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조각들

from Life 2018. 5. 14. 11:33

여름의 조각들

 

러닝타임도 짧고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영화였다. 영화를 보기 전에 알고 있었던 사실은 감독이 예전에 영화배우 장만옥과 함께 작업(이마 베프, 클린)을 하기도 했고, 그 인연이 결혼으로까지 이어졌다는 것. 물론 금방 헤어졌고 현재는 영화감독 미아 한센 러브와 결혼해서 살고 있다는 사실. 또 이 영화에 예술품이 등장한다는 정도였다. 영화를 보고나서 알게 된 사실은 이 영화가 오르세 미술관 20주년 기획 영화이며 그래서 영화에 나오는 예술품은 실제로 미술관 소장품이라는 것. 또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에 들어가려던 중에 실제로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했고, 그로 인해 시나리오를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이다.

 

두 가지 생각

1. 유산을 놓고 세 남매의 의견이 갈린다. 첫째는 어머니의 집과 예술품을 유지하며 후대까지 이어가자는 의견, 둘째와 셋째는 현실적인 여건상 팔자는 의견. 이 상황에서 갈등을 보여주는 가장 쉬운 방식은 한쪽이 옳고 다른 한쪽은 나쁘다는 식으로 연출을 하는 것일 텐데, 이 영화는 그러지 않아서 좋았다. 첫째의 의견에 심정적으로 동의가 되었고 그 의견이 일리가 있지만, 마찬가지로 둘째와 셋째의 의견도 현실적이며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한국영화였다면 틀림없이 감정 과잉으로 흘렀을 부분을 담담하게 연출해서 마음에 든다.

 

2. 예술품이 실제 생활에서 쓰임새를 가지고 그에 걸맞은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실생활과 분리해서 엄정한 관리 하의 박물관에서 전시하는 게 좋은가. 쓰면서 드는 생각은 전자가 적절한 것 같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 영화의 결말까지 보고 난 후에 조금은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이 생각을 적용해서 해석해보았다. 엔딩에서 작중의 배경이 되는 집을 그대로 유지(생활과 유리되어 박물관에서 전시)하는 게 아니라 젊은이들이 창조적으로 변용(실제 생활에서 쓰임을 가지고 존재)해서 새로운 공간으로 이용한다. 이를 통해 예술품이 실생활에서 계속해서 쓰이며 존재하는 게 낫다는 감독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고 예술이 그러하듯 그것을 사용하는 세대도 계속해서 어떻게든 이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ps. 클린은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던데 이마 베프는 어떨지 꼭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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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2

 

 

몇몇 주제들이 책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공동체를 위한 노력, 감정이나 정념에 빠져들지 말고 이성에 따르는 행동의 필요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종국에는 소멸하기 마련이니 삶에 큰 미련을 가지지 말고 현재에 충실할 필요성, 관조적 태도 등을 들 수 있겠다.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비슷한 주제들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적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고 반성하며 다짐하는, 일종의 비망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완벽하게 떨쳐낼 수 없는 생각들이기에 이렇게 반복적인 글로 자신을 다잡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책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특정 주제의 반복적인 서술을 보며 느낀 점이 있다. 한 인간의 관심사나 인생의 화두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내가 지금까지 글이라고 적어둔 것을 읽어보니 대동소이한 주제들을 단어나 표현만 달리하여 적고 있었다. 책을 읽을 때도 느낀다. 이미 읽었던 책을 시간이 꽤 흘러 재독하면 새로운 면이나 생각할 거리가 많이 보이길 기대하지만 결국 읽고 나서 줄쳐놓는 부분은 그때나 지금이나 거기서 거기인 경우가 많다. 뭐 그렇더라고.

 

 

 

 

아름다운 것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그 자체로 아름답고,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다. 찬미는 그것을 이루는 성분이 아니다. 찬미를 받는다고 해서 더 나아지지도, 더 나빠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아름답다고 불리는 것들, 이를테면 자연의 산물이나 예술작품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아름다운 것에게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것은 법이나 진리나 선의나 겸손만큼이나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중 어느 것이 칭찬 받는다고 아름다워지고, 비난 받는다고 망가지겠는가? 에메랄드가 칭찬 받지 못한다고 더 나빠지겠는가?(58-59p)

 

 

