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8

 

칼럼 모음집이라 그런지 각 글들이 짧아서 조금 아쉽다. 너무 긴 글도 싫지만 이건 너무 짧은 걸.

 

 

 

“말하는 데 한 푼도 들지 않은 당신의 찬사가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는 먼저 생각해 보시죠.” 18세기 영국 문인 새뮤얼 존슨 박사가 한 말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칭찬이 모두 무가치하냐 아니냐가 아니고, 칭찬을 말한 쪽이 빠지는 고유의 착각이다. 그는 원가(=제로)와 무관하게 자신의 칭찬이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가치가 있기 때문에 받은 쪽이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수표라도 써 준 것처럼 말이다.(43-44p)

 

 

중고생 시절, 미국의 ‘물질주의’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처음 의심하게 된 계기는 히틀러를 피해 건너온 망명자들이 제공했다. 그들은 걸핏하면 자기들 ‘문화’를 우리 ‘천박한 물질주의’와 대비시키곤 했다. 들여다보니 그들의 ‘문화’라는 건 유럽 시절 하인을 부리고 살았다는 것과 그들이 황홀해하는 릴케, 슈테판 츠바이크, 브루크너, 말러에 대한 지식 정도가 다였다. 그들이 말하는 ‘문화’가 신세계에서 형편만 허락한다면 제대로 누리고 싶은 중산 계급식 물질주의와 감상주의를 뜻할 뿐이라는 걸 발견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폴린 케일, 「나는 영화관에서 그것을 잃었다」, 1965)(53p)

 

 

우정의 다이내믹은 꽤 관대한 편이어서 가장 친한 친구의 순위 바꿈이나 연락의 휴지를 허용한다. 하지만 한번 금이 간 친구 관계는 다시 회복되지 않는다. 연애가 거의 무한정 누리는 사치, 즉 싸움을 우정은 한 번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친구 관계는 별로 질기지 않고, 한번 못 볼 꼴을 보면 바로 해소된다. 그런 오점만 없다면, 십 년간 겨울잠을 자던 밍밍한 친교도 나중에 잘 이어지곤 한다.(60p)

 

 

“그는 다른 작가들을 그들이 보인 업적으로 평가했지만, 그들이 그를 평가할 때는 장차 달성할 업적을 가지고 평가해 주길 바랐다.” 나는 네 겉만 보겠으나 너는 내 속을 봐 줘야 한다는 이런 태도. 내면은 오직 나만의 것이라는 태도.(71p)

 

 

 

「에지웨어로 뒷골목의 조촐한 극장」(1939)은 영국의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이 남긴 아마 단 한 편의 환상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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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 박물관 열람실을 나와 저녁 거리를 쏘다니던 한 사람이 영화관에 간다. 가고 싶은 곳은 따로 있지만, 돈은 없고 비는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들어선 꾀죄죄한 극장은 무성영화 전용관을 표방하고 있다. 즉 ‘고급문화도 아니고 싸구려에다가 임시적이고 욕구불만에 가득 찬 어떤 시대착오적 오락’이 이미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거의 손님이 없는데, 영화에서 자살 장면이 나오자 옆자리에 앉은 사내가 말을 건다. 아니 대놓고 귀에다 속삭인다. “엉터리네.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피가 많이 나오는데.” “뭐가요?” “사람을 죽이면.” “저건 살인이 아닌데요.” “나도 알아.” “뭘 안다는 거죠?” “저런······것을.” 사내는 혼잣말로 뭔가 불길하고 낯익은 거리 이름을 중얼거리다 나간다. 불이 들어오고 사내가 앉았던 곳 스쳤던 곳 모두가 피투성이다. 최근 뉴스에 난 살인 사건이 뇌리에 스친 주인공은 달려 나가 경찰에 전화를 건다. 틀림없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자는 살인범이다·····. 흥미롭게 듣고 있던 경찰이 대꾸하는 소리가 전화기에서 들려온다. “아니요. 범인은 잡았습니다·····. 없어진 것은 시체뿐입니다.”(161-163p)

 

 

아마 한 조직이 선한지 악한지 알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두목보다 착한 부하가 생존이 가능한지를 살펴보는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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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잠자코 있으면 살릴 사람들을 굳이 죽이기 위해 그가 의식적인 선택을 한 것은 분명하다. 이런 선택을 평범함이나 복종이라는 말로 포장하기는 어렵다.(분명히 그는 복종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아이히만은 이십 년 뒤 바로 평범함과 복종의 대표자로 부활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 때문인데,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본 그녀는 그를 사악하기보다는 평범하고, 고지식하게 명령을 수행하려 애쓴 다소 머리가 둔한 공무원적 인물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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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이 평범한 인물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게다가 아렌트가 말한 평범함은 보통 사람의 특출하지 못한 면을 중립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녀가 견딜 수 없어 하는 모든 특성의 총합 같은 인상을 준다. 나중에 그녀는 좀 더 힌트를 주었다. “그의 특징은 천박함이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는 그 대중성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대중화될 수 없는 전제 위에 서 있었다. 자신이 몹시 싫어하는 부류에게 ‘평범하다’는 수식어를 부여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렌트 같은 지식인 귀족이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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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없어진 개념들이 그렇듯 악의 평범성은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적용해도 되는 말이 되었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에게만 겁을 주는 말이기 쉬웠다. 악당들도 마찬가지로 겁을 먹으면 좋을 테지만, 그 개념이 그런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인지는 조금 의문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악당이 되는 것보다, 악당이 자신을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여기기 시작하는 것, 그게 훨씬 두려운 일이 아닐까.(190-193p)

 

 

 

ㅡ 김영준, <작가, 업계인, 철학자, 스파이>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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