2020/11/14

 

 

다 읽어 봤는데, 젊은 작가상 작품집에서 이미 읽었던 ‘우리들’이 여전히 베스트. 그 소설의 한 대목은 정말 잊히지 않는다. 책의 세 작품을 묶어 해설한 신형철의 글도 좋았음.

 

 

그녀는 내게 며칠 전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유명한 해안 절벽에 올랐는데, 지나온 삶이 너무 허망해서 거기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한참 동안 거품이 이는 바다를 내려다보다가, 막상 정말 그렇게 있다보니 자기는 그 일을 해내지 못할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고 나니까 오히려 이제 정말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

나는 진심으로 어머니가 그렇게 살기를 바랐다. 그녀가 정말로 바란 삶이 그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와 같은 사람을 바란 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남영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그날 모질게 마음을 먹고 병원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더라면 이영선이 살았을 삶에 대해서는 이제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그녀가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 그렸던 인생의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많이 달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가 이번에는 끝까지 마음을 바꾸지 않고, 그녀의 말대로 시골에 근사한 집을 짓고 호박이나 고추 같은 거 말고, 라일락과 해바라기를 가꾸고 살았으면, 그리고 긴 세월이 지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가 그를 그리워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정말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이기만 했다면 지금까지 그녀의 삶에 일어난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 또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내가 지켜봐야 했던 그 많은 불행한 장면들을 지켜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주일 후 서울에 올라온 그녀가 예정대로 법원을 찾아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놀라지 않았다.

(...)

그것이 모든 가능성을 지닌 채로 온전한 자유 속에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 결과가 자신을 또다시 전형적인 고난과 불행 속으로 밀어넣는 것이라고 해도, 스스로 상상해낼 수 없는 삶을 선택하지 못한 그녀를 누가 비웃을 수 있단 말인가?(210-211p)

 

 

이 모든 것은 화자가 그들과 보낸 한 시절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들이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냥 화자가 배운 것이다. 애초 나를 선택한 것은 그들이지만, 그들에게서 스승을 발견한 것은 나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와는 종류가 다른 사람이라는 강렬한 발견은 그 시절의 나였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스승을 우리가 원하는 시절에 만난다. 기적처럼 나타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찾아내기 때문이다. 정은과 현수가 정말 ‘어른의 삶’ 혹은 ‘진정한 삶’을 살았는지를 따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이럴 땐 가르치는 자의 실패까지도 가르침이다. 성숙한 삶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배우면서 화자는 한 걸음 더 성숙해졌을 것이다.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처럼.(219-220p)

 

 

이 소설에서도 역시 스승은 가르친 게 없다. 선애는 자신에게 닥쳐온 인생을 거부하지 못하고 그저 살았을 뿐이니까.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스승은 낯선 자가 되고, 삶의 낯선 부분을 보여주는 자가 된다. 덕분에 나는 자신이 모르는 게 있음을 알게 됐고, 삶에는 배울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배웠으니 된 것이다. 가르칠 수 없음을 가르치고 배울 수 없음을 배운다는 것,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이야기가 우리를 교육하는 방식이다. 삶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앎(지식)은 쉽게 말로 전달되지 않는 비명제적 지식에 속한다. 비명제적 지식을 배우는 일은 그냥 그런 것이 있다는 것만을 겨우 배우는 데서 멈추는 일이다.(223p)

 

 

 

ㅡ 정영수, <내일의 연인들>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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