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9

 

읽음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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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

 

물론 돈은 절대로 돈 그 자체만이 아니다. 돈은 언제나 돈 이외의 것이고, 돈 이상의 것이다. 그리고 돈은 언제나 최종 결정권을 쥐고 있다.(10~11p)

 

나는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잡문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결국 그것 때문에 인생의 낙오자가 되었지만, 거기에는 어떤 낭만적인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가령 나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선언하고, 훌륭한 인생에 대한 일반 통념에 휩쓸리지 않고 혼자 힘으로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은 욕구 같은 것. 내 입장을 고수하고 물러서지 않으면, 아니 그렇게 해야만 내 인생은 훌륭해질 터였다. 예술은 신성한 것이고, 예술의 부름에 따르는 것은 예술이 요구하는 어떤 희생도 치르는 것, 목적의 순수성을 끝까지 지키는 것을 뜻했다.(62p)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꼴이 말이 아니군요. 정말 형편없어요.”

그래. 자네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 말인데, 자네가 해줄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네.”

이렇게 말하고는 느닷없이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내 눈을 들여다보면서 감정에 떨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자네 집으로 데려다주게. 그리고 침대에 누워서 자네와 사랑을 나눌 수 있게 해주게.”

너무나 뜻밖의 요구여서 나는 깜짝 놀랐다. 기껏해야 커피 한 잔이나 수프 한 그릇 정도를 예상하고 있었다.

안돼요, 그건. 내가 좋아하는 건 여자지 남자가 아니라고요. 미안하지만 그런 짓은 안해요.”

그가 다음에 꺼낸 말은 내가 이제껏 들은 말 중에 가장 훌륭하고 재치있는 말로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있다. 그는 1초도 낭비하지 않고, 낙담하거나 섭섭해하는 기색은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고, 어깨만 한번 으쓱하는 것으로 내 대답을 받아넘기고는, 쾌활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물었고, 그래서 대답한 걸세.”(91p)

 

 

폴 오스터, <빵굽는 타자기> ,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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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

 

여름 대목이 다가오면 대형서점의 여행서 매대는 전쟁터가 된다. 매대의 여행서들은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여름휴가를 집에서 보내는 것은 죄악이라고. 어떤 위험과 부담을 감수하고라도 여름휴가를 멋진 여행지들에서 보내라고. 인도양의 산호초, 뉴욕의 5번가, 프로방스의 작은 마을, 미얀마의 석불이 당신을 기다린다고.

언젠가부터 여행은 신성불가침의 종교 비슷한 것이 되어서 누구도 대놓고 저는 여행을 싫어합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혹시 신입사원 모집 공고마다 나오는 해외여행에 결격사유가 없을 것이라는 문구의 영향일까?). 여행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쩐지 나약하고 게으른 겁쟁이처럼 보인다. 폰 쇤부르크처럼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났더라면 우리 귀족들은 원래 여행을 안 좋아해라고 우아하게 말할 수 있겠지만 그건 우리 같은 평민들이 쓸 수 있는 레토릭이 아니다. (...) 새삼 당연한 얘기지만, 여행을 하고 안 하고는 단지 선택의 문제일 뿐이었고 지금도 그렇다.(57~58p)

 

성장은 끝나지 않는다. 모든 비극과 희극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배를 타고 고향을 떠나는 것, 술을 만들어 먹는 것만으로 온전한 성인이 될 수 있었다면 아마 문학과 연극, 영화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82p)

 

책값은 패스트패션의 가장 저렴한 옷값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싸다. 지난 십 년간 우리나라의 물가는 36퍼센트가 올랐는데 책값은 불과 18.5퍼센트밖에 오르지 않았다. 실제 가치로 본다면 책값은 십 년 사이에 더 떨어진 것이다. 종잇값도 오르고 인건비도 오르는 판에 책은 왜 더 싸지는 것일까. 스위스 명품 시계 회사 사장의 인터뷰에 힌트가 있다. 당신네 회사 시계는 왜 그렇게 비싸냐고 묻는 기자에게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필요가 없으니까요.”

