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4/13

 

 

안녕, 잘 지냈니,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네, 고등학교 졸업하고 한동안은 상갓집이나 결혼식에서 어색하게 마주치기라도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다들 멀어져서 그렇게 모일 일도 없구나,

(...)

혹시 내가 너에게 무언가 잘못한 게 있을까. 너희 부모님이 집을 한 채 네 명의로 돌려두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약간은 조롱조로 너에게 유산계급이라고 말했던 일 때문일까, 그리고 그 일을 다른 친구들한테 이야기해서? 모르겠네, 사실은 그 이야기를 한 시점도 잘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지금까지 나는 자주 너에 대해 생각해왔어, 우리가 이제 와서 친구로 지낼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쩌면 살면서 계속 담아두고 있었던 마음의 앙금들이 사실 한 번의 대화, 단 한 번의 용기로 해소할 수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나중에 하게 될까 봐, 누군가가 먼저 말을 걸기만 한다면 멀리서나마 서로를 응원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편지를 써····(46-47p)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 이런 회의를 견뎌내고 나아간 사람들이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것 아닐까, 앞서 살아간 사람들도 삶이 전부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괴감이나 죄책감이나 열등감이나 상실감을 느끼고, 불안도 안도도 사랑도 미움도, 그 모든 것을 경험한 것 아닐까, 그리고 그다음 이 세상에서 완전히, 영원히 소멸되는 거지···· 그래서 말인데,. 이상하게 이미 살고 사라진 모든 사람들이나, 지금 살고 있고 앞으로 태어나 살고 사라질 모든 사람, 모든 존재들을 생각하면 뭉클해져, 그런 걸 생각하면 그냥 살아가면 되는 거라는 생각도 들어, 아무 회의도 갖지 않고, 말없이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살다가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사라져가는 거야, 그게 다라고 생각하면 아무 문제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58-59p)

 

 

 

ㅡ 정영수 외, <2024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中,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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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23

 

제목만 보고 국내 작가들이 자신의 소설과 마진율에 대해 이야기할거라고 생각해서 굉장히 재밌을 줄 알았는데 그냥 작가들의 소설에 대한 생각을 적은 에세이었다. 제목은 수록 작품 중 오한기 작가가 쓴 에세이 제목을 따서 지은 거였다. 뭐 그렇다고.

 

 

 

다만, 모두가 입을 모아, 많이 쓰는 행위 자체를 우려하는 것에 대해, 혹은 소설을 쓰는 행위가 내 안의 무언가를 소진하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의 반감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어째서 소설을 쓰는 행위가 계속해서 소진되는 과정이어야만 하는 걸까? 소설을 쓰는 행위가 나 자신을 추동하는 힘으로만 작동할 수는 없는 걸까? 쓰는 행위 자체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성할 수는 없는 걸까? 그러므로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그런 작가가 존재한다고, 쓰는 행위 자체를 동력으로 삼아서 쓰고 쓰고 또 쓰는 작가가 있다고.(74-75p)

 

 

 

ㅡ 김사과 외, <소설엔 마진이 얼마나 남을까> 中, 작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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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20

 

트위터, 투비에서 쓴 일기 및 포스타입에 쓴 일기에서 이미 언급했던 내용들이 다수 등장했지만 서술이 달라서인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 들었다. 

 

 

어느 날의 일기에서 러스브리저는 소설가 아널드 베넷의 말을 인용한다. 베넷은 우리에게 잘 먹고 잘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어려운 과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주어진 책무를 완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에게는 음악, 그림, 달리기, 기차 모형 세트, 혹은 그 밖의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 물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살아 있기에도 바쁜데 다른 걸 할 시간이 어딨어? 베넷의 대답은 단호하다.

"우리에게 시간이 추가로 주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필요한 시간이 모두 주어져 있다."(50-51p)

 

 

늘 너무 피곤하다. 정말 일찍 자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마흔 살이 넘어서까지 이런 고민을 하다니 나는 정말 야행성인 것 같다. 문제는 세상은 야행성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나도 야행성이라고 하기에는 몸이 너무 축난다는 것···.

