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7

 

 

너무나도 예리하고 신랄하게 k-창작계의 현실을 짚는 소설. 거의 대부분의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며 봤다. 2024년 한국 창작의 현실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영미권을 포함한 유럽의 창작 현실을 알고 싶다면 '옐로페이스'를 권한다.

 

 

 

“좋아, 좋아. 요즘 딱 해야 할 얘기야. 페미니즘도 그렇고, 시대도 그렇고, 여성 인물도 그렇고, 요즘 젊은 애들도 그렇고, 딱 그런, 그렇잖아? 아주 시의적절한, 그런 거잖아?”

피 PD는 ‘그렇다’는 게 대체 뭔지는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하나만은 확실했다.

 

“이거 통한다.”

 

하지만 팔리기 위해 쓰인 모든 영화 시나리오가 그렇듯 「맨투맨」의 운명도 순탄치 않았다. 투자사들을 도는 동안 몇 번의 수정을 거듭하면서도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원래 처음 쓴 「맨투맨」 속 초롱이는 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흑인 혼혈이었다. 그러나 어디서 그런 배우를 구하겠냐는, 그리고 설령 구한다고 해도 무명에 가까운 그런 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 어떻게 투자를 받으며 어떤 관객이 보러 오겠느냐는, 뭐 그런 지극히 당연한 문제의식으로 인해 결국 초롱이를 (토종) 한국인으로 바꿔야만 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초롱이 옆에 빠방한 남자 캐릭터를 붙여 일명 ‘남녀 투톱’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 여자 배우 한 명만 있으면 역시나 투자받기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선 가산점이었던 게 현실에선 마이너스 점수였다. 이외에도 승부 조작을 하는 악당의 역할이 필요하다든지, 초롱이 곁에는 예측 불허의 발랄하고 예쁜 여자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든지, 뭐 여러 가지 피드백들로 인해 「맨투맨」도 초롱이도 점점 바뀌어 갔다. 나는 갈수록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21-23p)

 

 

“시대를 이야기해야 하는 거야. 오늘날, 지금 이곳의 사회, 시스템! 그래, 인마!”

뒤이어 피 PD는 자신의 대학 시절과 1980년대의 투쟁, 그리고 그때 전성기를 구가한 문학과 예술에 대해 침 튀기며 떠들어 댔다. 나는 한평생을 그 단 몇 년간의 대학 시절과 확인불가능한 무용담을 가지고서 먹고사는 것 같은 피 PD와 그들 동년배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피 PD는 세상과 불화해야 한다며 목에 핏대를 올렸고, 혼자 골방에 갇힌 것 같은 이런 글 써 오지 말고 요즘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사는지 조사해서 지금 이 시대의 것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이 시대의 것을 찾으라고?

그 말은 나에게 마치 참치회를 불판에 구워 먹는 일과 같은 인지부조화를 불러일으켰다. 내가 바로 이 시대의 사람이고, 요즘의 젊은이였다. 그런데 나를 향해 이건 요즘의 것이 아니며 이 시대의 젊은이들 얘기가 아니라는 둥 판결을 내리는 것은 피 PD처럼 젊었을 적 일찌감치 사회에서 한자리씩 차지한 뒤 몇십 년간 그곳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는 저 잘난 세대의 분들이었다.

결국 나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닌가 봐. 이 시대의 젊은이가 아닌가 봐.(56-57p)

 

 

세상과의 불화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옥빛 누나였다. 옥빛 누나의 경우는 인생에 불화가 없어서 결국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케이스였다.

예술대학에 입학하고 막 두 번째 학기에 접어들었을 때, 옥빛 누나는 엄청난 깨달음에 그만 충격받고 말았다. 그 전까지 옥빛 누나는 한국 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불우한 가정환경,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가족끼리의 어떤 갈등과 폭력 등이 모두 소설이기에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뭐랄까, 히어로 영화 속 초능력자들처럼 현실엔 절대 존재하지 않지만 그냥 재미로 보는, 장르적인 클리셰 같은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대학에 오니 다들 앞다투어 자신들이 실제 그런 경험이 있음을 밝혔다. 처음 옥빛 누나는 그게 거짓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다 실화였던 것이다! 그건 초능력자들이 실존한다는 것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그들과 옥빛 누나는 극단적으로 달랐다. 10대 시절에 가족끼리 두 번의 세계여행을 떠났고 가족회의를 통해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매우 수평적이며 다정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면서도 자신의 가정이 지극히 평범한 줄로만 알았던 옥빛 누나로서는 그런 불화를 겪어 본 적이 없을뿐더러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소설을 쓴다는 애들은 모두 그런 경험이 있었고, 나아가 그런 경험이 흡사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가능성 혹은 자질과 품격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양 여겼다는 점이다. 심지어 어떤 평론가는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없다는 말을 했고, 학생들은 그 말을 경전처럼 입에 올리곤 했다.

