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7

 

첫 감상은 무난하고 평범한 소설이었는데, 모임을 위해 이것저것 떠올려오니 제법 공들여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쁘진 않았지만 누구에게 권할 만큼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겨우 몇 주가 아니라 몇 년은 알고 지낸 사이처럼 하워드에게 자신의 좌절감과 괴로움을 털어놓았던 자동차 안의 대화 이후로 진은 시간이 날 때마다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또는 현명하지 않을 정도로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182p)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도 자신의 속얘기를 털어 놓으면 상대와 급격히 친해졌다고 착각을 하는 경향이 있다. 한술 더 뜨면 상대방 역시 그런 얘기를 나에게 해주길 원하고 그러지 않으면 섭섭해한다.

 

 

진은 슬론 광장에서부터 걸어가면서 가게 진열창에 비친 자기 모습을 흘깃 보았다가 낡은 레인코트를 입은 구부정한 중년의 여성을 보고 당황했다. 유행에 뒤떨어지는 쥐털 같은 머리카락은 곧지도 곱슬거리지도 않고 군데군데 흰머리가 있었다. 진은 스스로 활기차고 착실한 직장 여성이라고 생각했지만, 어깨가 둥글고 칙칙한 모습은 정반대였고 평소에 그녀가 왜 거울을 피하는지를 상기시켜 주었다.(305p)

 

 

“잠깐, 움직이지 말아요.” 두 사람이 소파에 반쯤 앉고 반쯤 누운 채 진이 그의 무릎을 베고 있을 때 하워드가 말했다. “들어 봐요.”

레코드가 끝나서 바늘이 판을 긁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왜요?” 진이 말했다.

“행복이에요. 안 들려요?”(389p)

 

낯 간지러. 에릭인 줄...

 

 

“비키예요, 아프기 전이죠.” 앨리스가 말했다. “정말 사랑스런 아이였답니다.”

“그런 것 같네요.”

“비키를 괴물이라 생각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비키도 그냥 아이였을 뿐이에요. 그 애가 무슨 짓을 했든, 나쁜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아파서 그런 거예요.”(444p)

 

진짜 무슨 개소리를 하는건지? 그냥 아이는 나쁜 짓을 할 수 없을거라고 생각하나? 그리고 아파서였든 뭐든 범죄를 저질렀는데 그 보호자가 저렇게 얘기를 한다고? 범죄 행위에 대해 장애로 인한 심신미약을 주장할 수는 있을지라도 저렇게 얘기라면 곤란하지.

 

 

그녀는 틸버리 가족을 만나기 전에, 겨우 6개월 전의 삶이 어땠는지 기억하려 애썼다. 그때는 감정의 정점도 바닥도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계절마다 직장과 집에서 해야 하는 정해진 일들은 적당히 다양하고 보람이 있었기 때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작은 즐거움들ㅡ하루의 첫 담배, 일요일에 점심식사를 하기 전에 마시는 셰리 한 잔, 일주일 동안 쪼개 먹는 초콜릿 바 하나, 아직 다른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도서관의 새 책, 봄의 첫 히아신스, 단정하게 잘 다려서 개어놓은 여름 향기 나는 빨래, 눈 덮인 정원, 보물 서랍에 넣으려고 충동 구매한 문구ㅡ로 충분히 기운을 낼 수 있었다.

그녀는 몇 년이 지나야 이미 깨어난 갈망의 괴물을 잠재우고ㅡ잠재울 수 있다면 말이다ㅡ억제된 삶을 다시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각했다. 사랑에 빠져드는 여정은 너무나 쉽고 우아했지만, 사랑에서 빠져나오는 여정은 너무나 길고 힘든 오르막길이었다.(456p)

 

“세상에, 무슨 일 있어?”

진이 열심히 눈을 깜빡거렸다. 아무 일도 없다고 하고 얼른 나갈 수도 있고 멜섬 부인이 내미는 동정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기억이 그녀를 쿡쿡 찔렀다ㅡ리밍턴 호텔에서 만났던, 진이 내민 우정의 손길을 거절했던 만신창이의 딸. 그녀는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는 자랑스러움을 포기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날 밤 두 사람 모두 움츠러들었다. 늦었지만 눈부신 통찰 덕분에 진은 도움을 받아들이면 양쪽 모두가 더욱 풍성해진다는 사실에 눈을 떴다.

(...)

이 만남으로 인해 진의 상황이 실제로 조금 더 나아졌다. 진은 최근 틸버리 가족 때문에 겪은 슬픔을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연애가 끝나서 외롭고 후회된다고 내비쳤다.

(...)

물론 멜섬 부인은 진의 실연에 대해서 어떤 치료법도 제안할 수 없었고 그러려고 하지도 않았다. 유서 깊은 방법들ㅡ인내, 기분전환, 일ㅡ뿐이었는데, 그런 방법이라면 진도 잘 알고 있었고 예전에 프랭크와 헤어졌을 때 기대기도 했지만, 지금은 떠올려 봐도 별로 자신이 없었다. 예전의 경험은 고통이 끝없이 계속되지는 않는다고ㅡ그러나 매끄럽게 점점 더 빨리 가라앉지도 않는다고, 무서운 파도를 연달아 일으키며 가라앉는다고, 몇 번의 파도는 그녀를 쓰러뜨릴 수도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458-460p)

 

 

 

ㅡ 클레어 챔버스, <스몰 플레저> 中, 다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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