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22

 

 

우리 자매의 부모는 여전히 불행하고 불운해 당신들의 감정과 삶에 가족 구성원이 모두 휩쓸리기를 바라고 있으며 마땅히 그렇게 되는 것을 화목이고 친밀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나는 그런 시도들에 동의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친밀한 관계가 아니다. 내가 내 부모와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씁쓸하거나 놀랍다는 듯한 얼굴로 그래도 부모인데 가족인데, 하고 말한다.

(...)

그래도 부모인데 가족인데.

이 말은 그래서 아무런 입장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의견도 생각도 마음도 아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이 입장이고 의견이고 생각이고 마음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부모이고 가족’이라는 말은 그중 어느 것도 아닐 뿐 아니라 누군가를 죽음으로 등 떠밀 수 있는, 상투적이라서 해로운 말이다. 나는 뒤늦게 발견되곤 하는 가정폭력 사망의 첫 번째 원인으로 어른들의 그런 상투성을 꼽는다. 자기가 가진 것만을 헤아리는 그 게으른 태도들 때문에, 어린이가 고통 속으로 돌아가고 거기 방치된다.(52-55p)

 

 

내 최초의 감정이 하필 공포와 혐오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때가 있다. 당시 파도와 상상된 파도의 차이를 생각하면 내게 공포와 혐오란 상상된 것에 가깝다. 파도라는 생물을 상상하며 바다를 응시하던 나는 내 말랑한 몸을 보호해줄 껍데기랄 것도 없고 생존에 필요한 정보도 기술도 갖추지 못한 어린이였으므로 그때 내게는 공포와 혐오가 가장 유용하고도 쉬웠을 것이다. 파도라는 낯선 것이 내게 다가올까봐 무섭고 그것이 내게 달라붙을까봐 싫고. 공포와 혐오는 애쓰는 상태가 아니다. 그 중에 혐오는 특히 그래서, 그건 지금 내게도 쉽다. 그런 감정이 내게 문득 쉬울 때, 뭔가가 누군가가 즉시 싫고 밉고 무서울 때 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로 상상된 것인지, 혐오는 아닌지를 생각한다.(68-69p)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너무 정치적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런데 나는 누가 어떤 이야기를 굳이 ‘너무 정치적’이라고 말하면 그저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말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그건 너무 정치적,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을 대개 이런 고백으로 듣는다.

나는 그 일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습니까.(133-134p)

 

 

 

ㅡ 황정은, <일기>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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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7/31

 

이 시리즈 중 가장 별로였다.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이 기획에 섭외 되었는지 의문이다. 나름 유명한 사람인가?

모인 글들이 통일성도 없고 중간에 뜬금없이 밴드 얘기하는 것은 웃기지도 않았다. 책 제목은 ‘그림자’라고 했어야 하지 않을까. 농담 이야기는 거의 없다. 농담을 기대한 자리에서 우울하고 감상적인 얘기만 듣다 나온 기분이다.

 

 

 

 

직업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좋은 선생이 되기엔 아무래도 부족한 게 많다. 그럼 어떤 일이 나한테 맞을지를 이어서 생각하게 되는데, 사람 적게 만나고 말 안해도 되고 몸을 움직이는 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바다를 좋아하니까 부둣가나 항구에서 일하며 살아도 좋겠다 싶었다. 어찌됐건 지금 하는 일과 많이 다른 일이라는 건 분명했다. 적성과는 별개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좀 더 잘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잘 하고 싶은 마음. 이력이나 경력을 쌓고 싶다는 마음과는 분명히 다른,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보다 본질적인 부분에서 깊이와 중심을 갖고 싶다는 마음.(61p)

 

 

입 밖으로 꺼낸 말보다 속으로 감춘 말이 언제나 더 많다. 늘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보다는 무슨 말을 하지 않았는지가 항상 더 중요하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해지는 수많은 의미들.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저 말들이 교묘하게 피해가고 있는 어떤 지점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 말의 빈자리, 도넛의 구멍을 찾는 것. 곳곳에 감춰져 있는 말의 여백에 따라 우리가 뱉은 말은 진실이 되기도, 진실처럼 보이려 애쓰는 거짓이 되기도, 허울에 감춰진 욕망이 되기도 한다.(77p)

 

 

 

ㅡ 김민영, <농담과 그림자> 中, 시간의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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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7/25

 

 

내가 지닌 결함으로 인해 도리어 타인의 빈틈을 한층 세심하게 알아차리고 보듬을 수 있을 거라고, 그리하여 싱그러운 젊음의 틈새에 숨어든 몇 안 되는 그늘진 얼굴들을 누구보다 먼저 찾아내어 다독일 거라고 항상 생각해왔다. 그날 수업에서의 돌발 상황은, 저 다짐이 어디까지나 적당하고 안전한 사회적 테두리 안에서만 가능했음을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테두리를 부수고 들어온 한 학생의 거센 말과 돌출 행동에 나는 몹시 당황했고, 이내 화가 났으며, 종국에는 강의실 들어가기가 두려웠다. 그게 빈틈임을 알아차리고도 보듬어주지 못했다. 그늘을 보고서도 다독일 마음을 더는 갖기가 어려웠다.(42p)

