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7/20

 

확실히 요즘 점점 짧고 쉬운 컨텐츠를 즐기다보니 이 책의 장식적이고 장황한 문장에 적응이 안 되어서 여러 번 포기할 뻔했다. 모임 책이라 억지로 붙잡고 읽었는데 후반부에는 적응이 되어 그런지 읽기가 조금은 수월해지긴 개뿔 ㅋㅋㅋㅋ

그나마 대략 300p부터는 등장인물의 정체가 밝혀지는 반전(?)이 등장하며 조금은 읽는 재미가 있었다. 책에 대한 메타적인 소설이자 기록된 사실이 실제의 현실을 결코 반영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돌이켜보니 좋았던 구절이 종종 있었다만 그걸 즐기기 위해 많은 시간 고통을 감내해야 할 걸 생각하면 누구에게든 쉬이 읽어보라고는 못 권하겠다. 다만 비평가들은 딱 좋아할 만한 책이다.

 

 

 

관광객들은 돈이 있었고 우리는 그것이 필요했다. 그 대가로 그들이 요구한 것은 그저 거짓말을 들려달라. 자기를 속여달라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하게는 자신들이 안전하며, 이ㅡ국가적, 개인적, 영적으로ㅡ안전하다는 기분이 권태에 지친 변덕스러운 운명의 허튼 농담이 아니라고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자신들은 권력과 부를 지녔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검은 완장을 두를 필요가 없다고, 몇몇 사람의 부가 숱한 사람의 비참에 그토록 기묘하게 의존하고 있는 이유를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혹은 설명하지 않는 일에 대해 찜찜한 기분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친절하게도 우리는 이런 거래가 어디까지나 의자를 사고파는 일인 척, 그들이 가격과 유래를 물으면 그에 맞장구쳐 응대해주는 일인 척 행동했다.

하지만 그것은 가격과 유래에 관한 일이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관광객들은 무언의 질문을 집요하게 품고 있었고, 우리는 위조한 가구를 가지고 가능한 한 최선의 답을 내놓아야 했다. 사실 그들은 ‘우리는 안전한가요?’라고 묻고 있었으며, 사실 우리는 ‘아뇨, 하지만 쓸모 없는 상품들로 바리케이드를 치면 시야를 가리는 데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요’라고 답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만은 그저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단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틀림없는 본능으로 보는 편이 나을 만큼 인간에게 뿌리깊은 감각인 까닭에 그들은 ‘이것이 우리의 잘못이라면 고통을 겪게 될지’까지 알고 싶어했는데, 과연 우리는 ‘네, 서서히요. 하지만 가짜 골동품 의자가 당신과 우리 둘 다 기분을 좀 가볍게 해줄지도 모르지요’라고 응수하는 셈이었다. 생계가 걸려 있었고, 이러는 게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썩 나쁘지도 않았고, 내다팔 의자야 힘닿는 데까지 많이 들어 옮길지언정 세상의 무게를 들어 옮길 생각은 없었으니까.(21-22p)

 

 

훙 선생이 말한다. 한 권의 책이란 최초에는 삶을 이해하는 새로운 길ㅡ독창적인 우주ㅡ일 수도 있지만, 머잖아 아첨꾼들의 과찬과 동시대인의 경멸을 받으며 두 편 중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 저술사의 각주로 전락한다고. 책의 운명은 가혹하며 책의 숙명은 부조리하다. 독자들에게 무시당하면 사멸하고, 후대의 승인을 받으면 영원히 곡해될 운명에 처하는 것이다. 또 그 저자들은 처음에는 신이 되고, 그다음에는 필연적으로, 그들이 빅토르 위고가 아니라면, 악마가 된다.(44p)

 

 

나는 또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표적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ㅡ정확히 말하자면 장바뵈프 오듀본 자신이 아니라 장바뵈프 오듀본이 쏘아맞히지 못한 새들로부터ㅡ배웠다. 사람들은 자기와 상반되는 것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에 있을 때 나는 암흑가의 영국인으로 사는 것이 유용하다는 것을 익혔고, 나중에 영국의 암흑가로 돌아갔을 때는 미국인 모험가로 행세했다. 또 이곳 밴디먼스랜드에서는 설령 삼류라 할지라도 ‘외지에서 온 예술가’ㅡ물론 여기서 외지란 유럽을 뜻한다ㅡ만큼 환대받는 존재가 없는듯하다. 만에 하나라도 내가 유럽으로 돌아가는 날에는, 부당하게 학대받은 순진하고 촌티나는 식민지인을 연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78p)

 

 

나는 먼 데서 바라봐 세부를 뭉개버리고 삶을 모욕하는 허랑한 그림을 그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팝조이 같은 이들이 너무나 사랑하는 저 풍경화, 마치 거리를 두고 보아야만 어떤 장소나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듯이 하늘로 높이높이 치솟으며 진실을 훼손하는 저 풍경화ㅡ그것은 땅의 거짓말이다. 진실은 절대로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운 먼지 속에, 불쾌한 점액과 딱지와 오물 찌꺼기 속에, 악마와 더불어 천사와 더불어 존재하며, 이 모두가 지상과 우리 안에 사로잡혀 있고, 이 모두가ㅡ나와 여러분과 우리의ㅡ한차례 맥박 속에, 또한 내가 물고기 육신을 가지고 구현하고 이루려는 모든 주제 안에 담겨 있다.(111p)

 

 

나는 책이 이야기의 본줄기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조금도 동의할 수 없다. 하느님도 나와 생각이 다르지 않으리라. 그분은 스물 여섯 글자로 당신이 원하는 것을 다 만들어냈으며, 그분의 이야기는 A-B-C로도 Q-E-D로도 문제없이 잘 통하지 않는가.

