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5

 

 

뻔히 책 표지에 적혀있어서 할 말은 없는데 대충 봐서 그랬는지 현대사상이라고 해놓고 프랑스 현대철학자들만 나와서 좀 당황스러웠다. 입문서에 깊이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므로 평소 여러 책에서 조금씩 접했던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의 사상에 조금 더  익숙해지는 시간이었다. 데리다, 들뢰즈, 푸코로 시작하는 초반은 굉장히 간명하고도 쉽게 설명하므로 쉬이 따라갈 수 있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어려워진다. 철학 초심자를 위한 배려로 상이한 입장을 가진 철학자들을 하나의 큰 도식으로 뭉뚱그려 엮었다는 점은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확실히 사람은 일을 더 진척시키려면 다른 가능성을 잘라 버리고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때 무엇인가를 잘라 버렸다. 고려에서 배제해 버렸다는 것에 대해 창피하다는 생각이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때 잘라 버린 것을 다른 기회에 회복하려 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또 가고정과 차이의 이야기를 떠올려 주었으면 하는데요, 모든 결단은 그것으로 이제 아무 미련 없이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미련을 동반하는 것이고, 그러한 미련이야말로 바로 타자성에 대한 배려입니다. 우리는 결단을 거듭 되풀이하면서 미련의 거품 속에서 다른 기회에 어떻게 응할 것인가를 계속 생각해야 합니다. 탈구축적으로 사물을 봄으로써 편향된 결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항상 편향된 결단을 할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 잠재적인 아우라처럼 타자성에 대한 미련이 뒤따른다는 것을 의식하자는 얘기입니다. 그것이 데리다적인 탈구축의 윤리이며, 바로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친절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51-52p)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은 밖에서부터 반강제로 주어지는 모델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 속에서 여러 가지 도전을 해서 스스로 준안정상태를 만들어 나가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꽤 엄격한 요구입니다.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들뢰즈+가타리가 생각하는 것은 모종의 예술적, 준예술적 실천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활 속에서 독자적인 거처가 되는, 자신의 독자적인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여러 가지 만들어 나가자고 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고, 관엽식물을 기르는 것도 좋고, 사회 활동에 몰입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한 새로운 활동을 다양하게 조직화함으로써 인생을 준안정화해 나가면 되는 것이지, ‘진정한 나의 본모습’을 탐구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를 하자, 여러 가지를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은 그렇게 낙관적이고, 행동으로 사람들의 등을 떠밀어 주는 사상이거든요.(72p)

 

 

그런데 그러한 정신분석은 어떤 식으로 현대사상과 연결되어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현대사상은 정신분석을 비판하지만, 원래는 정신분석에서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앞 장에서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를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19세기에 표면의 질서 아래 숨겨져 있는 힘의 차원이 발견되고 20세기에 이르러 그러한 탈질서적인 것의 창의성이 얘기되었습니다. 표면의 질서는 이항대립적으로 조립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도망치는 것은, 데리다라면 탈구축에 의해 질문되는 회색 지대이고, 들뢰즈라면 도주선 끝의 외부라는 것이 됩니다. 인간의 사고나 행위에는 질서 정연한 것만이 아니라 불합리한 힘의 흐름에 맡겨져 있는 면이 있고,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이르려면 질서를 벗어나는 디오니소스적이고 꺼림칙한 것을 인간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정신분석은 인간에 대한 하나의 정의를 줍니다. 그것은 “인간은 과잉의 동물이다”라는 것입니다.(144p)

 

 

그런데 언어는 분별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이쪽은 이쪽, 저쪽은 저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언어습득이란 어떤 의미에서 세계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어를 습득하지 않으면 인간은 도구를 제대로 조작할 수조차 없습니다. 아마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겁니다. 동물의 경우라면 언어를 습득하지 않고서도 일정한 행동을 취할 수 있지만, 동물이 본능적으로 사물을 구별하고 분절하여 파악하는 반면, 인간은 언어습득과의 관계에서 세계를 다시 분절하는 ‘제2의 자연’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그 안에서 목적적인 행동을 취할 수 없습니다. 언어란 들뢰즈의 어휘를 사용하면 ‘제도’의 일종입니다.

목적적, 실리적으로 사물을 구별하고 행동하는 ‘제대로 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경계를 넘어 여러 사물을 접속하는 상상력은 약해집니다.

그런데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상상력의 리좀적 전개와 언어적 분절성은 인간에게 병립되어 있습니다.(158p)

 

 

 

데리다, 들뢰즈, 푸코에서 공통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올바른 의미다”라고 확정할 수 없고 항상 취하는 관점에 따라 의미 부여가 변동한다는 의미의 결정 불가능성 혹은 상대성입니다.

