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7/15
신경다양성의 하나인 자폐가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다는 점은 이 책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에는 반드시, 기존의 ‘정상성’이라는 기준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를 성찰하려는 역사적 맥락이 고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삐딱한 의문도 든다. 모든 사람이 고유한 뇌 작동 방식을 가진 존재라면, ‘신경다양성’이라는 말은 과연 어떤 유효한 구분선을 가지고 있는가? 결국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해받아야 할 존재라면, 누구까지를 신경다양성의 범주에 포함시킬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또한 이 책에서 그려지는 자폐인의 모습은 매우 고기능에 속하는 사례로 보이며, 이는 극히 소수의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될 수 있다. 그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지만, 중등도 자폐인의 삶과 목소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신경다양성이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음.
이것이 바로 '스몰토크', 정보 전달이 아닌 사회적 목적으로 가득한 대화다. 그리고 이 대화는 굉장히 중요하다. 적어도 신경 전형성의 세상, 존재하는 모든 규칙이 만들어지는 그 세상에서는. 언어학자들이 즐겨 명명하는 대로 이런 '의례적 의사소통'의 목적은 소통이 발생하며 조금씩 사회적 관계가 원활해지는 것,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환상 속에서 두 사람 사이의 연결이 차츰차츰 가만가만 돈독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 같은 자폐인에게는 정말이지 악몽이다.
(...)
실제로 자폐인은 비자폐인들이 자유롭게 손에 넣는 듯한 사회적 규칙 안내서 없이 성장했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고, 나는 이 비유를 필요에 따라 주기적으로 언급할 것이다. 우리는 신경전형성을 지닌 또래를 관찰하며 이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자동적으로 무심코 이루어지는 반면 자폐인은 하나하나 배워가며 분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에게 가벼운 대화는 박수만큼 쉬워 보이지만, 자폐인에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방해의 장벽이 된다.(26-27p)
사실 대화라는 얼기설기 얽힌 덤불길은 양방향이라(얽히려면 두 사람이 필요하니까) 신경학적 전형성을 타고난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타협해야 한다. 자폐를 연구하는 데이미언 밀턴 박사는 '이중 공감 과제'*를 주제로 장문의 설득력 강한 글을 쓴 바 있다. 그는 자폐인이 신경 전형성의 관점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그쪽 역시 우리를 이해하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을 파고든다. 차이점이라면 우리는 자신의 분투를 극도로 예민하게 인식하고 이질성을 보상하기 위해 노력하는 반면, (지극한 존중심을 품고 하는 말인데) 그쪽에서는 이런 염병할 현실에 관해 어렴풋한 자각조차 없는 것 같다.
가장 좋은 결과는 중간에서 만나는 것이다. 자폐인들이 비자폐인들의 이상한 규칙과 선호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듯 그쪽에서도 이해를 위해 동등한 수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원활하게 대화를 나누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실수로 인해 지나치게 화를 내는 일은 없으리라.
*: 자폐인은 공감력이 부족하다는 통념이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며 다만 감정을 나타내고 소통하는 방식이 비자폐인과 다를 뿐이기에, 자폐인과 비자폐인 모두에게 서로의 공감 방식을 배워야 한다는 과제가 있다는 이론.(40-41p)
일반적으로 신경 전형인이 인내의 한계에 도달해 감정을 분출하면 주변 사람들은 엄청난 애정과 지지를 표한다. 자신도 비슷한 한계점이 있기에 그 사람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자제력을 놓지 않고는 그런 수준의 학대나 트라우마를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에게 애정과 지원을 쏟을 수 있다. 누군가가 이혼, 상실, 이사, 범죄 피해 등으로 인해 심각한 스트레스를 겪을 때 이런 반응이 이어지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이들을 위한 연민이 산더미처럼 쌓인다. 그러나 자폐인이 똑같은 일을 겪을 때는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왜 이런 이중 잣대가 있는 걸까?
비자폐인 구경꾼들은 사람들의 한계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령 자폐인이 레스토랑에서 심리 탈진을 겪는다면 그들은 주변 환경과 상황에 그럴 만한 이유가 없으리라고 추론한다. 그들은 주변 환경과 상황에 그럴 만한 이유가 없으리라고 추론한다. 그들은 자신이 식당의 소음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저기 있는 사람은 대체 왜 난리일까 의아해한다. 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은 자폐인의 삶에서는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스트레스의 한계, 인내의 한계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한계선 밑에 아슬아슬하게 존재하는 반면 비자폐인은 대부분 한참 밑에서 일생을 보내며, 끔찍한 일이 일어나 갑자기 그 한계를 넘어가는 자신을 발견할 때까지 한계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한계선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선을 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심리 탈진을 겪는 자폐인이 동정심이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53-54p)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폐인에게 마음 이론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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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이론은 적어도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자폐성 장애 연구의 표준 개념이었고, 이는 쉬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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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자폐 연구자가 허술한 근거를 기반으로 내리는 중대하고 광범위한 결론의 훌륭한 예시다. 하지만 그로 인한 영향과 피해는 이미 발생했고, 2020년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 피해를 걷어내고 자폐인의 진실을 똑바로 인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분명 자폐인에게도 공감 능력이 있다. 사실 자폐인 상당수는 공감력이 상당한 듯한데, 비자폐인이 보기에는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발현될 뿐이다.
많은 자폐인이 '과공감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는 위험하거나 불편한 상황에 처한 사람과 동물을 보면 일종의 극단적인 감정적 반응이 생긴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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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자폐인은 공감력이 어느 누구 못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우리가 공감을 표현하는 방식이 흥미를 자극할 만큼 다양하고 (비자폐인이 볼 때는) 전형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것도 우리가 공감을 표현할 수 있을 경우의 이야기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자폐인은 공감력이 있다. (81-83p)
ㅡ 피트 웜비, <나에겐 너무 어려운 스몰토크> 中, 윌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