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4/8

 

 

하기야 모두를 순전한 마음으로 아끼고 용서하고 이해하기란 천사나 할 일이지 사람의 태도는 아니다. 천사처럼 군다는 것은 상대를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고기가 말을 모르고 규칙을 모르는 것에 화내지 않듯이 기대가 없고 하찮은 존재에게만 한없이 너그러울 수 있다.(109p)

 

 

ㅡ 단요, <다이브>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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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4/6

 

‘개와 소금의 왕국’이라는 단편에 나오는 쌍둥이 테마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확장하여 만든 걸로 보이는 범죄 소설. '피와 기름'의 우혁도 등장한다(?). 꽤나 재밌고, 만족도 높은 시간이었다. 등장인물이 말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기계적이고 계산적이라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고 일견 동의한다. 다만 그걸 감안하고도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이 펼쳐놓는 생각의 흐름이 충분히 흥미로웠다. ‘다이브’도 그냥 읽어야겠다.

 

 

 

“최 선생님이 보기엔 그 노인들이 바보 같지요?”

“그렇다기보다는, 이해가 어려운 면이 있죠. 그 정도면 스스로도 몸이 망가졌다는 걸 느낄 텐데 기어코 스테로이드제나 받아 가려는 게 말입니다.”

“그거는 본능이에요.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려는 특질, 즉 항상성은 사람 몸만이 아니라 정신에도 적용된다 이겁니다. 늙을수록 더더욱 그래요. 큰 병원에 간다면 수술을 마음먹어야 하지만 스테로이드제가 있으면 내일도 모레도 살던 대로 살 수 있지요.”

“그러나 어쨌든 중병으로 병원에 가는 것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때가 언제냐, 얼마나 심각해졌느냐의 차이일 뿐이라고 봅니다만.”

대표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 대하듯 껄껄 웃었다.

“죽음이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처하는 과정은, 죽음 자체보다 두렵기 마련이에요. 아까 내가 바보라는 말을 썼지요. 이 두려움을 이기지 못 하면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됩니다."(8-9p)

 

 

"그 기전이 미스터리라서 그래.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는 것보다 그게 낫다고 생각하는 심리가 이해가 안 가. 잡일이야 돈 내고 사람 쓰면 되고, 말은 그냥 하면 나오는 거 아닌가?"

"솔직히 말해 줘?"

"가급적이면."

"당신은 성격이 악랄한데 인간 자체는 순해서 손해만 보고 살아. 학생들 중에 그런 유형이 있잖아. 규칙 안 지키는 애들은 잡아먹을 것처럼 굴고, 특히 공부까지 못하면 죽어라 싫어하고, 남이 벌을 안 받으면 자기가 손해 본 양 억울해하는 애들. 그러면서도 맡은 일은 거의 강박적으로 하는 애들. 그런데 인간관계는 어째야 하는지를 몰라서, 괜히 돈은 돈대로 내면서 인망 깎아먹고 그러지."

"모범생들의 행동 습성이지. 의사들 중에 모범생 아니었던 사람 얼마나 있기에."(73p)

 

 

어릴 적부터 겪어 온 바에 따르면 민호는 최선이라는 개념에 기묘한 진정성을 부여하는 녀석이었다. 중학생 시절, 민호 녀석이 운동부 선배의 여자친구와 사귀면서도 정작 그 선배에게는 무척이나 깍듯하게 대하는 걸 보고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났다. 도대체 무슨 심리냐, 사람 놀리는 재미 때문이냐 하고 묻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자기는 상대가 바라는 대로 한다는 거였다. 여자애가 양다리를 원하는 그래 주는 것이고, 선배는 공손한 후배를 원하니 그것도 따라 준다고 했다. 자신은 둘 모두가 좋으며 둘은 자신에게 잘해 주니까, 들키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셈이니까,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리라는 대답 앞에서 민형은 낯선 충격을 받았다.

모두를 동등하게 아끼며 서로 나누는 관계로부터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인간 유형이란 세인들의 상상과 달리 아름답지 않았다. 멀쩡한 줏대를 갖추지 못한 상태라면 재난이나 다름없었다. 진상이 돌출되기 전까지는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환상이 주어진다는 점, 그래서 도리어 진상을 묻어 두게 된다는 점이 그 재난을 더욱 변칙적이고 위험하게 만들었다.(94-95p)

 

 

순수한 헌신과 친절로 가장한 처세술의 경계를 묻자 묘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우리가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생각해······ 전문 분야가 다를 뿐이지."

"받을 거 받고, 줄 거 주면서 살겠다는 게 형 신조잖아. 나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나는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니는 것과 별개로 거절이 어려운 사람이거든. 돈이 아니라 인간 마음이 얽힌 문제라면 특히 그래. 그러니까 일단 어지간하면 남이 바라는 건 다 해 주고, 나한테 필요한 게 생기면 그때 말을 꺼내. 그중 누구든지 한 명이라도 해 주면 되는 일이야. 연대책임 후불제란 말이야. 이해하지?"

"전혀 모르겠는데."

