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0

 

김원영 작가가 본인의 책에 인용해서 알게 된 책. 지금 이 글을 쓰며 알게 된 나에게만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역자 중 한 분이 김현경 씨였고, 내가 아는 김현경은 한 명 밖에 없어 자연스레 사람, 장소, 환대를 쓴 인류학자 김현경 씨라고 생각했다. 그 책을 즐거이 읽었던 터라 반가운 마음과 함께 이 책을 꼭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책을 펴서 책날개의 역자 설명을 보니 동명이인의 다른 사람이었다는 사실.

 

커버링의 개념과 그 맥락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읽게 되었다. 저자가 법대 교수라 딱딱한 이론과 설명으로 가득할 거라고 지레 겁먹고 있었는데 기우였다. 학창 시절에 법학뿐만 아니라 영문학도 함께 공부했던 사람답게 게이로서의 본인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일본계 미국인으로서의 본인의 정체성 및 성별에 대한 차별 얘기를 전환, 패싱, 커버링의 개념과 함께 상세히 다루면서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책이었다. 역시 시를 썼던 그 재능은 어디 안 가겠지.

 

이 책은 법이 계속해서 진전 된다고 하더라도 법 자체의 한계로 인해 인간이 겪는 모든 차별이나 불평등을 해결해줄 수는 없을 것이며, 그 한계를 인정하되 지레 포기하지 말고 법의 진전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법이 해결할 수 없는 부분에서는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자는 어떻게 보면 원론적인 얘기를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꼭 완벽한 해결책을 내놓아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해결책이라면 누군가가 앞서 내놓았겠지. 비록 제시하는 해결책이 미흡하더라도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그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는 계기가 될 테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조금씩이나마 흡족한 해결책을 모색해갈 수 있지 않을까?

 

 

 

게이 정체성에 도달하기까지 나는 3단계의 고투를 거쳤다. 이것은 동성애자 친구들의 삶에서도 똑같이 목격되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에서, 나는 이성애자가 되려고 애썼다. 옥스퍼드 대학 안에 있는 교회에 다닐 때, 나는 지금 이 모습이 아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이것을 전환(conversion)'의 욕구라고 부르고자 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 나는 동성애자임을 받아들였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이 사실을 숨겼다. 빌에게 그의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던 무렵에는 더 이상 나를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 친구들에게는 나의 정체성을 숨기려고 노력했다. 이것을 패싱(passing)'의 욕구라고 부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벽장에서 나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커밍아웃한 지 한참이 지난 후에도 동성애자를 주제로 글을 쓰거나 공개적으로 동성과 애정 표현을 하지 않음으로써 여전히 나의 성적 지향을 부각시키지 않았다. 이것은 패싱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동료들은 내가 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알려진 나의 게이다움을 자제하려고 하는 이러한 노력을 어떤 단어로 설명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 후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의 저서 낙인(Stigma)에서 내가 찾던 단어를 발견했다. 1963년에 출간된 이 책에서는 장애인, 노인, 비만인 등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손상된정체성을 감당하며 살아가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고프먼은 패싱에 대해 논의한 후 자신에게 찍혀 있는 낙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은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낙인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프먼은 이러한 행동을 커버링(covering)'이라고 명명했다. 고프먼은 패싱은 개인적 특성의 가시성과 관련되는 반면, 커버링은 두드러짐과 관련되어 있다고 언급하면서 패싱과 커버링을 구분했다. 고프먼은 커버링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보좌관들이 회의를 하러 오기 전에 왜 항상 테이블 뒤에 자리를 잡고 있게 되었는지와 연관시켜 이야기했다. 누구나 루스벨트가 휠체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가 패싱을 한 것은 아니었다. 루스벨트는 커버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장애를 대수롭지 않게 보이게 해서 대통령으로서의 탁월함에 집중하게 만든 것이다.(38-39p)

 

 

모든 민권 집단이 커버링 요구로 상처받는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백인처럼 입고’ ‘뒷골목 비속어를 쓰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아시아에서 온 티를 내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여성에게는 직장에서 남자처럼 행동하고, 육아에 대한 책임감을 숨기라고 한다. 유대인에게는 너무 유대인처럼보이지 말라고 한다. 무슬림에게는, 특히 9.11 이후 베일을 사용하지 말고, 아랍어를 쓰지 말라고 한다. 장애인들은 활동을 보조하는 장비를 숨기라는 말을 듣는다. 미국 사회가 수십 년간의 투쟁 후에 이 여러 집단의 사람들을 완전히 평등하게 대우하는 데 전념하는 것처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하다.

