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4/27

 

나한테는 역시 별로. 예상했던 딱 그대로라 읽는 재미가 전혀 없다.

아니 에르노는 더 안 읽을 듯.

 

 

 

요즘은 ‘한 남자와 미친 듯한 사랑’을 하고 있다거나 ‘누군가와 아주 깊은 관계’에 빠져 있다거나 혹은 과거에 그랬었다고 숨김없이 고백하는 사람을 보면, 나도 내 마음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고 공감에서 느끼는 행복감이 사라지고 나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었더라도 그렇게 마구 이야기해버린 것을 후회했다. 대화를 나누면서 “맞아요. 나도 그래요. 나도 그런 적이 있어요”하고 남의 말에 맞장구를 치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이런 말들이 내 열정의 실상과는 아무 상관 없는 쓸데없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 알 수 없는 감정 속에서 무언가가 사라져가고 있었다.(21p)

 

 

일상생활에서 가끔 일어나는 귀찮고 짜증스러운 일에도 나는 무덤덤했다. 두 달이 넘도록 계속되는 우편 집배원들의 파업에도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A는 절대로 내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으니까.(물론 결혼한 남자로서의 신중함 때문이었다.) 나는 도로가 막히거나 은행 창구가 붐벼도 조용히 기다렸고, 직원들이 불친절해도 화를 내지 않았다. 어떤 일에도 초조해하지 않았다. 또 나는 사람들에 대하여 연민과 고통과 우정이 뒤섞인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일없이 공원 벤치에 누워 있는 사람들, 그리고 통속소설에 정신이 빠져 있는 여자들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렇지만 내 안의 무엇이 그 사람들과 닮았는지는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다.)(24-25p)

 

 

이런 이야기들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것을 나는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글이 씌어지는 때와 그것을 나 혼자서 읽는 때,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읽는 때는 이미 시간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을 터이고, 어쩌면 남들에게 이 글이 읽힐 기회가 절대로 오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남들이 읽게 되기 전에 내가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전쟁이나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런 시간상의 차이 때문에 나는 마음놓고 솔직하게 이 글을 쓸 수가 있다. 열어섯 살 때 일광욕을 한답시고 하루 종일 몸을 태우고 스무 살 때는 피임도 하지 않은 채 겁 없이 섹스를 즐겼던 것처럼, 나중 일을 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겪은 일을 글로 쓰는 사람을 노출증 환자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노출증이란 같은 시간대에 남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하는 병적인 욕망일 뿐이니까.)(38-39p)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같은 것을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사치가 아닐까.(74p)

 

 

 

ㅡ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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