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6/14

 

읽음. 다른 질병이나 증상은 평소에 알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른 부분이 없었으나 자해에 대한 설명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 다른 부분이 있어서 꽤나 흥미로웠다. 

 

ㅡ 대릴 커닝엄, <정신병동 이야기> 中, 이숲

 

,

2016/6/14

 

읽음. 이런 주제를 다루는 다른 책을 더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듦.

 

ㅡ 대릴 커닝엄, <과학 이야기> 中, 이숲

,

2016/6/13

 

‘화려한 싱글’이라는 거짓말과 ‘행복한 결혼’이라는 거짓말은 모두 사실을 숨긴다. 두 가지 거짓말이 은연중 강요하는 사고의 틀에 갇혀 있는 한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이 두 가지 거짓말은 모두 은밀하게 생략법을 사용한다. ‘화려한 싱글’이라는 거짓말은 화려하지 않은, 아니 비참하게 보호받지 못하는 홀로 버려진 사람들을 생략한다. 세상에는 분명 결혼 따위는 우습게 알아도 괜찮은 화려한 싱글도 있지만, 생존마저 위협받는 한계적 상황에 놓여 있어도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는 처참한 싱글도 있다. 결혼할 이유를 찾지 못해 결혼하지 않은 싱글에게는 비혼의 상황이 불행의 지름길이 아니지만, 결혼하고 싶은데 결혼하지 못한 싱글에게는 비혼이란 인생의 참사에 가깝다.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에게 혼자 산다는 것은 여유로움이지만, 자립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혼자 산다는 것은 버림받음 혹은 뿌리 뽑힘에 가깝다. ‘화려한 싱글’이라는 첫 번째 거짓말 속에는 이렇게 생략된 많은 사람들이 들어 있다. 화려한 싱글을 주로 내세우는 마케팅 담당자는 독거노인과 노숙자와 같은 완벽하게 혼자 사는 사람들을 생략한다. 또한 ‘결혼은 항상 행복’이라는 거짓말 역시 ‘결혼했지만 불행한 사람 혹은 심지어 결혼으로 인해 불행해진 사람’을 생략한다. ‘행복했던 결혼 생활이 이혼이라는 파국’으로 끝난 불행한 사람도 생략한다. 생략된 대상에는 남편에게 매 맞고 사는 여성도 있고,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남편도 있다.(28~29p)

 

최악의 것은 청소죠. 그건 정말 끔찍해요. 매일 해봐야 진짜로 알 수 있을텐데. 이를테면 당신이 금요일 날 무엇을 닦아 놓아도 다음 주 똑같은 시간, 똑같은 곳에 똑같은 먼지가 앉아 있을 거예요. 그러니 지겹지 않겠어요. 최소한 맛이 가게 하는 일임엔 틀림없죠. (...) 이건 거의 바다 한복판에서 걸레질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요.(96p)

 

1인 가구는 밖의 경제활동과 안의 가정활동을 관할하는 주체가 동일하다. 1인 가구는 능력 있는 가장이어야 하는 동시에 자애로운 안사람이어야 한다. 연말소득공제 업무를 처리하고 자동차세를 납부하고 가장 경제적인 자동차 보험회사를 찾는 사람과, 마트의 할인 정보를 수집하고 포인트 카드를 챙기고 원플러스원 상품을 찾아내는 사람이 동일하다. 이 식탁에 필요한 돈을 제공하는 사람이 이 식탁에 올릴 음식을 요리하고, 이 식탁에서 나온 음식물 쓰레기까지 처리한다. 1인용 테이블에 식사를 제공하는 능력은 TV의 케이블 채널에서 보는 것처럼 멋지게 요리의 레시피를 재현해낼 수 있는 즐거운 능력이 아니다. 이 모든 귀찮은 과정을 혼자서 처리해야 하는 자립의 능력이다. 이런 자립의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밖에서 돈을 많이 번다고 하더라도 1인용 테이블에는 온갖 배달음식 전단지만 올라갈 뿐이다.(99p)

 