잠을 자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확히 말하면 적당한 시간에 자러 들어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초조함과 불안과 아쉬움, 뭐 그런 것들 때문이다. 오늘이 만족스럽고 내일이 기대되고, 이렇질 않으니 선뜻 자러 갈 수가 없는 거다. 가끔은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어떤 생각으로 자러 가고, 눈을 뜨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스톡홀름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던 악셀 린덴은 어느 날 도시 생활을 접고 시골 목장으로 내려가 양을 치기 시작했다. 목장 생활을 시작하고 두 번째로 맞은 봄, 5월 6일의 일기를 린덴은 이렇게 썼다.

 

다들 느끼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속 불가능하다. 이 세상에 지속 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이 지속 가능했던 적도 없다. 그런데 다들 별일 아닌 척한다. 좋은 생각이 있는 척, 바꿀 수 있는 척한다. 왜들 그러는지 잘 모르겠다.

 

내 말이.(211-212p)

 

 

 

 

ㅡ 금정연, <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 中, 북트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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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19

 

수천 개의 영어 작품을 대상으로 무작위로 표본을 추출하여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전형적 서사 형식을 추론할 수 있었다.

'누더기에서 재물로’

'재물에서 누더기로’

맨인홀

이카로스

앞에서 언급한 신데렐라

오이디푸스(53-36p)

 

 

몇 가지 극적 구조에 대해 속성으로 알게 된 여러분은 이제 이것이 여러분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분명 궁금할 것이다. 여러분이 제 2의 댄 브라운이 될 계획이 아니라면 여기서 여러분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재의 내러티브는 어떠한가? 도널드 트럼프와 앙겔라 메르켈은 언제 나오는가?

조금만 더 기다려 주기 바란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서사 구조의 편재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싶다. 왜냐하면 영화와 문학뿐만 아니라 정보를 전달하는 모든 형식에서 서사 구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허구이든 사실이든, 뉴스, 교육, 광고를 비롯하여 정보가 교환되는 모든 곳에서 서사 구조가 발견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소위 '마스터플롯'을 살펴보고자 하는 이유다. 어떤 전문가에게 묻는지에 따라서 스토리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마스터플롯은 두 개부터 예순아홉 개까지 구분할 수 있다. 커트 보니것이 제시한 원형이 감정적 전개 구조를 제공하는 반면, 마스터플롯은 주인공을 부추기는 에너지, 거대한 갈등이나 소망을 기술한다.(58-59p)

 

 

<저머니스 넥스트 탑모델>에서는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해 몇몇 포맷이 한 가지 마스터플롯을 제시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마스터플롯이 혼합되어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성장 스토리를 플롯과 더불어 앞에서 언급한 경쟁, 약자, 포괄적인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참가자들의 변신이 함께 나타난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스토리를 본다. 말하자면 젊은 시청자에게는 동일화나 투영이라는 이유에서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이 중요하고, 나이 든 시청자는 이러한 포맷을 역설적으로 보면서 경쟁 상황을 더욱 재미있게 즐긴다. 또한 이성애적 성향의 남성은 에로틱한 남성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혼합 방식이 성공하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즉 혼합 형식은 마치 서사 만화경처럼 여러 플롯을 제공하고 시청자가 적어도 그중 하나의 플롯에서 자기 모습을 재발견할 수 있도록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 마음에 와닿는 스토리를 본다.(69p)

 

 

최근에 자주 보이는 캐스팅 쇼나 매우 진부한 광고가 여전히 하나의 마스터플롯에 따라 작동한다면 영웅은 기본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편재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그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갈등도 함께 존재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전통적으로 영웅을 탄생시키는 전쟁을 더 이상 겪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자유화된 우리 일상의 많은 부분이 해석 권한을 둘러싼 전쟁과 닮았다. 전투에서의 군사적 용기가 오늘날에는 시민의 용기, 비타협적 태도, 공감이 되었다. 하지만 동일화와 숭배 메커니즘은 똑같이 남아 있다. 브뢰클링에 따르면 오늘날의 영웅은 우리 약점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를 묘사한다. 이를테면 "사랑의 아픔, 알코올 문제, 오만함, 급한 성미, 우울증을 비롯한 다른 모든 인간적인 결점"을 말이다. 이와 동시에 오늘날의 영웅은 아이러니하게도 예외적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우리가 모두 갈망하는 것을 이루어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더 나은 상태를 향해 나아간다.(71-72p)

