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5/11

 

 

내가 상대적으로 성공한 위치에 있으면 남의 실패를 안타까워하기가 더 쉬워진다. 내가 상대적으로 실패한 입장이라면 남의 성공을 기뻐해주기가 어렵다.(117p)

 

 

근본적 귀인 오류를 저지르는 우리의 성향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른 사람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 종합적인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황적 요인과 기질적 요인을 동등하게 놓고 고려한다면 남의 불행에 아무 생각 없이 웃음을 터뜨리거나 미소 짓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282p)

 

 

“난 그 사람이 싫어. 그러니까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겠어.”(288p)

 

 

 

ㅡ 리처드 H. 스미스 , <쌤통의 심리학> 中,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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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패터슨은 남부인들의 자유에 대한 사랑 역시 노예제의 효과라고 보았다. “명예와 자유에 대한 남부인들의 고도로 발달된 감각에는 기만적이거나 비정상적인 데가 하나도 없다. 타인에게 속박과 굴욕을 가하는 자들일수록, 그들이 남들에게 갖지 못하게 한 것을 자기들은 갖고 있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깨닫고 있을 테니 말이다.” 이것은 에드먼드 모건이 미국의 노예제도, 미국의 자유의 마지막 장에서 피력한 견해이기도 하다. 버지니아 식민지의 초기 역사를 세밀하게 그린 이 책에서 모건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공화주의적 열정이 어떻게 노예제도에 대한 지지와 양립할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그가 보기에 워싱턴과 제퍼슨을 비롯하여, 미국의 독립에 사상적 기초를 제공했던 버지니아인들이 모두 대농장주이자 노예 소유주였다는 사실에는 어떤 역설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노예제도가 도입된 후 버지니아에서 성장한 많은 사람들이, 그 이전 세대와 달리 열렬한 공화주의자가 되었다는 사실에는 단순한 우연 이상의 무엇이 있는데, “적어도 법률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뜻에 거의 전적으로 굴종하는 사람들의 존재는,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제군주에 지배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노예의 존재는 버지니아인들에게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웠을 뿐 아니라, 평등의 감정을 북돋우었다.(62~63p)

 

 

의례적 평등의 실현은 경칭의 인플레이션을 수반하곤 한다. 몇 해 전 뉴욕에 갔을 때 길에서 핫도그를 파는 남자에게 손님들이 sir’라는 경칭을 붙이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한국의 경우, 마트의 계산원이나 중환자를 돌보는 간병인들이 여사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평등의 제스처에는 현실적인 불평등을 은폐하는 효과도 있다. 간병인들을 여사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조건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153p)

 

 

한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다루는 또 하나의 방법은 효도나 돌봄 같은 전통적인 가치를 강조하면서 가족에게 짐을 떠넘기는 것이다. 조금 전에 생활보호 대상자를 애완동물에 비유했지만, 한국에서는 애완동물이 될 자격조차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폐지를 주워 팔면서 혼자 사는 노인이 장성한 자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초생활수급권을 얻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런 사례를 조명할 때 언론은 이 장성한 자녀에게 실제로 부양 능력이 있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만일 부양 능력이 있는데도 노인을 모시지 않는 거라면, 그 자녀는 인륜을 저버렸다는 비난을 받는다. 요컨대 문제는 시스템이 아니라 도덕과 풍습이라는 것이다. ‘시스템의 한계가 논의되는 것은 자녀 역시 막노동을 하거나 몸져 누워 있는 등 극단적인 빈곤 상태에 처해 있을 때뿐이다.(184p)

 

 

부모는 아이가 자기들로부터 나왔고, 한때 자기들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 부모는 무엇보다 아이에게 생명을 준 사람이 자기들이고, 그들이 아이를 죽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 이 망각으로부터 사회의 가능성이 생겨난다.(217p)

 

 

즉 벌은 계약의 일부이며, 벌을 받는 동안에도 계약은 유지된다. 이것은 축구 경기에서 레드 카드를 받은 선수가 운동장 바깥으로 나간 뒤에도 여전히 규칙의 지배 아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벌이 보복이라고 말한다면, 벌이 지니는 이 계약적인 속성이 깨어진다. 보복이란 본래 보복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보복은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공격을 내포한다. 그 결과, 보복당한 사람은 보복한 사람과 예전의 관계로 완전히 돌아갈 수 없다(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건 그 때문이다. 보복당한 사람이 다시 반격하지 않으면, 그는 상대방보다 낮은위치로 떨어진 채 남아 있게 된다). 반면 현대 사회에서 형벌은 규칙의 위반에 대해서만 책임을 묻고, 위반한 사람의 인격을 문제 삼지 않는다. 형기를 마친 사람은, 레드 카드를 받은 선수가 다음 경기에 출전하는 것처럼, 명예에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고 자연스럽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 사람이 사회계약에 계속 참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모든 계약은 주체들의 인격적 동등성을 전제하는 까닭이다.(232p)

