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5/7

 

 

 

사람들은 속임수에 넘어가서 심한 두려움과 모멸감을 느끼게 될 조짐이 보일 때 큰 충격을 받는다. 사회적, 문화적, 개인적 차원에서 우리는 이런 두려움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하고 직관적인 경험인 데 비해 '속임수에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하나의 일관적인 현상으로는 주목받지 못했다.

사실 사기당하지 않는 방법을 다룬 책과 글은 많지만,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우리가 속고 속일 때 작용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중점적으로 탐구하는 한편, 개인의 자아와 사회 질서의 측면에서 '무엇을 가리켜 사기라 하고, 누구를 호구라 부르는가?'하는 문화적 동기에 의문을 던진다.

(...)

사람들은 대부분 어떻게 해야 성공적이면서도 선한 삶을 살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하지만 속임수에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성공한 삶과 선한 삶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모두 방해할 뿐만 아니라, 성공하는 동시에 착하게 산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우리에게 속삭인다. 이 책은 이 속삭임의 볼륨을 높여 더욱 명확하게 듣고, 우리가 이 속삭임을 언제는 귀담아듣고 언제는 무시해야 할지, 또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놓아줘야 할지 결정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8p)

 

 

가짜 사이트에 개인정보를 해킹당하거나 속아서 텔레비전 쇼에 출연하는 등 아픈 경험을 하고 나면 우리는 다음에는 같은 일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는 교훈을 얻는다. 불에 데고 나면 다음부터는 불에 섣불리 다가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속임수에 당하는 것을 지나치게 경계해서 생기는 문제는 잘 언급하지 않는다. 하마터면 사기꾼에게 당할 뻔했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떤 교훈을 마음에 새길까? 그리고 이 교훈은 다음번에 우리가 마음을 열고 누군가에게 무언가 베풀려는 순간 우리 마음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울까?(11-12p)

 

 

인간은 호구가 될지 모르는 위험에 처하면 기존의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공격을 저지하고자 맞받아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겁에 질린 호구가 투쟁이 아닌 도피 혹은 회피로 대응할 때다. 도피나 회피는 맞서 싸우는 것보다는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지나치게 겁에 질리고 회의주의에 빠진 나머지 누군가를 믿지 못하거나 무언가를 섣불리 시도하지 못한다면 이 또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기는 마찬가지다. 호구가 될까 두려워서 어떤 일에 발을 들이지 않고 물러난다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도 있고, 협력하기를 멈출 수도 있으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너그러이 베풀던 친사회적 욕구조차 억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호구 잡힐까 불안한 마음에 후퇴하려는 경향은 의료 보험, 복지, 이민 정책 등에도 영향을 끼친다.(22p)

 

 

사실 우리가 치르는 진짜 비용은 돈도 시간도 번거로움도 아니다. 아주 잠깐이나마 사기에 말려들 때 치러야 하는 비용은 바로 '자신의 바로 같은 모습을 직면해야 하는 심리적 비용'이다. 많은 사람이 혹시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자동차 정비소에 전화할 것이고, 정말 돈을 그냥 주는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도 주저하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험을 감수했다가 혹여 잘못되기라도 하면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까 봐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혹시 모를 이익을 포기할 만큼 끔찍하다.(39p)

 

 

호구 공포증이 조금 아리송하면서도 괴상한 이유는 엄밀히 말해 이 공포가 '착취자'를 향한 두려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호구 공포증은 근본적으로는 '내가 바보가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다. 이런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대상은 자기를 호구로 만드는 가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속임수로 인해 '내가 무엇이 되느냐'이다. 이렇게 구별하면 정확히 어떤 경험이 공포 반응을 유발하는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은 기존의 계층 구조에 이미 익숙한 탓에 혹여 정부나 부자처럼 힘 있는 존재에게 당한다고 해도 이것을 모욕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일 나와 동등한 사람 혹은 심지어 나보다 아랫사람에게 이용당한다면 나는 대체 뭐가 되겠는가?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다.(68-69p)

 

 

'너 그러다 사람들한테 바보 취급 받는다'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까? 고속도로에서 차선을 변경하려는 차를 끼워주지 않거나 종업원에게 팁을 조금만 주고, 일찍 퇴근하는 동료의 일을 대신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일상 속 사소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무엇을 택하느냐가 결국 사회, 문화, 정치적 수준에서 벌어지는 일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속임수에 당할까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나라에 인도주의적 지원을 베푸는 정책을 어떻게 생각할까? 사정이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망명을 신청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호구 공포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재분배 정책을 보면 복지 사기를 걱정하고, 선거권을 부여한다고 하면 투표자 사기를 우려한다. 또 교육 영역에서는 부모들이 주소를 허위로 등록해서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내려 한다고 의심한다. 시민 의식이 있어야 할 자리에 호구 공포증이 떡하니 자리 잡은 결과다. 자격 없는 수혜자 한 명이 나머지 사람 전부를 호구로 만들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보호하려는 선한 동기를 가로막는다.(88p)

 

 

사기꾼으로 주로 의심받는 사람이 이민자, 여성, 졸부, 죄수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은 비록 실질적으로는 그렇게 큰 위협을 가할 힘이 없지만, 이들에게 사기를 당하는 사람은 사회적 지위가 엄청나게 흔들리거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을 수 있다.

(...)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사람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수준의 공포를 느낀다고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는 잠재적 사기꾼이 누구냐에 따라 착취에 대한 두려움은 그 정도가 확연히 달라진다. 우리가 사기 위협을 마주할 때, 원초적인 감정 수준에서 나오는 반응은 다음과 같다.