 

 

'화물 숭배'개념은 상관성을 인과성으로 미화시키느 믿음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조롱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렇게 자신에게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사건의 노리개에서 자기 운명의 플레이어로 탈바꿈하기 때문이다. 인과적으로 생각하고 결과는 반드시 무언가로부터 말미암은 것, 즉 모든 것에는 근원이 있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이상적으로 그 근원에 유리한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고 유익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적어도 우리는 이런 시도 자체를 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언제부터인가 신을 달래기 위해 제물을 바치기 시작한 것은 해방적인 행위이며, 당시의 관점으로 볼 때 매우 기발하고 능동적인 문제해결 방식이다. 무언가를 신에게 바치면ㅡ예를 들어 비를 내리도록ㅡ신을 더 잘 달랠 수 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다음 날 또 제물을 바친다. 이는 풍족한 수확물을 얻기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날씨에 우리가 조금의 영향도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완전히 타율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낫다.

(...)

말하자면 원인과 결과에 대해 이해하면 우리 적응력에 가장 중요한 행동 원칙이 생겨난다. 즉 어떤 것이 그냥 그렇게 우리에게 닥치거나 이유 없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우리에게 위협적인 상태를 지속적인 발전과 변화ㅡ오늘날에는 시행착오라고 말하기도 한다ㅡ를 통해 더 나은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적, 외적 변화를 통해서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웅 여정을 통해서.

하지만 우리 인간은 절제를 모르기 때문에 삶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이유도, 의미도 없다는 인식 뒤에 숨어 있는 '공백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 모든 사람을 '인과 관계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쉽게 만족을 느낄 수 있다.(83-84p)

 

 

 

연구진은 환자에게 한쪽 뇌에서만 볼 수 있는 물체를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연구진은 피험자에게 일어나서 물 한잔을 가져올 것을 칠판에 써서 요청했다. 그런 다음 피험자가 왜 그렇게 했는지 물었다. 피험자의 양쪽 대뇌 반구는 칠판에 적힌 정보와 질문 내용을 공유하지 못해 이를 전체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즉 언어 중추를 담당하는 좌뇌가 설명을 생각해냈다. 피험자는 "목이 말라서요."라고 말했다. 급하게 만든 이유라도 자신이 왜 일어나서 물을 가져왔는지 전혀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보다 확실히 더 나았다. 연구진이 피험자에게 정말 갈증을 느꼈는지 재차 물어보자 그는 당황했다. 말하자며 그의 말은 변명이었다.(99-100p)

 

 

우리가 맛이 뛰어난 샌드위치를 먹거나 환상적인 섹스를 할 때, 또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때 '무엇을 하고 있든 계속 해, 최고야.'라고 신호를 보내는 전달물질이 방출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추진력과 동기를 부여하는 도파민의 효과다. 도파민을 '행복 호르몬'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 근시안적이라고 볼 수 있다. 신경내분비학자 로버트 새폴스키는 도파민의 메커니즘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요약한다. "도파민은 즐거움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즐거움에 대한 기대와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행복 자체가 아니라 행복을 향한 노력에 관한 것이다."(106p)

 

 

스토리는 이야기되는 내용을 가리키며, 이야기는 이것이 어떻게, 어떤 동기로 행해지는지를 나타내며, 내러티브는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이야기가 전해지는지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나무 열매를 따 먹은 여자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당한 남녀에 대한 스토리의 경우 이야기는 유혹, 죄책감, 추방에 대한 것이지만 이러한 이야기의 지배적 내러티브는 다음과 같다. 즉 '여성은 위험하다.'(162p)

 

 

