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7/15

 

신경다양성의 하나인 자폐가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다는 점은 이 책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에는 반드시, 기존의 ‘정상성’이라는 기준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를 성찰하려는 역사적 맥락이 고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삐딱한 의문도 든다. 모든 사람이 고유한 뇌 작동 방식을 가진 존재라면, ‘신경다양성’이라는 말은 과연 어떤 유효한 구분선을 가지고 있는가? 결국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해받아야 할 존재라면, 누구까지를 신경다양성의 범주에 포함시킬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또한 이 책에서 그려지는 자폐인의 모습은 매우 고기능에 속하는 사례로 보이며, 이는 극히 소수의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될 수 있다. 그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지만, 중등도 자폐인의 삶과 목소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신경다양성이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음.

 

 

이것이 바로 '스몰토크', 정보 전달이 아닌 사회적 목적으로 가득한 대화다. 그리고 이 대화는 굉장히 중요하다. 적어도 신경 전형성의 세상, 존재하는 모든 규칙이 만들어지는 그 세상에서는. 언어학자들이 즐겨 명명하는 대로 이런 '의례적 의사소통'의 목적은 소통이 발생하며 조금씩 사회적 관계가 원활해지는 것,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환상 속에서 두 사람 사이의 연결이 차츰차츰 가만가만 돈독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 같은 자폐인에게는 정말이지 악몽이다.

(...)

실제로 자폐인은 비자폐인들이 자유롭게 손에 넣는 듯한 사회적 규칙 안내서 없이 성장했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고, 나는 이 비유를 필요에 따라 주기적으로 언급할 것이다. 우리는 신경전형성을 지닌 또래를 관찰하며 이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자동적으로 무심코 이루어지는 반면 자폐인은 하나하나 배워가며 분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에게 가벼운 대화는 박수만큼 쉬워 보이지만, 자폐인에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방해의 장벽이 된다.(26-27p)

 

 

사실 대화라는 얼기설기 얽힌 덤불길은 양방향이라(얽히려면 두 사람이 필요하니까) 신경학적 전형성을 타고난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타협해야 한다. 자폐를 연구하는 데이미언 밀턴 박사는 '이중 공감 과제'*를 주제로 장문의 설득력 강한 글을 쓴 바 있다. 그는 자폐인이 신경 전형성의 관점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그쪽 역시 우리를 이해하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을 파고든다. 차이점이라면 우리는 자신의 분투를 극도로 예민하게 인식하고 이질성을 보상하기 위해 노력하는 반면, (지극한 존중심을 품고 하는 말인데) 그쪽에서는 이런 염병할 현실에 관해 어렴풋한 자각조차 없는 것 같다.

가장 좋은 결과는 중간에서 만나는 것이다. 자폐인들이 비자폐인들의 이상한 규칙과 선호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듯 그쪽에서도 이해를 위해 동등한 수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원활하게 대화를 나누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실수로 인해 지나치게 화를 내는 일은 없으리라.

 

*: 자폐인은 공감력이 부족하다는 통념이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며 다만 감정을 나타내고 소통하는 방식이 비자폐인과 다를 뿐이기에, 자폐인과 비자폐인 모두에게 서로의 공감 방식을 배워야 한다는 과제가 있다는 이론.(40-41p)

 

 

일반적으로 신경 전형인이 인내의 한계에 도달해 감정을 분출하면 주변 사람들은 엄청난 애정과 지지를 표한다. 자신도 비슷한 한계점이 있기에 그 사람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자제력을 놓지 않고는 그런 수준의 학대나 트라우마를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에게 애정과 지원을 쏟을 수 있다. 누군가가 이혼, 상실, 이사, 범죄 피해 등으로 인해 심각한 스트레스를 겪을 때 이런 반응이 이어지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이들을 위한 연민이 산더미처럼 쌓인다. 그러나 자폐인이 똑같은 일을 겪을 때는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왜 이런 이중 잣대가 있는 걸까?

비자폐인 구경꾼들은 사람들의 한계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령 자폐인이 레스토랑에서 심리 탈진을 겪는다면 그들은 주변 환경과 상황에 그럴 만한 이유가 없으리라고 추론한다. 그들은 주변 환경과 상황에 그럴 만한 이유가 없으리라고 추론한다. 그들은 자신이 식당의 소음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저기 있는 사람은 대체 왜 난리일까 의아해한다. 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은 자폐인의 삶에서는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스트레스의 한계, 인내의 한계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한계선 밑에 아슬아슬하게 존재하는 반면 비자폐인은 대부분 한참 밑에서 일생을 보내며, 끔찍한 일이 일어나 갑자기 그 한계를 넘어가는 자신을 발견할 때까지 한계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한계선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선을 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심리 탈진을 겪는 자폐인이 동정심이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53-54p)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폐인에게 마음 이론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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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이론은 적어도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자폐성 장애 연구의 표준 개념이었고, 이는 쉬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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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자폐 연구자가 허술한 근거를 기반으로 내리는 중대하고 광범위한 결론의 훌륭한 예시다. 하지만 그로 인한 영향과 피해는 이미 발생했고, 2020년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 피해를 걷어내고 자폐인의 진실을 똑바로 인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분명 자폐인에게도 공감 능력이 있다. 사실 자폐인 상당수는 공감력이 상당한 듯한데, 비자폐인이 보기에는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발현될 뿐이다.

많은 자폐인이 '과공감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는 위험하거나 불편한 상황에 처한 사람과 동물을 보면 일종의 극단적인 감정적 반응이 생긴다는 뜻이다.

(...)

따라서 자폐인은 공감력이 어느 누구 못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우리가 공감을 표현하는 방식이 흥미를 자극할 만큼 다양하고 (비자폐인이 볼 때는) 전형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것도 우리가 공감을 표현할 수 있을 경우의 이야기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자폐인은 공감력이 있다. (81-83p)

 

 

ㅡ 피트 웜비, <나에겐 너무 어려운 스몰토크> 中, 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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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7/9

 

기억의 외부 아웃소싱과 매개된 경험의 가속화, 극단적 효율 추구라는 오늘날의 흐름에 대해 우려하고 비판하는 책들은 이미 많다. 이 책도 그런 부류에 속하며, 특별할 건 없다. 다만 장점이라면 다양한 최신 사례들을 성실하게 수집해 놓았다는 점이다.

 

 

 

로드 레이지의 뿌리에는 성급함이 있다. 우리처럼 결점이 있고, 피곤하고, 정신이 산만해진 다른 사람들에게 참을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줄을 서는 것에 대한 불만이 늘어나는 것처럼, 운전 중에 인지된 사소한 모욕에 과잉반응(때로 치명적인)을 하는 것은 우리의 기대가 얼마나 많이 변화했는지 알려준다.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 부분적인 이유는 일상생활의 끊임없는 가속화에 있다. 일상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기다릴 수 있는 것, 기다려야 하는 것에 대한 기대가 변하고 있다. 우리는 기다리지 않고 서로에게 바로 연락할 수 있는 것에 익숙해졌다(140p)

 

 

기대를 아웃소싱하는 것은 가본 적이 없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기 전에 옐프의 리뷰를 샅샅이 뒤지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우리는 놀라움을 좋아하지만 불쾌한 놀라움은 반기지 않는다. 기대는 놀라움의 가까운 친척이며, 기대가 즐거운 경험으로 이어질 때면 기다림이 즐거움을 한층 더 키운다. 그러나 기대와 놀라움이 실망으로 이어질 때면 우리는 거기에 할애한 시간을 낭비로 보는 경향이 있다.

아주 짧은 틈새 시간도 채울 수 있는 너무나 많은 방법이 있다 보니, 기대 심리에 미묘한 변화가 나타났다. 기다림을 기대보다는 지연으로 경험할 가능성이 더 높아진 것이다. 이제 기다림은 정상적인 인간 경험이 아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었다. 시간을 쉽게 채우는 데 익숙해지면 기대의 기회는 사라진다. 백일몽의 기회처럼 말이다.

