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5/24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참 복잡해진다. 신파극인지 알면서도 눈물이 나고 눈을 꼬집히면 눈물이 나기 마련인 것처럼, 별 이야기가 아니라고 해도 유독 엄마에 대한 글이나 영상을 보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감정이 북받친다. 한국에서, 아니 나에게 엄마란 어떤 존재인가.

개인적으로 이 책은 그저 여행을 좋아하는 저자 개인이 자신의 여행기를 책이라는 출판물의 형태로 남겼다는 개인적인 보람을 제외하고는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내 기억 속에 조금이라도 남는다면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와의 여행기라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내게 이 책은 목적지인 인도도 중요하지 않고, 이모는 물론이거니와 무얼 했는지도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방점은 ‘엄마’와 자식이 함께 무언가를 함께 했다는 것이다. 아쉽지만 오해는 금물이다. 이 책이 다른 어떤 책보다 유달리 엄마와 딸의 관계를 잘 다룬다거나, 생애 처음 해외여행을 하는 엄마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엄청난 특장점이 있어서 기억에 남는다는 말이 아니다. 이런 책은 흔하다. 모르긴 몰라도 서점의 매대에 꽂혀 있는 여행 에세이 중 이와 같은 테마의 여행기가 수십 권은 있을 것이다. 다만 여행 에세이를 즐겨 읽지 않는 나는, 이런 책을 처음 읽었고 그게 나름의 신선한 경험이었다는 말이다. 같은 테마의 다른 여행기를 읽었어도 아마 비슷한 감상이 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타 여행에세이에 비해 큰 차별점이나 특정 집단에 소구하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인도에 대한 책이므로 인도에 대한 얘기도 잠깐 해보자. 인도에 처음으로 호기심과 관심이 생겼던 계기는 고등학생 때 읽었던 류시화의 ‘지구별 여행자’ 때문이었다. 이 책의 본문에서도 류시화의 인도에 대한 또 다른 에세이인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을 얘기하며 저자의 인도에 대한 첫 기억이라고 말하는데, 정말로 그럴법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책들이 특별한 어느 누군가의 개인적 경험으로 남기에는 너무 많이 팔렸다. 예전 같지는 않아도 위의 두 책은 지금도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셀러고 당시에도 이미 충분히 팔리며 많은 사람에게 읽혔다. 그런 이유로 해외여행에 로망이 있는 사람치고 당시에 소위 ‘인도 뽕’을 맞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고등학생이었던 그때 그 책에서 접했던 인도는 그야말로 신비한 곳이고 살면서 한번쯤은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었다. 길에서 동냥하는 거지조차 인생의 삼라만상을 꿰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고, 영성으로 충만한 곳으로 묘사했으니 고등학생이라면 혹할만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더 이상 류시화의 책을 읽지 않지만 그 책을 읽으며 즐거웠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오늘은 기차역에 대한 새로운 추억도 생겼다. 기차역 소음과 어우러진 엄마의 나지막한 목소리 말이다.

“캘커타에서 참 많은 것을 봤어. 살면서 봤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본 것 같아.”(111p)

 

 

스물한 살, 대학 시험에 합격해 서울로 올라가기 전날 밤이었다. 다른 집과 달리 우리 집에선 누구도 날 서울까지 데려다주지 않았다. 아마 부모님은 딸을 데려다주는 것보다 딸이 서울로 가기 위해 필요한 차비를 버는 일이 더 급했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기 위해 ‘캐리어’라는 것을 샀고, 그 가방에 옷 몇 벌과 필기도구, 기숙사에서 쓸 만한 것들을 주워 담았다. 그리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잠시 후 불 꺼진 방으로 엄마가 들어왔다. 그러고는 내 옆에 슬그머니 누워 내 손을 꼭 잡았다.

“선영아, 혼자 서울 보내서 미안하다.”

10년도 더 된 일이지만 생생한 그 말.(227p)

 

 

“선영아, 난 항상 딸을 믿어. 서울 가서도 우리 딸이 당당하게 잘할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이제부터 딸은 이 집에 손님처럼 오게 될 끼다.”

“내가 왜 손님이야?”

“그냥. 이제 가면 니가 1년에 몇 번이나 집에 오겠나. 그러니깐 이제부턴 손님이지.”

