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4/2

 

이런 매큐언의 ‘견딜 수 없는 사랑’이라는 책이 새로 나왔다길래 읽어볼까 했는데 ‘이런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이미 나온 책의 개정판이었고, 집에 있는 책장을 들여다보니 잊고 있었던 ‘이런 사랑’이 꽂혀 있었다. 그런 이유로 개정판이 나온 시점에 예전 판본을 읽게 되었다. 초반에 발생하는 사건에 얽힌 인물이 여럿 나오므로 나는 당연히 각 인물의 사정에 대해 두루 다룰 줄 알았는데 끝까지 그런 건 없었다.  이언 매큐언은 어느 선까지 정보를 제공하며 끌고 가야 독자가 몰입할 수 있는지를 잘 아는 작가라고 생각하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그 장기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나쁘진 않았지만 읽고 나서 느끼기에 홍보성 찬사 문구나 호들갑이 아무래도 ‘흠 그 정도인가?’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타성이 생긴 사랑은 단순히 그때그때 처한 상황보다 위대했다. 사랑은 스스로 힘을 비축하고 생성해 내지 않던가? 우리가 지금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또다시 설명하고 듣는 일로 옮겨가는 것이다. 대중 심리학에서는 만사를 대화로 푸는 것을 중시하고 거기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다.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갈등이라는 것에도 자연적인 수명이 있다. 죽어 가도록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할 때가 언제인지 아는 것이 관건이다. 때를 잘못 판단해서 뱉은 말은 전기 충격처럼 작용할 수 있다. 그러면 갈등은 병원체의 형태로 되살아난다. 자기의 흥미를 끄는 새로운 말이, 혹은 사태를 병적으로 이렇게 봤다 저렇게 봤다 하는 ‘새로운 시각’이 갈등을 맹렬히 소생시키는 것이다.(204-205p)

 

 

우리는 반쯤만 공유된 신뢰할 수 없는 지각의 안개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 감각의 데이터는 욕망과 믿음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며 굴절되고, 그에 따라 우리의 기억 또한 왜곡된다. 우리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보고 기억하며 거기에 맞추어 스스로를 설득한다. 무자비한 객관성, 특히 우리 자신에 관한 무자비한 객관성이라는 사회적 전략은 언제나 실패하는 운명이었다. 우리는 절반의 진실을 얘기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스스로도 믿어 버리는 사람들의 후예다. 여러 세대를 거치며 적당한 사람들만 추려졌고 그런 성공이 이어지면서 결함 또한 바큇자국처럼 유전자에 깊이 새겨졌다. 자기에게 유리하지 않을 경우 앞에 있는 게 무엇인지 합의할 수 없다는 결함말이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가 아니라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인 것이다. 이혼과 국경 분쟁과 전쟁이 바로 이런 이유로 생기고, 동정녀 마리아 상이 피눈물을 흘리고 가네시 신상이 우유를 마시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형이상학과 과학이 그토록 대담한 사업이고 바퀴의 발명이나 심지어 농업의 발명보다 더 놀라운 발명인 이유도 그것이다. 인간의 본성과 어긋나는 인공물인 것이다. 사심 없는 진리. 하지만 우리 자신을 배제하지는 못했고 습성의 바큇자국은 정녕 깊었다. 객관성에서 어떤 개인적인 구원을 찾을 도리란 없으므로.(254-255p)

 

 

ㅡ 이언 매큐언, <이런 사랑> 中, media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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