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5/7

 

 

 

사람들은 속임수에 넘어가서 심한 두려움과 모멸감을 느끼게 될 조짐이 보일 때 큰 충격을 받는다. 사회적, 문화적, 개인적 차원에서 우리는 이런 두려움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하고 직관적인 경험인 데 비해 '속임수에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하나의 일관적인 현상으로는 주목받지 못했다.

사실 사기당하지 않는 방법을 다룬 책과 글은 많지만,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우리가 속고 속일 때 작용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중점적으로 탐구하는 한편, 개인의 자아와 사회 질서의 측면에서 '무엇을 가리켜 사기라 하고, 누구를 호구라 부르는가?'하는 문화적 동기에 의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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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부분 어떻게 해야 성공적이면서도 선한 삶을 살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하지만 속임수에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성공한 삶과 선한 삶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모두 방해할 뿐만 아니라, 성공하는 동시에 착하게 산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우리에게 속삭인다. 이 책은 이 속삭임의 볼륨을 높여 더욱 명확하게 듣고, 우리가 이 속삭임을 언제는 귀담아듣고 언제는 무시해야 할지, 또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놓아줘야 할지 결정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8p)

 

 

가짜 사이트에 개인정보를 해킹당하거나 속아서 텔레비전 쇼에 출연하는 등 아픈 경험을 하고 나면 우리는 다음에는 같은 일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는 교훈을 얻는다. 불에 데고 나면 다음부터는 불에 섣불리 다가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속임수에 당하는 것을 지나치게 경계해서 생기는 문제는 잘 언급하지 않는다. 하마터면 사기꾼에게 당할 뻔했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떤 교훈을 마음에 새길까? 그리고 이 교훈은 다음번에 우리가 마음을 열고 누군가에게 무언가 베풀려는 순간 우리 마음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울까?(11-12p)

 

 

인간은 호구가 될지 모르는 위험에 처하면 기존의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공격을 저지하고자 맞받아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겁에 질린 호구가 투쟁이 아닌 도피 혹은 회피로 대응할 때다. 도피나 회피는 맞서 싸우는 것보다는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지나치게 겁에 질리고 회의주의에 빠진 나머지 누군가를 믿지 못하거나 무언가를 섣불리 시도하지 못한다면 이 또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기는 마찬가지다. 호구가 될까 두려워서 어떤 일에 발을 들이지 않고 물러난다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도 있고, 협력하기를 멈출 수도 있으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너그러이 베풀던 친사회적 욕구조차 억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호구 잡힐까 불안한 마음에 후퇴하려는 경향은 의료 보험, 복지, 이민 정책 등에도 영향을 끼친다.(22p)

 

 

사실 우리가 치르는 진짜 비용은 돈도 시간도 번거로움도 아니다. 아주 잠깐이나마 사기에 말려들 때 치러야 하는 비용은 바로 '자신의 바로 같은 모습을 직면해야 하는 심리적 비용'이다. 많은 사람이 혹시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자동차 정비소에 전화할 것이고, 정말 돈을 그냥 주는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도 주저하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험을 감수했다가 혹여 잘못되기라도 하면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까 봐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혹시 모를 이익을 포기할 만큼 끔찍하다.(39p)

 

 

호구 공포증이 조금 아리송하면서도 괴상한 이유는 엄밀히 말해 이 공포가 '착취자'를 향한 두려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호구 공포증은 근본적으로는 '내가 바보가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다. 이런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대상은 자기를 호구로 만드는 가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속임수로 인해 '내가 무엇이 되느냐'이다. 이렇게 구별하면 정확히 어떤 경험이 공포 반응을 유발하는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은 기존의 계층 구조에 이미 익숙한 탓에 혹여 정부나 부자처럼 힘 있는 존재에게 당한다고 해도 이것을 모욕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일 나와 동등한 사람 혹은 심지어 나보다 아랫사람에게 이용당한다면 나는 대체 뭐가 되겠는가?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다.(68-69p)

 

 

'너 그러다 사람들한테 바보 취급 받는다'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까? 고속도로에서 차선을 변경하려는 차를 끼워주지 않거나 종업원에게 팁을 조금만 주고, 일찍 퇴근하는 동료의 일을 대신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일상 속 사소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무엇을 택하느냐가 결국 사회, 문화, 정치적 수준에서 벌어지는 일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속임수에 당할까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나라에 인도주의적 지원을 베푸는 정책을 어떻게 생각할까? 사정이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망명을 신청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호구 공포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재분배 정책을 보면 복지 사기를 걱정하고, 선거권을 부여한다고 하면 투표자 사기를 우려한다. 또 교육 영역에서는 부모들이 주소를 허위로 등록해서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내려 한다고 의심한다. 시민 의식이 있어야 할 자리에 호구 공포증이 떡하니 자리 잡은 결과다. 자격 없는 수혜자 한 명이 나머지 사람 전부를 호구로 만들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보호하려는 선한 동기를 가로막는다.(88p)