우리는 미국인들의 차별 방식이 변화하는 시점에 살고 있다. 지난 세대는 집단 전체를 차별의 표적으로 삼았다. 즉 소수 인종, 여성, 동성애자, 소수 종교인, 장애가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았다. 새로운 세대의 차별은 집단 전체가 아니라, 주류 규범에 동화되지 못한 그 집단의 일부를 겨냥한다. 이 새로운 형태의 차별은 소수자인 사람이 아니라 소수자의 문화를 표적으로 한다. 외부자들은 내부자들처럼 행동할 때만 받아들여진다. 그러니까 우리는 커버링할 때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43-44p)

 

 

커버링에 대한 강의를 하다보면 소위 성난 이성애자 백인 남성의 반발과 맞닥뜨리는 경우가 있다. 거의 예외 없이 백인 남성이며 화가 나 있는 수강생 한 명이 커버링이 민권의 이슈라는 것을 부정한다. 소수 인종이나 여성이 스스로 커버링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 이 집단이 통제할 수 없는 것, 예컨대 피부 색깔이나 염색체, 선천적인 성적 지향으로 인해 차별을 받지 않도록 법적 보호를 받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머리카락을 흑인 스타일로 땋는다거나, ‘여성스럽게행동하거나, 성 정체성을 티 내는 것처럼, 자신들의 통제 범위 안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행동이 왜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질문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자신은 평생토록 커버링을 해야만 한다. 우울증, 비만, 알코올 중독, 조현증, 수줍음, 노동자 계급 출신 배경, 명칭이 없는 아노미 상태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 자신 역시 조용한 절망의 삶을 사는 수많은 남성 중의 하나다. 전형적인 민권 집단은 왜 자신에게 없는 자기표현의 권리를 갖는단 말인가? 진정한 자아를 위한 자신의 고투는 왜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

내가 이들의 입장에 동의하면 다들 놀란다. 우리 시대의 민권 운동은 소수 인종이나 여성, 동성애자, 종교적 소수자, 장애인과 같은 전통적인 민권 집단의 권리 향상에만 중점을 두는 우를 범했다. 소위 주류에 속한 사람들, 예컨대 앞서 말한 이성애자 백인들은 커버링하지 않는다고 가정한 것이다. 이들은 자기 규정을 위해 분투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막는 사람들로, 오직 방해물로만 여겨졌다. 주류 대중이 민권 활동가들에게 적대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당연하다. 우리가 자신들은 거부당한 온전한 인간성을 표현할 자격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47-48p)

 

뒤이어 저자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의견을 제시하지만 소위 ‘성난 이성애자 백인 남성’들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을 것 같다. 한남들이 특히나 요즘 세상에서 더 억울해 죽으려고 하는 이유도 이런 식의 사고방식과 거의 유사할 것이다.

 

 

이들 사례에서 너무나 가슴 아픈 부분은 많은 게이들이 자발적으로전환 치료를 받았다는 점이다. 도입부에서 캐츠는 본인 스스로도 전환 치료를 시도했었다고 밝힌다. “당시 나는 근본적으로 바뀌어야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회며, 그런 사회에 결코 나를 맞추지 않겠다고 생각할 만큼 현명했지만, 그럼에도 의 문제는 동성애에 있고 목표는 이성애로의 치료라고 스스로 분석하기 시작했다미국 역사에서 이성애는 인간다움의 조건 중 하나였다. 인간이라는 종에 소속되려는 갈망 때문에, 따지기 좋아하는 급진주의자들마저도 동성애자로서의 자아를 죽이려고 했다.(60p)

 

 

세상은 바뀌고 있다. 내가 듣는 이야기도 바뀌고 있다. 한 동료는 자신의 게이 친구가 청소년 시절 부모님 손에 정신 병원으로 끌려갔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친구는 차의 앞 유리를 부숴 버릴 정도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부모는 그 친구를 정신과 의사에게 말 그대로 질질 끌고 갔다. 정신과 의사는 부모에게 아들보다는 부모가 입원해야 할 것 같다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나는 그 게이 청소년이 앞 유리가 부서진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상상해본다. 그 앞 유리는 금이 간 천국의 돔이자 자신의 세계를 열어젖힌 뚜껑이었을 것이다.

