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0

 

 

이런 석조 요새들 가운데 어딘가에서 삶이 다할 때까지 지나간 시간과 지나가는 시간을 연구하는 일에만 파묻혀 산다면 어떨까 상상해보았다. 하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진실로 자기 안에만 틀어박혀 살 수는 없으며, 우리 모두는 언제나 크든 작든 의미 있는 일을 계획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마지막 몇 해를 아무런 의무에도 매이지 않고 살고 싶다는 내 안에 떠오른 꿈 이미지는 벌써부터 오후를 뭐라도 하면서 보내야겠다는 욕망에 밀려나버렸다. 그리하여 어찌 된 영문인지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메모장과 연필, 입장권 한 장을 손에 들고 페슈 미술관 로비에 들어와 있었다.(10p)

 

 

누가 그들을 기억하겠는가, 누가 대관절 기억이라는 것을 하겠는가? 피에르 베르토는 삼십 년 전에 이미 인류의 변화를 내다보면서, 기억과 보관과 유지는 주거지의 밀도가 낮은 시대에만, 즉 우리가 만들어낸 물건들이 많지 않은 데 반해 공간만은 넉넉했을 시대에만 삶의 중대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당시에는 기억과 보관과 유지 중 그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었고 그건 죽은 뒤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누구든 한 시간이면 족히 타인에게 갈 수 있고 대체 가능한 존재로 사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인구 과잉에 기여하는 20세기 말 도시의 삶은, 불필요한 것을 지속적으로 내다버리는 것으로,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것 모두, 가령 청소년 시절, 유년 시절, 출생, 선조와 조상을 남김없이 잊는 것으로 귀착된다. 최근 각별한 사이였던 사람들을 웹상에서 매장하고 방문할 수 있도록 온라인에 개설된 이른바 추모 공원은 한동안 명맥을 유지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상 묘지 역시 얼마 지나면 대기 속으로 사라질 것이고, 과거 전체는 형체도 알아볼 수도 없는 말 없는 덩어리가 되어 녹아 없어지리라. 그러면 우리는 기억이란 것을 알지 못하는 어느 현재를 살아가면서, 또 아무것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는 미래를 마주하면서, 종국에는 잠시라도 머물고 싶은 또는 가끔씩이라도 되돌아오고 싶은 마음조차 품지 못한 채 삶 자체를 놓아버리게 되리라.(42-43p)

 

 

어두운 과거가 있는 정치 공동체에서 그 공동체 건립에 선행한 희생자들을 추모하려는 의지는 새로운 질서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 질서의 존립 여부는 과거를 현실이 아닌 것으로 부정하고 승자와 동일시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121p)

 

 

아메리는 연민과 자기연민 둘 다를 억제하는 절제understatement'라는 일반적인 전략을 활용한다. 이는 니덜랜드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박해 피해자들이 쓰는 글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자기에게 가해진 고문을 전하는 아메리의 보고 역시 고통의 파토스보다는 그의 몸을 상대로 진행된 절차의 어마어마한 광기를 강조하는 어조를 띠고 있다. “벙커의 둥근 천장에는 끄트머리에 강철 갈고리가 달린 사슬이 도르래에 달려 있다. 나는 그 장치로 끌려갔다. 갈고리는 등뒤로 묶인 양손 수갑에 연결되었다. 다음으로 사람들은 내가 매달린 그 사슬을 위로 잡아당겼다. 내가 바닥에서 1미터 정도 떠 있게 될 때까지 말이다. 인간은 그렇게 서서, 아니 그렇게 등뒤에 묶인 두 손에 매달려서, 반쯤 기울어진 채 근력에 의지해 아주 잠깐 버틸 수는 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마지막 힘까지 쓰고 나면, 이마와 입술에 땀이 맺히고 숨은 헐떡거리고, 어떤 질문에도 답할 수가 없게 된다. 공모자는? 주소는? 접선 장소는? 이런 말들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 단 하나의 신체 부위, 즉 어깻죽지에 모인 생명은 반응하지 않는다. 그 생명은 안간힘을 쓰느라 완전히 바닥났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체적으로 강한 체질을 타고난 사람이라 해도 오래 버틸 수 없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꽤 빨리 포기해야 했다. 그러자 내 몸이 지금 이 시각까지 잊지 못하는, 부서지고 빠개지는 소리가 어깨에서 났다. 어깨 양쪽에서 구관절이 튀어나왔다. 체중을 버티지 못하고 탈구를 일으킨 것이다. 어깨가 완전히 탈골되어 허공으로 툭 떨어진 내 몸은 머리 위 뒤쪽으로 높이 치들려 묶인 두 팔에 매달려 있었다. 라틴어 토르구에레torquere에서 온 고문tortur이란 말은 탈구되다라는 뜻이다. 어원학적으로 얼마나 명쾌한 실물교육인가!”