 

 

사기꾼으로 주로 의심받는 사람이 이민자, 여성, 졸부, 죄수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은 비록 실질적으로는 그렇게 큰 위협을 가할 힘이 없지만, 이들에게 사기를 당하는 사람은 사회적 지위가 엄청나게 흔들리거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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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사람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수준의 공포를 느낀다고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는 잠재적 사기꾼이 누구냐에 따라 착취에 대한 두려움은 그 정도가 확연히 달라진다. 우리가 사기 위협을 마주할 때, 원초적인 감정 수준에서 나오는 반응은 다음과 같다.

"네가 어떻게 감히?“

그러나 같은 문장의 강조점을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네가 어떻게 감히?“

자녀 혹은 학생처럼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속아 넘어가면 그 사람은 패배자가 된다.(90-91p)

 

 

그러나 호구 공포증 때문에 우리가 취약해질 수 있는 상황을 전부 회피한다면, 그 부작용은 개인과 사회 모두에서 나타날 수 있다. 문제는 단지 비트코인에 투자하지 않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호구 공포증에 빠지면 사람들은 사회적 차원에서 어려운 이들을 지원하거나 시민으로서 마땅히 협력해야 할 때도 이를 거부한다. 호구 공포증은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협력에 대한 우리의 선호를 왜곡한다.(100p)

 

 

시대니어스와 그의 동료는 집단 간 억압을 사회과학적으로 완벽히 설명한 책 <사회적 지배>를 출간했다. 그들에 따르면 특정 종류의 사회적 계층화에는 보편성이 존재한다. 또한 모든 문화에는 나이와 성별에 따른 계층 구조가 존재한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어른이 아이를 지배하는 현상은 거의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결정적으로 거의 모든 문화에는 시대니어스가 말한 '임의 결정 체계'가 존재한다. 임의 결정 체계는 민족, 계급, 종파, 씨족, 국적, 인종 혹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모든 집단 구별'등 사회적으로 형성되었거나 겉으로 두드러지는 특성에 따라 사회 구성원을 계층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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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지배 이론'은 인간의 광범위한 행동을 사회적 지배라는 궁극적 목표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사회적 지배 이론에 따르면 인종차별주의에는 목표가 있고 그 목표는 바로 '권력'이다. 시대니어스에 따르면 인종적, 민족적 고정관념은 임의로 세워진 계층 구조를 정당화하는 구실을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지배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거의 모든 형태의 집단 편견, 고정관념, 집단의 우열에 관한 관념과 개인적, 제도적 차별은 집단 기반의 사회적 계층 구조를 양산하고 반영한다. 또한 특정 집단에 관해 떠도는 이야기는 사회 불평등을 도덕적, 지식적으로 정당화한다.(175-176p)

 

 

진짜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호구가 될 것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호구가 될 것이냐'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주체로서 우리는 손 놓고 있다가 그대로 '비관적인 호구'가 될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진정성 있는 호구'가 될지 선택할 수 있다.(251p)

 

 

호구 짓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비합리적이지도 않다. 단지 여러 가지 고려할 사항 중 하나일 뿐이다. 호구 짓이 우리의 선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판단하려면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노트에 기록해 보면 된다.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때로는 그저 명쾌한 계산 한 번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내가 이루려는 목표는 무엇이고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무엇인가? 이러한 분석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날 때는 공포가 큰 자리를 차지한다.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이 책의 핵심은 바로 '호구 공포증이 유독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공포가 두드러지고 말고는 돌에 새겨진 듯 고정된 사실이 아니고, 우리가 거기에 주의를 기울일지 말지 역시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다. 어쩌면 생각보다 간단하게 호구 공포증의 무기화를 막을 수 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우리가 가진 선택지를 조사하고 계산하는 것이다.(323p)

 

 

물론 호구가 되면 실질적으로 손해를 입을 때도 있다. 호구가 된 표적은 자신에게 의미 있는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물질적, 사회적 결과에 맞닥뜨릴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은 호구가 될 때 느끼는 것은 단지 감정에 지나지 않고, 이 감정을 지나 중요한 다른 문제보다 더 우선시 할 이유는 없다.(338p)

 

 

 

 

ㅡ 테스 윌킨슨 라이언, <호구의 심리학> 中, 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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