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3/15

 

뭘 받고 싶냐고 물으면 난 그 즉시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은 기분이 되어버립니다.(20p)

 

 

존경받는다는 관념 또한 나를 상당히 두렵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완벽에 가깝게 인간을 속이다가, 전지전능한 자에게 간파되어, 산산조각나고, 죽기보다 더한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것, 그것이 ‘존경받는다’는 상태에 대해 내가 내린 정의입니다. 인간을 속이면서 ‘존경’받아도 누군가 한 사람은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들도 마침내 그의 입을 통해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그 순간 타오르는 인간들의 분노, 복수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요. 상상만 해도 온몸의 털이 모두 곤두서는 느낌입니다.(23p)

 

 

또 어느 가을 밤에는, 누워서 책을 읽고 있는데 아네사가 새처럼 소리도 없이 어느 틈엔가 내 방으로 들어와, 갑자기 이불 위에 엎어져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요우가 날 도와줘야 해. 그럴 거지. 같이 이 집을 나가자. 그러는 게 좋아. 도와줘, 날 좀 도와줘” 하고 밑도 끝도 없는 말을 쏟아내더니 다시 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내 앞에서 여자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네사의 격한 말에 놀라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진부하고 아무 내용도 없는 푸념에 김이 새버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책상 위에 있던 감을 까서 한 쪽을 잘라 아네사에게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아네사는 훌쩍거리면서도, 그 감을 먹고 “뭐 재밌는 책 좀 없니? 좀 빌려줄래?” 하는 것이었습니다. 난 소세키가 쓴「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책꽂이에서 꺼내주었습니다.

“잘 먹었어.”

아네사는 쑥스러운 듯 살짝 웃어 보이며 방에서 나갔는데, 내게 아네사뿐만 아니라 여자라는 존재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생각하는 것은, 마치 지렁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보다 더 복잡하고 골치 아파서, 섬뜩한 느낌마저 듭니다. 다만 여자가 그렇게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경우에 뭔가 달콤한 것을 주면, 그걸 먹고 기분을 좀 가라앉히더라 하는 것만큼은 어릴 때부터 쌓아온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37p)

 

 

아아, 인간은 서로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고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인 양 평생 자신이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상대가 죽으면 눈물 흘리며 조문 따위를 읊어대는 것 아닐까요.(93p)

 

 

아니, 난 결코 돌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한순간도 미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아, 광인은 대개 자신들이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지요.(133p)

 

 

남들에게 존경 받으려고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

하지만 그런 착한 사람들은 나와 놀아주지 않지.


내가 조숙한 척 행동하면, 사람들은 날 조숙하다고 쑤군덕댄다. 내가 게으른 척 행동하면, 사람들은 날 게으르다고 쑤군덕댄다. 내가 소설을 쓰지 못하는 척하면, 사람들은 날, 글 한 줄 못 쓰는 놈이라 쑤군덕댄다. 내가 거짓말쟁이인 척하면, 사람들은 날 거짓말쟁이라 쑤군덕댄다. 내가 돈푼깨나 있는 척 행동하면, 사람들은 날 부자라고 쑤군덕댄다. 내가 냉담을 가장해 보이면, 사람들은 날 냉담한 놈이라 쑤군덕댄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괴로워서 나도 몰래 신음했을 때, 사람들은 날 괴로운 척한다고 쑤군덕댔다.

모든 게, 어긋나 있어.


결국, 자살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지 않나.

이리 괴로워도, 기껏 내 손으로 목숨을 끊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생각하니, 통곡으로 밤이 샌다.(206p)

 

 

 

ㅡ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사양> 中, 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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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1

 

능란한 단문으로 이루어진 짧은 소설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유명한 소설인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을 읽지 않고 어제를 먼저 읽은 이유는 짧아서다.

사람을 죽이려고 마음 먹고 칼을 들어도 누구도 죽일 수가 없다. 꿈꿨던 것은 이루지 못하고 글은 더 이상 쓰지 않는다.

 

 

한 노파가 무덤들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나는 왜 내 무덤을 아무도 돌보지 않느냐고 노파에게 물었다.

이건 아주 오래된 무덤이구먼, 그래. 날짜를 봐요. 이제는 아무도 그가 여기에 묻혀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가보우.

