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4/30

 

 

아마도 나이가 들면서 더 자주 찾아오는 회의와 냉소의 시기였을까. 기계처럼 움직이며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책이 뭘까? 이 많은 책들이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지? 그렇게 책에 묻혀 산 다음 나는 어떤 인간이 되었지? 박학다식한 지성인이 되지도 못했고 성숙한 인격자가 되지도 못했고 젊은 시절 예술과 문학에 빠져 현실 파악을 못한 바람에 경제적 여유와 멀어진 삶을 살게 된 것만 같았다.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말에 공감을 할 뻔하기도 했다. “내가 모르는 게 뭐 있겠니? 책에서 뭘 배우라는 거니? 나는 내 인생으로 다 겪었다.” 또한 읽기와 쓰기가 직업이 되면서 책은 서운함과 서글픔과 소외감이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가져다주기도 했다.(80-81p)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정말이지 모르겠어요.” 요가 선생님에게, 엄마에게, 친구에게, 길 가다가 아무나 붙잡고 묻고 싶었다. “다들 어떻게 살고 있어요? 무엇 때문에 살고 있어요? 50년 가까이 살았지만 매일 점점 더 모르겠어요.”

일을 열심히 해서 연금과 저축 액수를 높이면 잘 살고 있는 걸까. 매일 저녁을 더 정성껏 차리면 될까. 산책과 등산을 자주 하면서 자연의 변화를 접하면, 부모님에게 자주 전화를 드리면, 운동을 빠지지 않고 피아노 연습을 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고 자선 단체 후원금을 늘리면 잘 사는 걸까. 아니 그냥 살아 있기만 하면 될까.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본능에 따라 자의식을 버리고 들꽃이나 다람쥐처럼 살면 되는 걸까.

하지만 도서관에서 돌아온 나는 알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일곱 권이나 빌려서 집에 오는 길, 갑자기 모닥불처럼 붉게 타오르던 하늘을 바라보면서 가방이 하나도 무겁지 않아 이상하다고, 문득 삶이 두렵지 않다고 느꼈던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마음에 드는 소설책 한 권이면 크리스마스의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그림 같은 풍경이나 멋들어진 숙소를 보면서 저기서 책을 읽을 수만 있다면 행복이 보장될 것 같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오늘도 나를 몰입하게 해 줄 책을 찾아 서점과 도서관을 헤매는 나는 친구네 집에서 셜록 홈스를 읽던 어린이나 집에 있던 단 한 권의 수필집을 쓰다듬어 보던 소녀와 똑같은 사람이다. 번역가가 되어 일로서 책을 읽어야 하고 쓰고 싶은 글을 쓰지 못하고 허무와 냉소에 젖는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었다. 책은 언제나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반갑게 맞아 주고 차와 쿠키를 내어 주고 꽃과 정원과 하늘을 보여 주었다. 책은 끝이 없는 선물이자 변치 않는 약속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책에 한 번 더 의지하며 혹독하고 목마른 계절들을 나 보려고 한다.(91-92p)

 

 

ㅡ 금정연 외, <책에 대한 책에 대한 책> 中, 편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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