 

 

우리는 죽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야말로 도덕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죽은 사람은 우리가 무엇을 준들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맺었던 관계의 본질은 우리가 더 이상 남들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게 되는 시점에 받게 될 대접을 통해 확인된다.(256p)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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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읽음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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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읽음

 

데이비드 보더니스, <시크릿 하우스> , 생각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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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읽음.

 

얄고도 얕다. 내가 대단한 교양인이라서 얕다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도대체 겨냥한 독자층이 누구인지 궁금할 정도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읽기에는 어려워 보이고 고등학생이나 성인이 읽기에는 애매하다. 게다가 설명이 너무나도 도식적이고 이분법적이다. 세금, 국가, 자유, 직업, 교육, 정의 미래 등으로 구색을 갖추어서 설명하고 있으나 결국 주된 논지는 시장주도냐 아니면 정부의 개입이냐로 나눈다. 그러나 세상 돌아가는 일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나눠지는 게 결코 아니다. 이천십몇년을 대한한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사실을 누구한테 배우지 않아도 알고 있다. 딴소리를 조금 늘어놓자면 이 책을 읽고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사실은 이런 곳이었구나. 난 이 책을 읽었으니 이제 사회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를 이해했고 시민으로서의 기본적인 교양과 덕목을 갖췄군.”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있을 거라고 본다. 나꼼수나 황우석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이 썰전의 청취자들이 이 프로그램을 보는 자기네들만 정치에 대한 엄청난 식견과 지식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빤하다. 광자여 자신을 돌아보라.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네가 아는 것을 왜 남들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나? 겨우 너조차도 아는 사실을 남들은 자신보다 접할 수 있는 정보가 부족해서, 무식해서, 팟캐스트(자기들이 듣는 팟캐스트)를 듣지 않아서, 관심이 없어서 그럴 거라고 본다. 과연 그럴까? 네가 아닌 특정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데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을까? 한국의 정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TV프로그램, 팟캐스트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채사장, <시민의 교양> , 웨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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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그러므로 독자들이여, 안심하시라. 열 권의 책을 읽든 같은 책을 열 번 읽든, 똑같이 교양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단지 전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나 걱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걱정을 전혀 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들이다.(130p)

 

 

무엇이 이 단어를 혐오스러운 것으로 만들었을까? 처음에는 속물근성으로, 다음에는 집단 심리로 인해, 필요하지 않을 때도 그 단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러저러한 전시회에 방문객이 많았다고 말해도 충분한데, 많은 향유자들이 방문했다고 말하는 경우이다. 단어가 혐오스러워지는 까닭은 바로 대중 사회가 그것을 소유하여 아무 때나 마구 사용하기 때문이다. 베토벤 역시 콜택시 회사의 주제곡으로 사용될 때는 혐오스럽게 된다.

언젠가 계단에서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그가 당신을 바에 초대하여 커피 한 잔을 대접하고, 너무 지나치지 않으면서도 불쾌하지도 않은 우스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상상해 보라. 당신은 그가 호감을 주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를 매일, 하루에 세 번 계단에서 만나는데, 그때마다 당신에게 커피 한 잔과 우스개 이야기를 강요한다고 상상해보시라.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은 그의 목을 조르고 싶을 것이다. 단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147~148p)

 

조금은 사그라든 감이 있기는 개뿔 아직도 어디에나 갖다 붙이는 그 놈의 힐링타령과 멘토타령을 보노라면 1992년의 에코가 지적한 이런 면이 비단 2016년의 한국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는 고정불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사용하는 시대와 맥락에 따라 용례가 변화되고 확장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건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이 나라는 뭐 하나가 긍정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싶으면 어디에나 갖다 붙인다. 이런 걸 보고 단어의 의미가 변화되고 확장된다고 할 수는 없다. 돌아가는 일이 누가 봐도 비정상적인 경향을 띄면 오히려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며 조심해야지 누구보다 앞장 설 일인가?