 

 

그러니 지속되는 관계 속에서 때론 상대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대신, 당신의 길을 그대로 걸으며 시간의 선물에 신뢰를 가져보면 어떨까 한다.(86p)

 

 

잘 알지 못하는 대상을 향한 즉각적인 연민은 너무나 얕아서 저렇듯 세 번을 넘기지 못한다. 그럼에도 몇 해 지난 지금 드는 생각은, 타인을 위해 기도했던 그 아침의 몇 십 분이 더해진 세상이 그것마저 없는 세상보다는 따스하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얕음을 부끄러워하되 마음 자체에 대해서는 냉소하지 않으려 한다. 성자가 아닌 내가 ‘고아와 과부의 얼굴로 온 타자’에게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은 참으로 작고 비루할 테지만 매번 조금씩 더디게 지치기를. 다음에는 세 번째 아닌 네 번째에, 그다음엔 다섯 번째에. 그렇게 생을 통해 “연민은 더디게 지친다”는 명제를 만들어가고 싶다.(96p)

 

 

지도교수가 아무리 자상해도 부모일 수 없고 선배들이 아무리 다정해도 친언니 친오빠는 아니니, 그 애착은 필경 너를 실망시키고 공허하게 만들 거라고 했다.

(...)

그 애착은 과연 찰나적이었지만, 나를 실망시키거나 공허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관계의 밀도가 영원히 동일하지 않다고 해서 기억들이 휘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즐거움으로, 고마움은 고마움으로 영원히 남는다.(167p)

 

 

 

ㅡ 이소영, <별 것 아닌 선의> 中,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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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7/24

 

 

 

처음 글을 읽어가며 느낀 것은 특정 사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까지 집요하고 진지하게 서술할 일인가라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아래의 발췌는 보물찾기를 쓰레기 줍기로 착각한 것에 대한 작가의 서술이다.

 

‘나는 착한 어린이가 아니라 구제 불능으로 주의력이 결핍된 바보였다. 나는 단편적인 정보들에서 사건의 정합적 이행을 유추해내는 유능한 탐정이 아니라 상투적인 도덕 규범에 얽매여 판단의 오류를 저지르는 편협한 꽁생원이었다. 나는 예리한 관찰자가 아니라 세계의 접힌 귀퉁이들을 펼쳐 읽지 못하는 문맹자였다. 나는 보물 탐험가가 아니라 넝마주이였다. 나는 최초의 말을 놓쳤다. 나는 타인의 말을 알아듣지 않음으로써 세계를 잘못 파악했다. 나는 잘못 축조한 세계 안에서 그릇된 자아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놓친 말이 진리처럼 되돌아온 순간, 모든 허상이 깨지고 무너지고 벗겨졌다.

외부 사건의 연속적 흐름, 사건 생산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때 수행해야 하는 규칙들, 보다 근원적으로 그 사건을 정초한 타자의 언어, 이 세 가지를 인지하지 않음으로써 게임의 장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킨 잘못에 기인하여 사후적 몽타주의 간헐만 가능한 이날의 기억은 하나의 장면으로 집약된다.’(47-48p)

 

....... 뭐 이런 식이다. 좀 놀리고 싶기도 했는데 계속 읽으니 작가가 정말로 자신의 말과 글에 진심이라 그럴 마음은 사라졌다. 읽는 동안 한국어 어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철회라는 단어를 한 번쯤 꼭 써보고 싶었으니까. 우아하고도 애상적이다. 언술의 내용은 취소하되 화행의 기억은 보존한다. 그러므로 철회는 오류를 자인하는 가장 예의 바르고 세련된 방식이 아닐까.(151p)

 

 

살아오면서 그와 비슷한 사람들을 의외로 많이 마주쳤다.

논변 혐오에서 논변의 대상인 지식 혐오로, 지식 혐오에서 지식의 도구인 언어 혐오로, 그리고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 혐오로, 점차 자신의 사유와 감정을 변질시키는 사람들. 타인의 말을 비판하면서 정확한 논리와 올바른 어법을 촉구하지만, 가만히 통찰하여 들어보면,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수사적 술책 속에 언어, 지식, 인간을 향한 강박적 증오와 분노를 욱여 담아 표출한 뿐인 사람들.

