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7
너무나도 예리하고 신랄하게 k-창작계의 현실을 짚는 소설. 거의 대부분의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며 봤다. 2024년 한국 창작의 현실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영미권을 포함한 유럽의 창작 현실을 알고 싶다면 '옐로페이스'를 권한다.
“좋아, 좋아. 요즘 딱 해야 할 얘기야. 페미니즘도 그렇고, 시대도 그렇고, 여성 인물도 그렇고, 요즘 젊은 애들도 그렇고, 딱 그런, 그렇잖아? 아주 시의적절한, 그런 거잖아?”
피 PD는 ‘그렇다’는 게 대체 뭔지는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하나만은 확실했다.
“이거 통한다.”
하지만 팔리기 위해 쓰인 모든 영화 시나리오가 그렇듯 「맨투맨」의 운명도 순탄치 않았다. 투자사들을 도는 동안 몇 번의 수정을 거듭하면서도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원래 처음 쓴 「맨투맨」 속 초롱이는 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흑인 혼혈이었다. 그러나 어디서 그런 배우를 구하겠냐는, 그리고 설령 구한다고 해도 무명에 가까운 그런 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 어떻게 투자를 받으며 어떤 관객이 보러 오겠느냐는, 뭐 그런 지극히 당연한 문제의식으로 인해 결국 초롱이를 (토종) 한국인으로 바꿔야만 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초롱이 옆에 빠방한 남자 캐릭터를 붙여 일명 ‘남녀 투톱’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 여자 배우 한 명만 있으면 역시나 투자받기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선 가산점이었던 게 현실에선 마이너스 점수였다. 이외에도 승부 조작을 하는 악당의 역할이 필요하다든지, 초롱이 곁에는 예측 불허의 발랄하고 예쁜 여자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든지, 뭐 여러 가지 피드백들로 인해 「맨투맨」도 초롱이도 점점 바뀌어 갔다. 나는 갈수록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21-23p)
“시대를 이야기해야 하는 거야. 오늘날, 지금 이곳의 사회, 시스템! 그래, 인마!”
뒤이어 피 PD는 자신의 대학 시절과 1980년대의 투쟁, 그리고 그때 전성기를 구가한 문학과 예술에 대해 침 튀기며 떠들어 댔다. 나는 한평생을 그 단 몇 년간의 대학 시절과 확인불가능한 무용담을 가지고서 먹고사는 것 같은 피 PD와 그들 동년배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피 PD는 세상과 불화해야 한다며 목에 핏대를 올렸고, 혼자 골방에 갇힌 것 같은 이런 글 써 오지 말고 요즘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사는지 조사해서 지금 이 시대의 것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이 시대의 것을 찾으라고?
그 말은 나에게 마치 참치회를 불판에 구워 먹는 일과 같은 인지부조화를 불러일으켰다. 내가 바로 이 시대의 사람이고, 요즘의 젊은이였다. 그런데 나를 향해 이건 요즘의 것이 아니며 이 시대의 젊은이들 얘기가 아니라는 둥 판결을 내리는 것은 피 PD처럼 젊었을 적 일찌감치 사회에서 한자리씩 차지한 뒤 몇십 년간 그곳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는 저 잘난 세대의 분들이었다.
결국 나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닌가 봐. 이 시대의 젊은이가 아닌가 봐.(56-57p)
세상과의 불화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옥빛 누나였다. 옥빛 누나의 경우는 인생에 불화가 없어서 결국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케이스였다.
예술대학에 입학하고 막 두 번째 학기에 접어들었을 때, 옥빛 누나는 엄청난 깨달음에 그만 충격받고 말았다. 그 전까지 옥빛 누나는 한국 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불우한 가정환경,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가족끼리의 어떤 갈등과 폭력 등이 모두 소설이기에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뭐랄까, 히어로 영화 속 초능력자들처럼 현실엔 절대 존재하지 않지만 그냥 재미로 보는, 장르적인 클리셰 같은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대학에 오니 다들 앞다투어 자신들이 실제 그런 경험이 있음을 밝혔다. 처음 옥빛 누나는 그게 거짓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다 실화였던 것이다! 그건 초능력자들이 실존한다는 것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그들과 옥빛 누나는 극단적으로 달랐다. 10대 시절에 가족끼리 두 번의 세계여행을 떠났고 가족회의를 통해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매우 수평적이며 다정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면서도 자신의 가정이 지극히 평범한 줄로만 알았던 옥빛 누나로서는 그런 불화를 겪어 본 적이 없을뿐더러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소설을 쓴다는 애들은 모두 그런 경험이 있었고, 나아가 그런 경험이 흡사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가능성 혹은 자질과 품격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양 여겼다는 점이다. 심지어 어떤 평론가는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없다는 말을 했고, 학생들은 그 말을 경전처럼 입에 올리곤 했다.