일어나는 모든 일은 봄철의 장미나 여름철의 과일처럼 친숙하고 잘 알려진 것들이다. 병과 죽음, 중상모략과 음모, 바보들을 기쁘게 하거나 슬프게 하는 모든 것이 그와 같다.(66p)

 

 

매번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매사를 올바른 원칙에 따라 행하는데 싫증내거나 낙담하거나 포기하지 마라. 실패하면 다시 그 원칙들로 돌아가고, 네 행동이 대부분 인간의 본성에 맞는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네가 무엇을 지향하든 그것을 사랑하라.(76p)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이 소멸이 됐든 이주가 됐든 담담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가 올 때까지 어떻게 하면 만족스럽겠는가? 신들을 공경하고 찬양하는 것, 사람들에게는 선행을 베푸는 것, 사람들을 ‘참고 견디거나’ ‘멀리하는 것’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87p)

 

 

맛 좋은 요리나 그와 비슷한 다른 음식들을 보고는 이것은 물고기의 시체고, 이것은 새나 돼지의 시체라고 생각하고, 팔레르누스 산 포도주를 보고는 이것은 포도송이의 액즙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자포를 보고는 이것은 조개의 피에 담갔던 양모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성교란 것도 장기의 마찰과 진액의 발작적인 분비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멋진 발상인가. 그런 생각들은 사물들의 본질과 핵심을 건드려 그 사물들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볼 수 있게 해준다. 너도 평생 동안 그렇게 하여, 사물들이 너무 믿음직해 보이거든 옷을 벗겨 그것들의 무가치함을 꿰뚫어보고 그것들이 뻐기는 후광을 걷어내야 한다. 가식은 무서운 사기꾼이다. 그리고 네가 진지한 것들을 상대하고 있다고 굳게 믿을 때 가장 현혹되기 쉽다.(91-92p)

 

 

이 얼마나 이상한 행동인가. 인간들은 자신들과 더불어 사는 동시대의 사람들을 칭찬하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자신들이 본적도 없고 보지도 못할 후세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것은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것은 조상들이 너에 관하여 칭찬의 말을 하지 않았다고 네가 슬퍼하는 것과 대동소이한 것이다.

(...)

경기장에서 누가 우리를 손톱으로 할퀴고 머리로 받았다고 하자. 우리는 이를 나무라거나 못마땅히 여기거나 중에 그가 음모를 꾸밀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경계의 눈으로 살피되, 그를 적으로 여기거나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호의적으로 피할 뿐이다. 인생의 다른 상황에서도 그런 처신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우리의 경기 상대자들의 많은 부분을 너그럽게 보아주도록 하자. 앞서 말했듯이, 의심하거나 미워하지 않고도 그냥 피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94-95p)

 

 

원형극장이나 그와 같은 장소에서의 공연들이 똑같은 광경을 매번 되풀이하는 탓에 싫증이 나고 단조로움 때문에 구경가는 것이 싫어지듯이,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도 마찬가지다. 위로나 아래로나 모든 것이 언제나 똑같고, 똑같은 것들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그럴 것인가?

(...)

이 세상에서 단 한 가지 진실로 가치 있는 것은, 평생을 진리와 정의와 더불어 살아가며 거짓말쟁이들과 불의한 자들을 호의로써 대하는 것이다.(104-105p)

 

 

악이란 무엇인가? 네가 자주 보아온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네가 자주 보아온 것이라고 생각하라. 너는 시선을 위로 향하든 아래로 향하든 어디서나 똑같은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고대사도 중세사도 현대사도 그것들로 가득 차 있고, 오늘날에는 도시들과 가정들이 그것들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것이 익숙한 것들이고, 모든 것이 무상한 것들이다.(108p)

 

 

네가 갖고 있지 않는 것들에 대해 마치 이미 갖고 있는 양 연연해하지 마라. 오히려 네가 가진 것들 중에 가장 값진 것들을 골라, 만약 네가 그것들을 갖지 못했더라면 얼마나 그것들을 갈망했을지 생각해보라. 그러나 아무리 좋아도 그것들을 과대평가하는 버릇이 들지 않도록 조심하라. 언젠가 그것들이 없어지면 너는 안절부절못하게 될 테니까.(115p)

 

 

자신의 악에서 벗어나는 것은 가능한데도 자신의 악에서는 벗어나려 하지 않고, 남의 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테도 남의 악에서 벗어나려 하니 가소로운 일이다.

(...)

