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3/27

 

 

 

내 트위터는 끔찍했다. 물론 트위터 전반이 끔찍하긴 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2014년 후반부에 누군가 트위터에 있는 모든 걸 끔찍하게 만드는 버그를 풀어버린 것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트위터 덕분에 많이 웃었는데’하고 한탄했다. 더 이상 트위터로 웃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때 트위터에는 웃기고 흥미로운 트윗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지루하고 끔찍한 헛소리밖에 없었다.

(...)

예민하고도 뚱했던 10대 시절 내게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가 트위터였다. 나는 진심으로 트위터가 특별하고 또 선하다고 믿었는데, 이제는 진실이 내 앞에 드러나 있었다. 트위터는 기생충 같은 떠버리들로 바글거리는 소름 끼치는 지옥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아닌 군주가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으며 오직 파괴하고 해체하고 불평하고 화내고...(24-25p)

 

 

삶은 현재형 시제로 살면서 미래를 곁눈질하는 동시에 과거형으로 해석하는 것이었음에도 일인칭 시점이란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여기서 문학과 삶의 핵심적인 차이가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독자가 평소 자신의 고뇌 어린 일인칭 시선에서 벗어나 또 다른 일인칭 의식에 이입할 수 있었다. 실제 삶의 일인칭 시선을 규정하는 요소들은 제거되고, 의심과 결단을 반복하는 실질적 일인칭 의식은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고 나서 일시적으로나마 소설이라는 다른 일인칭 시점에 이입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부엌 식탁에 앉아 만약 삶에서의 일인칭 시점을 특징짓는 요소가 고뇌이며 그것이 일인칭 소설을 읽을 때 제거되고 만다면, 소설에는 근본적으로 일인칭적인 요소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얼굴을 만지며 생각했다. 그런 의미로 ‘문학에서 일인칭이란 근본적으로는 삼인칭이지 않은가’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내 소설의 두 버전은 서로 같다고 말이다.(103p)

 

 

나는 늘 사람들이 생각과 행동을 나란히 진행하거나, 혹은 그 둘이 우연히 연결되는 방식으로 자기 행동을 제어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기는 불가능했다. 우리는 불가해한 경험을 한 뒤 최선을 다해 언어와 이미지를 이용하여 그 경험을 자신에게 설명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다음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으려 애쓰듯 우리의 마음을 읽는 것이었다. 우리는 생각한 다음 행동하지 않는다. 생각과 행동의 관계가 결코 직선적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인간은 총체적으로 행동하는데ㅡ그중 오직 일부분만이 의식적인 생각이다ㅡ, 이때 해석이라는 행위를 하려면 사람은 스스로를 관찰해야만 했다.(108p)

 

 

 

ㅡ 조던 카스트로, <노블리스트> 中, 어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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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13

 

 

감기에 걸려서 끙끙 앓다가 허브차를 마시는 삶은 어떤 삶일까. 아마도 감기로 휴가를 내도 눈치가 보이지 않는 삶, 퇴근이 오후 4시인 삶, 신선한 음식을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삶, 푹 쉴 수 있는 삶, 그래서 몸의 자연 치유력을 믿을 수 있는 삶 아닐까. 반대로 항생제를 바로 먹어야 하는 삶은 빨리 나아야 하는 삶, 휴가를 낼 수 없는 삶, 퇴근이 밤 9시인 삶, 나약하다는 말이 두려운 삶, 자리가 보전되지 않는 삶, 그래서 힘들어도 버텨야 하는 삶일 것이다.(25-26p)

 

 

ㅡ 오지은, <아무튼, 영양제> 中,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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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2/25

 

화제의 책을 읽었다. 감상은 글쎄 이걸 뭘 이렇게나 좋아하는지... 그래도 짧으니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읽어봐야지.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28p)

 

 

ㅡ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中,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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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2/17

 

soso.