상처는 일종의 훈장이었다. 이혼 정도는 상처 축에도 들지 못했다. 옥빛 누나가 속해 있던 그 집단에서는 자신이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크면 클수록, 쉽게 말해 과거 엄마나 아빠가 개차반이면 개차반일수록 어떤 자부심과 우월감을 보이는 것 같았다.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과는 달리 엄마나 아빠에게 그런 상처 따위 받아 본 적 없는 옥빛 누나를 마치 숭고한 혁명에 참여하지 않고 혼자 무임승차한 파렴치한처럼 대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옥빛 누나 본인마저 죄책감 비스무레한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서 어떤 날엔가는 참고 참던 옥빛 누나가 가족들을 향해 울부짖으며 따진 적도 있었다. 왜 나를 이렇게 화목하고 평탄하게 키웠나요! 왜 나한테는 시련을 주지 않은 거예요!
흐음, 한마디로 모두들 개변태 마조히스트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
“내 기분이 오늘따라 누군가를 조소하고 비웃고 싶으면 젊은작가상 수상집을 읽고, 허망하게 망해 가는 뭔가를 볼 때의 허무한 기분을 느끼고 싶으면 이상문학상 수상집 같은 거 읽고.”
(...)
“난 본인 스스로가 너무 불쌍해서 견딜 수 없어 하는 거, 자기 연민이라고 해야 하나, 그게 참 싫더라. 또 그러면서도 불쌍한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하잖아?”(58-61p)
잠깐, ‘마초’라고 해서 육체적으로든 외모적으로든 강인하거나 거친 모습의 남자를 상상했다면, 그건 조용히 정체를 감춘 채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수많은 마초들에 대한 실례일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보통의 평균 성인 여자보다 키가 작았고 말랐던 것이다.
(...)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가 쓰는 글에는 아무리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흔히 말하는 남성성에 대한 열망, 그리고 그와 비례하여 왜곡된 성관념이 진하게 묻어 나왔다. 당시 사회는 한창 미투운동이 일어나며 세상의 변화를 촉구하던 때였고, 실제로 세상이 변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처럼 변화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 항상 그렇듯이 한쪽에서 혼자 팔짱 낀 채 ‘아닌데? 내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 않은데?’라며 힘 빠지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 법이었다. 우리의 초록 뿔테가 그랬다. 당연히도 좋은 말을 들을 리 없었다. 그를 향해 폭격과도 같은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신에 대한 정당하지 않은 대우라 여겼고, 이 시대의 마초답게 스스로를 핍박 받는 (그리고 지성적인) 의인 혹은 순교자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이 싸움에서 절대 굴복할 수 없다는 듯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
앞서 내가 치성이 형 얘기를 하며 일명 어둠의 스승에 관하여 말을 했던가. 그렇다. 초록 뿔테는 명실상부 나의 스승이었다. 그를 보며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아! 나는 저러면 안 되겠구나.(108-109p)
이야기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 작가는 말하지 않고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때의 작가가 꼭 나라는 인간과 동일인일 필요는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글 속의 화자와 글을 쓰는 작가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잘 모르는 것 하나가 있다. 그건 바로, 때로는 그 작가마저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작가의 얼굴마저 흉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교묘한 연출을 시도했다. 머릿속에 내가 아닌 또 다른 작가를 상상했다. 그리고 그 작가라면 어떤 문장을 쓰고, 어떤 화자를 통해 어떤 캐릭터로 어떤 사건에 대해 어떤 어휘로 표현할까 고민하며 글을 썼다. 그 작가는 말하자면 우리의 스승님과는 정반대의 이유로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남성이다. 혹은 호감까진 아니더라도 일종의 정상참작은 된다.
그렇다. 정상참작이다.