데이비드라는 친구는 열아홉 살에 커밍아웃을 하자 부모님이 자신을 가족 목사에게 데리고 갔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데이비드를 평생 보아 온 그 목사에게 데이비의 부모는 자신들의 당혹감과 사랑, 혼란을 상세히 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데이비드가 전환되어야 한다고 간청하였다. 목사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은박지를 씹었을 때의 찌릿함 같은 공포를 안고 시무룩하게 판결을 기다렸다. “제게는 아들이 세 명 있어요.” 목사는 마침내 입을 뗐다. “제 소망은 셋 모두 데이비드처럼 잘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데이비드가 변하기를 원한다면, 미안하지만 저는 당신 편이 아닙니다.” 이제는 30대 후반의 사회 복지사인 데이비드에게 어떻게 부모님이 동성애자 권리를 위해 그렇게 열심히 활동하는지 묻자, 데이비드가 해 준 이야기였다.(69p)

 

 

그러나 불변성 논리가 정교화될수록 나는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오류라는 확신이 든다. 이 논리에는 결점이 있는데, 일종의 암묵적인 변명이라는 점 때문이다. 불변성 논리는 나는 변하지 않을 거야.” 대신에 나는 변할 수 없어.”라고 말함으로써 전환 요구에 저항한다. 동성애자에 대한 전기 충격 치료는 효과가 없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치료는 효과가 있다고 해도 잘못된 것이다. 또한 불변성 논리는 이성애만 해도 되는 양성애자가 동성 욕망을 표현하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물론 논리적 차원에서 불변성 논리와 타당성 논리는 공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 차원에서 이 두 항변은 수사적 논증으로서 서로를 무효화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어떤 정체성이 변할 수 없다면, 이것이 타당한지 여부를 따지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 역시 사실이라면, 즉 어떤 정체성이 타당하다면, 사람들은 이 정체성이 불변적인지 여부를 따지지 않을 것이다. 문학 교수 레오 베르사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잘못된 길에 와 있다는 가정이 없다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라는 질문 자체를 도처에서 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79p)

 

인상적인 구절이다. 나 역시 성정체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위적으로 바꾸려고 하는 시도는 의미도 없고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는데 너무 단순한 생각이었다. 이 생각에서 확실하게 한 걸음 더 나아간 접근 아닐까? 이렇게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니.

 

 

전환이 동성애자와 전() 동성애자를 구분하고 패싱이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와 그렇지 않은 동성애자를 갈랐다면, 커버링은 노멀퀴어를 가른다. 이 마지막 구분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동화주의자와 해방주의자의 구분으로, 또는 성적 보수주의자와 급진주의자의 구분으로 말이다. 우리가 뭐라고 부르든, 이것은 오늘 날 동성애자 커뮤니티의 주요 단층선이다.(120p)

 

 

쟤들이 침대에서는 뭘 하든 신경 안 써.” 캠퍼스에서 입 맞추고 있는 두 남자를 지나쳐 가며 한 친구가 말했다. “왜 공공장소에서 저러는지 이해가 안 갈 뿐이지.” 그 당시에도 나는 동성애자의 단골 답변으로 응수할 수 있었다. 그녀가 두 남성의 입맞춤을 이성애의 기준선에 어긋나는 티 내기로 보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녀 역시 남자 친구와 공공장소에서 애정 행각을 하지만, 그것은 그저 일상적인 일이었다. “나는 동성애자야.”라는 말에는 당황하지 않는 사람이 누군가가 동성애자임을 표현하는 상황을 볼 때에는 왜 그렇게 불쾌해하는지 그 당시에도 의아했다.(138p)

 

 

동성애자의 평등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문제가 되는 행동이 동성애자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묻지 않을 것이다. 동성애자는 평등을 포함하여 많은 것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 더 나은 질문은 동일한 행동이 이성애자에게는 용납되고 동성애자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지 묻는 것이다. 샤하르의 소송에서는 이러한 이중 기준이 확실히 존재했다. 그녀가 결혼한다고 말했을 때, 콜먼은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샤하르가 여자와 결혼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콜먼은 그녀를 해고하라고 로비했다.(151-152p)