너무나 많은 예가 있다. 타인의 사소한 맞춤법 실수나 비문을 지적할 때, 조용히 친절하게 언급하는 대신 굳이 떠벌려 조롱함으로써 언어의 품격 자체를 훼손한다거나. 논쟁 중 말꼬리를 잡는 데 급급하여 공동의 사유가 더 넓고 생산적인 언어의 장으로 나아가는 것을 기어코 방해한다거나. 한줌의 명제로 환원되는 논리적 엄밀성을 구실로 언어의 우발적이고 시적인 운동성을 소거한다거나. 자기에게만 소중한 허상의 규칙, 관습, 어법, 문체를 따르지 않는 글쓰기는 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논문도 아닌 양 비하하거나. 질문하는 까닭은 지식을 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대답으로 주어지는 타인의 언어를 더럽히고 제 것처럼 타락시키려고. 사소한 낱말, 표현, 어법에 과민하게 집착하여 반대하기. 그리고 집요하게 지적하고 교정하기. 가독성을 내세워 문학적 목소리의 음역 연습을 저지하고 문장의 분방한 기운을 꺾기. 일본어식 한자, 외래어, 소위 번역투 문장 등 단일 국가어의 순수성을 오염시킨다고 여겨지는 말들의 결벽증적 청소. 세계, 현실, 사적인 삶에서 불의와 부조리에 대항하는 싸움에 지쳐, 말이 무슨 소용이야, 말해 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그것을 불완전하게 지시하고 표상할 수밖에 없는 언어에 악감정을 투사한다거나, 그럼으로써 여전히 힘껏 싸우는 사람들에게 열패감을 전염시키기.(192-193p)

 

 

무심히 눈길을 준 기사 제목은 「이유식 만드는 법」. 날짜는 1973년 6월. 이때의 고요한 감동을 나는 너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까. 내가 아직 세상에 있지 않았을 때 나를 기다린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의 상상 세계에 나는 이미 한참 전에 도래해 있다. 남은 달들을 무사히 채우고 나와, 젖도 떼고, 벌써 사람의 밥을 먹으려 한다. 이 사람이 이렇게 지을 밥을 먹기 위해서라도, 나는 있지 않으면 안 되었구나. 미래의 상상은 사랑의 한 형식임을, 너의 생이 저 앞 멀리 지속되리라는 기원과 확신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가장 큰 선물임을, 나는 배웠다.(228-229p)

 

 

 

ㅡ 윤경희, <분더카머> 中,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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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7/19

 

 

 

 

병식은 단순히 ‘나는 병이 있습니다.’하고 인정하는 것과 다르다. 병식은 병을 인정하고, 이 병을 관리하는 패턴을 만들며, 병적상태에서 자신의 행위가 자신 또는 타인에게 가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나는 병이 있다.’라고 생각하기만 하는 ‘병식 없는’환자 A와, 병식이 있는 환자 B는 똑같이 조증이 와도 그 사고와 행동이 다를 것이다.

예를 들면 A에게 조증이 왔다. A에게도 자신의 상태에 대한 통찰이 있기 때문에 조증 상태가 점점 심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A는 여러 가지 딴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다음 주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조증을 밝혀야 하나? 2주 후에 친구들과 모임이 있는데 그때까지 가만 있다가 ‘재미 좀 본’다음에 하이텐션으로 놀고 나서 그때 의사에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조증은 규칙적인 속도로 역을 향해 들어오는 기차가 아니라 살얼음에 미끄러져 마구 회전하며 주위의 모든 것을 들이받는 자동차에 가깝다는 것이다. 예측불가한 그 진행 속도에 그대로 올라타버려 그는 친구들과의 모임 전에 이미 사고를 치거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불쾌한 일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 인식한 즉시 빠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증상이 악화된다는 것을 알고, 조증이 아무리 발버둥치며 달콤한 말을 해도 귀를 막고 자신을 병원에 끌고 가는 것. 후일을 대비하여 미리 조증의 퇴로를 차단하는 이 행동이 병식 있는 병자의 것이며 여러 가지 불상사로부터 병자를 지킨다.(40-41p)

 

 

커밍아웃에서 내가 늘 유념하는 방법론이 있다. 아무리 커밍아웃을 해도 그것은 일회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리고 단발로 끝난다면 상대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커밍아웃은 한 사람이 퀴어로 ‘데뷔’하고 박수받으면 끝나는 일보다는 오히려 끝없고 어쩌면 고될지도 모르는 노정의 시작이다.(44p)

 

 

주변 사람들은 한 가지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요즘 살이 쪘다는 둥, 우울증 환자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는 것. 하지;만 이 작은 사실을 말하지 않기란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웃음)

우울증으로 이미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나는 너랑 관계를 지속하고 싶지 않다.”라는 말과 다름없습니다.(62p)

 

 

우울증은 단절의 병입니다. 내가 오늘 우울증에 맞서 씻고, 먹고, 외출하고, 직장에 나가거나 사회적으로 괜찮은 인간을 연출하고 만족스럽게 잠자리에 들더라도 다음 날엔 끔찍한 기분으로 눈을 뜰 수도 있습니다. 지금 조금 괜찮지만 언제라도 이 길에서 추락할 것만 같습니다. 무엇이든 이어지리라는 보장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나빠질 것이라는 확신만 있습니다. 이것이 우울증의 가장 지긋지긋한 점입니다. 확실한 것은 무가치함, 쓸모없음, 무기력, 무능력, 자신의 추한 모습과 기분, 감정, 정동의 둔마가 또다시 찾아올 거라는 사실입니다. 우울증 환자들에게는 이것이야말로 끈덕지게 달라붙어 아무리 씻어도 씻어도 벗겨지지 않는 진실입니다.