기묘하게 객관적인 말투로 보고하던 문단을 도발적이게도 유머 비슷하게 전환하며 마무리하는 마지막 말은, 아메리로 하여금 그토록 극단적인 경험을 복기할 수 있게 해준 무감각의 태도가 여기에서 임계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흔들릴지도 모르는 지점에서 아이러니라는 수단을 꺼내든 것이다. 그는 스스로가 언어적 전달 능력의 극한에서 작업하고 있음을 안다. “자신의 신체적 고통을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자기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고문자가 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따라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문을 받을 때 인간이 어떻게 완벽히 고깃덩이로 전락하는지, “우리 육체성이 어떻게 상상 가능한 최고의 강도로 고조되는지추상적으로 성찰하는 것뿐이다. 극한의 고문, 그리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고통의 감각을 아메리는 다른 논리적 방법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죽음에의 접근 과정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그날 이후 어디나 죽음을 끌고 다니는 사람이 출발점으로 삼는 학문이다. 아메리는 고문이 지워지지 않는 성격을 띤다고 말한다. “한번 고문을 당하면 영원히 고문당한 사람으로 남는다.” 이렇게 아메리는 자신의 사례를 일말의 비감도 섞지 않고 간단명료한 인식으로 전달한다.(178-179p)

 

 

아메리는 페터 바이스처럼 이런 위기 상황에서 빠져나와 동시대 문학 사이에서 독보적으로 언어의 정밀성에 무사히 도달함으로써 그렇지 않았다면 접근 불가능했을 자유의 공간을 쟁취했다. 하지만 아메리의 경우 이렇게 다시 얻은 언어적 능력만으로는 그 불행을 완전히 몰아내기에 충분히 않았다.

(...)

그리고 우리를 명료함의 위로로 채워주는 것처럼 보였던 그 단어들은 스스로의 불치 상태를 적시한 것일 따름이었고, “소통될 수 없는 두 세계사이를, 죽음의 감각을 지닌 사람과 그런 감각을 전혀 지니지 않은 사람 사이를”, 그리고 한 순간만 죽을 뿐인 사람죽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사이를 가르는 선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기록 행위는 죽음을 모면한 자가 더이상 살아 있지 않다고 깨달을 수밖에 없는 순간 해방이 되기도 하지만 해방의 무효화가 되기도 한다.

죽음을 경험했는데도 그 죽음을 넘어 연장되어버린 실존의 중심에 자리한 감정은 죄책감, 저 생존의 죄책감이다.(188-189p)

 

 

문학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문학의 소용은, 아마도 어떤 인과적 논리로도 해명할 수 없는 특별한 연관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파악하는 법을 배우는 것, 단지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닐까.(285p)

 

 

시행에서 죽음의 경계를 가로질러 두루 조망하는 시선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지만, 동시에 크나큰 불의를 당한 사람들에 대한 묵념을 통해 빛을 받고 있다. 글쓰기의 형식은 많고 많다. 하지만 오직 문학적인 글쓰기에서만이 사실을 등록하고 탐구하는 것을 넘어 재건하려는 노력이 그 관건으로 대두한다.(286p)

 

 

 

W. G. 제발트, <캄포 산토>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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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9

 

 

책을 어렵다고 느끼게 하는 지점은 내용 자체의 난해함도 있겠지만 사용하는 용어의 생경함도 한 몫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도 익숙함의 문제이긴 하다. 특정한 용어나 단어를 낯설게 느끼는 이유는 그만큼 관련 주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반증일 테니.