나는 날짜를 보았다. 올해였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114p)

 

 

나는 이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140p)

 

 

아고타 크리스토프, <어제>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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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0

 

 

실험적인 언어와 이미지를 제공하는 독창적인 작품이라는 평이 많은 데 동의하지 못하겠다. 작품에 등장하는 그 많은 사진과 타이포그래피가 그렇게 효과적이었는지 모르겠다. 없어도 별 상관없어 보인다. 장점이라면 그림과 이것저것 다 빼면 300페이지가 조금 넘을 소설인데 다 합쳐지니 489p나 되기 때문에 내가 뭔가 대단한 작품을 읽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많은 이미지와 글자 배열 등은 독서를 산만하게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게 의도였다면 제대로 적중했다. 소설 속에서 오스카의 재기 넘치는 모습을 보고 웃음 짓긴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재기라는 측면에서 적절한 비교는 아니지만, 소설 전체가 재기를 뿜어내는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사랑한다.’라는 말을 인상적으로 쓴 소설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못하겠다. 이 소설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마지막이라는 건 언제나 그때 당시에는 알지 못한다. 지나고 나서 그게 마지막이었구나.’라고 실감할 뿐이다. 사랑의 감정이 생기고 머릿속에 떠오른다면 망설이지 말고 표현하자. 내일로 미루지 말자. 한 행동에 대한 과거는 어떻게든 후회로 잊히지만, 하지 못했던 행동은 회한이 되어 평생 따라다닐 테니.

 

 

더 이상 네 앞에서 강한 척하고 있을 필요가 없어지자, 난 한없이 약해졌어. 바닥에 쓰러졌단다. 그곳이 내게 맞는 곳이었어.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어. 손이 부서지길 바랐지만, 너무 아파서 멈추었지. 하나뿐인 자식을 위해 손 하나 부서뜨리지도 못하다니 나는 얼마나 이기적인지.

화장실에 가야 했어. 일어나고 싶지 않았단다. 내 배설물 속에 널브러져 있고 싶었어. 나는 그래야 마땅해. 내 오물 속에서 뒹굴고 싶었어. 하지만 일어나서 화장실로 갔단다. 그게 바로 나야.(321p)

 

 

나는 그럴 때 사람들이 서로에게 무슨 말을 할지 모조리 생각해 보았다. 태어난 이상 천 분의 일 초 후든, 며칠 후든, 몇 달 후든, 76.5년 후든 누구나 죽어야 한다. 태어난 것은 모두 죽어야 한다. 그 말은 우리 삶이 고층 빌딩과 같다는 의미이다. 연기가 번져오는 속도는 저마다 다를지라도 불길에 휩싸여 있기는 다 마찬가지이고, 우리는 모두 그 안에 갇혀 있다.(340p)

 

 

사랑한다.(439p)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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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7

 

고상하고 엄숙하며 진지한 문학만이 진정한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읽어낼 수 없을 소설이다. 아예 멀리하는 게 좋겠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왜 이제야 읽었나 싶을 정도로 최고의 독서경험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이 책이 나왔을 때 바로 읽어보려 했는데 도입부부터 몰려오는 각주, 미주, 스페인어대중 문화 일반에 대한 인용 등에 대해 너무 겁을 내어 던져두고 이번 기회에 읽게 됐다.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 관심도 있고, 정치적 상황 및 관련 정보들을 많이 알고 있으면 훨씬 풍요로운 독서체험이 될 수 있겠지만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충분히 따라가면서 읽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읽다보니 라틴 아메리카의 국제 정세에 대해 너무나 무지한 것 같고, 관심도 생겨서 조금씩 찾아보며 읽었는데 이건 뭐 마술적 리얼리즘운운하는 책들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굉장히 젊은 책이고 사실 번역이 쉽지 않았을텐데 번역도 매끄럽게 느껴졌다. 저자의 첫 단편소설집 드라운도 같은 역자가 번역한 걸로 알고 있는데 기대된다.