"마음의 빚이란 그런 거야. 마음의 빚이라는 건······ 그게 정확히 얼마인지는 나도 상대도 모르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찔러 보고 아니면 마는 식으로 수금하는 거지. 그중에서 더 많이 납부하는 사람이 있으면 고마운 일이고.“

"심약하고 소심한 사람 건수 잡아서 등쳐먹는다는 소리를 고상하게 하는군."(136-137p)

 

 

대화에서 거듭 확언되는 사실이란 썩 확실치 못 한 것들이다. 가건물이 매 순간 흔들거리고 있음을 잊기 위해 억지로 고정못을 박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서로가 서로의 주장을 강경하게 앞세울 때는 특히 그렇다. 그러니까 가장 확실한 사실들은 말해지지 않는 영역에, 만약 입에 오르더라도 그렇게나 이렇게 쯤으로 호명되는 영역에 존재한다. 그것들은 너무나도 치명적인 진실이기 때문에 감히 발음할 수 없고, 발음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안다. 대화의 역설은 이러한 행태가 순전한 뜬소문에도 적용된다는 점에 있다. 치명적이지만 매혹적인 허구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똑같이 한다. 상대를 감싸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책임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그 일 때문에 딸이 그렇게 됐대요. 그렇게가 무엇인지, 그 일은 또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 하는 상태로 수근대는 말들. 침묵 아닌 침묵이 계속되는 동안 각자에게는 각자의 이야기가 생기고, 그건 대개 진상과 다르다. 다른 편이 차라리 낫다.(153-154p)

 

 

사람들은 말로 풀어낸 부분만을 아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언어에 앞서 복받치는 충동이야말로 가장 명료하다. 혼자 죽으려다가 그 소식에 기뻐할 누군가를 상상하고, 차라리 남을 죽이길 택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올곧은 마음이 필요할 터였다.(159-160p)

 

 

 

ㅡ 단요, <트윈> 中, 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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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4/6

 

 

잘 읽히는 건 맞음. 지난 작품집인 ‘빛을 걷으면 빛’과 이번 작품을 거의 같은 시기에 읽으며 느낀 점은 이 작가가 꾸준히 천착하는 주제는 매 소설마다 소재는 달라지더라도 정체성, 세대, 연령, 계급 등이 서로 상이한 인물들이 여러 계기로 만남을 갖고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듯하나 결국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긴 힘들다는 것, 그리고 작품에서 비판, 풍자의 대상이 되는 인물을 독자도 조롱하거나 욕을 하며 볼 텐데 그 인물들과 책을 읽는 너희들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볼 수 있냐고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를 독자 쪽으로 돌려버리는 연출을 즐겨 쓴다는 것이다. 기억하고 싶거나 인상적인 문장은 없었다. 존나 내가 뭘 몰라서 그런 건가.

 

 

 

ㅡ 성해나, <혼모노>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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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4/4

 

 

작가가 쓰고자 노력하는 소설은 아마도 자전적 소설로 실린 ‘김일성이 죽던 해’에서 화자가 설명하는 좋은 소설에 가닿으려는 노력이지 않을까.

 

주인공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만, 결국은 실패하는 소설

 

 

 

ㅡ 성해나, <빛을 걷으면 빛>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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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4/2

 

 

나는 돈이 필요한 게 아니다. 죄책감 같은 것도 모른다. 내가 지나온 평생과 앞으로의 시간에 각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무엇을 하면 평판이 깎이는지, 무엇을 하면 감옥에 가는지, 무엇을 하면 돈을 잃는지, 무엇을 하면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지, 이 모든 감점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뿐이다. 그런 종류의 앎은 도덕이나 예의나 타산처럼 쓰일 수도 있지만 실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내게 중요한 것은 이 순간의 마음뿐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나는 너무 유아적이고 이기적이라서, 추해지지 않거나 영예로울 까닭조차 알지 못해서, 찰나의 기쁨보다 더 중요하고 복잡한 것을 느낄 능력이 없다. 나는 오래전에 지나간 선택지를 다시금 마주치고, 또 다른 기쁨을 꿈꾸기로 마음먹는다.

 

 

 

ㅡ 단요, <개와 소금의 왕국> 中, 우주라이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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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4/1

 

크게 말을 보탤 게 없이 뻔한 작품이었다. 한때 김애란을 좋아했던지라 에세이를 포함해서 그의 모든 글을 읽어왔다. 그러나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으며 내가 좋다고 느끼는 그의 글은 단편에 한정되는 게 아닐까라는 의문을 가졌었고, 이번 작품을 읽으며 그 생각은 더 굳어졌다. 무색무취의 청소년 문학인 줄 알았다.

 

 

 

ㅡ그래? 넌 이야기가 왜 좋은데?

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ㅡ끝이······ 있어서?

소리가 신기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ㅡ난 반댄데.

ㅡ뭐가?

ㅡ난 시작이 있어 좋거든. 이야기는 늘 시작되잖아.

지우가 잠시 먼 데를 봤다.

ㅡ이야기에 끝이 없으면 너무 암담하지 않아? 그게 끔찍한 이야기면 더.

소리도 시선을 잠시 허공에 뒀다.

ㅡ그렇다고 이야기가 시작조차 안 되면 허무하지 않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잖아.

ㅡ그런가?

ㅡ응.(66-67p)

 

 

누군가 집을 떠나 변해서 돌아오는 이야기, 지우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알았다. 하지만 그 결말을 잘 믿지는 않았다. 누군가 빛나는 재능으로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 재능이 구원이 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에 몰입하고 주인공을 응원하면서도 그게 자신의 이야기라 여기지는 않았다. 지우는 그보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 그래도 괜찮음을 알려주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떠나기, 변하기, 돌아오기, 그리고 그사이 벌어지는 여러 성장들. 하지만 실제의 우리는 그냥 돌아갈 뿐이라고, 그러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당시 자기 안의 무언가가 미세히 변했음을 깨닫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 삶의 나침반 속 바늘이 미지의 자성을 향해 약하게 떨릴 때가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그런 것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는데다 거의 표도 안 나는 그 정도의 변화도? 혹은 변화 없음도? 지우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다만 거기에는 조금 다른 이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지우는 그 과정에서 겪을 실망과 모욕을 포함해 이 모든 걸 어딘가 남겨둬야겠다 생각했다.(232-233p)

 

 

 

 

ㅡ 김애란, <이중 하나는 거짓말>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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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31

 

이 소설에서는 어떤 의미나 상징을 내포하는 식으로 동물을 의인화 하지 않고 말이 통하지 않고 결코 상호 이해에 도달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긴다. 그 점을 새롭게 평가하는 듯.

