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

 

 

쇼코는 할아버지에게 늘 밝은 내용의 편지를 적어 보내는 것 같았다. 달리기경주에서 일등을 했다. 고모와 맛있는 카레집을 찾아갔다, 휴일에 친구들과 보트놀이를 했다. 북해도를 여행했다.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쇼코의 이야기는 그림엽서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이야기들이었다.

반면 내가 받은 편지에는 어두운 이야기뿐이었다.

할아버지의 돈을 훔쳤지만 할아버지는 모른 척했다. 그 돈을 하수구에 버려버렸다. 가끔씩 할아버지의 음식에 독을 타고 싶다, 아빠가 보내는 양육비를 고모가 허비해버리는 걸 알고 고모의 속옷을 하나둘씩 찢어서 거리에 내던졌다, 가끔씩 소독한 칼로 자신의 골반 근처를 찌른다.

당시에는 쇼코의 모순된 말들에 혼란을 느꼈다. 할아버지에게 하는 말이 진짜인지, 아니면 내게 하는 말이 진짜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두 종류의 편지가 모두 진실이었으리라고 짐작했다. 모든 세부사항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모두 진실된 이야기였을 거라는 걸. 아니, 모든 이야기가 허구였더라도 마찬가지다. 할아버지의 편지에서 보이는 것처럼 남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었을 것이고, 내 편지에 썼듯이 자신을 포함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겠지.(16-17p)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24p)

 

 

그래. 나는 겁쟁이야. 하지만 증오할수록 벗어날 수 없게 돼.(27p)

 

 

나는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 친구라고 부르던 사람들을 거의 다 잃어갔다. 기다려준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림자를 먹고 자란 내 자의식은 그 친구들마저도 단죄했다. 연봉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친구는 볼 것도 없이 속물이었고, 직장생활에서 서서히 영혼을 잃어간다고 고백하는 친구를 이해해주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고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의 끔찍함에 놀랐으나 그조차 오래가지는 못했다.

점점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때가 많았고, 엄마와 할아버지를 찾아가지도, 따로 전화하지도 않았다. 그나마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과도 거리를 두면서 영화를 통해 인간 내면의 깊은 곳을 그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오만이 그 사람들을 얼마나 쓸쓸하게 했을지 당시의 나는 몰랐다.(34-35p)

 

 

가끔씩 할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오면 받지 않거나 건성으로 받곤 했다. 할아버지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냥 당연히, 원래 그렇게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내 상황이 나아지고 자리를 잡아서 떳떳해져야 한다고만 생각했었다. 할아버지는 건강에 대해서 가타부타하지 않았고, 되려 나이가 드니 감기도 잘 안 걸린다고 말했었다.(43p)

 

 

“난 정말이지 괜찮을 줄 알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턱도 벌릴 수가 없었다. 턱을 벌려 입을 열면 눈물이 쏟아져내릴 것 같아서였다. 그제야 할아버지의 마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몸이 말라가고, 피부가 누렇게 변해가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건 그냥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인 줄로만 알았다. 단지 그 노화가 조금 빠르게 진행된다고만 생각했다. 나 자신에게는 그리도 예민했으면서 할아버지의 상황에는 왜 그토록 무뎠었는지.

할아버지는 베레모를 벗어서 무릎에 올려놨다. 숱이 적은 흰 머리카락이 모자에 눌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마치 애인에게 이별을 고하는 남자처럼 변명했다.

“정말이다. 이렇게 심해질 걸 알았으면 너에게 진작 말했을 거다. 자주 얼굴이나 보자고.”

할아버지는 안간힘을 써서 웃고 있었다.

“내가 말했으면 나 자주 보러 왔을까.”

