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25

 

 

 

“약한 증거는 더 강한 증거를 결코 이길 수 없다”라는 것이다.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증거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증거보다 늘 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믿을 만한 근거가 있을 수 없다는 논리다. 기적을 옹호하는 증거가 믿음을 줄 만큼 강력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흄이 내세운 반론의 핵심은 “기적이 자연법칙을 위반한 것”이라는 점이다. 단지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한 사건을 기적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비행기에서 추락해 죽을 상황인데, 기이한 돌풍이 불고 아주 푹신한 곳에 떨어져서 그가 살아남았다면 이는 놀라운 행운이지만 기적은 아니다. 반면 비행기에서 추락한 사람이 날아오른다면 그것은 기적일 수 있다. 흄의 반론에 따르면, 인간은 경험상 자연법칙에 늘 예외가 없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연법칙이 통하지 않았다는 주장, 즉 기적이 일어났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는 “경험을 통해 나온 다른 모든 주장만큼 완벽하고 흠이 없다.” 우리의 일관된 경험에 따르면, 중력은 늘 효력을 발휘하고, 열은 늘 얼음을 녹이며, 죽은 자는 부활할 수 없다. 기적을 반박하는 증거는 도처에 있다. 일관된 경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적의 존재를 반박하는 증거로 손색이 없다. 기적이 일어났다는 증거는 절대로 강력할 수 없다. 기적은 늘 한 사람이나 소수의 증언에 기반을 두고 있기 마련이고, 그러한 증언은 자연의 일관성에 대한 가정을 뒤흔들 만큼의 신빙성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논증도 마찬가지다. 좋은 논증의 전형적인 특징은 규정할 수 있지만, 어떤 논증이 통하고 통하지 않는지를 확정해주는 완벽한 규칙이란 없다. 특정 논증의 타당성을 알아보는 방법은 그것을 다른 논증들과 비교해 검증하는 것이다. 흄이 지식인들과의 우정을 중시하고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도 귀하게 여겼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라플레슈의 예수회대학 교정을 거닐면서 수도사들과 나눈 대화는 흄이 자신의 논증을 검증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논증의 타당성을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은 없다. 최상의 논증은 그저 더 우월한 경쟁 상대를 찾지 못한 논증일 뿐이다.

 

 

의지라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몸을 다르게 움직이거나 뭔가를 새로 지각한다고 할 때 우리가 느끼고 의식하는 내적인 인상 그 이상은 아니다. — 데이비드 흄, 『인성론』 중

 

흄은 자유의지에 관한 우리의 무분별한 생각의 원인 중 하나가 “자발적 자유”와 “무차별적 자유”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자발적 자유는 행위자가 강요 없이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다. 반면 무차별적 자유는 인과의 필연성에서 벗어나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다. 무차별적 자유는 불가능하다. 인간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유는 자발적 자유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유일한 자유는 “의지의 결정에 따라 행동하거나 행동하지 않을 힘이다. 가령 내가 움직이지 않은 채 계속 있기로 결정한다면 움직이지 않을 수 있고 움직이고자 하면 또 그렇게 할 수 있다. 죄수거나 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러한 자유는 보편적으로 모든 이에게 허용된다.”

 

 

 

ㅡ 줄리언 바지니, <데이비드 흄> 中, A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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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사춘기가 되면 털이 더 많아진다고 느끼기 쉽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렇지는 않다. 다만 원래 있던 솜털이 차츰 〈어른다운〉 털로 바뀔 뿐이다. 면도한다고 해서 그 자극으로 털이 자라거나 변하는 일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창 사춘기의 변화가 진행되는 시기에 처음 털을 깎기 시작하기 때문에 면도 때문에 털이 바뀌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뿐이다. 면도를 하면 털이 더 굵어지고 뻣뻣해지며 심지어 더 빨리 자란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어제 음부를 면도한 터라 그곳이 고슴도치처럼 뾰족뾰족한 채로 하루 종일 앉아 있자면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하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털은 주로 죽은 세포로 이루어진다. 털에서 피부 위로 빠져나온 부분은 모두 죽은 단백질이고, 살아 있는 부분은 털집 속에 담겨 있다. 그러니 우리가 털을 깎더라도 털집은 그 사실을 모른다. 죽은 자가 말할 수 있는 건 코르넬리아 풍케Cornelia Funke의 『유령 퇴치 클럽Gespensterjäger』 시리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현실의 털집은 우리가 거기서 자란 생산물을 무자비하게 깎아 낸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채 여느 때와 다름없는 속도로 털을 길러 낼 뿐이다. 그리고 털의 굵기는 털집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는데, 면도를 아무리 자주 하더라도 털집 크기는 변하지 않는다.

 

 

남자와 달리 여자는 사는 동안 계속 새 생식 세포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여성은 처음 세상에 나오는 순간에 약 30만 개의 난자를 다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그 난자들은 아직 성숙한 형태가 아니다. 우리가 갖고 태어난 난자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생식력이 있는 난자의 전구 세포인 난모세포이다. 난자 전구 세포(난모세포)는 배아가 5개월째에 이미 다 형성된다. 그 세포들은 나중에 사춘기가 와서 생리가 시작될 때까지 미래의 임무를 예행연습해 보는데, 여러 개가 한 묶음으로 다달이 성숙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뇌에서 오는 배란 신호가 없기 때문에, 그러다가 그냥 죽어 간다. 엄청난 수가 그렇게 죽는다. 여성이 사춘기에 이를 무렵이면 그런 예행연습으로 난자의 3분의 1 이상을 잃고 약 18만 개만 남은 상태다. 25세 무렵에는 약 6만 5천 개가 남는다. 이 난자들은 이후 참을성 있게 제 차례를 기다렸다가 생리 주기에 따라 성숙되어 배출된다.

 

 

 

ㅡ 니나 브로크만, 엘렌 스퇴켄, <질의응답> 中,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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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7

 

6명의 저자 모두 농담에는 전혀 소질이 없어 보인다.