곧은길을 믿는 자는 장군들과 우편마차의 마부들뿐이다. 내가 보기에 이 점에서는 킹도 내 편이다. 그가 굽이와 우회와 유람에 온몸으로 동의함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여행이란 언제나 끝없는 실망의 예술이지만 마땅히 기억할 만한 것이어야 하며, 이것들은 여행을 기억할 만한 일로 만들어준다.

생각에 열중한 나는 이 길에 대한 질문이야말로 고대 그리스 문명과 로마 문명을 근본적으로 가르는 차이라고 킹에게 역설했다. 로마인들처럼 곧은길을 닦으면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세 단어를 얻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반면에 그리스인들처럼 아크로폴리스 곳곳에 염소가 다니는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내면 무엇을 얻는가? 「오딧세이」전권과 「오이디푸스 왕」전체를 얻는다.(184p)

 

 

요르겐 요르겐센의 배후에 있는 어떠한 동기ㅡ내가 사령관에게 끼치고 있다고 여겨지는 영향력에 대한 질투, 혹은 명확한 인과관계를 추구하는 서기로서의 욕망ㅡ를 찾아낸다 해도 그것은 실제 삶이 아니라 문학에 불과할 것이다. 삶에는 사람의 행동에 대한 설명이나 동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그것은, 톱상어의 본성과 마찬가지로 단지 그의 본성이었다.

나중에ㅡ너무 늦게야ㅡ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령관처럼 요르겐 요르겐센도 상상과 실제가 어긋나 있다는 감각에 시달렸다. 그는 책을 너무 많이 읽었고 열여섯의 나이에 로맨스와 모험담에 고취되어 1798년의 어느 날 고향 코펜하겐을 과감히 떠나 거친 세상으로 나갔지만, 세상은 자기가 읽은 그 무엇과도 일치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사물들은 파열했고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책은 견고했지만 시간은 녹아 흘렀다. 책은 원인과 결과를 다루었지만 삶은 불가해한 무질서였다. 아무것도 책과 같지 않았다.(275p)

 

 

빌리 굴드는ㅡ너무 부끄러워서 여기서는 나 자신을 삼인칭으로밖에 부를 수 없다ㅡ욕지기를 느꼈다.

(...)

내가 읽은 모든 것이 사령관이 꿈꾼, 그야말로ㅡ유럽의 앤 양조차 감히 꿈꾸지 못했던ㅡ하나의 감옥으로서의 이성적 사회상이라는 무시무시한 인식이었다. 이 최후의 창조물, 아마도 여러 면에서 그의 가장 가공할ㅡ설령 의도치 않았을지언정ㅡ이 업적이야말로, ‘구세계’에 대한 무의식적이고도 기괴한 숭배라는 점에서 ‘마작의 전당’과 국영철도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

그것은 이 역사 전체에서 그가 보고 알았던 모든 것, 그가 목격하고 겪었던 모든 것이 마치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흩어지는 꿈처럼 이제 사라지고 무의미해졌다는 사실이었다. 자기 과거의 정신을 펄에일 병에 담아 가지고 다니는 카푸아 데스의 주장처럼, 만일 자유가 기억의 공간에서만 존재한다면, 빌리 굴드와 그가 아는 모든 사람은 영원한 징역을 선고받은 셈이었다.(316-317p)

 

 

아주 많은 면에서 시체는 산 사람과 대비되는 이미지다. 아주 많은 면에서, 나는 이 허물어져가는 살덩이가 그 안에 한때 거주했던 사람보다 오히려 낫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르겐 요르겐센이 이 세계를 자기 욕망에 맞추어 만들고자 했던 반면, 그의 시체인ㅡ사령관의 가면 인장이 그나마 남은 살점과 더불어 떨어져나가면서 그에 대한 예속으로부터도 해방된ㅡ킹은 서구적 순응의 모범 그 자체다. 요르겐 요르겐센이 후손들에게 자기 생각을 말하고 싶어했던 반면 킹은 묽은 수프 같은 내 횡설수설을 조용히 곱씹는 선에서 만족한다.(326-327p)

 

 

인생이란 역사화에서 관습적으로 묘사되는 식의 진보도 아니고, 적절한 순서에 따라서 열거되고 이해되는 사실의 연속도 아니다. 그것은 변형의 연속이다. 어떤 변형은 즉각적이고 충격적이며, 어떤 변형은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느리지만 너무나 철저하고 무시무시해서, 우리는 삶이 끝날 때쯤 노망든 자아와 어린 시절의 자아가 일치하는 순간을 찾아 기억을 헛되이 더듬게 된다.(333p)

 

 

하지만 사령관의 눈물도 그의 흐려진 시야를 지극히 명백한 사실로부터 가리지 못했으니, 드퀸시의 필적과 앤 양의 필적이 동일했던 것이다.