 

 

 

 

그러나 의료전문가들이 이처럼 광범위한 영역에 개입할 권한을 가질만한 자격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분명하게 답할 수 없는데도 의학이 관할하는 영역이 계속 확장되고 의사들이 점점 더 많은 영역에서 이익과 불이익, 특권과 배제를 둘 다 수여하는 사회적 기능에 문지기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의료화의 정의하는 능력은 실제로 그 대상자의 생존을 좌우할 수 있다.

(...)

아픈 사람이 진단명을 얻지 못하는 경우, 즉 아프다는 본인의 주관적인 경험에 대해 의학적 승인을 받지 못할 경우 아픈 사람은 아픈 몸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지원을 끊길 위험에 처한다. “보험금 청구, 보조금, 복지 수당과 장애 수당 모두가 공식적인 진단에 달려 있을 뿐 아니라, 병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프다고 거짓말하면서 제대로 일도 안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 끼치는 인간으로 낙인찍혀 결국 가족, 친구로부터 버림받는일이 드물지 않은 것이다.(25p)

 

 

의학이 도덕적 가치판단과 무관하다는 전제가 의학이 사회의 권력 구조를 강화하고 유지하는 데 일조한다는 사실을 가린다는 점을 페미니스트 의료사회학자 및 과학자들은 꾸준히 지적해왔다.

더 중요한 것은 병리화의 작동 방식이다. 강제불임시술을 받았던 정신장애인과 한센인, 교정치료라는 이름의 고문을 받았던 자폐인과 정신장애인과 퀴어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 병리화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저 단순히 아파서 병을 치료하는 문제가 아니다. 병리화는 정상성을 생산하고 강화하는 기제다. 생물학적 다양성을 정상/병리의 차등적인 위계질서 안에 촘촘하게 줄 세워 배치하면서 정상적인 몸을 구성하는 외부로서 병리적인 몸을 생산하는 것이다. 특정 몸이 정상적인 몸의 위상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에 반대되는 비정상으로서 병리화된 몸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정상성과 장애는 동전의 양면이다.(30p)

 

 

정상성에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그냥 우리도 정상인에 끼워달라는 요구가 아니다. 페미니즘이 기울어진 운동장 자체를 문제시하듯, 퀴어 장애 정치는 인간, 인간의 몸, 인간의 정신, 사회관계 모두를 정의하고 해석하고 재현하는 그 모든 방식에 특정 몸·정신·인간만 정상으로 인식/인정하고 그 외의 것들은 열등하고 일탈적이고 병리적인 것으로 배제하는 위계가 체계적으로 구축되어 있음을 비판하는 데서 시작한다.(32p)

 

 

여자아이는 얌전하고 나대지 않고 귀여운 게 최고라는 편견, 성폭력의 위험을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편견, 여성의 성욕을 잠재적으로 위험한 것으로 보고 여성의 성욕 표출을 문란하고 사회질서에 위배되는 것으로 보는 편견, 아동과 여성과 장애인을 독립적인 인간 존재가 아니라 부모나 보호자에게 귀속되는 물건으로 보는 편견, 장애인은 무성적인 존재이고 무성적인 존재여야 하니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는 편견, 이 모든 편견이 총체적으로 결합하여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41-42p)

 

 