지연delay은 오늘날 부정적 뜻을 내포하고 있다. 더 이상 미덕(의지력이나 인내력의 발휘)이나 기회(반성이나 기대)를 암시하지 않는다. 지연은 불편을 의미한다.(163-164p)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온라인에서 보내는 우리에게 이런 종류의 오프라인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증거가 늘어나고 있다. 미시간대학교 사회연구소의 연구 결과, "오늘날 대학생의 공감 능력은 20~30년 전의 대학생보다 약 40퍼센트 낮으며, 가장 급격한 감소세는 스마트폰 보급과 추세가 일치한다. 한 연구원은 "온라인에서 '친구'를 쉽게 사귈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문제에 반응하고 싶지 않을 때 무시해버릴 가능성이 높아지며, 이런 행동은 오프라인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런 경향을 악화시켰다. 2022년 대학생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팬데믹의 여파로 대학생들의 불안과 우울증이 증가했고 공감 능력도 크게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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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활동이 오프라인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많은 연구에서 다루어지는 논란 많은 연구 주제다. 폭력적인 비디오게임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는 하위 연구 장르가 있을 정도다. 이런 연구는 대개 모의 폭력에 대한 노출이 다른 곳에서의 폭력에 둔감해지게 하는지를 다룬다. 그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폭력적인 게임을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폭력적인 행동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지만(사실 폭력적인 비디오게임을 하는 사람은 증가했지만 폭력 범죄율은 감소했다), 폭력적인 범죄보다 측정하기 어려운 결과, 즉 공감 능력의 저하는 나타난다는 것이다. 임상심리학자 진 브로크마이어는 <뉴욕타임스>에 "장기적으로 폭력적인 비디오게임에 더 많이 노출된 사람들은 폭력에 대한 낮은 공감 능력 등의 특징을 보인다는 것이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브로크마이어는 10대들이 폭력적인 이미지에 장기간 노출될 경우 공감 능력과 관련된 뇌 영역이 약화된다는 것을 발견했다.(188-190p)

 

 

자신의 감정적인 삶을 얼마나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런 기술은 양의 탈을 쓴 디지털 늑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인식을 돕는 기술로 마케팅되고 있지만, 원치 않는 노출을 야기하는 기술로 쉽게 변질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기술에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방해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 어떤 동료가 직원 회의에서 발언할 때마다 당신의 심박수가 올라가고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포착하기 전까지는 당신이 그를 싫어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라. 아니면 아내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 스마트폰이 그녀의 어조가 불안한 것을 파악하고는 거짓이라고 인식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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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셔피로는 감정을 드러내는 기술은 감정을 숨기는 기술의 개발도 촉진하리라는 점을 인정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감정 은폐 장치"는 일상을 감정적 가면을 쓴 사람들이 오가는 스크린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204-205p)

 

 

매개는 쾌락을 균질화한다. 마치 모든 경험이 똑같은 몇 개의 필터를 통과한 것처럼, 마치 모든 사람이 똑같은 도전이나 곡예를 하고 촬영을 하고 공유를 하는 것처럼 쾌락을 순응적으로 만든다.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쾌락과 경험을 공개하는 플랫폼들은 시청자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우리 경험에서 불쾌한 부분을 제거할 것을 장려한다. 당신의 쾌락은 다른 모든 사람의 쾌락과 마찬가지로 앱과 플랫폼을 통해 여과되고 같은 방식으로 소비된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순간들이 잘 조정된 끊임없는 흐름으로 소비되는 것이다. 이것은 소심한 형태의 쾌락으로서 그 증가세는 너무 강렬하거나 너무 현실적이거나 너무 위험하거나 너무 통제할 수 없거나 너무 육체적이거나 너무 비순응적인 경험으로부터의 집단적인 후퇴를 암시한다. 쾌락은 디지털 형태로 더 쉽게 소화되고 공유될 수 있도록 치명성이 제거된다. 그러면 쾌락이 완전히 탈바꿈된다. 때로 쾌락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더 조작된 경험, 즉 위험보다는 통제, 우연보다는 검색, 변덕보다는 알고리즘, 개인 정보 보호보다는 편의를 우선한다. 다시 말해 쾌락의 가장 큰 변화는 쾌락의 상당 부분이 데이터화된다는 점이다.(222-223p)

 

 

베리는 경험을 보존하려는 남자의 동기를 지적한다. 그가 촬영하는 것은 "그것을 가진 후에도 여전히 그것을 갖기 위해서다. 그것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스위치를 한 번만 누르면 그것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 시는 이런 기록의 대가를 떠오르게 하는 말로 끝난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결코 거기에 있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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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예술가 코린 비오네는 이탈리아 피사를 여행하면서 관광객들이 피사의 사탑을 몇 가지 같은 각도에서 촬영하는 것을 봤다. 이후 사진 공유 사이트들을 뒤져보고 이런 의도하지 않은 시각적 동조visual conformity가 관광지에서는 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우리가 알고 있는 사진을 다시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습니다. 우리는 사진의 사진을 재생산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닐까요?"(235-236p)

 

 

비트 로트의 문제는 극복한다 해도 온라인에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남기는 유일한 기억은 메타 같은 기업의 소유가 될 것이다. 이는 경험의 기록이 경험의 보존보다 훨씬 쉽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오늘날 성장하는 아이들은 이전 세대처럼 물리적 형태로 기억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사진 앨범도, VHS 테이프도, 편지도 없다. 그들은 더 덧없는 유산, 다시 말해 말소된 인스타그램 게시물과 틱톡 휴면 계정 형태의 디지털 무덤을 남길 것이다.

그런 세상에도 기억을 위한 공간이 있을까? 사진에서부터 편지와 책에 이르기까지 기억을 보존하는 물건들이 디지털 세계로 이동하면서 우리는 검색과 연결 같은 새로운 힘을 얻었다. 하지만 잃는 것들도 있다.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들이 메타나 구글 같은 대기업 소유의 플랫폼에 있는 경우 우리는 그들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 조상이 만진 물건이나 다른 사람이 우리를 위해 만든 물건을 손에 쥐는 촉각적 경험을 잃는다. 기억의 많은 물리적 단서를 잃는다. 우리의 취약성과 한계에 대한 감각을 잃고, 그 결과 육신 있는 인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329-330p)

 

 

 

ㅡ 크리스틴 로젠, <경험의 멸종> 中,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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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7/3

 

 

영화의 고민은 '내면의 외면화' 문제로 모아집니다. '내면'이란 영화감독의 세계관, 지식, 성향, 인식, 관점, 철학, 사유, 정치성 등이 포함된 추상적 관념입니다. '외면화'란 바로 그 추상적인 관념을 소통 가능한 대상으로 구체화해서 겉으로 드러내는 작업입니다.(12p)

 

 

이런 점에서 볼 때 내면의 외면화에서 중요한 것은 '내면'도 '외면'도 아닌 '모양이 바뀌다'라는 의미의 '화(化)'인지도 모릅니다. 세계와 마주한 인간의 치열한 사유, 즉 내면도 중요합니다. 대중의 감각을 자극하는 작품, 즉 외면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피사체를 선택해서 특정한 렌즈가 달린 카메라로 찍은 후 그것을 다시 이어붙이는 지난한 '화'의 과정이 없으면 영화 감독의 내면은 결코 관객에게 전달될 수 없습니다. 영화감독이란 '화'의 전문가입니다. 영화에서 '화'란 내면과 외면을 매개하는 방법론적 고민, 즉 영화 언어입니다. 영화감독은 자신의 세계관을 주장하기 전에 그것에 부합하는 대사, 상황 설정, 이미지, 움직임 등을 쌓아가고 대중은 메시지에 공감하기 전에 영화감독이 쌓아올린 대사, 상황 설정, 이미지, 움직임 등에 반응합니다.(14p)

 

 

교수가 강의실에 도착했고 지금 그는 짜증이 나 있는 상태입니다. 이때 교수의 상황이 내면이고, 그것이 강의실의 학생들이나 스크린 밖의 관객에게 전달되는 과정이 외면'화'입니다. 이것은 영화로 찍는다면 어떨까요? 다양한 영화 언어가 가능할 것입니다. 첫 번째, "학생 여러분, 오늘 제가 너무나 짜증이 납니다"라는 식으로, 교수 역을 맡은 배우의 입을 통해 해당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 "나는 오늘 너무 짜증이 난다"라는 교수의 독백을 삽입하는 방식입니다.

(...)