나는 대답 대신 할아버지의 머리를 꼭 안았다. 정수리에서 머릿기름 냄새가 났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예순다섯 밤을 더 보내고 영면하셨다.(45-46p)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

나는 줄곧 그렇게 생각했다. 헤어지고 나서도 다시 웃으며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끝이 어떠했든 추억만으로도 웃음지을 수 있는 사이가 있는 한편, 어떤 헤어짐은 긴 시간이 지나도 돌아보고 싶지 않은 상심으로 남는다고.(89-90p)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지적하는 엄마의 예민하고 우울한 기질을 섬세함으로, 특별한 정서적 능력으로 이해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줌마의 애정이 담긴 시선 속에서 엄마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보였었다.

아줌마라고 해서 엄마의 모든 면이 아름답게 보였을까, 엄마의 약한 면은 보지 못했을까. 아줌마는 엄마의 인간적인 약점을 모두 다 알아보고도 있는 그대로의 엄마에게 곁을 줬다. 아줌마가 준 마음의 한 조각을 엄마는 얼마나 소중하게 돌보았을까. 그것이 엄마의 잘못도 아닌 일로 부서져버렸을 때 엄마가 느꼈던 절망은 얼마나 깊은 것이었을까. 내가 아는 한, 엄마는 그 이후로도 마음을 나눌 친구를 쉽게 사귀지 못했었다. 그리웠을 것이다. 말로는 그때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엄마를 엄마 자신으로 사랑해준 응웬 아줌마를 엄마는 오래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저, 가끔 말을 들어주는 친구라도 될 일이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곁을 줄 일이었다. 그녀가 내 엄마여서가 아니라 오래 외로웠던 사람이었기에. 이제 나는 사람의 의지와 노력이 생의 행복과 꼭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엄마가 우리 곁에서 행복하지 못했던 건 생에 대한 무책임도, 자기 자신에 대한 방임도 아니었다는 것을.(91-92p)

 

 

이모에게 의지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엄마의 마음을 시리게 했다.(104p)

 

 

할머니는 일생 동안 인색하고 무정한 사람이었고, 그런 태도로 답답한 인생을 버텨냈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런 태도를 경멸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난 뒤 그 무정함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상대의 고통을 같이 나눠 질 수 없다면, 상대의 삶을 일정 부분 같이 살아낼 용기도 없다면 어설픈 애정보다는 무정함을 택하는 것이 나았다. 그게 할머니의 방식이었다.(105p)

 

 

이모와 엄마는 살해당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모는 최종 재판에 참석했었다고 말하고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주제를 돌려야 하는데 그 생각에 부딪히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그럴 때면 엄마는 어색하게나마 엄마의 이야기를 했다. 엄마의 결혼생활의 한심한 점들을 조목조목 이야기하고 친정 친구들과 절연한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사실 엄마는 행복한 편이었지만 조금이라도 그 행복을 드러냈다간 이모가 박탈감을 느낄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런 태도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기만하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엄마는 처음에는 한 달에 두 번 이모를 찾아가다가 나중에는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계절에 한 번 안양에 찾아갔다. 가끔씩 통화를 하면 더 이상 할말이 없어서 피상적인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이모는 엄마에게 솔직하지 못했고 엄마 또한 그랬다. 엄마는 살얼음판을 딛듯이 이모의 상처가 달지 않은 마음들만을 디디려 했고 이모는 엄마가 이모를 조금이라도 가여워할까봐 애써 아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엄마는 심지어 이모가 안양에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사는지조차 몰랐다. 서로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던 그런 태도가 서서히 그들의 사이를 멀게 했고, 함께 살았던 시간 동안 쌓아왔던 마음들도 더 이상 그 관계를 지탱해주지 못했다. (113-114p)

 

 

크게 싸우고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주 조금씩 멀어져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더 오래 기억되는 사람들은 후자다.

이십대 초반에 엄마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만난 인연들처럼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할 수 있는 얼굴들이 아직도 엄마의 인생에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 동반 여행을 가고 등산을 했다. 스무 살 때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때는 뭘 모르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하면서.(115-116p)

 

 

할머니의 바람대로 엄마는 이모와 관계없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런데도 가끔 엄마는 이모를 떠올렸다.

(...)