의아해하는 기자에게 이렇게 부연했다.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은 값이 떨어집니다. 많은 회사들이 뛰어들어 서로 경쟁하며 값싸게 생산할 방법을 결국 찾아내거든요. 저희가 만드는 시계는 사람들에게 필수품이 아닙니다. 그러니 값이 떨어지지 않습니다.”(160p)

 

 

 

김영하, <보다>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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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

 

저를 포함한 문학작품의 독자들은 예상치 못한 찬란한 실패를 욕망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존재들입니다. 시장에 가서 잘 익은 사과를 골라 바구니에 담으면서도 막상 집에 와서 장바구니를 풀었을 때 그 사과가 여전히 그저 잘 익은 사과에 불과하면 실망을 합니다. 그것은 사과 이상(옥은 그 이하)의 전혀 예기치 못한 그 무엇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엇을 소비자는 미리 알 수가 없습니다. 미리 안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겠지요. ‘내가 뭘 원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잘 모르는 바로 그것을 내놓으라는 게 문학 독자의 욕망인 것처럼 보입니다.(168~169p)

 

한 권의 책과 그것을 읽은 경험은 독자 개인에게만 고유한 어떤 경험으로 남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독서를 왜 할까요? 그것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는 바로 그 점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거의 모든 것이 공개돼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하루하루는 시작부터 끝까지 공유되고 공개됩니다. 웹과 인터넷, 거리의 CCTV, 우리가 소비한 흔적 하나하나가 다 축적되어 빅데이터로 남습니다. 직장은 우리의 영혼까지 요구합니다. 모든 것이 털리는시대. 그러나 책으로 얻은 것들은 누구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독서는 다른 사람들과 뭔가를 공유하기 위한 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공유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 내면을 구축하기 위한 것입니다.(180~181p)

 

 

 

김영하, <말하다>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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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6

 

 

이 말을 하기에 조금은 늦은 감이 있지만 SNS시대다. 페이스북을 위시한 SNS사이트를 훑어보면 어떤 것에 대해 좋다고 칭찬하고 찬양하는 경우는 볼 수 있으나, 어떤 것이 구리다고 적극적으로 구림을 표출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왜 자신의 에너지를 그런 부정적인 곳에 써야 하냐고? 세상에 많고도 많은 구림을 감지하고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면 왜 안 되나. 나쁜 것을 넘어 형편없는 것들이 버젓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 말할 가치가 없다고 내버려두니 그 형편없음이 계속해서 존재하고 기승을 부리는 것이다. 제발 모든 취향은 존중 받을 가치가 있다는 PC한 말은 하지말자. 그렇게 모든 걸 개인 기호의 문제로 환원해 버리면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우리는 그것에 대해 무엇을 얘기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세상에는 형편없는 기호와 취향이 수두룩하고 그것을 이용해 이지성, 김난도 같은 자들이 계속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전부는 무시해도 사는데 아무 문제 될 게 없으며 오히려 그 돈을 친구와 술 먹으며 얘기를 나누는 데 사용하는 것이 사는데 더 많은 도움이 될 거라는데 내 손모가지라도 걸 수 있다.

이 얘기를 왜 하냐고? 이 글의 제목으로 써놓은 책도 별반 다를 바가 없어서이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자기계발서 따위는 안 읽어도 될 것 같다. 자기계발서로 계발이 되는 사람은 그걸 읽는 사람이 아니라 그 책을 사주는 사람으로 인해 돈을 버는 자들이다.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자기계발서들이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하면 된다.’ 이거 아닌가? 하면 되기는 개뿔 되면 하겠다. 이딴 식의 긍정주의를 사회에 만연하게 해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나 불합리한 것들은 도외시하고 네가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남들보다 열심히 살지 않아서이고, 열심히만 살면 성공할 수 있다는 헛소리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책이 자기계발서 아닌가 말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또 얼마나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께서 친히 양비론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중용의 미덕을 설파하시겠지.