상처는 일종의 훈장이었다. 이혼 정도는 상처 축에도 들지 못했다. 옥빛 누나가 속해 있던 그 집단에서는 자신이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크면 클수록, 쉽게 말해 과거 엄마나 아빠가 개차반이면 개차반일수록 어떤 자부심과 우월감을 보이는 것 같았다.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과는 달리 엄마나 아빠에게 그런 상처 따위 받아 본 적 없는 옥빛 누나를 마치 숭고한 혁명에 참여하지 않고 혼자 무임승차한 파렴치한처럼 대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옥빛 누나 본인마저 죄책감 비스무레한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서 어떤 날엔가는 참고 참던 옥빛 누나가 가족들을 향해 울부짖으며 따진 적도 있었다. 왜 나를 이렇게 화목하고 평탄하게 키웠나요! 왜 나한테는 시련을 주지 않은 거예요!

흐음, 한마디로 모두들 개변태 마조히스트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

“내 기분이 오늘따라 누군가를 조소하고 비웃고 싶으면 젊은작가상 수상집을 읽고, 허망하게 망해 가는 뭔가를 볼 때의 허무한 기분을 느끼고 싶으면 이상문학상 수상집 같은 거 읽고.”

(...)

“난 본인 스스로가 너무 불쌍해서 견딜 수 없어 하는 거, 자기 연민이라고 해야 하나, 그게 참 싫더라. 또 그러면서도 불쌍한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하잖아?”(58-61p)

 

 

잠깐, ‘마초’라고 해서 육체적으로든 외모적으로든 강인하거나 거친 모습의 남자를 상상했다면, 그건 조용히 정체를 감춘 채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수많은 마초들에 대한 실례일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보통의 평균 성인 여자보다 키가 작았고 말랐던 것이다.

(...)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가 쓰는 글에는 아무리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흔히 말하는 남성성에 대한 열망, 그리고 그와 비례하여 왜곡된 성관념이 진하게 묻어 나왔다. 당시 사회는 한창 미투운동이 일어나며 세상의 변화를 촉구하던 때였고, 실제로 세상이 변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처럼 변화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 항상 그렇듯이 한쪽에서 혼자 팔짱 낀 채 ‘아닌데? 내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 않은데?’라며 힘 빠지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 법이었다. 우리의 초록 뿔테가 그랬다. 당연히도 좋은 말을 들을 리 없었다. 그를 향해 폭격과도 같은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신에 대한 정당하지 않은 대우라 여겼고, 이 시대의 마초답게 스스로를 핍박 받는 (그리고 지성적인) 의인 혹은 순교자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이 싸움에서 절대 굴복할 수 없다는 듯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

앞서 내가 치성이 형 얘기를 하며 일명 어둠의 스승에 관하여 말을 했던가. 그렇다. 초록 뿔테는 명실상부 나의 스승이었다. 그를 보며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아! 나는 저러면 안 되겠구나.(108-109p)

 

 

이야기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 작가는 말하지 않고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때의 작가가 꼭 나라는 인간과 동일인일 필요는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글 속의 화자와 글을 쓰는 작가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잘 모르는 것 하나가 있다. 그건 바로, 때로는 그 작가마저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작가의 얼굴마저 흉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교묘한 연출을 시도했다. 머릿속에 내가 아닌 또 다른 작가를 상상했다. 그리고 그 작가라면 어떤 문장을 쓰고, 어떤 화자를 통해 어떤 캐릭터로 어떤 사건에 대해 어떤 어휘로 표현할까 고민하며 글을 썼다. 그 작가는 말하자면 우리의 스승님과는 정반대의 이유로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남성이다. 혹은 호감까진 아니더라도 일종의 정상참작은 된다.

그렇다. 정상참작이다.

처음부터 내가 그렇게 치밀했던 건 아니었다. 시작은 무의식적인 공포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렇게 써버린 일이었다. 하지만 같은 조 사람들에게 한번 찬사를 듣자 그것은 나의 명백한 지침이 되어 버렸다. 나는 그 지침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은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나를 향한 그처럼 따뜻한 박수와 응원 그리고 지지는 생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축축하고 어둡기만 하던 음지에 햇볕이 스며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들 나를 좋아했다. 아마 우리의 스승님과 대비되어 나란 인간이 더 돋보였으리라. 그들은 기본적으로 친절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들이었고, 그런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다는 건 정말이지 행복한 일이었다.

