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5/18

 

굉장히 과격한 주장인 듯하나 읽어보면 수긍되는 지점들이 있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사적인 핵가족과 오이디푸스 서사(어머니, 아버지, 아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통해 자아가 형성된다는 걸 상상하기가 어렵다.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아가 항상 이런 식으로 형성된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원한다면 다른 방식으로도 자아를 형성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만약 당신이 “가족을 폐지하라”는 표현에 거의 반사적으로 “그치만 난 우리 가족을 사랑한다구”같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행운아라는 걸 알아둘 필요가 있다. 당신이 가족을 사랑한다니 참 다행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운이 좋은 건 아니다, 그렇지 않겠는가?

가족을 사랑한다는 건 가족 폐지에 찬성하는 것과 상충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상대가 충분한 돌봄뿐만 아니라 자율성을 만끽할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다ㅡ자본이 숨통을 조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이런 풍요가 가능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만약 이런 사랑의 정의가 옳다면, 내가 “진짜” 어머니라는 사실을 근거로 아이가 접근할 수 있는 어머니(어느 젠더든 간에)의 수를 제한하는 건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사랑이라고 하기 힘들다. 어쩌면 당신은(핵가족에서 성장했다면)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할당된 기능이 얼마나 억압적인지 은연중에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10-11p)

 

 

요컨대 가족이 없으면 부르주아 국가도 없다. 가족의 기능은 복지를 대신 수행하고 채무자의 보증을 서는 것이다. 가족은 개인의 선택이니, 개인의 탄생이니, 개인의 욕망 같은 허울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국가의 노동력 재생산을 저렴하게 관장하고 빚을 확실하게 갚게 하는 수단이다.

하지만 잠깐, 가족은 이미 위태롭지 않은가! 혹은 그렇다는 전설이 있다. 요즘 애들은 자식을 낳으려고 하질 않아, 요즘 애들은 가족을 돌보질 않아, 그냥 부모 집에서 살아, 집 나가면 전화도 안 하고, 자기 집을 사려는 꿈을 안 꿔, 결혼도 안 하려고 하고,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가정을 꾸릴 기반을 다지지도 않고. 하지만 생각해보라. 가족은 위태롭지 않은 적이 없었다.(19p)

 

 

장담하건대 당신은(특정한 계급에 속한) 한 명, 두 명, 세 명, 또는 네 명의 개인에게 임의로 신생아를 떨어뜨리는 복권 시스템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들에게 아기를 삶에서 가장 중요한 20여 년 동안(아기 자신의 동의도 없이) 맡겨놓고, 아기가 자신의 육체적 생존, 법적인 존재 상태, 경제적 정체성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만들고, 또 그들의 자기 인생을 노동에 바치는 이유가 되게끔 강제하는 시스템 말이다. 당신은 사랑하는 아이에 대한 헌신이 성인들(특히 여성)의 족쇄가 되는 규범보다 나은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다. 함께 머리를 맞대면 우리는 인간“본성”에 대한 다른 설명을, 사회적 재생산을 조직하는 다른 방식을 발명할 수 있다. 오늘날에 가족은 허울을 걷어내고 보면 국가와의 경제적 계약 또는 노동자 교육 프로그램일 뿐이다. 힘을 합치면 우리는 합의에 기반한 세대 초월적인 공동 거주 양식을, 일상의 노동이라는 부담을 분배하고 최소화하는 대대적인 방법들을 확립할 수 있다.(38-39p)

 

 

ㅡ 소피 루이스, <가족을 폐지하라> 中,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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