정체성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진정성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유성애/무성애를 비롯해 남/, 이성애/동성애 등 우리의 성적 영역을 직조하는 수많은 이분법에 딱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의 삶과 실존을 설명하기에 입수 가능한 언어가 턱없이 부족하고, 주어진 문법은 이러한 삶과 실존에 적절하지 않다는 뜻이다. 현재의 경직된 이분법적인 정체성 정의가 자신에게 꼭 맞지 않는 사람들은 부족한 언어에 자신을 끼워 맞추거나 다른 언어와 문법을 발굴해가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 중에 놓여 있다. 이는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불변이라고 전제하는 진정성 서사를 교란하고 인간의 가능성을 더 광범위하게 열어놓는다.(62p)

 

 

트랜스젠더 혹은 mtf/트랜스여성이 인공물이라는 인식은 트랜스젠더가 성전환 수술을 통해 몸의 형태를 바꾸고 젠더화된 외형을 갖춘다는 이해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이해는 인공물인 트랜스젠더퀴어가 아닌 여성은 진짜 여성, 자연스러운 여성이라는 이항 대립 구도를 구축한다.

(...)

페미니즘은 바로 이런 본질주의를 문제 삼으며 등장했다. 그렇기에 여성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고 가부장제가 주장하는 그런 여성의 본질적 속성, 본질적 역할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를 질문하는 데에선 논쟁적이었다.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는 당연한 본질이라고 생각했으며 단지 사회적 성역할을 바꾸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이었다. 트랜스는 인공물이라는 언설은 바로 이러한 여성 범주를 질문하지 않는 흐름에 토대를 둔다.(84-85p)

 

 

...병에 대한 낙인과 장애에 대한 낙인이 결이 다르다는 것을 경험하는 이들도 있다. 일례로 가시적인 장애인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는 편견에 둘러싸여 모든 기회를 박탈당하고 친절을 가장한 간섭에 시달린다면, 아픈 사람들은 기본적인 도움조차 받지 못하고 건강한 비장애인의 기준에 맞춰 노동할 것을 강요당하며 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꾀병 부린다는 비난을 듣는다. 이 경우 장애인과 아픈 사람 둘 다 결국엔 쓸모없는 존재라는 낙인이 찍히지만, 전자는 비장애인과의 차이가 과도하게 부각되어 차별의 근거로 동원되는 반면 후자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올 만큼 아파도 이 아픔이 차이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낙인으로 인한 경험이 다르다.(128p)

 

 

그러므로 아픈 사람을 정체성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그저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의 별개의 제3항으로서 범주를 하나 늘리는 일이 아니다. 아픈 사람이 나을 의지가 없거나 아픔으로부터 이득을 얻기 위해 병에 안주하는 나약하고 교활한 인간으로 쉽게 매도당하는 데에는,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엄격한 분리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 아픈 사람들은 그 이분법의 경계를 넘나들거나 경계지대에 상주함으로써 그 경계 자체가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구성적 허구라는 것을 입증하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앞 절에서 이야기했듯 주류 사회는 물론 주유 장애학계에서도 장애인은 치료될 수 없고 의지로 극복 못하는 돌이킬 수 없는 차이인 반면 아픈 사람은 치료 가능성이 있고 따라서 나을 의지가 중요한 일시적인 위치라고 구분 지을 때, 이 구분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이분법적 분리를 공고히 하여 비장애인의 주체 위치를 안전하게 담보하는 데 이바지할 위험이 있다. 자신이 언제든 병에 전염될 수 있고 언제든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이 공포를 비장애인 중심 사회는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장애인은 영원히 비장애인과는 다른 존재여야 하고, 경계를 위태롭게 만드는 아픈 사람은 두 범주 중 어느 한쪽으로 치워져 눈에 띄지 말아야 한다는 어떤 사회적인 강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픈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그만큼 인정받기 어려운 이유를 보여주는 동시에, ‘아픈 사람은 장애인/비장애인 이분법적 분리 체계에서 쫓겨난 비체이자 그 체계 자체를 구성하는 외부로서 체계의 내적 불안정성을 폭로하고 전복시킬 잠재력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137-138p)

 

 