나는 정말 엄마가 말한 대로 1년에 한두 번 집에 내려갔다. 자주 찾는 손님도 아닌, 드문드문 찾는 손님이 되어버린 것이다. 엄마와 아빠에게 화가 나서 3년 동안 집에 내려가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렇게 전화도 없고 집에도 안 오던 나에게 어느 날 엄마가 전화를 걸었다.

“선영아, 니 뭐하고 사나?”

“왜? 왜 전화했는데?”

“보고 싶어서.”

난 엄마의 그 말에 그날 당장 짐을 싸들고 집으로 내려갔고, 3년 만에 엄마를 봤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엄마는 그새 많이 늙어 있었다. 내가 상상했던 젊고 건강한 엄마의 모습이 아니었다.(228p)

 

 

 

ㅡ 윤선영, <세상에, 엄마와 인도 여행이라니!> 中, 북로그컴퍼니

,

2018/5/29

 

 

먼저 현실과 실재의 경계에 대한 이야기 자체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오래된 이야기다. 플라톤이 본질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를 나누어 놓은 이후로는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현실은 실재가 아니라는 생각에 별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인간이 욕망의 주체인 한에 있어서, 현실과 실재의 경계는 별로 의미가 없어진다. 현실의 ‘나’는 욕망의 실현을 위한 가상일 수 있으며, 나는 현실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실재’라는 가상을 필요로 한다. 현실은 실재가 되고 실재는 현실이 된다. 그러나 이 경계를 무너뜨리는 순간 욕망은 유지될 수 없으며, 삶은 끝난다.

인간은 욕망을 갖는 한에서만 인간일 수 있다는 것이 지젝의 출발점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욕망을 가진 인간은 자신의 욕망의 대상이 무엇인지 항상 착각하며 살고 있다. 지젝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이 목표로 하는 것은 욕망이 완전히 충족되는 상태가 아니라, 욕망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상태이다. 욕망의 주체로서의 인간은 욕망의 실현에서가 아니라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부터 자신의 삶을 확인하고 쾌락을 얻는다. 그러나 욕망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의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환상을 통해 그런 욕망의 목표를 만들어내며 그것을 통해 욕망하는 법을 배운다.

욕망하기 위해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현실에서 이미 욕망이 실현되어 있다는 것을 은폐하는 것이다. 실재가 욕망이 실현된 세계이고 현실이 그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해야 하는 세계라면, 실재는 환상이고, 현실 속에서는 이미 욕망이 실현되어 있으므로 현실은 이미 실재가 된다. 왜냐하면 욕망의 실현이란 사실은 욕망의 재생산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실현된 욕망이란 끊임없이 멀어지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삐딱하게 본다’는 것은 똑바로 보면 존재하지 않는 욕망의 대상을 만들어내는 방법이다. 우리가 세상을 똑바로 볼 때 욕망의 대상, 곧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이것은 곧 우리가 욕망하는 것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거기에는 공허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순간 욕망은 중단되며 쾌락은 막을 내린다. 이것은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우리가 삶의 의미를 잃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삐딱하게 보지 않을 수 없다. 삐딱하게 봄으로써 실재는 현실과 구분되고 삐딱하게 볼 때에만 존재하는 그 왜상적 대상을 욕망하면서 우리는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실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현실과 구별되는 실재를 인지하며 현실과 실재의 경계를 유지하는 것이 욕망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욕망은 환상을 필요로 한다. 공허 그 자체로서의 실재가 우리의 현실에 침투해 들어오게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19-21p)

 

 

그러나 새옹지마의 교훈은 그저 훈훈한 것만은 아니다. 변방에 살았던 노인의 아들은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전쟁에 나가지 않았고,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만, 현실은 대개 그렇게 담담하지가 않다. 당시의 의료수준을 생각해 보건대 그 노인의 아들은 아마도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전쟁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야 낫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삶의 고통은 계속되는 것이다. 비극은 그렇게 삶이 지속된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새옹지마’라는 고사가 우리에게 말해 주듯이 그러한 삶의 일상은 언제나 불확실하고 지리멸렬해서 견디기 힘들다는 데 있다.(49p)

 

 