다섯 번째, 얼굴을 붉히는 교수의 표정 직후 짜증이 나게 된 상황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는 것도 가능합니다.

(...)

여덟 번째, 교수는 열심히 강의를 하는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학생들 대부분이 딴청을 부리거나 엎드려 자고 있는 상황을 연출할 수도 있도 있습니다. 아홉 번째, 강의실 안의 에어컨 소음이나 강의실 밖 복도 소음을 활용해 관객의 청각을 자극하는 방식도 가능합니다. 열 번째, 교수를 포착할 때와 학생을 포착할 때의 렌즈, 앵글, 쇼트 등을 차별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열한 번째, 카메라가 강의실 끝에서부터 교수가 있는 교탁 쪽으로 조금씩 흔들리면서 다가오다가 기어이 교수의 식은땀 맺힌 목젖에 도달하는 방식도 가능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동일한 내면에 대한 다양한 외면화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다양한 외면화 방식을 통과할 때 동일한 내면은 전혀 다른 성질, 질감, 무게, 부피로 변환될 것입니다. 이 다양한 '화'의 양상 중 방법론적 고민의 강도가 높은 것은 무엇일까요? 영화의 본질과 가까운 것,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에 근접한 것은 무엇일까요? 방금 언급한 사례로 생각해볼 때 나는 뒤로 갈수록 고민의 강도가 높아지고 영화의 본질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렇게 설명하고, 설득하고, 주장할 것입니다.(16-18p)

 

 

백 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훨씬 명쾌할 때가 있습니다.

(...)

말하지 않고 표정이나 동작을 보여주며 생각과 마음을 전달하는 놀이, 즉 대사 이외의 비언어적 수단을 시각화하며 내면을 외면화하는 방식이 셔레이드입니다.

약간의 부연이 필요합니다. '셔레이드의 시각성'과 '카메라 시선의 시각성'의 구분이 애매하기 때문입니다. 영화감독의 방법론적 고민은 결국 '무엇을 어떻게 찍느냐'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여기서 셔레이드의 시각성은 '무엇'에 해당됩니다. 카메라 시선의 시각성은 '어떻게'에 해당됩니다. 셔레이드의 시각성은 카메라 시선이 아니라 피사체의 시각성에 방점을 찍습니다. '피사체의 지형도'가 셔레이드인 것입니다.

(...)

'지형도'란 무엇일까요? 피사체들의 시각적 상황입니다. 얼굴의 표정, 신체 상황, 제스처, 시선의 방향과 상태, 인물 사이의 거리, 공간의 색감과 뉘앙스, 소품의 위치와 특징 등이 어우러진 상태가 피사체의 지형도입니다.(61-62p)

 

 

 

ㅡ 박우성, <영화 언어> 中, 아모르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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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7/1

 

2024 부커상 수상작.

우주에서 지구 궤도를 열여섯 번 도는 과정을 따라가는 소설이다. 세계 지리에 관심이 없다면, 최소한 지구본이라도 옆에 두고 읽어야 지금 어느 지역을 지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매일 지구를 열여섯 번 돌며 일출과 일몰을 반복해서 본다는 것, 그 반복 속에서 시간 감각이 서서히 흐려진다는 점은 꽤 흥미로운 상상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 흥미가 전부다. 우주의 시선으로 지구를 바라보며 경이로움을 느끼거나, 인간의 걱정이 얼마나 사소한지를 깨닫는 감정은 오히려 천문학 대중교양서를 통해 더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서사나 플롯의 재미를 원한다면 읽지 말기를.

 

 

로만은 선실에 둔 기록지에 88번째 줄을 더할 것이다.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고 셀 수 있는 것으로 묶어 두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중심마저 떠내려간다. 우주는 시간을 조각낸다. 그러니 일어나면 매일을 기록하라고, 지금은 새날의 아침임을 되뇌라고 훈련 때 들었다. 이를 명심해야 한다. 지금은 새날의 아침이다.

오늘도 그렇다. 그렇지만 이 새 날에 이들은 지구를 열여섯 번 돌 것이다. 열여섯 번의 일출과 열여섯 번의 일몰, 열여섯 번의 낮과 열여섯 번의 밤을 볼 것이다. 로만은 창가 난간을 부여잡고 균형을 잡는다. 남반구 별들이 스쳐 지나간다. 당신들은 협정 세계시를 따르는 거라고, 지상 근무원들은 말한다. 이를 늘 명심해야 한다. 자주 시계를 들여다보며 마음을 정박시키고 일어날 때마다 스스로 되뇔 것. 지금은 새날의 아침이다.(12-13p)

 

 

참 이상한 일이다. 모험과 자유와 발견을 향한 꿈이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은 열망으로 이어져 지금 이곳에 이렇게 갇혀 있다는 게. 물건들을 쌌다가 풀었다가 하면서, 실험실에서 완두콩 싹과 목화 뿌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어디로도 가지 않지만 돌고 또 돌면서 나날을 보낸다. 변함없이 오래된 생각도 곁을 맴돈다.(35p)

 

 

달 착륙 날. 어릴 적 치에는 바닷가에 서 있는 엄마가 달에서 벌어지는 일을 올려다보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믿었다. 엄마가 맨눈으로 그걸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엄마가 어떤 식으로든 그 사건과 관련이 있는 줄 알았다. 이번 임무를 맡아 떠나오기 전 엄마에게 이 사진을 건네받지 않았더라면 치에는 그런 생각을 까먹고 살았을 것이다. 새삼 그런 생각의 무게와 과거의 힘을 느꼈고, 과거가 얼마나 은밀하게 미래를 만드는가를 실감했다. 돌이켜 보면 치에가 처음으로 우주를 생각했던 계기가 바로 이 사진이었다.(104-105p)

 

 

얼마큼 밀폐 공간을 견딜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일주일 동안 깊은 동굴 훈련장에서 극도로 적은 식량을 가지고 네 사람과 함께 지내며 몸보다 아주 살짝 큰 구멍들을 몇 시간씩 기어 지나다니고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사람들조차 패닉에 빠지는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반 시간 후의 일은 생각도 하지 않게 된다. 하물며 미래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은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 우주복을 입고 거동도 힘든데 아프게 쓸리고, 간지러운 곳을 몇 시간 동안이나 긁을 수 없고, 몸이 따라 주지 않고, 벗어날 수 없는 곳에 파묻힌 듯하고, 관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상태에 적응하려고 애쓰다 보면 바로 다음 호흡에만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산소를 너무 많이 쓰지 않도록 얕게만 호흡하되 너무 얕으면 안 된다. 그다음 호흡도 신경 쓸 처지가 아니다. 오직 이번 호흡에만 집중한다. 달이나 핑크빛으로 물든 화성을 볼 때도 인류의 미래는 생각나지 않는다. 당신이나 당신이 아는 사람이 운 좋게 저곳까지 갈 수 있는 논리적 확률을 생각할 따름이다. 이기적이고 집요하며 뻔뻔한 자신의 인간성을 생각해 본다. 발사대까지 오르려고 수천 명을 밀쳐 낸 자신에 대해. 자기 의지대로 밀고 나가면서 그 길에 있는 모든 걸 태워 버리겠다는 신념이야말로 당신에게 우위를 주지 않았던가?(181-182p)

 

 

우주력이 아직 대부분 일어나지 않은 시간까지 다 아우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앞으로 두 달 안에 구슬 같은 근사한 지구에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다. 생명체의 관점에서 희망찬 일은 하나도 없다. 떠도는 별 하나가 태양계 전체와 지구를 뒤흔들 수도, 운석 충돌로 대멸종이 벌어질 수도, 지구의 자전축 기울기가 커질 수도, 궤도가 휘고 밀려나 몇몇 행성이 쫓겨날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대략 넉 달 후, 그러니까 50억 년 후에는 연료를 다 소진한 태양이 적색 왜성으로 팽창해 결국 수성과 금성을 집어삼키리라는 것이다. 지구는 그때까지 살아남는다고 쳐도 바짝 시들고 건조해져 바다가 끓다 메말라 버릴 것이고, 그렇게 백색 왜성 흑색 왜성 죽어 가는 태양이 있는 지긋지긋한 궤도에 갇힌 잉걸불로 남을 것이다. 그러다 끝내 궤도가 쇠하고 태양이 우리까지 먹어 치우면, 쇼는 모두 끝이다.