 

 

 

감당하지 못하는 순간이 닥치면 보잭은 언제나 도망치는 쪽을 선택한다. 그는 곁에 있는 사람에게 고약한 말로 상처를 주고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다른 사람을 조종하고 모략을 꾸미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보잭은 그렇게 살아온 결과로 망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망쳐가는 사람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그는 자신의 행복을 방해하려고 사는 사람 같다. 인생을 어떻게 꾸려야 할지 알(것 같)지만 제대로는 모르고, 그나마 아는 것도 제대로 못하고 잘못을 바로 잡고 사과하고 싶지만 그러는 대신 죄책감을 감추려고 더 심술 맞게 구는 사람이 보잭이다.

한편으로 그는 더 나아지려고 끊임없이 애쓴다. 우정을 생각하고 호의를 베풀며 잘못한 일은 잘도 반성하고 원치 않는 일이어도 다른 사람을 배려해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다정하고 마음 깊은 말을 할 줄 알고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끌어안기도 한다.

그럴 때 보잭은 확실히 이전보다 나아진 듯하고 이후로 그의 인생이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지만, 그때뿐이다. 통찰과 성찰 후에도 그는 변함없이 형편없다.

나아지는 채로 인생이 계속되지는 않는다. 인생에는 나아지는 순간이 있지만 그 순간이 짧다는 게 문제다. 각성과 반성이 삶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 후에도 인생의 실패는 여전하다.

깨닫고 자책하고 새 삶이 열리기를 기대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순간만 그렇다. 삶은 부메랑처럼 언제나 돌아간다. 자기만 알고 상처를 주고 망쳐버리는 데 익숙한 바로 그 순간으로.

(...)

다이앤의 말처럼 보잭은 특별히 나쁘지 않고 특별히 선하지 않다. 그저 보통의 우리와 다를 바 없이 간혹 어리석어 나쁘고 대체로 선량하다.

보잭을 좋아하지 않기란 너무 힘들다. 이런 인물이 나와 영 다른 사람인 척하기도 힘들다. 언제나 이런 사람을 좋아하고 애틋하게 여기고 그들의 행복을 기원했지만 그들은 결코 행복해지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몰락을 향해 내달린다.(27-29p)

 

 

 

ㅡ 편혜영 조해진 김나영 한유주 이주란 이장욱, <술과 농담> 中, 시간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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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4

 

읽음.

 

 

ㅡ 김시선, <오늘의 시선> 中, 자음과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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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3

 

 

뇌과학의 최신 연구 성과를 담았다고 하길래 내심 새로운 자극을 받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며 읽어나갔는데 이미 알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저자의 출간 의도가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최신 뇌과학의 연구성과를 간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 쉬운 책을 쓰고자 한 것이니 불평할 건 없겠다. 앞 절반 정도는 꽤나 좋았고, 5, 6, 7강은 좋은 이야기긴 한데 크게 흥미로운 얘기는 아니었다. 시간이 나면 같은 저자의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와 데이비드 이글먼의 ‘브레인’을 들춰봐야겠다.

 

 

 

뇌의 핵심 임무는 이성이 아니다. 감정도 아니다. 상상도 아니다. 창의성이나 공감도 아니다. 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생존을 위해 에너지가 언제 얼마나 필요할지 예측함으로써 가치 있는 움직임을 효율적으로 해내도록 신체를 제어하는 것, 곧 알로스타시스를 해내는 것이다. 당신의 뇌는 음식이나 보금자리, 애정 또는 물리적 보호와 같이 좋은 것으로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지속해서 당신의 에너지를 투자한다. 그렇게 해서 자연의 필수 과업, 곧 당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31p)

 

 

과학자들은 최근 모든 포유류의 뇌가 단 하나의 제조계획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파충류와 다른 척추동물들도 같은 계획대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포유류의 뇌를 형성하는 신경세포들은 놀라울 정도로 예측 가능한 순서대로 만들어진다. 이 순서는 생쥐, 쥐, 개, 고양이, 말, 개미핥기, 인간, 그리고 지금까지 연구한 모든 종류의 포유류 동물에게서 똑같이 발견된다. 그리고 유전학적 증거들은 이러한 순서가 파충류와 조류, 그리고 일부 어류에게도 나타남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그렇다. 과학적 지식에 따르는 한 당신은 다른 물고기의 피를 빨아먹으며 살아가는 칠성장어와 똑같은 뇌 제조계획을 갖고 있다.

그토록 많은 척추동물의 뇌가 같은 순서로 발달한다면 왜 이 뇌들은 제각각 달라 보이는 것일까? 그 이유는 만들어지는 프로세스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며, 종별로 각 단계를 지속하는 기간이 짧거나 길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구성요소들은 똑같다. 차이가 나는 것은 오직 시간이다. 예를 들어 대뇌피질을 구성하는 신경세포들이 만들어지는 단계는 인간보다 설치류가 ᄍᆞᆲ고, 도마뱀은 이보다 훨씬 더 짧다. 그래서 우리의 대뇌피질은 크고 생쥐의 것은 작으며, 이구아나의 것은 훨씬 더 작거나 없는 것이다.

(...)

그래서 인간의 뇌에 새로운 부분이란 없다. 우리 뇌에 있는 신경세포들은 다른 포유류의 뇌에도 들어 있으며, 다른 척추동물에서도 찾아낼 수 있다. 이러한 발견으로 삼위일체의 뇌 가설의 진화적 토대는 흔들린다.(46-47p)

 

 

커다란 뇌에 비례해서 커다란 대뇌피질을 갖고 있다는 것은 특별할 게 없다. 사실상 이것이 정확히 우리 인간이 가진 것이다. 모든 포유류는 신체 크기에 비해 비교적 커다란 뇌를 가졌으며, 대뇌피질 역시 뇌에 비해 비교적 커다랗다. 우리의 대뇌피질은 상대적으로 뇌가 작은 원숭이, 침팬지, 그리고 다양한 육식동물에게서 발견되는 상대적으로 작은 대뇌피질의 확대 버전에 지나지 않는다.

(...)

