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7/11

 

 

피해자다움이나 피해호소인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사용하는 시대를 비판, 강간 사건에서 피해자가 기쁨을 느낄 수 있으나 그렇다고 그 사실이 그의 모든 고통을 상쇄하는지에 대한 고민, 그리고 그루밍 성범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복잡 미묘한 성격을 스릴러의 형식으로 잘 풀어냈다. 읽는 동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와 ‘더 테일’, ‘화차’가 생각이 났다.

 

 

비밀이란 그런 것이다. 비밀의 존재를 숨기고 없는 척할수록 그 비밀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다. 어디를 가도 그 비밀이 따라온다. 시간이 쌓이면서 그 비밀을 지키고 싶기도 하고 없애버리고 싶기도 한 두 가지 생각이 끊임없이 경쟁을 벌이며 우리를 기진맥진하게 만든다.(111p)

 

판옌중은 장궈구이가 한번쯤 시간을 내어 의뢰인의 말에서 진위를 가려내는 방법을 교육해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담당 사건이 늘어나면서 장궈구이가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자신이 피해자라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죄상을 부인하는 것은 단순히 심성이 악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선량하고 정직한 일면에 미련을 버릴 수 없어 뻔뻔스레 사실과 다른 말을 하는 것이었다.(131p)

 

 

웃기는 소리!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긴 하나? 판옌중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따. 사람이 평생 거짓말을 가장 많이 하는 대상은 배우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많은 이들이 결혼을 ‘울타리’에 비유한다. 그 울타리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특수한 외형과 생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거짓말은 결혼생활에서 윤활제이지 걸림돌이 아니다.(133p)

 

 

친구의 상황이 자신보다 훨씬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사람들은 곧잘 질투심에 사로잡혀 불행감을 느낀다. 팔자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던 친구에게 불운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그 친구도 결국 비슷한 처지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친구의 불운을 떠올리며 은밀한 행복감까지 느낀다. 이럴 때 그들의 우정은 허위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더없이 진실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156p)

 

 

눈을 크게 뜨고 있으면 가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것을 목도하면 뒤돌아갈 수 없다. ‘어린 시절’에서 강제로 쫓겨난다. 문을 여는 암호를 잃어버린 그들이 문 밖에서 아무리 울부짖어도 다시 돌아갈 수 없다. 그때부터는 어른이다. 오드리는 열 살 때 어른이 되었다.

오드리는 린 선생님을 사랑했다. 그 사랑에 대해 어쩌고저쩌고 토론할 마음은 없다. 그 감정에 다른 요소들, 말하자면 존경이나 숭배, 감사함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고 해도 그게 뭐 어떻다는 말인가? 그 모든 것을 합치면 결국 사랑이었다. 오드리는 린 선생님을 사랑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오드리를 붙잡고 그 사랑의 ‘속성’이 무엇인지 정리해서 알려주려 했다. 오드리는 그런 모든 위로를 통해 오히려 자신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오드리의 사랑은 가짜라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그때의 내가 바보 멍청이라고 생각해요?(184-185p)

 

 

여자애가 그런 일을 겪고도 다음 날 쑹화이쉬안과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눈다고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쑹화이구 선배는 인기가 정말 많았어요. 그 선배를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정말 많았죠. 그런 남자가 뭐하러 굳이 그런 짓을 저지르겠어요?(195p)

 

남성 입장에 감정이입을 하는 전형적인 사람의 발언인데, 재밌는 건 이 소설에서는 그 선배를 짝사랑했던 '여자'의 발언이다.

 

 

더는 희망을 품지 않기로 했다. 희망이 절망의 친구라서 둘은 언제나 같이 움직인다. 희망이 마음에 깃들면 절망이 부르지 않아도 다가온다. 그가 희망을 버리자 절망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는 기나긴 평온의 길로 들어섰고, 더는 원망의 마음 없이 아버지를 간병할 수 있었다.(253p)

 

 

우신핑이 사건 다음 날 그 남자 여동생과 함께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똑똑히 봤다.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신핑이 웃을 수 있었을까?(263p)

 

 

그게 절말이면 왜 린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고 했어?