처음부터 내가 그렇게 치밀했던 건 아니었다. 시작은 무의식적인 공포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렇게 써버린 일이었다. 하지만 같은 조 사람들에게 한번 찬사를 듣자 그것은 나의 명백한 지침이 되어 버렸다. 나는 그 지침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은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나를 향한 그처럼 따뜻한 박수와 응원 그리고 지지는 생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축축하고 어둡기만 하던 음지에 햇볕이 스며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들 나를 좋아했다. 아마 우리의 스승님과 대비되어 나란 인간이 더 돋보였으리라. 그들은 기본적으로 친절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들이었고, 그런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다는 건 정말이지 행복한 일이었다.
프랑켄이 태어난 건 바로 그즈음이었다. 처음엔 글 쓸 때만 잠깐씩 내 주위를 맴돌며 중얼거리던 그 존재가 언젠가부터 글을 쓰지 않을 때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하는 말과 사상은 아무런 줏대도 신념도 없이 마치 덕지덕지 매단 훈장처럼 제멋대로였다. 그래서 나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따서 그를 '프랑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
그것은 비열한 행위인가. 나는 스스로를 향해 묻는다.
하지만 내가 남의 것을 탐하거나 뭔가를 빼앗기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나는 단지 호의와 응원, 지지를 받고 싶은 것이다. 사랑받고 싶은 것이다.
물론 솔직히 말하면 이해되지 않는 것도 많다. 나와는 어떤 의미에서든 정체성이 다른 그들이 느끼는 감정과 사용하는 표현의 본질을,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앵무새처럼 흉내낼 뿐이다. 알 것 같다고, 이해할 것 같다고, 그리고 때로는 겸허히 반성이라도 하는 듯이(혼날 땐 입 꾹 다무는 게 상책이듯) 의도된 침묵도 해 가면서, 소소한 거짓말을 할 뿐이다. 하지만 그게 꼭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스포츠의 부정행위나 반칙처럼 무슨 큰 잘못을 한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내가 속으로 그들을 조롱하거나 그들에게 격렬히 반대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단지 나는 좀 헷갈릴 뿐이었고, 그러나 그 헷갈림은 잠시 보류한 채, 일단 지금보다는 더 사랑받을 수 있을 모습으로 나 자신을 위장한 것뿐이었다.
근데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더 비열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스스로를 향해 묻는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 행위로써 나에게 일종의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지, 나는 반문한다.
그리고 이렇게 반문함으로써 자기반성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건 아닌지, 나는 의심한다.
그리고 이렇게 의심함으로써 나는 적어도 양심적인 인간임을 넌지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에 또다시 묻는다. 어쩌면 또다시,
아······ 음······ 뭐라 해야 하지······. 좀 왠지······ 느끼하네요.
진실한 나는 진실한 대답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진실임은 과연 누가 판단할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진실한지 아닌지 스스로가 제일 잘 알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맞을까.
나의 진실을 판단할 자격이 과연 나에게 있을까?(110-113p)
더불어 그 선배는 편집증적인 화법을 구사했는데, 예컨대 아무도 모르는 마이너한 서브컬처 쪽 지식들과 유럽의 혁명운동가들을 조합한다든지, 주어와 술어에 서로 어울리지 않는 걸 집어넣거나 번역투의 대사를 써서 짐짓 문장을 더럽게 한다든지, 아무튼 의도적으로 그렇게 말하고 글을 씀으로써 자신이 일종의 힙스터라고 믿는 자였다. 특별해지고 싶다는 발버둥.
(...)
어쨌든 힙스터가 되기 위해 무진장 노력하면서도 '흐음? 힙스터가 뭐지?' 하는 그의 오묘한 표정을 볼 때면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132p)
그들, 프랑켄과 그년은 우리와 확실히 달랐다.
우리는 좋게 말하면 겁이 많고 조심스러운 인간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비겁한 인간이었다. 말을 하기보단 침묵하는 편이, 어떤 문장을 쓰기 보다는 쓰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혼자 속으로 의심하고 고민하며 생각하다가, 결국엔 아무 말도 아무 문장도 쓰지 않고는 나중에 가서 아, 그때 아무것도 안 하길 참 다행이다, 하고 안심하는 쪽이었다. 실제로 그간 우리가 그런 선택을 함으로써 이득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태도로는 「맨투맨」을 쓸 수 없었다. 의심하고 고민하며 생각하는 것 따위를 하다가는 아무것도 결정 지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심하고 고민하며 생각하는 것 따위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것은 행위가 아니라 비행위로 간주된다. 비행위는 욕망 없는 인간의 문장처럼 쓰이지 않는다. 쓰이지 않은 것을 읽어 주는 이는 없다.
그래서 뭐든 해야 하는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과 소음들은 이제 덮어 두고.