서구의 과학자와 지식인들은 ‘커다랗고 이성적인 대뇌피질’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고는 오랜 세월 동안 그 개념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이렇다. 진화과정에서 뇌의 발달 단계 중 어떤 것은 더 길게, 어떤 것은 더 짧게 지속되도록 특정 유전자들이 변형되었으며, 이것이 뇌 안에서 상대적으로 크거나 작은 부분들을 만들어낸다.(48-49p)

 

 

우리의 뇌 네트워크는 항상 켜져 있다. 신경세포들은 결코 가만히 앉아서 외부세계의 뭔가가 자신들을 켜주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모든 신경세포는 배선을 통해 서로 끊임없이 수다를 떤다. 그들의 의사소통이 외부세계나 당신의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따라 더 강해지거나 약해질 수는 있지만, 이 의사소통은 당신이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62p)

 

 

전반적으로 말하자면, 한 신경세포가 다른 기능들이 아닌 특정 기능에 더 기여할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어떤 신경세포도 하나의 심리적 기능만 갖지는 않는다. 심지어 과학자들이 ‘시각피질’ 또는 ‘언어 네트워크’와 같이 그 기능을 따서 뇌 일부분에 이름 붙인다 하더라도 그 이름은 뇌의 해당 부분이 수행하는 어떤 독점적인 업무가 아니라 그때 그 과학자가 주목하는 것을 반영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지금 모든 신경세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공항이 비행기를 띄우고 항공권을 판매하고 형편없는 음식을 제공할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신경세포는 ‘두 가지 이상의 일’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또한 서로 다른 신경세포들의 집단이 동일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 한번 핸드폰이든 초콜릿이든 당신 앞에 있는 무언가를 잡기 위해 손을 뻗어보라. 손을 거두었다가 아까와 똑같은 방식으로 다시 손을 뻗어보라. 이처럼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는 간단한 동작도 한 번 할 때마다 다른 신경세포들의 조합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런 현상을 ‘축중’이라 한다.(68-69p)

 

 

뇌에 관한 한 본성이냐 양육이냐 같은 단순한 구분이 유혹적일 수는 있겠으나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양육이 필요한 본성’을 지녔다. 우리의 유전자가 완성된 뇌를 만들어내려면 적절한 물리적 환경과 사회적 환경, 곧 적소가 필요하다. 아이와 눈을 맞추고 말을 걸고 수면시간을 일정하게 설정해주고 체온을 유지해주는 양육자들로 채워진 적소가 필요하다.(98p)

 

 

이러한 순간에 당신의 뇌는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예측능력을 사용했고, 당신은 뭔가를 자신이 직접 했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 순간에 좀 더 자제력을 발휘했다면 행동을 바꿀 수 있었을까? 아마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행동에도 책임이 있는 것일까? 물론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책임이 당신에게 있다.

행동을 개시하는 예측들은 난데없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어렸을 때 손톱을 물어뜯지 않았다면 지금 물어뜯는 일도 없을 것이다. 친구에게 던진 후회막심한 말들을 아예 배운적이 없다면 지금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새콤달콤한 맛에 길들여지지 않았더라면 트위즐러를 그렇게 먹어치우지 않았을 것이다. 뇌는 과거 경험을 사용해 당신의 행동을 예측하고 준비한다. 마법처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오늘 당신의 뇌는 다르게 예측할 것이고 다르게 행동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세상을 다르게 경험할 것이다.

물론 과거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조금 수고를 들이면 앞으로 뇌가 예측하는 방식은 바꿀 수 있다. 약간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배울 수 있다.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고 새로운 활동을 시도해볼 수 있다. 오늘 배우는 모든 것은 내일을 다르게 예측하도록 뇌에 씨를 뿌려줄 것이다.(117-118p)

 

이 부분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흔히 습관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지어 생각해볼만 함.

 

 

연구에 따르면 모욕과 위협을 지속적으로 받은 사람은 병에 걸릴 가능성이 더 커진다. 과학자들이 아직 이런 일들의 근본적인 메커니즘을 낱낱이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분명하다.(136p)

 

 

비록 변이가 표준이고 또 우리 종에게 축복이라 할지라도, 변이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인간의 마음에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난다는 생각보다는 하나의 보편적인 인간 본성이 있다는 생각이 훨씬 더 편안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서로 종류가 다른 마음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변이를 특정한 범주로 나누어 다루려고 애쓴다. 그들은 깔끔한 작은 상자들에 이름표를 붙이고는 사람들을 분류해 넣는다.

(...)

당신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서 당신을 작은 상자들에 배정하는 성격 검사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좋은 예로 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MBTI)를 보자. MBTI는 서로 다른 성격 유형으로 분류한 작은 상자 16개에 사람들을 나누어 넣는데, 이를 파악하면 사회생활에서 성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처럼 보인다. 안타깝게도 MBTI의 과학적 타당성은 매우 의심스럽다. 이 검사를 비롯해 이와 유사한 성격 검사들은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방식으로 작동하는데, 연구에 따르면 일상생활에서의 실제 행동은 이 대답과 거의 관련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 개인적으로 나는 MBTI보다 적은 네 개의 상자만 갖고 있고 훨씬 더 엄밀한 ‘호그와트 기숙사 배정 검사’를 선호한다(참고로 나는 ‘래번클로’다).(151-152p)

 

ㅋㅋㅋㅋㅋ

 

 

인간의 뇌는 자신을 오해하고 사회적 현실을 물리적 현실로 착각해 온갖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모든 동물 종처럼 엄청나게 다양하다. 하지만 동물 왕국의 다른 부분들과 달리 우리는 이 변이들을 인종, 성별, 국적처럼 작은 상자들에 이름표를 붙여 정리해 넣는다. 이러한 이름표가 붙은 상자들은 사실상 우리가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취급한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를테면 ‘인종’이라는 개념에는 종종 피부색과 같은 신체적 특성들이 포함된다. 하지만 피부색이라는 요소는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연속체이며, 색조 한 세트와 다른 세트 사이의 경계는 한 사회의 사람들에 의해 세워지고 유지된다. 어떤 이들은 유전학에 호소해 그 경계를 정당화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하지만 피부색이 유전자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눈 색깔, 귀 크기, 발톱의 곡률 또한 마찬가지다.(178p)

 

 

ㅡ 리사 펠드먼 배럿,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 中, 더 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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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2

 

또 다른 관심 있는 역자의 에세이.