 

 

 

다리 들어올리기, 윗몸일으키기, 아침 일찍 동네 한 바퀴 걷기 같은 운동을 두어 번 시도해봤지만, 자기만 빼고 다들 여자친구가 있는 게 눈에 띄었고, 그럴 때면 절망하여 다시 먹어댔으며, <펜트하우스> 같은 도색잡지와 던전 설계, 자기 연민에 빠져들었다.

나는 부지런한 거에 알레르기가 있나봐. 오스카의 말에 롤라는 코웃음을 쳤다. , 넌 부지런함이 아니라 시도하는 데 알레르기가 있는 거야.(39p)

 

사람들이 뚱뚱한 사람을 싫어한다고? 그렇다면 살 빼려는 뚱보는 얼마나 더 싫어할지 상상해보라. 그 광경은 사람들 속에 내재된 저 빌어먹을 악마를, 발로그를 끄집어했다. 세상에서 제일 상냥한 아가씨들이 길에서 뛰는 그를 보고 차마 못할 말을 던지곤 했고 나이 든 할머니들은 저 뚱보 좀 봐, 구역질나게시리, 라고 했다, 구역질이 난다고. 평소 오스카에게 반감을 표시한 적이 한 번도 없던 해럴드조차 그를 자바 더 벗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의 반응은 너무나 적대적이었다.(212p)

 

인생이란 그런 거다. 아무리 열심히 행복을 모아봤자 아무것도 아닌 듯 쓸려가버린다. 누군가 나한테 묻는다면, 난 세상에 저주 따윈 없다고 대답하겠다. 삶이 있을 뿐. 그걸로 충분하다고.(246p)

 

이제 나도 엄마가 되고 보니 우리 엄마는 달라질 수 없었다는 사실을 불현 듯 깨닫는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왜 이런 말이 있잖은가. 플라타노 마두로 노 세 부엘베 베르데(익은 플라타노는 다시 녹색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엄마는 마지막까지도 내게 사랑 비슷한 걸 전혀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나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울지 않았다. 오직 오스카를 위해서만 눈물을 흘렸다. 미포브레 이호(가엾은 내 아들). 당신은 부모가 적어도 언젠간 바뀔 거라고, 나아지는 것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부모는 그렇지 않았다.(249p)

 

 

주노 디아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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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6

 

대단히 좋았다. 조금 찾아보니 작가 본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거의 여과 없이 드러내는 작품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작가들은 창작을 할 때 의식적으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지 않도록 작품을 쓰는 경우가 있고(알게 모르게 자신의 모습이 비춰질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의 모습을 내놓고 드러내는 자전적인 형태의 글을 쓰는 경우도 있다. 그 중에서 자전적인 글을 쓰기가 더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책이라는 것은 한명의 친구가 아닌 다수의 독자를 상정하고 쓰기 때문이다. 자신은 이걸 읽을 불특정다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데 그들은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안다고 지레짐작을 한다면 어떨까? 사람들이 많은 광장에서 발가벗겨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특히 자신의 실제 모습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쓰는 과정 자체가 무척 고통스러울 것 같다. 이 작품을 읽고 나니 보통의 자전적이니 반자전적인 이야기이니 하는 소설들은 감히 장난으로 보인다. 이건 뭐 갖다 댈 계제가 아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가족사를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 글을 쓸 때의 그 고통이라는 것은 감히 짐작조차도 할 수 없다.

클라이맥스라고도 할 수 있을 4막에서 티론의 장광설과 제이미의 취중진담(?)은 두고두고 기억날 것 같다.

 

 

전에도 말했지만, 네 어머니 옛날 얘기는 좀 과장이 섞였어. 집도 대단했던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 평범했지. 그리고 네 외할아버지도 네 어머니 말처럼 그렇게 훌륭하고 관대하고 고귀한 아일랜드 신사는 아니었어. 물론 좋은 분이었고 사교성도 좋고 말솜씨도 좋았지. 나도 그분을 좋아했고 그분도 나를 좋아했어. 그리고 식품 도매상을 해서 부유한 편이었고 능력도 있었지. 하지만 그분에게도 결점은 있었어. 네 어머니 말야, 나 술 마시는 거 갖고 나무라지만 네 외할아버지 술 좋아하시던 건 잊어버리고 그러는 거야. 네 외할아버지가 마흔이 되실 때까지 술 한 방울 입에 안 댔던 건 사실이지만 그 뒤로 그동안 못 마셨던 걸 다 마셔버렸지. 그분은 샴페인만 드셨는데 상태가 심각했어. 샴페인만 마시는 걸 대단히 고상한 취미인 것처럼 생각했지. 그런데 그것 때문에 일찍 돌아가셨어. 거기다 폐병이······.(168~169p)