 

희영이 가진 장점들의 상당수는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몇 가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타인의 상처에 대해 깊이 공감했고, 상처의 조건에 대한 직관을 지니고 있었다. 글쓰기에서는 빛날 수 있으나 삶에서는 쓸모없고 도리어 해가 되는 재능이었다.(59p)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79-80p)

 

 

다희씨는······ 그녀는 머뭇거리면서 말을 골랐다. 저는······ 다희씨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조금은 좋아하게 됐어요.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에요.

그 말을 할 때 자동차가 인안대교에 들어섰다. 그곳에서, 둘은 언제나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득 그녀는 말하고 싶었다. 다희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다희의 눈썹. 다희가 얘기할 때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눈썹을 보면서, 사람에게 눈썹이라는 게 있었구나. 눈썹이라는 게 꼭 마음과 통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그리고 사실 그녀는 귤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말도. 그렇게 껍질을 까서 하나하나 손바닥에 올려주던 마음이 고마워서 그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고, 결국엔 귤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말도. 다희가 더 깊은 이야기를 할까 한편으로는 두려웠다는 말도. 사람들은 때로 누군가에게 진심을 털어놓고는 상대가 자신의 진심을 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상대를 증오하기도 하니까. 애초에 그녀는 깊은 이야기를 할수록 서로 가까워진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말도. 그렇지만 다희가 그녀로 하여금 말하게 했고, 그 사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말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서 멀어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는 사실도. 하지만 그녀는 그중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120-121p)

 

 

그때 내 마음에서 나는 옳고 언니는 그르고, 나는 맞고 언니는 틀리고, 나는 알고 언니는 모르고, 나는 할 수 있고 언니는 할 수 없고, 나는 용감하고 언니는 비겁하고, 나는 독립적이고 언니는 의존적이고, 나는 떳떳하고 언니는 비굴하고, 나는 배려하고 언니는 이기적이고, 나는 언니를 지켰고 언니는 나를 버렸지. 모든 것이 분명해서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믿었어. 하지만 긴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그중 어느 하나도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에게 너희 엄마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질 때가 있어. 내가 네가 모르는 언니의 모습을 알고 있듯이 너는 내가 모르는 언니의 모습을 알고 있겠지. 그리고 우리 둘 다 아는 모습도 있을 거야. 이를테면 무언가에 집중할 때면 미간을 찌푸리는 표정, 낮은 웃음소리, 빠른 발걸음, 잠들기 전에 크게 기지개를 켜는 모습, 모로 누워 조용히 자는 얼굴, 중요한 말을 하기 전에 음······ 하고 한 박자 뜸을 들이는 버릇, 신 음식을 먹을 때 찡그리는 표정, 할말을 속으로 ㅅ삼킬 때의 얼굴, 뒷짐을 지는 버릇······(175p)

 

 

엄마에게 이모는 책임감이 강하고 엄격한 언니였고 아빠에게 이모는 어려움을 겪는 가족을 도와주지 않는 냉정한 사람이었다. 데이케어 센터의 복지사는 이모가 평상시에는 조용하다가 한 번씩 화를 내는 충동적인 성격의 노인이라고 말했다. 그 모든 평가와 판단을 모두 모은다고 해도 그것이 이모라는 사람의 진실에 가닿을 수는 없을 것이다.(263-264p)

 

 

마이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기남은 그애가 한 계절만 지나도 오늘의 일을 잊을 거란 걸 알았다.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그애에게 그저 말고 낯선 혈육이 되리라는 것도. 하지만 그 사실이 자신을 더는 슬프게 하지 않는다고 기남은 생각했다.(320p)

 

 

 

ㅡ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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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2/8

 

총 열 권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마무리. 시리즈가 이어질수록 함께 일하는 유능한 동료들과의 착착 맞아떨어지는 협업이 돋보였다. 시리즈의 시작이었던 ‘로재나’를 다시 읽어보면 느낌이 어떨지 궁금하다.

 

 

 

 

“와줘서 고맙습니다.” 브락센이 말했다. “이런 일에 와줄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생각을 알 것 같았습니다.” 마르틴 베크가 말했다.