 

 

우울함을 핑계로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드라마나 보고 있는 건 언제든 빠져들고 싶은 달콤한 유혹이지만, 그 유혹을 이기고 샤워하고 일하고 청소하고 장을 보고 와서 아이를 웃으며 맞았을 때 그날 하루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생각한다. 실망스러운 여행지 숙소를 보고 “그래도 전망은 좋네”라고 말하며 활짝 웃는 것이 얼마나 멋진 능력인지 이제는 안다.

생각대로 되지 않았던 일을 곱씹고, 과거를 후회하고, 나 자신을 한심해하면서 하루를 흘려보내기가 더 쉽고, 나는 지금보다 분명히 나아질 수 있다고 믿고 뭐라도 시도해보는 것이 더 어렵다.

그럼에도 또다시 참신하고 창의적인 낭패를 안겨주는 것이 어른의 나날이기에 또다시 희망을 갖고 낙관을 유지하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까다롭고 고된 감정 노동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도 거기서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폴리애나가 되어야만 하는 순간들이 우리에겐 아주 많다.

메리 올리버는 「긴 호흡」에서 이렇게 말한다.

“젊었을 때 나는 슬픔에 매료되었다. 슬픔이 흥미로워 보였다.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 줄 에너지 같았다. 늙지는 않았다고 해도 이제 나이가 든 나는 슬픔이 싫다. 나는 슬픔이 자체의 에너지가 없이 내 에너지를 은밀히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제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예전만큼 신선하거나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슬픔이나 우울을 신비로움과 창의성의 원천으로 보지도 않는다. 애써 밝은 태도와 표정을 짓기 직전까지 우리 마음에 어떤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는지 잘 안다.

우울은 지성의 부산물이라는 대사에 무릎을 탁 쳤었다. 이제 나는 이렇게 바꾸고 싶다.

“나의 속없는 웃음은 경험의 부산물이야.”(66-67p)

 

 

우리는 나이를 차곡차곡 먹고 있고 어떤 기능은 퇴화하고 있다. 매일 집밥을 차리고 몇 시간 만에 책 한 권을 뚝딱 읽고 퇴근하고 외국어 학원에 가던 30대의 나는 될 수가 없다.

중요한 건, 그만두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 아닐까. 한 달에 한 번이건 두 달에 한 번이건, 석 달에 한 번이나 아무리 띄엄띄엄이라도 어느 날 토요일 아침엔 달리기를 하러 나가듯이 나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했던 습관을 되살리며 살아가면 잘못 사는 건 아니지 않을까.(135p)

 

 

나는 처음에는 관심을 받는 편이지만 오래 알게 되면 사람들이 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고, 나 자신에게만큼은 꽤나 객관적이라 자부하는 내가 냉철한 평가를 내렸다. 특별히 욕을 먹거나 배척을 당하지는 않지만 나를 계속 찾고 연락을 먼저 하면서 만나자는 사람도 많지는 않다.

나의 인간됨. 그저 나라는 사람이 거기까지다. 인정하자.

그렇게 내려놓으면서 딱 한 가지만 노력하기로 했다. 사람들 말을 듣자. 아주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자. 상대방이 말하도록 하자. 리액션을 잘해주자.

적어도 이건 노력으로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이었다.(166p)

 

 

말로는 고독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지금도 얼마나 말이 통할 사람, 일상을 나눌 사람을 찾아 헤매는가. 가족으로도 부족해 친구의 근황을 항상 챙기고 혼자 일하기 싫어 작업실을 열고 혼자 책을 읽지도 못해 북클럽을 만들고 글을 같이 쓰기 위해 글쓰기 클럽에 가입하고 SNS에서 나를 보여주지 못해 안달하는 주제에 말이다.

하지만 내가 여전히 외로워하고 사람에 금방 반하고 새로운 사람을 인생에 들이는 것과, 그 관계가 없으면 내가 불완전하다거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과는 다르다. 서로의 삶을 통째로 바꾸었다거나 그 사람을 만나기 전과 후의 운명이 달라졌다거나 서로로 인해 완전해졌다는 커플이나 친구 이야기를 보고 읽고 그들의 행운을 축하하지만, 나에게는 그 행운이 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임을 거의 확신하는데 전혀 서운하지 않다.

(...)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기억해주지는 않았지만, 내가 지나왔던 수많은 순간 나 자체로 완전했다는 걸 먼길을 돌아돌아 알게 되었다.(194-195p)

 

 

나와는 전혀 닮지 않은 얼굴에 담담한 성격에, 예측 불가능한 반전 유머 감각을 지닌, 나와 노래방은 가지만 퀸 영화는 같이 보기 싫어하는 아이.

너에게 엄마가 사랑하는 음악과 영화와 책을 애써 추천해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너는 앞으로 너만의 우주를 스스로 만들어갈 테니까.

그리고 가족끼리 취향이 무슨 소용일까. 나를 키운 건 부모님과 나의 공통점이나 가수나 배우에 대한 대화가 아니라 그들이 우직하고 원초적인 사랑이었음을 한참 후에야 꺠달았다. 그분들이 내가 뭘 좋아하든 내버려두었기에 나는 내가 되었다.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뭘 좋아해’가 아니라 ‘내가 널 있는 그대로 좋아해’라는 걸 우리 부모님에게서 배웠고 우리 딸에게서 또 배운다.(207p)

 

 

그 순간, 어린 시절 너그러웠던 부모님에게서도 불만을 찾아내 불평하고, 나의 약점을 몇 배나 부풀린 다음 나를 구성하는 주요 성분처럼 만들어버리고, 한두 번의 실패 후에 나 같은 인간은 살 가치도 없다고 자조하던 내가 보였다.

내 인생에 더없이 완전한 선물이 저절로 준비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이 근거 없는 욕심과 소녀적 이상주의, 내가 가진 아름다운 컬러를 보지 못하는 색맹 같은 나의 시력이 나를 가장 괴롭힌 근본적이고도 고질적인 문제가 아니었을까. 부족한 대로 사랑하고 끌어안겠다고 말하고 글을 쓰지만 그렇게 살지 못했던 시간들은 결국 내가 만들었다. 꽃이 필 수 있는 정원을 메마른 황무지로 만들어놓고 내가 왜 황무지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아이처럼 칭얼대고 있었다.(213-214p)

 

 

하지만 꼭 그렇게 약간의 수고가 필요한 일을 도모하지 않아도 된다. 앞으로 나에게 이런 저녁들이 무수히 생길 것이며,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면 보다 더 살아있다고 느끼는지, 나는 알았다.