하이데거가 말하는 일상인의 삶이 지속될 수 있는 힘은 아마도 그들이 자신들의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잡담이나 소문의 소재로 만들어 버리는 데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의 삶이 아니고, 그 누군가의 삶이기 때문에 그럭저럭 참을 만한 것이다. 자신의 삶을 그 누군가의 삶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그때그때 적당히 흥분하고 적당히 기대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속으로 ‘하면 된다’를 되뇌며,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굳게 믿으면서, 당장의 고통만 지나가면 그 다음에는 행복한 인생이 펼쳐질 것이라고 희망해야 한다. 눈앞에 닥친 고비 너머에 나의 진정한 삶이 있다고, 조금만 더 견디어 내면 나는 왜 사는지 말할 수 있을 거라고, 내 삶의 의미는 곧 분명해 질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러나 물론 일상은 반복적으로 우리의 이런 기대를 배반한다. 수험생이 시험을 마쳤다고 해서, 군인이 제대를 했다고 해서, 취업준비생이 취직을 했다고 해서, 처녀 총각이 결혼에 성공했다고 해서, 그들이 행복한 일상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삶이 중단되지 않는 한, 일상은 지속될 것이며, 그것은 여전히 참기 힘들 정도로 지리멸렬할 것이다. 이것은 삶의 의미가 왜 말해질 수 없는가 하는 이유이다.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나의 삶은 그 의미의 최종적인 봉합을 계속해서 연장한다.(51-52p)

 

 

102세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간 노철학자가 깨달은 건강 유지의 비법은 결국 자신만의 삶의 리듬을 잃지 않으면서 내적인 평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가다머의 가르침에 따라서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결코 무리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성향에 맞지 않게 삶의 태도를 바꾸려 해서는 안 되며, 심지어 지나치게 노력하는 삶을 살아서도 안 된다.

(...)

소시민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내적인 척도에 맞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인생의 목적을 어떤 대단한 것을 성취하는 데 두고 있지 않고 그저 건강하게 살다가 가는 데에서 찾고 있다면 그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인가? 그런 삶을 부도덕하다고 비난하는 사회는 내적인 척도에 맞게 평온한 삶을 살고자 하는 불가피한 생존 욕구마저 부정하고 있는 너무 야박한 사회가 아닐까?(64-65p)

 

 

다윈의 진화론에서 특징적인 요소는 그러한 변이의 선택과정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지적했다는 점이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다윈의 관점은 살아남았다는 것이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양한 변이 가운데 어느 것이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것은 미리 정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지극히 우연적인 과정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언어와 문화를 만들고 교양 있는 행동을 하며 나아가 성스럽게 여겨지는 삶을 살게 된 것도 인간의 본질과는 무관한 일로서 우연적인 역사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해서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84-85p)

 

 

그렇지 않아도 세상 살기 바쁘고 경쟁에 지쳐있는데 머리나 식혀볼까 하고 손에 든 소설마저 ‘아침형 인간’으로 변신해서 ‘부자 아빠’가 되라고 외쳐댄다면 인생이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

 

그러나 로마 상류층의 사상은 한 가지 결정적인 측면에서 취약점을 보인다. 아파테이아와 평점심은 이미 가진 재산이 없어서 쾌락주의자가 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쓸모없는 충고이다. 그들은 가난과 질병, 죽음에 노출되어 있으며, 자신들의 통치자들과 소유주들의 의지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하고 자신들에게 어떠한 덕과 어떤 행복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 몇몇 사람들에게는 신비적인 종교가 그 대답을 제공했다. 하지만 훨씬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대답은 기독교의 도래를 기다려야 했다.

 

아마도 철학사를 읽어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진부하게 여겨지는 대목일 것이다. 나를 괴롭힌 것은 “재산이 없어서 쾌락주의자가 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구절이다. 나의 주장을 어처구니없게 생각한 사람들은 속으로 “돈도 없으면서 헛소리하고 있네”라고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다. 나는 진정한 쾌락주의자란 모든 종류의 욕망을 던져버리고 경쟁에 휩쓸리지 않고, 덧없는 것들에서 의미를 찾으며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매킨타이어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지나가는 어투로 재산이 없는 사람은 쾌락주의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평생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대책을 세워놓지 않은 사람은 경쟁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진정한 쾌락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진부한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106-108p)

 

 