 

 

 

그랬던 내가 어떻게 두희의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양심에 관한 속담을 예로 들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양심이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만한 행동을 하면 삼각형은 마음속에서 회전하며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양심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다 보면 뾰족했던 모서리가 닳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 얘기를 들은 후로 내 마음 속에는 크고 작은 삼각형들이 생겨났다. 그중 죽음에 관한 삼각형은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아빠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소식이 궁금하던 중학교 동창이 사고로 운명을 달리하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서서히 모서리가 닳아갔다.

한동안 나는 삼각형의 모서리가 다시 자라길 기다렸다. 첨예하고 날카로운 감각이 다시 자라나 나를 떠나지 않기를 밤마다 기도했다. 하지만 삼각형은 다시 자라나지 않았다. 내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삼각형은 내 삶의 모양에 맞춰 모양이 변했다.

한때 삼각형이었던 마음들을 떠올리며 나는 내가 비로소 어른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평생 알고 싶지 않던 어른들의 마음을 저절로 이해할 수 있었다. 보편적인 굴레에 무사히 안착했다는 사실과 마주할 때마다 나는 무척 분했지만, 한편으로는 편안했다.(103-104p)

 

 

세월이 지남에 따라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시간은 착실하게 나를 따라붙었다. 한동안 나는 시간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계절이 바뀌고, 강산이 변했다. 17년간 이어지던 두희의 시간이 끝났을 때, 나는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동안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말에 의지했다. 시간이 모든 걸 말끔하게 해결해주리라 믿었다. 이마에 남아 있던 수영모의 밴드 자국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 사라져 있는 것처럼.

하지만 이제 나는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시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건 아니라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거라면 왜 우리는 저절로 행복해지지 않는 것일까. 시간이 내 문제를 떠안고 멀리로 흘러가는데 왜 나는 여전히 가슴이 답답한 것일까. 끊임없이 시간이 흐르는데 어째서 두희의 방바닥에 남은 패인 자국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두희의 물건을 하나도 남김없이 정리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두희의 흔적은 장판 위에 남은 자국뿐이었다. 비바리움을 올려놓았던 선반의 귀퉁이가 몇 년간 장판을 눌렀던 흔적이었다. 장판을 교체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가도 눌린 자국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141-142p)

 

 

두희와 함께했던 시간은 두희의 죽음으로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 시간들은 여전히 내 곁에 남아 있었다. 조금 더 다양한 기쁨과 슬픔, 행복과 외로움, 상실과 위안 들이 나의 경험으로 남으면서 나에게는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182-183p)

 

 

"근데,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게 뭐가 나쁜거야? 우린 인간이잖아. 얘네도 타란툴라적인 생각으로 세상을 이해할 텐데."

"사람들이 가진 힘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너무 강력하잖아."

비바리움들을 전부 돌아본 나는 J가 데리고 있는 타란툴라들이 어째서 오랫동안 블루프로그에 남아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너무 흔해서, 은신처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아 관찰이 어려워서, 움직임이 지나치게 빨라서, 발색이 애매해서, 다리 부절을 회복하지 않아서. 타란툴라 사이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문제처럼 여겨지는 건 확실히 균형 관계가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219p)

 

 

내 인생에 블루프로그가 없었다면 어쩌면 내 삶은 훨씬 평탄했을지 몰랐다. 두희가 없는 삶 속에서는 두희로 인해 엄마와 척을 지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소리와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또 타란툴라에 대한 편견으로 나를 대하는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지금보다 단조로운 삶이 분명했다. 나는 단순하지 않은 삶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내 인생에 블루프로그가 있었기 때문에 포포를 지키고 싶어하는 원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나와 당신이 참 많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 무언가와 함께 산다는 건, 그래서 서로를 관찰할 수밖에 없고 그럼에도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다는 건 내게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였다.(225p)

 

 

 

ㅡ 정덕시, <거미는 토요일 새벽> 中,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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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7

 

 

너무나도 예리하고 신랄하게 k-창작계의 현실을 짚는 소설. 거의 대부분의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며 봤다. 2024년 한국 창작의 현실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영미권을 포함한 유럽의 창작 현실을 알고 싶다면 '옐로페이스'를 권한다.

 

 

 

“좋아, 좋아. 요즘 딱 해야 할 얘기야. 페미니즘도 그렇고, 시대도 그렇고, 여성 인물도 그렇고, 요즘 젊은 애들도 그렇고, 딱 그런, 그렇잖아? 아주 시의적절한, 그런 거잖아?”

피 PD는 ‘그렇다’는 게 대체 뭔지는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하나만은 확실했다.

 

“이거 통한다.”