“그게 문제죠.” 브락센이 말했다. “남의 생각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걸 지지하고 나서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91p)

 

 

 

ㅡ 마이 셰발, 페르 발뢰, <테러리스트> 中, 엘릭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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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2/2

 

제일 재밌어 보이는 ‘올림픽공원 산책지침’만 읽었다. 혹시나 타이밍이 맞으면 다른 작품도 읽어볼지도.

 

 

 

“인간의 가장 강력한 감정은 노스탤지어라고 학교에서도 배우지 않아? 아니 너희 때는 아직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고 배우려나. 지수야, 너는 실제로 희망으로 움직이는 사람을 본 적 있어? 잠깐이면 가능할지 몰라도 희망은 장기적 동력이 될 수 없어. 의외로 휘발성이 강한 감정이라고.”

인류사 대부분의 위대한 발견은 고칠 수 없게 된 과거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에서 비롯됐고,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것은 날씨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얘기였다.(54-55p)

 

 

선물도 못 주고받게 하면서 무슨 크리스마스야. 지수는 몇 번 불평한 터였다. 사실 지수는 에이와 반대였다. 상습적 불평쟁이였다. 하지만 불평하지 않는다고 아쉬워하지 않는 게 아니듯 불평한다고 해서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62p)

 

 

 

ㅡ 지동섭 외, <제3회 문윤성 SF 문학상 중단편 수상작품집> 中, 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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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2/2

 

평이한 문장들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밀도가 높다면 높고 사유만 실어나르는 듯한 문장이 불쑥불쑥 등장한다. 그런 방식을 이 책에서만 쓴 건 아니고 이미 전작들인 ‘개의 설계사’,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에서도 비슷했으므로 놀란 건 아니겠으나 이번 작품을 읽고는 마음이 아주 약간 식었다. 나는 반복을 계속 경험하는 것에 남들만큼 재미를 못 느낀다.

 

 

 

 

 

나는 그 애가 어떤 식으로 아이들을 길들이는지 잘 알았다. 안혜리의 가장 큰 매력은 넓고 깨끗한 집이나 외모 따위가 아니라 기꺼이 바칠 수 있는 것과 희구하는 것을 각자의 저울에 올렬서 마술 같은 균형을 맞추는 재주였고, 그래서 그 애는 어떤 의미로든지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김은아도, 나도, 윤서래도, 다른 애들도 안혜리에게서 자신의 갈망을 찾으려 애썼다. 그리고 그게 사기에 불과했음을 깨달은 뒤에도 흔적에 충성을 바쳤다.(32p)

 

 

평범한 아이들은 차별이 나쁘다는 말에 선뜻 동의했지만 그게 싫어하는 애의 약점이 되면 금방 물어뜯었다. 혹은 그 애가 물어뜯기는 장면으로부터 눈을 돌려 공범이 되었다.(54p)

 

 

성적표의 숫자나 아양을 떠는 태도 따위로 학생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좋은 교육자일 수 있겠지만, 그런 기준을 갖추는 게 차라리 나으리라고 했다. 요컨대 이 사람은 본질을 보려고 애쓰다가 오히려 속물이 되는 유형이었는데, 덕분에 나는 국어 시간에 고등학교 2학년 수학 문제를 푸는 모범샘들보다 더 많은 점수를 얻고 있었다.(89p)

 

 

유치원생들에게 참치를 그려보라고 하면 물고기가 아니라 통조림 캔을 그린다고들 했다. 진짜 참치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잘 정리된 언어는 뼈대와 비늘을, 씹을 수 없거니와 혀에 상처까지 남기는 부분을 우리에게서 벗겨내기 위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무해하고 다정한 환대를 말하는 책들이 우리를 우아하게 모욕한다고 느꼈다. 우리를 매대에 올릴 만한 상품으로 소모시켜버린다고 느꼈다. 이 정도의 누추함은 감당할 수 있다는 오만을 판매하는 것이다. 어둡고 질척한 덩어리에서 슬픔과 연약함처럼 투명한 감정만 추출하고 기이함과 추함과 주먹질과 발작적인 웃음 따위는 모두 없는 척 내버리는 것이다.