 

 

지독한 노랭이 영감이라. 그래, 어쩌면 네 말이 맞는지도 모르지. 어쩌면 구제불능인지도 몰라. 돈이 좀 생긴 뒤로는 술집에서 다른 사람들 술값까지 내주면서 펑펑 돈을 쓰고 못 갚을 게 뻔한 인간들한테 돈을 빌려주고 그러면서 살았지만······. 물론 그건 술집에서 잔뜩 취해 있을 때 얘기지. 집에서 맨정신으로 있을 때는 도저히 그게 안 돼. 돈 귀한 걸 배운 것도 집에서고 늙어서 양로원 들어가는 걸 겁내게 만든 것도 집에서였으니까. 그런 걸 알게 된 후로는 운이란 걸 믿을 수가 없었지. 갑자기 운이 바뀌어 가진 걸 다 잃게 될까 봐 항상 두려웠어. 그래도 땅은 많이 가질수록 안심이 되거든. 이치에 맞지 않는 얘긴지는 몰라도 난 그렇다. 은행이 망하면 돈은 날아가는 거지만 땅은 어디 가는 게 아니니까. 너 아까, 고생이 뭔지, 아비가 어렸을 때 얼마나 힘들었겠는지 알겠더라고 했지. 알긴 개뿔을 알아! 네가 어떻게 알아? 부족한 거 없이 컸는데. 유모에, 학교에, 대학까지 보내줬잖아. 중간에 그만둬서 그렇지. 먹을 걸 못 먹었나, 입을 걸 못 입었나. 하기야 노동을 좀 해보긴 했지. 외국 땅에서 돈 한 푼 없이 고생도 좀 했고. 그건 내가 높이 산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낭만이고 모험이었어. 재미 삼아서 해본 거였다고.(180~181p)

 

 

널 건달로 만들려고 일부러 그랬어. 내 마음의 한 부분이 그렇게 한 거야. 커다란 한 부분이. 그 한 부분은 아주 오래전에 죽었어. 그래서 삶을 증오하지. 내 실패를 보고 배우도록 너한테 세상을 알게 해줬다는 거, 가끔은 나 자신도 그렇게 믿지만 그건 거짓이야. 내 실패들을 그럴 듯하게 위장하고, 취하는 걸 낭만처럼 보이게 했지. 가난하고 어리석고 더러운 존재에 지나지 않는 창녀들을 매혹적인 흡혈귀처럼 만들고, 노동을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조롱했지. 난 네가 성공하는 게 싫었어. 그러면 비교돼서 내가 더 한심하게 보일 테니까. 네가 실패하기를 바랐지. 항상 너를 질투했어. 어머니의 아기, 아버지의 귀염둥이! 그리고 네가 태어나서 어머니가 마약을 시작한 거야. 네 탓이 아니란 건 알지만 그래도, 빌어먹을, 너에 대한 증오를 억누를 수가·····!(207p)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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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25

 

 

앉은 자리에서 곧장 절반 정도 읽고, 그 다음날에 다 읽었다. ‘스포츠와 여가를 읽고 난 다음이라 그랬는지 확실히 정제되고도 정제되어 원액에 가까운 단문을 읽고 난 후라 이 소설은 훨씬 수월하게 읽혔다. 처음부터 끝까지 돈에 대해 이야기한다. 돈을 어떻게 써야하는가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고, 돈이라는 것이 사람들과의 관계(친구이든 연인이든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든)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돈으로 사람을 살 수 있다는 소릴 하자는 게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관계의 지형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그리고 그 영향이라는 것은 결코 작지 않다.

단 한번의 선택으로 인생의 행로가 극적으로 바뀌었다는 말을 심심찮게 듣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본문을 인용해 부연해보면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진학이며 결혼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날 무슨 색 옷을 입었는지, 몇 시 전철을 탔는지, 그런 세세한 사건 하나하나까지가 자신을 만들어온 거란 걸 이해했다.”라고 한다. 500% 공감한다.