우울증 환자들은 자기 내면에서 갑자기 긍정적인 무언가가 솟아날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의 기본값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감각하지 못하고, 기력이 없고, 힘이 없고, 삶을 구성하는 기초적인 행위조차 어려운 상태이므로. 우울증 환자들은 자신을 과소평가합니다. 많은 경우 스스로 쓸모없고 능력도 없고 타인에게 어떤 긍정적인 인상도 영향도 불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더 심각한 경우에는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가치한 존재이기 때문에 길가의 개미보다 가치가 없다고 진지하게 믿습니다.(67-68p)

 

 

일단 항우울제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신비의 물질이 아니다. 약물의 기전은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 뇌의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에 가까워서, 많이 먹는다고 그만큼 기분이 좋아지는 원리가 아니다.

(...)

많은 약들이 먹으면 먹을수록 효과가 많이 도는 방식으로 이뤄져 있지 않다. 그것은 착각이다. 알코올과 결합한 약물 남용, 자몽주스와 결합한 플루옥세틴 남용 등은 (일시적) 기억과 기억력 일부를 잃기 딱 좋은 결합체다.(152-154p)

 

 

우리의 목표는 ‘남들처럼’움직이고 비장애인의 습속을 모방함으로써 견뎌내는 것이 아니다. 이 실험과정은 자신만 알 것이고, 자기만이 이 재활의 고충을 알 것이다. 그래서 우울증 환자는 몇 배로 노력하는 데에 어려움과 억울함을 느끼기 쉽다. 남들이 쉬는 걸 당신은 쉬어줘야 할 것이며, 남들이 먹는 걸 당신은 먹어줘야 할 것이고 남들이 잠드는 걸 당신은 잠들려고 노력을 해야 이룰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타인과 비교하면 박탈감만 심해질 뿐이다. 링에 올라 싸우는 둘은 당신과 당신의 병이지 남들이 아니다. 타인과 겨루는 것은 기나긴 재활 실험 후의 일이다. 그러나 당신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어떤 시점에는 더 나빠질 수도 있고, 어떤 측면에서는 더욱 우수해질 수도 있다. 당신의 지금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변할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180p)

 

 

마지막으로 자살을 기도한 뒤,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을까? 모든 것은 정상으로 돌아왔을까?

(...)

그렇지 않다. 나는 자살을 기도한 ‘그날’ 앞으로 보낼 수 있을 많은 시간을 지불하고 일정 부분을 포기했다. 내가 버린 그 ‘나’는 내 인생에서 계속 맴돌 것이다. 그날 그 시간에서 멈춰서 나의 일부는 그 시간에서 산다. 그 생각을 종종 한다. 자주 하는 것도 아니고 의식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지만 사고의 회로를 빙빙 거치다 보면 자살을 시도한 나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미안해하지 않는다.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합리적이고 타당한 선택이었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그렇게 드러나는 복잡한 심경들은 필연적으로 ‘그날’이후로 흘러가고 있는 내 시간대로 스밀 것이다. 나이와 성별과 이름이 적힌 팔찌를 차고 오래 깨어나지 않던 나는 링거 줄이 줄줄 매달려 있던 병상에서 뒤척이며 일어나서, 간호사도, 보호자도, 병동의 잠금장치가 걸린 유리문도, 경비도 아무도 몰래 병원 밖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아, 이대로 도망가버릴까?’ 했지만,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친구들에게 자살 얘기를 했지만 마치 농담거리인 양 밝고 산뜻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내가 살아온 얼마간의 인생을 죽음을 택한 내게 쥐어주고 그냥 떠났다. 그리고 내가 잃은 것은 지나온 삶이 아니라 앞으로의 시간이라는 것을 늦게 알았다. ‘그날’ 내가 그에게 건넨 부피만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망실됐다. 이것은 상상된 두려움이 아니다.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이 제거하고 싶은 대상은 많을 거다. 자기 자신부터 시작해 특정 인간, 어떤 사실이나 기억 등. 그러나 결국 지불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살아남았어도 당신은 살아나지 못했다. 그는 늘 거기에 있다.(328-330p)

 

 

 

 

ㅡ 리단,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中, 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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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7/2

 

관심 있는 역자의 에세이.

 

 

나는 글을 늦게 깨우친 탓에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세상에서 공부가 가장 싫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부모님께 비밀로 했다. 싫은 것을 참으면 어른들은 안심한다.(149p)

 

 

 

 

ㅡ 박산호,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 中, 북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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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6/18

 

 

 

2012년 언저리의 트위터 상태를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어떤 위반을 저지를지 언제나 주시하고 있다. 얼마 후 우리가 눈 똑바로 뜨고 열심히 찾는 건 위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말실수였다. 다른 사람들의 저급함과 그에 대한 분노는 우리를 어마어마하게 소모시키기 시작했다. (...) 사실 화낼 대상이 아무도 없으면 이상하고 공허한 느낌마저 들었다. 누군가를 욕할 일이 없는 평온한 날들은 마치 손톱을 뜯을 때처럼 초조하거나 물에서 걷는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