쓰레기장에 핀 꽃을 보고 감동하지만 악취에는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 오로지 검댕을 이기고 핀 꽃을 보기 위해서만 쓰레기장에 발을 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많았다. 그 사람들은 쓰레기 더미의 명세를 알려고 하지 않았고, 해로운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거나 도리어 치워 없애려 들었다.(92-93p)

 

 

울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닌데도 우는 사람이 너무 많다. 하긴 울어서 해결될 만큼 사소한 문제만 있으면 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132p)

 

 

태초의 인간은 선악과를 먹은 뒤에야 자신이 벌거벗었음을 깨닫고 수치심을 느꼈다던데, 내가 딱 그 꼴이었다.

(...)

예상하긴 했지만 지금껏 살아온 곳과 해온 것들이 한순간에 모두 부끄러워졌고, 상식적으로 생각하려는 시도는 자해 같았다. 속물이라도 되고 싶었는데 그럴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쓰레기장을 외면함으로써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려면 일단 쓰레기가 아니어야 하는 법이다.(154p)

 

 

내가 논하고 싶은 것은 남의 엄마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상식이 아니다. 내 엄마에게는 이런저런 사정이 있으며 나는 그런 애가 아니라는 항변도 아니다. 전혀 다른 것이다. 만약 내 엄마가 그런 여자고 내가 그런 애라면, 너희는 나를 이렇게 취급해도 되냐는 것이다. 만약 내가 공부할 마음조차 다잡지 못해서 그 길로 흘러갔으면, 나는 이대로 버러지 취급을 받아도 되냐는 것이다. 예쁘지도 선하지도 않은 것이라면 구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저 짓밟아버려도 되냐는 것이다.

(...)

악함과 약함과 불쌍함은 다른 체계일지라도 뒤섞여 있다. 슬픈 사연만으로 면죄부를 주었다가는 세상이 무너지겠지만 그 사연이 없었더라면 죄도 없었을 것이다. 세상은 정말로 앞뒤가 맞지 않은 방식으로 질서정연하다.(160-161p)

 

 

포착하기란 하나의 상을 확정하며 시야 바깥을 잊는 일이고, 말하기란 보이는 것에 언어를 덧씌우고 나머지를 거스러미처럼 내버리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이 삶이 어디에서 출발했고 어디로 가는 중인지를, 무엇을 갚고 무엇을 청구할지를 정하는 일이다. 그런데 인간은 여러 곳을 동시에 볼 수 없고 생각이 뻗는 범위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보통은 순간적인 이미지에 눈이 멀거나 이미 지어진 말을 빌려 쓰게 된다. 프랜차이즈의 햄버거 세트처럼 건강이나 맛이나 영양소가 조금씩 부족하지만 언제든 시켜 먹을 만큼 간편한 말들. 낯선 가게에 들르는 도박이나 스스로 요리하는 곤란을 피하도록 도와주는 도구들. 그러니까 괴물을 죽이는 것은 도덕적인 일이라고들 하지만 어떤 괴물에게는 이런저런 사정이 있고, 마음 편히 연민하고 싶은 것들은 그러기 어려울 만큼 더럽거나 이상하거나 사납고, 반대로 악취와 더러움 속에 숭고함이 숨어 있기도 하고, 그래서 마음 가는 것이 마냥 좋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싫은 것이 마냥 나쁘다고 말하기도 어려운데, 평범한 사람들이 그 애매한 역설을 계산에 넣는 대신 상식을 고수하는 건 정말로 편함의 문제인 듯하다. 상식이 끝나는 자리에서 세상도 끝난다고 믿어버린다면 더 멀리 나아갈 필요 또한 없는 법이다.(194-195p)

 

 

 

ㅡ 단요, <케이크 손> 中,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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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30

 

 

