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6/20

 

마더 나이트 이후로 보네거트의 작품을 오랜만에 봤다. 한결 같은 풍자와 유머를 이 작품에서도 볼 수 있겠다. 


“미국인이 자기 노력으로 부자가 되는 건 아직도 가능해.”
“그럼요. 어렸을 때 누군가가 ‘돈 강이란 것이 있다, 그건 절대로 공평하지 않다, 성실한 노동, 능력 본위, 정직 같은 헛소리는 죄다 잊어버리는 게 좋다, 그 강으로 가라’고 말해준다면 가능하겠죠. 나 같으면 이렇게 말해주겠어요. ‘부자와 권력자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의 방식을 배워라. 그들에게 빌붙어도 되고, 겁을 줘도 된다. 그들에게 엄청난 호감을 주거나 엄청난 두려움을 줘라. 그러면 어느 칠흑 같은 밤에 그들이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소리 내지 말라고 경고할 것이다. 그런 다음 어둠을 뚫고 인간이 발견한 가장 넓고 가장 깊은 부의 강으로 당신을 데려갈 것이다. 당신은 강둑에서 당신의 자리를 소개받고, 당신만의 양동이를 넘겨...받을 것이다. 원하는 대로 양껏 퍼마시되, 퍼마시는 그릇을 떨어뜨리진 마라. 가난한 사람이 들을지 모르니까.’”(139~140p)

“그러게, 가난은 창피한 게 아니야.” 이 말은 인디애나 출신의 유머작가 킨 허버드가 오래전에 한 유명한 농담의 절반이었다.
“그래.” 다른 남자가 나머지 반을 말했다. “하지만 차라리 창피한 걸로 끝나는 게 낫지.”(250p)

“새로운 건 한 사람이 오랫동안 그런 사랑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한 사람이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익한 인간에 대한 우리의 증오, 그리고 그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들에게 가하는 잔인한 행위가 반드시 인간의 본성 탓은 아니라는 겁니다. 엘리엇 로즈워터라는 본보기 덕분에 수백 수천만 사람들이 누구를 만나든 서로 사랑하고 돕는 법을 배울 수 있지요.”(288p)

ㅡ 커트 보네거트,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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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6/2

2020/10/9


독서모임이 있어서 다시 읽었는데 역시 좋다.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문체와 늘어짐 없는 내용 전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측면과 가독성까지 흠 잡을 곳이 없는 소설이다. 이 소설을 흥미 있게 읽었다면 작가의 다른 작품인 “나를 보내지마”도 좋아할 것 같다. 감상은 책을 읽으면서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던 구절들로 갈음한다.


즉 ‘품위’는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집사의 능력과 결정적인 관계가 있다. 모자라는 집사들은 약간만 화나는 일이 있어도 사적인 실존을 위해 전문가로서의 실존을 포기하게 마련이다.(23p)


여러분을 둘러싼 세계가 어떻게 변해 가고 있는지 혹시 아십니까? 여러분의 그 고상한 직관으로 활약할 수 있었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 의도는 선량하지만 순진하기 짝이 없는 공론들이었죠.(132~133p)


익살이란 그 자체의 속성상, 예상되는 다양한 반응들을 제대로 따져 볼 새도 없이 입으로 내뱉게 되어 있다. 따라서 필요한 기술과 경험을 먼저 습득해 놓지 않으면 온갖 부적절한 말들을 내뱉게 될 위험이 엄청나게 크다.(165p)...


그러니 관심의 초점을 현재로 맞춰야 한다. 또한 과거에 이룬 것들을 가지고 자기 만족에 빠지지 않게 경계해야 한다. 지난 몇 달을 돌아볼 때 달링턴 홀의 상황이 예전과는 달라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175p)


“엄청나게 어리석은 짓이기도 하죠. 이제 그 처녀는 금방 실망하게 될 거예요. 인내하고 견뎠더라면 훌륭한 인생이 펼쳐졌을 텐데. 1~2년 지나면 어디 작은 저택에 총무 자리라도 알아봐 줄까 했었는데․․․․․․. 그건 너무 무리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스티븐스씨, 지난 몇 달 동안에 그 애가 얼마나 발전했었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지금 와서 그걸 송두리째 내던졌어요. 그 모든 걸 아무 소득 없이.”(195p)