브로딧츠키에 따르면 이러한 언어적 차이는 우리가 사물을 기억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사고가 발생했을 때 영어를 사용하는 목격자는 사고 유발요인을 기억하는 경향이 있지만,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목격자는 그것이 의도되지 않은 사건, 즉 불의의 사고라는 사실을 포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떄 서로 다른 관찰자는 이미 자신의 언어적 특징으로 말미암아 같은 사건을 다르게 인식하며, 따라서 세부적 내용도 다르게 기억한다. 이는 증인 진술과 법적 결과와 관련하여 전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보로딧츠키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언어는 우리가 사건을 판단하는 방식을 조종한다."(169p)

 

 

우리는 우리의 서사 본능을 작동시키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종종 우리 자신이 그렇기도 하다)을 너무 쉽게 믿으면서 바라본다.

우리가 기존의 (자기) 서사의 일관성을 위해 견지하는 가장 흔한 인식의 왜곡은 확증편향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은 것ㅡ또는 다른 사람들이 믿어야 하는 것ㅡ을 믿으며 그에 따라 모든 정보를 분류한다. 렐로티우스도, 프린스 모노룰루도 어느 정도 이러한 확증편향을 사용했다. 우리는 우리의 확신과 상충하는 지식보다 우리의 견해와 의도를 뒷받침하는 지식을 더 중요하게 평가한다. 말하자면 우리 자신을 적어도 모순투성이인 세상을 볼 때는 서사적으로 매우 좋지 못한 판단을 내린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최고의 사기꾼이다.

우리가 개인적이라고 생각하는 선호도조차 사회학적, 경제적 허구다, 우리는 사후에 과거를 회상하며 인과관계를 만들어 '나는 그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라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사후판단 편향, 혹은 잠복성 결정론이라고 부른다. 사회학자 던컨 와츠에 따르면 사후판단 편향은 특히 이례적인 큰 성공이 관찰될 때 효과를 보이기 시작한다. 더 특별한 성공일수록 그 성공 스토리는 더 훌륭하고 논리적이어야 한다.(263p)

 

 

그래노베터는 1978년에 불안과 집단행동을 연구하기 위해 소위 문턱값 모델을 개발했다. 그의 작업가설에 따르면 많은 사람이 어떤 요구나 새로운 이념을 위한 행동을 한 개인에게 제시할 경우 그 사람의 행동이 변하게 된다.

(...)

그는 예를 들어 이념이 어떻게 퍼지는지 조사하는 소위 확산 연구에서 문턱값 모델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은 간단한 공식을 제시한다. 즉 낮은 문턱값을 가진 개인이 많으면 새로운 이념이 더 빨리 퍼질 수 있고, 문턱값이 높은 개인이 많으면 개혁이 느리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와츠는 문턱값 모델을 사용하여 '누적 이익'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즉 어떤 노래나 책이 다른 노래나 책보다 인기를 더 얻으면 순식간에 몇 배나 더 많은 인기를 얻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 노래나 책이 더 좋고 더 아름답고 더 똑똑해서가 아니라 왜 모두 그것에 관심을 보이는지 그 이유에 대해 언젠가 모두가 관심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누적은 이렇게 작동되며, 스토리 역시 이와 똑같이 작동한다. 아마도 세상은 실재와 사실에 의해 결정되는 것과 아주 똑같이 거짓과 반쪽 진실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264p)

 

 

능력주의라는 용어는 1958년 마이클 던롭 영이 자신의 저서 「능력주의의 부상」에서 풍자적인 개념으로 처음 사용하였으며, 비굴하게 성과에 집착하고 하이퍼포머, 즉 고성과자의 폭정이 지배하는 2033년 사회의 억압적인 이미지를 표현했다. 비록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를 조소적으로 표현했지만 이 개념은 더 정의로운 사회질서라는 긍정적인 의미의 약속으로 발전했다.

(...)

