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6/12

 

소설가로 적합한 사람은 이를테면 ‘이건 이렇다’라는 결론이 머릿속에서 내려지더라도, 혹은 자칫 내려질 것 같더라도, ‘아니, 잠깐, 어쩌면 이건 나 혼자만의 억측일 수도 있어’라고 멈춰 서서 다시 생각해보는 사람입니다. ‘세상일이란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지. 나중에 뭔가 새로운 요소가 불쑥 튀어나오면 얘기가 백팔십도 달라질지도 모르잖아’라는 식으로.(120p)

 

‘시간이 있었으면 좀 더 잘 썼을 텐데ㅡ. 나는 소설 쓰는 친구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정말 깜짝 놀랐다. 지금도 그 일을 떠올리면 아연해진다. (중략) 만일 그가 써낸 이야기가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소설 따위를 쓰는가. 결국 우리가 무덤까지 가져갈 것은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 힘껏 일했다는 노동의 증거, 그것뿐이다. 나는 그 친구를 향해 말하고 싶었다. 제발 부탁이다, 지금 당장 다른 일을 찾아봐라, 라고. 똑같이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번다고 해도 세상에는 좀 더 간단하고 아마 좀 더 정직한 일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너의 능력과 재능을 최대한 쏟아부어 글을 써라. 그리고 변명이나 자기 정당화는 안 돼. 불평하지 마. 핑계 대지 말라고.(168p)

 

모든 일에는 ‘물때’라는 게 있고, 그 물때는 한번 상실되면 많은 경우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습니다. 인생이란 때때로 변덕스럽고 불공평하며 어떤 경우에는 잔혹한 것입니다. 나는 우연히 그 호기를 제대로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지금 돌아보면 그야말로 행운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행운이란 말하자면 무료 입장권 같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유전이나 금광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그걸 찾아내고 일단 손에 넣으면 그다음은 만사 오케이, 살살 부채질이나 해가며 안일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라는 건 아닙니다. 그 입장권이 있으면 당신은 행사장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ㅡ하지만 그냥 그것뿐입니다. 입구에서 입장권을 건네고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다음에 어떤 행동을 취할지, 거기서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취하고 혹은 버릴지, 거기서 생기게 될 몇 가지 장애물을 어떻게 뛰어넘을지,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재능이나 자질이나 기량의 문제고, 인간으로서의 기량의 문제고, 세계관의 문제고, 또한 때로는 극히 심플하게 신체력의 문제입니다. 어쨌든 그건 단순히 행운이라는 말만으로는 미처 다 처리되지 않는 사안입니다.(196~197p)

 

단지 내가 작가가 되고 정기적으로 책이 출간되는 동안에 한 가지 몸으로 배운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쓰든 결국 어디선가는 나쁜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긴 소설을 쓰면 ‘너무 길다.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반으로 줄여도 충분하다’라고 하고, 짧은 소설을 쓰면 ‘내용이 얄팍하다. 엉성하다. 명백히 태만한 티가 난다’라고 합니다. 똑같은 소설을 어떤 곳에서는 ‘같은 얘기를 되풀이한다. 매너리즘이다. 따분하다’라고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전작이 더 낫다. 새로운 시도가 겉돌고 있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이미 이십오 년 전쯤부터 ‘무라카미는 시대에 뒤떨어진다. 이제 끝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불평을 늘어놓는 쪽에서야 간단하겠지만(생각나는 대로 입에 올릴 뿐 구체적인 책임은지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 말을 듣는 쪽에서는 일일이 진지하게 상대했다가는 우선 몸이 당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절로 ‘뭐든 상관없어. 어차피 나쁜 말을 들을 거라면 아무튼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쓰자’라고 하게 됩니다.(269p)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지요. 일본이라는 토양에서, 그 딱딱한 틀에서 도망치고 싶어 이른바 ‘국외 유출자’로서 해외에 나갔는데 그 결과 원래 있던 토양과의 관계성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셈이니까요.(313p)

 

 

 

ㅡ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中,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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