그러나 이런저런 순간에 다르게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고 앉아 있어 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음만 심란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사실, ‘전환점’이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내가 그런 순간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돌이켜 볼 때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늘날 그런 상황들을 되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순간들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와 켄턴 양의 관계에서 엉뚱한 것들을 솎아 낼 수 있는 날이, 달이, 해가, 끝없이 남아 있는 줄만 알았다. 이런저런 오해의 결과를 바로잡을 기회는 앞으로도 무한히 많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처럼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 모든 꿈을 영원히 흩어 놓으리라고 생각할 근거가 전혀 없는 것 같았다.(221p)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이 나라의 중대한 결정들을 여기 이 사람과 그의 동류인 수백만 대중의 손에 맡겨야 한다고 고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과 같은 의회 제도에 묶여 있는데도 수많은 난제의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한다는 게 좀 놀랍지 않습니까? 뭐, 전쟁캠페인이라도 기획하신다면 ‘어머니 연맹 위원회’에 물어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245p)



ㅡ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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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5/19

“그냥 일일 뿐이니까. 어떤 영화든 출연료를 준다는 것은 다 맡지.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거야. 물론 가끔 그다지 맘에 들지 않는 영화를 만날 수도 있지만 크게 손해 볼 일은 없잖아? 공짜로 일하는 게 아니니까. 나는 예술가들을 잘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영화 기법이니 방식이니 하는 것들도 잘 몰라. 그냥 서라는 곳에 서서 대사를 읊고는 끝나면 집에 가는 거지. 그냥 연기일 뿐이야.”(23p)

“싫지는 않아. 이렇게 오랫동안 해온 일에 대해서 그 정도만 말할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는 거지.”(24p)

지난 2년 동안 스카이다이빙과 베이컨 축제, 회원 활동을 유지하기도 벅찰 정도로 어렵고 복잡한 인터넷 가상현실사회에 관한 기사들을 써온 버스터는 탈진한 끝에 글 쓰는 일을 포기하려 하고... 있었다. 이런 일들은 직접 경험해보면 애초에 품었던 기대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런 일들이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인생을 바꿀 만한 굉장한 경험이라고 거짓 기사를 써야 했다. 사륜차를 타고 사막을 달리는 것은 그로서는 이제껏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이지만 골연 그가 꿈꾸던 일로 바뀌어야 했다. 하지만 운전대를 잡은 후 그는 사륜차 운전이 즐거움을 주는 행위보다는 전문적이고 복잡한 일이라는 것을 즉시 깨달았다. 참을성 있게 사륜차를 운전하는 법, 속도를 높이는 법을 설명하는 강사 옆에 앉아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를 운전하려 고생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차라리 집에 돌아가 사륜차를 몰고 다니며 해변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해결하는 탐정소설을 읽는 편이 훨씬 낫겠다고 생각했다. 자동차를 뒤집어엎고 난 후 운전연습장에서 쫓겨난 그는 바로 호텔로 돌아와 한 시간 만에 뚝딱 기사를 써 재낀 다음 마리화나를 피우다 곯아떨어졌다.(34~35p)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세상을 올려다보며 이젠 더 이상 내려갈 데 없이 견고한 맨바닥 위에 서 있다고 생각했던 애니의 발밑이 한 번 더 꺼져 내렸다.(140p)

이 집안의 누군가 한 사람은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비록 제대로 내린 결정은 요란한 폭발이나 비명, 절규, 심리적 상처 같은 것으로 끝나지 않아 좀 시시하더라도 말이다.(218~219p)

부모가 그들의 인생을 망쳐놓은 것도 사실이고 그들을 자신들의 집에 거두어준 것도 사실이었다.(223p)

“당신은 마치 모든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날이 올 것처럼 말을 하지만, 이제까지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고려해보면 그런 날이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건 별로 상관없다는 거예요.(350p)

