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16

 

개의 설계사를 읽을 때만 해도 단요 작가의 전작을 다 찾아 읽을거라곤 생각지 않았는데 출간된 책 기준으로는 이제 다이브를 제외하고 다 읽었다. 근 2년 동안 이렇게 쏟아낸 작품들이 미리 써둔 원고라기보다는 2년간 쓴 작품이라고하니 앞으로도 재미있는 작품을 많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그건 내 고질적인 문제였다. 정의의 편이 되기에는 야심이 부족하고 악당이 되기에는 겁이 많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인 희비극에 실컷 도취되기에는 또 자기객관화가 잘됐다.(36p)

 

 

존엄은 돈과 맞바꾸지 못한다지만 그 말은 절반만 진실이다. 이미 팔린 낯을 돈으로 거둬들일 수는 없어도 돈을 받고 낯을 팔 수는 있기 때문이다. 어떤 부모들은 방송에 나와서 집안사정을 털어놓은 다음 무료 상담을 받고, 도박중독자는 유튜브에서 회고록을 읊어 댄다. 다들 그러고 사는데, 그래야만 앞날이 편해지는 사람도 있는데 돈에 영혼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나는 도대체 모르겠다.(50p)

 

 

돈을 벌면 앞으로 어쩌지. 잃으면 또 어쩌고. 막막하게만 들리는 문장이었지만 답은 어떻게 보면 단순했다. 그런 질문들은 내가 수익률의 세계에 머무르는 동안만 유효했고, 월급의 세계로 떠나는 순간 금방 우스워졌다. 생산직으로 공장에 입사하거나 콜센터에서 전화를 받는 건 일반적인 삶의 조건 중 하나이며 다들 슬플 것도 없이 그렇게 살고 있으므로.

그러니까 나는 정장을 입지 못하는 미래가 두려운 게 아니었다. 견고하고 안정적인 삶의 미덕이, 내가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운 거였다. 돈이 풍선처럼 부풀다가 터지고 다시 부푸는 데에는 사라질 일 없는 월급이 적금통장에 차곡차곡 모이는 것과는 다른 역동성이 있었다. 사람을 매혹시키고 사로잡는 역동성. 나는 한때 풍선을 부풀린 다음 적당히 자리에서 묶는 법을 알았다. 그것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풍선 탑을 쌓아올렸다·····. 지금도 그게 그리웠다·····. 탑의 높이가 아니라, 내가 그럴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 나한테는 현금 2,000만 원이 있다. 이것으로 ETN을 살 게 아니라, 월요일 장이 열리자마자 크루드오일 매도를 잡으면·····.(68p)

 

 

경상도 농가의 맏아들이었던 아버지는 서울 사람이 될 만큼 부드러웠고 폭력의 대물림을 끊고자 결심할 만큼 이지적이었지만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진정성에 대한 숭배를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서로가 마음의 문을 열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쌍방이 대등한 관계일 때에만 성립한다. 그러나 모든 부모는 아이를 스무 해 이상의 제작 기간을 요구하는 수공예품처럼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공예품이 자신의 형태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제작자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소통은 허위와 폭력의 게임이어야만 했다. 진의를 다정함으로 감싸고 아이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밀어 가는 것이, 그러다가도 격렬한 거부 반응 앞에서는 압도적인 차이를 드러내 기세를 꺾고 복종시키는 것이 부모의 일이었다. 진정성과 정직의 힘을 동경하는 이들은 그 역학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악질적이었다.(71-72p)

 

 

메뚜기 떼와 코로나19는 하나님이 타락한 현대인에게 내리는 심판이라는 거였다. 심판. 또 심판이다. 그런 이야기를 기사에 옮겨 적는 걸 보면 편집국 일동도 목사에게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이 사람들은 이집트에 저주가 내리는 장면까지만 읽고 성경을 덮었나 보지.

나는 그 뒤의 내용도 알고 있다. 그중 하나는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잃어버린 남자의 이야기다. 이름은 욥. 친구들은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께서 불행을 내린 것이라며 욥을 탓하고, 욥은 억울해한다. 도대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욥은 잘못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에 어처구니없이 휘말렸을 뿐이다.

이야기의 교훈은 명확했다. 세상은 원래 까닭 없이 끔찍해지는 것이니까, 타인의 불행을 두고 욥의 친구처럼 굴지 말라는 거였다. 수천 년 전의 중동에도 그 교훈이 필요한 사람은 참 많았나 보다.(83p)

 

 

내 뷰가 옳기만 하면 얼마든지 나를 좋아해 주고 걱정해 주는 사람들. 조건부란 안정성의 다른 말이다. 이유 없는 것들은 그 이유 없음으로 인해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147p)

 

 

승리의 트로피를 받아 들었을지라도 그 순간을 영원히 누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충만감은 삶을 채우기에는 너무 짧고 욕망이란 이루어진 목표를 새로운 목표로 교체하는 부단한 과정이므로. 그러니까 사람에게 주어진 선택지란 사실 둘뿐인지도 모른다. 갈증 속에 내달리다가 때때로 주어지는 기쁨을 달콤하게 받아들이는 것. 혹은 갈증도 짜릿함도 내버리고 다만 평온해지기로 마음먹는 것.

후자가 마음의 문제인 이유는, 욕망하기 위해서는 투지가 필요한 반면 욕망을 멈추기 위해서는 결심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둘 중 어떤 것도 갖추지 못했다가는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생각하지도 원치도 않았던 곳에 도달해 있기 마련이었다.(218-219p)

 

 

 

ㅡ 단요, <인버스> 中, 마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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