아픈 사람 정체성에 대한 사유는 인식론적 전환과 광범위한 사회적 투쟁을 요구한다. 이 과도한 경쟁사회에서 자신이 건강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기에, ‘아픈 사람 정체성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니 요즘 세상에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다고 유난이야?”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바로 그것이 아픈 사람을 정체성을 호명함으로써 노리는 효과이기도 하다. ‘요즘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어라고 말하는 순간, 이 사회가 기준 삼는 건강한 비장애인이라는 이상이 강제적인 허구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아픈 사람 정체성은 이 사회가 건강/-건강의 가치 위계를 자연스러운 진리이자 모두가 따라야 하는 정언명령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상 그 이면에서는 그러한 가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가혹하리만큼 배출하고 있다는 점을 폭로한다. 또한 세상에 안 아픈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다들 구조의 문제점을 사무치게 몸에 새기고 있음에도 이 사회가 그것을 개개인이 알아서 챙겨야 할 개인 건강 문제로 환원하게끔 조장함으로써 권력구조로 인한 피해를 개인에게 전가하고 그로써 이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권력구조를 영속시키는 방식을 폭로한다. 따라서 아픈 사람 정체성에 대한 진정한 인정은 단지 개인 관계에서 이뤄지는 협상과 배려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가치를 오직 노동 생산성으로만 평가하며 사람을 쓰고 버리는 소모품 취급하는 자본주의 체계와, 건강/-건강을 선/악의 이분법과 쓸모 있음/쓸모 없음의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도덕적 가치체계의 공모에 맞서 싸우는 거대한 투쟁을 필요로 한다.(149p)

 

 

범주는 한 개인이 살아온 삶의 극히 일부만 포착할 수 있으며 그 일부를 의미 있는 것으로, 가장 정치적이고 논쟁적 영역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 한 개인의 범주 인식을 통해 그 개인이 이 사회의 적법하거나 위법하거나 무법한 구성원인지를 파악하도록 하고, 이를 통해 그 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위치를 구성하도록 한다. 이것은 이 사회를 구성하는 권력 장치가 작동하는 방식을 폭로하는 작업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범주를 아는 것은 개인의 삶 전체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겪은 삶의 극히 일부만을 그저 짐작만 할 수 있고 그 경험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의미화되는지 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

이 계기가 마련되지 않고 한 인간의 많은 삶의 양식 중 일부를 두고 그것이 인간 그 자체, 존재 그 자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면 이것은 폭력으로 작동할 것이고 혐오를 생산하는 중요한 기재가 될 것이며 그 사람을 이 사회에서 추방하고 삭제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175-176p)

 

 

죽음을 어떤 식으로 사유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삶은 전혀 다르게 구성된다. 죽음을 범주의 근거로 사용할 것이냐 삶을 알아가는 자리로 사유할 것이냐에 따라 죽음, 그리하여 삶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형태로 변한다. 만약 트랜스젠더퀴어의 죽음을 그저 혐오 범죄의 증거, 그리하여 사회적 차별의 근거로만 사유한다면 이것은 삶과 죽음의 관계를 사유할 기회 자체를 박탈할 수 있다. 죽음은 범주를 정당화하는 수단, 그리하여 ㅇㅇ은 트랜스다와 같은 식으로 주장하는 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식의 주장은 지배 규범이 비규범적 존재를 평가하는 바로 그 방식을 반복하는 재생산한다. 죽음은 고인을 특정 범주로 수렴해서 사유할 수 없도록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계기여야 하고, 지금까지 알았거나 죽음을 계기로 조우한 고인의 삶을 복잡하게 재조직하는 시간이어야 한다.(187p)

 

 

나의 젠더가 무엇이고, 내가 어떤 젠더를 가진 사람에게 어떤 방식으로 끌림을 느끼는지를 도식화하는 것만이 정체성으로,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만이 정체화로 상상되는 것에서 아쉬움을 느낀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새롭게 하나의 카테고리를 만들어 더 다양한 가짓수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고정되고, 단일하고, 일관성 있는, 통합된 하나의 정체성이라는 상상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말해질 수 없는 서사와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의미화하고, 다르게 의미화한 서사와 경험을 새롭게 구조화해 나가기 위한 출발점이기를 바란다.