나는 살면서 한 번도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내심 선우가 내가 본 소설과 영화들의 주인공들처럼 행동하길 바랐던 거다. 평생 믿어온 것을 통쾌하게 부정하기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당당하게 말하면서 자유로워지기를. 그리고 나도 그 속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냥 그럴 수 없는 사람도 있는 거다. 증명되지 않은 천국과 지옥을 가지고 태어나는 바람에 그것들에 짓눌린 삶을 버틸 수밖에 없는····(126-130p)

 

 

신을 믿지 않는 데는 실패했다. 교회를 나가지 않고,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도를 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는 거기에 있었다. 신을 믿지 않기엔, 나는 신을 너무 증오했던 것 같다. 하나님은 다만 내 삶에서 천천히 멀어졌다. 연락이 끊긴 지 모래되어 얼굴도 이름도 가물거리는 어린 시절 친구처럼.

(...)

그리고 그것 분하게도 다윗이 희미해지는 속도와 완전히 정비례했다. 정말로 나는 다윗이 내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렇지 않다는 걸 열여섯 살의 내게 알려주었다면 그 애는 나를 죽이려 들었을지도 모른다.(313-318p)

 

 

 

ㅡ 정해나, <요나단의 목소리3> 中,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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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4

 

 

마약은 가히 환상적이다. 당신이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당신은 ‘인공 낙원’, ‘천국’을 맛보게 된다. 이제 당신에겐 무서울 것이 없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야수 하이드가 되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처럼 아이언맨이 된다. 하지만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마약은 곧 저주가 된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나중에는 술이 술을 먹듯, 술보다 중독성이 더 강한 마약은 이제 당신의 모든 것을 삼키기 시작한다. 당신은 마약을 위해서라면 몸도 팔고, 가족도 팔고, 당신의 영혼까지 팔게 된다. 마약의 끝은 감옥이나 병원, 그것도 아니면 무덤이다.(9p)

 

 

다이어트 약인 펜터민은 중추신경계에 작용해 사람을 흥분시키고 각성하게 만든다. 펜터민 외에도 펜디메트라진, 디에틸프로피온, 마진돌 모두 비슷한 기전을 가진다. 약을 먹으면 마치 큰 시험이나 발표를 앞둔 사람의 심정과 같아진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이 바짝 마르며, 잠이 오지 않는다. 긴장한 상태여서 식용이 없다. 그 결과 먹는 양이 줄어 살이 빠진다. 실제로 펜터민을 투여했을 때 3개월간 평균 9.5kg(체중의 11%)의 체중 감소 효과를 보인다. 다만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 달에는 체중이 극적으로 감소하지만, 두 번째 달에는 주춤하고 세 번째 달부터는 큰 변화가 없다. 또한 국내에서 이 약은 3개월간 쓰게 되어 있는데, 막상 환자들이 약을 잘 끊지 못한다. 약을 끊으면 식욕이 폭발해 음식을 많이 먹게 되고 다시 살이 찌는 요요 현상이 생기기 때문이다.(48-49p)

 

 

그럼 누가 주로 마약을 할까? 우리가 뉴스에서 주로 접하는 마약 사범은 연예인이나 재벌 2세다. 하지만 대검찰청「마약류 범죄백서」(2022)를 보면 마약 사범이 대부분 무직자나 농업인임을 알 수 있다. 2022년 기준으로 전체 1만 8,395명 가운데 무직자가 31.5%에 이른다. 회사원이 6.2%이고, 예술/연예계 종사자는 0.4%에 지나지 않는다. 언론 보도로 인해 연예인이나 재벌 2세가 많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몇 되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마약을 더 많이 한다. 가난은 만성 통증처럼 마약에 중독될 확률을 높인다. 여러 연구에서 가난과 마약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

가난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마약만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 더 아프고 알코올 등에도 더 취약하다. 가난하면 치료를 받지 못해 더 아프고, 아프니까 일을 할 수 없어 더 가난해진다. 뭐가 먼저인지 알 수 없는 악순환이다. 마약도 마찬가지다. 가난해서 마약을 하고, 마약을 하니 가난해진다. (95-96p)

 

 

“선생님, 대마초는 담배보다 중독성과 의존성이 없고 효과도 더 좋은데 피워도 되는 거 아닌가요?”