속설은 속설을 만들었던 조건들이 이미 한참 전에 사라지고 난 뒤에도 ‘옛말’이라는 이유나 ‘삶의 지혜’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언급되고 통용된다. 이 시대에 결혼이라는 것은 과연 성숙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성숙과 미성숙의 기준을 결혼이라는 제도에 진입했는지 여부에 의해 결정하는 가장 단세포적인 생략법이 여전히 지배하는 사회가 우리 사회이다.(122p)

 

일반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위협하는 적은 고통과 권태라는 두 가지다. 그리고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에서 적당히 멀어지게 되면 그만큼 다른 하나가 가까이 다가온다. 또한 그 반대의 경우도 있어 우리의 일생은 거의 이 양자의 중간에서 때로는 강하게 진동하고, 때로는 약하게 진동하고 있는 격이라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192p)

 

자기계발서들은 독립과 의존 그 사이에 ‘의지’가 있다고 가르치지만,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독립과 의존 사이에서 돈의 힘을 느낀다. 자유는 의지만으로 채워진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자유의지는 실행되는 순간 자원을 요구한다. 자원 없는 자유의지는 가능태일 뿐이다. 모든 노력에는 자원이 필요하다.(224p)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로 두려움이 커질 때, 자신이 영원히 젊을 수 없다는 평범한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공포로 다가올 때, 가족관계로의 재진입은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미혼이라면 뒤늦었지만 가족관계로의 진입을 새삼 고민하고, 이혼 또는 사별로 인해 혼자 사는 경우라면 가족의 재구성을 심각하게 검토한다. 그렇기에 나이가 들수록 혼자 사는 사람이 처한 딜레마는 더욱 커진다. 계속 두려움을 가슴 속에 앉고 혼자 살 것인가? 아니면 가족관계로 진입할 것인가? 아니면 가족관계로 진입할 것인가? 이 두려움이 어느 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면 정말 탈출구는 짝을 찾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가슴 속에서 어느 순간 켜진 두려움이라는 경고등에도 불구하고 계속 혼자 사는 사람은, 경고등을 무시한 대가로 앞으로 부딪히게 될 모든 어려움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가? 두려움이 커질 때 가족으로의 진입은 두려움을 다스리는 훌륭한 처방 같지만,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

가족은 훌륭한 관계를 서로 맺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힘을 발휘하는 제도이다. 만약 한 개인이 속한 가족이 형편없는 가족이라면 그 가족은 가장 든든한 배경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어둡고 깊이조차 알 수 없는 근심의 기원일 수도 있다. 모든 가족이 훌륭한 것은 아니다. 형편없는 가족도 있다. 그러니까 가족으로의 편입이 두려움을 다스리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형편없는 가족, 아니 없는 것보다 못한 가족 속에서 억압받으며 억지로 가족의 구성원으로 사는 사람도 있다. 개인들이 획득한 정치적 자유가 문화적 자유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하여 혼자일 수 있는 능력이 정치적 억압에서 자유롭다는 의미의 소극적 자율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결정할 수 있는 적극적 자율의 토대가 되기 위해서는, 단지 경제적 능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자기만의 치타델레로 못 들어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들이 인생 계획을 세우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사회가 제공해줄 것을 요구”하는 아이디어는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232~234p)

 

 

ㅡ 노명우,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中, 사월의책

,

2016/6/12

 

소설가로 적합한 사람은 이를테면 ‘이건 이렇다’라는 결론이 머릿속에서 내려지더라도, 혹은 자칫 내려질 것 같더라도, ‘아니, 잠깐, 어쩌면 이건 나 혼자만의 억측일 수도 있어’라고 멈춰 서서 다시 생각해보는 사람입니다. ‘세상일이란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지. 나중에 뭔가 새로운 요소가 불쑥 튀어나오면 얘기가 백팔십도 달라질지도 모르잖아’라는 식으로.(120p)

 

