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7

 

다음은 의인법.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만 해도 1980년대에 태어났고 2010년대를 살아가며 2020년대를 코앞에 두고 있는 내가 빈곤에 대한 글을 쓰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생각은 곧 바뀌었다. 빈곤은 예나 지금이나 시의적절한 화두였다. 다만 표현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기아나 아사 같은 전형적인 이미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고정관념만 벗어나면 빈곤은 세련된 소재였다. 이제 빈곤은 무형의 형상을 갖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이미지든지 가질 수 있었다. 빈곤은 다채로운 형상으로 삶을 다방면에서 조여오고 있었다. 외면이 아니라 내면을 황폐하게 만들어서 예전만큼 티 나지 않을 뿐이었다. 근면과 성실이 아니라 로또와 부동산 투기가 빈곤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살인과 강도가 죄가 아니라 비정규직과 흙수저가 죄였다. 진보정당을 찍어도 보수정당을 찍어도 중도정당을 찍어도 해결될 거라는 기대가 되지 않았다. 빈곤은 국가의 책임이라는 표어도 진부해졌다. 창의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그러나 대책은 공정거래, 4차 산업혁명, 정의, 욜로처럼 공허한 단어였다. 우리는 가난한 데다가 공허하기까지 했다. 확신하는데 빈곤은 100년 뒤에도 모든 글의 소재거리가 될 것이었다. 빈곤은 현재를 넘어 과거를 돌아보게 했고, 미래를 예견하게 했다. 빈곤만큼 고전적이고 동시대적이며 SF적인 건 없었다.(18-19p)

 

 

표정을 보아하니 칭찬에 익숙하지 않아서 칭찬을 받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는군요. 어릴 때 부모님이 칭찬에 인색했죠? 아니면 스킨십이 부족했었나요? 맞벌이에 외동아들 맞죠? 스킨십에 익숙하지 않은 외동아들. 작가가 될 운명을 타고난 작자들이죠. 예전에 몇몇 작가하고 함께 일한 적이 있는데 그 작가들도 다르지 않았어요. 그들은 예외 없이 꽁하고 뚱하죠.(43p)

 

 

행복+행복=행복. 행복에 행복을 더하면 두 배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의 행복이다. 행복은 점점 둔감해지니까. 그리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지금 행복한 걸까.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백이면 백 이렇게 대답한다. 넌 나에 비해 행복한 거야.

절망을 계산하는 방법도 유사하다. 절망+절망=절망. 절망에 절망을 더하면 두 배의 절망이 아니라 하나의 절망이다. 각각의 절망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 하나의 거대한 절망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지금 절망적인 걸까.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백이면 백 이렇게 대답한다. 넌 나에 비해 행복한 거야.(55p)

 

 

제가 겪은 가을 중 남한의 경주가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보문호수 곁에 있는 콩코드호텔에 묵으며 불국사를 다녀온 게 기억에 남습니다.(145p)

 

 

잃을 게 없어서 무서울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잃을 게 없는 사람에게 더욱 가혹한 게 법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잃을 게 있는 사람은 그걸 잃으면 되지만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미래를 잃어야 했다.(288p)

 

 

내 생각은 변함없다. 언제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슬프다.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아득하다.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지친다. 셋 중 제일 어려운 건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치는 게 죽음과 가장 밀접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 근황에 대해 묻는다.(355p)

 

 

 

오한기, <나는 자급자족한다> ,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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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6

책이 정리가 안 되어 있는 느낌. 중복이 많음. 책을 읽으며 편집에 대한 아쉬움이 든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 책은 그렇게 느낌.