이것은 국지적인 장면에 불과하다. 작은 소동, 미니드라마다. 우리는 충돌하고 부유하는 우주에 갇혀 있다. 최초의 빅뱅으로 우주가 쪼개지며 길고 느리게 퍼져 나간 잔물결 속에 우리가 있다. 가까이 있는 은하들은 서로 충돌하고, 남은 은하들은 서로를 피해 흩어진다. 그렇게 홀로 떨어지고 나면 스스로 팽창하는 공간, 저절로 탄생하는 공허만이 남는다. 그때도 존재할 우주력에서 인간이 무엇을 했고 존재했는가는 1년 중 딱 하루, 찰나에 깜빡였다 사라지는 빛이어서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무상하게 피어난 삶을 살고 있다. 광란의 존재가 딱 한 번 손가락을 튕기면 모두 끝나리란 것도 안다. 여름에 터져 나오는 이 생명은 새싹보다 폭탄에 가깝다. 이 풍요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200-201p)

 

 

 

ㅡ 서맨사 하비, <궤도> 中,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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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27

 

생각보다 별 재미가 없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그들이 구축하는 네트워크가 돌아가는 방식이 크게 흥미롭지 않네.

 

 

호수성을 기반으로 조합이 운영된다고 가정했을 때, 조합 활동에 공헌하지 않는 사람도 지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험도가 높은 범죄 행위에 손댄 동료가 어려움에 빠졌다고 도울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자업자득 아닌가?

카라마를 비롯한 조합원들과 생활하다 보면 조합 활동에 대한 실질적인 공헌도, 특정한 어려움, 궁지에 빠지게 된 '원인'을 거의 불문하고, 마침 홍콩에 있는 그 타자가 처한 상황(결과)에만 응답하여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지원해주는 태도가 폭넓게 관찰된다. 이는 죽음이라는 특별한 사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또한 조합 활동과 타자에 대한 세세한 규칙이나 규범을 가능한 한 만들지 않는다/애매한 채로 둔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얘기한 사례가 보여주듯이 이들의 집회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데, 최종적으로는 '여러 사정이 있으니 세세하게 따지지 말자'는 결론에 도달한다ㅡ무임승차자 문제도, 기부금을 상황에 따라 달리 받자는 제안도 다시 문제 삼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데는 몇 가지 배경이 있다. 첫째, 홍콩조합 집회에서 한 여성이 발언했듯이 기본적으로 이들은 조언을 요청받지 않는 이상 타자의 비즈니스와 행위에 끼어들지 않기에 그 사람의 '사정'을 자신이 속속들이 알 수 없음을 이해하고 있다.

(...)

나는 연구자로서 이들의 생활사나 비즈니스에 대해 묻거나 들으면서 조사를 해왔는데, 대상자가 어떤 일을 태연히 설명해주더라도 주위 사람들이 내게 "그에게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을지 모르니 놔둬"라고 충고한 적이 있다. "그 이상은 알려고 하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좋지 않겠어?"라는 조언도 받곤 했다. 타자의 복잡한 사정은 알 수 없는/알고 싶지 않은 것이기에 타자의 '자기 책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란 어렵다.

(...)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들은 늘 "아무도 믿지 않아"라고 단언한다. 이는 '본성',드러내놓고 할 수 없는 사업'을 몰라서 그런다기보다 누구나 처한 상황에 따라 좋은 방향으로도, 나쁜 방향으로도 변모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인다. 카라마와 동료들은 "저 사람은 지금 잘나가니까 돈을 빌려줘도 괜찮아", "저 사람은 지금 수입한 천연석 품질이 나빠서 크게 손해를 보고 있으니까 조금 주의하는 게 좋아", "저 사람의 연인도 함께한다면 그는 좋은 녀석이니까 놀러가"라고 '지금'의 상황에 한정하는 형태로만 타자를 평가한다. 언뜻 냉정하게도 보이지만 이는 일종의 관용과도 표리일체다. 즉, '페르소나'와 그 뒷면에는 '민낯'이 있는데 '민낯'을 모르니까 신뢰할 수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책임을 돌릴 수 있는 일관된 불변의 자기 같은 건 없다고 인식하고 있는 듯 하다.

세 번쨰 배경은 난민으로 거주하지 않는 조합원들은 유동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을 오가기 때문에 구성원 사이의 엄밀한 호수성을 고려/계산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점이다.

(...)

말하자면 이들은 '서로 돕는 인간을 구별·평가하는 기준을 명확화하기'와 '상호 부조의 기준·규칙을 명확화하기', 어느 쪽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합 운영과 조합 내 상호 부조 면에서, 엄밀한 기준과 약속에 의해 '서로 무리하거나 스트레스를 크게 받는 것'을 되도록 회피하기를 규칙으로 삼고 있다고 보인다.(88-93p)

 

 

즉 카라마 같은 브로커들은, 홍콩 지리 및 업자의 방식과 수법에 익숙하지 않은 아프리카계 고객과 아프리카계 고객의 방식과 수법에 익숙하지 않아 신뢰할 만한 고객을 가려낼 수가 없는 업자 사이에서 '신용'을 보증하고 '수수료'나 '마진'을 챙기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고용되지 않고 대등한 파트너로서 자영업을 하는' 브로커들의 비즈니스는 양자 사이의 '신용 결여'로 인해 성립되며, 아프리카계 고객과 홍콩의 업자가 직접 거래를 거듭하여 신용을 수립하면 필요 없어지는, 혹은 자율성을 포기하고 어느 한쪽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가 되고 마는 불안정성을 지니고 있다.(116p)

 

 

카라마와 브로커들이 가장 선호하는 다섯 번째 방법은 비공식 송금업자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송금업자들은 휴대폰으로 매우 적은 수수료, 때로는 무료로 송금을 대행한다.

(...)

바간다의 송금 시스템은 다음과 같다. 카라마가 모국에서 사업을 운영하는 아내에게 100달러를 보내고 싶을 때, 카라마는 100달러와 50홍콩달러를 바간다에게 건넨다. 바간다에게는 동아프리카의 우간다, 탄자니아, 케냐에 비즈니스 파트너가 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휴대폰의 문자메시지 등으로 탄자니아의 파트너에게 카라마 아내의 전화번호와 100달러라는 정보를 보낸다. 메시지를 수신한 파트너는 즉시 엠-페사나 티고-페사라는, 탄자니아 통신 회사들의 모바일 계좌를 이용한 송금 서비스로 카라마 아내의 계좌에 전자화폐를 송금한다. 그 뒤 아내에게서 무사히 송금받았다는 연락이 온다. 이때 걸리는 시간은 불과 15분 정도다. 아내가 굳이 웨스턴유니온을 이용할 수 있는 은행 등으로 갈 필요도 없기 때문에 속도가 매우 빠르다.(153-154p)

 

 

 

ㅡ 오가와 사야카,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中, 갈라파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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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26

 

 

내가 프랑스어로 말한 지는 30년도 더 되었고, 글을 쓴 지는 20년도 더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이 언어를 알지 못한다. 나는 프랑스어로 말할 때 실수를 하고, 사전들의 도움을 빈번히 받아야만 프랑스어로 글을 쓸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프랑스어 또한 적의 언어라고 부른다. 내가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이 가장 심각한 이유다. 이 언어가 나의 모국어를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52-53p)

 

 

나의 어린 딸은 아이 아빠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고 나는 두 개의 가방을 들고 있다. 둘 중 한 가방에는 젖병과 기저귀, 아기에게 갈아입힐 옷이 있고 다른 가방에는 사전들이 들어 있다.(69p)

 

 

무엇보다,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할 일은 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쓰는 것을 계속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누구의 흥미를 끌지 못할 때조차. 그것이 영원토록 그 누구의 흥미도 끌지 못할 것이라는 기분이 들 때조차. 원고가 서랍 안에 쌓이고, 우리가 다른 것들을 쓰다 그 쌓인 원고들을 잊어버리게 될 때조차.(97p)

 

 