 

하지만 팔리기 위해 쓰인 모든 영화 시나리오가 그렇듯 「맨투맨」의 운명도 순탄치 않았다. 투자사들을 도는 동안 몇 번의 수정을 거듭하면서도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원래 처음 쓴 「맨투맨」 속 초롱이는 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흑인 혼혈이었다. 그러나 어디서 그런 배우를 구하겠냐는, 그리고 설령 구한다고 해도 무명에 가까운 그런 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 어떻게 투자를 받으며 어떤 관객이 보러 오겠느냐는, 뭐 그런 지극히 당연한 문제의식으로 인해 결국 초롱이를 (토종) 한국인으로 바꿔야만 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초롱이 옆에 빠방한 남자 캐릭터를 붙여 일명 ‘남녀 투톱’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 여자 배우 한 명만 있으면 역시나 투자받기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선 가산점이었던 게 현실에선 마이너스 점수였다. 이외에도 승부 조작을 하는 악당의 역할이 필요하다든지, 초롱이 곁에는 예측 불허의 발랄하고 예쁜 여자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든지, 뭐 여러 가지 피드백들로 인해 「맨투맨」도 초롱이도 점점 바뀌어 갔다. 나는 갈수록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21-23p)

 

 

“시대를 이야기해야 하는 거야. 오늘날, 지금 이곳의 사회, 시스템! 그래, 인마!”

뒤이어 피 PD는 자신의 대학 시절과 1980년대의 투쟁, 그리고 그때 전성기를 구가한 문학과 예술에 대해 침 튀기며 떠들어 댔다. 나는 한평생을 그 단 몇 년간의 대학 시절과 확인불가능한 무용담을 가지고서 먹고사는 것 같은 피 PD와 그들 동년배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피 PD는 세상과 불화해야 한다며 목에 핏대를 올렸고, 혼자 골방에 갇힌 것 같은 이런 글 써 오지 말고 요즘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사는지 조사해서 지금 이 시대의 것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이 시대의 것을 찾으라고?

그 말은 나에게 마치 참치회를 불판에 구워 먹는 일과 같은 인지부조화를 불러일으켰다. 내가 바로 이 시대의 사람이고, 요즘의 젊은이였다. 그런데 나를 향해 이건 요즘의 것이 아니며 이 시대의 젊은이들 얘기가 아니라는 둥 판결을 내리는 것은 피 PD처럼 젊었을 적 일찌감치 사회에서 한자리씩 차지한 뒤 몇십 년간 그곳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는 저 잘난 세대의 분들이었다.

결국 나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닌가 봐. 이 시대의 젊은이가 아닌가 봐.(56-57p)

 

 

세상과의 불화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옥빛 누나였다. 옥빛 누나의 경우는 인생에 불화가 없어서 결국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케이스였다.

예술대학에 입학하고 막 두 번째 학기에 접어들었을 때, 옥빛 누나는 엄청난 깨달음에 그만 충격받고 말았다. 그 전까지 옥빛 누나는 한국 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불우한 가정환경,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가족끼리의 어떤 갈등과 폭력 등이 모두 소설이기에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뭐랄까, 히어로 영화 속 초능력자들처럼 현실엔 절대 존재하지 않지만 그냥 재미로 보는, 장르적인 클리셰 같은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대학에 오니 다들 앞다투어 자신들이 실제 그런 경험이 있음을 밝혔다. 처음 옥빛 누나는 그게 거짓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다 실화였던 것이다! 그건 초능력자들이 실존한다는 것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그들과 옥빛 누나는 극단적으로 달랐다. 10대 시절에 가족끼리 두 번의 세계여행을 떠났고 가족회의를 통해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매우 수평적이며 다정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면서도 자신의 가정이 지극히 평범한 줄로만 알았던 옥빛 누나로서는 그런 불화를 겪어 본 적이 없을뿐더러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소설을 쓴다는 애들은 모두 그런 경험이 있었고, 나아가 그런 경험이 흡사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가능성 혹은 자질과 품격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양 여겼다는 점이다. 심지어 어떤 평론가는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없다는 말을 했고, 학생들은 그 말을 경전처럼 입에 올리곤 했다.

상처는 일종의 훈장이었다. 이혼 정도는 상처 축에도 들지 못했다. 옥빛 누나가 속해 있던 그 집단에서는 자신이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크면 클수록, 쉽게 말해 과거 엄마나 아빠가 개차반이면 개차반일수록 어떤 자부심과 우월감을 보이는 것 같았다.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과는 달리 엄마나 아빠에게 그런 상처 따위 받아 본 적 없는 옥빛 누나를 마치 숭고한 혁명에 참여하지 않고 혼자 무임승차한 파렴치한처럼 대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옥빛 누나 본인마저 죄책감 비스무레한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서 어떤 날엔가는 참고 참던 옥빛 누나가 가족들을 향해 울부짖으며 따진 적도 있었다. 왜 나를 이렇게 화목하고 평탄하게 키웠나요! 왜 나한테는 시련을 주지 않은 거예요!

흐음, 한마디로 모두들 개변태 마조히스트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

“내 기분이 오늘따라 누군가를 조소하고 비웃고 싶으면 젊은작가상 수상집을 읽고, 허망하게 망해 가는 뭔가를 볼 때의 허무한 기분을 느끼고 싶으면 이상문학상 수상집 같은 거 읽고.”

(...)

“난 본인 스스로가 너무 불쌍해서 견딜 수 없어 하는 거, 자기 연민이라고 해야 하나, 그게 참 싫더라. 또 그러면서도 불쌍한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하잖아?”(58-61p)

 

 

잠깐, ‘마초’라고 해서 육체적으로든 외모적으로든 강인하거나 거친 모습의 남자를 상상했다면, 그건 조용히 정체를 감춘 채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수많은 마초들에 대한 실례일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보통의 평균 성인 여자보다 키가 작았고 말랐던 것이다.