그저 밖으로 나와서 반드시 걷자고 다짐한다.

특히 늦여름 밤이라면 걸어야 한다. 이날을 기억하기 위해 적어둔다.

(...)

어른이 되면서 한 가지 확실하게 안 건 섹스는 과대평가되었다는 사실이 아닐까. 그보다 우리는 벽면을 가득 채운 화가의 그림 앞에서, 격렬한 운동 후 샤워를 하면서, 가을에 은행잎이 보도를 카펫처럼 덮은 길을 걸으면서 온몸이 감각이 깨어나고 영혼이 정화되는 경험을 한다. 그대로 쓰고 싶지만 한국어로 황홀감, 도취감, 황홀경 등으로 번역해야 하는 ‘하이high’의 상태라고나 할까.(260-261p)

 

 

 

ㅡ 노지양, <오늘의 리듬> 中,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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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9

 

 

가차 없이 하는 말마다 비수 같이 꽂히네.

 

 

다름이 아니라 문제를 곰곰이 따지며 생각해보려는 성향 덕에, 또 아마 좋은 연습이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인간이 나이를 먹는다는 게 무얼 뜻하는지 이 글에서 밝혀보려 한다.

(...)

이 주제를 두고 벌이는 내 성찰은 이른바 노인의학과는 전혀 상관없다. 내가 다루고자 하는 물음은 나이를 먹어가는 인간이 시간을, 자신의 몸을, 사회를, 문명을, 그리고 궁극적으로 죽음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가 하는 점이다. 실증과학이 제공하는 충실한 정보, 곧 특정한 상태의 인생에 도움이 될 정보를 기대한 사람이라면, 그러니까 이 책에서 늙어감에 맞춤한 실질적인 지식을 기대한 삶이라면 이 책을 읽고 실망을 금치 못하리라. 나는 그런 정보나 지식을 제공할 수 있는 처지의 사람이 아니다.(6p)

 

 

예나 지금이나 나는 늙어가는 사람, 노인이 감당해야만 하는 비참한 운명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사회가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이런 방향으로 이뤄지는 모든 고결하고 귀중한 노력이 아마도 약간의 아픔을 덜어주기는 하겠지만, 말하자면 무해한 진통제와 같다는 의견을 여전히 고집하고 싶다. 다시 말해서 그런 노력은 늙어감이라는 비극적 불행에 있어서 어떤 근본적인 것도 바꾸거나 개선할 수 없다.(10-11p)

 

 

자신이 그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은 노인, 그래서 곧 공간으로부터 몰려나게 될 나이 먹어가는 사람에게는 많은 기만적 위로가 주어진다. 가장 크고 최고로 우롱을 일삼는 환상은 물론 종교이지만, 그 밖에도 기만적 위로는 많기만 한다.

(...)

정말 위대한 작품의 탄생이다. 그러나 이 위대한 작품은 고통의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숨을 몰아쉬는 그에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

다른 사람들이 공간을 들여다보았다. 그도 자신들과 별 다를 게 없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집은 그대로 남으리라. 이 집에서 아이가 자라 다시 아이를 낳고 대를 이어 살아가며 활동하고 작품을 남기겠지. 잿빛의 육중한 묘비가 그 삶의 흔적을 증언하리라. 장롱 위에 그 책들이 뒹굴거나, 미술관 벽에는 그림이 걸리겠지. 또는 세월의 풍파를 맞아 집은 황폐해져 폐허로 변하고 자손들은 사방팔방으로 바람처럼 흩어지리라. 책과 그림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이내 지워지고 말겠지. 파리의 공동묘지 ‘페르라셰즈’의 늘어선 영묘는 황폐하게 망가져 그 안에는 쥐들만 산다. 그 색 바랜 황금 명패에는 ‘영구 임대 묘지’라는 문구만이 남루하다. 마치 시민의 재산이 적어도 가짜 영원함을 공간에서 구현하기라도 한 것처럼. 집과 마당, 책, 그림, 묘비, 이 모든 것은 죽은 자가 살아 사랑을 누리거나 아픔에 신음하던 밤들과 마찬가지가 되리라. 그런 건 전혀 없었던 것처럼 허망하리라.(42-43p)

 

 

“저게 내 얼굴인가 싶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형상을 보며 당혹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그런 때가 많기만 했따.” 그 여자 친구가 쓴 글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증오한다. 눈위로는 마치 모자처럼 생긴 게 머리라고 걸려 있으며, 눈 아래로 보이는 넙데데한 얼굴은 무슨 가방인 것만 같다. 입 주변에는 주름살이 자글자글해 서글퍼만 보인다. 이제는 낙엽으로 뒤덮인 것만 같은 머리를 보며 한숨짓지만 그 낙엽이 떨어지지는 않으리라.”

(...)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불평이나 탄식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노화의 실상이 아닐까.

(...)

여기에는 A가 거울을 통해서만 아니라 일상에서 만져보기도 하는, 그래서 만져보는 손이 기괴하게도 느낌의 대상이 되는, 곧 내가 ‘나 아닌 나’가 되는 깊은 충격이 노화의 진실이 아닐까. 젊은 시절에는 당연하다고만 여겼던 게 돌연 낯설기만 한 것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소름끼침, 우리 인간의 근본 정서 가운데 일부인 소름끼침은 거울 앞에서 물러나 평소 일상에 뒤덮여 하루 일과를 감당하느라 잊힐 따름이다. 그러나 이 얇디얇은 일상의 층은 늙어가는 인간이 자신의 노화 흔적을 뼈저리게 느끼며 거울 앞에 머무르는 한, 여지없이 깨어진다. 그럼 돌연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라는 것, 곧 ‘나 아닌 나’가 평소 익숙한 나를 문제 삼으면서 충격과 경악이 고개를 든다.(60-61p)

 

 