이제 와 생각해보면 당시 나를 즐겁게 했던 것은 종이에 적힌 활자 그 자체만은 이미 아니었던 것 같다. 작가가 적은 문장들이 나에게 환기시키는 감각, 나는 그것에 일찌감치 매료되었다. 문장은 작가의 것이었지만 감각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으니까. 조용한 도서실의 한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노라면 활자들은 일렁이는 물결처럼 내 안을 흔들어놓았고 때로는 파도처럼 밀려와 나의 조그만 세계를 여지없이 부수었다. 책을 덮고 다시 교실로 돌아가기 위해 복도로 나오면 세계는 이전과 완벽히 달라져 있었는데, 그것은 현기증 나는 경험이었지만 나는 그런 감각을 어렴풋이 사랑했다.(116-117p)

 

 

1935년 10월 30일 헝가리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그녀의 조국이 처음에는 독일, 나중에는 소련에 의해 차례로 침략받는 것을 목격하며 성장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여러 언어들이 교차하는 국경 마을에 살았던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녀의 글쓰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1956년에 일어나는데, 헝가리에서는 그해 자유를 갈구하던 시민들의 혁명이 소련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는 일이 벌어진다. 그 결과 스물한 살의 젊은 엄마였던 아고타 크리스토프를 포함해 20만 명에 달하는 헝가리인들이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세상의 모든 난민들이 그렇겠지만 그녀의 이주 역시 자발적인 선택은 아니었고 정치적으로 연루된 남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감행한 월경의 결과였다. 이 같은 사실은 크리스토프의 글쓰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점이다.(122-123p)

 

 

 

ㅡ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맹> 中,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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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24

 

 

제가 이상하다고 하는 이유는 '위험성'으로 인해 인생의 갈래가 수없이 나뉘기 때문입니다. 위험성에 대한 경고를 들은 환자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몇 가지 길이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각각의 길에는 화살표와 함꼐 도착지가 쓰여 있는데, 환자는 위험성을 근거로 좋지 않은 길을 피해 '평범한 인생'으로 향하는 길을 골라서 신중히 나아갑니다.

그렇지만 실은 여러 길 중 어디로 들어선들 화살표가 가리키는 도착지에 다다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각각의 길이 외길일 리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길이든 한번 들어서버리면 다시 수많은 길이 나타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각각의 길이 어떤지 미리 알 수 없으며 선택과 진행을 할 때마다 갈림길의 개수와 방향이 점점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

지금까지 마주했던 갈림길 중 다른 길을 골랐다면 우리가 함께 일할 가능성은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 길 중 하나로 들어서는 것은 외길을 선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길로 들어서는 순간 또다시 새로운 가능성을 무수히 마주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특정한 길로 들어서는 단계에 다시 여러 갈림길이 생겨나며, 갈림길마다 애초에 그 사람에게 있었던 인생의 온갖 가능성이 통째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갈림길 중 하나로 들어서는 것은 외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롭게 생겨난 수많은 가능성들을 만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능성이란 계속 나뉘는 길 중에서 도착지를 알 수 있는 한 줄기 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가능성이란 항상 쉬지 않고 변화하는 전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처럼 변화하는 가능성 중에는 나쁜 일이 벌어질 가능성 또한 숱하게 존재합니다.(30-31p)

 

 

의료와 복지의 세계에서는 늘 다 같이 '지원'을 합창합니다. "올바른 정보에 가초하여 환자의 의사를 존중하며 지원하자." 모두가 이렇게 말하지요. 당연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올바른 정보'란 객관적으로 일반화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근거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합창에 무조건 찬동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객관적 데이터가 환자에게 전해질 때는 홀몸이 아닙니다. 객관적 데이터는 구체적인 문맥 속에 포함되어서 의료자의 입에서 구체적인 말로 이야기가 되어 전해집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환자가 듣는 이야기에는 미래에 대한 의료인의 예상과 더불어 그 예상 속에서 환자가 취해야 하는 이상적인 행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다시 말해 환자는 '이 앞에 기다리는 미래가 이러하니, 이 길로 나아가겠다.' 하며 운명론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운명론적으로 바라보는 미래는 환자의 의사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의료인의 의도, 나아가 의료인들이 의지하는 근거를 작성한 사람의 의도까지 포함된 융합물입니다. 의료인이 존중하겠다고 하는 '환자의 의사'에는 의료인의 의사도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42-43p)

 

 

'이런 위험한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라고 예측한 것 때문에 현재의 가능성이 좁아지는 데에서 느낀 위화감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공원 놀이기구가 점점 얌전해지면서 절대로 다치지 않을 듯한 미끄럼틀만 놓이는 현상과 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45p)

 

 

이런 전제 위에 더글러스는 '우리는 언제 확률론적인 판단을 포기하는가?'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경험에 기초한 판단이 불가능할 때'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시 강수확률 30퍼센트로 돌아가면 우리는 그 정보가 얼마나 정확할지, 만약 비가 내린다면 어떤 상황이 될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약을 먹지 않으면 뇌경색에 걸릴 확률이 약을 먹을 사람보다 5배 높아진다는 말을 들으면 어떨까요? 어떤 상황일지 제대로 실감 나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가 없습니다.

(...)

그런 경험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

더글러스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판단 기준을 바꿉니다. 경험에 기초한 확률론이 아니라 내가 누구를 신뢰하는지를 기준으로 삼지요. 내가 믿는 사람이 대신 결정해주길 바랍니다.(67-68p)

 

 

물론 벌어진 일의 원인을 파고들고, 앞으로 찾아올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다만 시간이 흘러가며 수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이상 다양한 원인이 다음 순간 어떻게 얽힐지, 그리고 그 순간으로 다다르는 여러 흐름이 어떻게 수렴될지를 무언가가 완전히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매 순간 갖가지 원인이 우연히 겹쳐서 '지금'이 태어나고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미래가 펼쳐지는 식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성립되는 것 아닐까요. 구키 슈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지금'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우연이다. 우연은 '현실의 생산점'이다.

구키 슈조가 합리성을 추구해봤짜 쓸모없다든가 필연성은 무의미하다고 말한 건 아닙니다. 그가 「우연성의 문제」에서 필연성부터 분석했듯이, 지성을 지니고 합리적으로 살아가려 하는 우리는 최선을 다해 필연성을 찾습니다. 그럼으로써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변해가는 세계를 통제하려 합니다. 인생이 안정되길 바랍니다. 그렇게 인간은 진보하며 사회를 일군 것입니다. 짓궂다고 할지 재미있다고 할지, 합리성에 기초한 지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인간은 비로소 우연성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원인을 쫓으며 일정한 흐름을 탐구했기 때문에 그런 흐름에서 벗어난 것을 찾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요?(103-104p)

 

 

정돈되어서 놀이라고는 끼어들 틈이 없는 말들. 분명히 대화인데, 점점 글말과 가까워지는 것이 바로 병에 대한 대화입니다. 병에 대한 대화는 일관적이며 여분이 배제되기에 움직일 빈틈이 거의 없습니다. 즉 화제가 전환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대화에서 저는 100퍼센트환자로서 이야기하게 되고 듣는 이도 비환자라는 역할에 고정됩니다. 그런 대화는 같은 평면에서 서로 말을 주고받는 캐치볼이라기보다 정해진 역할(심지어 '환자와 그 외'로 나뉘어 역할 배분이 압도적으로 불균형합니다)을 수행하며 공을 꽉 쥔 채 실수 없이 상대에게 건네줄 뿐인 행위입니다.

병에 대해 대화할 때 신중한 자세는 꽤나 사람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는 100퍼센트 환자는 되고 싶지 않은 인간입니다. 남이 만든 스토리에 휘말리기도 싫고요.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병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때ㅡ즉 일상적인 대화ㅡ는 병에 걸렸다는 사실 자체를 배제하고 있습니다.

(...)

예전에는 병과 일상이 잘 구분되었습니다. 아직 증상이 진행되기 전이라 웬만큼 무리할 수 있었지요.

(...)

하지만 병세가 악화되면서 병과 일상이 충돌할 때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병이 저의 일상으로 야금야금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친구와 즐겁게 식사 약속을 잡을 때도 고민하곤 합니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 구역질이 날 수 있는 것, 이따금씩 통증에 시달리는 것 등을 미리 알려야 할까 하고요.

(...)