‘시간이 있었으면 좀 더 잘 썼을 텐데ㅡ. 나는 소설 쓰는 친구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정말 깜짝 놀랐다. 지금도 그 일을 떠올리면 아연해진다. (중략) 만일 그가 써낸 이야기가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소설 따위를 쓰는가. 결국 우리가 무덤까지 가져갈 것은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 힘껏 일했다는 노동의 증거, 그것뿐이다. 나는 그 친구를 향해 말하고 싶었다. 제발 부탁이다, 지금 당장 다른 일을 찾아봐라, 라고. 똑같이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번다고 해도 세상에는 좀 더 간단하고 아마 좀 더 정직한 일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너의 능력과 재능을 최대한 쏟아부어 글을 써라. 그리고 변명이나 자기 정당화는 안 돼. 불평하지 마. 핑계 대지 말라고.(168p)

 

모든 일에는 ‘물때’라는 게 있고, 그 물때는 한번 상실되면 많은 경우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습니다. 인생이란 때때로 변덕스럽고 불공평하며 어떤 경우에는 잔혹한 것입니다. 나는 우연히 그 호기를 제대로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지금 돌아보면 그야말로 행운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행운이란 말하자면 무료 입장권 같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유전이나 금광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그걸 찾아내고 일단 손에 넣으면 그다음은 만사 오케이, 살살 부채질이나 해가며 안일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라는 건 아닙니다. 그 입장권이 있으면 당신은 행사장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ㅡ하지만 그냥 그것뿐입니다. 입구에서 입장권을 건네고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다음에 어떤 행동을 취할지, 거기서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취하고 혹은 버릴지, 거기서 생기게 될 몇 가지 장애물을 어떻게 뛰어넘을지,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재능이나 자질이나 기량의 문제고, 인간으로서의 기량의 문제고, 세계관의 문제고, 또한 때로는 극히 심플하게 신체력의 문제입니다. 어쨌든 그건 단순히 행운이라는 말만으로는 미처 다 처리되지 않는 사안입니다.(196~197p)

 

단지 내가 작가가 되고 정기적으로 책이 출간되는 동안에 한 가지 몸으로 배운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쓰든 결국 어디선가는 나쁜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긴 소설을 쓰면 ‘너무 길다.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반으로 줄여도 충분하다’라고 하고, 짧은 소설을 쓰면 ‘내용이 얄팍하다. 엉성하다. 명백히 태만한 티가 난다’라고 합니다. 똑같은 소설을 어떤 곳에서는 ‘같은 얘기를 되풀이한다. 매너리즘이다. 따분하다’라고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전작이 더 낫다. 새로운 시도가 겉돌고 있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이미 이십오 년 전쯤부터 ‘무라카미는 시대에 뒤떨어진다. 이제 끝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불평을 늘어놓는 쪽에서야 간단하겠지만(생각나는 대로 입에 올릴 뿐 구체적인 책임은지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 말을 듣는 쪽에서는 일일이 진지하게 상대했다가는 우선 몸이 당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절로 ‘뭐든 상관없어. 어차피 나쁜 말을 들을 거라면 아무튼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쓰자’라고 하게 됩니다.(269p)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지요. 일본이라는 토양에서, 그 딱딱한 틀에서 도망치고 싶어 이른바 ‘국외 유출자’로서 해외에 나갔는데 그 결과 원래 있던 토양과의 관계성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셈이니까요.(313p)

 

 

 

ㅡ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中, 현대문학

,

2016/6/12

 

지금 내가 죽으면 분명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기타노 다케시라는 인간이 살았구나’하는 사실은, 땅에 떨어지는 비 한 방울이 곧이어 떨어지는 빗방울에 간단히 지워져버리는 것처럼 이내 잊히게 마련이다.(14p)

 

간단히 말해서 연예인을 지망하는 사람이 1,000명 있다고 치자. 그중 몇 명이나 연예활동으로 먹고살 수 있게 될까? 고작 한 명 있을까 말까다. 나머지 999명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노력하면 꿈은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없다.(66p)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남의 성공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만약 내가 전혀 팔리지 않는 연예인인데도 아야노코지의 성공을 기뻐할 수 있다면 정말 훌륭한 사람일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 내가 뜨지 않았다면 만나서 입으로는 “잘됐다” 정도의 말은 하겠지만, 내심 ‘웃기고 있네. 어째서 나는 못 뜨고 네가 뜨는 거야’ 하고 생각했을 게 뻔하다.(99p)

 

‘옛날에 나는 너를 도와주었는데 너는 지금 왜 날 도와주지 않는 거야’ 하고 생각한다면, 그런 건 처음부터 우정이 아니다. 자신이 정말로 곤란할 때 친구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 우정이다.