(...)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가 쓰는 글에는 아무리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흔히 말하는 남성성에 대한 열망, 그리고 그와 비례하여 왜곡된 성관념이 진하게 묻어 나왔다. 당시 사회는 한창 미투운동이 일어나며 세상의 변화를 촉구하던 때였고, 실제로 세상이 변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처럼 변화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 항상 그렇듯이 한쪽에서 혼자 팔짱 낀 채 ‘아닌데? 내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 않은데?’라며 힘 빠지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 법이었다. 우리의 초록 뿔테가 그랬다. 당연히도 좋은 말을 들을 리 없었다. 그를 향해 폭격과도 같은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신에 대한 정당하지 않은 대우라 여겼고, 이 시대의 마초답게 스스로를 핍박 받는 (그리고 지성적인) 의인 혹은 순교자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이 싸움에서 절대 굴복할 수 없다는 듯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

앞서 내가 치성이 형 얘기를 하며 일명 어둠의 스승에 관하여 말을 했던가. 그렇다. 초록 뿔테는 명실상부 나의 스승이었다. 그를 보며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아! 나는 저러면 안 되겠구나.(108-109p)

 

 

이야기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 작가는 말하지 않고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때의 작가가 꼭 나라는 인간과 동일인일 필요는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글 속의 화자와 글을 쓰는 작가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잘 모르는 것 하나가 있다. 그건 바로, 때로는 그 작가마저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작가의 얼굴마저 흉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교묘한 연출을 시도했다. 머릿속에 내가 아닌 또 다른 작가를 상상했다. 그리고 그 작가라면 어떤 문장을 쓰고, 어떤 화자를 통해 어떤 캐릭터로 어떤 사건에 대해 어떤 어휘로 표현할까 고민하며 글을 썼다. 그 작가는 말하자면 우리의 스승님과는 정반대의 이유로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남성이다. 혹은 호감까진 아니더라도 일종의 정상참작은 된다.

그렇다. 정상참작이다.

처음부터 내가 그렇게 치밀했던 건 아니었다. 시작은 무의식적인 공포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렇게 써버린 일이었다. 하지만 같은 조 사람들에게 한번 찬사를 듣자 그것은 나의 명백한 지침이 되어 버렸다. 나는 그 지침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은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나를 향한 그처럼 따뜻한 박수와 응원 그리고 지지는 생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축축하고 어둡기만 하던 음지에 햇볕이 스며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들 나를 좋아했다. 아마 우리의 스승님과 대비되어 나란 인간이 더 돋보였으리라. 그들은 기본적으로 친절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들이었고, 그런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다는 건 정말이지 행복한 일이었다.

프랑켄이 태어난 건 바로 그즈음이었다. 처음엔 글 쓸 때만 잠깐씩 내 주위를 맴돌며 중얼거리던 그 존재가 언젠가부터 글을 쓰지 않을 때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하는 말과 사상은 아무런 줏대도 신념도 없이 마치 덕지덕지 매단 훈장처럼 제멋대로였다. 그래서 나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따서 그를 '프랑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

그것은 비열한 행위인가. 나는 스스로를 향해 묻는다.

하지만 내가 남의 것을 탐하거나 뭔가를 빼앗기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나는 단지 호의와 응원, 지지를 받고 싶은 것이다. 사랑받고 싶은 것이다.

물론 솔직히 말하면 이해되지 않는 것도 많다. 나와는 어떤 의미에서든 정체성이 다른 그들이 느끼는 감정과 사용하는 표현의 본질을,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앵무새처럼 흉내낼 뿐이다. 알 것 같다고, 이해할 것 같다고, 그리고 때로는 겸허히 반성이라도 하는 듯이(혼날 땐 입 꾹 다무는 게 상책이듯) 의도된 침묵도 해 가면서, 소소한 거짓말을 할 뿐이다. 하지만 그게 꼭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스포츠의 부정행위나 반칙처럼 무슨 큰 잘못을 한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내가 속으로 그들을 조롱하거나 그들에게 격렬히 반대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단지 나는 좀 헷갈릴 뿐이었고, 그러나 그 헷갈림은 잠시 보류한 채, 일단 지금보다는 더 사랑받을 수 있을 모습으로 나 자신을 위장한 것뿐이었다.

근데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더 비열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스스로를 향해 묻는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 행위로써 나에게 일종의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지, 나는 반문한다.

그리고 이렇게 반문함으로써 자기반성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건 아닌지, 나는 의심한다.

그리고 이렇게 의심함으로써 나는 적어도 양심적인 인간임을 넌지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에 또다시 묻는다. 어쩌면 또다시,

아······ 음······ 뭐라 해야 하지······. 좀 왠지······ 느끼하네요.

진실한 나는 진실한 대답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진실임은 과연 누가 판단할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진실한지 아닌지 스스로가 제일 잘 알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맞을까.

 

나의 진실을 판단할 자격이 과연 나에게 있을까?(110-113p)

 

 

더불어 그 선배는 편집증적인 화법을 구사했는데, 예컨대 아무도 모르는 마이너한 서브컬처 쪽 지식들과 유럽의 혁명운동가들을 조합한다든지, 주어와 술어에 서로 어울리지 않는 걸 집어넣거나 번역투의 대사를 써서 짐짓 문장을 더럽게 한다든지, 아무튼 의도적으로 그렇게 말하고 글을 씀으로써 자신이 일종의 힙스터라고 믿는 자였다. 특별해지고 싶다는 발버둥.

(...)

어쨌든 힙스터가 되기 위해 무진장 노력하면서도 '흐음? 힙스터가 뭐지?' 하는 그의 오묘한 표정을 볼 때면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132p)

 

 

그들, 프랑켄과 그년은 우리와 확실히 달랐다.