살면서 몇 번은 이모에게 다시 연락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실행한 적은 없었다. 시간을 이모를 한때 엄마의 삶에 머물렀다 스쳐간 사람으로 기록했고 엄마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120p)

 

 

한지도 한지의 이야기를 해줬다. 나이로비에 살고 있는 삼백만 명의 사람들 중에 이백오십만 명이 빈민가에 산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한지는 그런 극단적인 부조리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부모님을 이해하지 못하며 자랐다고 말했다. 교회에 가서 가족의 평안만을 비는 부모님을 보면서 한지는 그 교회에서 고작 몇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지는 아버지의 돈으로 좋은 교육을 받았고, 가족에게 헌신적인 어머니의 사랑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자신이 누려왔던 삶은 부모님의 부로 인한 것이었고, 그 부가 누군가를 착취한 결과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눈을 감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자신이 진정으로 믿고 의지하는 건 결국 돈뿐이라고 고백했다.(144p)

 

 

“기억은 재능이야. 넌 그런 재능을 타고났어.”

할머니는 어린 내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란다. 그러니 너 자신을 조금이라도 무디게 해라. 행복한 기억이라면 더더욱 조심하렴. 행복한 기억은 보물처럼 보이지만 타오르는 숯과 같아. 두 손에 쥐고 있으면 너만 다치니 털어버려라. 얘야, 그건 선물이 아니야.”

(...)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억은 현재를 부식시키고 마음을 지치게 해 우리를 늙고 병들게 한다.(164-165p)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때 나는 나보다 약한 누군가를 도와주는 내 모습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말로는 친구라고 하면서도 내가 미진보다 더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는 나 없이 아무것도 못해, 라고. 미진이 점점 더 러시아 말을 잘하게 될수록, 저의 도움이 필요 없어질수록, 매력적인 친구들과 어울릴수록 미진에게 화가 났습니다. 미진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넌 아무것도 아니야. 넌 아무것도 아니야. 그게 날 견딜 수 없게 하더군요. 이타심인 줄 알았던 마음이 결국은 이기심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건 미진이 떠난 이후였습니다.(193p)

 

 

사람들의 말이 맞았다. 미카엘라는 언제나 든든한 딸이었다. 고생해서 제힘으로 서울에 뿌리를 내린 딸이 여자는 고맙고도 안쓰러웠다. 남들 다 보내는 학원 학 번 보내지 못했고 비싼 메이커 교복 대신 시장 교복을 사다 입혔던 여자였다. 통장에 부어놓았던 돈으로 미카엘라의 대학 입학금과 첫 학기 등록금을 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첫 여름방학에 고향에 내려온 아이가 이제부터 학비는 제 손으로 벌어 낼 테니 몸을 그만 혹사시키라고 했다.

그런 딸 앞에서 여자는 언제나 면목이 없었다. 엄마로서 제대로 해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면 짐이라도 되지 말자고 다짐하게 됐다.

(...)

여자는 걸음을 옮겨서 지하철을 탔다. 딸이 사는 망원동으로 가서 숙소를 찾아볼 요량이었다. 어쩌면 미카엘라가 내일 아침에 전화를 할지도 모르고, 같이 점심을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카엘라에게 먼저 전화를 걸 용기는 나지 않았다. 광복절 날에도, 토요일에도 회사에서 일을 하는 아이가 아닌가. 바쁜 아이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얼굴이라도 한번 보면 좋겠다 싶었지만 그것도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220-221p)

 

 

그녀 나이 서른하나, 그녀 또래의 이들은 함께 힘을 모아 무엇 하나 바꿔보지 못했다. 세상은 그녀가 온몸을 던져도 실금하나 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해 보였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안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그녀는 그녀의 이십대를 통해 깨쳤다.(235p)

 

 

여자는 옆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노인을 바라봤다. 이 노인은 얼마나 여러 번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렸을까. 여자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그런 존경심을 느꼈다. 오래 살아가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오래도록 남겨지는 일이니까. 그런 일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홀로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 일이니까.(238-239p)

 

 

ㅡ 최은영, <쇼코의 미소>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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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7

 


수치심, 죄책감, 창피함 등의 감정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좀 더 상세히 논의를 전개했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좀 가벼움.