네가 선행을 베풀고 남이 그것을 받았으면 그만이지 어째서 바보같이 제3의 것을 바라느냐? 선행을 베푸는 것을 남이 보아주거나 또는 선행의 보답을 받는 것 말이다.(126p)

 

 

이웃의 의지는 그의 호흡이 그러하듯 내 의지와 무관하다. 우리는 각별히 서로를 위하여 태어났지만 우리의 지배적 이성은 각기 제 주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웃의 사악함이 내게도 불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는 것을 신은 원치 않았으니, 내 불행이 다른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145p)

 

 

너는 누군가의 몰염치에 기분이 상할 때마다 “세상에 몰염치한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고 즉시 자문해보라.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마라. 이 사람도 반드시 세상에 존재해야 할 몰염치한자들 가운데 한 명이기 때문이다. 악당이나 신의 없는 자나 잘못을 저지르는 다른 모든 자들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떠올려라. 너는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사기하자마자 이들 한 명 한 명에 대하여 더 관대해질 것이다. “자연이 이런 잘못에 대하여 어떤 미덕을 주었을까?” 하고 즉시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무지한 사람에 대하여 일종의 해독제로서 온유함을 주었고,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또 다른 능력을 주었기 때문이다.(163p)

 

 

건강한 눈은 보이는 것은 모두 보아야 하며 “나는 초록색만 원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눈병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청각과 후각은 들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듣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냄새 맡을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건강한 위는, 마치 방아가 찧도록 되어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찧듯이, 음식물이면 무엇이든 소화해야 한다. 그와 같이 건전한 정신은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내 자식들은 안전하게 해주소서!” 그리고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만인이 칭찬하게 해주소서!”라고 정신이 말한다면, 그 정신은 초록색만 반기는 눈이나 부드러운 것만 찾는 이빨과 같다.(180p)

 

 

누군가 나를 경멸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가 알아서 할 일이다. 내가 알아서 할 일은 경멸 받을 말과 행동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가 나를 미워하게 된다면? 그가 알아서 할 일이다. 내가 할 일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호의적으로 대하고, 특히 그에게는 그의 잘못을 기꺼이 지적해주되 나무라거나 내가 참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지 말고, 저 유명한 포키온처럼ㅡ그가 진심에서 그런 말을 했다면ㅡ점잖고 신사답게 지적해주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은 그런 것이어야 하며, 어떤 일에도 화내지 않고 불평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신들에게 보여야 한다.

(...)

“나는 너에게 솔직하게 대하기로 결심했어.” 라고 말하는 자는 얼마나 썩고 불순한가. 인간이여, 너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그런 말은 미리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은 저절로 드러나기 마련이고 이마에 적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마치 애인이 애인의 눈에서 당장 모든 것을 알아내듯이, 그런 것은 목소리의 울림을 들어도 당장 알 수 있고, 눈을 보아도 당장 알 수 있다. 소박하고 선한 자는 악취를 풍기는 자와 비슷하게 그에게 다가서는 사람은 다가가는 순간 원하든 원하든 않든 그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나 위장된 솔직함은 비수와 같다. 늑대의 우정보다 더 수치스런 것은 없다. 무엇보다도 그런 우정을 피하라. 선하고 소박하고 호의적인 그 모든 특징들을 눈에 드러내며, 그런 특징들은 숨어 있지 않는다.(188-190p)

 

 

4) 넷째, 너도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고, 너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네가 어떤 잘못들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설사 비겁하기 때문에 명예욕 때문에 또는 그와 비슷한 다른 동기에서 그들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에게도 그런 잘못을 저지를 기질은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5) 다섯째, 그들이 실제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너는 확신하지도 못하고 있음을 생각해보라. 많은 일들이 상황의 요구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남의 행동에 대하여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많은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7) 일곱째,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람들의 행동이 아니다.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지배적 이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실은 그들의 행동에 대한 우리의 의견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견을 근절하고 그들의 행동이 끔찍하다는 판단을 버릴 각오를 하라. 그러면 분노는 가라앉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러한 의견을 근절할 것인가? 어떤 모욕도 너에게 치욕을 안겨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가능해진다. 그렇지 않다면 너는 남이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에 수많은 잘못을 저질러 강도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8) 여덟째, 우리를 화나게 하고 슬프게 하는 그들의 행동보다는 그러한 행동에 대한 우리의 분노와 슬픔이 얼마나 더 괴로운 것인지 생각해보라.