우리는 좋게 말하면 겁이 많고 조심스러운 인간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비겁한 인간이었다. 말을 하기보단 침묵하는 편이, 어떤 문장을 쓰기 보다는 쓰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혼자 속으로 의심하고 고민하며 생각하다가, 결국엔 아무 말도 아무 문장도 쓰지 않고는 나중에 가서 아, 그때 아무것도 안 하길 참 다행이다, 하고 안심하는 쪽이었다. 실제로 그간 우리가 그런 선택을 함으로써 이득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태도로는 「맨투맨」을 쓸 수 없었다. 의심하고 고민하며 생각하는 것 따위를 하다가는 아무것도 결정 지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심하고 고민하며 생각하는 것 따위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것은 행위가 아니라 비행위로 간주된다. 비행위는 욕망 없는 인간의 문장처럼 쓰이지 않는다. 쓰이지 않은 것을 읽어 주는 이는 없다.

 

그래서 뭐든 해야 하는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과 소음들은 이제 덮어 두고.

저 멀리로 아득한 곳으로 스스로를 던져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161-162p)

 

 

그런데 문제는 이 '안전한' 시나리오가 이제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꽤나 충격적인 사실인데, 왜냐하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러한 전략이 어느 정도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해함' 또는 '착함'이 하나의 화두가 되어 한국 사회를 휩쓸고 지나갔던 몇 년 전의 풍경을 기억하고 있다. 양극화되어 가는 사회에 대한 반발로 터져 나왔던 그러한 대중적 요구 속에서 「맨투맨」이 획득하고 있는 균형 감각은 어느 정도 미덕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작품이 표방하고 있는 중간자적 위치는 분명한 상업적인 소구점이 있었을 것이고, 때에 따라 그것이 밀수하고 있는 제삼자적 태도마저 어떤 신중함으로 칭송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고 이제 그런 시나리오는 팔리지 않는다. 사용자의 연령, 젠더, 소득, 학벌, 정치 성향에 맞춰 가장 알맞은 콘텐츠들이 선별되어 추천되는 2024년의 개인화된 미디어 환경 위에서 「맨투맨」이 취하고 있는 어정쩡한 태도는 기껏해야 '타겟층'이 불분명하다는 소리를 들을 뿐이다. 작품의 유일한 미덕이라 할 만한 절묘한 균형 감각은 이제 오히려 그것의 매력을 감소시키는 약점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그것의 진영적 애매함은 어떠한 매개도 없이 곧바로 상업적 애매함으로 이어지고 있다. 작중 「맨투맨」의 시나리오가 투자자들에게 퇴짜를 맞을 때마다 반복해서 제기되는 "주인공의 욕망이 보이지 않는다"(36쪽)는 지적은 한편으로 그 뒤편에 놓인 작가의 욕망을 집요하게 캐묻고 있다. 너는 대체 누구의 편을 들고 있냐고, 우리에게 그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하라고.

(...)

이 소설이 치성이 형의 사례를 경유해서 우리에게 전달하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이제는 더 이상 판정까지 가면 안 된다. 이기더라도 확실하게 이겨야 하고, 지더라도 확실하게 져야 한다.

(...)

이제 정말 그는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주장해야 한다. 실베스터 스탤론과 캐스터 세메냐 사이에서. 뉴할리우드 시네마와 페미니즘 시네마 사이에서. 어제의 좋음과 오늘의 나쁨 사이에서. 영호는 결국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러나 그는 결국 모든 것을 선택한다. 영호는 「맨투맨」을 위해 여섯 개의 서로 다른 결말을 쓴다.

(...)

이곳에는 모든 경우의 수가 뷔페처럼 미리 준비되어 있으며, 편집자, 투자자, 그리고 독자는 자신의 취향에 맞춰서 그중 하나의 「맨투맨」을 선택하여 읽으면 그만이다.

이것은 이 소설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가장 저열한 장면이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선택함으로써 사실 아무런 선택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립식 시나리오'의 구조 속에서 선택의 책임은 또다시 다른 사람에게 떠넘겨진다. 최대주의의 선율 사이로 모든 가능성들이 수확되지만 정작 그것을 지휘하고 있는 작가의 자리는 비어 있다. 그는 다만 어떠한 자극적인 가능성들을 배설한 채 암막 뒤로 쥐새끼처럼 숨어들고 있을 뿐이다. 소설의 윤리는 폭파되었다. 그는 또다시 도망치고 있다. 이건 비겁하다. 정말 쓰레기같이 비겁하다.

그런데······ 그에게 뭔가 다른 가능성이 열려 있었을까? 나는 여기에 잠시 멈추어 서서 ㅡ 마치 영호가 그러하였듯 ㅡ 그에게 주어질 수 있었던 다른 결말을 상상해 보지만, 도대체 좀처럼 그럴듯한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다. 말의 역설적인 의미에서, 무한히 열려 있는 「맨투맨」의 결말은 소설 속 영호의 이야기가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결말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이 비겁한 풍경은 2024년 한국에서 '「록키」를 좋아하는 한 30대 남자 작가 지망생'이 숨을 쉬며 글을 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그동안 가꾸어 온 글쓰기의 가능성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풍족하게 폐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 「맨투맨」의 결말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다.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분기들. 가능성의 개수에 비례하여 줄어드는 작가의 죄. 우리는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208-213p)

 

 

 

ㅡ 최재영, <맨투맨>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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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

 

 

이 책을 읽으며 작년부터 올해까지 출간된 단요의 책을 모두 읽었다. 아마 한국 작가 기준으로는 가장 많은 작품을 읽은 작가 중 한 명일 텐데 자기만의 확고한 주제 의식과 넘치는 창작력이 마음에 든다. 앞으로 출간될 어떤 형태의 글이든 읽을 생각.

