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8/26

 

 

왜 사냐고 묻는 것이 뜬구름 잡는 소리라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묻는 것이 제대로 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 그렇다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할까?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저자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중에서도 책의 제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후자에 대해 더 초점을 맞춘다. 전자에 대해서는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 조지 베일런트의 행복의 조건같은 책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인간은 모두 한 번은 죽는다. 나의 부모님도 죽고, 나의 친구들도 죽을 것이며, 물론 나 역시 죽을 것이다. 슬프게도 이 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디 앨런은 이런 말을 했다. “we're just temporary people with a very short time in a universe that will eventually be completely gone. And everything that you value, whether it's Shakespeare, Beethoven, da Vinci, or whatever, will be gone. The earth will be gone. The sun will be gone. There'll be nothing.”

 

사람들은 성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것 만큼이나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조차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자기에게는 벌어지지 않을 일인 것처럼 부정하는 것이다. 상담기법 중에 직면이라는 기법이 있다. 내담자로 하여금 지금까지 직면하기를 거부해 왔던 자신의 감정, 경험 그리고 행동의 영역들을 탐색하도록 돕는 것이다. 정확히 같은 용례는 아니겠지만 이 책을 통해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직면함으로써 인간답게 죽는 것에 대해 알 수 있었고,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할까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몸의 쇠락은 넝쿨이 자라는 것처럼 진행된다. 하루하루 지내면서는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대로 적응해 가며 산다. 그러다가 뭔가 일이 벌어지면 모든 게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73p)

 

운이 좋고 꼼꼼하게 자기 관리건강한 식습관, 운동, 혈압 조절, 필요할 때 의학의 도움을 적절히 받는 것를 한 사람은 오랫동안 그럭저럭 잘 살아 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나이가 들면서 점점 많은 것들을 잃어 가다 보면 일상적인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충족하기에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버거운 상태에 이르게 된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는 경우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우리 대부분은 삶의 상당 기간을 독립적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로 보내게 될 것이다.

언젠가 벌어질 일임에도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그 결과 대부분 아무런 준비 없이 그 단계에 도달한다.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어떻게 살 것인지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지내다가 뭔가 해 보기에는 너무 늦은 시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94~95p)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어 하는지는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가설이다. 젊고 건강할 때는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믿는다. 가지고 있는 기능과 능력을 잃을까 봐 걱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세상은 네 손 안에 있다.” “마음만 먹으면 못 해낼 일이 없다.” 젊은이들은 현재의 즐거움을 기꺼이 뒤로 미룬다. 이를테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기술과 자원을 얻는 데 몇 년이고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그들은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더 큰 물결에 연결되고 싶어 한다.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친구를 비롯한 사회적 관계를 넓히는 일에 더 몰두한다.(...)그러나 삶의 사야가 축소되어 눈앞의 미래가 불확실하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삶의 초점은 지금, 여기로 변화하게 된다. 일상의 기쁨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로 옮겨 가게 되는 것이다.(155~156p)

 

스스로는 자율권을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안전하길 바라는 게 인간이라는 거예요.” 바로 이 점이 노쇠한 사람들에게 가장 크고 역설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가 애정을 가진 사람에게 바라는 일들 중에는 정작 자신은 단호히 거부하는 것들이 많다는 거죠. 자아감을 침해하는 일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에요.”(168p)

일반적인 의료 행위와 호스피스 케어의 차이점은 치료하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있다는 것이었다. 보통의 의료 행위는 생명 연장에 목적을 두고 있다. 지금 당장은 수술, 화학요법, 중환자실 입원 등으로 삶의 질을 희생하게 되더라도 시간을 좀 더 벌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한다. 호스피스 케어는 간호사, 의사, 성직자, 사회복지사 등을 동원해서 치명적인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현재의 삶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돕는다.(248p)

 