이러한 변화는 어느 정도 기본적인 사회상을 반영하기도 한다. 공공의 적을 나눠 갖는 것이 친구를 사귀는 가장 빠른 방법임을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지 않았나. 정치적으로도 낙관적인 비전 아래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것보다 무언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한데로 모으는 것이 훨씬 쉽다.(48p)

 

 

어떤 소식들이건, 마치 벌을 받는 것처럼 뉴스의 폭격을 받는다는 느낌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나는 한 사람이 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는 불운의 양에는 한계가 없고, 이러한 정보를 정확하게 바라보는 방법이 우리에게는 없다고 썼다. 이렇게 동시에 발생하는 인간의 다양한 경험을 수용할 만큼 우리의 심장을 넓어지게 해주는 가이드북이 없고, 우리는 시시한 것과 심오한 것을 분리하는 방법을 배울 수도 없다. 인터넷은 무언가를 아는 능력은 극적으로 증가시켰지만 무언가를 바꾸는 능력은 그 상태 그대로다. 아니, 어떠면 우리 눈앞에서 쪼그라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인터넷이 우리 손에 들려준 것은 쏟아지는 비극 앞에서 비통해하다가 냉랭해지기를 반복하는 사이클일 뿐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지나친 참여가 우리를 점점 더 무감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

그것만큼은 최대한 늦추고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우리의 인간성을 유지하기 위한 작은 시도들뿐이다. 자신의 실제 자아가 비난받을 점이 많고 일관성 없으며 중요하지 않은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그 자아에 따라 정직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무엇을 얻고 있는지를 신중하게 돌아보고, 그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정체성에 대해서는 덜 신경 쓰고, 참을 수 없는 주장이란 것에 깊이 회의할 줄 알며, 반목과 증오가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살펴보고, 나 자신부터 내세우지 않고는 연대감을 표현할 수 없을 때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렇지 않았을 때의 대안을 말로 하기도 힘들 정도로 끔찍하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 세계는 이미 우리 앞에 와 있다는 것을.(61-63p)

 

 

 

ㅡ 지아 톨렌티노, <트릭 미러> 中, 생각의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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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6/17

 

 

“따로 계산해 드릴까요?”

어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은 어린이게 책을 받아 아빠와 계산을 마친 다음 다시 어린이게 “따로 담아 드릴까요?” 하고 물으셨다. 어린이 손님은 그렇게 해 달라고 했다.

“아유, 귀여워 몇 살이야? 아빠 드려야지.” 사장님은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돈을 내는 것은 아빠니까 아빠 편을 드는 게 나았을지 모른다. 어쩌면 어린이도 자기를 어르는 말에 넘어갔을지 모르고, 아마 그런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까 서점의 정중한 손님 대접이 어린이에게 얼마나 기억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이라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게다가 그렇게 하는 사장님의 모습에도 품위가 있었다.

 

 

기사에 달린 댓글에는 어린이가 ‘피어 보지도 못했다’는 표현이 있었다. 글을 쓴 분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나는 틀린 비유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삶은 그런 게 아니다. 삶의 순간순간은 새싹이 나고 봉우리가 맺히고 꽃이 피고 시드는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지나고 보면 그런 단계를 가졌을지 몰라도, 살아 있는 한 모든 순간은 똑같은 가치를 가진다. 내 말은 다섯 살 어린이도 나와 같은 한 명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소영 씨, 우리 딸 또래니까 말 놓을게”라고 해서 다급히 “안 됩니다”라고 말했던 사람 아닌가. 안 될 일이다. 그럼 친해진 다음에도 되나?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업무상의 관계니까.

 

 

어린이가 어른의 반만 하다고 해서 어른의 반만큼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가 아무리 작아도 한 명은 한 명이다.

 

 

어린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기 때문에 소수자라기보다는 과도기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나 자신을 노인이 될 과도기에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처럼, 어린이도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맞다. 또 어린이가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는 사이에 늘 새로운 어린이가 온다. 달리 표현하면 세상에는 늘 어린이가 있다. 어린이 문제는 한때 지나가는 이슈가 아니다. 오히려 누구나 거쳐 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하는 일이다.

 

 

“왜 안 낳아?”라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나는 “왜 낳았어?”라고 묻지 않는데. “안 낳으면 나중에 후회해”라는 말도 들어봤다. 나는 “낳은 거 나중에 후회할걸”이라고 하지 않는데. 차마 그런 식으로 대꾸할 수는 없어서 속상한 순간이 많았다.

 

 

대훈이는 점심때 아주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면서 “드래곤나물인가 그랬어요. (잠시 고민) 맞아요. 드래곤나물. 조금 용처럼 생겼어요”라고 한 적도 있다. 그래, ‘곤드레나물’의 어감이 독특하긴 하지.

 

 

“어린이 여러분, 가족과 함께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라는 말을 금지하는 것이다. 모든 어린이가 가족과 함께 어린이날을 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모든 어린이가 가족과 함께 보낸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모든 어린이가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가족과 함께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좋은 뜻으로 하는 축복의 말이겠지만, 어떤 어린이에게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는 말이다. 어른들은 그런 말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어린이 여러분, 불편한 일은 ㅇㅇㅇ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국민 여러분, 오늘 하루 어린이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른들은 주변의 어린이를 살피고 돕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어린이를 보호합시다.”