정신적 외상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게 작용하는 것인가? 직접 외상을 겪었던 당사자들은 현장에 함께 있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그들의 경험에서 의미를 찾는 것을 보고 할 말을 잃게 된다.(368p)

ㅡ 케빈 윌슨, <펭씨네 가족> 中,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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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5/3

산시로는 이런 경우 대답을 잘 못한다. 순간의 기회가 지나가고 머리가 냉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과거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면 좋았을걸, 그렇게 했으면 좋았을걸, 하고 후회한다. 그렇다고 이렇게 후회할 것을 예상하고 억지로 임기응변식의 대답을 아주 자연스럽고 자신 있게 지껄일 만큼 경박하지는 않다. 그래서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얼간이 같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155~156p)

산시로는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다. 용무가 있어 다른 사람과 만날 약속을 했을 때는 그쪽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 하는 것만 상상한다. 자신이 이런 표정으로, 이런 일을, 이런 목소리로 말해야지 하는 것은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더구나 만나고 나면 나중에 반드시 ...그것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그리고 후회한다.(220p)

다들 딱한 사람들뿐인 것 같지만 실제로 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사자뿐이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사실을 좋아하지만 사실에 수반되는 정조는 잘라버리는 습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잘라버려야 할 정도로 세상이 각박하니 어쩔 수가 없다. 그 증거로 신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신문의 사회면 기사는 열에 아홉이 비극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비극을 비극으로 체험할 여유가 없다. 다만 사실에 대한 보도로 읽을 뿐이다. 자기가 보는 신문에는 사망자 수십 명이라는 제목으로 하루에 변사한 사람의 연령, 호적, 사인을 6호 활자로 각각 한 줄씩 싣는 일이 있다. 간단명료함의 극치다. (...) 당사자에게는 비극에 가까운 사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다지 절실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고 각오해야 할 것이다.(267~268p)

ㅡ 나쓰메 소세키, <산시로> 中,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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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4/20

나는 더 이상 아버지가 그립지 않다. 보통은 그렇다. 나도 그리워하고 싶다. 그리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시간이 모든 것을 치유해준다는 말은 진실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사실이며,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조심하지 않으면, 시간은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가져가버리고, 그 자리에 이해만을 채워 넣는다. 시간은 기계이다. 시간은 고통을 경험으로 바꾸어놓는다. 순수한 정보를 가져다 편집하고, 보다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번역해놓는다. 우리 삶의 사건들은 기억이라고 불리는 다른 물질로 변형되며, 이 과정에서 손실되는 것들은 결코 다시 되돌릴 수 없다. 다시는 편집되지 않은, 가공되기 전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로 인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선택권이 없다.(88p)

나는 잊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느낌이라는 것을. 앞으로 나아가는 일, 절벽에서 아래의 암흑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일, 놀랍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갑자기 착륙하는 일. 그리고 이어지는 매 순간순간마다 그런 똑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는 일. 매 순간마다 추락한 다음 다시 기어 올라와 똑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겪는 일. 나는 이 윙윙대고 흐릿한 풍경, 잠망경을 통해 보는 것 같은 의식, 내 자신의 삶을 누리는 것의 마찰력과 견인력, 그 삶의 소모를 거의 그리워했었나보다. 나는 현재라는 이름의, 혼란스럽고 즉흥적이지만 과도하게 제작된 매 순간의 무대에 대해서, 만들어졌다 부서지는, 매번 스스로를 분해하는, 시간의 매 순간마다 부서진 후 다시 만들어지는 그 무대가 가져다주는 위험과 즐거움에 대해 거의 잊어버렸던 것 같다.(101~102p)

어쩌면 내가 원한 것이 바로 이런 상황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사람을, 모든 존재를 나로부터 밀어내는 것. 나는 언제나 이런 일을 저질러버린다. 진짜로 선택을 할 만한 기회가 오는 경우는 너무도 드물다. 보통은 이 세계의 줄거리가 나를 앞으로 가도록 밀어낸다. 그러나 가끔 중요한 갈림길, 시간의 나뭇가지가 갈라지는 지점에서, 내가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때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언제나 이런 결과가 나와버린다.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 내가 보호해야 할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만다. 나는 자기 타임머신을 망가뜨리는 고객들이나 돈을 구걸하는 지나가는 섹스봇 따위에게는 친절하지만,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일에서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 엄마, 필, 아버지에게도.(147p)