 

 

 

중독자라면 누구나 실패를 좇았다. 지금껏 잃은 돈을 복구하겠다는 포부를 호기롭게 읊는 사람이라도 실은 파탄을 원했다. 고깃국물로 사골국물을 대신할 수 없듯 승리에만 만족하기란 불가능했다. 생명줄이 고스란히 드러날 때까지 돈을 긁어낸 뒤에야 비로소 선명해지는 희열이 있었으므로. 우혁은 그 감각에 유별나게 예민한 타입이었고, 죽었다 싶을 정도로 궁지에 몰릴 때면 어김없이 발기했다. 그런 예민성은 중학생 시절, 물이 불어난 계곡에 발을 담갔다가 급류에 휘말린 기억과 맞닿아 있었다. 팔다리의 움직임과 물살을 구분하지 못할 지경인데도 미끈거리는 피가 땀처럼 살갗을 뒤덮은 것만큼은 뚜렷이 느껴졌다. 그 외에는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코와 입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물이 공기 같았다. 수면 위아래로 넘실대는 하얀 게 돌인지 팔꿈치 뼈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갈비뼈 밑을 훑는 게 심장의 박동인가 죽음의 기운인가도 궁금했다. 통증과 쾌감이 뒤섞였다. 아득했다.(31-32p)

 

 

"우혁아, 네 문제는 그거야. 죄송하다고 한 다음 또 하는 거. 정상적인 상황이면 죄송하다는 말을 할 일이 안 생겨. 정상적인 사람은 너처럼 이상한 짓을 하지 않는단 말이야. 멀쩡하게 살면 그게 바로 대답이야. 그런데 너는 입으로만 죄송하다고 한 다음 행동은 똑같이 해. 심지어 미친 짓을 하는 이유도 남달라서 막을 수가 없어. 그냥 하는 거야. 정신 나간 건 넌데 왜 내가 미치는 기분이 들까? 이유가 도대체 뭘까?“

"죄송합니다.“

(...)

세상 사람 모두가 상식적이고 선량한데 자신만 이 꼴이라서 우혁은 조금 울었다.

울면 문제가 해결되나?

김 형의 말대로 미친 짓을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으니까 눈물이 나는 것이다.

이성은 정념의 노예라던데 자신이 딱 그 꼴이라고, 우혁은 생각했다. 그리고 노예의 본분을 받아들이고자 마음먹었다.(70-71p)

 

 

가령 나는 네가 정말로 부활을 경험했다는 걸 믿고, 그게 엄청난 은총이라는 것도 인정해. 그런데 요즘 세상에 그 정도의 은총을 받는 건, 처음 들른 카지노에서 슬롯머신 잭팟을 터뜨리는 것과 비슷한 불행이야. 저주나 마찬가지야. 어쨌든 사람은 취직을 하고 돈을 벌고 부모님 노후를 대비해야 하는데, 예수인지 도깨비인지 모를 것만 쫓아다니면 그럴 수가 없거든. 이쪽과 저쪽이 있는 거지. 이쪽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고, 저쪽은 그냥 저승이야. 그게 도박판이든 종교적 열반의 경지든 간에. 나는 너만큼은 아니지만 꽤 오래 저승에서 방황한 축이야. 정신을 차리고 이쪽으로 넘어오면 당장 가족의 태도부터가 변해. 내가 유령 꼴을 벗어나 남들과 똑같은 인간이 된 걸 느껴. 나는 바로 그 눈빛을 볼 때마다, 이게 맞는 길이구나, 하는 확신을 얻는단 말이야.(83-84p)

 

 

우혁은 소년의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했고, 절망과 희망이 한 쌍임을 절감했다. 좌절은 생생한 미래와 가망 없는 현재 사이에서 움트기 마련이다. 소년의 신통력을 믿는 것과 별개로 그에게는 주식 계좌에 넣을 돈이 부족했다. 부모님이 못난 아들놈을 믿고 투자할 리도 없었다. 가능성의 금고에 막대한 유산을 남기더라도 찾아가는 사람이 없다면 별무소용인 것이다.(105-106p)

 

 

자신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느껴본 적도 없었다. 그는 종종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척했지만 결정권을 쥔 것은 기분이었다. 충동이었다. 바타유나 베르그송 같은 사상가들의 논지를 빌리더라도, 그런 고찰은 현학적인 정당화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냥 심장이 시켜서 한 것이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텐데 거기에 어려운 말을 덧씌워봤자·····.(191p)

 

 

악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뉠 만합니다. 하나는 가진 사람이 더 많이 얻어내려 할 때 발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거의 가지지 못한 사람이 삶을 동아줄처럼 붙들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전자와 후자를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거니와 후자를 전자보다 미워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둘은 종종 뒤섞입니다. 가진 사람의 위에는 더 많이 가진 사람이 있으며, 없는 자의 아래에는 더욱 없는 자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용서와 이해는 몹시도 어려운 일이 됩니다.

보육원은 이 사실을 배우기에 아주 좋은 장소이며, 1980년대에는 특히 그랬습니다.

(...)

