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와 재능과 노력만으로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모든 것은 무위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내가 성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내 친구들이 다들 실패해야 한다는 거지. 혹은, 내가 똥을 싸면 남들이 죄다 맞을 정도로 높은 곳까지 올라가고 싶다는 거지.(91p)

 


“원시 사회 사람들에게 여론 조사를 했다면, 행복이란 불을 좀더 쉽게 피우는 거라는 답이 나왔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생각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이제 그런 종류의 행복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지식을 넓히는 것, 의식의 그물을 더 넓게 던지는 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그는 살고 싶다기보다는 죽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는 내게 지구에서 가장 슬픈 사람처럼 보인다....
나는 그에게 완벽하게 공감한다.(102p)

 


정원에는 큼지막한 바위가 하나 있다. 당신이 그것을 위에서 응시하든 다른 어떤 각도에서 응시하든, 그것을 치워버릴 방법은 없다. 그리고 모든 바위는 똑같이 중요하고 똑같이 무의미하다. “당신과 당신의 사람들이 아무리 최면에 걸려 있다 한들, 당신도 그들의 전쟁에서, 우리의 전쟁에서 똑같이 죽을 것이다. 그 무슨 새로운 지혜를 무덤으로 가져가서 벌레들에게 해독시키겠는가?”(122p)

 


그녀와 그녀가 만난 모든 사람은 서로를 오해하며, 애들러는 그 오해를 칠흑같이 캄캄한 인식론적 어둠으로 묘사한다. 세 번째 부분은 그 어둠이 사회와 문명 전체에서도 역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간의 모든 상호 작용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다.(153~154p)

 


내가 머지않아 죽을 거라는 사실이 한 가지 좋은 점은 무엇에든 가짜로 흥미 있는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이봐, 나는 죽어가고 있다고! 조지프 헬러의 회고록 <때때로 Now and Then>를 보면, 마리오 푸조가 조지프의 병실에 찾아와서 부러움을 드러내면서 ‘자네는 남은 평생 그 진단을 사회적 변명으로 내세울 수 있겠군’하고 말하는 장면이 나와요.(205p)


 


ㅡ 데이비드 실즈,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中,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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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6




선택은 외부로부터 집단에 가해지는 메커니즘이 아니다. 선택은 과정이다. 특정 유전자의 빈도가 시간에 따라 높아짐으로써 더 잘 적응하게 되는 과정일 뿐이다. 생물학자들이 어떤 특질에 대해 선택이 작용한다고 말할 때는 그 특질이 그 과정을 겪는다는 말을 줄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종들은 환경에 적응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적응은 의지가 개입되거나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일이 아니다. 환경에 대한 적응은 그 종이 적절한 유전적 변이를 갖고 있을 때 필연적으로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171p)

 


그런데 명심할 점이 하나 있다. 다윈의 생각과는 달리, 종들은 자연의 빈 생태 지위를 채우겠다는 목적으로 생겨나는 게 아니다. 자연에 다양한 종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종들이 생겨나는 게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종 분화를 연구해 보면, 종들은 진화적으로 우연한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자연의 '무리'들은 생물 다양성 면에서 아주 중요하지만, 그것들이 다양성을 높이고자 진화한 것이 아닐뿐더러 균형 잡힌 생태계를 만들고자 진화한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공간적으로 격리된 집단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화함으로써 생긴 유전적 장벽의 필연적 결과일 뿐이다. (250p)

 