프랑켄이 태어난 건 바로 그즈음이었다. 처음엔 글 쓸 때만 잠깐씩 내 주위를 맴돌며 중얼거리던 그 존재가 언젠가부터 글을 쓰지 않을 때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하는 말과 사상은 아무런 줏대도 신념도 없이 마치 덕지덕지 매단 훈장처럼 제멋대로였다. 그래서 나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따서 그를 '프랑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

그것은 비열한 행위인가. 나는 스스로를 향해 묻는다.

하지만 내가 남의 것을 탐하거나 뭔가를 빼앗기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나는 단지 호의와 응원, 지지를 받고 싶은 것이다. 사랑받고 싶은 것이다.

물론 솔직히 말하면 이해되지 않는 것도 많다. 나와는 어떤 의미에서든 정체성이 다른 그들이 느끼는 감정과 사용하는 표현의 본질을,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앵무새처럼 흉내낼 뿐이다. 알 것 같다고, 이해할 것 같다고, 그리고 때로는 겸허히 반성이라도 하는 듯이(혼날 땐 입 꾹 다무는 게 상책이듯) 의도된 침묵도 해 가면서, 소소한 거짓말을 할 뿐이다. 하지만 그게 꼭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스포츠의 부정행위나 반칙처럼 무슨 큰 잘못을 한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내가 속으로 그들을 조롱하거나 그들에게 격렬히 반대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단지 나는 좀 헷갈릴 뿐이었고, 그러나 그 헷갈림은 잠시 보류한 채, 일단 지금보다는 더 사랑받을 수 있을 모습으로 나 자신을 위장한 것뿐이었다.

근데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더 비열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스스로를 향해 묻는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 행위로써 나에게 일종의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지, 나는 반문한다.

그리고 이렇게 반문함으로써 자기반성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건 아닌지, 나는 의심한다.

그리고 이렇게 의심함으로써 나는 적어도 양심적인 인간임을 넌지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에 또다시 묻는다. 어쩌면 또다시,

아······ 음······ 뭐라 해야 하지······. 좀 왠지······ 느끼하네요.

진실한 나는 진실한 대답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진실임은 과연 누가 판단할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진실한지 아닌지 스스로가 제일 잘 알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맞을까.

 

나의 진실을 판단할 자격이 과연 나에게 있을까?(110-113p)

 

 

더불어 그 선배는 편집증적인 화법을 구사했는데, 예컨대 아무도 모르는 마이너한 서브컬처 쪽 지식들과 유럽의 혁명운동가들을 조합한다든지, 주어와 술어에 서로 어울리지 않는 걸 집어넣거나 번역투의 대사를 써서 짐짓 문장을 더럽게 한다든지, 아무튼 의도적으로 그렇게 말하고 글을 씀으로써 자신이 일종의 힙스터라고 믿는 자였다. 특별해지고 싶다는 발버둥.

(...)

어쨌든 힙스터가 되기 위해 무진장 노력하면서도 '흐음? 힙스터가 뭐지?' 하는 그의 오묘한 표정을 볼 때면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132p)

 

 

그들, 프랑켄과 그년은 우리와 확실히 달랐다.

우리는 좋게 말하면 겁이 많고 조심스러운 인간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비겁한 인간이었다. 말을 하기보단 침묵하는 편이, 어떤 문장을 쓰기 보다는 쓰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혼자 속으로 의심하고 고민하며 생각하다가, 결국엔 아무 말도 아무 문장도 쓰지 않고는 나중에 가서 아, 그때 아무것도 안 하길 참 다행이다, 하고 안심하는 쪽이었다. 실제로 그간 우리가 그런 선택을 함으로써 이득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태도로는 「맨투맨」을 쓸 수 없었다. 의심하고 고민하며 생각하는 것 따위를 하다가는 아무것도 결정 지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심하고 고민하며 생각하는 것 따위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것은 행위가 아니라 비행위로 간주된다. 비행위는 욕망 없는 인간의 문장처럼 쓰이지 않는다. 쓰이지 않은 것을 읽어 주는 이는 없다.

 

그래서 뭐든 해야 하는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과 소음들은 이제 덮어 두고.