 

 

 

ㅡ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中,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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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2

 

 

81-85p는 평생 머리에 새기며 되뇌어야 할 내용.

 

 

 


확실한 것은, 말을 하지 않아 이득이 된 경우는 많아도, 말을 하여 이득이 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말하지 않은 것은 언젠가 말할 수 있어도, 일단 말한 것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 그것은 엎질러진 물이다. (29p)

 

 

비밀을 지키지 않았다고 대체 무슨 권리로 남을 나무랄 수 있단 말인가? 알려져서는 안 될 일이라면 남에게 이야기하지 말았어야 할 것이다. 그대가 비밀을 그대에게서 꺼내어 다른 사람 속에 감추려 한다면, 그대 자신보다 남을 더 신뢰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자가 그대보다 더 나을 게 없다면 그대는 끝장날 것이며, 그것은 그대 책임이다. 그자가 그대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면 그대는 운 좋게 구원받을 것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냈으니까. ‘그는 역시 내 친구이니까.’ 하지만 내가 그를 신뢰하듯 그에게도 신뢰할 친구가 있을 것이며, 그 친구에게도 또 다른 친구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비밀은 수다를 통해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며 불어나고 증식한다.(32-33p)

 

 

특정 화제를 좋아하는 사람은 특히 조심하고, 되도록 그런 화제는 피해야 한다. 그런 화제는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언제나 거기에 살을 붙이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경험이나 재능에서 남들을 능가한다고 생각되는 화제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그런 사람은 허영심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자신이 가장 능숙하다고 믿는 일들에 바칠 것이다.

독서광은 역사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문학자는 문법에 관해 토론하기를 좋아하고, 널리 떠돌아다닌 여행가는 낯선 나라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이러한 기호도 조심해야 한다. 수다는 언제나 짐승처럼 낯익은 풀밭으로 가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 때문이다. 소년 퀴로스의 처신이 높이 평가받는 까닭은, 그가 자신이 더 잘하는 종목이 아니라 덜 숙달된 종목에서 경쟁하자고 동년배들에게 도전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동년배들을 능가함으로써 고통을 주기보다는 그들에게서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54-55p)

 

 

좋네, 술라. 무소니우스는 좋은 말을 많이 했는데, 내가 기억하기에 그중 하나가 “건강하게 살고 싶으면 평생을 치료가 필요한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이었네. 이성이 치료제 역할을 할 경우 크리스마스로즈처럼 즉석에서 한 번 쓰고는 질병과 함께 몸에서 배출되어서는 안 되고, 혼 안에 남아 우리의 판단을 통제하고 감시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일세. 이성의 효력은 약과 같은 것이 아니라 건강식과 같아서, 거기에 익숙해진 사람이라야 건강과 활력을 얻기 때문이네. 한편 충고나 질책은 최고조로 부풀어 오른 정념들에는 별반 효력이 없으며, 간질병 환자들을 깨우기는 하되 병을 낫게 하지는 못하는 냄새 자극제보다 더 나을 게 없다네.(63-64p)

 

 

내가 분노할 때 거울로 비추더라도 못마땅해하지 않을걸세. 자신의 일그러진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본다는 것은 분노라는 격정의 명예를 실추시키는데 적잖이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네.(71p)

 

 

훈련을 통해 우리 혼의 비합리적이고 완고한 요소를 길들이려면 모든 감정의 습관화가 필요하지만, 하인들에 대한 분노만큼 많은 노력이 필요한 감정도 없네. 하인들에게 우리는 두려움도 없고, 명예욕도 느끼지 못한다네. 우리는 하인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기에 자주 화를 내다 보면 실수를 많이 저지르게 되고, 또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다 보니 화를 내다가 미끄러운 바닥에서처럼 넘어지곤 한다네. 감정이 개입하게 되면 책임지지 않는 권력은 실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법일세.

유일한 해결책은 온유함으로 권력을 제한하고, 우리를 무르고 무심하다고 나무라는 아내와 친구들의 잦은 불평에 귀를 막는 것이라네. 또 내가 하인들에게 가혹하게 대하곤 했던 것은 하인들이 벌 받지 않으면 못쓰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일세. 나중에야 나는 첫째, 남들을 바루려다 가혹함과 분노로 나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보다는 느긋하게 잘못을 용서해줌으로써 남들을 더 나쁘게 만드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네. 둘째, 나는 그들이 오히려 벌 받지 않음으로써 나빠지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징벌보다는 용서가 개선의 시발점이 되는 것을 자주 보았네.