 

 

가키모토 리카는 1986, 스물다섯 살 때 두 살 연상의 우메자와 마사후미와 결혼했다. 식품회사에 다니는 마사후미와는 전문대학 시절 친구의 소개로 만나 약 1년가량 교제를 한 뒤 결혼했다. 결혼을 계기로 리카는 그때까지 다녔던 카드회사를 그만두었다. 장래 무엇이 되고 싶다, 어떤 일을 하고 싶다고 하는 명확한 의사도 없이 취직한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고역은 아니었지만, 특별히 즐거웠던 적도 없었다. 나는 이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리카는 근무하는 동안 줄곧 생각했었다. 명함에 적힌 자신의 이름은 카키모토 리카의 극히 일부라고, 늘 느끼고 있었다. 그 일부인 채 나이를 먹고, 어느새 자신의 일부가 완전히 자기 자신이 돼버린 게 아닐까 하고 막연히 공포를 느끼고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직할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마사후미가 결혼 의사를 넌지시 비쳤을 때는 깊이 안도했다. 자신의 일부를 일부로밖에 느낄 수 없는 부분을 완전히 잘라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리카는 미련 없이 퇴사를 선택했다.(67~68p)

 

하루하루는 다시 지루해져 갔다. 색깔 예쁜 도시락을 만들고, 아침 식사를 차리고 마사후미를 배웅하고, 텅 빈 집을 청소하고 다닌다. 한 주에 한 번 요리교실에 가서 배운 것을 며칠 안에 그대로 만든다. 빨래를 널고, 이불을 널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점심을 먹고, 저녁 메뉴를 생각하여 자전거를 타고 슈퍼에 간다. 텔레비전을 켜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영상이 매일같이 나왔다. 리카는 전혀 흥미 없는 그 영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결혼 초에는 아무런 의문도 없이 하던 일이 점점 색이 바래지고, 마치 영상 속의 장벽처럼 멀리 느껴졌다.(70~71p)

 

우메자와 씨, 단골 고객한테 인기도 있고 성적도 아주 좋아서 말이야.”

이노우에는 설득하듯이 말했다. 리카는 고객의 얼굴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8할이 정년퇴직한 노인들뿐이다. 푸념과 소문얘기, 과거 자랑이며 날마다 생각나는 걸 얘기하고 싶어서 못 견딘다. 그러나 그 얘기를 하는 상대는 도내나 지방에 사는 자식이나 배우자, 취미 클럽이나 지역 모임의 친구들이 아니라, 별로 친하지 않고, 요컨대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고 적당히 흘려들어주는 누군가다. 리카는 그런 얘기를 듣는 게 그리 힘들지 않기 때문에 그저 듣고 있다. 하고 싶은 말도 없으니까 끼어들지도 않는다. 동행한 행원이 없을 때는 사소한 일전구 갈기, 문에 기름칠하기, 병뚜껑 열기도 싫은 얼굴 하지 않고 떠맡는다. 자네가 독신이었으면 우리 며느리 삼았을 텐데, 라는 말을 몇 명한테 들었는지. 요컨대 그런 인기였다.(94p)

 

리카는 무수한 만약의 끝에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 거야라는 생각을 계속했지만, 그러나 그 몇 개의 만약을 선택했다고 해도 이렇게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망연해지다가 이어서 천천히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생각해봐야 소용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무수한 만약을 자신은 선택하지 않았고, 그리고 1997, 거의 동시에 두 가지 일은 일어났다.(184~185p)

 

그걸로 됐어. 나 늘 생각하지만, 뭔가 하려면 철저하게 하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어. 잠깐 손을 댔다가 이내 빼버리는 것이 사람으로서 가장 옳지 않다고 생각해”(207p)

 

그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서 현관을 열고 거실 문을 열고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마키코를 보고 싶지 않았다. 돈에 관련해 답이 나오지 않는 문답으로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가망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귀엽지만, 이제 끝이어도 어쩔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혼, 이라고 소리내어 본다. 지금도 그것밖에 얘기하지 않는 마키코는 위자료니 양육비니 하고 돈 얘기만 열심히 하겠지. 있는 것 전부 다 줘버려도 상관없다고도 생각했다. 아내와 아이에게 송금하기 위해서만 일하는 것, 그것도 괜찮지 않은가.(214p)

 

세상은 예전에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말캉거렸다. 그런가, 돈 있는 사람들은 이런 세계를 보는 건가, 리카는 생각했다.