 

 

대부분은 이성애자들에게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행동이 동성애자들에게 명백히 금지된다. 법원은 동성애자들에게 법 앞에서는 단순히 커버링을 요구하는 반면, 자녀들 앞에서는 종종 패싱할 것을 요구한다. 미주리 주 항소 법원은 1998년에 자녀들이 어머니의 성적 선호를 알지 못했고, 어머니는 자녀 앞에서 성적이거나 애정을 표현하는 행동을 한 적이 없다.”라는 것을 밝히고 레즈비언 어머니에게 양육권을 부여했다. 1990년에 한 레즈비언 어머니에게 동일한 기준으로 양육권 부여를 거부한 루이지애나 주 항소 법원은 성정체성 형성기의 자녀가 있는 곳에서, 단순한 우정을 넘어선 공개적이고 무분별한 애정 표현을 했다고 언급했다. 만약 동성 커플에게 허용 가능한 성적 표현이 우정의 모습으로 제약된다면, 부모에게 기대하는 성적 지향이 확실히 중립적이지 않다.

이러한 커버링이 요구되는 이유 역시 유념하라. 바로 부모가 티를 내면 성 정체성이 형성되고 있는자녀를 전환시킬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동화에 대한 세 가지 요구 모두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 자녀가 전환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에게 패싱을 해야 하고 법원에서는 커버링을 해야 한다. 내가 설명한 전환, 패싱, 커버링까지의 변화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하는 범주의 변화가 아니라, 강조점의 이동이다.(156-157p)

 

 

이러한 이유로 나는 동성애자 권리를 지지한다고 말하지만 동성애자들이 커버링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이들보다, 동성애자 평등에 반대한다고 말하고 동성애자가 전환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이들을 지적인 측면에서 보다 더 존중한다. 동성애를 혐오하고 동화의 세 가지 형태 모두를 요구하는 것이 차라리 일관성 있는 것이다. 동성애자 평등을 지지하지만 커버링 요구를 통해 동성애자들을 이등 시민의 자리에 밀어 넣는 것은 일관된 태도가 아니다.(162p)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다른 인종보다 순수한 혈통을 지닌, 별도로 분리된 인종이라고 믿는다. 수년간 나는 일본인들의 인종 차별주의를 백인 미국인들이 분명하게 이해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일본인들이 자신의 더듬거리는 일본어를 듣고 감탄하며 칭찬을 늘어놓는 모습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나에게 와서 일본 문화에 친밀감을 느낀다며, 자기 안에 일본인의 피가 흐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나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한 달, 1, 아니면 5년 후에 자신이 결코 일본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처음 병원에 가서 의사가 자신의 버터 냄새 나는상체에 움찔하는 것을 본 순간일 수도 있다. 혹은 아주 예외적인 일본 여성들만 자신과 진지하게 사귈 것이며, 그녀의 가족은 아마도 결혼을 반대할 것이고, 만약에 자녀가 생긴다면 그 아이들이 혼혈아라고 차별받을 것임을 깨달았을 때일 수도 있다. 역설적이게도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게 될 때일 수도 있다. 외국인이 서툰 일본어로 말하면 칭찬하지만,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면 기모치 와루이’, 즉 기분 나쁘다고 말하는 일본인들이 많다.(173p)

 

 

요즘 미국에서 나를 보는 일본인들은 백인 혼혈이냐고 자주 묻는다. 누나는 절대 이런 질문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둘 사이의 신체적 차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행동, 예컨대 자세를 취하는 방식, 공간을 이동하는 방식, 말하는 방식으로 인해 내가 일본인으로서 부호화되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나와 교류했던 일본인들은 나의 다름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 그들은 내 몸에 그 차이를 입혀 본 후에야 겨우 다름을 이해한다.