그리고 맹세코, 그들은 매질을 하고 낙인을 찍는 자들에게보다는 머리를 끄덕이며 조용히 명령하는 자들에게 더 기꺼이 복종하는 것을 보았네. 그리하여 나는 분노보다는 이성이 더 훌륭한 길라잡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네. 시인의 다음과 같은 말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일세.

 

두려움이 있는 곳에 존경심도 있다.

 

천만의 말씀! 존경심이 깃들인 마음속에서만 자기 개선을 수반하는 두려움도 자라나는 법이라네. 반면에 지속적이고 무자비한 매질은 지난 잘못을 후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잘못을 숨겨야겠다는 생각을 일깨워준다네. 셋째, 나는 우리에게 궁술을 가르치는 사람은 우리에게 활쏘기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과녁을 빗맞히는 것을 금하며, 마찬가지로 제때에 지나치지 않게 유익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벌주라는 가르침도 벌주는 것 자체를 금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늘 명심한다네. 그래서 나는 되도록 벌 받을 자들에게서 자신을 변호할 권리를 박탈하지 않고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줌으로ㅆ 분노를 억제하려 한다네.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 동안 감정이 누그러져서 판단력이 처벌의 적절한 방법과 적정 수위를 발견하게 되니까. 게다가 벌 받을 자가 분노 때문이 아니라 납득한 뒤에 벌 받게 되면 처벌에 반항할 구실이 없어지네. 끝으로, 주인보다 하인이 더 옳은 것처럼 보이는 가장 수치스러운 경우를 피하게 된다네.

알렉산드로스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포키온은 아테나이인들이 그런 소식을 너무 빨리 믿고 너무 일찍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말리며 이렇게 말했네. “아테나이인들이여, 그가 오늘 죽어 있다면 내일도 모레도 죽어 있을 것이오.” 마찬가지로 화가 나서 서둘러 응징하려는 자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네. “그자가 오늘 잘못이 있다면 내일도 모레도 잘못이 있겠지. 그가 좀 늦게 벌을 받았다고 해서 해로울 것은 없겠지만, 일찍 벌을 받으면, 옛날에도 그런 일이 흔히 있었지만, 언제까지나 부당하게 벌 받은 것으로 보이겠지.” 왜냐하면 우리 가운데 누가 닷새 또는 열흘 전에 고기를 태웠거나 식탁을 엎었거나 너무 느리게 명령을 이행했다고 해서 노예를 매질하거나 벌줄 만큼 잔인하겠는가? 그런데 바로 이런 일들이 방금 일어났거나 일어난 지 얼마 안 될 때 우리는 흥분하여 잔인하고 거칠게 대한다네. 안개 속에서는 물체가 더 커 보이듯, 화가 났을 때는 실수도 더 커 보이는 법이지.

따라서 우리는 먼저 그런 생각들을 당장 머리에 떠올려야 하네. 그리고 우리가 감정에서 자유로운 것이 확실하고, 차분하고 침착하게 숙고해보아도 그 행위가 벌 받아 마땅하다 싶으면 단호하게 응징해야 하고, 식욕이 엎어지면 음식을 먹지 않듯이 벌주기를 게을리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되네. 분노가 가라앉았다고 해서 사건을 묵살하고 벌주지 않으면 우리는 나중에 더욱더 화를 내며 벌주게 된다네. 그럴 경우 우리는 바다가 잔잔할 때는 항구에 닻을 내리고 있다가, 폭풍이 일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항해하는 게으른 뱃사공들과도 같다네. 그리하여 우리는 벌주는 데 무르고 나약하다고 이성을 나무라며 분노의 바람에 휩쓸려 무턱대고 앞으로 돌진한다네. 음식은 허기진 사람이 섭취하는 것이 순리이지만, 처벌은 처벌에 허기나 갈증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행하는 것이 순리일세. 밥에 반찬이 필요하듯 처벌에 분노가 필요해서는 안 되네. 오히려 벌주고 싶은 욕망을 억제한 다음 마지못해 처벌해야 하네.(81-85p)

 

 

 

ㅡ 플루타르코스, <수다에 관하여> 中,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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