여러 가지 논거가 동원이 되겠지만, 가장 고전적인 논거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것이다. 암울한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세상을 저주하던 내게 이 말씀은 참으로 세상을 부정할 힘을 주었던 생명의 말씀이었다. 나는 나의 정신적인 방황과 고통이 세상의 거짓들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언젠가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자유롭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보니 진리가 너무 많아서 그 중에 어떤 것이 진짜 진리인지 가릴 수가 없게 되었다.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할 것 같은데 그 놈의 진리가 도대체 어떤 놈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짧은 인생 경험을 통해서 깨달은 바로는 이런 와중에 내 말이 진짜 진리요 하고 나서는 놈들은 대개는 목소리만 큰 사기꾼이거나 주먹 센 깡패라는 것이다.(117-118p)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 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상으로 치장이 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 앉아서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129p)

 

 

무억보다도 코스모폴리탄적인 프로젝트가 실패할 수밖에 이유는 그들이 정치의 헤게모니적 차원을 무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무페는 사회의 모든 질서가 필연적으로 헤게모니 질서이며, 그것을 통해서 권력관계가 구성 된다고 보기 때문에 ‘헤게모니를 넘어선’ 정치를 상상하는 것은 헛된 망상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무페가 코스모폴리탄적인 ‘망상’에 대해 제시하는 대안은 다극화된 세계의 건설이다. 그에 의하면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성적인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이성적인 대화와 타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사람들의 욕망과 환상을 이용해야 하며 민주주의적 실천에 공헌하는 정체성을 만들어내야 한다. 지배적인 헤게모니에 대한 투쟁은 모든 층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민주주의적 실천은 따라서 결코 종결될 수 없는 프로젝트이다.(189p)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인식은 개별적인 몸들이 사실은 아무런 관련이 없이 세상의 존재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 양자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단절이 있다는 것을 바라봄으로써 얻어진다.(240p)

 

 

인간의 비극적인 삶이 종식되지 않는 한 기도는 지속될 것이다. 이 땅의 고난과 굴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기를, 아이들을 사지로 내몬 잘못을 용서해주기를 우리는 계속해서 참회하며 빌게 될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일수록 완전한 신을 갖는다”는 포이어바흐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현실의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신음과 같은 기도를 뱉어내게 할 것이다.(269p)

 

 

 

ㅡ 이유선,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中, 라티오

,

2018/5/25

 

 

 

하지만 여행을 다니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여행이 일상을 벗어난 아주 특별한 상태가 아니라 일상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른바 ‘편도행 티켓’을 끊어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도 있지만, 그건 나의 것은 아니다. 아마 그런 여행은 나의 죽음, 그것으로 한 번일 것이다.(7p)

 

 

나는 여행을 떠나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을 싫어한다.

우리는 여행에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나 자신을 가지고 간다. 속옷 한 장 없이 떠날 수 있지만 나 자신이 없이는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한다.

진정한 자아는 어디 있는가? 성지에? 템플스테이에? 인도에? 내 자아는 내 집, 내 방에 있지 않을까? 전혀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서 비일상의 경험을 하며 자아를 찾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런 생활을 지속해야 할 일이다.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왕복 여정을 떠난다면, 내 자아가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의 상황을 주시할 일이다.(13p)

 

 

내가 여행과 관련해서 유일하게 되뇌는 점이 있다면, “예정대로 되지 않는 일을 받아들일 것.” 오로지 그것을 더 여유 있게 경험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매일의 삶에서 예정대로 되지 않는 일은 내 힘으로 돌파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행지에서라면 더 부드럽고 가볍게, 가려고 한 식당이 문을 닫거나, 박물관 입장 줄이 너무 길어서 관람을 포기하거나, 화산재가 날아와서 비행기 운항이 취소되는 일을 통해 포기하는 법을 배우고 변수를 받아들인다. 아마도 나는, 평상시에 대충 ‘해치울’수 없는 것들을 해버리기 위해 여행을 가는 것 같다. 여행지에서의 선택은 대체로 자유롭다. 여행지에서 실패해도, ‘이곳’(사실 이승이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다)에서의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아, 카드대금이 있군.(14p)

 

 