ㅡ 찰스 유, <SF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 中,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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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4/3

갈보 집은 우울해요. 뭔가를 집어넣으러 가는 곳은 다 그렇죠. 은행, 우편함, 무덤, 자동판매기.(33p)

호머는 파리들의 편이었다. 이따금씩 허공에서 맴돌던 파리 한 마리가 너무 멀리 돌아 선인장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호머는 마음속으로 그 파리가 그대로 날아가거나 되돌아가기를 빌었다. 파리가 선인장에 내려앉으면 도마뱀이 살금살금 다가갔고, 호머는 녀석이 파리를 잡아먹을 때까지 숨을 멈춘 채 지켜보면서 제발 무슨 일이 일어나서 파리가 위험을 알아차리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렇게 파리가 무사히 도망치기를 바라면서도 자기가 개입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도마뱀은 이따금씩 거리 조절에 실패했고 그때마다 호머는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71~72p)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일부만을 욕망에 바친다. 머리나 가슴만 훨훨 타오르는데 그나마도 완전히 몰두하는 건 아니다. 더욱더 운이 좋은 사람들은 백열등의 필라멘트와 같아서 맹렬히 타오르지만 조금도 닳지 않는다.(95~96p)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만이 눈물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울고 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그러나 호머처럼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사람들, 그저 영구불변의 번민이 전부인 사람들은 울어 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울지 않을 수도 없다.(98p)

여기서 누군가를 체포해야 하는 경우에도 그들은 일단 범인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이 행동하다가 모퉁이를 돌아간 뒤에야 비로소 경찰봉으로 마구 두들겨 팼다. 범인을 점잖게 대하는 것은 군중 속에 있을 때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243p)

토드는 그 사람들이 군중에 합류하자마자 변모하는 과정을 목격했다. 줄을 서기 전까지만 해도 눈치를 살피듯 조심스러운 모습이었지만 군중의 일부가 되는 순간부터 뻔뻔스럽고 공격적인 태도로 돌변했다. 그들이 순진한 호사가라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했다. 그들이 순진한 호사가라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했다. 그 사람들은 잔인하고 사나웠으며 특히 중년층이나 노년층은 더욱더 심했다.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권태와 실망 때문이었다.
그들은 책상이나 계산대, 밭이나 각양각색의 단조로운 기계 따위에 매달려 따분하고 힘겨운 노동과 함께 한평생을 보낸다.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으면서 언젠가 돈이 좀 넉넉해지면 여유를 얻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날이 온다. 주급 10달러 또는 15달러를 받게 되었다. 그럴 때 햇빛과 오렌지의 땅 캘리포니아가 아니면 또 어디로 가랴?
그러나 막상 이곳에 도착하면 햇빛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 마련이다. 오렌지에도, 심지어 아보카도와 패션 푸르트에도 싫증이 난다. 재미있는 일도 없다.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할 길이 없다. 여가를 즐길 만한 정신적 여건을 갖추지도 못했고 자금력도 부족하고 신체적 여건도 쾌락을 추구할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따금씩 고작 아이오와로 소풍이나 가려고 그토록 오랫동안 노예처럼 일했나? 뭐 또 없을까? 그들은 베니스에 가서 밀려드는 파도를 구경한다. 대부분은 바다가 없는 곳에 살던 사람들이지만 파도는 하나만 보아도 모두 본 것과 다름없다. 글렌데일의 비행기도 마찬가지다. 어쩌다 한 번씩 비행기가 추락하기라도 하면 신문의 표현처럼 <불구덩이 속에서> 몰살당하는 승객들을 구경할 수 있다. 그러나 비행기는 좀처럼 추락하지 않는다.
권태는 점점 더 심해진다. 그들은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원한을 불태운다. 날이면 날마다 신문을 읽고 영화를 보러간다. 이 두 가지는 그들에게 폭행, 살인, 성범죄, 폭발 사고, 충돌 사고, 밀회 사건, 화재 사건, 혁명, 전쟁 따위를 가르쳐준다. 날마다 그런 정보를 주식으로 먹으면서 그들은 점점 더 약아진다. 태양도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오렌지도 그들의 지친 입맛을 자극하지 못한다. 제아무리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도 그들의 느슨해진 몸과 마음을 팽팽하게 긴장시킬 수는 없다. 그들은 사기를 당하고 배신을 당했다. 죽도록 일하며 저금한 보람이 없다.(245~247p)