"네가 어떻게 감히?“

그러나 같은 문장의 강조점을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네가 어떻게 감히?“

자녀 혹은 학생처럼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속아 넘어가면 그 사람은 패배자가 된다.(90-91p)

 

 

그러나 호구 공포증 때문에 우리가 취약해질 수 있는 상황을 전부 회피한다면, 그 부작용은 개인과 사회 모두에서 나타날 수 있다. 문제는 단지 비트코인에 투자하지 않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호구 공포증에 빠지면 사람들은 사회적 차원에서 어려운 이들을 지원하거나 시민으로서 마땅히 협력해야 할 때도 이를 거부한다. 호구 공포증은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협력에 대한 우리의 선호를 왜곡한다.(100p)

 

 

시대니어스와 그의 동료는 집단 간 억압을 사회과학적으로 완벽히 설명한 책 <사회적 지배>를 출간했다. 그들에 따르면 특정 종류의 사회적 계층화에는 보편성이 존재한다. 또한 모든 문화에는 나이와 성별에 따른 계층 구조가 존재한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어른이 아이를 지배하는 현상은 거의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결정적으로 거의 모든 문화에는 시대니어스가 말한 '임의 결정 체계'가 존재한다. 임의 결정 체계는 민족, 계급, 종파, 씨족, 국적, 인종 혹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모든 집단 구별'등 사회적으로 형성되었거나 겉으로 두드러지는 특성에 따라 사회 구성원을 계층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

'사회적 지배 이론'은 인간의 광범위한 행동을 사회적 지배라는 궁극적 목표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사회적 지배 이론에 따르면 인종차별주의에는 목표가 있고 그 목표는 바로 '권력'이다. 시대니어스에 따르면 인종적, 민족적 고정관념은 임의로 세워진 계층 구조를 정당화하는 구실을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지배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거의 모든 형태의 집단 편견, 고정관념, 집단의 우열에 관한 관념과 개인적, 제도적 차별은 집단 기반의 사회적 계층 구조를 양산하고 반영한다. 또한 특정 집단에 관해 떠도는 이야기는 사회 불평등을 도덕적, 지식적으로 정당화한다.(175-176p)

 

 

진짜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호구가 될 것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호구가 될 것이냐'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주체로서 우리는 손 놓고 있다가 그대로 '비관적인 호구'가 될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진정성 있는 호구'가 될지 선택할 수 있다.(251p)

 

 

호구 짓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비합리적이지도 않다. 단지 여러 가지 고려할 사항 중 하나일 뿐이다. 호구 짓이 우리의 선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판단하려면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노트에 기록해 보면 된다.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때로는 그저 명쾌한 계산 한 번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내가 이루려는 목표는 무엇이고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무엇인가? 이러한 분석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날 때는 공포가 큰 자리를 차지한다.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이 책의 핵심은 바로 '호구 공포증이 유독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공포가 두드러지고 말고는 돌에 새겨진 듯 고정된 사실이 아니고, 우리가 거기에 주의를 기울일지 말지 역시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다. 어쩌면 생각보다 간단하게 호구 공포증의 무기화를 막을 수 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우리가 가진 선택지를 조사하고 계산하는 것이다.(323p)

 

 

물론 호구가 되면 실질적으로 손해를 입을 때도 있다. 호구가 된 표적은 자신에게 의미 있는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물질적, 사회적 결과에 맞닥뜨릴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은 호구가 될 때 느끼는 것은 단지 감정에 지나지 않고, 이 감정을 지나 중요한 다른 문제보다 더 우선시 할 이유는 없다.(338p)

 

 

 

 

ㅡ 테스 윌킨슨 라이언, <호구의 심리학> 中, 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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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5/7

 

역시 크게 관심 없는 작가의 우울한 자전적 에세이를 읽는 건 재미없구나. 시종 우울한 정서로 자신의 감정과 헤어진 애인 등에 대해 계속해서 얘기하는 걸 내가 왜 읽고 있는지 문득 깨닫고 내려놓는다.

 

 

 

예전에는 탄산음료를 자주 마시던 친구한테 그만 좀 마시라며 잔소리를 달고 살았는데, 이제는 내가 탄산을 입에 달고 사네. 웃긴다. 인생은 웃겨.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점점 더 가벼운 사람으로 만들어. 노인이 된다면 나는 얼마나 우스운 사람으로 기억될까. 젊은 시절 탄산을 많이 마셔서 뚱뚱하고 당뇨를 달고 있는 노인? 새벽에 사이다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66p)

 

 

 

ㅡ 김남숙, <가만한 지옥에서 산다는 것>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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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5/2

 

이제 이 책까지 포함하면 저자의 책 3권을 읽었다. 이 책을 끝으로 당분간은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책을 쓰지 않을 예정이라고 한다.

 

 

 

 

같은 나라, 같은 시대를 같은 나이와 같은 성별로 살더라도 사람마다 다른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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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시 정해진 법적 성별이 남성이었지만 스스로를 여성으로 인지하는 MTF(male-to female) 트랜스젠더들의 옷차림을 탈코르셋 운동의 맥락에서 반동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원하는 성별로 인정받지 못해 고통받았던 숱한 시간들 속에서 온전한 자신이 되고자 외모를 꾸미는 길을 찾은 이들을 두고서, 가부장제가 강요한 여성의 옷을 입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폭력이다. 시스젠더 여성과 MTF 트랜스젠더는 같은 시기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만 각기 다른 전선에 서 있기 때문이다.(31-32p)

 

 

또 하나는 모든 인간은 특정한 맥락에서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의 피해자였던 한국인이, 한국에서는 동남아시아에서 온 여성 결혼 이민자나 이주 노동자에게 인종차별의 가해자일 수 있습니다. 남성이 권력을 가진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남성과의 관계에서 약자인 여성들이, 시스젠더만을 정상적인 몸으로 취급하는 성별 이분법의 사회에서는 트랜스젠더와의 관계에서 기득권일 수 있습니다.(47p)

 

 

하지만 실제 그 사회가 평등한지는 다른 문제이다. '원칙-실행의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흑인이 자신이 원하는 지역에서 집을 살 수 있었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물으면 95%가 넘는 사람이 "그렇다"라고 답하지만 집주인이 상대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집을 팔지 않는 것을 금지하는 법에 찬성하는지 물으면 65%만이 "그렇다"라고 답한다. 주거뿐 아니라 많은 영역에서 인종차별 금지 원칙에 찬성하는 것과, 모든 사람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지지하는 것 사이에는 대부분 30%가량의 차이가 존재한다.(68-70p)