외할머니는 제주도보다 더 먼 곳으로 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다. 나는 외할머니를 모시고 일본에 가기보다 일본에서 책을 잔뜩 사오는 편을 택했다. 그때는 겨우 취직한 직후였으니까, 돈을 더 벌면 ‘나중에’라고 생각했다. 변명에 불과했다는 걸 시간이 지나고 깨닫는다. 무엇이든, 지금이 그 나중이다.(24p)

 

 

여행이야말로 우아하게 가난할 수 있는 방법이다. 집에서 가난한 것보다는, 여행지에서 가난하면 인생의 깨달음을 얻고 있다는 자위라도 할 수 있으니까. 돈이 없어서 고생을 하고 나면 정말로 뭔가 알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게 뭔지는 결국 알 수 없었다. 정신 승리가 따로 없다.(33p)

 

 

뉴질랜드 북섬 로토루아에는 와이토모 동굴이라는 곳이 있다. 반딧불 동굴이라고도 불리는데, 동굴의 바닥까지 내려가, 마지막에는 캄캄한 가운데 밧줄을 붙잡고 동굴 바닥을 흐르는 물길 위에 뜬 쪽배에 올라탄다. 모두 안전하게 탄 게 확인되면 안전요원이 설명한다. 이제부터 불을 끌 것이다. 전혀 위험하지 않다. 당신들은 옆에 만져지는 밧줄을 당겨라. 그러면 배는 조금씩 앞으로 전진해 나가는 곳으로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불을 끄면 위를 쳐다보아라. 그리고 정말 완전한 소등. 암흑. 암흑? 머리 위를 보는 순간 마치 가장 공기가 맑고 빛이 없는 지역 밤하늘처럼 반딧불 수천 마리가 빛나는 장관이 펼쳐진다. 하늘은 멀지만, 동굴 천장은 멀지 않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안전요원의 설명대로 보트를 맨 줄을 당겨가며 앞으로 이동하면서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냥 여기에 더 머물고 싶다고. 밖으로 나와 숲을 산책하면서, 반딧불은 곤충 아닌가? 그 위에 수천 마리가 그러면 어쩌고 있는거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막 떨어지고 그런 것도 있을 텐데, 어두워서 못 본 건가? 으윽. 원효의 해골물 같은 경험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렇게 관광객이 드나드는 일이 반딧불이에게는 괜찮은 것일까도 근심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와 그 경험을 떠올려보면,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것, 그것뿐이다.(49-50p)

 

 

‘다름’을 접하는 방식 역시 어른의 여행에서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여행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다른 것들을 구경하기에 머물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같음에 눈이 뜨이는 법이다.(60p)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우리는, 현지 사람들이 나에게 하는 이해 못할 현지어가 내 외모에 대한 품평이나 인종차별적인 욕이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설령 내가 사용하는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라고 해도, 굳이 나쁜 말을 할 이유는 없다. 상대는 알아듣지 못해도 그 말을 하는 나는 내가 한 말을 듣는다. 이런 일은 정말이지 하나도 재미있지 않다.(66p)

 

 

얹혀 있는 데는 사실 기술이라고 부를 만한 게 없다. 가능한 하지 않는 게 좋다. 친한 친구가 온다고 하면 반겨 맞겠지만, 그게 아닌 대부분의 경우는 오겠다고 하니 그냥 두는 것뿐이다.

당신을 반겨 맞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얹혀 있게 된다면 몇 가지는 당부하고 싶다. 아래 사항에서 한 가지를 택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전부 할 생각을 해야 한다.

 

1. 필요한 것이 있는지 물어보고 가능한 가져다준다.(외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소주나 담배, 식재료가 특히 유용할 수 있으며,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국어로 된 책이 필요한지 묻고 사다 주면 좋다.)

2. 제대로 된 식사를 현지의 친구나 친구 가족에게 최소한 한 번 이상 외식으로 대접한다.