이것이 바로 수백만 번 반복되는 현대의 비극이다. 우리가 풀 수 있는 생명의 실타래가 정확히 얼마나 남았는지를 알 길이 없는 상황이라면, 그리고 실제보다 더 많이 남아 있다고 상상한다면 우리는 싸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혈관에 화학약품을 투여하고, 목구멍에 관을 삽입하고, 살에 수술로 꿰맨 자국을 가진 채 죽어 가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더 단축시키고, 삶의 질을 악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는 의사들이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사들에게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효과가 밝혀지지 않은 독성 약품을 줄 수도 있고, 종양 일부를 제거하는 수술을 할 수도 있고, 환자가 먹지 못하면 영양 공급관을 삽입할 수도 있다. 언제나 무언가 할 일은 있다. 우리는 선택 가능성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 선택하고 싶어 한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우리는 대부분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다. 자동 모드를 켜고 그 뒤에 숨어 버리는 것이다.(266p)

 

그러나 선택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삶 자체가 끊임없이 밀어닥치는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을 하나 하고 돌아서자마자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할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327p)

 

 

 

아툴 가완디, <어떻게 죽을 것인가> , 부키

,

2015/8/25

 

 

앉은 자리에서 곧장 절반 정도 읽고, 그 다음날에 다 읽었다. ‘스포츠와 여가를 읽고 난 다음이라 그랬는지 확실히 정제되고도 정제되어 원액에 가까운 단문을 읽고 난 후라 이 소설은 훨씬 수월하게 읽혔다. 처음부터 끝까지 돈에 대해 이야기한다. 돈을 어떻게 써야하는가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고, 돈이라는 것이 사람들과의 관계(친구이든 연인이든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든)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돈으로 사람을 살 수 있다는 소릴 하자는 게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관계의 지형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그리고 그 영향이라는 것은 결코 작지 않다.

단 한번의 선택으로 인생의 행로가 극적으로 바뀌었다는 말을 심심찮게 듣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본문을 인용해 부연해보면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진학이며 결혼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날 무슨 색 옷을 입었는지, 몇 시 전철을 탔는지, 그런 세세한 사건 하나하나까지가 자신을 만들어온 거란 걸 이해했다.”라고 한다. 500% 공감한다.

 

 

가키모토 리카는 1986, 스물다섯 살 때 두 살 연상의 우메자와 마사후미와 결혼했다. 식품회사에 다니는 마사후미와는 전문대학 시절 친구의 소개로 만나 약 1년가량 교제를 한 뒤 결혼했다. 결혼을 계기로 리카는 그때까지 다녔던 카드회사를 그만두었다. 장래 무엇이 되고 싶다, 어떤 일을 하고 싶다고 하는 명확한 의사도 없이 취직한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고역은 아니었지만, 특별히 즐거웠던 적도 없었다. 나는 이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리카는 근무하는 동안 줄곧 생각했었다. 명함에 적힌 자신의 이름은 카키모토 리카의 극히 일부라고, 늘 느끼고 있었다. 그 일부인 채 나이를 먹고, 어느새 자신의 일부가 완전히 자기 자신이 돼버린 게 아닐까 하고 막연히 공포를 느끼고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직할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마사후미가 결혼 의사를 넌지시 비쳤을 때는 깊이 안도했다. 자신의 일부를 일부로밖에 느낄 수 없는 부분을 완전히 잘라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리카는 미련 없이 퇴사를 선택했다.(67~68p)

 

하루하루는 다시 지루해져 갔다. 색깔 예쁜 도시락을 만들고, 아침 식사를 차리고 마사후미를 배웅하고, 텅 빈 집을 청소하고 다닌다. 한 주에 한 번 요리교실에 가서 배운 것을 며칠 안에 그대로 만든다. 빨래를 널고, 이불을 널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점심을 먹고, 저녁 메뉴를 생각하여 자전거를 타고 슈퍼에 간다. 텔레비전을 켜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영상이 매일같이 나왔다. 리카는 전혀 흥미 없는 그 영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결혼 초에는 아무런 의문도 없이 하던 일이 점점 색이 바래지고, 마치 영상 속의 장벽처럼 멀리 느껴졌다.(70~71p)

 

우메자와 씨, 단골 고객한테 인기도 있고 성적도 아주 좋아서 말이야.”

