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4/21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과 그냥 생각으로만 그치는 것 사이의 간극을 고민해보는 시간이자 나도 모르게 받은 부모의 영향을 떨쳐내는 게ㅡ어떤 행동 양식이나 사고 방식이 부모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지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겠지만ㅡ얼마나 힘든지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집 근처의 가게에서 구한 책인데 태어난 날에 근거해 사람의 성향을 설명해준다고 말하며 내가 태어난 달로 책장을 넘겨 글을 읽어주었다.

(...)

나는 그 내용 중에 맞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글의 진실은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입에 올리고, 회자하는 상대의 성향을 이러저러한 뚜렷한 특성의 가닥으로 풀어내며 상대의 행동이나 행동의 이유에 대해 말을 얹을 수 있게 허용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상대 혹은 우리 자신을 읽을 수 있다고 여기게 되고, 이를 심오한 발견으로 경험한다고.(26-27p)

 

 

나는 로리와 내가 요즘 아이를 가질지 말지 의논하고 있다고 했다. 엄마는 낳아야지, 아이를 갖는 건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는 나도 동의했다. 하지만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로리와 내가 저녁 요리를 하면서도 장을 보러 가면서도 커피를 준비하면서도 수시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같은 화제를 다방면으로 반복해 논하며 서로가 세세하고 실감나는 요소를 추가하거나, 끝나지 않는 추측을 하는 물리학자들처럼 수백 가지 가능한 경우들을 되짚었다. 우리 둘이 지칠 대로 지치고 잠도 부족한 상태가 되면 서로 얼마나 상처를 줄지. 돈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지. 다른 존재를 전적으로 돌보는 가운데 우리 스스로의 충족감은 어떻게 유지할 건지. 친구들에게도 의견을 물었고, 모두 솔직하고 정직하게 답해주었다. 몇몇 친구는 헤쳐 나갈 수 있고 아이들이 나이가 들수록 길을 찾는 게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다른 친구들은 우리 관계의 허점이 모두 적나라하게 드러날 거라고 말했다. 또 일부는 아이를 갖는 건 엄청난 희열을 주는 경험일 수 있다고, 다만 그에 기꺼이 항복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런 사려 깊은 조언과 이야기도 결국 아무 의미가 없다고 봐야 했고ㅡ한 삶과 다른 삶을 비교하는 건 최종적으로 불가능하기에ㅡ그래서 우리는 어김없이 도로 시작점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34-35p)

 

 

강사는 이런 감정은 오늘날 우리 안에도 생생히 살아 있다고 했다. 이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언급하며 자기 모친은 친구뿐 아니라 식구 하나하나 사이에서 누가 무얼 주고받았는지를 말없이 다 헤아려두었다고 말했다. 강사는 다른 집을 방문할 때마다 어머니가 잊지 않고 챙겨 가던 완벽한 선물을 기억하며 그런 격식을 자기가 사춘기 시절 얼마나 지긋지긋해했는지, 어머니는 답례로 받은 선물에 대해서도 꼭 한마디해야 했고 보이지 않는 저울에 올리고 정의의 여신이라도 되는 양 평가를 붙였다고 말했다. 강사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은 아주 컸고 손님과 친척이 수시로 지내러 왔는데, 누가 집에 오기만 하면 이런 계산이 따랐지만 동시에 대놓고 그런 언급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그리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자기도 모전여전으로 내면화 한 이런 계산하는 버릇을 퇴치하려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고 말했다.(45p)

 

 

그날 뒤로 달라진 건 딱히 없었고 단지 아주 오랫동안 그리스 희곡 작가들을 읽지 않았다. 그러다 시간이 한참 지나 돌아갔을 때, 내가 여전히 그 작품들에 매혹된다는 사실에 실망감마저 들 뻔했다.(61p)

 

 

삶에 있어 최선은 욕망받는 것이라고, 내가 욕망하지 않더라도, 나를 욕망하는 사람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나만은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게 최선이라는 가르침을 어떤 경로로든 받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내가 어디서 배웠는지는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104p)

 

 

나는 모네에 대해서라면 아는 게 별로 없다고, 학생이던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고 말했다.

(...)

하지만 남자친구와 시내 미술관을 찾은 그날 그 순간, 아련한 빛과 들판에 놓인 건초 더미의 모양을 보며 이해한 게 있었다. 그 그림들이 시간에 대한 그림이라는 생각이 그때 들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했다. 화가가 두 개의 시선으로 들판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첫째는 젊음의 시선으로, 풀 위에 깃든 새벽 분홍빛에 잠에서 깨어나 그가 전날 한 작업과 앞으로 해야 할 작업 모두를 가능성을 품고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두 번째 시선은 나이가 있는 사람의 시선, 어쩌면 그 그림들을 그리던 모네의 나이보다 연륜이 지긋한 시선으로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예전에 느꼈던 그 감정들을 기억하고 다시 붙잡으려 시도하는, 그러나 그사이 지니게 된 필연성의 감각이 풍경에 스미는 걸 막을 길 또한 없는 시선이었다.(107-108p)

 

 

원인은 지금도 몰랐지만 그 지점에서 잔 여울을 지났고, 그런데 정작 몽상에 잠겨 예상도 대비도 못 한 걸 수도 있다고 했다. 뒤집힌 채로 물살이 몸과 얼굴과 머리 주위로 치밀던 느낌과, 그런데도 묘하게 차분했고 이제 어떻게 되는지 가만 기다리고 보자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

왠지 모르게 자기도 형도 그 일을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차분히 가던 길을 계속 갔다고, 수면으로 다시 올라왔을 때 형이 짓고 있던 표정을 봤음에도 누구도 그 일을 시인하지 않았고 여행이 끝날 때까지도 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로리는 말했다. 나는 너무 실감이 나서, 너무 끔찍해서 그런 게 아닐까 여겼는데 로리는 아니라고, 자기 생각에는 그 반대 같다고, 그러니까 저희 둘 다 그런다고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을 걸 알고 또 계속 길을 가고 싶고 계속 가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뒤로도 여울을 몇 차례 지나쳐야 했고, 이미 벌어진 일이 그 사실을 바꾸지는 않았다고.(129-130p)

 

 

강사가 예전 언젠가 부모는 자식의 숙명이고, 이는 비극에 있어서뿐 아니라 소소하고도 위력 있는 점에서 참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내게 딸이 있다면 그 아이의 삶이 내가 살아온 방식에 일부 좌우되고 아이의 기억이 내 기억을 따를 것이며 이 점에 관한 한 그 아이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136p)

 

 

 

ㅡ 제시카 아우,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 中, 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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