능력주의적 관점은 교육, 직업, 인간관계로의 접근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제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미 학교 교육에서 재능이나 성과, 자질에서 쉽게 파생되지 않는 사회적 불평등을 만든다. 거의 모든 서구 사회에서 교육과 직장에서의 성공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지표는 여전히 부모의 지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성공은 얻어지기보다는 상속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더 좋은 자질을 갖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황금빛 미래가 자신의 성과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가 선호하는 자기 서사는 독자적으로 자신의 길을 나아가며 모든 역경과 운명에 맞서는 사람으로 귀결된다.(288-289p)

 

 

켄디에 따르면 주라라는 이 책에서 그 이전에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것을 했다. 바로 아프리카 대륙의 모든 사람을 단일민족 집단으로 정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일괄적으로 동종 집단으로 보고 모든 유럽인에 비해 낮게 평가했다. 대서양 노예무역을 막 시작하면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사람들을 대규모로 납치하여 노예로 팔았던 포르투갈 왕실은 주라라의 글 덕분에 완벽한 모험 이야기를 얻을 수 있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은 포르투갈의 본보기와 아프리카 사람들의 원시성에 대한 주라라의 허구 이야기를 따라 아프리카 대륙에서 사람들의 소유물을 빼앗았다.(293-294p)

 

 

인종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여전히 타국을 정복하고 억압하고 착취하고 그곳의 거주자를 적대자로 만들며 이와 함께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동화에 속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시대에 맞게 조정되고 있다. 1929년 미국에서 멕시코인은 백인으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1930년부터는 더 이상 백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백인이 아닌 사람의 이주가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무기 생산을 위한 노동자가 필요해지면서 멕시코인은 다시 백인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피부색이 사회적 구성이며 사회적 상황에 따라 상대화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예다.(297-298p)

 

 

과거에도 항상 사실과 함께 소문과 신화, 비방이 무성하게 확산했다. 그러한 거짓말들은 지어낸 소문 이상인 것처럼 점점 자기주장과 닮은 척을 하면서 '음모 서사'가 된다. 주라라의 인종차별적 여행기나 노리치의 윌리엄에 대한 반유대주의적인 허구적 성인이야기처럼 말이다. 20세기의 가장 치명적인 음모 서사로 '시온 장로 의정서'라는 위서를 꼽을 수 있다. 이 의정서의 초판은 1903년 러시아 제국에서 처음으로 러시아어로 출판되었으며 나치의 이념적 지주 역할을 했다. 이 문서는 유대인이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허구를 담고 있다. 그 내용은 완전히 지어낸 것이며 다양한 출처에서 모아 조각조각 붙여 만든 것이다.

(...)

시온 장로 의정서는 1920년에 프랑스어로 번역되면서 단숨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미국에서도 자동차 제조업자인 헨리 포드가 수십만 부를 발간했고, 이를 통해 시온 의정서 영어판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해졌다. 오늘날까지도 반유대주의자들은 이 텍스트를 근거로 내세운다.(339-340p)

 

 

우리는 여성 혐오 내러티브 자체를 종종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

소위 세계 종교의 메시아적 영웅이든, 그리스와 로마 신화의 서사적 영웅이든, 게르만이나 켈트 초기 문화의 전설적 영웅이든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즉 이 영웅들이 모두 남자라는 것이다.

(...)

영웅 여정 안에서 여성은 주인공의 주의를 흐리거나 시험에 빠트리는 존재, 심지어 적대자로 등장한다. 하지만 영웅으로 그려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406p)

 

 

서사적인 측면에서 기후 위기를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기후 위기는 인간이 만든 것으로 집단적이며, 악당이나 범죄 조직의 잘못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파괴적인 주도권에 기인한다. 기후 위기는 병든 한 시대의 탈선이 아니라 수 세기에 걸쳐 커져 나갔다. 특출한 악마도 없고 과격한 집단적 이념도 없으며 적대자로 적합한 공격적인 민족 국가도 없다. 그리고 기후 위기에서는 어떤 영웅이든 상대가 악한 정도만큼만 선할 뿐이며 주역을 배정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어느 경우든 이 문제는 집단적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 믿을 만한 영웅으로서 가장 적합한 사람들은 보다 지속 가능한 세상과 긍정적인 사회적 전환점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과학자, 정치인, 활동가)이다. 그들이라면 사회 전체의 꾸준한 변화를 위해 투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90분 만에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창의적인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다른 모든 사람은 아무 걱정 없이 외면하고 있는데 너째서 나는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438p)