저 멀리로 아득한 곳으로 스스로를 던져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161-162p)

 

 

그런데 문제는 이 '안전한' 시나리오가 이제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꽤나 충격적인 사실인데, 왜냐하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러한 전략이 어느 정도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해함' 또는 '착함'이 하나의 화두가 되어 한국 사회를 휩쓸고 지나갔던 몇 년 전의 풍경을 기억하고 있다. 양극화되어 가는 사회에 대한 반발로 터져 나왔던 그러한 대중적 요구 속에서 「맨투맨」이 획득하고 있는 균형 감각은 어느 정도 미덕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작품이 표방하고 있는 중간자적 위치는 분명한 상업적인 소구점이 있었을 것이고, 때에 따라 그것이 밀수하고 있는 제삼자적 태도마저 어떤 신중함으로 칭송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고 이제 그런 시나리오는 팔리지 않는다. 사용자의 연령, 젠더, 소득, 학벌, 정치 성향에 맞춰 가장 알맞은 콘텐츠들이 선별되어 추천되는 2024년의 개인화된 미디어 환경 위에서 「맨투맨」이 취하고 있는 어정쩡한 태도는 기껏해야 '타겟층'이 불분명하다는 소리를 들을 뿐이다. 작품의 유일한 미덕이라 할 만한 절묘한 균형 감각은 이제 오히려 그것의 매력을 감소시키는 약점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그것의 진영적 애매함은 어떠한 매개도 없이 곧바로 상업적 애매함으로 이어지고 있다. 작중 「맨투맨」의 시나리오가 투자자들에게 퇴짜를 맞을 때마다 반복해서 제기되는 "주인공의 욕망이 보이지 않는다"(36쪽)는 지적은 한편으로 그 뒤편에 놓인 작가의 욕망을 집요하게 캐묻고 있다. 너는 대체 누구의 편을 들고 있냐고, 우리에게 그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하라고.

(...)

이 소설이 치성이 형의 사례를 경유해서 우리에게 전달하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이제는 더 이상 판정까지 가면 안 된다. 이기더라도 확실하게 이겨야 하고, 지더라도 확실하게 져야 한다.

(...)

이제 정말 그는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주장해야 한다. 실베스터 스탤론과 캐스터 세메냐 사이에서. 뉴할리우드 시네마와 페미니즘 시네마 사이에서. 어제의 좋음과 오늘의 나쁨 사이에서. 영호는 결국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러나 그는 결국 모든 것을 선택한다. 영호는 「맨투맨」을 위해 여섯 개의 서로 다른 결말을 쓴다.

(...)

이곳에는 모든 경우의 수가 뷔페처럼 미리 준비되어 있으며, 편집자, 투자자, 그리고 독자는 자신의 취향에 맞춰서 그중 하나의 「맨투맨」을 선택하여 읽으면 그만이다.

이것은 이 소설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가장 저열한 장면이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선택함으로써 사실 아무런 선택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립식 시나리오'의 구조 속에서 선택의 책임은 또다시 다른 사람에게 떠넘겨진다. 최대주의의 선율 사이로 모든 가능성들이 수확되지만 정작 그것을 지휘하고 있는 작가의 자리는 비어 있다. 그는 다만 어떠한 자극적인 가능성들을 배설한 채 암막 뒤로 쥐새끼처럼 숨어들고 있을 뿐이다. 소설의 윤리는 폭파되었다. 그는 또다시 도망치고 있다. 이건 비겁하다. 정말 쓰레기같이 비겁하다.

그런데······ 그에게 뭔가 다른 가능성이 열려 있었을까? 나는 여기에 잠시 멈추어 서서 ㅡ 마치 영호가 그러하였듯 ㅡ 그에게 주어질 수 있었던 다른 결말을 상상해 보지만, 도대체 좀처럼 그럴듯한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다. 말의 역설적인 의미에서, 무한히 열려 있는 「맨투맨」의 결말은 소설 속 영호의 이야기가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결말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이 비겁한 풍경은 2024년 한국에서 '「록키」를 좋아하는 한 30대 남자 작가 지망생'이 숨을 쉬며 글을 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그동안 가꾸어 온 글쓰기의 가능성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풍족하게 폐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 「맨투맨」의 결말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다.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분기들. 가능성의 개수에 비례하여 줄어드는 작가의 죄. 우리는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208-213p)

 

 

 

ㅡ 최재영, <맨투맨>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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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

 

 

이 책을 읽으며 작년부터 올해까지 출간된 단요의 책을 모두 읽었다. 아마 한국 작가 기준으로는 가장 많은 작품을 읽은 작가 중 한 명일 텐데 자기만의 확고한 주제 의식과 넘치는 창작력이 마음에 든다. 앞으로 출간될 어떤 형태의 글이든 읽을 생각.