 

 

사전적 의미로 혐오는 매우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뜻이다. 한국어에서는 혐오는 혐오시설’, ‘혐오식품처럼 시설이나 음식을 수식하는 말로 주로 쓰여왔다. 혐오표현은 헤이트 스피치를 번역한 말인데, 영어에서 헤이트도 극도의 싫음, 역겨움, 적대감을 뜻한다. 헤이트나 혐오 모두 상당히 강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혐오표현에서의 혐오는 이러한 일상적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여기서 혐오는 그냥 감정적으로 싫은 것을 넘어서 어떤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차별하고 배제하려는 태도를 뜻한다.(24p)

 

 

그러니까 동성애 반대라는 말이 실제로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할 것인지에 대한 이해가 다소 달랐던 것이다. 동성애 차별이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 반대는 결코 사소한 표현일 수 없다. 실제로 소수자 당사자와 제3 자의 입장 차이는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이해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한국에서 남녀가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여성혐오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면 불평등의 현실이 심각하다고 여길수록 여성혐오의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간주된다. 한국 사회의 맥락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소수자들이 처해 있는 불평등의 맥락 때문에 혐오표현은 그 표현 수위와 상관없이 차별을 조장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어떤 혐오표현은 특별히 대응하기도 구차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두면 고착화되어버린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김치녀, 김여사, 개념녀 같은 차별적인 언사들이 식사·술 자리에서 농담식으로 난무할 때 이를 하나하나 따지고 저항하는 것은 쉬울 일이 아니다. 문제 제기를 했다가는 너무 예민하다”, “분위기를 깬다”, “농담인데 왜 혼자 유난이냐등등의 반격을 받을 가능성도 높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자들은 침묵을 선택하곤 한다. 웃는 척하면서 넘어가기도 하고, 다른 말로 화제를 돌리기도 한다. 이때 침묵은 자발적이라기보다는 강요된 것이다. 사회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런데 이러한 침묵이 지속되다 보면 점차 그런 차별적 언사들이 정당화되고 고착화된다. 사실로 굳어지는 것이다.(40-41p)

 

 

혐오표현에 관하여 대중강연 하다 보면 남혐(남성혐오)도 문제 아닌가’, ‘개독도 혐오표현 아닌가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핵심은 남혐이나 개독이라는 표현이 소수자 혐오의 경우처럼 차별을 재생산하고 있는지의 여부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남성이나 기독교도와 같은 다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은 성립하기 어렵다. 소수자들처럼 차별받아온 과거와 차별받고 있는 현재와 차별받을 가능성이 있는 미래라는 맥락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수자를 대상으로 하는 혐오표현은 대개의 경우 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혐오표현과 같은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 “남학생들은 매일 스마트폰으로 스포츠카나 구경한다. 그래서 불행한 거다라고 말하거나 비장애인에게 장애가 없는 사람들은 밖에 나오지 말고 집에 처박혀 있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특별히 남성이나 비장애인에게 위협이 된다거나 차별을 조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에서 백인들에게 덩치만 크고 미련한 백곰 같은 놈들아라고 외쳐봐야 백인들의 정신적 고통을 야기하거나 백인=미련곰탱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고착화시켜 백인 차별을 조장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주노동자가 한국인 사장에게 한국 사람들은 사장님처럼 다 게으른 모양이네요라고 말한다고 해서 한국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효과를 낳을 리는 없다. 이성애자가 이성을 사랑하는 건 당신 자유인데, 내 눈에 띄지는 마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이성애자의 사랑이 위축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있을지언정, ‘혐오표현이라고 이슈화할 문제라고 보긴 어렵다. 반면 똑같은 표현이 소수자를 향할 때는 사회적 효과가 완전히 달라진다. 표현 자체가 차별을 조장하고, 상처를 주고, 배제와 고립을 낳을 수 있다. 그래서 혐오표현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인 것이다.(43-44p)

 

 