 

 

 

ㅡ 자미라 엘 우아실, 프리데만 카릭,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中, 원더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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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19

 

 

“편하게 해. 나는 복잡한 의전 따위는 싫어. 하지만 내가 싫다는 말은 티 나는 의전이 싫다는 거지 그것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의전을 해줘야 해. 신경 쓴 것 같지 않으면서도 주인공에게는 불편함이 가지 않는 것 말야. 그래도 나는 충남을 대표하는 도지사고,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정치인이네. 그래서 더더욱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의전을 하고 있는 건지 안하는 건지 모를 정도의 물 흐르는 의전이어야 해!”

(...)

지시는 미세하면서도 복잡했다. 결론적으로 지금보다 더 많은 걸 사전에 검토해서 정치인으로서는 더 돋보이고, 인간으로서는 더 편안하게 다닐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라는 지시였다. 단 티가 나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있었다. 더 많은 관심과 긴장이 요구됐다.(64-65p)

 

 

제가 소대장을 할 때 저의 소대원이 같은 소대 부소대장에게 구타를 당해 피해 사실을 호소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 소대원은 부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이병이었는데,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다며 부소대장이 아침 GOP 작전 철수 중에 이병의 얼굴을 구타했습니다. 부대 복귀 후 입가에 피가 묻은 소대원을 보고 여러 차례 물었는데도 소대원은 한참 스스로 넘어진 거라고 진술하다가 결국에는 부소대장에게 맞았다고 제게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이후 부소대장이 상급부대 보고를 하지 말고,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 하였을 때도 저는 헌병대에 해당 사실을 보고하여 수사를 받도록 처리하였습니다.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과 가해자로 의심되는 사람의 힘의 불균형이 눈에 쉽게 보이는 상황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에게 제가 지초지종을 물어보는 것보다는 격리 조치부터 먼저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조치한 것입니다.(197p)

 

 

 

ㅡ 문상철, <몰락의 시간> 中, 메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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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4

 

 

나는 가난을 말할 때 가족을 맨 뒤에 배치한다. 가족이 그 모양이니까 그렇게 됐지 따위의 말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한 가족과 가난을 세트 취급하는 클리셰가 지겹다. 내 가난은 가족이 아니라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과 세트였다. 날 불행하게 했던 것은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이(었)다.(116p)

 

 

 

ㅡ 안온, <일인칭 가난> 中, 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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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

 

 

영화에서 사이보그는 머리에 전극을 꽂고 엄청난 용량의 데이터를 전송받거나, 뇌의 데이터가 컴퓨터로 바로 옮겨지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런데 뇌과학 연구자들은 인간의 뇌와 컴퓨터의 메모리가 작동하는 방식이 달라서 컴퓨터에 저장된 것을 뇌로 전송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작은 전자칩을 팔에 이식하고 스스로를 사이보그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만, 이들은 칩은 건물 출입 카드나 버스 승차권을 대체하는 정도의 기능에 그치고 있다. 전자 칩은, 신경과 직접 연결되어 뇌의 명령을 받아 작동되지 않는다.

(...)

몸에 전자 칩을 이식한 것만으로 사이보그라고 부르기 힘들다는 얘기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기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다. 기계는 우리 몸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행위자로 인간 행위자와 함께 살아간다. 우리는 기계를 바꾸고, 기계는 우리를 바꾼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스마트폰을 손에 쥔 순간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 우리는 전례 없이 기계들의 촘촘한 네트워크 속에서 다양한 기계들과 인터페이스를 형성하면서 살아간다. 이렇게 기술과 인간이 서로 의지하고 서로를 바꾸며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사이보그화되었으며, 사이보그는 우리 존재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기계가 우리 몸에 삽입되지는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74-75p)

 

 

섀넌이 선택한 필진 대부분은 섀넌과 친한 사이버네틱스 그룹 회원들이었다. 심리학, 생리학을 연구했던 사이버네틱스 그룹은 인간과 기계의 유사성에 주목했고, 뇌와 비슷하게 작동하는 기계를 만들려고 했다. 이들이 염두에 둔 ‘생각하는 기계’는 마치 사람처럼 생각하는 기계였다.