다만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정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물은 복잡하다”라는 것입니다. 다의적, 양의적이라는 거죠.

예를 들어 푸코라면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지배자가 지배에 가담하는 면이 있고, 그래서 단순히 어느 한쪽이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역학이 복잡하게 있다는 식으로 현실의 복잡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둘 다 그게 그거니까 “둘 다 나쁘지 않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런 현대사상의 경향은 단순화되고 소박한 상대주의로 파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물은 어떻게든 파악된다”라거나 “그런 입장을 취하고 있으면 역사수정주의가 된다”라거나 “‘탈진실’이라고 일컬어지는 제멋대로의 사실 인식 강요나 음모론을 허용하게 되는 것 아니냐”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확실히 현대사상은 그러한 현대의 곤란한 현상을 일도양단으로 [과단성 있게]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의 사고·언어에는, 예를 들어 음모론에도 이르게 될 가능성이 애초에 있다는 것을 먼저 냉정하게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건 안 좋으니까 없애 버리세요”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어요.

인간은 애초에 정신분석적으로 말해도 ‘과잉’적인 존재이며, 일정한 의미의 틀을 벗어나 사물에 다르게 의미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있기에, 그것이 뚱딴지같은 망상으로 전개되는 것은 인간의 기본 설정으로서 있을 수 있습니다.(196-198p)

 

 

다시 푸코가 등장하게 됩니다. 푸코는 왜 고대로 회귀했을까요?

3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성의 역사 Ⅳ』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마음에 해소할 수 없는 죄책감을 설치함으로써 무한하게 반성을 강요받는 주체를 정립했습니다. 이 죄책감, 즉 원죄란 바로 부정신학적 X입니다. 기독교의 주체화는 바로 부정신학적 주체화입니다. 거기서 푸코는 그 이전의, 말하자면 무한하게 반성하지는 않았던 시대의 사람들에게서 일종의 가능성을 보게 됩니다.

세네카 같은 로마의 현인들은 뭔가 잘못을 저질렀어도 그것을 근원적인 죄로 여기지 않고 하루의 일과 끝에 일기를 쓰고 반성하며 “더 이상 하지 말자”라고 스스로에게 말할 뿐이었습니다.

(...)

즉, 수수께끼의 X를 파고들지 않고, 생활 속에서 과제가 하나하나 완료되어 간다는 그런 이미지의, 담담한 유한성입니다. 주체란 우선 행동의 주체이지 정체성을 고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반드시 하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관련된 문제는 있지만, 모든 문제가 연결되어 하나로 뭉칠 때, 사람은 엄청난 정체성의 고민으로 폐색 상태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문제는 분할해서 하나하나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데카르트도 말하지만, 바로 그 거대한 수수께끼, 거악이 일어나지 않도록 개별적으로 사물에 접근하는 것이야말로 복수성으로 향해 가는 방향 지어짐의 의미가 아닐까요?

(...)

어쩔 수 없이 고민하는 것이 깊은 삶의 방식인 것 같은 인간관이 근대에 의해 성립되고, 그것이 다양한 예술을 산출해 낸 것인데요, 그로부터 거리를 두고 세속적으로 사태와 씨름하는 것은, 인간이 변화가 없이 단조롭게 되어 버리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세속성에야말로 거대한 고민을 품고 있는 게 아닌 또 다른 인생의 깊이, 희극적이라고 할 수 있는 깊이가 있지 않을까요?

문제와 씨름한다는 것은 그저 해석을 이러쿵저러쿵 쓸데없이 만지작거리며 농락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을 하고 아주 조금이라도 세계를 움직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고뿐만이 아닙니다. 신체가, 사물이, 물질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개개의 문제에는 물론 어려운 것이 있고, 그것은 스트레스를 강요하지만, 그 고통을 무한한 고민으로부터 구별합니다.

(...)

세계는 수수께끼의 덩어리가 아닙니다. 세계는 산재하는 문제의 장입니다.

바닥없는 늪 같은 깊이가 아닌 다른 깊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속성의 새로운 깊이이며, 지금 여기에 내재하는 것의 깊이입니다. 그때 세계는 근대적 유한성에서 보았을 때와는 상이한, 다른 종류의 수수께끼를 획득합니다. 우리를 어둠 속으로 계속 끌어들이는 수수께끼가 아닌, 밝고 맑은 하늘의 수수께끼. 맑기 때문에 수수께끼입니다.(207-213p)

 

 

ㅡ 지바 마사야, <현대사상 입문> 中, ar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