“까마득하게 여겨지는 예전에 나는 내 외모를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고 믿었다.” 여자 친구가 쓴 글이다. “이렇게 해서 배불리 먹고 건강한 사람은 위장을 잊는 거겠지. 내 얼굴을 그어떤 불쾌감도 없이 바라볼 수 있는 한, 나는 내 얼굴을 잊고 지낸다. 그게 당연한 일이다.(65-66p)

 

 

노화라는 것은 그 자체로만 보면 정상이 아니라 일종의 병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어떤 치유의 희망도 담보해주지 않는 그런 고통이다. 우리가 늙어가는 인간으로서 병에 걸렸다가 다시 의학이 말하는 의미에서 ‘건강’해질 수는 있다. 그렇지만 다시금 건강을 회복했다 할지라도 유기적인 생명이 나선을 그리며 기능을 상실하는 모습에서 더 낮은 점으로 떨어질 뿐이다. 그러니까 예전처럼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의사의 위로가 아무리 만족스럽게 들릴지라도 젊은 시절의 건강은 절대 회복되지 않는다. 오늘 우리는 어제보다 덜 건강해졌으며, 내일의 건강 상태보다는 한 자락 더 낫다.

(...)

그런데 이제 다음과 같은 점을 유념해보자. 건강 일반이라고 하는 것은 건강을 잃었을 때에만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게 무슨 대단한 진리는 아니다. 자신이 젊게 느껴진다고 주장은 하지만 실제로 절대 청년일 수 없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기분이 좋아“라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건강이 좋은 게 아니다. 좋든 나쁘든 ‘느낌’을 가진다는 말은 그 자체가 별로 신뢰성 있지 않다. 실제로 힘이 넘쳐나며 온전한 건강을 누리는 사람은 ‘느낌’이라는 걸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완전한 건강을 자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머무르지 않는다. 독일의 위대한 의사나 인류학자의 책에서 읽어볼 수 있듯, 건강한 사람은 세상의 일과 사건에 충실할 따름이다. 우리가 자의적으로 덧붙인다면 건강한 사람은 자기 바깥에 머무른다. 그에게 속한 공간에, 떼려야 뗄 수 없이 자아와 맞물린 세계에 나아가는 게 건강한 사람의 태도다.(69-70p)

 

 

ㅡ 장 아메리, <늙어감에 대하여> 中,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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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

 

 

 

하여간 그날 웃긴 얘기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슬프고, 이상하고, 진지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들 자신의 얘기였다. 그제야 무대에 선 사람이 누구인지 보였다. 가벼운 농담은 우수수 부서졌다. 낯가림을 감추는 농담,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농담 따위는 절대 그곳에서 꺼낼 수 없었다. 마주 보고 했으면 당황스럽거나 눈물이 났을 이야기가 일어나서 했다는 이유로 너무 웃긴 얘기가 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모두가 한 가지 이야기를 위해 몸과 마음과 시간을 내어주고 있었다. 진짜를 꺼내 들어야 했다. 우리가 웃으면 꼭 무언가가 승화되는 것 같았다. 그 이야기를 보호해주는 어떤 기운이 생기는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놀라고 있었다. 사실 모두가 진짜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초의 공연이 시작되었고, 최초의 관객이 되고 있었다. 나는 팔짱을 풀었다. 바로 앉아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코미디가 시작된 것이다.(55-56p)

 

 

 

ㅡ 양다솔,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中,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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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6

 

 

섹스토이, 배양육, 인공자궁과 체외발생, 자살기계. 듣기만 해도 자극적이고 궁금한 내용들이고 누구나 한 번쯤은 머릿속에서 떠올려 봤음직한 주제들이다. 다양한 입장의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저자의 입장은 이미 정해져 있고 각각의 인터뷰후에도 자신의 생각을 크게 바꾸거나 혹은 바뀌지 않기 때문에 저자의 견해를 많이 담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프레데릭 와이즈먼의 다큐멘터리처럼 자신이 알리고 싶은 내용에 대한 각자의 입장을 그저 보여주는 방식이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해봤는데 책으로는 그런 방식으로 보여주기가 힘들겠구나.  

 

 

 

“제가 걱정하는 건 하모니의 권리가 아니에요. 제가 정말로 걱정하는 건, 하모니의 주인이 완전히 이기적인 관계에 익숙해진다면 어떻게 되냐는 거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왜곡되지 않을까요? 하모니는 꽤 사실적이잖아요. 현실 세계로 나갔을 때 그저 자기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거죠.”

매트는 이미 여성의 대상화와 매춘, 로봇의 권리 문제에 관한 필연적인 질문에 답해본 경험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질문에는 당황했다. 매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게 흔하고 정상적인 문화권도 있어요. 정상적인 관계에서는 언제나 힘의 교환이 일어나요. 한 사람이 관계에서 그 위치에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떠나야죠.”

“하지만 로봇은 떠날 수 없잖아요.”

“맞아요. 하지만 하모니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예요.”

매트의 바람과 달리 양쪽 다일 수는 없다. 살아 있는 듯한 이상적인 여자친구 대용품, 사회적으로 고립된 남자들과 감정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매트 자신이 “장난감이 아니다”라고 설명한 존재) 여성의 대용품을 만들거나, 아니면 섹스할 수 있는 가전제품을 만들거나 둘 중 하나다.(38-39p)

 

 

트루컴패니언의 목적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를 제공하는 거예요. 거기에 부정적일 게 어디 있겠어요? 진짜 말 그대로 그리고 비유적으로, 옆에서 손을 잡아주는 로봇을 갖는 데 무슨 나쁜 점이 있을까요?

나쁜 점은 당연히 인간이 주는 위안을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덩어리로 대체하는 데서 오는 감정적인 공허함일 것이다.(54p)

 

 

하지만 언제나 꿈꿔왔던 인형과 정말로 관계를 맺고 싶다면, 말을 쉽게 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비극적인 면이 있는데, 그건 데이브캣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시리든 알렉사든 하모니든, 인공지능은 모난 돌을 매끄럽게 깎아놓을 것이다. 우리는 인공지능이 이해하도록 지역별 억양과 화려한 언어생활을 포기하고, 기본에 더 가깝고 재미로부터는 먼 인간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로봇을 마음대로 바꿀 힘이 있듯이 로봇도 우리를 바꾸어놓을 것이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59p)

 

 

“인형과의 관계가 사람과의 관계보다 쉬운 게 당신이 더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인가요?”