이노우에는 설득하듯이 말했다. 리카는 고객의 얼굴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8할이 정년퇴직한 노인들뿐이다. 푸념과 소문얘기, 과거 자랑이며 날마다 생각나는 걸 얘기하고 싶어서 못 견딘다. 그러나 그 얘기를 하는 상대는 도내나 지방에 사는 자식이나 배우자, 취미 클럽이나 지역 모임의 친구들이 아니라, 별로 친하지 않고, 요컨대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고 적당히 흘려들어주는 누군가다. 리카는 그런 얘기를 듣는 게 그리 힘들지 않기 때문에 그저 듣고 있다. 하고 싶은 말도 없으니까 끼어들지도 않는다. 동행한 행원이 없을 때는 사소한 일전구 갈기, 문에 기름칠하기, 병뚜껑 열기도 싫은 얼굴 하지 않고 떠맡는다. 자네가 독신이었으면 우리 며느리 삼았을 텐데, 라는 말을 몇 명한테 들었는지. 요컨대 그런 인기였다.(94p)

 

리카는 무수한 만약의 끝에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 거야라는 생각을 계속했지만, 그러나 그 몇 개의 만약을 선택했다고 해도 이렇게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망연해지다가 이어서 천천히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생각해봐야 소용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무수한 만약을 자신은 선택하지 않았고, 그리고 1997, 거의 동시에 두 가지 일은 일어났다.(184~185p)

 

그걸로 됐어. 나 늘 생각하지만, 뭔가 하려면 철저하게 하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어. 잠깐 손을 댔다가 이내 빼버리는 것이 사람으로서 가장 옳지 않다고 생각해”(207p)

 

그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서 현관을 열고 거실 문을 열고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마키코를 보고 싶지 않았다. 돈에 관련해 답이 나오지 않는 문답으로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가망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귀엽지만, 이제 끝이어도 어쩔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혼, 이라고 소리내어 본다. 지금도 그것밖에 얘기하지 않는 마키코는 위자료니 양육비니 하고 돈 얘기만 열심히 하겠지. 있는 것 전부 다 줘버려도 상관없다고도 생각했다. 아내와 아이에게 송금하기 위해서만 일하는 것, 그것도 괜찮지 않은가.(214p)

 

세상은 예전에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말캉거렸다. 그런가, 돈 있는 사람들은 이런 세계를 보는 건가, 리카는 생각했다.

레스토랑에서도 바에서도 백화점에서도 부티크에서도, 리카 네를 맞이해주는 사람들은 웃는 얼굴이 끊이지 않았다. 아주 친절하게, 농담 한두 마디를 섞어서 진심이 담긴 인사를 해주었다. 거기에는 악의도 경멸도 오만불손함도 없고, 그저 포근한 선의만이 있었다. 리카는 은행에 거액의 정기예금이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모두가 그렇다고는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확실히 현실과 동떨어진듯한 사람들이 있었다. 해맑게 웃고, 목소리가 거칠어지지 않고, 사람을 밀어내지 않고, 쉽게 사람을 믿고, 악의 같은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이 누군가가 자신을 상처 입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돈이라는 폭신폭신한 것에 둘러싸여 살아왔을 것이다.(252~253p)

 

돈이라는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어째선지 보이지 않게 된다. 없으면 항상 돈을 생각하지만, 많이 있으면 있는 게 당연해진다. 100만 엔 있으면 그것은 1만 엔이 100장 모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 처음부터 있는, 무슨 덩어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은 부모에게 보호받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그것을 누린다.(297~298p)

 

 

가쿠다 미쓰요, <종이달> , 예담

,

2014

 

 

나는 이른바 추가 볼베어링으로 고용되었다. 추가 볼베어링이란 별다른 의무 조항 없이 언제든 그냥 내보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말한다. 오랜 본능의 깊은 우물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충고를 마음에 새기고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기로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무엇이 세상사를 계속 순조롭게 흘러가게 만드는지를, 무엇이 어머니처럼 우리를 돌봐주는 회사를 최선의 상태로 유지하게 만드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해야 회사의 불합리하고, 지속적이고, 쩨쩨하고, 사소한 모든 요구 사항을 만족시킬 수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194p)

 

나는 예전에 전미암협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공짜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온몸에 부스럼이 났고, 현기증을 일으켰으며,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래서 거기에 갔지만 나는 삼 주 후에 오라는 예약증만 받아왔다. 요즘의 모든 미국 꼬마들처럼 나 또한 그때 늘 그런 얘기를 들어왔다. 암은 초기에 잡아라. 그래서 그걸 초기에 잡기 위해서 찾아갔더니 그 작자들은 약속만 잡아놓고 삼 주를 기다리게 만들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듣는 얘기와 현실의 괴리이다.