이런 말이 좋다.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이니 뭐니 하는 말도 자제하면 좋겠다. 어린이는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을 위해 살아 있다. 나라의 앞날은 둘째치고 나라의 오늘부터 어른들이 잘 짊어집시다.

 

 

어린이가 가르쳐 주어서 길을 아는 게 아니라 어린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고심하면서 우리가 갈 길이 정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를 가르치고 키우는 일, 즉 교육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 된다. 가정과 학교는 교육의 출발점일 뿐 결국 책임은 사회가 져야 한다.

 

 

ㅡ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中,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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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5/31

 

읽다 만 명암을 다시 읽기 좋은 타이밍인 것 같다.

 

 

마쓰네는 그래 봬도 꽤 사랑스러운 남자야. 거기다 귀족 집 자제라 고상한 구석이 있지. 하지만 머리는 썩 좋지 않다네. 그리고 쉽게 욱하지. 그래서 시호다와는 맞지 않는다네. 나는 개의치 않지만. 마쓰네가 하이칼라였다면 벌써 대단한 사람이 되었을 걸세. 숙부가 백작이고 미쓰이와 친척 사이인데도 월급 30엔을 받으며 아등바등 빠듯하게 사니 참 이상한 일이지. 그리고 그는 아주 느긋한 남자라네. 남의 집에 놀러 와 눌러앉아선 밥때가 되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밥을 먹는다네. “오늘도 어쩌다 보니 얻어먹게 되네요”라거나 “감사합니다.”같은 말은 한 적이 없지. 꼭 자기 집에서 밥을 먹는 양 굴어서 그런 점이 참 좋다네.(246p)

 

 

저는 당신을 미워한 적이 없습니다. 좋아한 적도 없지요. 그러나 당신이 저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저도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머리의 논리임과 동시에 마음의 논리입니다.(351p)

 

 

나는 의식이 생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그 의식이 나의 전부라곤 생각지 않네. 죽은 후에도 나는 존재하고 심지어 죽은 후에야 비로소 본래의 나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지. 현재의 나는 자살을 선호하지 않는다네. 아마 내 명만큼 다 살고 가겠지.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여느 인간처럼 나의 태생적 약점을 발휘할 걸세. 그게 생이라고 믿기 때문이네. 나는 생의 고통을 혐오함과 동시에 억지로 생을 죽음으로 향하게 하는 지독한 고통을 혐오한다네. 그렇기 때문에 자살은 하고 싶지 않아. 내가 죽음을 택하는 것은 비관이 아니라 염세관일세. 비관과 염세의 차이는 자네도 잘 알겠지. 나는 이 점에 관해 다른 사람을 설득할 마음이 없네. 즉, 자네 같은 사람을 내 힘으로 석득해 내 의견에 동의하게끔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말일세.(382-383p)

 

 

그러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물건으로 받고 싶지는 않네. 물건이라면 상대의 호의가 내게 전해지는 것, 다시 말해 내 취향을 잘 이해한 것을 받고 싶은데 상대가 그걸 알 리가 없으니 결국 빈손으로 오는 게 더 나은 셈이 되지. 아니면 전병 한 봉지 정도가 오히려 더 좋다네(그 이유는 귀찮으니 생략하겠네).(388p)

 

 

짓궂게 굴기 위해 이런 말을 쓰는 게 아닙니다. 불평도 아닙니다. 다만 모처럼 알게 된 당신, 아름답고 좋은 면이 많은 당신에게 냉담해지기 싫어서 계속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도중에 관계가 끊어지는 게 싫어서 하는 말입니다. 저는 당신과 한 달간 교류하며 당신의 재미있고 친절한 면을 많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윤리상의 인격 면에서 우리는 특별히 서로를 감화시키지 못한 채로 헤어진 것 같군요. 그래서 이런 의문이 자연스레 마음속에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당신이 시치미를 떼고 있다는 제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저는 나쁜 사람이 됩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반대로 당신이 나쁜 사람이 되겠지요. 거기가 아슬아슬한 지점으로, 그때 서로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어 나쁜 쪽이 잘못을 뉘우치고 선한 쪽으로 마음을 바꾸어 사과하는 것이 이격의 감화라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기억이 안 난다는 당신 말을 믿을 수가 없고 역시 시치미를 떼는 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으니, 당신의 덕이 저를 감화시킬 정도가 아니고 저 또한 당신을 감화시킬 만큼의 힘을 가지지 못한 셈입니다. 친애하는 사람과 이런 중대한 면에서 교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습니다. 이건 다이토모의 여주인 다카 씨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 다카 씨에게 평범한 벗으로서 하는 말입니다. 요릿집 여주인 눈에 세상 물정 모르는 촌뜨기처럼 보인다면 그뿐이지만, 모처럼 친해진 당신과 그런 경박한 관계를 맺고 싶지 않기 때문에 주절주절 이런 말을 늘어놓는 겁니다. 저는 당신의 선생도 아니고 교육자도 아니니 냉담하게 적당히 인사나 하고 지내면 수고를 덜 수 있어 편하겠지만, 왠지 당신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인품 밑바닥에 선량하고 좋은 것들이 숨어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속 이런 촌스러운 말을 하는 것이니 기뿐 나쁘게 받아들이지 말아주십시오.(394-395p)

 

 

 

ㅡ 나쓰메 소세키, <나쓰메 소세키 서한집> 中, 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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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5/21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중독을 다룬 꼭지들이 특히 좋았다. 드링킹도 조만간 읽어봐야지.