데이브캣은 잠시 침묵했다. “솔직하게요? 네, 저는 절대 거짓말을 듣거나 속는 상황에 처하고 싶지 않아요. 로맨틱한 상황이든 그렇지 않은 상황이든 그런 적이 많았거든요. 제 인공 배우자를 85-95% 정도 통제하는 상황이 더 좋아요.” 데이브캣이 시도레를 바라보았다. “연인은 누구라도 상대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상대가 바람을 피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해요. 어느 정도는 통제광인 거죠. 아마도 저는 그냥 남보다 좀 더 드러내놓고 그게 제 성격의 일부라고 말하는 것뿐일 거예요. 대놓고 지뢰를 밟기 싫다고 말하는 거예요. 저는 지뢰밭에 절대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63-64p)

 

 

내 머릿속은 여성의 몸을 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얻어맞는 에바로 가득 차 있었다.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는 대신 우리는 그 문제를 상쇄하기 위해 뭔가를 발명한다.(81p)

 

 

순전히 주인을 즐겁게 할 목적으로 존재하는 파트너, 친척이나 생리 주기나 화장실 습관이나 감정의 응어리나 독자적인 뜻과 같은 걸림돌 없이 언제든 사용 가능한 파트너를 소유하는 게 가능해진다면, 그리고 어느 한쪽만의 즐거움만 중요한 상황에서 타협할 필요 없이 성관계를 갖는 게 가능해진다면, 다른 삶과 상호관계를 맺는 우리의 능력은 분명히 줄어들 것이다. 공감이 사회 소통에 필요하지 않은 때가 온다면, 공감은 우리가 연습해야만 하는 기술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조금 덜 인간적이 될지도 모른다.(113-114p)

 

 

1978년 올덤에서 최초의 체외수정으로 루이스 브라운이 태어났다. 그와 함께 아기를 낳는 여러 가지 가능성도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임신이 성관계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자궁 밖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한 여성이 다른 여성의 아이를 배는 게 가능해졌다는 뜻이다.

(...)

국제 대리모 출산에는 특유의 윤리적 문제가 잔뜩 엮여 있다. 아웃소싱 노동이라면 무엇이든 그렇듯이 시장과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건 가장 가난하고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다. 인도에서는 영국인의 대리모 관광이 성장하는 사업이었다.

(...)

지금은 저렴한 체외수정 대리모 출산을 위해 우크라이나를 찾는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대리모가 유산하거나 의학적으로 안전한 수준 이상으로 제왕절개 수술을 받아야 할 경우 돈을 받지 못하고 버림 받는 일이 드물지 않다. 임신 성공 확률을 가능한 한 높이기 위해 배아를 여러 개씩 이식하는 데, 대리모가 세쌍둥이나 네쌍둥이에 어떻게 대처할지에 관해서도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아무리 세계 곳곳의 여러 기꺼워하는 대리모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대신 낳아 아이를 절실하게 원하는 사람에게 부모가 되는 선물을 안겨줄 수 있다고 주장해도 대리모 출산은 엄연히 여성을 그릇이나 인큐베이터로 사용하는 행위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아이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라고 종용한다. 대리모 출산은 대리모가 스스로 착취당한다고 생각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여성의 임신 능력을 착취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231-234p)

 

 

부분적인 체외 발생은 향후 몇 년 안에 가능해질 전망이지만, 수정에서 탄생에 이르는 완전한 체외 발생은 현실적으로 아직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수정 이후 몇 주 동안 자궁 밖에서 배아의 생명을 연장하는 기술이 점점 더 좋아지면서, 점점 더 미성숙한 아기의 생명을 유지하는 방법을 알게 되면서, 언젠가 이 두 지점이 만나는 날이 올 것이다. 우리는 매년 그 순간에 점점 더 가까워진다.

(...)

과학자들은 체외수정으로 만든 인간 배아의 생명을 14일 동안만 유지할 수 있다. 15일째에 생기는 ‘원시선조(향후 뇌와 척수가 될 부분이 생기기 시작함을 알려주는 세포의 구조)’가 나타나기 전에 연구를 중단해야 한다는 윤리 규정 때문이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연구진도 이 14일 규정 때문에 배아를 죽여야 했다. 실험을 계속할 수 있었다면, 아마 한참 더 생존했을 것이다. 인체 밖에서 배아의 발달 과정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면 과학적인 잠재성이 엄청나기 때문에 2016년 이후 이 제한을 21이나 심지어는 28일로 늘려야 하는지를 놓고 광범위한 논쟁이 벌어졌다. 14일이라는 데드라인은 고작 17개국만이 공식적으로 준수하는 자발적인 윤리 규정이다. 북한이나 러시아 과학자들이 사람의 배아를 기르고 싶은 만큼 기르는 일을 막을 방법은 없다.(259-260p)

 

 

레슬리는 치사량을 마시는 실비아의 손을 잡았다. 레슬리의 묘사에 따르면, 넴부탈은 빠르고 존엄한 죽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비아의 마지막 순간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실비아는 구토했고, 눈과 코와 입에서는 계속 액체가 너무 많이 흘러나와 레슬리는 죽기에 충분한 양을 먹은 게 아닌지 걱정했다. “얼마 동안 실비아를 붙잡았는지 모르겠어요.” 레슬리가 나직하게 말했다. “실비아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맥박을 잡아보려고 했는데, 제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서 제가 느끼는 게 누구의 맥박인지 알 수 없었어요.”(335-336p)

 

 

사실은 그렇지 않다. 괴상망측하다. 필립의 꿈과 필립을 이곳으로 오게 한 발명품에 돈을 댄 사람들은 즐겁고 품위 있게 다음 세상으로 떠나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다. 그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절망과 두려움, 슬픔, 공포,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다 거기서 빠져나가게 도와줄 사람을 찾는 것이다. 사르코의 공개는 그런 사람을 도울 실현 가능한 방법이라기보다는 탐닉에 훨씬 가깝다는, 필립의 자아를 추켜세우기 위한 기념비라는 느낌이 들었다.(369p)

 

 

ㅡ 제니 클리먼, <AI 시대, 본능의 미래> 中, 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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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9

 

 

책 분량의 절반 정도는 각종 매체에 기고한 이미 읽은 글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새로운 글이었다. 아직까지는 '아무튼, 술'이 제일 좋다.