삼 주 후에 나는 다시 찾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몇 가지 검사를 공짜로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설령 그 검사를 무사히 통과한다고 해도 내게 암 덩어리가 없다는 사실을 완벽히 보증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만일 이십오 달러를 내고 받는 검사를 통과한다면, 암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지간히 확신할 수 있다고 했다.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싶다면, 이십오 달러짜리 검사를 받은 후에 칠십오 달러짜리 검사를 받아야 하고, 만일 거기까지도 무사히 통과한다면, 정말 안심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나의 문제가 알코올중독이나 신경과민이나 성병임을 의미하는 게 될 것이다. 그 작자들, 전미암협회에서 일하는 그 흰색 가운을 입은 애송이들은 정말로 그럴듯하고 명료하게 말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간단히 얘기하면, 백 달러가 든다는 거로군. 아니, 그게 아니라. 그들이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길로 그곳을 나와서 사흘 동안 술독에 빠져 살았다. 그러자 모든 부스럼이 어지럼증과 함께 사라져버렸고 더 이상 피를 토하지도 않았다.(245~246p)

 

 

찰스 부코우스키, <팩토텀> , 문학동네

,

2015/8/23

 

 

무슨 일이 있었던가? 그들은 함께 떠났고 사랑을 나누었다. 그건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측했어야 했다. 그건 그저 하나의 달콤한 사건, 어쩌면 환상의 끝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무해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그 모든 일이 일어났음에도 그토록 서로 분리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고립된 느낌, 나아가 살기까지 느껴진다.(85p)

 

그는 방안을 둘러본다. 모든 것이 진부하고 모든 것이 남루해 보인다. 때때로 그는 그녀의 부족한 점들 때문에 기운이 빠진다. 그녀의 단점들은 중요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종종 너무나도 생생하고 확실해서 그녀의 다른 특징들을 덮어버린다. 재기 넘치는 말과 생기에 가려진 이런 확고부동한 특징을 그는 이제야 포착하기 시작했다.(139p)

 

지속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우리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그 사실이 그들 두 사람 위에 선고되지 않은 판결처럼 걸려 있다. 그들의 침대에 누워 있다. 안마리의 모든 기쁨은 그들이 이제 막 시작했다는 사실, 그들 앞에 결혼이, 오툉과의 작별이 놓여 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반면 그는, 그녀의 꿈들을 인화한 네거티브필름처럼 정반대로 느낀다. 딘에게 매 순간이 그토록 통렬한 것은 끝에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이 사실을 의식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그는 정말 자기 자신의 운명을 감지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다나로서는 단언할 수 없다.(151~152p)

 

 

제임스 설터, <스포츠와 여가> , 마음산책

,

2015/8/21

 

 

경마가 없는 날. 정상이라는 느낌이 드는 게 묘하다. 헤밍웨이에게 투우가 필요했던 까닭을 난 안다. 그에게 투우는 삶이라는 그림을 끼울 액자 같은 것으로, 자기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를 일깨워주었으리라. 때때로 그걸 우린 잊어버린다. 기름 값을 지불하고 엔진오일을 교환하는 등등에 정신이 팔려서.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준비가 없다, 제 자신의 죽음이건 남의 죽음이건. 사람들에게 죽음은 충격이고 공포다. 뜻밖의 엄청난 사건 같다. 염병, 어디 그래서 되겠나. 난 죽음을 왼쪽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때때로 꺼내서 말을 건다, “이봐, 자기, 어찌 지내? 언제 날 데리러 올 거야? 준비하고 있을게.”

꽃이 피어나는 것이 애도할 일이 아니듯, 죽음도 애도할 일이 아니다. 끔찍한 건 죽음이 아니라 인간들이 죽기까지 살아가는 삶, 또는 살아보지 못하는 삶이다.(17p)

 


암만 컴퓨터라고 해도, 제아무리 많은 정보를 입력해도, 우승마를 점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의 제안을 듣는 대가로 돈을 낼 때마다, 우린 손해를 보게 된다. ‘어떤 사람엔 상담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 중개인, 강습회 강사 등등도 다 포함된다.