일상이 병으로 뒤덮일 것 같으면 저는 당황합니다. 어떻게든 대화를 다시 일상으로 돌리려고 하지만, 이미 환자라는 역할이 고정되어서 이야기를 돌릴 여유가 없습니다.

(...)

그곳에 병 앞에서 우연을 받아들이며 지금에 몸을 내던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잔뜩 경직된 인간이 있을 뿐이지요.(152-154p)

 

 

어느 특정한 시점에 달라지 것이냐, 대화 중에 커다란 전환점이 있었느냐, 아니면 좀더 잘하려고 한 단계 뛰어넘은 것이냐, 하고 물어본다면 그런 대단한 일은 없었습니다. 느긋하게 수다를 떨다 보니 자연스레 '어중간한 환자'로 자리를 잡았지요. 사소한 화제 전환과 변화가 거듭되는 과정에서 미처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

어떤 의미로는 착실한 미야노 마키코가 극적인 변화에 뛰어드는 이미지를 그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변화란 그렇게 극적으로 벌어지지 않고, 훨씬 뭉근하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는지도 모릅니다. 저라는 사람 역시 매사에 분명하지 않고 상대방과 관계 속에서 시시때때로 변하며 그때마다 뒤늦게 깨닫는, 훨씬 애매한 존재가 아닐까요.

본래 일상생활이란 다양한 상태가 얼룩덜룩하게 섞인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그 얼룩무늬의 이쪽저쪽을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일상은 느릿느릿 나아가지요. 그런데 병에 걸린 사람의 일상은 무슨 수를 써도 '환자'라는 상태가 얼룩무늬를 정리 해버립니다. 그 결과 역할과 역할이 서로 충돌한 끝에 그저 침묵하게 되어버리죠. 저와 파트너가 할 말을 잃고 옴짝달싹하지 못했듯이요.

멋있게 살아갈 수 없는(굳이 멋있게 살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암 환자의 일상에 중요한 것은 바로 '느릿느릿'이며, 뭉근한 변화라고 생각합니다.(157-158p)

 

 

본래 운동으로 그려지던 궤적이 점과 점을 연결할 뿐인 무미건조한 직선, 다시 말해 연결선이 된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좀 난해하지만 도보 여행과 수송을 예로 들면 한층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잉골드에 따르면 최종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도보 여행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세계를 지각하고 그 세계와 친밀감을 나누며 통과해가는 일종의 운동입니다. 그렇게 운동함으로써 궤적(선), 즉 발자취가 새겨진다고 하지요. 그런데 잉골드는 도보 여행이 수송으로 변하는 순간, 운동이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수송이란 출발지와 도착지라는 점과 점을 직선으로 연결하여 화물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고 횡단시키는 행위입니다. 잉골드는 수송과 도보 여행의 차이점을 다음처럼 설명했습니다.

 

수송과 도보 여행은 기계적 수단을 사용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도보 여행에서 보이는 이동과 지각의 친밀한 관계가 사라지는지에 따라 구별한다. 수송되는 여행자는 승객이 되고, 자신은 움직이지 않은 채 장소에서 또 다른 장소로 움직여진다. 수송되는 동안 승객에게 다가오는 풍경, 소리, 감각은 승객을 옮기는 움직임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잉골드가 지적했듯이 걸어서 이동해도 수송이 될 때가 있습니다. 가령 구글 맵을 보며 목적지까지 가는 이동과 한가할 때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걷는 이동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의 경우, 나는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를 횡단합니다. 이동하는 도중 내 곁에 있었을 풍경은 나와 친밀감을 나눌 틈도 없이 배경으로 물러나고, 나는 그저 도착지를 향해 직선으로 이동하지요. 후자의 경우, 나는 경치와 분위기를 느끼면서 거리를 통과합니다. 그리고 마치 모험을 하듯이 저 앞에는 뭐가 있을까 설레는 마음을 안고 나를 둘러싼 거리와 함께 선을 그립니다.(208-209p)

 

 

ㅡ 미야노 마키코 외,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中, 다다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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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24

 

 

저는 이런 게 바로 호러 영화라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고 깨닫는 순간의 공포 또는 '아무래도 이 세상은 이제껏 내가 믿어온 것과는 전혀 다른 듯하다'고 깨닫는 순간 느끼게 되는 도망칠 데를 잃은 암담한 기분 같은 인간의 감정을 그리는 게 호러라고 생각합니다.

(...)

첫 번째 <에이리언>에서 에이리언과 맞닥뜨린 인간은 너무나 겁에 질린 나머지 굳어 버리고는 도망치는 것도 잊은 채 그저 멍하니 멈춰서고 맙니다. 그러자 에이리언이 천천히 입을 벌리고 느긋하게 이 인간을 삼켜 버리지요. 이 천천히 입을 벌려가는 동안이 무섭습니다. 바로 이게 호러 영화의 연출이지요. 이때 먹이가 된 인간은 아까 말한 '이 세상에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있고, '이 세상은 자신이 믿어온 것과는 다름'을 질릴 정도로 실감할 게 분명합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 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겠지요.(19p)

 

 

여러분도 보면서 그런 점이 궁금해지지 않던가요? 이 화면에 비치고 있는 것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요? 이 영상을 보고 있자면 그만 저런 질문들이 떠올라 버립니다. 그러니까 이 <공장의 출구>라는 작품은 세계 최초로 화면에는 비치지 않는 프레임 바깥으로까지 보는 이의 상상을 자극하는 영상이란 얘기지요. 이는 <춤추는 여자>나 <권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획기적인 진전이자, 영상이 영화로 진화하는 역사적 순간이기도 합니다.

이제 제가 말하고 있는 영화란 무엇인지 조금 아시겠나요? 한마디로 말해, 화면에는 비치지 않는 바깥이 영화에는 있다는 얘깁니다.

(...)

영화를 만드는 건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얀 노트에 펜으로 글을 쓰는 행위와도 전혀 다르지요. 영화를 만든다는 건 오려내는 겁니다. 눈 앞에 있는 것을 네모난 프레임으로 오려내는 거죠. 이게 영화 제작입니다. 오려낸 것 바깥쪽에는 당연히 화면에는 비치지 않는 것들이 잔뜩, 무한하게 펼쳐져 있기 마련이지요.(85-86p)

 

 

한 가지 덧붙여 두자면, 이 <공장의 출구>라고 하는 영화는 그저 공장 출구 앞에 카메라를 놓고 사람들이 나오는 모습을 우연히 촬영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움직임 전부가 예정대로 연출된 겁니다. 일종의 픽션인 셈이지요.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이제 아시겠지요. 다큐멘터리든 픽션이든 영화의 본질은 변함이 없습니다.

한 번 더 말씀드리지요. 세계로부터 공간과 시간을 오려낸 게 영화입니다. 세계의 일부분이지요.

(...)

물로 우리가 응시하는 건 화면에 비치고 있는 무언가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화면에 비치지 않는 것, 비치지 않는 시간을 상상하지요. 그게 영화입니다.(88-89p)

 

 

이어서 훨씬 까다롭고 각본 작업을 하던 시점에서도 대단히 망설였던 부분에 관해 말씀드리지요. 영화 전반부의 경찰서 시체 안치소 장면입니다. 아이카와 쇼가 시신을 인수하러 온 보호관찰사 미야지(시미즈 타이케이)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다소 뒤늦지만 미야지도 아이카와 쇼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장면이지요. 먼저 아이카와 쇼가 미야지와 재회한 순간, 이 남자가 옛날에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원수임을 눈치채는 순간이 있었지요. 이건 그렇다 치고, 그 직후에 미야지도 아이카와 쇼가 예전에 자신이 죽인 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임을 깨닫게 되는데, 이건 어떤 이유에서 그런 걸까요? 아이카와의 얼굴은 이미 소년 시절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나저나 그럼 그 뒤에 아이카와는 자신이 눈치채고 있다는 걸 이미 미야지에게도 들켰음을 깨닫는 걸까요? 깨닫는다고 한다면, 언제 어떤 식으로 깨닫게 되는 걸까요? 혹시 미야지는 자신이 아이카와의 존재를 눈치챈 걸 아이카와 본인에게도 들켰음을 깨닫는 걸까요?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면, 언제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된 걸까요?