일본에 있으면서 나는 인종 정체성에 행동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종이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인종에 대한 자각이 생물학 하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보다 조심스러운 개념이다. 누나와 나 모두 일본인의 혈통과 피부색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생물학적 특질은 진짜 일본인으로서의 지위에 필수적이었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인종은 우리의 행동에 의해서도 규정되었다.(174p)

 

 

1990년에서 1991년까지 진행된 이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여성과 남성이 펜실베이니아 로스쿨에 똑같은 점수로 입학하더라도 남성이 학급의 상위 10퍼센트에 들 확률이 2~3배 높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책은 이러한 불균형의 원인이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남성적이었던 제도가 여성을 허용해도 남성에게 유리한 문화를 유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책에서는 이 문화를 분석하면서, 예일 대학교 미팅에서 드러난 커버링 요구와 역커버링 요구를 설명한다. 한편으로 펜실베이니아 로스쿨의 여성들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탈성화(desexualize)하고, 전형적인 여성적 특질을 멀리하고, 페미니스트 액티비즘을 피하라는 압력을 받는지에 대해 짚는다. 한 교수의 말에 따르면 여성들은 훌륭한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 신사처럼 행동하라.”는 말을 듣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반대의 압력도 받는다. 교실에서 자기 목소리를 거리낌 없이 내는 여성은 야유, 공개적인 망신, 가십을 경험한다. 전형적인 여성적 행동에 순응하지 않는 여성은 남성 혐오 레즈비언또는 페미나치 다이크라고 불린다.

성 평등을 다루는 문헌은 이러한 궁지를 진퇴양난”, “딜레마”, “외줄타기로 다양하게 설명한다. 여러 직장에서 여성들은 노동자로서 존중받기에 충분할 만큼 남성적이 되라는 압박뿐 아니라 여성으로서 존중받기 충분할 만큼 여성적이 되라는 압박을 받는다. 많은 증거를 통해 나는 여성이 되라는 순응의 요구는 여성의 속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여성을 여성으로서 대상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모순적 요구는 오늘날의 성차별 이야기가 지배 집단으로의 순응 강요라는 단순한 내러티브보다는 훨씬 복잡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215-216p)

 

 

여성의 독특한 지점은 지배 집단인 남성으로부터 커버링과 역커버링을 둘 다 꼬박꼬박 요구받는 점이다. 여성만이 이런 식의 특이한 상황에 놓인 이유는 여성의 종속이 대개 특유한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동성애자 및 인종적 소수자와 달리 여성을 억압하는 사람들은 여성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오랫동안 남성은 따스함, 공감, 돌봄 등 여성에게 있다고 여겨지는 여성적인특질에 가치를 두었다.

여성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남성이 여성을 제약하는 사고방식을 영역 분리라고 한다. 즉 남성은 일, 문화, 정치의 공적 영역에 거주하고, 여성은 따뜻한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 거주한다는 이데올로기다. 표면상 이 두 영역은 남성과 여성의 상이한 특징을 뒤따른다. 남성은 그들의 남성적인속성 때문에 공적 영역에, 여성은 그들의 여성적인속성 때문에 사적 영역에 적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남성이 여성을 속박하는 동시에 소중히 여기는 것을 가능케 한다. 즉 여성은 숭배를 받지만 오직 가정에서만이다.

(...)

미국 여성은 가정이라는 영역을 결코 떠나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그 안에서 매우 의존적이지만, 여성이 그 이상 높은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곳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218p)

 

 

남성이든 여성이든 대부분의 노동자는 직장에 들어설 때 자녀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포기의 정도는 성 중립적이지 않다. 혹실드는 한 대기업을 연구하면서, 고위직 남성 임원은 책상 위에 자녀 사진을 일상적으로 전시해 두지만, 여성 관리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학위증과 상장을 전시하길 선호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한 여성 관리자가 말했다. “경력을 관리하는 여성들은 함께 일하는 남성들에게 나는 어머니나 아내가 아니라 동료입니다.’라고 밝히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합니다.”(223p)

 

 

나는 앞으로 한 세대가 지나도 여러 여성 법관의 초상화가 벽에 무난하게걸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르치는 여성학생이 외모나 정서적으로 더욱 남성스럽게되라는 커버링 요구 때문에 좌절하거나, 여성들끼리의 액티비즘이나 연대를 부각하지 말라는 압력 때문에 곤란을 겪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 여성들이 자녀 양육의 주된 책임을 맡게 될 확률이 매우 높으리라는 짐작 때문에 비관적이다.