 

 

하야마 아마리,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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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잘 정돈된 이야기를 읽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이고 소설에는 명백한 플롯과 손에 땀을 쥐는 드라마가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은 소설을 예술가병에 걸린 비대한 자의식의 배설물일 뿐으로 그렇게 독자들을 무시할 거면 자기들만의 성을 짓고 그 안에서 굶어 죽든 역병에 걸려 뒈지든 아무튼 알아서 하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소설이 있고 다양한 독서가 있다. 가독성이 높고 흥미진진한 서사를 가진 소설에는 그것에 맞는 독서가 있고,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러한 소설에는 그것에 맞는 독서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쉽게 읽히는 소설만이 소설이라고 주장하며 그렇지 않은 소설은 현실에 발을 붙이지 않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분노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화를 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그런 독서를 갖지 못한 게 작가의 잘못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독서의 등급을 나누려는 게 아니다. 어떤 소설이 더 낫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분노를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두 종류의 독자가 있다. 자신의 독서로 이해할 수 없는 작품 앞에서 조용히 책을 덮거나 호기심을 느끼는 독자와 작가를 향해 분통을 터뜨리는 독자. 어떤 독서로 어떤 책을 읽을지 혹은 읽지 않을지 선택하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자유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방식에서 벗어난다고 무작정 작품을 비난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207~208p)

 

스물여덟 살의 그는 또래 남자들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아니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모든 남자들이 간단없이 그러는 것처럼 자신이 그리 아름답지는 않지만 딱히 못나지는 않고 자세히 살펴보면 은근히 매력적인 것이 어디에서 꿀리지 않는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물론 그의 코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코는 한쪽으로 휘어 있었고 그는 그것도 모른 채 휘어진 코와 함께 28년을 살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더 나쁜 것은,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알고 있던 비탄젤로 모스카르다가 아니었다. 멍청이다. 흰 코로 거들먹거리는 못난이다. 그가 믿었고 또 살았던 현실은 그렇게 무너졌고, 그날 이후 그는 무시무시한 광기에 사로잡힌다.(256p)

 

코가 없는 남자에게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코가 없어졌으니 코를 찾는 것인데 코가 없기에 코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삶이란 게 그렇다.(262p)

 

그들은 곧 눈에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서 묶이고 말았다. 게다가 서로에 대해 느끼는 그들의 호감을 어떻게 설명할까? 한 사람의 하찮은 특징이나 가증스러운 결점과 같은 것들이 왜 상대방의 마음을 끄는 것일까? 첫눈에 반한다고 하는 것은 열정의 세계에 있어서는 진실이 아닐 수 없다. 일주일도 되기 전에 그들은 서로 말을 놓았다.

그들은 골동품 삼정이 늘어선 거리를 산책하고, 공예 학교, 대성당, 국영 공장, 기념관 그리고 모든 공공 전시장을 함께 다닌다. 가끔은 영국인이나 외국인인 체하면서 즐거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는 법. “생각이 많아질수록 그들은 더욱 많은 고통을 느꼈다.”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난 그들은 머리를 합쳐 세상의 모든 비밀을 풀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그들이 가진 학식과 시간이 너무 짧았던 것이다. 단조로운 사무실도 지겨워졌다. 예전에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동료들이 이제는 어리석게만 느껴졌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횟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게다가 날마다 지각을 해서 상사에게 혼나기 일쑤였다.(289p)

 

 

금정연, <난폭한 독서> ,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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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뇌 과학과 인지과학에 대해 최대한 쉬운 글을 쓰는 개리 마커스가 쓴 책이다. 같은 저자의 클루지를 흥미롭게 읽고 나서 찾아 읽게 되었다. 과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조차 없는 나로서는 쉽게 쓰였음에도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책을 덮었다. 스티븐 핑커가 쓴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책도 생각이 났다.

 

대부분의 유전자는 뇌에서나 신체에서나 동일하다. 생물학의 도구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뇌에서 발현되는 유전자와 다른 곳에서 발현되는 유전자 사이에는 거의 아무런 차이도 없다. 유전자는 유전자일 뿐이다.

또한 홀로 존재하는 유전자란 있을 수 없다. 뇌든 심장이든 신장이든 복잡한 생물학적 구조는 모두 많은 유전자들의 협동과 상호작용의 결과이지, 단 하나의 유전자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특정 행동에 대응하는하나의 유전자라는 개념이 우스울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의 행동을 만들어내기 위한 신경회로가 단 하나의 유전자로 설명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기 때문이다. 심장의 좌심실을 만드는 데 단 하나의 유전자로는 충분치 않은 것처럼, 언어에 대한 하나의 유전자나 날씨 얘기를 좋아하는 성격에 대한 하나의 유전자 같은 것은 불가능하다. 단 하나의 뇌세포나 단 하나의 심장세포조차 많은 단백질이 상호작용한 결과물이고 따라서 많은 유전자들의 결과물이다.