 

 

 

중독자라면 누구나 실패를 좇았다. 지금껏 잃은 돈을 복구하겠다는 포부를 호기롭게 읊는 사람이라도 실은 파탄을 원했다. 고깃국물로 사골국물을 대신할 수 없듯 승리에만 만족하기란 불가능했다. 생명줄이 고스란히 드러날 때까지 돈을 긁어낸 뒤에야 비로소 선명해지는 희열이 있었으므로. 우혁은 그 감각에 유별나게 예민한 타입이었고, 죽었다 싶을 정도로 궁지에 몰릴 때면 어김없이 발기했다. 그런 예민성은 중학생 시절, 물이 불어난 계곡에 발을 담갔다가 급류에 휘말린 기억과 맞닿아 있었다. 팔다리의 움직임과 물살을 구분하지 못할 지경인데도 미끈거리는 피가 땀처럼 살갗을 뒤덮은 것만큼은 뚜렷이 느껴졌다. 그 외에는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코와 입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물이 공기 같았다. 수면 위아래로 넘실대는 하얀 게 돌인지 팔꿈치 뼈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갈비뼈 밑을 훑는 게 심장의 박동인가 죽음의 기운인가도 궁금했다. 통증과 쾌감이 뒤섞였다. 아득했다.(31-32p)

 

 

"우혁아, 네 문제는 그거야. 죄송하다고 한 다음 또 하는 거. 정상적인 상황이면 죄송하다는 말을 할 일이 안 생겨. 정상적인 사람은 너처럼 이상한 짓을 하지 않는단 말이야. 멀쩡하게 살면 그게 바로 대답이야. 그런데 너는 입으로만 죄송하다고 한 다음 행동은 똑같이 해. 심지어 미친 짓을 하는 이유도 남달라서 막을 수가 없어. 그냥 하는 거야. 정신 나간 건 넌데 왜 내가 미치는 기분이 들까? 이유가 도대체 뭘까?“

"죄송합니다.“

(...)

세상 사람 모두가 상식적이고 선량한데 자신만 이 꼴이라서 우혁은 조금 울었다.

울면 문제가 해결되나?

김 형의 말대로 미친 짓을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으니까 눈물이 나는 것이다.

이성은 정념의 노예라던데 자신이 딱 그 꼴이라고, 우혁은 생각했다. 그리고 노예의 본분을 받아들이고자 마음먹었다.(70-71p)

 

 

가령 나는 네가 정말로 부활을 경험했다는 걸 믿고, 그게 엄청난 은총이라는 것도 인정해. 그런데 요즘 세상에 그 정도의 은총을 받는 건, 처음 들른 카지노에서 슬롯머신 잭팟을 터뜨리는 것과 비슷한 불행이야. 저주나 마찬가지야. 어쨌든 사람은 취직을 하고 돈을 벌고 부모님 노후를 대비해야 하는데, 예수인지 도깨비인지 모를 것만 쫓아다니면 그럴 수가 없거든. 이쪽과 저쪽이 있는 거지. 이쪽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고, 저쪽은 그냥 저승이야. 그게 도박판이든 종교적 열반의 경지든 간에. 나는 너만큼은 아니지만 꽤 오래 저승에서 방황한 축이야. 정신을 차리고 이쪽으로 넘어오면 당장 가족의 태도부터가 변해. 내가 유령 꼴을 벗어나 남들과 똑같은 인간이 된 걸 느껴. 나는 바로 그 눈빛을 볼 때마다, 이게 맞는 길이구나, 하는 확신을 얻는단 말이야.(83-84p)

 

 

우혁은 소년의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했고, 절망과 희망이 한 쌍임을 절감했다. 좌절은 생생한 미래와 가망 없는 현재 사이에서 움트기 마련이다. 소년의 신통력을 믿는 것과 별개로 그에게는 주식 계좌에 넣을 돈이 부족했다. 부모님이 못난 아들놈을 믿고 투자할 리도 없었다. 가능성의 금고에 막대한 유산을 남기더라도 찾아가는 사람이 없다면 별무소용인 것이다.(105-106p)

 

 

자신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느껴본 적도 없었다. 그는 종종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척했지만 결정권을 쥔 것은 기분이었다. 충동이었다. 바타유나 베르그송 같은 사상가들의 논지를 빌리더라도, 그런 고찰은 현학적인 정당화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냥 심장이 시켜서 한 것이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텐데 거기에 어려운 말을 덧씌워봤자·····.(191p)

 

 

악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뉠 만합니다. 하나는 가진 사람이 더 많이 얻어내려 할 때 발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거의 가지지 못한 사람이 삶을 동아줄처럼 붙들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전자와 후자를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거니와 후자를 전자보다 미워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둘은 종종 뒤섞입니다. 가진 사람의 위에는 더 많이 가진 사람이 있으며, 없는 자의 아래에는 더욱 없는 자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용서와 이해는 몹시도 어려운 일이 됩니다.