실패 뒤 자신을 추슬러 움직여나가는 것보다 더 큰 가르침을 주는 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두려움에 시달린다. 사람들은 실패를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실패하고 만다. 그들은 너무 길들여졌고, 뭘 할 건지 지시받는 데 너무 익숙하다. 그게 가족에서 시작해서 학교를 거쳐 사회생활로 이어진다.(71p)

 


젊었을 땐 나았다. 아직 뭔가를 찾고 있었으니까. 난 밤거리를 어슬렁대며 찾고 또 찾고...사람들과 어울리고, 쌈박질하고, 또 찾았다...아무것도 찾아내진 못했다. 그러나 그 전체적인 광경, 그 아무것도 없음이 날 그다지 압도하진 않았다. 친구를 제대로 찾지도 못했다. 여자로 말하자면, 새 여자를 사귈 때마다 희망을 품었지만, 그것도 풋내기때만 그랬다. 일찍부터도 난 사정을 알아채고, ‘꿈의 아가씨찾기를 그만뒀다. 그저 악몽 같은 여자만 아니길 바랐다.(163~164p)

 


사람들에겐 그런 게기득권 세력에 대한 반대, 부모에 대한 반대, 이런저런 것에 대한 반대가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성공한 백만장자 록그룹은 그들이 뭐라 말하든, 그들 자신이 기득권 세력이다.(165p)

 

 


찰스 부카우스키,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 모멘토

 

 

 

 

,

2015/8/19

 

 

제임스 설터의 소설 중 처음 읽은 책. 단편집으로 중산층의 색다를 것 없는 삶의 드라이한 모습과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파리 리뷰에서 제임스 설터 본인에게 어떤 책을 쓴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지 두 권 고르라고 했는데 “스포츠와 여가”와 “가벼운 나날”을 골랐다. 둘 다 장편인데 어떨지 궁금하다.

 

 

누군가를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녁을 함께 먹고 카드를 몇 번 쳤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은 실제로 아무것도 모른다. 언제나 놀라게 된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19p)

 

그가 한 가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무리 안정적인 것 같은 사람이라도 심각한 위기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악재가 몇 번 연속으로 일어나면 그뿐이었다. 그런 일들은 경고도 없이 일어났다. 때론 손을 쓸 수 있었지만 때론 어쩔 도리가 없었다.(69p)

 

취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그건 학습되고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얘기를 가끔 했다. 무엇을 바꿀 수 있고 또 바꿀 수 없는가에 대해서. 사람들은 언제나 뭔가, 말하자면 어떤 경험이나 책이나 어떤 인물이 그들을 완전히 바꾸어놨다고들 하지만, 그들이 그전에 어땠는지 알고 있다면 사실 별로 바뀐 게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상대방이 매력적이긴 해도 완벽하지는 않을 때, 사람들은 결혼한 다음에 전부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론 잘해야 한 가지 정도를 바꿀 수 있을 뿐이고, 그것마저도 결국은 예전처럼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99p)

 

그 집뿐이었다. 나머지는 그리 강렬하지 않았다. 삶을 꼭 닮은 장황한 소설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다 어느 날 아침 돌연 끝나버리는. 핏자국을 남기고.(186p)

 

 

ㅡ 제임스 설터, <어젯밤> 中, 마음산책

,

2015/8/18

 

 

“만”을 읽고 다음으로 고른 책. 형식의 측면에서도 참신했고 소위 ‘악마주의 작가’라고 불릴 정도로 이 작품 말고도 전반적인 작품에서 성과 여자의 미에 대해 논하는 게 신기하다. 게다가 노골적인 묘사와 충격적인 상황설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걸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드러낸다. 특히 6월11일 마지막 일기로 소설의 전 내용을 아우르며 마무리 짓는 장면은 충분히 인상적이다.

 

덧. 번역계의 상황을 몰라서 하는 소리인지도 모르지만 다른 건 몰라도 작가의 이름은 번역할 때 통일이 되었으면 한다. 타니자끼 준이찌로오는 뭐 어쩌라는 말인지? 부코우스키, 부코스키, 부카우스키 역시 점입가경이다.