무슬림이 일상적인 편견, 혐오, 차별에 노출되어 있는 사회에서 무슬림 혐오표현을 농담처럼 받아넘길 수 없다. 혐오표현이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실제로 위협하는 현실 그 자체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출근길에 차도르를 두르고 나갈까 고민이 된다. 거리에서 조금이라도 묘한 시선을 받게 되면 배제와 차별의 눈빛 같아 두렵다. 회사에서 삼삼오오 쑥덕거리는 모습을 목격하면 혹시 자신을 험담하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 기도를 하러 나갈 때도 무슬림 휴일에 휴가를 내는 것도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무슬림 혐오가 난무하는 인터넷을 보다 보면 차도르를 두르고 나갔다가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45p)

 

 

하지만 혐오표현의 문제에서 저자의 의도는(그를 형사처벌할 것이 아니라면)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다. 나쁜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나쁜 효과를 낳고 있다면 그 자체로 문제가 될 수 있다. 중국 동포들에게 영화를 영화로 봐달라고 요구하기 이전에 그들이 영화를 영화로만 볼 수 없게 된 사정을 헤아려야 한다. 영화와 같은 예술에서 조롱이나 희화화는 흔한 일이다. 하지만 그 집단이 사회적 강자나 권력자가 아닌 소수자일 때는 얘기가 다르다. 그 부정적 효과를 충분히 고려하고 성찰하는 것은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윤리다.

다만 이런 문제에 영화 상영 허용 또는 금지와 같은 이분법으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의 지형을 협소화시킬 우려가 있다. 표현과 창작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예술과 문화의 영역에서 손쉽게 규제카드를 꺼내든다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수 있다.

(...)

무엇보다 우리 영화가 그동안 소수자를 다뤄온 방식이 너무 편의적이지 않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비하 의도가 없었음을 항변할 것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는 부정적 효과에 너무 무심하지 않았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88-89p)

 

 

그렇다면 왜 증오범죄를 특별히 이슈화하는 것일까? 혐오표현과는 달리 증오범죄는 증오범죄로 분류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처벌하는 범죄인데도 말이다. 가장 큰 이유는 증오범죄의 해악이 중대하기 때문이다. 증오범죄는 피해자 집단에게 너희들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피해자 집단이 평등한 사회 구성원이 아님을 선언하는 것이며, 차별과 배제를 공공연하게 예고하는 것이다. 예컨대 성소수자 환영 현수막을 훼손한 것은 이곳은 성소수자가 평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다. 그렇게 직접 할 수도 있겠지만 현수막 훼손이라는 범죄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증오범죄가 발생하면 그 피해자들은 집단적으로피해를 공유한다. 자신도 언제든 피해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극심한 공포감을 느끼고 위축된다. 혐오표현이나 증오범죄의 파급력은 상당히 유사하다.(96p)

 

 

한국 사회에도 미국식 접근을 선호하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분명히 확인해두어야 할 것은, 미국식 접근은 대통령이 수시로 차별금지에 대한 입장을 확인하고, 차별금지법이 각종 차별을 실질적으로 규제하고, 대학과 기업이 차별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표현에 관해서는 어떠한 내용 규제도 일관되게 불허하는 미국 사회의 맥락에서나 유효하다는 점이다.(141p)

 

 

혐오표현이 금지되면 사회의 담론이 합법 표현과 불법 표현으로 이분화되어 그동안 도덕·비도덕, 사회적·반사회적 등 다양한 가치 판단에 의해 논의되던 것들이 합법·불법이라는 논점으로 급격하게 빨려 들어갈 수 있다. 이전에는 반사회적이라고 비판받던 것들이 합법이라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의 엉뚱한 정당화 기제를 갖게 될 수도 있다. 형법의 판단은 일도양단이다. 유죄 아니면 무죄다. 이론상 무죄는 국가형벌권을 동원할 문제가 아님이 소극적으로 표명된 것에 불과하지만 현실에서의 무죄는 문제없음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형사범죄화로 인해 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적 에너지가 처벌에만 집중된다는 문제도 있다. ‘합법이라고 인정하면 사회는 그것을 문제없음으로 받아들이고 문제 해결을 위한 추가적인 노력을 회피하곤 한다. 반면, ‘불법으로 판결하여 처벌에 성공하면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착시현상이 생기고 국가는 자기 역할을 다했다는 면죄부를 얻어 더 중요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등한시할 수 있다.