레스토랑에서도 바에서도 백화점에서도 부티크에서도, 리카 네를 맞이해주는 사람들은 웃는 얼굴이 끊이지 않았다. 아주 친절하게, 농담 한두 마디를 섞어서 진심이 담긴 인사를 해주었다. 거기에는 악의도 경멸도 오만불손함도 없고, 그저 포근한 선의만이 있었다. 리카는 은행에 거액의 정기예금이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모두가 그렇다고는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확실히 현실과 동떨어진듯한 사람들이 있었다. 해맑게 웃고, 목소리가 거칠어지지 않고, 사람을 밀어내지 않고, 쉽게 사람을 믿고, 악의 같은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이 누군가가 자신을 상처 입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돈이라는 폭신폭신한 것에 둘러싸여 살아왔을 것이다.(252~253p)

 

돈이라는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어째선지 보이지 않게 된다. 없으면 항상 돈을 생각하지만, 많이 있으면 있는 게 당연해진다. 100만 엔 있으면 그것은 1만 엔이 100장 모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 처음부터 있는, 무슨 덩어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은 부모에게 보호받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그것을 누린다.(297~298p)

 

 

가쿠다 미쓰요, <종이달> ,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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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나는 이른바 추가 볼베어링으로 고용되었다. 추가 볼베어링이란 별다른 의무 조항 없이 언제든 그냥 내보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말한다. 오랜 본능의 깊은 우물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충고를 마음에 새기고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기로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무엇이 세상사를 계속 순조롭게 흘러가게 만드는지를, 무엇이 어머니처럼 우리를 돌봐주는 회사를 최선의 상태로 유지하게 만드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해야 회사의 불합리하고, 지속적이고, 쩨쩨하고, 사소한 모든 요구 사항을 만족시킬 수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194p)

 

나는 예전에 전미암협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공짜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온몸에 부스럼이 났고, 현기증을 일으켰으며,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래서 거기에 갔지만 나는 삼 주 후에 오라는 예약증만 받아왔다. 요즘의 모든 미국 꼬마들처럼 나 또한 그때 늘 그런 얘기를 들어왔다. 암은 초기에 잡아라. 그래서 그걸 초기에 잡기 위해서 찾아갔더니 그 작자들은 약속만 잡아놓고 삼 주를 기다리게 만들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듣는 얘기와 현실의 괴리이다.

삼 주 후에 나는 다시 찾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몇 가지 검사를 공짜로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설령 그 검사를 무사히 통과한다고 해도 내게 암 덩어리가 없다는 사실을 완벽히 보증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만일 이십오 달러를 내고 받는 검사를 통과한다면, 암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지간히 확신할 수 있다고 했다.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싶다면, 이십오 달러짜리 검사를 받은 후에 칠십오 달러짜리 검사를 받아야 하고, 만일 거기까지도 무사히 통과한다면, 정말 안심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나의 문제가 알코올중독이나 신경과민이나 성병임을 의미하는 게 될 것이다. 그 작자들, 전미암협회에서 일하는 그 흰색 가운을 입은 애송이들은 정말로 그럴듯하고 명료하게 말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간단히 얘기하면, 백 달러가 든다는 거로군. 아니, 그게 아니라. 그들이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길로 그곳을 나와서 사흘 동안 술독에 빠져 살았다. 그러자 모든 부스럼이 어지럼증과 함께 사라져버렸고 더 이상 피를 토하지도 않았다.(245~246p)

 

 

찰스 부코우스키, <팩토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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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23

 

 

무슨 일이 있었던가? 그들은 함께 떠났고 사랑을 나누었다. 그건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측했어야 했다. 그건 그저 하나의 달콤한 사건, 어쩌면 환상의 끝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무해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그 모든 일이 일어났음에도 그토록 서로 분리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고립된 느낌, 나아가 살기까지 느껴진다.(85p)

 