 

 

움베르토 에코, <미네르바의 성냥갑 1> ,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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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교양을 쌓은 사람들은 안다. 불행하게도 교양을 쌓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으나, 교양인들은 교양이란 무엇보다 우선 오리엔테이션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교양을 쌓았다는 것은 이런 저런 책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전체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줄 안다는 것, 즉 그것들이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각각의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내부는 외부보다 덜 중요하다. 혹은, 책이 내부는 바로 책의 외부요, 각각의 책에서 중요한 것은 나란히 있는 책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저런 책을 읽지 않았다는 건 교양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그 책의 내용을 정확히 모른다고 하더라도, 종종 그 책의 상황’, 즉 그 책이 다른 책들과 관계 맺는 방식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책의 내용과 그 책이 처한 상황의 이러한 구분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교양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별 어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덕택이기 때문이다.(31p)

 

 

그럴 듯한 말이다. 영화에 빗대어 볼까? 나만 해도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최초로 상영된 영화이니 뭐니 떠들 수 있다. 그 뿐인가. 나는 푸도프킨과 에이젠슈타인의 영화를 단 한편도 보지 않았고 앞으로도 볼 생각이 없지만 그들이 지향했던 몽타주의 개념과 서로 간의 차이점에 대해서 떠들 수 있다. 재밌는데 계속해볼까. 트뤼포, 고다르 같은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감독의 작품의 보지 않고도 점프컷이나 브레히트가 말했던 소격효과와 같은 것을 이야기 할 수 있다. 히치콕의 작품을 대략적으로 듣기만 했어도(대표적으로 싸이코의 샤워씬)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서스펜스를 쌓아올리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피스, 장 르누아르, 오손 웰즈, 존 포드, 타르코프스키, 루이스 부뉴엘, 잉마르 베리만,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 등등 이름만 들어도 아는 감독들의 목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책도 비슷하지 않을까? 플로베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마담보바리, 감정교육, 부바르와 페퀴셰 등의 저작들을 꼭 다 읽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의 본문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 각각의 목록에서 길을 잃지 않고 위치를 파악하기만 해도 그 책에 대해 충분히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피에르 바야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여름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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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4/8

 

 

 

밑줄 그을 만한 책은 아니고 나중에 과학분야의 책을 읽을 때 뒤에 실린 리스트가 도움이 될 것 같다.

 

 

 

ㅡ 이정모, 이명현, 이한음, 조진호, <판타스틱 과학책장> 中, 북바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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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4/6

 

 

페미니스트는 남자를 싫어하고, 브래지어도 싫어하고, 아프리카 문화를 싫어하고, 늘 여자가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화장을 하지 않고, 면도도 하지 않고, 늘 화가 나 있고, 유머감각이 없고, 심지어 데오도란트도 안쓴다는거지요.(14p)

 

 

나는 페미니스트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맞아, 오늘날의 젠더에는 문제가 있어, 우리는 그 문제를 바로잡아야 해, 우리는 더 잘해야 해, 하고 말하는 사람이라고요. 여자든 남자든, 우리는 모두 지금보다 더 잘해야 합니다.(52p)

 

 

 

ㅡ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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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2/3

 

 

 저자가 직접 만든 용어는 아닐지라도 맨스플레인이라는 용어를 유행시킨 계기가 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조차도 모를 때가 허다한데, 하물며 그 질감과 반영이 우리와는 달랐던 시대에 살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야 어떻겠는가. 빈틈을 메운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알지는 못하는 어떤 진실을 완전히 안다고 착각하는 어떤 거짓으로 바꾸는 일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보다 사실 더 모른다. 완결된 지식을 가진 척하는 이런 태도는 어쩌면 실패한 언어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담하게 단언하는 언어는 뉘앙스와 모호함과 성찰을 간직한 언어보다 더 간명하고 덜 부담스럽기 때문이다.(125p)

 

 

내게 희망의 근거는 단순하다. 우리는 다음에 벌어질 일을 모른다는 것, 세상에는 있을 법하지 않은 일과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꽤 자주 벌어진다는 것. (...) 절망은 확실성의 한 형태다. 미래가 현재와 거의 같거나 현재보다 쇠락하리라고 믿는 확실성이다. 곤잘러스의 공감되는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절망은 미래에 대한 확실한 기억이다. 마찬가지로 낙관도 앞으로 벌어질 일을 확신한다. 절망과 낙관은 둘 다 행동하지 않을 근거로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 현실이 반드시 우리 계획과 일치하진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야말로 희망일 수 있다.(134p)

 

 

 

ㅡ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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