요컨대 우정은 내가 저쪽에다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지, 저쪽에서 얻을 수 있는 뭔가가 아니다. 우정이란 상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다.

애초에 우정에서 뭔가를 얻으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다. 손익으로 따지자면 우정은 손해만 볼 뿐인 것.(127p)

 

타인에 대한 배려 중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어째서인지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점점 힘들어지는 부분이다. 나이 든 사람들은 걸핏하면 자기 자랑만 늘어놓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자랑은 한 푼도 득이 되지 않고, 그 자리의 분위기만 흐릴 뿐이다. 남의 자랑을 들어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142~143p)

 

용서할 수 없는 타입은 함께 술을 마실 때 “다케시 씨는 참 좋은 사람이군요”라고 말하는 여자다.

나는 나쁜 사람이나 못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유혹했는데, 그렇게 말해버리면 더 이상 진도를 나갈 수가 없다. 계속 좋은 사람인 척하고 있을 수밖에.

헤어질 무렵에 여자는 확인 사살을 한다.

“나중에 또 상담해주세요.”(149p)

 

여러 종류의 단맛을 모두 “단 것 같아요”라는 말로 정리해버리고, 세세한 표현을 하지 않는다.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끝까지 파고들어 자세히 생각하지 않고, 적당히 대충 때우고 넘어간다고 할까. 요즘 세상에는 모호한 것들이 만연하고 있다.

(...)

모호한 표현으로 상대에게 공감을 호소하려는 걸까? ‘·····같은 느낌’이라고 써두면, 무슨 의미인지는 상대가 생각해줄 테니 대립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표현은 글로 쓸 때 뿐 아니라 말할 때도 예사로 사용되고 있다.

(...)

기본적으로 문학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고, 예술이라는 것은 그 ‘·····같은’ 부분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것이다.

여고생이 ‘빨간 석양 같은’이라고 한마디로 끝내는 석양빛을 제대로 나타내기 위해서 화가는 오랫동안 고민한다. 자신이 경험한 ‘·····같은’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이다. 뭐든 ‘·····같은’이라고 간단하게 해결하는 모호한 감각으로는, 제대로 된 예술을 탄생시킬 수 없다.(170p) 

 

 

ㅡ 기타노 다케시,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 中, 북스코프

,

2016/6/9

 

읽음. 딱히 언급할만한 구절은 없다.

 

 

ㅡ 김찬호, <모멸감> 中, 문학과지성사

,

2016/6/8

 

단잠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을 아는 자는 드물다. 내가 거짓 증언을 하게 된다면? 내가 간음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이웃 하녀에게 욕정을 품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러한 모든 것들이 단잠을 방해한다.

그리고 모든 덕을 갖춘다 할지라도 우리는 또 하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덕들도 올바른 시간에 잠재워야 한다는 사실을.

이러한 덕들, 이러한 얌전한 아가씨들이 서로 다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더군다나 그대 때문에, 그대 불행한자 때문에 말이다!(40p)

 

그의 지혜는 단잠을 이루기 위해서는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참으로 삶이 무의미하고, 무의미를 택하지 않을 수 없다면 내 경우에도 이것이 가장 선택할 만한 무의미가 아니겠는가.(42p)

 

그렇다.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언제나 약간의 망상이 들어 있다. 그러나 그 망상 속에도 언제나 약간의 이성이 들어 있다.