법이 발화자 처벌에만 머무른다는 것도 문제다. 혐오표현의 원인에는 복잡한 정치·사회·경제적 배경이 깔려 있어서 이런 것들을 도외시한 채 혐오표현의 발화자만 처벌하는 것은 진정한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범죄를 낳은 것은 사회인데, 처벌받는 것은 범죄를 저지를 사람이 된다는 문제다. 금지와 처벌로 인해 겉으로는 법규제가 성공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수면 아래에 있는 혐오와 차별은 언제든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159-160p)

 

 

형사 규제, 민사 규제, 차별시정은 모두 혐오표현을 금지하는 방식인 반면 형성적formative, 촉진적facilitative, 적극적affirmative, 사전 예방적인 방식의 규제도 있다. 혐오표현의 금지, 처벌을 통한 문제 해결이 사후적·소극적·부정적negative인 조치라고 한다면, 형성적인 규제는 혐오표현이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여건을 만들어가는긍정적positive인 조치를 말한다. 혐오표현 전단지 배포자들을 형사처벌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한 전단지가 학교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도록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한 여건을 만들기 위해 교사를 훈련시키고, 교육과정을 제공하고, 관련 수업을 진행하게 하는 것이 바로 형성적 규제다.(174-175p)

 

 

동성애를 혐오한다거나 외국인 노동자를 쫓아내자고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느끼는 사람이 세금 폭탄이나 일자리 문제가 개입되면 최소한의 윤리적인 자기 검증을 중단하게 된다. 사회경제적 위기가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난제일수록 엉뚱하게도 만만한 상대에게 손쉬운 방법으로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혐오의 확산을 그들 나라의 사회경제적 상황과 연결시키는 분석이 많다. 역사적으로 파시즘이 경제 위기와 함께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치즘이 중간계층의 위기에서 싹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226p)

 

 

홍성수, <말이 칼이 될 때> ,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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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6




그다음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언제까지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종종 걱정된다. 이 사람과 헤어지면 다시 연애를 할 수 있을까? 내일 당장 일이 끊기면 어떻게 하지? 늙거나 병들어 거동이 불편해지면 누가 나를 돌봐주나? 하지만 이내 남편과 직장도 그리 믿음직한 대책이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가족도 돌아서면 남이고, 직장에 충성해봤자 회사가 망하거나 나이 들어 내쫓기면 일찍 독립한 사람들보다 나을 게 없다. 또한 나 아니고 여기 아니어도 갈 데 많은 사람이라는 긴장이 없으면 상대에게 무심해지는 게 관계의 생리라, 결혼을 하건 회사를 다니건 자립의 기반은 있어야 한다. 그럼 결국 지금과 다를 게 뭔가, 라는 의문이 든다. 그래, 돈이나 열심히 모으자, 결론은 늘 그렇게 난다.

마지막 불편은 외로움이다. 매일 얼굴 보고 시시콜콜 의논할 사람이 없다는 게 가끔은 막막하다. 상세한 설명 없이도 내가 요즘 무슨 일을 하고, 오늘 무엇 때문에 힘들었는지 알아주는 사람, 따로 약속을 잡지 않아도 매일 만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그게 가족이건 동료건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딸린 한 무더기의 부록은 원치 않는다. 누구 말마따나, 소시지 하나 먹자고 돼지를 기를 필요는 없다. 게다가 혼자 놀아버릇하면 그것만큼 편한 게 없다.(7-8p)

 

 

혼자라도 침대는 퀸 사이즈를 쓴다. 그래야 편하다.(17p)

 

이 책에서 가장 공감되는 말이다. 너무나 맞는 말이다.