그의 누나는 그녀의 남동생과 잿더미로 화한 그의 국가만큼이나 가짜였음이 드러났다. 사령관은 향기나는 수건을 내팽개치고, 휘몰아치는 매캐한 연기를 너무 깊이 들이마신 나머지 헛구역질을 했다. 다가올 황금시대, 한 겹 아래 도사린 몰락, 모독당한 유토피아, 오로지 결연한 망각으로만 말살 가능한 지옥, 그는 불타는 궁전의 연기 속에서 마침내 이 모든 관념의 냄새를 맡으며, 삶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의 어리석음이 거기 배어 있음을 느꼈다.

돌연 그는 자신이 꿈이 아니라 그 공포스럽고 무시무시한 역인 현실로부터 깨어나, 제대로 깨친 거라면 모든 삶이 흉포한 꿈이라는 감각에 눈뜨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꿈에서 사람은 파도와 바람에 붙들려, 또한 자신이 경외에 떨며 매일매일의 경이를 목격하는 증인에 불과하다는ㅡ언제라도 망각될 위험에 처한ㅡ인식에 붙들려 질질 끌려다니고 있었다.

그가 생각한ㅡ짜증나게 빌리 굴드가 그의 생각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따져 묻지 말기를. 굴드가 여태껏 털어놓은 것보다 훨씬 아는 게 많다는 사실을 지금까지도 의심한다면 뭐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테니까ㅡ몇 가지 시시한 것들을 여기에 특별한 순서 없이 재생한다.

ㅡ복제할 가치가 있는 유럽은 없다. 내 궁전을 집어삼키는 화염을 뛰어넘는 지혜도 없다. 오로지 우리가 아는 이 삶, 이 모든 경이로운 먼지와 오물과 장려함으로 가득찬 삶만이 있을 뿐.

ㅡ과거의 관념이나 미래의 관념이나 매한가지로 무용하다. 둘 다 누구든 무엇으로든 불러일으킬 수 있다. 지금 있는 것 이상의 아름다움은 없다. 지금 있는 것 이상의 기쁨이나 슬픔이나 경이도 없다. 또한 지금 있는 것 이상의 완벽함도 선이나 악도 없다.

ㅡ내가 이제껏 무의미한 삶을 살아온 것은 이 의미 있는 한순간과 지금 깨달은 이러한 것들을 위해서였다. 이 깨달음은 내 머리와 마음으로 불현듯 들어왔듯이 불현듯 떠나갈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조향사 샤르댕이라 해도, 과연 이처럼 코를 찌르는 계몽의 향으로 볼테르의 머리를 채울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는 이 모두를 온전히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이는 은총이자, 그러지 않았다면 완전히 무의미했을 삶의 완성으로 느껴졌다. 또한 그는 자신의 생각이 최후의 무용한 허영임을, 자신의 궁전처럼 자신의 생각도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있음을, 자신이 사사프라스 차가 담긴 컵을 든 채로 혼자 남겨졌으며, 그 컵이 소름 끼치게도 점점 뜨거워지고 있음을 깨달았다.(404-405p)

 

 

나는 어째서 정반대의 두 가지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지? 좀 설명해달라. 설명이 안 되더라도 어째서인지 알고 싶다ㅡ내 삶의 모든 증거는 이 세상이 늙은 덴마크인의 둥둥 뜬 시체보다 더 지독한 악취가 진동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어째서 나는 아직도 이 세상이 좋은 곳이고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밖에 믿을 수 없는지?

내 기다란 코로 저 잠수부들의 물안경을 톡톡 두드리고 이렇게 말하고 싶을 때도 있다. 이 나라가 무엇이 되었는지 알고 싶은가? 나한테 물어보라ㅡ어쨌든, 만약 거짓말쟁이와위조범, 매춘부와 밀고자, 살인범 죄수와 도둑을 신뢰할 수 없다면 당신은 이 나라를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 모두가 권력과 나름의 타협을 하며, 우리 대부분은 약간의 평화와 고요를 얻기 위해 우리 형제자매를 팔아넘길 터이기 때문이다. 윤리적으로 비겁한 삶을 살도록 훈련받았으면서도 항상 우리는 ‘자연’의 반항아라며 자위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무엇에 대해서도 화를 내거나 흥분해본 적이 없다. 우리는 애버리지니를 쏘아 죽이고 얻은 땅에서 유순히 풀을 뜯다가 결국 도살되는 양떼와 똑같다.

(...)
그래서 이 두 가지, 이 둘을 나는 도저히 화합시키지 못하고, 그것이 내 몸을 둘로 찢어놓는다. 세상이 너무나 끔찍하다는 인식, 삶이 너무나 특별하다는 감각ㅡ이 두 가지 감정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433-434p)

 

 

 

 

ㅡ 리처드 플래너건, <굴드의 물고기 책>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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