 

 

친구는 중얼거렸다. “늘 혼자 있다니. 얼마나 즐거울까.”

글쎄,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내가 누리는 이런 수준의 고독이 즐거운 것은 사실이다. 사치와 안도감이 있다는 것도, 엄청난 자유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친구가 잠시 벗어난 시간과 혼자 있는 시간을, 쉴 시간과 빈 시간을, 고독과 고립을 헷갈리고 있다는 것도 안다. 마치 내가 일하지 않는 동안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집 안을 어슬렁거리며, 빵을 굽고, 끝도 없이 거품 목욕을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친구는 이 시간에서 끝없는 평온과 고요만을 보았다. 나로 말하면, 이 시간에서 그보다 좀 더 걱정스러운 것, 그보다 분명 더 어려운 것을 본다. 내가 이렇게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는 것은 그 시간을 늘 혹은 틀림없이 즐기기 때문이 아니다. 내게 그런 시간이 필요한 것 같기 때문이다.(17p)

 

 

우정은 때로 아주 실질적이고 긴요한 것이지만, 여러 관계들 중에서 가장 일시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느 정도의 마모는 자연스럽고 예측 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은 변하고, 각자 자기 갈 길을 간다.(96p)

 

 

내 집이 있는 진짜 내 동네는 요즘의 여느 도시 동네처럼 기능한다. 한마디로 전혀 기능하지 않는다.

(...)

도시 삶의 현실, 내가 의문을 제기해본 적조차 드문 이 현실이 나는 대체로 마음에 든다. 이 현실이 우리의 도시 생활이 쇠락해가는 몇몇 이유를 알려주는 건 사실이다.

(...)

그래도 대체로 나는 이웃들과의 거리에 대해서 특이할 것 없고 설명하기 쉬운 이유를 갖고 있었는데, 그 이유란 집이 내게는 은둔처라는 것이다. 집은 내가 고독과 프라이버시를 맘껏 누릴 수 있는 장소다. 그래서 나는 내 집 현관문 너머까지 소속감을 확장해야 할 급박한 필요성을 대체로 느끼지 못하고 지냈다.

하지만 개 주인 모임이 이런 시각을 약간 바꿔놓았다.

(...)

유난히 스트레스가 많았던 날이라면, 나도 모르게 어서 그 시각이 되기를 고대한다. 어서 개 주인 모임에 나가고 싶다. 이것이 바로 이웃이라는 느낌일 텐데, 나는 이 기분을 지리적 동네에서는 느끼지 못하고 지내다가 이제야 그동안 내가 이걸 몰랐구나 하고 깨닫는다.(111-112p)

 

 

우리가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맨 처음 알게 되는 사실 중 하나가 바로 이것, 다른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문화는 죽음을 끔찍하게ㅡ지독하게ㅡ잘못 다룬다. 상을 당한 사람에게 주는 휴가는 보통 사흘. 그 후에도 6주쯤은 사람들이 당신을 조심조심 대하고, 너무 많은 걸 바라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대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당신에게 공식적으로 주어진 애도 기간을 끝난다. 이후에는 사무실에서 멍하닌 앉아 있거나 하루에 세 번씩 빨개진 눈으로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이 부적절하게 느껴진다. 다시 정상적으로 행동하고 정상적으로 느껴야 할 듯한 압박이 든다.

나는 이게 싫다. 가끔은 길 가는 사람들을 잡아 세우고 말하고 싶다. “우리 부모님이 죽었다고요. 우리 부모님이. 알겠어요?” 너무 많은걸 억누르고 삼켜야 한다. “정말 우울해요.” 몇 주 전에 내가 남자 동료에게 이렇게 말하자, 그는 멍청히 나를 보면서 말했다. “왜요?” 그 목소리에는 진심으로 놀란 기색이 있었다. 우울해요? 왜? 나는 그를 목 졸라 죽이고 싶었다.(130p)

 

 

예를 들어, 사실 그런 통화에는 암호가 듬뿍 담겨 있었다. 모녀의 역학 관계를 이루는 물밑 메시지들이 담겨 있었다. 이제 나는 어머니가 외부적인 문제들로 투덜거렸던 것은 자신에게 더 깊은 불안을 안기는 문제들을ㅡ자신의 건강을, 변함없는 슬픔을, 두려움과 회한을ㅡ투덜거리기에는, 특히 딸에게 투덜거리기에는, 너무 내밀하고 자존심 강한 삶이라서였음을 안다. 어느 정도는 나도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그 밑에 깔린 불안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그 반응으로 불쑥 짜증과 죄책감을 느끼곤 했던 것은, 아마 어머니의 괴로움을 직면한 나 자신이 무능하고 혼란스럽게 여겨져서였을 것이다. 어머니의 불안에 괜히 내가 불편한 것, 어머니를 도와야 한다고 느끼지만 방법을 모르는 데 대한 답답함, 어머니의 불안이 가라앉고 모든 것이 저절로 괜찮아지기를 바라는(아마도 유아적인) 마음.(148-149p)