조앤 윌리엄스와 노동조합 고문 낸시 시걸은 이렇게 썼다. “80퍼센트 이상의 여성이 어머니가 되고”, “25세에서 44세 사이의 여성 95퍼센트가 1년 내내 주당 50시간 미만으로 일한다.” 이는 내가 가르치는 여학생 대다수가, 이 초상화의 인물 중 하나가 되기까지 필요한 시간만큼 일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뼈저리게 깨닫듯이 <뉴욕 타임스>는 변호사에 대한 기사에서 마미 트랙(mommy track)”이라는 이젠 흔해진 신조어를 만들었다. 관련 논문에서는 로펌이 하부에는 엄마 변호사들로 구성된 핑크 칼라 직종이 떠받치고 있고 상부에는 남성과 무자녀 여성으로 가득 찬조직이 되어 버릴 끔찍한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다.(237-238p)

 

 

동화 모델은 어떤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존재는 보호하지만, 그 집단과 관련된 어떤 행위는 보호하지 않는다. 법원은 피부색은 보호하되 언어는 보호하지 않고, 염색체는 보호하되 임신은 보호하지 않으며, 성적 지향은 보호하되 (2007년 현재) 동성 결혼은 보호하지 않는다.(254p)

 

 

민권을 집단 기반의 평등이 아닌 보편적 자유라는 측면에서 분석할 때의 장점은 집단 문화에 관해 가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앞서 간략히 언급했듯이, 주류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실제로는 그냥 본연의 모습대로행동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커버링 개념은 이들이 진짜 정체성을 숨기는 거라고 너무 성급하게 가정해 버릴 가능성이 있다. 한 여성 동료가 이 지적에 대해 매우 설득력 있는 견해를 제공했다. “네 연구에서 내가 싫어하는 부분은 이 점이야. 자전거를 고치는 것처럼 흔히 남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일을 하면 사람들은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가장 단순한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젠더 수행성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해. 나는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자전거를 고치는 게 아니야. 그냥 자전거가 고장 났으니까 고치는 거지.”

그 동료는 또 다른 예를 들었다. “내가 대학원에 있을 때 독일 낭만주의 시를 공부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있었어. 네 말대로라면, 그 사람이 굉장히 난해하고 고답적인 것을 공부하면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커버링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내가 볼 때 그 사람은 분명 낭만주의 시가 좋아서 낭만주의 시를 공부한 거야. 그가 백인처럼 행동하려고 낭만주의 시를 공부한다고 생각한다면 인간으로서 그의 가치를 폄하한 거야.”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네가 할 일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되도록돕는 거야. 자기 자신이 되도록 하는 능력을 박탈하고 순응하도록 요구받는 것에 맞설 수 있도록 말이야. 그런데 커버링의 개념은 네가 없애고자 한 그 고정 관념이 계속해서 이어지도록 해. 소수자가 고정 관념을 깨는 방법 중 하나가 고정 관념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인데, 만약 소수자들이 그렇게 할 때마다 사람들이 그들이 매우 중요한 정형화된 정체성을 커버링한다고 생각한다면 고정 관념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야.”(275-277p)

 

 

진짜 해결책은 시민인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지 우리 안의 아주 작은 집단인 법률가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법률가가 아닌 사람들은 법 밖에서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를 해야 한다. 우리는 고프먼의 용어인 커버링을 학문적 모호함에서 끄집어내어 대중적인 어휘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커버링이란 단어도 패싱이나 클로짓처럼 통용될 수 있다. 비록 법이 커버링 요구를 하는 장본인들에게까지 미치지 못하고 커버링 요구로 인해 고통 받는 집단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커버링을 요구받는 사람들은 그 요구의 근거를 찾는 과정에서 용기를 얻어야 한다. 이러한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는 법정 밖에서 일어나야 한다. 직장에서, 식당에서, 학교에서, 운동장에서, 온라인 대화방에서, 거실에서, 광장에서, 술집에서 이런 대화를 해야 한다.(282p)

 

 

켄지 요시노, <커버링>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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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9

 


아 이 유머코드 어쩔거야 ㅋㅋ

 



당신, 요즘 이상하다. 애인이라도 생겼나 봐?”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쓸데없이 발끈한 것은 나였다. ‘내가 지금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느냐, 매일매일 칼퇴근해서 아이들 씻기고 함께 방귀대장 뿡뿡이 노래 부르는 거 보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 그럼 내 애인이 뿡뿡이란 말이냐나는 무슨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22-23p)

 

 