ㅡ 너새네이얼 웨스트, <메뚜기의 날> 中,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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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3/28

“자네가 뉴욕에서 일주일에 15달러를 받는 일을 얻었다고 생각해보게. 여기서 우리와 함께 20주를 보냈으니 다 합치면 300달러를 잃은 셈이 되는군. 하지만 여기서는 하숙비도 없었으니 일주일에 7달러 정도를 아꼈다고 치면 총 140달러를 번 셈이야. 결국 자네는 고작 160달러만 손해 본 거네. 게다가 이를 모두 뽑는 비용으로 최소한 200달러가 든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은 40달러가 남는 장사지. 아, 또 있군. 내가 자네한테 새것은 20달러나 하고 지금 상태로도 최소한 15달러가 나가는 의치를 공짜로 주었다는 것을 잊지 말게. 이렇게 따지면 자네 이익은 55달러가 돼. 이 정도면 자네 나이에 20주를 날렸다 해도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닐 걸세.”(66p)

비참할 때는 동행이 있으면 나은 법이다.(131p)

ㅡ 너새네이얼 웨스트, <거금 100만 달러> 中,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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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소설 중 가장 잘 읽혔다. 그게 단점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그저 거창한 제목을 봤을 때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전개, 굳이 이렇게 길고도 긴 소설로 만들어야 했느냐는 의문이 들었을 뿐이다. 소설 보다는 하루키의 에세이와 여행기를 찾아봐야겠다. 기억에 남는 구절은 딱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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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도 학교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일요일이 형에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이해하지 못했다. 엿새 동안의 어두웠던 정신 작용을 이날 하루에 산뜻하게 회복시키기 위해 형은 많은 희망사항을 이십사 시간 속에 던져 넣는다. 그러다 보니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열 개 중에 두세 개도 실행하지 못했다. 아니 그 두세 개조차 모처럼 실행하려고 하면 도리어 그로 인해 소비되는 시간이 아까워져 꼼짝 않고 지내는 사이에 일요일은 어느덧 저물어버리기 일쑤였다. (p33)

그는 오래도록 문밖에서 서성이는 운명으로 태어난 듯했다. 거기에는 옳고 그름도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통과할 수 없는 문이라면, 일부러 거기까지 찾아가는 건 모순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갈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그는 앞을 바라보았다. 눈앞에는 견고한 문이 언제까지나 전망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는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문을 통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아니었다. 요컨대 그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p264)


ㅡ 나쓰메 소세키, <문> 中,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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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일이 싫었다. 역겨워서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내가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 기쁜 마음으로 배운 것이었다. 할 일은 해야 한다는 것.(17p)


"인생이 그래서 그래. 발을 아주 조금만 잘못 디뎌도 비극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으니까."(23p)


고별사를 읽으면서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채플을 네가 해야 할 일의 일부로 여겨야 해. 닭의 창자를 끄집어내는 일처럼 여겨야 해. 코드웰 말이 맞아. 어디를 가든 늘 너를 미치게 만드는 뭔가가 있을 거야. 아버지, 룸메이트, 채플에 마흔 번이나 참석해야 한다는 사실. 따라서 또다른 학교로 옮긴다는 생각은 집어치우고 그냥 일등으로 졸업이나 해!(122p)


"집에서 멀리 있으니 행복하니?"...
"전보다 나아요. 엄마." 전보다 나아요. 엄마가 전보다 못한 대가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176p)


매우 평범하고 우연적인, 심지어 희극적인 선택이 끔찍하고 불가해한 경로를 거쳐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239p)



ㅡ 필립 로스, <울분>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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