 

 

혼자 산다는 건 마냥 낭만적인 일은 아니다. 그건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스스로를 보살피고, 공과금을 내고, 막힌 변기를 뚫고, 음식물 쓰레기를 치우고, 집주인이나 이웃들과 협상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35p)

 

 

우리가 인생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우리를 싫어하는 사람들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회사를 뛰쳐나가고 싶을 때,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성공 여부가 불투명하지만 흥미로운 무언가에 자원을 쏟아부으려 할 때, 우리가 실패하고 다치고 망하고 상처받을까 봐 말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머뭇거리게 한다. 내가 실패하고 망함으로써 그들을 책임지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지는 소중한 존재들, 그들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족쇄다. 가족이란 대개 그런 존재다. 그리고 그들 때문에 포기한 모든 일들은 고스란히 후회로 남는다.(79p)

 

 

해야만 하는 일들로부터 도망칠 공간이 있다는 것, 의무와 무관한 몰입의 대상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견뎌내야 하는 사람의 무게를 좀 더 가볍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나는 돈이 되지 않는 일들에 기꺼이 시간을 내고 에너지를 쏟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사람을 사랑하고 자신을 돌볼 줄 아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의 대척점에는 바로 지금 여기, 자기에게 먹이를 주는 집단이 우주의 전부인 줄 아는 터무니없이 비장한 부류들이 있다.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다. 그들과 대화하다 보면 세계가 관짝처럼 쪼그라들어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 든다.(98p)

 

 

책을 좋아하거나 글을 쓰게 생긴 얼굴이 뭔지 정확히는 모른다. 소심하고 게으르고 내성적인 기질을 신중함으로 위장하는 데 그럭저럭 성공했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이미지는 그렇지만 사실 나는 책과 그리 친하지 않다. 집중력이 부족해서 눈으로는 글자를 더듬으면서 머리로는 딴생각을 할 때가 많다. 독서나 여행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 백날 책 읽고 여행 다녀도 멍청하고 이기적인 사람은 언제까지나 멍청하고 이기적이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활자 시대의 사람인지 책을 읽는 동안에는 TV를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술을 마실 때보다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덜 든다. 그게 내가 책을 읽는 유일한 이유다.

책을 모으는 데는 더 회의적이다. 나는 책의 물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책은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한다. 그것들은 원룸 생활자의 적이요, 이사의 적이다. 소파에 드러누워 책을 읽으면 이내 팔이 저려온다. 테이블에 놓고 읽으면 제멋대로 페이지가 넘어간다. 독서대에 끼워두면 페이지를 넘기기 번거롭다. 빛바래고 먼지 앉고 벌레 먹은 책들은 호흡기에도 해롭다.(103-104p)

 

 

나는 인간이 아무런 목적 없이 행하는 고차원적 활동에 쉽게 감동한다. 업무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추구한다거나 보상 없는 정의를 실천하는 식의 태도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입증하는 방식이라 믿는다. 같은 관점에서 토플 성적이나 유학 같은 실용적인 목적이 아니라 지적 유희로써 공부를 한다는 게 신선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112-113p)

 

 

한밤에 일어나 흑역사를 떠올리며 이불을 걷어차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사람으로 태어나 이렇게 외로워도 되나 의문이 들고, 모든 사람이 나를 비웃는 것 같고, 짧지 않은 인생에 아무것도 이뤄놓지 못한 것이 부끄럽고, 어쩌면 이런 식으로 수십 년을 더 살아야 한다는 게 지긋지긋해서 확 혀를 깨물고도 싶다. 그럼에도 우리가 죽거나 미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영화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 감히 말해본다.(124p)

 

 

<아멜리에>에는 지치고 정서적으로 고립된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그들은 저마다 사소한 일에 몰입하며 고독을 견딘다. 하지만 어쩐지 서로를 돕지 않는다. 아멜리에는 다르다. 방법은 서툴지만 조금씩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상대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되 먼저 손 내밀기, 친절하기, 무기력해지지 않기. 그것이야말로 외로움에 벗어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131p)

 

70쯤 되면 아멜리에 같이 남을 배려하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사실 여행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부분에서는 그렇다. 선택해야 할 것도 너무 많고 계획을 짜는 것도 귀찮다. 남들은 그 과정을 좋아해서 공항 갈 때까지가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들 하던 데 나는 그 전에 이미 지쳐버린다.