삶을 기꺼이 맞아들이는 내게도 나비와 비눗방울, 그리고 인간들 가운데서 나비와 비눗방울 같은 자들이 행복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65p)

 

그대들은 자신을 견뎌내지 못하며 그대들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대들은 이웃을 유혹하여 사랑하도록 만들고 이웃을 과오를 이용하여 그대들 자신을 도금하려 한다.(104p)

 

자신의 앎과 반대로 말하는 자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무지를 무시하고 말하는 자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들은 이웃과 만나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이웃마저 기만하는 것이다.(104p)

 

잠시 동안의 어리석은 행위들, 그대들은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대들의 결혼은 잠시 동안의 어리석은 행위들을 종결시키는 하나의 길고 긴 어리석음인 것이다.(123p)

 

아, 그대들은 이 땅의 것들을 참고 견디라고 설교하는가? 하지만 사실 이 땅의 것들이야말로 그대들을 잘도 참아내고 있지 않은가, 그대 비방이나 일삼는 자들이여!(127p)

 

의사여, 그대 자신부터 고치도록 하라. 그래야만 그대의 환자에게도 도움이 된다. 스스로를 치유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 환자에게 최상의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134p)

 

 

ㅡ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민음사

,

2016/6/3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충분한 사례의 인용으로 드러내고 있는 책이다. 불안의 원인이야 빤하기 때문에 보통이 제시하는 불안의 이유보다는 해법을 더 흥미롭게 읽었다. 당연하게도 이 책을 통해 불안에 대한 대단한 해답을 얻었다기보다는 ‘그래, 이런 식으로도 생각해볼 수도 있지.’ 정도로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다.

 

살면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겠냐마는 그래도 책을 조금이나마 읽어보니 드는 생각은 단 한권으로 대단한 인생의 깨우침을 주는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포장된 책이라면 사이비일 가능성이 농후하며 당장이라도 멀리하는 게 당신의 소중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끼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마음으로 책을 읽으면 생각을 한다고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나 책에서 뭔가 대단한 해결책을 찾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인생의 해답을 책에서 찾으려는 사람들만큼 한갓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책을 많이 읽는다고 인생의 답을 얻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라면 소설가나 문학평론가의 삶을 최고로 쳐야할 것이다. 실상은 그런가?

 

덧. 166p는 너무 웃겨서 죽는 줄 알았다.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 남의 관심 때문에 기운이 나고 무시 때문에 상처를 받는 자신을 보면,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어디 있나 싶어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한다. 동료 한 사람이 인사를 건성으로 하기만 해도, 연락을 했는데 아무런 답이 없기만 해도 우리 기분은 시커멓게 멍들어버린다. 누가 우리 이름을 기억해주고 과일 바구니라도 보내주면 갑자기 인생이란 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환희에 젖는다.(22p)

 

우리가 가진 것은 그 자체만으로 평가할 수도 없고, 중세 조상의 생활과 비교하여 판단할 수도 없다. 역사적 맥락에서 우리가 놀라운 번영을 이룩했다고 강조하는 소리를 들어봤자 전혀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오직 우리가 함께 자라고, 함께 일하고, 친구로 사귀고, 공적인 영역에서 동일시하는 사람들만큼 가졌을 때, 또는 그보다 약간 더 가졌을 때만 우리는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57p)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80~81p)

 

다른 사람들이 나를 경멸하는가? 경멸하라고 해라. 나는 경멸을 받을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할 뿐이다.(158p)

 

이렇게 인간성을 통찰력 있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유용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불리한 점은 이런 관점을 따를 경우 친구가 줄어든다는 것이다.(166p)

 

혼자 사는 사람을 두고 사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것은 밤에 봉디 숲에서 산책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한테 산책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167p)

 

비극 작품은 재앙을 피하는 우리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가르치며, 동시에 재앙을 만난 사람들에게 공감을 느끼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따라서 극장을 나설 때면 쓰러지고 실패한 사람들을 우월한 태도로 대하기가 어려워진다.(206p)

 

 

ㅡ 알랭 드 보통, <불안> 中, 이레

,

2016/5/25

 

 