또한 반사작용을 제외한 모든 행동은 수많은 신경회로의 합작품이다. 포유류에서든 조류에서든, 모든 활동은 인지 체계, 경계 체계, 동기화 체계 등 수많은 체계들이 복합적으로 힘을 합친 결과이다. 비둘기가 지렛대를 쪼아 먹이를 먹는 행동을 하느냐도 비둘기가 배가 고픈지 아닌지, 피곤한지 아닌지, 주위에 다른 흥미로운 것이 있는지 없는지 등 수많은 조건에 달려 있다.(113p)

 

개리 마커스, <마음이 태어나는 곳> , 해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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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읽음.

 

 

김현, <행복한 책 읽기> ,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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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4

 

대단한 하루키 열풍에도 불구하고 하루키통이 아니라 몇 권의 소설과 몇 권의 에세이를 읽은 게 다다. 인상적인 구절들이 있지만 대단한 사유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거나 이런 건 아니다. 이건 하루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루키는 그런 작가가 아니다. 오히려 내가 하루키에게 감탄하는 점은 성실성이다. 다른 예술 분야에서 이런 성실성을 보여주는 사람으로 바로 떠오르는 사람은 우디 앨런이 있다. 이들은 짧지만 빛나는 전성기에 뛰어난 작품을 남기고 금방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라 전성기에는 못 미칠지라도 오랜 세월동안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한다. 이게 그들이 일하는 방식이다. 그러기 위해서 하루키는 담배를 끊고, 일찍 자고, 달리기를 한다. 그럼 우디 앨런은? 에스콰이어와의 인터뷰에서 우디 앨런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A corned-beef sandwich would be sensational, or one of those big, fat frankfurters, you know, with the mustard. But I don't eat any of that stuff. I haven't had a frankfurter in, I would say, forty-five years. I don't eat enjoyable foods. I eat for my health.” 이것만 봐도 이 양반이 어떻게 살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성실함이 작품의 완성도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일을 위해 이렇게나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한편 달리기를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잠깐이나마 생겼는데 겨울이라서 쏙 들어갔다.

 

 

그래서 나는 달리기를 주위의 누군가에게 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달리는 것은 근사한 것이니까 모두 함께 달립시다.” 같은 말은 되도록 입에 담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만약 긴 거리를 달리는 것에 흥미가 있다면, 그냥 놔둬도 그 사람은 언젠가 스스로 달리기 시작할 것이고, 흥미가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권한다고 해도 허사일 것이다.(73~74p)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문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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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9/23

 

 

기계의 생산력으로 인류에게 혜택을 준 발전된 경제 조직이 여가를 파격적으로 증대시키는 것으로 이어져야 마땅하지만 여가가 많아지면 상당한 지적 활동과 관심사들을 보유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루해하기 십상이다. 여가를 가진 인구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교육받은 인구이며, 또한 그 교육은 직접적 유용성을 가진 과학기술적 지식뿐 아니라 정신적 기쁨도 목표로 했음이 틀림없다.(45p)

 

이런 단락을 보면 단순히 여가시간이 주어진다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은퇴 후 넘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서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괜히 노년기에 우울증이 찾아오는 게 아니다. 러셀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꼭 교육을 통해서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하며 보낼지 충분한 고민과 숙고가 필요한 걸로 보인다.

 


숙고하는 습관의 이점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가장 심오한 것에 이르기까지에 폭넓게 걸쳐 있다. 우선 벼룩 때문에 괴롭다든지, 기차를 놓쳤다든지, 함께 사업을 하는데 걸핏하면 싸움이 일어난다든지 하는 작은 번민들부터 생각해 보자. 이런 고민거리들은 영웅적 행위의 뛰어남이나 모든 인간적 불행의 덧없음에 비하면 별로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들로 보이기 쉽다. 그렇지만 바로 그런 일들에서 생겨나는 짜증들이 많은 사람의 좋은 성격과 즐거운 인생을 망쳐 놓는 것이다.