(...)

지금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혼란스러워집니다만, 어쨌든 우선은 이 둘이 얼마만큼 눈치채고 있느냐에 대한 설명을 각본상 어떻게 설정할지를 두고 굉장히 고민했습니다. 지금은 잊었지만, 그리고 나서 최종적으로는 어느 패턴인가의 설정으로 정하고, 그 뒤에 이어지는 둘의 관계를 거의 억지로 밀고 나갔지요. 그래서 결과는·····. 글쎄요. 완성된 영화를 봤더니, 지금 장황하게 설명한 설정 같은 건 어찌되건 하등 상관없었음을 깨달은 겁니다.

'아이카와 쇼와 미야지는 시체 안치소에서 슬쩍 얼굴을 마주하고, 두 사람의 얼굴 표정에 무언가 기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그저 이렇게만 해 두고, 더 이상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 둘이 순간적으로 서로가 서로의 정체를 눈치챘음을 깨달았다라고만 설정해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둘의 관계는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얼마만큼이나 눈치챘느냐와는 관계없이, 자유자재로 어떻게든 될 대로 되고 관객도 이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영화를 완성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은 거죠.

이게 영화의 불가사의겠지요. 인연이 있는 두 사람이 우연히 재회하여 슬쩍 얼굴을 마주하고 긴장한 표정을 드러낸 순간, 영화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이야기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조리정연함 같은 것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영화 특유의 비현실, 비논리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되는 듯합니다. 이 불가사의한 세계에서는 두 남자가 얼굴을 마주하기만 했는데도 뭔지 모를 초능력에 의해 자유자재로 순식간에 뭐든 깨달을 수가 있고, 그 이후의 이야기 속에서도 서로의 과거 인연을 적당히 알거나 모르거나 하며 자유자재로 어떻게든 될 대로 됩니다. 이렇듯 대단히 불가사의한 비현실의 표현이 영화였단 겁니다.

그리고 이 비현실은 각본으로 쓰려면 대단히 어렵지만 실제로 촬영하는 건 아주 간단하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98-100p)

 

 

'그치만 이상하잖아'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이때 아이카와는 납치된 아내를 구출하러 온 거니까, 아무리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고 한들 보통은 '아내는 어디 있지? 장소를 말해'라고 말하겠지요. 그런데 '이미 죽었겠군'이라니, 이게 무슨 소립니까? 아내가 이미 죽었다면 구출하러 온 의미도 없다는 게 되잖아요.

이에 각본을 쓴 다카하시 히로시가 열띤 변명을 펼쳤지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건 복수 이야기야. 그러니까 아이카와 쇼는 어느 시점부터 복수를 개시하지 않으면 안돼. 그게 바로 이 지점이지. 여길 놓치면, 그는 아내의 죽음을 확인하고, 장례식 등을 올리고, 주위 사람들의 위로를 받고, 슬픔에 잠겼다가 이윽고 점점 복수심이 싹트기 시작한다·····라는 대단히 귀찮은 수순을 밟아가야 한다고. 그게 현실이라고 해도, 그 설명만 하다가 벌써 영화는 끝나 있을걸. 그러니까,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하다면 아내의 시체를 발견하기 훨씬 전부터 아이카와는 복수를 개시하지 않으면 안 돼.(101p)

 

 

뤼미에르 이전에도 움직이는 영상은 이미 다수 존재하고 있었지요. 그저 여자가 춤추고 있는 것이나 에디슨이 발명한 키네토스코프를 통해 권투 장면을 포착한 것 등, 움직이는 사진을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었지요.

(...)

그저 화면에 비치는 무엇이 아니라 왠지 이쪽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화면에 비치지 않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무언가가 태어났지요. 이는 단순히 움직이는 사진으로부터는 상상도 할 수 없던 획기적인 전진이자, 영상이 영화로 진화하는 역사적 순간이기도 했습니다.(189p)

 

 

그렇다면 한 쇼트가 연속되기만 한다면, 그 연속되는 시간이야말로 쭉 지속되는 시간 즉 그야말로 진짜 리얼한 현실의 시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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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을 거치지 않은 하나의 쇼트가 어디까지 중단없이 계속되는가'가 최근 제가 영화에 관해 생각하는 가장 큰 테마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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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적어도 '이 쇼트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서 끝날 것이다'라고 정하는 사람이니, '준비, 스타트'라고 말을 꺼냈다가 어느 시점에서 '컷!'이라고 말합니다. 감독이 거기까지는 지속시키겠다는 의사를 갖고 있었다는 얘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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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이'라고 말한 이상 최종적으로는 어찌 될지 몰라도 일단 그 쇼트는 사용하기로 정해지고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이게 촬영이라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완성된 영화에서 쇼트의 지속을 유심히 보면 바로 거기서 감독이 뭘 하고 싶었는지 제법 분명히 읽힙니다. 또 이는 편집이라는 어딘가 냉혹하고 사기 같은 작업에 좌우되는 게 아니지요. 게다가 보통 각본에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는 연속 촬영할 것'같은 말은 한 마디도 적혀 있지 않지요. 그러니 이는 감독 개인의 결정권에 맡겨져 있는 부분이라 봐도 될 겁니다.(202-203p)

 

 

개인적으로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고 마는 21세기 영화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 듯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외측' 혹은 '외부'가 아닐까 하는데,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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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시에 드러나는 외측', 바로 이게 21세기 영화에 가끔씩, 아니 점점 더 분명히 짙게 감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걸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라는 장소로부터 외부로 향하는 움직임 혹은 눈에 보이는 안쪽과 아직 눈에 보이지는 않는 바깥쪽의 관계를 다룬 영화, 요즘 제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게 그런 영화들뿐이군요.(238-239p)

 

 

 

ㅡ 구로사와 기요시, <구로사와 기요시, 21세기의 영화를 말한다> 中, 미디어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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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23

 

 

자전적 이야기를 쓰는 작가는 주체와 관련하여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상상한다. 이 연관성은 밀접하다. 사실, 결정적이다. 작가의 민낯이라는 원료로 만들어지는 서술자는 이야기에 꼭 필요한 존재이다. 이 서술자가 페르소나가 된다. 그의 어조, 그의 시각, 그가 구사하는 문장의 리듬, 관찰하거나 무시할 대상은 주제에 맞게 선택된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가장 크게 보여야 하는 것은 서술자ㅡ혹은 페르소나ㅡ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민낯의 자아에서 페르소나를 빚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소설이나 시는 창조된 인물이나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작가의 대리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작가가 직접 언급할 수는 없지만 핍진하게 전해야 하는 모든 것ㅡ부적절한 갈망, 방어적인 당혹감, 반사회적인 욕망ㅡ을 대리인에게 쏟아부을 수 있다. 반면, 논픽션의 페르소나는 대리인이 아니다. 논픽션 작가는 소설가나 시인이라면 거리를 둘 수 있는 변명과 낭패감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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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어렵다 해도 에세이나 회고록을 쓸 때는 그런 페르소나를 반드시 만들어내야 한다. 이는 조명 도구나 마찬가지다. 이게 없으면, 주제도 이야기도 있을 수 없다. 회고록이나 에세이를 쓰는 작가는 그런 페르소나를 빚어내기 위해 소설가나 시인처럼 자기 성찰이라는 견습 기간을 거치며, 왜 말하는가, 누가 말하는가를 동시에 알아내야 하는 이중고를 겪는다.(11-12p)

 

 

모든 문학 작품에는 상황과 이야기가 있다. 상황이란 맥락이나 주변 환경, (가끔은) 플롯을 의미하며, 이야기란 작가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는 감정적 경험, 혹은 통찰과 지혜, 혹은 작가가 전하고픈 말이다. 「아메리카의 비극」에서 상황은 작가인 시어도어 드라이저가 살던 시절의 미국, 이야기는 출세욕의 병적인 성질이다. 에드먼드 고스의 회고록 「아버지와 아들」의 경우, 상황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된 시대의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영국이며, 이야기는 친밀한 관계의 배신을 통한 정체성 찾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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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의 주제는 항상 자기 인식이지만, 진공 상태에서의 자기 인식이란 있을 수 없다. 시인이나 소설가처럼 회고록 작가도 세상과 교류해야 한다. 교류는 경험을 낳고, 경험은 지혜를 낳으며, 결국 중요한 것은 이 지혜ㅡ더 정확히 말하면, 지혜를 향한 정진ㅡ이기 때문이다. 어느 훌륭한 작문 교사는 이런 말을 했다. "좋은 글은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지면 위에서 살아 숨 쉬며, 작가가 무언가를 발견해가는 여정에 있음을 독자에게 납득시킨다."(18-19p)