열일곱 살의 오드리는 그 말에 대항하지 못했다. 엄마의 추궁이 합당해 보여 아무 대꾸도 못 했다. 열 살 때의 나는 왜 린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했을까? 내가 그를 미워했다면, 그가 나에게 한 짓이 싫었다면, 나는 왜 린 선생님이 간식과 홍차를 사주는 것을 그냥 받아들였을까? 그가 내 중학교 생활에 관심을 보이도록 내버려 둔 이유는 무엇일까?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린 선생님은 다시는 그런 행위를 하자고 요구하지 않았고, 사진들에 관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오드리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런데 린 선생님과 만났다가 헤어질 때마다 왠지 허전한 기분이었다. 린 선생님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지만 오드리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는 느낌이었다. 스물일곱 살이 되어서야 당시 자신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어떻게든 정리해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녀는 린 선생님에게 집착했고, 린 선생님이 자신을 버리지 않기를 바랐다. 열 살이었던 오드리는 갑자기 너무 높은 의자 위에 올려졌다. 그리고 자신을 거기에 올려놓은 사람만이 도로 내려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264-265p)

 

 

판옌중은 장씨 아주머니의 딸 장전팡이, 심지어 신핑의 어머니인 황칭롄까지 신핑을 멸시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신핑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피해자였다. 그날 신핑의 옷차림이 그랬고 술에 취해 의식이 없었던 것도 그랬다. 성폭행 사건에서 피해자에게 문제가 있었다고 몰아가기 쉬운 요소다. 사건이 일어난 이후의 정황도 그랬다. 신핑은 처음에 힘들어하면서 눈물을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판옌중은 불안한 심정으로 생각했다. 신핑이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너무 짧았다······.

(...)

제가 다시 물었죠. 경찰에 신고한 뒤에 벌어질 일을 감당할 수 있겠니? 신핑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세요? 선생님, 제가 낯선 사람에게 얻어맞았다면 지금처럼 몇 번씩이나 신고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298-299p)

 

 

오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은 자신의 출신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할지 말지조차 결정하지 못한다.

오빠, 이것 좀 봐. 나는 내가 죽을지 말지 결정하지 못해. 물론 다른 사람을 살릴지 말지도 결정하지 못해. 모든 상황이 정해진 궤도를 벗어났다. 가면 갈수록 비뚤어진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다. 멈출 수도 없다.(350p)

 

 

“지금도 그때의 감각이 기억나. 옌아이써가 가끔 책상이나 책꽂이 같은 걸로 보일 때가 있었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몇 초 정도 짧게 그렇게 보이는 거야. 옌아이써가 물건으로 보일 때면 걷어차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사람들이 화가 나면 책상을 차는 것처럼 말이야.

(...)

당신하고 같이 지낸 몇 년 동안 나는 계속 두려웠어. 당신도 물건으로 보일까봐. 방금 당신이 말한 것처럼 과거의 dfl이 언젠가는 나를 찾아올 거라고 예감하고 있었어······. 당신이 실종되기 전날 우리가 크게 싸웠잖아? 그날 나는 아주 긴장하고 있었어. 혹시라도 내가 또······. 솔직히 거의 그럴 뻔했어. 당신이 비명을 지르거나 나를 저주하면 얼른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은 나한테 사과를 했지.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하면 안 됐던 거라고, 당신이 그렇게 말해줘서 정신을 차렸어. 어, 그러니까 내가 당신한테 고맙게 생각한다는 거야. 일이 더 커지지 않게 막아줬으니까. 고마워. 당신 덕분에 나란 사람이 완전히 쓰레기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어. 내가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고.”(430-431p)

 

 

어떤 여자의 성격이 순진하고 선량하다고 해서 그녀가 반드시 무고하지는 않다.(440p)

 

 

우샤오러가 회의한 것은 ‘피해자가 기쁨을 느꼈다면, 그 사실이 그의 고통을 상쇄하느냐’였다.(444-445p)

 

 

 

ㅡ 우샤오러,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中, 한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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