 

 

사람들은 보통 차별을 두고 특정한 경험이나 사건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설문지를 이용한 연구로 차별이 우리 몸에 미치는 영향이 따로 떨어진 사건들이 아니라 연속적인 상태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소수자들은 차별을 경험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행위와 무관하게 무시당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긴장하고 그 긴장은 삶을 지배한다. 나는 이러한 관점이 기존에 진행된 일반적인 차별 경험과 건강에 대한 연구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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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된 경계심 측정'설문지로 실제 차별 경험이 아니라 차별을 경험할 것 같다는 우려만으로도 건강이 나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가령 집을 떠나기 전에 미리 오늘 어떤 일을 당할지 걱정하고 무시나 모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옷차림에 신경을 써야만 하는 등의 스트레스가 삶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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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적인 환경은 삶의 모든 시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72-73p)

 

 

김승섭: 제도적 차별은 법률로 막을 수 있고, 일대일 관계에서 누군가를 차별하는 행동은 혐오 발언 규제 등으로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차별적 행동으로 드러나는 무의식적인 편견과 고정관념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윌리엄스: 내가 타인을 차별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나는 한 번도 누군가를 차별한 적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차별적인 행동을 하기에 최적화된 사람일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편견은 스스로에 대한 경계를 풀 때 더 쉽게 나타난다.

(...)

고정관념을 가진 대상을 계속해서 직접 만나 관계를 맺는 것 역시 내재적 편견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76-77p)

 

 

연구자가 고통받는 이들의 삶과 건강에 대한 연구를 하더라도, 모든 고통이 동등하게 주목받지는 않는다. 2015년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던 당시, 나는 해고 노동자의 아내가 겪었던 고통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못했다. 해고 노동자와 가족들이 모여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이었던 '와락'에서 아내분들을 만나 인사하면서도 그분들을 고통의 '당사자'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111p)

 

 

피부색은 피부에 존재하는 멜라닌색소의 양에 따라 결정됩니다.

(...)

인간의 피부색을 결정하는 멜라닌색소는 선크림처럼 자외선 흡수를 방해합니다. 멜라닌색소가 풍부한 흑인의 경우, 백인과 같은 양의 비타민D를 합성하려면 자외선에 5배가량 더 노출되어야 합니다. 햇빛 노출량이 많은 적도 부근 지역에 피부색이 진한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멜라닌색소가 많아도 비타민D를 합성하는 데 필요한 햇빛을 충분히 받을 수 있고, 멜라닌색소가 많아야 피부암에 덜 걸릴 수 있으니까요. 이는 반대로 위도가 높은 러시아나 북유럽 지역에 상대적으로 백인이 많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햇빛에 적게 노출되는 지역에서는 피부색이 연한 이들이 생존할 가능성이 높았고, 수만 년 동안 그런 자연선택의 과정을 거치며 결국 연한 피부색을 지닌 이들이 다수가 된 것입니다. 즉, 피부색은 어떤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한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아니라 일조량에 따른 진화의 결과물입니다.(130-131p)

 

 

야간 교대 노동이 발암 요인이라는 근거는 학술적으로도 확고해지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 산하 국제암연구소는 2007년 생체리듬을 파괴하는 "교대제 근무"를 납과 같은 등급인 유력한 발암물질로 분류했습니다.

(...)

2019년 7월에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갑니다. 국제암연구소에서 주최한 회의에 참석한 과학자 27명은 2007년의 분류 결정 이후 출판된 논문을 재검토한 후,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습니다. 이들은 교대제 근무를 여전히 유력한 발암물질로 분류하는 게 타당하다며, 그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발암 물질의 이름을 "야간 교대제 근무"로 바꿉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어 그 위험을 감지하지 못할 뿐, 야간 교대제 근무는 유력한 발암물질입니다.(134p)

 

 

2017년 미국질병관리본부의 AIDS팀에서 공식적으로 'U=U'를 발표했다. '검출되지 않으면, 전염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HIV 감염인이 치료 약을 꾸준히 복용해서 체내 바이러스 농도가 일정 수준 미만으로 내려갈 경우, 콘돔 없이 성관계를 하는 경우에도 비감염인 파트너가 감염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174-175p)

 

 

그런 측면에서 저는 감염인을 'HIV 보균자'라고 부르는 일이 조심스럽습니다.

(...)

HIV 감염인을 특정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뿐,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가지고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영어로 HIV 감염인을 PL, 즉 'HIV 감염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187-188p)

 

 

우리는 타인의 성적 지향이나 인종을 포함한 여러 정보를 이유로 그 사람에 대해 쉽사리 판단하곤 합니다. 스스로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내가 상대방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훨씬 더 많이 남아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고정관념은 편리한 만큼, 그릇된 것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215p)

 

 

피해자는 항상 고통받고 있어야 하고 항상 슬퍼야 하고 절대로 행복해선 안 되고···이런 것들이 정말 부당하다고 생각했어요. 사람이 죽어도 장례식장에서 유족은 밥도 먹고, 웃기도 하고, 농담도 하지요. 일상을 살아가야 하니까요.

(...)

당당하고 확신에 찬 생존자의 모습이 한국 사회에 필요한 거 같아요.(254p)

 

 

이제 질문을 해야 할 시점이다. 인종주의와 비장애중심주의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소외된 흑인 맹인의 삶에 가슴 아파하고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헬렌 켈러와, 중증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기를 의사의 판단에 따라 안락사시키는 일을 두고 "뛰어난 인간애"라고 말했던 헬렌 켈러는 다른 인물인가? 후자를 헬렌 켈러가 젊은 날 저지른 실수로 치부하거나, 혹은 짐짓 무시하며 헬렌 켈러의 삶에서 지우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앞서 말했듯, 그것은 헬렌 켈러의 삶을 구미에 맞게 변형시켜 박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질문해 볼 수는 없을까? 1915년은 어떤 시대였기에 헬렌 켈러조차도 하이젤든 박사의 행동을 옹호하는 글을 썼을까?