그는 방안을 둘러본다. 모든 것이 진부하고 모든 것이 남루해 보인다. 때때로 그는 그녀의 부족한 점들 때문에 기운이 빠진다. 그녀의 단점들은 중요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종종 너무나도 생생하고 확실해서 그녀의 다른 특징들을 덮어버린다. 재기 넘치는 말과 생기에 가려진 이런 확고부동한 특징을 그는 이제야 포착하기 시작했다.(139p)

 

지속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우리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그 사실이 그들 두 사람 위에 선고되지 않은 판결처럼 걸려 있다. 그들의 침대에 누워 있다. 안마리의 모든 기쁨은 그들이 이제 막 시작했다는 사실, 그들 앞에 결혼이, 오툉과의 작별이 놓여 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반면 그는, 그녀의 꿈들을 인화한 네거티브필름처럼 정반대로 느낀다. 딘에게 매 순간이 그토록 통렬한 것은 끝에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이 사실을 의식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그는 정말 자기 자신의 운명을 감지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다나로서는 단언할 수 없다.(151~152p)

 

 

제임스 설터, <스포츠와 여가> ,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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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19

 

 

제임스 설터의 소설 중 처음 읽은 책. 단편집으로 중산층의 색다를 것 없는 삶의 드라이한 모습과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파리 리뷰에서 제임스 설터 본인에게 어떤 책을 쓴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지 두 권 고르라고 했는데 “스포츠와 여가”와 “가벼운 나날”을 골랐다. 둘 다 장편인데 어떨지 궁금하다.

 

 

누군가를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녁을 함께 먹고 카드를 몇 번 쳤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은 실제로 아무것도 모른다. 언제나 놀라게 된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19p)

 

그가 한 가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무리 안정적인 것 같은 사람이라도 심각한 위기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악재가 몇 번 연속으로 일어나면 그뿐이었다. 그런 일들은 경고도 없이 일어났다. 때론 손을 쓸 수 있었지만 때론 어쩔 도리가 없었다.(69p)

 

취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그건 학습되고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얘기를 가끔 했다. 무엇을 바꿀 수 있고 또 바꿀 수 없는가에 대해서. 사람들은 언제나 뭔가, 말하자면 어떤 경험이나 책이나 어떤 인물이 그들을 완전히 바꾸어놨다고들 하지만, 그들이 그전에 어땠는지 알고 있다면 사실 별로 바뀐 게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상대방이 매력적이긴 해도 완벽하지는 않을 때, 사람들은 결혼한 다음에 전부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론 잘해야 한 가지 정도를 바꿀 수 있을 뿐이고, 그것마저도 결국은 예전처럼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99p)

 

그 집뿐이었다. 나머지는 그리 강렬하지 않았다. 삶을 꼭 닮은 장황한 소설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다 어느 날 아침 돌연 끝나버리는. 핏자국을 남기고.(186p)

 

 

ㅡ 제임스 설터, <어젯밤> 中,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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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18

 

 

“만”을 읽고 다음으로 고른 책. 형식의 측면에서도 참신했고 소위 ‘악마주의 작가’라고 불릴 정도로 이 작품 말고도 전반적인 작품에서 성과 여자의 미에 대해 논하는 게 신기하다. 게다가 노골적인 묘사와 충격적인 상황설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걸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드러낸다. 특히 6월11일 마지막 일기로 소설의 전 내용을 아우르며 마무리 짓는 장면은 충분히 인상적이다.

 

덧. 번역계의 상황을 몰라서 하는 소리인지도 모르지만 다른 건 몰라도 작가의 이름은 번역할 때 통일이 되었으면 한다. 타니자끼 준이찌로오는 뭐 어쩌라는 말인지? 부코우스키, 부코스키, 부카우스키 역시 점입가경이다.

 

나는 나의 1월 4일 일기에서 “나는(남편의 일기장을) 절대로 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스스로 정해둔 한계를 넘어서 남편의 마음속까지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내 마음속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듯이 다른 사람의 깊은 마음속을 속속들이 아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나는 내 마음속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의 깊은 마음속을 속속들이 아는 것”을 좋아한다.(166p)

 

ㅡ 타니자끼 준이찌로오, <열쇠>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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