그런데 매카시는 처음부터 이런 접근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봤으며, 또한 ‘생각하는 기계’는 꼭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더라도 문제만 풀면 된다고 추론했다. 생물학적 혹은 구조적 유사성은 필요하지 않았고 기능만 같으면 됐던 것이다. 비행기가 새처럼 날개를 퍼덕이지 않아도 날 수 있듯이,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아도 생각하는 컴퓨터를 만들 수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사실 새처럼 날려고 했던 과거의 모든 시도가 실패했듯이, 매카시는 사람처럼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려는 시도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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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마타에 관한 책이 출판될 무렵 그는 ‘사이버네틱스’나 ‘오토마타’와 차별화되면서 자신의 연구 프로그램에 적합한 새로운 이름을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인공지능’이었다. 매카시는 이 단어를 어디에선가 보고 자신이 사용했다고 회고했지만, 후대의 역사학자들조차 매카시 이전에 이 단어를 사용한 기록을 찾지 못했다.(94-95p)

 

 

미국에는 이렇게 MIT, 스탠퍼드, 카네기 멜런 세 곳의 대학에 센터가 설립되어 인공지능 연구를 이끌었고, 대서양 건너편 영국의 에든버러 대학교에 설립된 인공지능 연구소가 이 연결망을 유럽으로 확장했다.

이들은 모두 인공지능 연구가 인간의 뇌를 닮은 컴퓨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푸는 컴퓨터를 만드는 데 집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접근 방법을 ‘기호 인공지능’이라고 불렀다.(99p)

 

 

왜 아무 질문이나 던지고 이에 답해서 컴퓨터와 인간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성 역할을 흉내 내는 임무를 맡기고 이를 통해 인간과 컴퓨터를 구별하게 했을까?

튜링의 논물을 읽은 많은 사람이 이 성 역할 놀이를 기계의 지능을 테스트하는 기준으로 삼은 데 대해 비판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튜링 테스트가 남을 속이는 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으로, 인간 지능의 척도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런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튜링은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지 않았다.

튜링은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분명치 않다고 보았다. 그는 논문에서 향후 50년 안에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는 인공지능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고’라는 기준에서 보면 기계와 인간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페미니즘 철학자인 주디스 제노바는 튜링이 이 테스트를 통해 말하고 싶어한 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튜링이 성 역할 놀이를 테스트에 도입한 이유에 대해 그가 인간-기계의 경계가 임의적이라는 것 외에 남녀의 사회적 성별의 경계 또한(심지어 더 나아가 생물학적 성의 경계까지도) 임의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였다고 해석했다. 게다가 심판관의 질문들을 잘 살펴보면 튜링이 사고와 욕망의 경계도 문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제노바는 튜링이 인공지능의 성능을 검사하는 테스트 하나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서구 사회에서 받아들였던 이분법적 사고들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지적인 도전을 감행했다고 해석했다. 이러한 심원한 문제의식은 튜링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감추고 살면서 성 역할의 경계와 같은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했음이 분명해 보인다.(119-120p)

 

 

2차 사이버네틱스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자기 생성 체계이며, 인간의 인지는 세상에 대한 반영이 아니라 인간 주체가 적극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되었다. 이렇게 인간과 다른 생명체를 구별 짓던 경계는 허물어졌다. 인간만이 세상에 대해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단세포 생명체도, 까마귀도, 개구리도 세상에 대해 인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지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특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를 가진 복잡한 한 자기 생성 체계가 외부 세계에 대해 행하는 작용이었다.