그 친구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저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분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인간은 좋은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에서 수많은 악이 기인한다고 봅니다. 악은 불행을 낳고, 불행은 다시 악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호오를 분별하며 자신에게 족한 것을 사랑하는 습성은 인간 행위의 원천이자 선행의 동력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의 정체입니다·····.(198-199p)

 

 

말인즉슨 기존 종파와의 차이점을 내세우는 것은 모범적인 시장 개척법이었다. 서혜라의 새천년파는 꽤나 현대적인 방식으로 틈새시장을 파고들었다. 현대사회의 세속화 경향에 적극적으로 영합하며(그러니까, 젊은이들이 교회를 피하는 세태에 발맞추어), 신학과 철학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 없이 살아오던 지식인들이 중년에 접어들 무렵 태도를 바꾸어, "나는 신을 믿어서가 아니라 삶의 지침을 위해 종교를 가졌다"라며 외치기 시작하는 현상을 상품화한 셈이었다. 그 나이쯤 먹으면 뭐라도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매 순간 영점을 새로이 조준하며 세계를 바라보는 작업은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외롭기까지 하다. 반면 초월적인 관념 하나를 가정함으로써 세상 사람 모두를 용서하고 사랑할 이유를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수지맞는 장사인가.(271-272p)

 

 

삼촌과 이모들 앞에서는 일부러 아빠에게 꼭 붙어 다녔다. 학교에서는 명절마다 할머니 댁에 가서 맛있는 요리를 원 없이 먹는 일, 사촌동생에게 한 대 얻어맞았다가 화해한 일 따위를 읊어댔다. 관광지에서 웃고 떠드는 다른 가족들을 볼 때마다, 그리고 아빠와 엄마와 내가 그들과 결코 구분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세상의 비밀이 여기에 숨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저 애들도 나만큼이나 아슬아슬한 곡예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할머니라든지 슬픔이라든지 고무 튜브라든지 사랑 같은 말들을 언제 어떤 자리에 넣어야 알맞은지 항상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파운드케이크가 파운드케이크인 이유는 밀가루와 설탕과 버터와 계란을 1파운드씩 섞어 굽기 때문이며, 세상은 몇 종류의 흉내와 그 흉내의 배합 비율로만 이루어져 있다. 비율이 어그러지거나 잘못된 재료가 들어가면 못 먹을 물건이 나오고 만다. 친구들이 나를 허언증이라 놀린 건 내가 그 사실을 너무 늦게 배웠기 때문이겠지.(318p)

 

 

씨발 정말이지 단체로 세뇌당한 게 아니라면 핼러윈이랍시고 호박 모양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그렇게나 많이 사 갈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인간을 인쇄한 폴리염화비닐 카드나 귀여운 캐릭터 모양을 한 아크릴 판때기도 모두 마찬가지다. 아니, 이런 것들은 단편적인 예시일 뿐이다. 뭐든 간에 웃으면서 돈 쓸 구석이 질식할 정도로 많다. 영화, 게임, 드라마, 스포츠 중계, 포르노, 책, 음악, 옷, 각종 취미 용품·····. 이런 와중 대형 마트의 매대는 여전히 각종 파스타 소스로 뒤덮여 있다(심지어 지난달에 신제품이 추가됐다). 나는 조강현의 견지에 좀 더 분명히 동의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무언가를 사랑하고 바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끔찍한 일이다.(410p)

 

 

 

ㅡ 단요, <피와 기름> 中, 래빗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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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

 

 

조금 간지럽긴 하더라. 작가가 소설 말고 다른 형태의 글도 좀 써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궁금하고 신기하다는 이유만으로 남의 사정을 알아내려는 태도가 당연해진다면 세상은 멈춰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남의 창문을 넘겨다보느라 바빠서. 혹은 남에게 창문을 들여다보일까 두려워서(82p)

 

 

사람들은 죽은 이가 한때 살아 있었음을 안다. 그 사람이 모범생이었다거나 직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거나 자식이 둘 있었다거나 하는 것도 안다. 절반가량은 그런 것조차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는 기억한다. 그러나 그런 사실들이 정확히 어떤 인상을 남겼는지는 떠올리지 못하고, 각각의 사실이 어떤 세부 사항으로 채워져 있는지도 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죽은 이를 잊는다는 것은 함께했던 시간을 툭 잘라내는 것과는 다르다. 그건 오히려 시간을 아주 빠르게 감아서 핵심만을 남기는 일에 가깝다. 부패한 시체가 뼈다귀로 변하듯이, 현존은 망각을 거쳐 이야기의 씨앗으로 변한다. 삶의 역동에 비하면 훨씬 간략하고 명쾌한 이야기로. 영웅의 업적은 교과서 한 단락으로 움츠러들고 위대한 제왕의 삶조차 두 페이지 분량으로 쭈그러들고 만다. 어떤 작가는 그걸 다시 수십만 자로 펼쳐내며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정말로 살아 숨 쉬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과거의 존재들이 살아 돌아오는 일은 없다. 여전히 이야기뿐이다.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언제고 사람을 매혹시킬 힘이 있을지라도 이웃을 건네는 아침 인사와 같은 행복을 전해주지는 못한다. 삶이 우리네 코앞에서 짖고 낑낑대는 (그리고 이따금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개라면, 이야기는 개가 있는 그림이다. 아주 멀리서 바라본 개, 오래전에 보았지만 지금은 소식을 몰라서 상상으로 그린 개, 추측과 기록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개,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상상된 개. 그림을 들여다보며 감탄할 수야 있지만 껴안을 방법이 없으므로, 우리의 삶에는 영영 맞붙지 못할 개(83-85p)

 

 

예전에 쓴 청소년 소설인 <다이브>에는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향해 "왜 슬퍼해? 기억해서 좋을 것도 없고 이미 지나간 일인데 잊어버리는 게 이득 아닌가?"라고 말하다가 주변인이게 핀잔을 듣는 소년이 나옵니다. 그건 제 목소리입니다.

성장기라는 단어 앞에서는, 어른들이 제게 '인간관게는 대차대조표가 아니며, 감정은 없애기로 마음먹는다고 해서 곧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를 알려주려 애쓰던 시간들이 떠오릅니다. 한편 이론가들을 통해 답을 얻으려 노력하던 것, 오랜 시간을 할애해 실천적인 노력을 기울이던 것도 기억납니다.(165-166p)

 

 

 

ㅡ 단요, <담장 너머 버베나> 中,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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