 

 

 

이런 이유들로 나는 언젠가부터 가식을 응원하게 되었다. 물론 그 가식에 타인에게 나쁜 짓을 하려는 악의적인 의도가 없는 한에서. 가식에는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어보고자 하는 분투가 담겨 있다. ‘좋은 사람’을 목표로 삼고 좋은 사람인 척 흉내 내며 좋은 사람에 이르고자 하지만 아직은 완전치 못해서 ‘가식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누군가의 부단한 노력의 과정. 그러니까 내 앞에서 저 사람이 떨고 있는 저 가식은, 아직은 도달하지 못한 저 사람의 미래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 사람이 가진, 저기서 더 앞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누군가가 “넌 가식적이야”라는 말로 섣불리 가로막을까 봐 지레 초조할 때도 있다. 실제로, 특히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이들 중에 “내가 너무 가식적으로 느껴져서 자기혐오가 생긴다”라고 고민 상담을 해오는 경우가 많아서이다.

(...)

혹시 나 자신이 너무 가식적으로 느껴져서 견디기 힘든 날이 있는가? 누군가 나에게 가식적이라고 비난해서 모멸감을 느낀 날이 있는가? 괜찮다. 정말 괜찮다. 아직은 내가 부족해서 눈 밝은 내 자아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내 ‘가식의 상태’를 들키고 말았지만, 나는 지금 가식의 상태를 통과하며 선한 곳을 향해 잘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보다 최선을 다해 가식을 부리는 사람이 그곳에 닿을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다. ‘척’한다는 것에는 어쩔 수 없이 떳떳하지 못하고 다소 찜찜한 구석도 있지만, 그런 척들이 척척 모여 결국 원하는대로의 내가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가식은 가장 속된 방식으로 품어보는 선한 꿈인 것 같다.(62-64p)

 

 

이런 단어들은 유독 강한 반발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써온 표현을 지적받으면 아무렇지 않았던 과거가 무안하고 아무래져야 하는 미래가 번거로워 반발심이 들기 마련인데, ‘벙어리장갑’처럼 이미 고유한 명사가 되어버린 친근한 단어를 놔두고 막 지어낸 듯한 어색한 단어를 가져다 쓰는 건 유난하다고 느껴서 더욱 그런 것 같다. 하지만 그 유난하다는 느낌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벙어리’라는 단어를 쓰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사람들에게 계속 상기 시켜준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일 것이다. 이외에도 장애인 비하가 들어가 있는 표현들, 이를테면 ‘꿀 먹은 벙어리’‘눈뜬 장님’‘눈먼 돈’‘앉은뱅이책상’‘절름발이 행정’ 같은 말도 역시 쓰지 않는다.

최근들어서 안 쓰려고 노력하는 말은 종(種)차별적인 표현들이다.

(...)

의식적인 노력을 다한다 하더라도 글은 모든 상황과 입장을 전부 담지는 못한다. 어느 한곳에서는 반드시 누수가 일어나 어떤 존재들은 빠져나가고 배제되고 소외되기 마련이다. 그 안에서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표현’을 계속 고민하고 다듬는 일이다.(124-126p)

 

 

거기엔 석 달 전 점심시간에 관해 적혀 있었다. 그날 얼마나 반가웠는지, 또 얼마나 기뻤는지. 올해 들어 가장 즐거웠던 시간이었다며 M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 후로 어쩐지 점심시간마다 너를 계속 기다리게 됐어. 혹시 또 안 오나 해서.”

다시 읽어도 숨이 멎을 듯해서 바닥에 잠시 주저앉았다. 펑펑 울었다. 편지의 나머지 부분을 읽으면서도 문득문득 뒷문을 쳐다봤을 M이 자꾸만 상상돼서, 그때마다 실망하는 M의 표정과 아무렇지 않은 척 실망을 추스르며 맞곤 했을 M의 오후가 자꾸만 생각나서, 그날처럼 크게 터져 나올 일이 더 많았다면 좋았을 M의 끼룩끼룩대는 웃음소리가 자꾸 떠올라서 가슴이 미어졌다. 그리고 후회했다. 그 후로도 수백 번은 더 하게 될 후회였다. 몇 번 더 갈걸, 더 자주 갈걸 하는 후회는 아니었다. 가지 말걸, 그날 가지 말걸. 그냥 지나갈걸. 그럴걸.

(...)

그런 내 성향과 행동 패턴을 고려했을 때 내가 M에게 자주 가야겠다고 먼저 알아서 생각했을 확률은 전혀 없었고, 생각했다고 한들 어차피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가지 말았어야 했다. 책임지지 못할 일은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사실 나는 그게 ‘시작’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백지에 별생각 없이 점 하나를 찍고 말 때, 누군가는 그 점에서부터 시작하는 긴 선을 그리려 한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알았어야 했다.

(...)

관심이란 달짝지근한 음료수 같아서 한 모금 마시면 없던 갈증도 생긴다는 것을, 함께 마실 충분한 물이 없다면 건네지도 마시지도 않는 편이 좋을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한다. 순간의 기분으로 문 너머 외로운 누군가에게 다가가려다가도, 가장 따뜻한 방식으로 결국에는 가장 차가웠던 그때의 내가 떠올라 발을 멈춘다. 끝까지 내 밀 손이 아닐 것 같으면 이내 거둔다. 항상성이 없는 섣부른 호의가 만들어내는 깨지기 쉬운 것들이 두렵다. 그래서 늘 머뭇댄다. ‘그럼에도’발을 디뎌야 할 때와 ‘역시’디디지 말아야 할 때 사이에서. 이 사이 어딘가에서 잘못 디딘 발자국들 사이에서.(134-136p)

 

 

“역시 넌 오우삼 같아. 뭐든 좀 지나쳐.”(164p)

 

 

ㅡ 김혼비, <다정소감> 中, 안온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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