(...)

첫째, 당시는 우생학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둘째, 당시 농과 맹을 지니고 있던 헬렌 켈러는 '신생아 볼린저'와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인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헬렌 켈러는 신체적 손상이 사회적 관계와 맥락 속에서 장애가 된다고 보는 현대 장애학의 관점, 몸의 차이를 긍정하고 장애를 정체성과 자부심으로 여기는 장애 인권 운동의 감수성을 접할 수 없는 시대를 살다 갔다.

(...)

당대의 시간을 누구보다 뜨겁게 살아냈던 헬렌 켈러의 삶에는 많은 사람이 경이롭게 생각하는 성과만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한계와 모순이 함께 새겨져 있다. 그 모든 점을 함께 바라 본다고 해서 헬렌 켈러라는 놀라운 인간이 폄하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나는 '장애를 극복한'박제된 영웅보다, 오류와 모순을 품고 당대를 살아낸 한 인간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길 원한다.(279-285p)

 

 

 

ㅡ 김승섭,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中,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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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13

 

 

안녕, 잘 지냈니,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네, 고등학교 졸업하고 한동안은 상갓집이나 결혼식에서 어색하게 마주치기라도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다들 멀어져서 그렇게 모일 일도 없구나,

(...)

혹시 내가 너에게 무언가 잘못한 게 있을까. 너희 부모님이 집을 한 채 네 명의로 돌려두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약간은 조롱조로 너에게 유산계급이라고 말했던 일 때문일까, 그리고 그 일을 다른 친구들한테 이야기해서? 모르겠네, 사실은 그 이야기를 한 시점도 잘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지금까지 나는 자주 너에 대해 생각해왔어, 우리가 이제 와서 친구로 지낼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쩌면 살면서 계속 담아두고 있었던 마음의 앙금들이 사실 한 번의 대화, 단 한 번의 용기로 해소할 수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나중에 하게 될까 봐, 누군가가 먼저 말을 걸기만 한다면 멀리서나마 서로를 응원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편지를 써····(46-47p)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 이런 회의를 견뎌내고 나아간 사람들이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것 아닐까, 앞서 살아간 사람들도 삶이 전부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괴감이나 죄책감이나 열등감이나 상실감을 느끼고, 불안도 안도도 사랑도 미움도, 그 모든 것을 경험한 것 아닐까, 그리고 그다음 이 세상에서 완전히, 영원히 소멸되는 거지···· 그래서 말인데,. 이상하게 이미 살고 사라진 모든 사람들이나, 지금 살고 있고 앞으로 태어나 살고 사라질 모든 사람, 모든 존재들을 생각하면 뭉클해져, 그런 걸 생각하면 그냥 살아가면 되는 거라는 생각도 들어, 아무 회의도 갖지 않고, 말없이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살다가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사라져가는 거야, 그게 다라고 생각하면 아무 문제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58-59p)

 

 

 

ㅡ 정영수 외, <2024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中,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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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23

 

제목만 보고 국내 작가들이 자신의 소설과 마진율에 대해 이야기할거라고 생각해서 굉장히 재밌을 줄 알았는데 그냥 작가들의 소설에 대한 생각을 적은 에세이었다. 제목은 수록 작품 중 오한기 작가가 쓴 에세이 제목을 따서 지은 거였다. 뭐 그렇다고.

 

 

 

다만, 모두가 입을 모아, 많이 쓰는 행위 자체를 우려하는 것에 대해, 혹은 소설을 쓰는 행위가 내 안의 무언가를 소진하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의 반감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어째서 소설을 쓰는 행위가 계속해서 소진되는 과정이어야만 하는 걸까? 소설을 쓰는 행위가 나 자신을 추동하는 힘으로만 작동할 수는 없는 걸까? 쓰는 행위 자체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성할 수는 없는 걸까? 그러므로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그런 작가가 존재한다고, 쓰는 행위 자체를 동력으로 삼아서 쓰고 쓰고 또 쓰는 작가가 있다고.(74-75p)

 

 

 

ㅡ 김사과 외, <소설엔 마진이 얼마나 남을까> 中, 작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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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20

 

트위터, 투비에서 쓴 일기 및 포스타입에 쓴 일기에서 이미 언급했던 내용들이 다수 등장했지만 서술이 달라서인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 들었다. 

 

 

어느 날의 일기에서 러스브리저는 소설가 아널드 베넷의 말을 인용한다. 베넷은 우리에게 잘 먹고 잘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어려운 과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주어진 책무를 완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에게는 음악, 그림, 달리기, 기차 모형 세트, 혹은 그 밖의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 물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살아 있기에도 바쁜데 다른 걸 할 시간이 어딨어? 베넷의 대답은 단호하다.

"우리에게 시간이 추가로 주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필요한 시간이 모두 주어져 있다."(50-51p)

 

 

늘 너무 피곤하다. 정말 일찍 자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마흔 살이 넘어서까지 이런 고민을 하다니 나는 정말 야행성인 것 같다. 문제는 세상은 야행성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나도 야행성이라고 하기에는 몸이 너무 축난다는 것···.

잠을 자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확히 말하면 적당한 시간에 자러 들어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초조함과 불안과 아쉬움, 뭐 그런 것들 때문이다. 오늘이 만족스럽고 내일이 기대되고, 이렇질 않으니 선뜻 자러 갈 수가 없는 거다. 가끔은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어떤 생각으로 자러 가고, 눈을 뜨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스톡홀름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던 악셀 린덴은 어느 날 도시 생활을 접고 시골 목장으로 내려가 양을 치기 시작했다. 목장 생활을 시작하고 두 번째로 맞은 봄, 5월 6일의 일기를 린덴은 이렇게 썼다.