많은 사례들에서 수치와 수치 주기는 부당한 비난을 받고 있다. 사실 수치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수치를 유발하는 규범인데 말이다. 의사들이 실수를 저질러 놓고 너무 수치스러워서 그것을 인정하거나 털어놓지 못한다면 진짜 문제는 수치가 아니다. 의사는 실수를 해선 안 되며 실수를 하지도 않는다고 규정하는 규범이 문제라는 얘기다(이는 주로 소송의 위협 때문일거라고 나는 생각한다).(56p)

 

 

창피함과 수치심 둘 다 누군가가 지켜볼 때 나타나는 감정이지만 수치심의 경우 목격당하는 것이 좀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습적인 규범을 모르고 위반했을 때에는ㅡ어떤 행사에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했거나 신발에 화장지가 붙어 있는 것을 누군가가 봤을 때ㅡ창피함을 느끼겠지만,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저질렀을 경우에는 그것을 실패로 간주하는 좀 더 확실한 사회적 기준이 존재하기 때문에 수치심을 느낀다. 동료 학생들 앞에서 암산을 하게 한 UCLA 실험에서 학생들이 보인 감정은 창피함보다는 수치심에 가까웠다. 암산 능력은 자아와 관련된 무언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창피함은 개별 사건과 관련되기 때문에 좀 더 쉽게 잊히는 반면, 수치심은 그 사람의 정체성과 관련되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오래 지속된다.(64p)

 

 

외모를 통제하는 것은 개인의 역량에 달린 일이지만 대기나 여타의 환경 문제에 대한 개인의 영향력은 그렇게 크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자유 시장 논리에 따라 그 비용은 소비자에게 전가되기 때문에 죄책감을 덜어주는 제품들은 대부분 가격이 더 비싸다. 따라서 과거에 부자들이 돈을 내고 면죄부를 사서 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듯이, 이제 부자들은 돈을 내면 환경 파괴와 그에 관한 죄책감에 벗어날 수 있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75p)

 

 

물론 친환경 소비자운동은 조금 거슬리거나 실망스럽긴 해도 분명히 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알렉스 윌리엄스는 2007년 「뉴욕 타임스」패션과 스타일 면에 실린 기사에서, 환경 운동가들이 친환경 제품을 구매하면서 그러한 행동이 실제로 큰 차이를 만든다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은 아니라고 썼다. 친환경 제품을 구매하는 것은 그저 ‘선한 첫걸음’일 뿐이며 ‘종착점이 아닌 출발점’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도덕적 면허’에 관한 연구들은 친환경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선한 첫걸음이 된다는 가정에 부합하지 않는다. 친환경 제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그 후 탐욕과 거짓말, 도둑질을 좀 더 쉽게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79p)

 

 

대부분의 사회 및 환경 라벨들의 경우, 해당 산업의 일부, 즉 죄책감을 느끼기 쉬운 양심 있는 소비자들의 구미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일부만 변화하면 된다. 나머지는 계속해서 살충제를 사용하거나 불공정 무역을 하거나 파괴적인 조업 장비를 사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제품들은 더 낮은 가격에 판매하면 된다. 그 다음 단계, 즉 규칙을 제정하여 업계 전체를 바꾸는 단계는 생략된다. 이 모든 게 사실은 계획의 일부이다. 생산자들이 올바른 일ㅡ유기농 식품을 재배하거나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물고기를 잡는 것ㅡ을 하게 만드는 주요 인센티브는 물건 값을 올릴 수 있다는 점이니까 말이다. 프리미엄 가격을 받기 위해서는 해당 제품이 규칙이 되어선 안 되고 예외가 되어야 하며, 따라서 해당 시장은 극소수 소비자들의 가책을 덜어주되 해당 업계에 장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일은 피해야 한다. 이른바 ‘죄 세탁’ㅡ죄책감과 죄책감 완화 시법을 기만적으로 활용하여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차별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ㅡ을 하는 셈이다.(81-82p)