(...)

“처음에 시작한 게 뭐였나요?”

“떨, 그러니까 대마요.”

“그죠? 아시겠지만, 모두 다 대마로 시작해요. 물론 죽을 때까지 대마만 할 수도 있죠. 근데 그다음 뭐 하셨어요?”

“뽕이요.”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왜 이러실까?”

(...)

마약중독을 이해할 때는 소프트 드러그와 하드 드러그로 구분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소프트 드러그는 말 그대로 부드러운 마약으로, 상대적으로 효과가 덜하고 중독과 금단 증상도 약하다. 마리화나가 대표적이다. 반대로 하드 드러그는 강력한 효과와 함께 중독과 금단 증상이 심하다. 코카인과 헤로인이 대표적이었는데, 합성마약인 히로뽕에 이어 펜타닐이 가세했다. 중독성은 환각 계열(대마초, LSD, 엑스터시)이 약하고 업 계열과 다운 계열이 강한 편이다. 처음부터 코카인이나 헤로인 같은 강한 마약을 하기에는 낯설고 무섭고 불안하다. 코로 뭔가를 들이마시는 것이 어색하다. 자기 몸에 주사를 놓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앞서 언급했지만, 담배를 피운다면 마리화나가 제일 쉽다. 흡연자는 비흡연자에 비해 1년 동안 대마초를 피울 확률이 무려 10배, 매일 대마초를 피울 확률이 무려 25배 높다. 그렇게 몇 번 마리화나를 피우다 보면 마약을 한다는 불안감도 서서히 줄어든다.

“대마를 경험하고 나니 마약에 대한 두려움이 차츰 사라지더군요. 그래서 필로폰의 유혹이 왔을 때 별 망설임 없이 투약하게 되었습니다.” 아편에서 모르핀으로, 모르핀에서 헤로인으로 점점 강해지듯이 대마초도 마찬가지다. 점점 THC 성분이 높은 대마초를 찾게 된다.

(...)

시작이 반이다. 마약을 처음 하기가 어렵지 한번 하면 다른 마약을 하기는 쉽다. 거기에다가 마약까지 한 상태에서는 새로운 약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보다 호기심이 더 앞선다. 선뜻 새로운 마약에 손을 댄다. 당연히 더 강하고 센 약으로.

미국의 경우를 보면 마리화나에서 시작해 결국 코카인과 헤로인으로 간다. 실제 설문조사에서도 평생 한 가지 약만 사용한 경우는 10명 중 4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

비교적 가벼운 약인 마리화나나 프로포폴 같은 향정신성 약물이 위험한 이유는 이처럼 더 강하고 위험한 약으로 가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관문이론이다. 과거 한국에서는 본드에서 가스로, 가스에서 알약(러미라)으로, 알약에서 대마로, 대마에서 필로폰으로 이어지는 마약중독을 ‘엘리트 코스’라고 했다. 미국에서는 대마로 시작해 LSD, 엑스터시, 코카인을 거쳐 헤로인, 펜타닐까지 가는 게 기본 코스다.(107-111p)

 

 

반대로 마약 하는 사람을 범죄자로 보지 않고 환자로 본다면 이들이 더 쉽게 치료를 받아 약을 끊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계속 말하지만, 마약을 끊는 것은 단순히 의지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다만 일반인에게는 마약에 대한 경계심이 낮아질 수 있다. 마약을 하는 사람들도 ‘나는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 아플 뿐이야’라고 생각하며 치료 의지가 약해지거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

마약을 하는 사람은 범죄자인 동시에 환자다. 절대로 마약을 해서는 안 되지만, 만약 마약을 하고 있다면 치료를 받아야 한다. 다리가 부러지면 우리는 수술을 받거나 깁스를 한다. 아무런 치료도 없이 단순히 의지만으로 걸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나중에 깁스를 푼다고 해도 바로 예전처럼 뛸 수는 없다.