인류 진화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질문을 받는다. 우리는 아직도 진화하고 있나요? 젖당 내성이나 아밀라아제 유전자 중복을 보면 틀림없이 지난 수천 년 동안에 우리에게 선택이 작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정확한 답은 내리기 어렵다. 선조들에게 가해졌던 선택압 중 많은 종류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게 사실이다. 선조들을 죽였던 많은 질병과 환경이 영양, 위생, 의학의 개선으로 말미암아 사라졌고, 자연 선택의 잠재적 원천이던 요인들이 제거되었다. 영국 유전학자 스티브 존스가 지적했듯이, 영국에서 태어난 아기가 생식 연령까지 생존할 확률이 5백 년 전에는 겨우 50퍼센트였지만 지금은 99퍼센트로 높아졌다. 인류의 진화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에는 선택에 의해 가차 없이 솎아졌을 듯한 개체들이 요즘은 의학의 개입으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이나 이빨이 나빠서 사냥이나 씹기에 서툴렀던 탓에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죽어 갔을까?(당시라면 나도 분명히 부적응자였을 것이다.)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항생제가 없다면 죽어 버렸을 감염을 겪었던가? 어쩌면 요즘 우리는 문화적 변화 때문에 여러모로 유전적 내리막길을 걷는지도 모른다. 한때 해로웠던 유전자가 더 이상 나쁘지 않아서(안경이나 솜씨 좋은 치과 의사로 '나쁜'유전자를 간단히 보완하니까) 인구에 계속 남는다는 뜻이다.

 거꾸로, 한때 유용했던 유전자가 문화적 변화 때문에 지금은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단것과 기름기를 좋아하는 우리의 성향은 선조들에게는 적응적 특질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런 음식이 귀중하고 희귀한 에너지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때 귀했던 음식들이 지금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물려받은 유전적 유산 때문에 충치와 비만과 심장 질환에 시달린다. 기름진 음식을 먹은 뒤 몸에 지방을 축적하는 성향도 과거에는 적응적 특질이었을 것이다. 식량 사정이 들쭉날쭉하여 풍요와 기근을 오가는 상황에서는 보릿고개에 대비하여 칼로리를 저장해 두는 개체들에게 선택적 이점이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304~305p)

 


진화의 교훈이 윤리, 역사, '가정생활' 영역으로 넘쳐흐르고야 말리라는 피어시의 생각은 지나친 걱정이다. 어떻게 진화에서 삶의 의미, 목적, 윤리를 끌어낸단 말인가? 불가능하다. 진화는 생명이 다양해진 과정과 패턴을 설명하는 이론이지, 삶의 의미를 말해 주는 거창한 철학적 체계가 아니다. 진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에게는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그들은 우리의 기원에 관한 설명에서 우리의 존재의의와 행동 규범을 찾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314~315p)

 


진화는 도덕적이지도, 비도덕적이지도 않다. 진화는 존재할 뿐이고, 우리는 우리가 좋을대로 그것을 생각할 뿐이다. 나는 '우리가 진화를 이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하는 두 가지 방향을 보여 주려 애썼다. 그것은 진화가 단순하다는 것, 또한 경이롭다는 것이다. 진화 연구는 우리의 행동을 구속하기는커녕 우리의 마음을 해방시킨다. 우리는 방대한 진화 계통수에서 하나의 잔가지에 불과할지도 모르나, 그렇다고는 해도 아주 특별한 동물이다. 자연 선택은 우리의 뇌를 정련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세상을 펼쳐주었다. 우리는 질병, 불편, 부단한 식량 탐색에 시달렸던 선조들의 삶을 그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개선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우리는 높은 산맥 위를 날고, 깊은 바닷속을 잠수하고, 심지어 다른 행성으로 여행한다. 교향곡, 시, 책을 지어 미학적 열정과 감정적 욕구를 채운다. 다른 어떤 종도 이것과 비교될 만한 일을 해낸 적이 없었다. (325p)

 



ㅡ 제리 코인, <지울 수 없는 흔적> 中,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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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보면 모든 생물체가 요행이랍니다, 놀랍도록 총명하신 군주여. 필연적인 형질이란 없습니다.

- 우리 스퀸치는 우리 행성에서 요행히도 특정 사건들이 특정 순서대로 발생한 결과입니다. 우리 선조가 살았던 독특한 환경 조건에서 번성했던 독특하고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들을 포함해서 말입니다.(145p)

 




ㅡ 제이 호슬러&케빈 캐넌,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진화> 中, 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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