 

다들 느끼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속 불가능하다. 이 세상에 지속 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이 지속 가능했던 적도 없다. 그런데 다들 별일 아닌 척한다. 좋은 생각이 있는 척, 바꿀 수 있는 척한다. 왜들 그러는지 잘 모르겠다.

 

내 말이.(211-212p)

 

 

 

 

ㅡ 금정연, <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 中, 북트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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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19

 

수천 개의 영어 작품을 대상으로 무작위로 표본을 추출하여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전형적 서사 형식을 추론할 수 있었다.

'누더기에서 재물로’

'재물에서 누더기로’

맨인홀

이카로스

앞에서 언급한 신데렐라

오이디푸스(53-36p)

 

 

몇 가지 극적 구조에 대해 속성으로 알게 된 여러분은 이제 이것이 여러분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분명 궁금할 것이다. 여러분이 제 2의 댄 브라운이 될 계획이 아니라면 여기서 여러분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재의 내러티브는 어떠한가? 도널드 트럼프와 앙겔라 메르켈은 언제 나오는가?

조금만 더 기다려 주기 바란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서사 구조의 편재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싶다. 왜냐하면 영화와 문학뿐만 아니라 정보를 전달하는 모든 형식에서 서사 구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허구이든 사실이든, 뉴스, 교육, 광고를 비롯하여 정보가 교환되는 모든 곳에서 서사 구조가 발견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소위 '마스터플롯'을 살펴보고자 하는 이유다. 어떤 전문가에게 묻는지에 따라서 스토리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마스터플롯은 두 개부터 예순아홉 개까지 구분할 수 있다. 커트 보니것이 제시한 원형이 감정적 전개 구조를 제공하는 반면, 마스터플롯은 주인공을 부추기는 에너지, 거대한 갈등이나 소망을 기술한다.(58-59p)

 

 

<저머니스 넥스트 탑모델>에서는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해 몇몇 포맷이 한 가지 마스터플롯을 제시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마스터플롯이 혼합되어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성장 스토리를 플롯과 더불어 앞에서 언급한 경쟁, 약자, 포괄적인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참가자들의 변신이 함께 나타난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스토리를 본다. 말하자면 젊은 시청자에게는 동일화나 투영이라는 이유에서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이 중요하고, 나이 든 시청자는 이러한 포맷을 역설적으로 보면서 경쟁 상황을 더욱 재미있게 즐긴다. 또한 이성애적 성향의 남성은 에로틱한 남성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혼합 방식이 성공하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즉 혼합 형식은 마치 서사 만화경처럼 여러 플롯을 제공하고 시청자가 적어도 그중 하나의 플롯에서 자기 모습을 재발견할 수 있도록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 마음에 와닿는 스토리를 본다.(69p)

 

 

최근에 자주 보이는 캐스팅 쇼나 매우 진부한 광고가 여전히 하나의 마스터플롯에 따라 작동한다면 영웅은 기본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편재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그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갈등도 함께 존재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전통적으로 영웅을 탄생시키는 전쟁을 더 이상 겪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자유화된 우리 일상의 많은 부분이 해석 권한을 둘러싼 전쟁과 닮았다. 전투에서의 군사적 용기가 오늘날에는 시민의 용기, 비타협적 태도, 공감이 되었다. 하지만 동일화와 숭배 메커니즘은 똑같이 남아 있다. 브뢰클링에 따르면 오늘날의 영웅은 우리 약점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를 묘사한다. 이를테면 "사랑의 아픔, 알코올 문제, 오만함, 급한 성미, 우울증을 비롯한 다른 모든 인간적인 결점"을 말이다. 이와 동시에 오늘날의 영웅은 아이러니하게도 예외적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우리가 모두 갈망하는 것을 이루어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더 나은 상태를 향해 나아간다.(71-72p)

 

 

'화물 숭배'개념은 상관성을 인과성으로 미화시키느 믿음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조롱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렇게 자신에게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사건의 노리개에서 자기 운명의 플레이어로 탈바꿈하기 때문이다. 인과적으로 생각하고 결과는 반드시 무언가로부터 말미암은 것, 즉 모든 것에는 근원이 있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이상적으로 그 근원에 유리한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고 유익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적어도 우리는 이런 시도 자체를 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언제부터인가 신을 달래기 위해 제물을 바치기 시작한 것은 해방적인 행위이며, 당시의 관점으로 볼 때 매우 기발하고 능동적인 문제해결 방식이다. 무언가를 신에게 바치면ㅡ예를 들어 비를 내리도록ㅡ신을 더 잘 달랠 수 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다음 날 또 제물을 바친다. 이는 풍족한 수확물을 얻기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날씨에 우리가 조금의 영향도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완전히 타율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낫다.

(...)

말하자면 원인과 결과에 대해 이해하면 우리 적응력에 가장 중요한 행동 원칙이 생겨난다. 즉 어떤 것이 그냥 그렇게 우리에게 닥치거나 이유 없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우리에게 위협적인 상태를 지속적인 발전과 변화ㅡ오늘날에는 시행착오라고 말하기도 한다ㅡ를 통해 더 나은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적, 외적 변화를 통해서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웅 여정을 통해서.

하지만 우리 인간은 절제를 모르기 때문에 삶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이유도, 의미도 없다는 인식 뒤에 숨어 있는 '공백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 모든 사람을 '인과 관계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쉽게 만족을 느낄 수 있다.(83-84p)

 

 

 

연구진은 환자에게 한쪽 뇌에서만 볼 수 있는 물체를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연구진은 피험자에게 일어나서 물 한잔을 가져올 것을 칠판에 써서 요청했다. 그런 다음 피험자가 왜 그렇게 했는지 물었다. 피험자의 양쪽 대뇌 반구는 칠판에 적힌 정보와 질문 내용을 공유하지 못해 이를 전체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즉 언어 중추를 담당하는 좌뇌가 설명을 생각해냈다. 피험자는 "목이 말라서요."라고 말했다. 급하게 만든 이유라도 자신이 왜 일어나서 물을 가져왔는지 전혀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보다 확실히 더 나았다. 연구진이 피험자에게 정말 갈증을 느꼈는지 재차 물어보자 그는 당황했다. 말하자며 그의 말은 변명이었다.(99-100p)