(...)

단순히 의지만으로 끊을 수 없다. 전문적인 의학적 치료가 필요하다. 증상이 심할 경우 2~3주 정도의 입원 치료가 필요하고 이어지는 외래 치료는 필수다. 약을 끊고 1년 정도 지나면 손상된 뇌와 신경 구조가 어느 정도 회복된다. 가족과의 관계, 경제적인 문제 등을 회복하기 위해 각종 재활 치료가 필요하다. 이런 재활 치료가 없으면 또 넘어져 다칠 수 있다. 의학적인 치료와 함께 재활이 필수다.(155-156p)

 

 

치료를 받은 중독자들은 대부분 약을 끊을 결심을 하는데 100명 중 92명이 약을 끊는다. 다만 오래가지 않는다. 1년 이상 단약에 성공하는 사람은 겨우 36.9%다. 이것조차도 전문적인 치료를 받았을 때다. 다시 약을 하고 재발해서 치료를 받는다. 어떤 이는 죽어서야 약을 끊을 수 있다고도 말한다. 치료나 도움 없이 혼자만의 의지로 끊는 것은 사실상 “전무하다”.

강한 의지로 어렵게 치료를 받아 약을 끊고 금단 증상에서 벗어나도 더 큰 문제가 남아 있다. 바로 일상생활이다. 몸은 예전 같지 않고, 인간관계는 파탄이 나 있다. 힘들게 마약을 참고 있더라도 약과 관련된 사람을 만나거나, 약을 했던 상황에 처하거나, 약을 주로 한 장소에 가면 갈망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전에 마약을 했던 모든 상황, 즉 스트레스를 받거나, 기분이 좋거나, 섹스를 하거나, 몸이 아프거나, 술을 마시거나, 클럽에 가거나, 특정 친구를 만나는 것이 모두 마약에 대한 욕구를 끓어오르게 한다. 약을 끊으려면 약과 관련된 모든 상황과 장소와 사람을 끊어야 한다. 하지만 마약중독자에게 남은 사람이라고는 마약과 관련된 자들뿐이다. 더욱이 금단 증상과 우울감에 지루함까지 괴롭힌다. 제대로 된 직장이나 모아 둔 돈도 있을 리 만무하다. 새로 시작하려는 삶조차 쉽지 않다.

“출소하면 제일 어려운 점이 경제력이야····.”

마약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들과 관계나 파탄 나서 도움받을 사람도 없고, 몸도 좋지 않아 제대로 된 일을 하기도 힘들다. 비참하다. 눈앞의 현실을 잊기 위해 가장 손쉬운, 옛날 방법을 찾는다. 바로 약이다.(158-159p)

 

 

 

ㅡ 양성관, <마약 하는 마음, 마약 파는 사회> 中, 히포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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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7

 

전체적인 설정이 지구 끝의 온실과 되게 비슷하지 않나? 그때는 돔시티 안에서 밖으로 나오며 벌어지는 일이라면 이번에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며 벌어지는 일, 내성종이라는 설정과 유사한 광증 저항 등. 지구 끝의 온실보다는 다소 아쉬웠다.

 

 

 

물론 경계 지역은 불완전했다. 범람체와 인간은 너무 달랐고, 여전히 경계 지역 밖에서 범람체는 인간을 파괴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계속해서 더 멀리 가고 싶어했다. 앞으로도 그 균형이 지금처럼 유지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불균형하고 불완전한 삶의 형태는 어떻게 지속될 수 있을까. 태린은 경계 지역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 답을 찾아내주기를 바랐지만, 어쩌면 아이들도 명확한 답에는 다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단지 불균형과 불완전함이 삶의 원리임을 받아들이는 것, 그럼에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는 것,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것만이 가능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태린은 그것이 계속해서 다음 세대로 이어질 질문이라고 생각했다.(418-419p)

 

 

 

ㅡ 김초엽, <파견자들> 中, 퍼블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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