말할 수 없음에 대해 고민했다. 말하는 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대치되거나, 그것은 진지하게 이야기될 주제가 아니라고 치부되거나, 내가 특정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위치지어지거나, 그것에 대해 말하기 위한 언어가, 체계가 부재한다고 느낄 때, 그럼에도 그것을 말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220p)

 

 

 

 

전혜은·루인·도균,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 , 여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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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8

 

 

지각의 변동가능성, 기억의 부정확에 대한 얘기가 특히 흥미로웠다.

 

 

 

우리는 모든 동물들이 주어진 시간에 지각하는 사건의 수가 거의 일정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에 지각하는 사건의 수가 동물마다 크게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할 이유는 충분하다.

(...)인간은 1초당 겨우 열 건의 사건을 지각하는데, 만약 열 건이 아니라 1만 건의 사건들을 지각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우리가 일생 동안 지각할 수 있는 사건의 수가 일정하다면, 지각하는 사건이 1,000배로 늘어났으므로 수명은 1,000분의 1로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작 한 달 미만을 살아야 하므로, 계절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책을 통해서만 알 뿐 전혀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겨울에 태어난 사람은(석탄기라는 뜨거운 지질시대가 있었음을 믿는 것처럼) 더운 여름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세상의 움직임은 너무 느려 우리의 감각으로 보는 것은 고사하고 추론할 수도 없다. 예컨대 태양은 하늘에 그대로 떠 있고, 달의 모양은 거의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가정을 뒤집어, 우리가 주어진 시간에 지각하는 사건의 수가 1,000분의 1로 줄어들었다고 치자. 그러면 우리의 수명은 1,000배로 늘어나고, 겨울과 여름은 1년의 4분의 1이 아니라 한 시간의 4분의 1처럼 느껴질 것이다. 버섯과 속성 식물들은 속사포처럼 자라, 세상이 순식간에 창조된 것처럼 보일 것이다. 1년생 관목들은 펄펄 끓는 옹달샘처럼 순식간에 우거졌다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총알이나 포탄과 같은 동물의 움직임은 우리 눈에 포착되지 않을 것이다. 태양은 별똥별처럼 하늘을 가로지르며 시뻘건 꼬리만 남길 것이다. 어떤 초인간도 당해낼 수 없는 그런 가상적 사례는 동물계 어딘가에서 실현되고 있을 게 분명하므로, 그것을 덮어놓고 부인하는 것은 성급하리라.(44-45p)

 

 

기억은 고정되고 활기 없고 단편적인 수많은 흔적들을 고스란히 재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반응이나 경험들을 바라보는 전반적 태도이미지나 언어의 형태로 저장된 세부 사항을 기초로 하여 상상력이 가미되어 구성되거나 재구성된다. 심지어 가장 기초적인 암기와 반복의 경우에도 기억이 늘 정확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기억의 정확성을 절대시할 필요는 없다.(109p)

 

 

진정 나만의 것으로 보이는 열광과 충동 중 상당 부분이 실은(나에게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후 잊힌) 타인의 제안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타인이 나일 수도 있다.

(...)

이런 식의 망각은 때때로 자가표절로 이어질 수 있다. 나는 전에 사용했던 구절이나 문장을 마치 새것인 양 재생산하곤 하는데, 가끔 심각한 건망증과 뒤섞여 문제가 더욱 복잡해질 수 있다.(120p)

 

 

로프터스가 제시한 사례에서 분명한 것은 상상 또는 현실 속의 아동학대가 됐든, 진짜 기억 또는 실험적으로 이식된 기억이 됐든, 오도된 증인 또는 세뇌된 죄수가 됐든, 무의식적인 표절이 됐든, 오귀속이나 출처 혼동에서 유래하는 거짓 기억이 됐든, 외부의 확인이 없을 경우 진짜 기억(또는 아이디어)으로 느껴지는 것차용되거나 암시된 기억(또는 아이디어)’을 쉽사리 구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도널드 스펜스는 이를 역사적 진실과 서사적 진실간의 딜레마라고 불렀다.