 

 

우리가 맛이 뛰어난 샌드위치를 먹거나 환상적인 섹스를 할 때, 또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때 '무엇을 하고 있든 계속 해, 최고야.'라고 신호를 보내는 전달물질이 방출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추진력과 동기를 부여하는 도파민의 효과다. 도파민을 '행복 호르몬'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 근시안적이라고 볼 수 있다. 신경내분비학자 로버트 새폴스키는 도파민의 메커니즘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요약한다. "도파민은 즐거움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즐거움에 대한 기대와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행복 자체가 아니라 행복을 향한 노력에 관한 것이다."(106p)

 

 

스토리는 이야기되는 내용을 가리키며, 이야기는 이것이 어떻게, 어떤 동기로 행해지는지를 나타내며, 내러티브는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이야기가 전해지는지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나무 열매를 따 먹은 여자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당한 남녀에 대한 스토리의 경우 이야기는 유혹, 죄책감, 추방에 대한 것이지만 이러한 이야기의 지배적 내러티브는 다음과 같다. 즉 '여성은 위험하다.'(162p)

 

 

브로딧츠키에 따르면 이러한 언어적 차이는 우리가 사물을 기억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사고가 발생했을 때 영어를 사용하는 목격자는 사고 유발요인을 기억하는 경향이 있지만,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목격자는 그것이 의도되지 않은 사건, 즉 불의의 사고라는 사실을 포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떄 서로 다른 관찰자는 이미 자신의 언어적 특징으로 말미암아 같은 사건을 다르게 인식하며, 따라서 세부적 내용도 다르게 기억한다. 이는 증인 진술과 법적 결과와 관련하여 전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보로딧츠키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언어는 우리가 사건을 판단하는 방식을 조종한다."(169p)

 

 

우리는 우리의 서사 본능을 작동시키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종종 우리 자신이 그렇기도 하다)을 너무 쉽게 믿으면서 바라본다.

우리가 기존의 (자기) 서사의 일관성을 위해 견지하는 가장 흔한 인식의 왜곡은 확증편향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은 것ㅡ또는 다른 사람들이 믿어야 하는 것ㅡ을 믿으며 그에 따라 모든 정보를 분류한다. 렐로티우스도, 프린스 모노룰루도 어느 정도 이러한 확증편향을 사용했다. 우리는 우리의 확신과 상충하는 지식보다 우리의 견해와 의도를 뒷받침하는 지식을 더 중요하게 평가한다. 말하자면 우리 자신을 적어도 모순투성이인 세상을 볼 때는 서사적으로 매우 좋지 못한 판단을 내린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최고의 사기꾼이다.

우리가 개인적이라고 생각하는 선호도조차 사회학적, 경제적 허구다, 우리는 사후에 과거를 회상하며 인과관계를 만들어 '나는 그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라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사후판단 편향, 혹은 잠복성 결정론이라고 부른다. 사회학자 던컨 와츠에 따르면 사후판단 편향은 특히 이례적인 큰 성공이 관찰될 때 효과를 보이기 시작한다. 더 특별한 성공일수록 그 성공 스토리는 더 훌륭하고 논리적이어야 한다.(263p)

 

 

그래노베터는 1978년에 불안과 집단행동을 연구하기 위해 소위 문턱값 모델을 개발했다. 그의 작업가설에 따르면 많은 사람이 어떤 요구나 새로운 이념을 위한 행동을 한 개인에게 제시할 경우 그 사람의 행동이 변하게 된다.

(...)

그는 예를 들어 이념이 어떻게 퍼지는지 조사하는 소위 확산 연구에서 문턱값 모델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은 간단한 공식을 제시한다. 즉 낮은 문턱값을 가진 개인이 많으면 새로운 이념이 더 빨리 퍼질 수 있고, 문턱값이 높은 개인이 많으면 개혁이 느리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와츠는 문턱값 모델을 사용하여 '누적 이익'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즉 어떤 노래나 책이 다른 노래나 책보다 인기를 더 얻으면 순식간에 몇 배나 더 많은 인기를 얻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 노래나 책이 더 좋고 더 아름답고 더 똑똑해서가 아니라 왜 모두 그것에 관심을 보이는지 그 이유에 대해 언젠가 모두가 관심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누적은 이렇게 작동되며, 스토리 역시 이와 똑같이 작동한다. 아마도 세상은 실재와 사실에 의해 결정되는 것과 아주 똑같이 거짓과 반쪽 진실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264p)

 

 

능력주의라는 용어는 1958년 마이클 던롭 영이 자신의 저서 「능력주의의 부상」에서 풍자적인 개념으로 처음 사용하였으며, 비굴하게 성과에 집착하고 하이퍼포머, 즉 고성과자의 폭정이 지배하는 2033년 사회의 억압적인 이미지를 표현했다. 비록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를 조소적으로 표현했지만 이 개념은 더 정의로운 사회질서라는 긍정적인 의미의 약속으로 발전했다.

(...)