3. 청소에 신경 쓴다. 매일 침구 정리, 욕실 정리,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 설거지를 해야 한다. 혹시 그곳의 친구도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면 아예 현금을 주고 숙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가 얹혀 있기를 그만두게 된 이유는 신세지는 일은 성인이 해도 좋은 일이 전혀 아니구나 싶어져서였다. 돈이 없어서 숙소를 얻을 여력이 없다면, 차라리 여행을 가지 않는 쪽이 낫다고 마음먹기도 했고.(69-70p)

 

 

문제는, 제약조건이 없는데도 혼자 아무것도 하지 않는 휴가라는 것은 어쩐지 ‘없어 보인다’는 강박을 낳는 것이다. 바쁘게, 좋은 데서 보내는 시간이야말로 나 자신을 괜찮게 보이게 한다는 생각.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도 없는 걸 휴가라고 불러도 되는가. 남들이 물어보는 말이 귀찮아서라도 어딘가 다녀와야 하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에 시달린다.(110p)

 

 

예전 대학 선배 중에 <어린 왕자> 책을 언어별로 모으는 사람이 있었다. 언어가 다른 다양한 나라들을 여행하고 기록하는 재미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132p)

 

 

여행지에서 가져와야 하는 것은 그곳 스타일의 옷보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는 법(여행지에는 내가 모르는 사람뿐이니까)과 타인의 스타일에 간섭하지 않는 태도(아래위로 훑어보면 실례다)일지도 모른다.(135p)

 

 

뭘 하지 않을 자유를 말하는 책의 저자는 대체로 그것을 많이 해본 사람이더라는 생각에서다. 옷장의 미니멀리즘을 설파하는 지비키 이쿠코의 <옷을 사려면 우선 버려라> 역시 읽다 보면 옷을 버리라는 저자가 누구보다 좋은 물건을 아주아주 많이 사고 써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미니멀리즘을 주장하는 책들은 많이 쌓는 삶을 살아본 뒤에 쌓지 말자고 한다. 소식을 주장하는 책을 우리가 너무 많이 먹는 게 문제라는 데서 시작한다. 과잉이야말로 금욕의 가장 소중한 식재료다. 해본 사람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이 메시지부터 받아들이는 것에 있지 않을까.

똥을 굳이 먹어봐야 아나. 타인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줄 아는 것이 문명화된 인간 아니겠는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경험이라는 것은 ‘간접’이라는 말이 붙는 순간 ‘0’에 무한히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 직접 경험이 깨달음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간접 경험은 그냥 경험을 안 해봤다는 말이다. 사랑을 글로 배울 수 없고, 여행도 글로 배울 수 없다. 한 것과 한 것 같은 것은 다르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 봐야 안다.

일본에서의 미니멀리즘이 3.11 동일본대지진으로부터 촉발된 움직임이라면, 한국에서의 미니멀리즘은 저소득을 긍정하고 받아들이게 만드는 쪽에 가까워 보인다. 사고 싶은 만큼 사보니 안 사도 되겠다는 깨달음을 얻는 것과, 원하는 만큼 사본 적 없지만 그래 봐야 부질없다고 배운 뒤 일단 아끼고 보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여행하지 않을 자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여행을 가보니 생각의 깊이란 내 집 침실에서도 얻을 수 있더라 하는 깨달음을 얻는 것과, 애초에 여행 가도 별것 없으니 안 가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은 다르다. 사랑할 자유를 누린 뒤에 사랑하지 않을 자유를 만끽할 수 있고, 일하고 싶은 자유를 충족시킨 뒤에야 일하지 않을 자유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할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하지 않을 자유’를 가르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해보니 별것 없더라”와 “해도 별것 없대”는 다르다. 여건이 된다면, 결론을 내기 위해 직접 경험할 수 있다면, 하기를 권한다. 여행을 다녀오지 않고도 여행을 다녀온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내 안으로 여행하기’를 잘 하려면,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뭔지부터 알아야 할 것 아닌가. 하다못해 여행을 싫어한다는 사실도, 여행을 해봐야 알 수 있다. 인내와 금기는 엉뚱한 판타지만 키우더라.(155-156p)

 

 

먹어보지 않은 음식을 다짜고짜 좋아하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 ‘진짜’ 맛있는 음식이라면 먹는 순간 눈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신의 음성이 귓가에 울릴 것 같지만, 그건 음식만화에서나 가능한 일일뿐더러, 맛을 음미하는 법을 아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지적인 쾌락이다. 미각은 다른 많은 감각처럼 훈련할수록 더 성취도가 높아진다. 미술이나 음악, 소설 같은 예술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법을 다양한 작품을 통해 배우듯 말이다.(206p)

 

 

 

ㅡ 이다혜,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中, 예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