 

 

어머니가 즐겨 하신 말씀 중에 “인생은 드레스 리허설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었다. 술을 끊기 전 몇 달 동안 나는 저 말을 수시로 떠올렸다. 술을 지나치게 마시면, 인생의 힘든 순간들을 겪어내는 데 술에 지속적으로 의지하면, 삶의 모든 일이 현장이 아닌 연습인 양 느껴지기 시작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 여름에 밤이면 밤마다 전화를 붙들고 애통해할 때, 나는 실제로 애도한 게 아니라 애도를 연습한 것이었다. 희석된 고통은 직면한 고통과 결코 같지 않다. 술과 자신감의 방정식, 술과 불안의 방정식도 마찬가지다. 칵테일 파티에서 마티니로 얻은 세련됨은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힘겨운 작업을 거쳐서 내면으로부터 얻은 세련됨과 결코 같지 않다.

성인이 된 뒤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그 밑바탕에는 늘 무언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렸고,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렸고, 내게 맞는 남자나 직업이나 신발, 옷, 헤어스타일 따위가 휙 하고 나타나서 나를 바꿔주기를 기다렸다. 내가 행복하고, 남들에게 인정받고,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외부에서 내게 주입해주기를 기다렸다.

(...)

술은 효과가 있다. 술은 사람을 달래고, 느긋하게 만들고, 차분하게 만들고, 기분 좋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가 성장하도록 돕진 않는다.(155-156p)

 

 

나한테 문제가 있는데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내가 거식증인 것 같다고. 지금 기억나는 것은 두 분의 눈뿐이다. 걱정과 약간의 두려움이 깃들어 있지만 주로 무력한 표정이었던 눈. 두 분은 공감하지 못했고, 나는 설명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에게 이 일이 벌어져도ㅡ어쩌면 그 경우에 더욱더ㅡ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어머니가 우편으로 보낸 쪽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이렇게만 적혀 있었다. “먹어라.”(170p)

 

 

시행착오와 데이터 수집. 이것은 수고가 들고 힘든 일이다. 나는 개와 함께 미들 섹스 펠스 자연보호 지구를 걷는 일을 700번 한 뒤에 발견했다. 그래, 나는 이게 좋다, 개와 함께 숲에 오는 일이 좋아. 재봉틀과 900번 씨름해서 족족 패배한 뒤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 나는 이게 싫어, 난 바느질에 필요한 인내력이 없고 이걸 하면 내가 무능하다는 느낌만 들어. 너무 사소한 발견들이 아닌가 싶겠지만(실제로 사소하다), 그래도 이런 교훈들은 주야장천 술만 마실 때는 배울 수 없고 우리가 견고한 자아 감각을 구축하려면 꼭 필요한 작은 벽돌들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내 욕구는 이것이야, 내 특별한 강점과 약점은 이것이야, 하는.

(...)

금주한 지 일이 년 뒤에 다시 마시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그 무렵은 뿌연 안개가 걷히고 앞으로 해야 할 어려운 일이 드러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술을 끊는 일은 기차 사고에서 빠져나오는 일과 좀 비슷하다. 당신은 멍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일어나서, 한동안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다 머리가 맑아지고 트라우마가 잦아들면, 자신도 모르게 망연히 잔해를 보며 서 있게 된다. 저 기차에서 내린 나는 이제 누구지? 이제 나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지? 거기까지 어떻게 가지? 이것은 겁나는 시기이고, 나는 스스로에게 이것이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자주 상기시켜야 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키인 건 맞지만, 모든 것이 가능한 시기이기도 하다고.(198-199p)

 

 

알코올 중독에는 정확함이란 게 없으니까요. 어떤 하나의 사건 때문에 건강했던 사람이 아파지는 게 아니고, 어ᄄᅠᆫ 하나의 비정상 세포가 분열하거나 돌연변이를 거쳐서 사람의 미래를 바꾸는 게 아니니까요. 그저 느리고 불분명한 과정이 있을 뿐이죠. 우리는 자신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죠. 알지만 알지 않으려 하죠. 자신이 충분히 끊을 수 있다고, 관리할 수 있다고,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불안해서 홀짝홀짝, 부정하려고 벌컥벌컥.(205p)

 

 

지금도 나는 그때의 나란 사람이 그때의 처지에서 어떻게 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애니타 힐의 이야기가 처음 상세히 알려졌을 때도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자꾸 힐에게 왜 클래런스 토머스가 부적절하게 행동했던 그 순간에 조치를 취하지 않았느냐고,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고.

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그렇게 취약한 위치에 있을 때는 그런 접근에 대응하기가 몹시 어렵다는 것이다.(248-249p)

 

 

ㅡ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中,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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