 

나는 나의 1월 4일 일기에서 “나는(남편의 일기장을) 절대로 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스스로 정해둔 한계를 넘어서 남편의 마음속까지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내 마음속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듯이 다른 사람의 깊은 마음속을 속속들이 아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나는 내 마음속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의 깊은 마음속을 속속들이 아는 것”을 좋아한다.(166p)

 

ㅡ 타니자끼 준이찌로오, <열쇠> 中, 창비

,

2015/8/17

 

 

향기에 반하는 것은 향기를 피워올린 그 순간뿐이고, 술맛에 감동하는 것은 술을 마시기 시작한 찰나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충동에도 그와 같은 순간이 존재한다고 믿네. 별다른 감정 없이 그 단계를 지나 상대에게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친밀함은 느껴지지만 이성을 향한 촉각은 점점 마비되는 것 아니겠나.(190~191p)

 

자네, 아직도 기억하는가? 내가 언젠가 자네에게 이 세상엔 나쁜 사람이라고 정해진 인간은 없다고 한 말을. 대부분 선량한 사람들이지만 한순간에 나쁜 사람이 돼버리니 방심하면 안 된다고 한 말을 말이네. 그땐 자넨 내가 흥분하고 있다고 지적했지. 그리고 어떤 경우에 선량한 사람이 나쁜 사람으로 변하냐고도 물었지. 내가 한마디로 ‘돈’이라고 대답하자 자넨 영 석연찮다는 표정을 지었잖나. 나는 그때의 자네 얼굴을 잘 기억하고 있네. 지금에서야 털어놓네만, 그 말을 하면서 난 작은아버지와의 일을 떠올렸던 거야. 내 대답은 ...사상 문제를 깊숙이 탐구해 나가려는 자네가 듣기엔 시시했을지도 모르지. 너무 진부한 대답이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냉철한 두뇌로 새로운 발견을 입에 담기보다 뜨거운 혀로 평범한 원리를 이야기하는 편이 살아 있는 것이라고 믿네. 피가 돌아야 몸이 살아 움직이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야. 진실을 담은 말은 의미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보다 강한 힘을 갖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지.(196~197p)

 

술은 끊었지만 일을 할 생각은 없었지. 일이 없으니 다시 책을 펴드는 수밖에 없었네. 하지만 끝까지 독파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책을 덮기 일쑤였지. 아내는 가끔씩 내게 그렇게 공부를 해서 뭘 할 거냐고 물었네. 나는 슬쩍 웃어 보이기만 했어. 하지만 속으로는 이 세상에서 내가 유일하게 믿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날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생각하니 씁쓸했지. 이해시킬 방법은 있지만, 이해시킬 용기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 더욱 슬퍼졌네.(331p)

 

ㅡ 나쓰메 소세키, <마음> 中, 문예

,

2015/8/16

 

 

이 책을 읽음으로써 산시로, 그 후, 문으로 이어지는 소세키의 전기 3부작을 다 읽게 되었다. 완벽하게 이어지는 소설들이 아니고 각 작품들이 독립적으로 훌륭하지만 다 읽고 난 후의 감상은 어차피 다 읽을거라면 저 순서대로 읽는 게 훨씬 몰입해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이스케가 스스로 놋쇠가 되는 것을 감수하게 된 것은 갑작스레 엄청난 파란에 휘말려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심기일전하게 되었다는 등의 멜로드라마와 같은 내력을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다이스케 특유의 사색과 관찰의 힘으로 스스로 조금씩 도금을 벗겨온 것에 불과했다. 다이스케는 그 도금의 대부분은 아버지가 덮어씌운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아버지가 금으로 보였다. 많은 선배들이 금으로 보였다.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은 모두 금으로 보였다. 그래서 자신의 도금이 고통스럽게 여겨졌다. 한시바삐 금이 되고 싶어서 안달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도금으로 가려져 있던 다른 사람들의 바탕쇠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들여다보고 나니 갑자기 이제까지 매달려 왔던 것이 부질없는 짓으로 생각되었다.(99p)

 