 

 

2009년 미국 7개 도시의 시민 50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가장 효과적인 에너지 절약 방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장 많이 나온 응답은 ‘전깃불을 끄는’ 것이었다. 조명을 언급한 응답자는 20퍼센트에 가까웠던 반면, ‘자동차 사용을 줄인다’고 답한 사람은 13퍼센트에 불과했다. 개인의 차량 사용으로 인한 탄소 배출량은 전체 미국 가정의 탄소 배출량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며 미국 전체의 탄소 배출량 가운데서도 무려 15퍼센트를 파지하는데 말이다. 미국 가정의 에너지 사용량 가운데 자동차 사용으로 인한 소비량이 조명에 비해 6배 이상 더 많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정작 문제로 지적해야 할 것은 조명이 아니라 자동차였다.

(...)

“영국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한 번 탈 때 마다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은 비닐봉지를 73만 개 사용하거나 주전자에 물을 17만 6천 번 넘치게 받는 것과 똑같다.”

(...)

영국은 휴대전화 충전기의 플러그를 뽑아 놓으라고 자주 권고하지만 이를 통해 절약되는 에너지는 평균 자동차를 1초 동안 몰지 않았을 때 절약되는 에너지와 비슷한 양이므로 오히려 정신만 산만해질 뿐이라고 시사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다. 매케이는 정작 필요한 것은 개인의 행동이 아니라 법안이라고 말했다.(83-85p)

 

 

수치 주기를 지속 가능하게 만들어 미래에도 사용할 수 있게 하려면 폭로 대상인 개인이나 기업에게 집단에 다시 편입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도 중요하다. 가장 효과적인 수치 주기의 경우에는 행동 변화에 대한 보상으로 명예가 따라오기도 한다.(161p)

 

 

플로리다 주 범인 식별 사진을 올리는 웹사이트들이 있는가 하면, 이들과 공모하여 돈을 받고 사진을 내려주는 사이트들도 있다. 돈을 받고 웹에 있는 콘텐츠를 삭제해주는 시장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241p)

 

 

우리는 개인주의 정신과 자유 시장 이념에 사로잡혀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최대의 방법은 바로 소비자로서 참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로 인해 죄책감이 패권을 장악하면서 지속 가능한 해산물과 유기농 식품, 탄소 계측기 같은 제품의 판매를 장려해왔다. 소비자들은 재활용 봉투와 머그컵을 사용하고 전깃불을 끄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이는 교통사고로 머리가 깨졌는데 비타민 C를 섭취하는 것과도 같다.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것과는 거리가 먼 일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대규모 협동의 딜레마들은 소수의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끼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이 소수의 사람들이 소비자로서 죄책감을 갖고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분명히 충분하지 않다. 좀 더 신속하게 그리고 좀 더 대규모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다.

(...)

수치는 규범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우리의 미래에 수치가 어떤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는 미래에 어떤 규범이 남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

이러한 상황에서는 새로운 규범, 좀 더 중대한 규범들이 요구된다. 수치를 현명하게 활용한다면 그러한 규범을 만들고 시행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269-271p)

 

 

 

ㅡ 제니퍼 자케, <수치심의 힘> 中, 책읽는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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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6

 

 

제지 원료를 넝마에서 펄프로 전환시킨 뒤로 출판업은 결코 환경 친화적인 산업일 수가 없기 때문에, 책을 쓰는 행위에는 필수적으로 양해가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대안 제시도 없이, 일관성 있는 의견 제시도 없이 툴툴거리기만 하는 것이 그런 당위가 될 수 있을까요? 적어도 제가 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슬프게도 그럴 수 있다고 보는데, 뚜렷한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면, 툴툴거리며 그 불편함을 상기시키는 것이 그 다음으로 유익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책 없는 툴툴거림은 쓰레기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유용한 쓰레기입니다. 대안이 없다고 입 닥치고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우린 우리가 겪고 있는 짜증마저도 망각하고 맙니다. 게다가 툴툴거림은 대안을 제시할 능력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구체적인 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죠.