저 멀리로 아득한 곳으로 스스로를 던져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161-162p)
그런데 문제는 이 '안전한' 시나리오가 이제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꽤나 충격적인 사실인데, 왜냐하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러한 전략이 어느 정도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해함' 또는 '착함'이 하나의 화두가 되어 한국 사회를 휩쓸고 지나갔던 몇 년 전의 풍경을 기억하고 있다. 양극화되어 가는 사회에 대한 반발로 터져 나왔던 그러한 대중적 요구 속에서 「맨투맨」이 획득하고 있는 균형 감각은 어느 정도 미덕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작품이 표방하고 있는 중간자적 위치는 분명한 상업적인 소구점이 있었을 것이고, 때에 따라 그것이 밀수하고 있는 제삼자적 태도마저 어떤 신중함으로 칭송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고 이제 그런 시나리오는 팔리지 않는다. 사용자의 연령, 젠더, 소득, 학벌, 정치 성향에 맞춰 가장 알맞은 콘텐츠들이 선별되어 추천되는 2024년의 개인화된 미디어 환경 위에서 「맨투맨」이 취하고 있는 어정쩡한 태도는 기껏해야 '타겟층'이 불분명하다는 소리를 들을 뿐이다. 작품의 유일한 미덕이라 할 만한 절묘한 균형 감각은 이제 오히려 그것의 매력을 감소시키는 약점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그것의 진영적 애매함은 어떠한 매개도 없이 곧바로 상업적 애매함으로 이어지고 있다. 작중 「맨투맨」의 시나리오가 투자자들에게 퇴짜를 맞을 때마다 반복해서 제기되는 "주인공의 욕망이 보이지 않는다"(36쪽)는 지적은 한편으로 그 뒤편에 놓인 작가의 욕망을 집요하게 캐묻고 있다. 너는 대체 누구의 편을 들고 있냐고, 우리에게 그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하라고.
(...)
이 소설이 치성이 형의 사례를 경유해서 우리에게 전달하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이제는 더 이상 판정까지 가면 안 된다. 이기더라도 확실하게 이겨야 하고, 지더라도 확실하게 져야 한다.
(...)
이제 정말 그는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주장해야 한다. 실베스터 스탤론과 캐스터 세메냐 사이에서. 뉴할리우드 시네마와 페미니즘 시네마 사이에서. 어제의 좋음과 오늘의 나쁨 사이에서. 영호는 결국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러나 그는 결국 모든 것을 선택한다. 영호는 「맨투맨」을 위해 여섯 개의 서로 다른 결말을 쓴다.
(...)
이곳에는 모든 경우의 수가 뷔페처럼 미리 준비되어 있으며, 편집자, 투자자, 그리고 독자는 자신의 취향에 맞춰서 그중 하나의 「맨투맨」을 선택하여 읽으면 그만이다.
이것은 이 소설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가장 저열한 장면이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선택함으로써 사실 아무런 선택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립식 시나리오'의 구조 속에서 선택의 책임은 또다시 다른 사람에게 떠넘겨진다. 최대주의의 선율 사이로 모든 가능성들이 수확되지만 정작 그것을 지휘하고 있는 작가의 자리는 비어 있다. 그는 다만 어떠한 자극적인 가능성들을 배설한 채 암막 뒤로 쥐새끼처럼 숨어들고 있을 뿐이다. 소설의 윤리는 폭파되었다. 그는 또다시 도망치고 있다. 이건 비겁하다. 정말 쓰레기같이 비겁하다.
그런데······ 그에게 뭔가 다른 가능성이 열려 있었을까? 나는 여기에 잠시 멈추어 서서 ㅡ 마치 영호가 그러하였듯 ㅡ 그에게 주어질 수 있었던 다른 결말을 상상해 보지만, 도대체 좀처럼 그럴듯한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다. 말의 역설적인 의미에서, 무한히 열려 있는 「맨투맨」의 결말은 소설 속 영호의 이야기가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결말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이 비겁한 풍경은 2024년 한국에서 '「록키」를 좋아하는 한 30대 남자 작가 지망생'이 숨을 쉬며 글을 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그동안 가꾸어 온 글쓰기의 가능성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풍족하게 폐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 「맨투맨」의 결말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다.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분기들. 가능성의 개수에 비례하여 줄어드는 작가의 죄. 우리는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208-213p)
ㅡ 최재영, <맨투맨> 中,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