“그럼 극히 고상한 예를 들어서 설명해 주지. 진부한 이야기지만, 어떤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어. 오다 노부...나가가 어느 유명한 요리사를 고용했는데, 그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처음으로 먹어보고 너무 맛이 없어서 심한 잔소리를 했다는군. 요리사로서는 최상급의 요리를 만들었는데 야단을 맞자 그 다음부터는 적당히 이류 내지는 삼류의 요리를 주인에게 만들어주었더니 내내 칭찬을 받았다고 하네. 그 요리상의 경우를 보게. 생활을 위해서 일을 한다는 점에서는 빈틈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자신의 기술인 요리 그 자체를 위해서 일한다는 점으로 봐서는 매우 불성실한, 즉 타락한 요리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108p)

 

영웅의 명성이란 그만큼 변화무쌍한 것이다. 그건 결국 대부분의 경우 영웅이란 그 시대에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는 의미인 고로, 이름만으로는 대단한 것 같지만 본래는 매우 현실적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중요한 시기를 넘기면 세상은 그 자격을 점점 빼앗으려 든다. 러시아와 한창 전쟁 중일 때야 폐색대란 중요한 것이었지만, 평화를 되찾은 새벽이 되면 백 명의 히로세 중령도 완전히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세상은 이웃 사람에 대해 아주 타산적이지만 영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251p)

 

그는 원래 태도가 불분명한 편이었다. 누구의 명령도 그대로 따른 적이 없는 대신에, 그 누구의 의견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저항해 본 적이 없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약삭빠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처럼 보이기도 하는 태도였다. 그 자신조차도 그 두 가지 비난 중 어느 쪽을 들어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주된 원인은 약삭빨라서도 우유부단해서도 아니고 오히려 그가 융통성 있는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어서 두 가지를 동시에 볼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로 그 능력 때문에 이제까지 외곬으로 돌진하려는 용기를 상실하곤 했다. 그래서 다가가지도 물러나지도 않은 채 그대로 현상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현상을 유지하려는 그의 태도가 생각이 부족해서가아니라 오히려 명백한 판단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그가 평소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과감한 태도로 신념을 밀고 나갈 때 비로소 자각할 수 있었다. 미치요와의 경우가 바로 그 적절한 예였다.(304p)

 

 

ㅡ 나쓰메 소세키, <그 후> 中, 민음사

,
2015/8/11

사놓고 미루고 미루다가 드디어 읽었다. 아쉬운 점은 영화를 통해 전체적인 내용을 알고 있는 상태로 봐서 몰입도가 조금은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와 책은 다른 매체이고 다 읽은 뒤의 감상으로는 책과 영화 모두 흥미로웠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언 매큐언 소설들(토요일, 체실 비치에서, 속죄)의 특징은 주제를 점층적으로 쌓아올리는 방식이다. 그래서 읽다가 중도에 포기하면 의미가 없다. 끝까지 읽어야 한다(다른 책이야 안 그렇겠냐마는). 게다가 묘사가 끝도 없이 길어지는 경우도 있고, 속죄 같은 경우에는 분량도 만만찮아서 초반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 겉으로 드러난 내용과 반전(?)을 제외하고도 생각해볼 여지가 많은 책이다.


그녀가 이렇게 흥분하는 것은 선과 악, 영웅과 악당이라는 피곤한 투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세 사람 중에는 악한 사람도 특별히 선한 사람도 없었다.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굳이 교훈이 있어야 할 까닭도 없었다. 단지 타인의 마음도 똑같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애써 기억하면서 자신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살아 숨쉬는 각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그리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교훈이었다.(66~67p)

언젠가 손님들을 초대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무슨 분야인진 몰라도 과학을 가르친다는 어느 교수가 분위기를 바꿔볼 요량으로 큰 장식촛대들 위를 날아다니는 벌레 몇 마리를 가리키며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이 벌레들을 빛 속으로 유혹하는 것은 빛 너머에 있는 더 깊은 어둠이라고 했다. 벌레들은 잡아먹히는 한이 있더라도 빛의 가장자리에 있는 가장 어두운 곳을 찾아가려는 본능에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곤충들 눈에 보이는 빛 속의 어둠은 착시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그의 이런 설명은 궤변처럼, 단지 설명을 위한 설명처럼 들렸다. 어느 누가 곤충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세상 모든 것에 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데도 그것들을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세상사를 그르치는 일이며 쓸데없는 짓일 뿐 아니라 화를 부를 수도 있다. 어떤 일들은 정말로 그렇다.(215p)

ㅡ 이언 매큐언, <속죄> 中, 문학동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