나는 형의 도움을 받아 소이탄에 관한 거짓 기억의 원인을 밝힐 수 있었으며, 로프터스도 대상자들에게 그들의 기억이 이식되었음을 공언함으로써 오해의 소지를 없애려고 했다. 그러나 설사 거짓 기억의 근본적인 메커니즘이 밝혀진다고 해도, 그런 기억이 갖고 있는 현실감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특정 기억이 명백히 모순되거나 터무니없다고 해도 확신감이나 신뢰감이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던 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경험담을 이야기할 때 대부분 거짓말을 하지 않고, 그 이야기를 꾸며 냈다고 의식하지도 않으며, 그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

일단 하나의 스토리나 기억이 구성되고 생생한 감각적 심상과 강력한 감정이 동반되면, 내적·심리적 방법은 물론 외적·신경학적 방법으로도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기억의 생리적 연관성은 fMRI를 이용하여 조사될 수 있으며, 촬영된 뇌영상을 살펴보면 생생한 기억이 감각영역, 감정영역(변연계), 실행영역(전두엽)을 광범위하게 활성화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어떤 기억이 실제 경험에 근거하든 말든, 활성화 패턴은 사실상 똑같이 나타나는데.

(...)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대한 착오는 비교적 드물고, 우리의 기억은 대부분 굳건하고 신뢰할 만하다니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132-134p)

 

 

과거의 일이든 미래의 일이든, 시간상으로 가까운 일이든 먼 일이든, 의식의 흐름을 구성하는 다른 부분에 대한 지식은 늘 현재의 사물에 대한 지식과 혼합되어 있다.

과거의 대상들에 대한 정보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는 한편 새로운 대상들에 대한 정보가 유입됨에 따라, ‘기억 및 경험시간에 대한 전향적·후향적 감각이 탄생한다. 그런 것들은 의식에 연속성을 부여하므로, 그러한 연속성이 없다면 의식을 흐름이라고 부를 수 없다.(178p)

 

 

시각은 통상적인 상황에서 이음새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므로, 우리는 그 밑바탕에 무슨 과정이 깔려 있는지 전혀 눈치챌 수 없다. 시각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뭔지를 알려면, 실험동물이나 신경계장애 환자에서 시각의 연속성이 단절되는 장면을 관찰해야 한다. 특정약물중독 환자나 중증 편두통 환자들이 경험하는 깜박거리고 반복되고 흐릿한 이미지는 의식이 불연속적 순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아이디어의 설득력을 높여준다.

그 메커니즘이야 어찌됐든, 불연속적인 시각 프레임이나 스냅숏의 융합은 움직이며 흐르는 의식의 전제 조건이다.(194-195p)

 

 

신경학자들이 사용하는 암점이라는 용어는 어둠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에서 유래한다. 암점이란 지각의 단절이나 중단을 의미하며, 본질적으로 신경병터에 의해서 생성되는 의식의 갭을 뜻한다. 그런데 암점을 가진 환자는 자신이 경험하는 바를 타인에게 전달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스스로 부인하는 모순에 빠지는데, 그 이유는 손상된 사지가 더 이상 내적 신체상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이 실제로 경험하지 않는 이상 상대방의 암점을 액면 그대로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211-212p)

 

 

과학, 특히 심리학에서 성급한 단순화와 체계화가 과학을 얼마나 경직화시키고 발달을 가로막을 수 있는지를 역설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과학은 일종의 다락방을 갖고 있으며, ‘당장 쓸모없어 보이는 것별로 적당하지 않아 보이는 것들을 거의 반사적으로 그 속으로 집어 던진다. 우리는 수많은 보물들을 사용해보지도 않고 끊임없이 다락방에 처넣어, 결국에는 과학의 발달을 가로막게 된다.(217p)

 

 

 

올리버 색스, <의식의 강> , 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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