능력주의적 관점은 교육, 직업, 인간관계로의 접근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제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미 학교 교육에서 재능이나 성과, 자질에서 쉽게 파생되지 않는 사회적 불평등을 만든다. 거의 모든 서구 사회에서 교육과 직장에서의 성공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지표는 여전히 부모의 지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성공은 얻어지기보다는 상속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더 좋은 자질을 갖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황금빛 미래가 자신의 성과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가 선호하는 자기 서사는 독자적으로 자신의 길을 나아가며 모든 역경과 운명에 맞서는 사람으로 귀결된다.(288-289p)

 

 

켄디에 따르면 주라라는 이 책에서 그 이전에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것을 했다. 바로 아프리카 대륙의 모든 사람을 단일민족 집단으로 정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일괄적으로 동종 집단으로 보고 모든 유럽인에 비해 낮게 평가했다. 대서양 노예무역을 막 시작하면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사람들을 대규모로 납치하여 노예로 팔았던 포르투갈 왕실은 주라라의 글 덕분에 완벽한 모험 이야기를 얻을 수 있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은 포르투갈의 본보기와 아프리카 사람들의 원시성에 대한 주라라의 허구 이야기를 따라 아프리카 대륙에서 사람들의 소유물을 빼앗았다.(293-294p)

 

 

인종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여전히 타국을 정복하고 억압하고 착취하고 그곳의 거주자를 적대자로 만들며 이와 함께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동화에 속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시대에 맞게 조정되고 있다. 1929년 미국에서 멕시코인은 백인으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1930년부터는 더 이상 백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백인이 아닌 사람의 이주가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무기 생산을 위한 노동자가 필요해지면서 멕시코인은 다시 백인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피부색이 사회적 구성이며 사회적 상황에 따라 상대화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예다.(297-298p)

 

 

과거에도 항상 사실과 함께 소문과 신화, 비방이 무성하게 확산했다. 그러한 거짓말들은 지어낸 소문 이상인 것처럼 점점 자기주장과 닮은 척을 하면서 '음모 서사'가 된다. 주라라의 인종차별적 여행기나 노리치의 윌리엄에 대한 반유대주의적인 허구적 성인이야기처럼 말이다. 20세기의 가장 치명적인 음모 서사로 '시온 장로 의정서'라는 위서를 꼽을 수 있다. 이 의정서의 초판은 1903년 러시아 제국에서 처음으로 러시아어로 출판되었으며 나치의 이념적 지주 역할을 했다. 이 문서는 유대인이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허구를 담고 있다. 그 내용은 완전히 지어낸 것이며 다양한 출처에서 모아 조각조각 붙여 만든 것이다.

(...)

시온 장로 의정서는 1920년에 프랑스어로 번역되면서 단숨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미국에서도 자동차 제조업자인 헨리 포드가 수십만 부를 발간했고, 이를 통해 시온 의정서 영어판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해졌다. 오늘날까지도 반유대주의자들은 이 텍스트를 근거로 내세운다.(339-340p)

 

 

우리는 여성 혐오 내러티브 자체를 종종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

소위 세계 종교의 메시아적 영웅이든, 그리스와 로마 신화의 서사적 영웅이든, 게르만이나 켈트 초기 문화의 전설적 영웅이든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즉 이 영웅들이 모두 남자라는 것이다.

(...)

영웅 여정 안에서 여성은 주인공의 주의를 흐리거나 시험에 빠트리는 존재, 심지어 적대자로 등장한다. 하지만 영웅으로 그려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406p)

 

 

서사적인 측면에서 기후 위기를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기후 위기는 인간이 만든 것으로 집단적이며, 악당이나 범죄 조직의 잘못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파괴적인 주도권에 기인한다. 기후 위기는 병든 한 시대의 탈선이 아니라 수 세기에 걸쳐 커져 나갔다. 특출한 악마도 없고 과격한 집단적 이념도 없으며 적대자로 적합한 공격적인 민족 국가도 없다. 그리고 기후 위기에서는 어떤 영웅이든 상대가 악한 정도만큼만 선할 뿐이며 주역을 배정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어느 경우든 이 문제는 집단적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 믿을 만한 영웅으로서 가장 적합한 사람들은 보다 지속 가능한 세상과 긍정적인 사회적 전환점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과학자, 정치인, 활동가)이다. 그들이라면 사회 전체의 꾸준한 변화를 위해 투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90분 만에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창의적인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다른 모든 사람은 아무 걱정 없이 외면하고 있는데 너째서 나는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438p)

 

 

 

ㅡ 자미라 엘 우아실, 프리데만 카릭,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中, 원더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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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19

 

 

“편하게 해. 나는 복잡한 의전 따위는 싫어. 하지만 내가 싫다는 말은 티 나는 의전이 싫다는 거지 그것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의전을 해줘야 해. 신경 쓴 것 같지 않으면서도 주인공에게는 불편함이 가지 않는 것 말야. 그래도 나는 충남을 대표하는 도지사고,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정치인이네. 그래서 더더욱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의전을 하고 있는 건지 안하는 건지 모를 정도의 물 흐르는 의전이어야 해!”

(...)

지시는 미세하면서도 복잡했다. 결론적으로 지금보다 더 많은 걸 사전에 검토해서 정치인으로서는 더 돋보이고, 인간으로서는 더 편안하게 다닐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라는 지시였다. 단 티가 나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있었다. 더 많은 관심과 긴장이 요구됐다.(64-65p)

 

 

제가 소대장을 할 때 저의 소대원이 같은 소대 부소대장에게 구타를 당해 피해 사실을 호소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 소대원은 부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이병이었는데,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다며 부소대장이 아침 GOP 작전 철수 중에 이병의 얼굴을 구타했습니다. 부대 복귀 후 입가에 피가 묻은 소대원을 보고 여러 차례 물었는데도 소대원은 한참 스스로 넘어진 거라고 진술하다가 결국에는 부소대장에게 맞았다고 제게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이후 부소대장이 상급부대 보고를 하지 말고,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 하였을 때도 저는 헌병대에 해당 사실을 보고하여 수사를 받도록 처리하였습니다.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과 가해자로 의심되는 사람의 힘의 불균형이 눈에 쉽게 보이는 상황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에게 제가 지초지종을 물어보는 것보다는 격리 조치부터 먼저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조치한 것입니다.(197p)

 

 

 

ㅡ 문상철, <몰락의 시간> 中, 메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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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4

 

 

나는 가난을 말할 때 가족을 맨 뒤에 배치한다. 가족이 그 모양이니까 그렇게 됐지 따위의 말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한 가족과 가난을 세트 취급하는 클리셰가 지겹다. 내 가난은 가족이 아니라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과 세트였다. 날 불행하게 했던 것은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이(었)다.(116p)

 

 

 

ㅡ 안온, <일인칭 가난> 中, 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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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

 

 

영화에서 사이보그는 머리에 전극을 꽂고 엄청난 용량의 데이터를 전송받거나, 뇌의 데이터가 컴퓨터로 바로 옮겨지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런데 뇌과학 연구자들은 인간의 뇌와 컴퓨터의 메모리가 작동하는 방식이 달라서 컴퓨터에 저장된 것을 뇌로 전송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작은 전자칩을 팔에 이식하고 스스로를 사이보그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만, 이들은 칩은 건물 출입 카드나 버스 승차권을 대체하는 정도의 기능에 그치고 있다. 전자 칩은, 신경과 직접 연결되어 뇌의 명령을 받아 작동되지 않는다.