말하자면 반년이 훌쩍 지나 그 30만 원의 행방이 도착한 것이었다. 편지는 아내가 나에겐 말하지 않고 벌써 꽤 오랫동안 후원해온 우간다에 사는 카와토라는 아홉 살짜리 친구에게서 온 것이었다. 카와토는 지난 성탄절에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는 첫 문장으로 편지를 시작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겐 뜻밖의 선물이었고, 보내준 30만 원으론 암소 한 마리와 염소 두 마리를 샀으며, 자신의 운동복과 동생들의 옷을 샀다고, 띄엄띄엄 편지에 적었다. 카와토가 암소 한 마리와 염소 두 마리 옆에서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 동봉되어 있었다.

카와토는 편지 말미에 이런 문장을 적었다.

 

뜻밖의 성탄 선물 때문에 우리 가족의 인생은 바뀌었습니다.

이제 제 동생들도 학교에 갈 수 있게 되었어요.

 

나는 그 편지를 읽고 난 뒤에도 한동안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아내는 아마도 내 이름으로 카와토에게 특별 후원금을 보낸 모양이었다. 나는 잠깐 아파트 대출 이자 때문에 오랫동안 가계부를 들여다보던 아내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트에서 팔고 있는 값비싼 유모차 앞을 서성이다가 돌아선 아내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리고 염소 때문에 학교에 갈 수 있게 된 저 먼 나라 친구를 생각했다. 염소 한 마리에 4만 원. 나는 어쩌면 내가 평생 꼰대가 되지 않는다면, 그건 다 아내 덕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다.(73-74p)

 

 

어른들은 아이들을 너무 모른다. 아이들을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순간 아이들은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 아들의 여자 친구가 내게 그것을 가르쳐주었다.(93p)

 

 

다시 돌아온 두 번째 토요일 아침, 아내는 두툼한 장편소설 한 권을 들고 외출했다. 학교 다닐 때처럼 하루 내내 카페에 앉아 책 한 권 읽어보는 것, 그것 또한 아내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아내는 현관을 나서기 직전, 예의 또 괜찮겠어?” 라고 물어왔지만, 그래서 나는 씨익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그러나 속으론 좀 얇은 책이면 안 되겠니, 시집도 좋은 게 많은데생각한 것도 사실이었다.(111p)

 

 

작은아빠, 동생들이 내가 말이 많다고 싫어하죠?”

나는 조카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그렇지 않다고 동생들은 누나를 좋아한다고 동생들이 삐치는 게 더 문제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조카딸의 입에선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제가요, 우리 오빠 때문에 말이 많아졌거든요. 우리 오빠가 많이 아프잖아요. 제가 말을 많이 해야 우리 오빠가 다치지 않거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뭉클한 것이 올라왔다. 나는 조카딸의 작은 손을 꼭 잡아주었다. 말을 많이 하거라, 아이야. 말을 많이 하거라, 아이야. 온 세상이 너와 네 오빠를 도와줄 거란다. 나는 기어이 눈물까지 툭 흘리고야 말았다.(157-158p)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게 많다니까.”

나는 아내의 그 말을 들으면서 내가 부모로서 성장한 것이 아닌, ‘부모로서 착각한 것들이 더 많이 쌓여왔다는 것을, 그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241p)

 

 

이기호,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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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7

 

검색을 통해 이기호 작가의 다른 책을 확인하고 빌리러 갔는데, 그 사이에 누군가 빌려가서 대신 집어왔다. 이기호 작가가 쓴 것 같은 책이다. 시종 경쾌한 문체로 유쾌한 느낌이 들지만 그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묘한 울림을 주는, 그런 책.

 

 

 

그거 알아요? 애들은요, 아빠가 없어서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구요, 문제가 생긴 다음부터 아빠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구요. 그게 어떤 차이인지 잘 모르시죠?(68p)

 

 

내가 최근직을 그렇게 죽음에서 구한 것 같더냐? 말도 안 되는 소리. 최근직은 손순녀를 만나기 이전부터 이미 살려고 했던 사람이니라. 네가 그것을 알더냐? 가족을 다 잃어도 제 목숨을 스스로 끊기 어려운 것이 사람이니라. 슬픈 것은 슬픈 것이요, 살고 싶은 것은 살고 싶은 것. 최근직은 자기 의지로 산 사람이니라.(154-155p)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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