그에 따른 과학적 지식에 객관적이고 절대적 지식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함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했다. 지식은 모두 주관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관주의가 도덕적인 상대주의를 낳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지 과정에서 우리가 세상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환경 파괴는 곧 우리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이므로 도덕적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되었다. 다른 이들의 자유를 침범하는 것은 이들이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세상을 억누르는 것이기 때문에 비윤리적인 행동이 되었다. 편을 가르고 싸움을 부추기는 진리라는 개념 없이도 우리는 훨씬 더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윤리 원칙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인간에게 특권을 부여하지 않고도 인간의 책임을 강조할 수 있는 것이다.(166-167p)

 

 

 

ㅡ 홍성욱, <포스트휴먼 오디세이> 中,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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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27

 

 

 

내 트위터는 끔찍했다. 물론 트위터 전반이 끔찍하긴 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2014년 후반부에 누군가 트위터에 있는 모든 걸 끔찍하게 만드는 버그를 풀어버린 것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트위터 덕분에 많이 웃었는데’하고 한탄했다. 더 이상 트위터로 웃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때 트위터에는 웃기고 흥미로운 트윗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지루하고 끔찍한 헛소리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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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하고도 뚱했던 10대 시절 내게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가 트위터였다. 나는 진심으로 트위터가 특별하고 또 선하다고 믿었는데, 이제는 진실이 내 앞에 드러나 있었다. 트위터는 기생충 같은 떠버리들로 바글거리는 소름 끼치는 지옥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아닌 군주가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으며 오직 파괴하고 해체하고 불평하고 화내고...(24-25p)

 

 

삶은 현재형 시제로 살면서 미래를 곁눈질하는 동시에 과거형으로 해석하는 것이었음에도 일인칭 시점이란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여기서 문학과 삶의 핵심적인 차이가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독자가 평소 자신의 고뇌 어린 일인칭 시선에서 벗어나 또 다른 일인칭 의식에 이입할 수 있었다. 실제 삶의 일인칭 시선을 규정하는 요소들은 제거되고, 의심과 결단을 반복하는 실질적 일인칭 의식은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고 나서 일시적으로나마 소설이라는 다른 일인칭 시점에 이입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부엌 식탁에 앉아 만약 삶에서의 일인칭 시점을 특징짓는 요소가 고뇌이며 그것이 일인칭 소설을 읽을 때 제거되고 만다면, 소설에는 근본적으로 일인칭적인 요소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얼굴을 만지며 생각했다. 그런 의미로 ‘문학에서 일인칭이란 근본적으로는 삼인칭이지 않은가’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내 소설의 두 버전은 서로 같다고 말이다.(103p)

 

 

나는 늘 사람들이 생각과 행동을 나란히 진행하거나, 혹은 그 둘이 우연히 연결되는 방식으로 자기 행동을 제어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기는 불가능했다. 우리는 불가해한 경험을 한 뒤 최선을 다해 언어와 이미지를 이용하여 그 경험을 자신에게 설명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다음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으려 애쓰듯 우리의 마음을 읽는 것이었다. 우리는 생각한 다음 행동하지 않는다. 생각과 행동의 관계가 결코 직선적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인간은 총체적으로 행동하는데ㅡ그중 오직 일부분만이 의식적인 생각이다ㅡ, 이때 해석이라는 행위를 하려면 사람은 스스로를 관찰해야만 했다.(108p)

 

 

 

ㅡ 조던 카스트로, <노블리스트> 中, 어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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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13

 

 

감기에 걸려서 끙끙 앓다가 허브차를 마시는 삶은 어떤 삶일까. 아마도 감기로 휴가를 내도 눈치가 보이지 않는 삶, 퇴근이 오후 4시인 삶, 신선한 음식을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삶, 푹 쉴 수 있는 삶, 그래서 몸의 자연 치유력을 믿을 수 있는 삶 아닐까. 반대로 항생제를 바로 먹어야 하는 삶은 빨리 나아야 하는 삶, 휴가를 낼 수 없는 삶, 퇴근이 밤 9시인 삶, 나약하다는 말이 두려운 삶, 자리가 보전되지 않는 삶, 그래서 힘들어도 버텨야 하는 삶일 것이다.(25-26p)

 

 

ㅡ 오지은, <아무튼, 영양제> 中,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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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2/25

 

화제의 책을 읽었다. 감상은 글쎄 이걸 뭘 이렇게나 좋아하는지... 그래도 짧으니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읽어봐야지.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28p)

 

 

ㅡ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中,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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