꼭 여행할 때만 그런 건 아니다. 카메라를 사야겠다고 결심하면 나는 카테고리별 인기 기종들을 조사하고 각각의 장단점을 리스트로 만들어 비교하고 필요한 경우 새로운 광학기술에 관한 논물과 제조사의 사회공헌 여부까지 찾아볼 다음 구입할 모델을 결정한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해당 모델에 대한 국내외 온·오프라인 판매처의 가격을 비교하고 한국어와 영어로 된 구매 후기를 모두 찾아 읽은 끝에 간신히 결제한다. 한동안 식탁을 사려다 각 기후대에서 생산되는 목재의 차이, 마감도료의 종류 및 유해성 여부, 가구 디자인의 역사까지 흘러가버린 적도 있다. 그걸 지켜보던 누군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

그런 성격이다 보디 여행지 선정부터가 골치 아프다. 여행 잡지에 실린 멋진 사진이나 영화 로케이션, 다녀온 사람들의 추천에 혹해서 그래, 저기야! 떠나자!’ 불쑥 결심을 하는 것까지는 좋다. 이내 기왕 가기로 한 거, 근처에 더 둘러볼 데는 없을까?’ 고민한다. 가장 저렴한 항공권과 가성비 좋은 숙소를 찾아 인터넷을 헤매느라 며칠 밤을 새워놓고, 막상 신용카드 CVC 입력 단계에 가서 이게 옳은 선택일까? 하루만 더 생각해볼까? 아 몰라, 머리 아파하고 컴퓨터를 끈 다음 자고 일어나 똑같은 일을 고스란히 되풀이한다. 내가 나 자신을 좋아하는 순간은 극히 드물지만 이럴 때만큼 끔찍하게 싫은 순간도 없다.

그러다 결국 진이 빠지면 조사 기간 동안 가장 눈에 자주 걸려 익숙해진 지역과 숙소 등으로 대강 예약을 해버린다. 그때쯤이면 여행 계획은 시작과는 아주 달라져 있다.(152p)

 

 

낯선 도시에서 카페에 모여 앉아 웃으며 식사하는 무리를 보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한 게 여러 번이다. , 서울 가면 나도 친구 있다 뭐, 그런 유치한 생각을 할 때도 있다. 다음에 누군가와 함께 여행한다면 그때는 더 참고, 더 기뻐하고, 더 의욕을 부려서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지, 다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156-157p)

 

 

우리는 여기가 싫어서 혹은 어딘가가 좋아서 떠나고 싶다고 말하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여기혹은 어디가 아니라 떠난다는 행위 자체다.(218p)

 

 

백인들은 백인이 인간의 기본형인 줄 알고, 대다수 남자들은 남자가 인간의 기본형인 줄 알고, 이성애자들은 이성애가 기본이라 생각하며, 신체에 질병이나 특이점이 없는 사람들은 그게 기본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우월주의고 차별이라는 걸 그 자신이 반대편에 서기 전에는 인식하지 못한다.(230p)

 

 

대만 총통 차이잉원이 왜 결혼을 안 하느냐는 물음에 소시지 하나 먹자고 돼지를 통째로 살 필요는 없다고 대답했다는 소문이 한때 인터넷에 떠돌았다. 결국 낭설로 밝혀졌지만 듣자마자 무릎을 쳤다.(239p)

 


이숙명, <혼자서 완전하게> , 북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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