그럴 경우, 그 순간의 문젯거리와 약간의 연관이 있을 뿐인 동떨어진 지식(실제로 연관이 있든 그렇게 생각한 것이든 간에)에서 의외로 큰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설사 그 문제와 아무 연관이 없는 지식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현재의 골칫거리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는 데는 큰 도움이 된다.

격분해서 안색이 하얗게 된 사람이 마구 공격해 올 때는, 데카르트의 열정에 관한 논문에 나오는, ‘분노로 안색이 하얘지는 사람이 안색이 빨개지는 사람보다 두려움을 더 많이 타는 이유란 제목의 장을 돌이켜보면 즐거워질 것이다.(48~49p)

 

숙고하는 습관의 이점에 대한 러셀의 위트 있는 문장

 


죽음이 떠오르면 다소 금욕주의적인 태도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다. 다시 말해 죽음의 중요성을 최소화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것을 초월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냉정하게 사고해야 한다.

이런 원칙은 다른 공포감도 마찬가지다. , 공포를 일으키는 대상을 단호하게 주시하는 것이 유일한 처치법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래, 좋아.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지?”

사람들은 전쟁터에서 죽음에 직면했을 때 이런 방법으로 대처한다. 그렇게 하고 나면 자신들이 생명을 바치려 하는 명분이나 자신이 아끼는 사람의 중요성이 확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느끼는 방법은 어느 경우에든 바람직하다.(87p)

 

이런 식의 생각은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러셀이 언급하는 것처럼 단지 죽음의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힘든 스트레스 상황이나 공포를 일으키는 대상에 대해 그래, 좆도 이게 뭐라고'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는 것. 만사가 이런 식이면 곤란하겠지만.

 


과거에는 훈육의 개념이 대단히 무시무시해서 교육이 잔인한 충동의 통로가 되었다. 아이에게 고통을 주면서 쾌감을 느끼는 일이 없이 최소한의 징벌을 내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물론 옛 관습에 젖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런 쾌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부인할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회초리로 후려치며 다음과 같이 말했던 일화는 누구나 알 것이다.

얘야, 맞는 너보다 때리는 내 마음이 더 아프단다.”

그러자 아들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아버지. 제가 대신 아버지를 매질하게 해주시겠어요?”(237p)

 

 

인생에서 만나는 고통스런 일에 대한 지식을 아이들에게 숨기려 해서도 안 되고 강요해서도 안 된다. 상황이 불가피할 때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고통스런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땐, 있는 그대로 감정을 넣지 말고 얘기해야 한다. 단 가정에서 누군가 죽었을 경우엔 예외다. 이때 슬픔을 감추려드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어른들은 슬픔 속에서도 쾌활한 용기를 보여 주어야 하며 그것을 보고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배워나갈 것이다.

청년기에는 사사롭지 않은 많은 관심사들이 젊은이들 앞에 제시되어야 하며 자기 외부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삶이 있다는 것을(드러내놓고 훈계하는 방법이 아닌 암시의 방법으로)깨쳐 주어야 한다. 불행이 닥쳤을 땐 아직도 살아야 할 이유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견뎌내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일어나지도 않은 불행에 깊이 파고들게 두어선 안 된다. 설사 그것이 불행에 맞설 준비를 하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젊은이들을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혹시 자신이 교육에 필요한 훈육적 요소들로부터 가학적 쾌감을 느끼고 있지나 않은지 스스로를 엄밀하게 감시해야 한다. 훈육의 동기는 항상 품성이나 지성의 발달에 두어야 한다. 지성에도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훈련 없이는 결코 정확함을 얻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성의 훈련은 좀 성격이 다른 문제여서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훈육은 내적 충동에서 솟아나올 때가 가장 좋다는 얘기다. 그러기 위해선 아이나 청년에게 어려운 무엇인가를 달성하고자 하는 야심이 있어야 하고 그 목적을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와 같은 야심은 흔히 주변의 누군가로부터 제의받는 수가 많다. 결국 자기 단련조차도 교육적 자극에 의해 좌우된다는 얘기다.(239~240p)

 

 


버트란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 사회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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