불평은 적어도 자극제는 되며, 그런 자극을 받는 사람들 중 대안을 제시할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어떤 구체적 의도도, 일관성도 없는 순수한 툴툴거림은 대안을 가진 일관성 있는 생각보다 더 구석까지 파고들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더 솔직해질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르죠. 100페이지가 넘어가는 일관성 있는 글을 쓰는 사람들은 어디선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요.(8-9p)

 

 

용감한 자를 찬양하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우리가 나약한 사람들을 비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전적으로 불공평한 기준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대부분 나약한 사람들입니다. 그 때문에 용감한 행동들이 더 존중을 받는 거죠.(56p)

 

 

모두에게 알맹이를 쌓으라고 하는 주장은 알맹이 있는 운 좋은 사람들이 거만한 자기 과시에 불과합니다. 저희처럼 운 없는 사람들은 주어지지도 않는 알맹이 대신 허세라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스노브들이 유해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저 자신 역시 상당한 골수 스노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스노브 예찬까지는 아니더라도 스노브 존재 옹호론을 끌어들여 동족들의 존재 가치를 주장하는 데 일조하는 것도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일단 스노브들은 우리네 삶의 질을 확장시킵니다. 대부분의 고급 스노브들은 정보와 문화의 첨단, 또는 그 근처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거의 보편적인 인권 운동으로 자리 잡은 동성애자 인권 운동을 봅시다. 게이 인권 운동가들이 기본적인 양식과 지식만으로 싸워왔다면 그게 지금 수준까지 올라왔을 것 같습니까? 어림없습니다. 그건 다 지금까지 우리 같은 스노브들이 「셀룰로이드 클로젯」같은 뻔한 책 한 권 달랑 읽은 것을 밑천 삼아, 지금까지 죽어라 아는 척을 해대며 바람을 잡아왔기 때문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쉬크해 보이는 것은 공정성과 정의보다 몇 배나 더 보급에 중요한 것입니다.(64-65p)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F의 90퍼센트는 쓰레기다. 그러나 모든 것의 90퍼센트는 쓰레기다.(146p)

 

 

영화관에 앉아 끊임없이 이성에 대한 강간 ․ 살인 ․ 폭행 장면들을, 강간당하는 걸 마치 수태고지쯤으로 아는 등뼈 없는 여성 등장인물들을 당연하다는 듯이 구경하면서도 「안토니아스 라인」과 같은 영화에서 남자 등장인물이 바지 어딘가를 무언가로 한번 푹 찔리는 장면을 보면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벌떡 일어나서 남성에 대한 폭력이라느니, 폭력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느니 하면서 툴툴거리는 이유가 뭘까요? 분명 이런 사람들 중 상당수는 전략적 목적을 위해 극단적으로 이분화된 투쟁 영화들을 손뼉 치면서 보았을 텐데 말입니다.(150p)

 

 

‘세계’라는 단어에는 꼭 지리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세계’는 우리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범위 안으로 제한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미국의 잡지 편집자라고 생각해보세요. 그들의 세계는 뻔한 것입니다! 만약에 지리적인 공평성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억지로 끼워 넣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위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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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세계 문화의 중심’에 있는 것이 꼭 유리한 것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자신들의 문화에 대해서만 알 뿐이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중심의 문화+자신의 문화를 알고 있죠. 선택의 폭이 더 넓어지고 삶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눈과 귀를 바짝 세우는 노력이 필요하긴 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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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이 나라의 갑갑한 문화 환경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저지만, 엄청나게 박학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노래방에서 마돈나와 이문세 사이를 오갈 수 있는 나라에 사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듯합니다.(184-185p)

 

 

 

ㅡ 듀나, <스크린 앞에서 투덜대기> 中,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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