독서가 취미라는 학생, 그건 정말 우습다. 노동자나 정치인이나 군인들의 취미가 독서라면 모르지만, 책을 읽고 거기에서 배우는 것이 본업인 학생이 그 독서를 취미쯤으로 여기고 있다니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닌가.(18p)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언론 자유에 속한다. 남이 나를, 또한 내가 남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이해하고 싶을 뿐이지.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타인이다.(31p)

 

구도의 길에서 안다는 것은 행에 비할 때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 사람이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지식이나 말에 의해서가 아님을 그는 깨우쳐 주었다. 맑은 시선과 조용한 미소와 따뜻한 손길과 그리고 말이 없는 행동에 의해서 혼과 혼이 마주치는 것임을 그는 몸소 보여 주었다.(78p)

 

 

 

ㅡ 법정, <무소유> 中, 범우사

,

2016/5/24

 

정확히 10년 전 이맘때쯤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10년 전 대학교 1학년 때 내게 이 책은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나의 20대 초반은 대학생이라면 으레 그래야 당연하다는 듯 사회의 제문제에 관심과 열정이 충만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을 담아낼 만한 지식이 부족했다. 생경한 용어가 수시로 나오고 사회에서 당연시하던 용어, 관념, 사고방식 등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사유하도록 끊임없이 촉구하는 이 책은 내게 잠깐이나마 일상생활에서 말 한마디 하는 것조차 조심스럽게 만들고 내 생활 전체를 반추하게 했다.

 

이번에 읽었을 때는 어땠을까? 10년의 세월이 흐른 탓도 있고, 내가 그때보다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이 많아졌는지 그때만큼 어렵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슬픈 건 일부 개정되었으나 무려 10년 전 이 책에서 논의했던 문제들 대부분이 해결되긴커녕 오히려 심화되는 모습을 보이며, 낡아 보여야 마땅할 이 책이 2016년의 현재를 사는 많은 사람에게 여전히 새로울 책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이 책에 대한 칭찬이 결코 아니다. 당대의 현실, 과학기술 등을 다루는 책은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낡아 보이고 그래야 마땅하다. 가령 뇌과학을 다루는 책은 하루가 멀다고 새로운 연구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1년 전의 연구 성과를 담은 책을 1년 후에 읽어보면 옛것으로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노예제라는 당대의 현실 문제를 다룬 책도 그 시대에는 첨예한 논쟁을 낳았겠지만, 지금이야 ‘인권’이라는 개념 아래 한 인간이 인종과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인간을 노예로 삼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모두가 동의한다. 사회가 변화하면 사람들의 인식이 그에 걸맞게 바뀌는 것이 당연할진대 10년 전의 논의가 지금도 유의미하게 언급되고 쇄를 거듭하여 읽힌다는 사실은 사회에도 우리 자신에게도 결코 좋은 징조라고 할 수 없다.

 

최근에 일어난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남자들의 반응을 보자니 도대체가 이천십몇 년의 문명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 살고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사회의 무시와 냉대로 인한 열등감과 열패감으로 여자를 수차례 찔러 죽여 놓고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고 하는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지 모르겠고, 처음에는 인터넷 댓글만 그런가 했더니 직접 그 장소까지 방문하여 ‘여자들 조심하라, 남자가 화나면 이렇게 힘으로 보여 준다.’ 같은 포스트잇을 붙이는 자가 내 주변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만 아연해진다. 살인자의 정신병력만 문제 삼아 단순히 정신이상자의 묻지마 살인사건으로 치부하는 것은 너무 안일한 처사이며, CCTV를 보면 누가 봐도 여자로 대상을 정하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명백한 여성혐오를 기반으로 한 살인을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불러야 하나.

 

 

 

혁명은 사회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재정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6p)

 

세상에 하나의 목소리만 있을 때는 다른 목소리는 물론이고, 그 한 가지 목소리마저도 알기 어렵다. 의미는 차이가 있을 때 발생하며, 인식은 경계를 만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44p)

 

완벽한 어머니 일 수행의 합격선은 어머니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도달 불가능하다.(66p)

 

 

 

ㅡ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中, 교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