(...)

몸에 전자 칩을 이식한 것만으로 사이보그라고 부르기 힘들다는 얘기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기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다. 기계는 우리 몸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행위자로 인간 행위자와 함께 살아간다. 우리는 기계를 바꾸고, 기계는 우리를 바꾼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스마트폰을 손에 쥔 순간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 우리는 전례 없이 기계들의 촘촘한 네트워크 속에서 다양한 기계들과 인터페이스를 형성하면서 살아간다. 이렇게 기술과 인간이 서로 의지하고 서로를 바꾸며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사이보그화되었으며, 사이보그는 우리 존재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기계가 우리 몸에 삽입되지는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74-75p)

 

 

섀넌이 선택한 필진 대부분은 섀넌과 친한 사이버네틱스 그룹 회원들이었다. 심리학, 생리학을 연구했던 사이버네틱스 그룹은 인간과 기계의 유사성에 주목했고, 뇌와 비슷하게 작동하는 기계를 만들려고 했다. 이들이 염두에 둔 ‘생각하는 기계’는 마치 사람처럼 생각하는 기계였다.

그런데 매카시는 처음부터 이런 접근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봤으며, 또한 ‘생각하는 기계’는 꼭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더라도 문제만 풀면 된다고 추론했다. 생물학적 혹은 구조적 유사성은 필요하지 않았고 기능만 같으면 됐던 것이다. 비행기가 새처럼 날개를 퍼덕이지 않아도 날 수 있듯이,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아도 생각하는 컴퓨터를 만들 수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사실 새처럼 날려고 했던 과거의 모든 시도가 실패했듯이, 매카시는 사람처럼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려는 시도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오토마타에 관한 책이 출판될 무렵 그는 ‘사이버네틱스’나 ‘오토마타’와 차별화되면서 자신의 연구 프로그램에 적합한 새로운 이름을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인공지능’이었다. 매카시는 이 단어를 어디에선가 보고 자신이 사용했다고 회고했지만, 후대의 역사학자들조차 매카시 이전에 이 단어를 사용한 기록을 찾지 못했다.(94-95p)

 

 

미국에는 이렇게 MIT, 스탠퍼드, 카네기 멜런 세 곳의 대학에 센터가 설립되어 인공지능 연구를 이끌었고, 대서양 건너편 영국의 에든버러 대학교에 설립된 인공지능 연구소가 이 연결망을 유럽으로 확장했다.

이들은 모두 인공지능 연구가 인간의 뇌를 닮은 컴퓨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푸는 컴퓨터를 만드는 데 집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접근 방법을 ‘기호 인공지능’이라고 불렀다.(99p)

 

 

왜 아무 질문이나 던지고 이에 답해서 컴퓨터와 인간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성 역할을 흉내 내는 임무를 맡기고 이를 통해 인간과 컴퓨터를 구별하게 했을까?

튜링의 논물을 읽은 많은 사람이 이 성 역할 놀이를 기계의 지능을 테스트하는 기준으로 삼은 데 대해 비판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튜링 테스트가 남을 속이는 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으로, 인간 지능의 척도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런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튜링은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지 않았다.

튜링은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분명치 않다고 보았다. 그는 논문에서 향후 50년 안에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는 인공지능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고’라는 기준에서 보면 기계와 인간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페미니즘 철학자인 주디스 제노바는 튜링이 이 테스트를 통해 말하고 싶어한 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튜링이 성 역할 놀이를 테스트에 도입한 이유에 대해 그가 인간-기계의 경계가 임의적이라는 것 외에 남녀의 사회적 성별의 경계 또한(심지어 더 나아가 생물학적 성의 경계까지도) 임의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였다고 해석했다. 게다가 심판관의 질문들을 잘 살펴보면 튜링이 사고와 욕망의 경계도 문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제노바는 튜링이 인공지능의 성능을 검사하는 테스트 하나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서구 사회에서 받아들였던 이분법적 사고들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지적인 도전을 감행했다고 해석했다. 이러한 심원한 문제의식은 튜링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감추고 살면서 성 역할의 경계와 같은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했음이 분명해 보인다.(119-120p)

 

 

2차 사이버네틱스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자기 생성 체계이며, 인간의 인지는 세상에 대한 반영이 아니라 인간 주체가 적극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되었다. 이렇게 인간과 다른 생명체를 구별 짓던 경계는 허물어졌다. 인간만이 세상에 대해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단세포 생명체도, 까마귀도, 개구리도 세상에 대해 인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지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특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를 가진 복잡한 한 자기 생성 체계가 외부 세계에 대해 행하는 작용이었다.

그에 따른 과학적 지식에 객관적이고 절대적 지식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함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했다. 지식은 모두 주관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관주의가 도덕적인 상대주의를 낳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지 과정에서 우리가 세상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환경 파괴는 곧 우리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이므로 도덕적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되었다. 다른 이들의 자유를 침범하는 것은 이들이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세상을 억누르는 것이기 때문에 비윤리적인 행동이 되었다. 편을 가르고 싸움을 부추기는 진리라는 개념 없이도 우리는 훨씬 더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윤리 원칙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인간에게 특권을 부여하지 않고도 인간의 책임을 강조할 수 있는 것이다.(166-167p)

 

 

 

ㅡ 홍성욱, <포스트휴먼 오디세이> 中,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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