 

 

오웰은 그가 들려주고픈 이야기를 혼자서도 전할 수 있는 이 페르소나를 정치 상황 속에 불쑥 끼워 넣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아름답지 못해서, 오웰 자신은 옹졸한 불안감에 쉽게 휘둘리던 남자였다. 비열한 행동이나 말을 하기도 했다. 수정주의적 관점의 전기들을 보면 그는 성차별주의자이자 지독한 반공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밀고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가 논픽션에서 창조해낸 페르소나ㅡ민주적 품위의 정수를 보여주는 페르소나ㅡ는 자신으로부터 뽑아낸 뒤 작가로서의 목적에 맞추어 빚어낸 진실한 존재였다. 이 조지 오웰은 경험과 관점, 그리고 지면 가득 풍기는 개성이 성공리에 합쳐진 결과물이다. 그의 존재감이 워낙 강하다 보니 우리는 서술자를 아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렇듯 우리가 서술자를 알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은, 신뢰할 수 있는 서술자의 능력이다.(23-24p)

 

 

세상 곳곳에서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현상은 자신의 삶이 의미 있다는 요즘의 보편적 믿음에서 비롯된다. 세계 도처의 인권 운동과 일반적인 심리 치료 문화가 이런 믿음을 부추기는데 크게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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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회고록은 증언도 우화도 분석적 기록도 아니다. 회고록이란, 삶이라는 원료로부터 이야기를 끌어내 경험을 구체화하고, 사건을 변형하고, 지혜를 전달하는 자아라는 개념에 의해 통제되는 일관된 서사적 산문이다. 회고록 속의 진실은 실제 사건의 나열로 얻어지지 않는다. 작가가 당면한 경험을 마주하려 열심히 노력하고 있음을 독자가 믿게 될 때 진실이 얻어진다. 작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그 일을 큰 틀에서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글을 짓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프리쳇은 회고록에 대해 "중요한 건 필력이다. 인생을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칭찬받을 수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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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적인 회고록이 명확히 던지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하는 것이다. 삶에서 곧장 건져낸 이 이야기의 의미를 결정하는 '나'는 정확히 누구인가? 회고록 작가는 이 질문에 마주해야 한다. 답이 아닌 깊이 있는 탐구로써.(107-108p)

 

 

 

 

ㅡ 비비언 고닉, <상황과 이야기> 中, 마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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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23

 

 

쇼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이 책으로 쇼트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추천하지 않는다. 제법 어렵다. 다른 개론서로 대충이나마 쇼트의 개념을 잡고 이 책을 훑어 보는 게 나을 듯. 아니 솔직히 요즘은 영화 이론에 대한 좋은 책 많은데 굳이 이 책까지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네.

 

 

 

어쨌든 쇼트의 묘사는 우리가 그 내용과 맺게 되는 이중적 관계를 드러낸다. 한편으로 우리는 본 것을 묘사한다. 즉 배경, 인물들, 인물들의 상대적인 위치와 움직임, 인물들의 의상, 인물들을 비추는 조명 방식, 이미지 속에서의 선명함과 흐림의 정도, 시야 심도 등등.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본 것을 이해하기 위해 트래킹 쇼트와 파노라마와 줌에 대해, 즉 카메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묘사하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평평한 표면 위에, 그러나 시점의 측면에서 보면 깊이감 있는 공간 위에 나누어 배치된 복잡한 시각적 정보들에 대해 우리의 뇌가 내린 해석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쇼트를 보면서 우리는 영화로 찍힌 것을 볼 뿐만 아니라, 파졸리니의 말처럼 우리는 카메라를 '느낀다'. 더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가시적인 것을 조직하고, 그것과 마주하고, 그것을 (음악가처럼) 연주하고, 그리고 카메라 안에, 전적으로 카메라에 의해 나타나는 그런 순간을 우리는 '느낀다'. 한 쇼트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우리가 묘사하려고 애쓰는 것, 즉 우리가 지각해야 하는 것은 직접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 즉 연출된 것일 뿐 아니라, 보이는 것과 보여주려는 순간(앞서나가고, 되돌아가고, 주장하고, 따라다니고, 머뭇거리고, 만나거나 헤어지고, 정확하게 표현하거나 흐지부지하는 그런 순간) 사이의 긴장의 표현이다.(40-41p)

 

 

그런데 '영화적'인 것이란 이러하다. 선들의 갈등, 쇼트들 간의 갈등, 부피들의 갈등, 덩어리들(다양한 빛의 조도로 채워진 부피)의 갈등, 공간의 갈등 등이다. 이러한 갈등들은 추진력의 증폭을 기다렸다가 서로 반대되는 부분들이 짝이 되어 표출된다. 큰 쇼트와 작은 쇼트. 다양한 선들의 시퀀스들. 깊이감이 있게 다루어지는 시퀀스와 편면으로 다루어지는 시퀀스들.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 등등. (···) 조명 이론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조명을 장애물과 충돌한 빛의 흐름으로 느끼는 것은 한 대상을 강타하는 소방 호수의 분사와 같거나 혹은 그림자와 부딪치는 바람과 같다. 이것은 숙고된 빛의 사용으로 연결되어야 한다.(113p)

 

 

몽타주가 영화의 형식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영화는 편집 작업대 위에서 태어난다고 주장했던 1920년대의 소위 '몽타주 영화론'의 투사들인 쿨레쇼프와 에이젠슈테인을 전적으로 따르기는 어려운 일이다.

모든 예술은 몽타주 수법을 필요로 한다는 주장은 그 정당성을 이미 인정받은 바 있다. 즉 부분들을 선별하고 종합하고 새로운 맥락을 얻어낸다는 주장 말이다. 그러나 영상이란 촬영 도중에 태어나는 것이며 쇼트의 내부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촬영 과정에서 쇼트에서의 시간의 흐름에 신경을 쓰고 이 시간의 흐름을 포착하고 정확하게 재구성하기 위하여 애를 쓴다. 이에 반해 몽타주는 이미 시간적으로 확정된 쇼트들을 서로 조화시키고 이 쇼트들로부터 영화라는 생생한 유기물을 구축해낸다. 그리고 이 유기체의 혈관 속에는 생명력을 보장해주는 시간이 여러 가지 리듬이라는 형태로 고동치고 있는 것이다. (···) 쇼트의 연결은 영화의 구조를 창조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영화의 리듬을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한 영화의 리듬은 그보다는 쇼트의 내부에서 흐르는 시간의 특성에서 나온 기능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영화의 리듬은 편집된 부분들의 길이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사이에 흐르는 시간의 강도에 의해 정해진다. 시간은 영화 속에서 몽타주의 힘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편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몽타주 작업은 리듬을 정해주지 못한다(혹은 몽타주는 한낱 스타일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쇼트 속에 확정된 시간의 흐름이다. 감독은 편집 작업대 위에 놓여 있는 자료 필름 속에서 바로 이 쇼트 속의 시간의 흐름을 반드시 포착해내야만 한다.

바로 이 쇼트 속에 고정된 시간이 그때그때 적절한 몽타주의 원칙을 감독에게 제시해준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상이한 시간의 흐름을 갖는 쇼트들을 서로 연결되기 힘들게 되며 소위 몽타주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실제의 시간과 조작된 시간은 마치 서로 직경이 다른 수도 파이프가 연결될 수 없듯이 영화 속에서도 서로 연결되기 힘든 것이다.

쇼트 안에서 지속되는 시간은 그 견고성이 점점 강화되든지 혹은 약화되든지 간에, 시간의 압박감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몽타주라는 것은 영화의 여러 부분들 각각이 내포하고 있는 시간적 압박감에 따라 하나의 엮어내는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113-115p)

 

 

 

 

ㅡ 엠마뉴엘 시에티, <쇼트> 中,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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