보육원은 이 사실을 배우기에 아주 좋은 장소이며, 1980년대에는 특히 그랬습니다.

(...)

그 친구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저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분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인간은 좋은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에서 수많은 악이 기인한다고 봅니다. 악은 불행을 낳고, 불행은 다시 악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호오를 분별하며 자신에게 족한 것을 사랑하는 습성은 인간 행위의 원천이자 선행의 동력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의 정체입니다·····.(198-199p)

 

 

말인즉슨 기존 종파와의 차이점을 내세우는 것은 모범적인 시장 개척법이었다. 서혜라의 새천년파는 꽤나 현대적인 방식으로 틈새시장을 파고들었다. 현대사회의 세속화 경향에 적극적으로 영합하며(그러니까, 젊은이들이 교회를 피하는 세태에 발맞추어), 신학과 철학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 없이 살아오던 지식인들이 중년에 접어들 무렵 태도를 바꾸어, "나는 신을 믿어서가 아니라 삶의 지침을 위해 종교를 가졌다"라며 외치기 시작하는 현상을 상품화한 셈이었다. 그 나이쯤 먹으면 뭐라도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매 순간 영점을 새로이 조준하며 세계를 바라보는 작업은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외롭기까지 하다. 반면 초월적인 관념 하나를 가정함으로써 세상 사람 모두를 용서하고 사랑할 이유를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수지맞는 장사인가.(271-272p)

 

 

삼촌과 이모들 앞에서는 일부러 아빠에게 꼭 붙어 다녔다. 학교에서는 명절마다 할머니 댁에 가서 맛있는 요리를 원 없이 먹는 일, 사촌동생에게 한 대 얻어맞았다가 화해한 일 따위를 읊어댔다. 관광지에서 웃고 떠드는 다른 가족들을 볼 때마다, 그리고 아빠와 엄마와 내가 그들과 결코 구분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세상의 비밀이 여기에 숨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저 애들도 나만큼이나 아슬아슬한 곡예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할머니라든지 슬픔이라든지 고무 튜브라든지 사랑 같은 말들을 언제 어떤 자리에 넣어야 알맞은지 항상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파운드케이크가 파운드케이크인 이유는 밀가루와 설탕과 버터와 계란을 1파운드씩 섞어 굽기 때문이며, 세상은 몇 종류의 흉내와 그 흉내의 배합 비율로만 이루어져 있다. 비율이 어그러지거나 잘못된 재료가 들어가면 못 먹을 물건이 나오고 만다. 친구들이 나를 허언증이라 놀린 건 내가 그 사실을 너무 늦게 배웠기 때문이겠지.(318p)

 

 

씨발 정말이지 단체로 세뇌당한 게 아니라면 핼러윈이랍시고 호박 모양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그렇게나 많이 사 갈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인간을 인쇄한 폴리염화비닐 카드나 귀여운 캐릭터 모양을 한 아크릴 판때기도 모두 마찬가지다. 아니, 이런 것들은 단편적인 예시일 뿐이다. 뭐든 간에 웃으면서 돈 쓸 구석이 질식할 정도로 많다. 영화, 게임, 드라마, 스포츠 중계, 포르노, 책, 음악, 옷, 각종 취미 용품·····. 이런 와중 대형 마트의 매대는 여전히 각종 파스타 소스로 뒤덮여 있다(심지어 지난달에 신제품이 추가됐다). 나는 조강현의 견지에 좀 더 분명히 동의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무언가를 사랑하고 바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끔찍한 일이다.(410p)

 

 

 

ㅡ 단요, <피와 기름> 中, 래빗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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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

 

 

조금 간지럽긴 하더라. 작가가 소설 말고 다른 형태의 글도 좀 써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궁금하고 신기하다는 이유만으로 남의 사정을 알아내려는 태도가 당연해진다면 세상은 멈춰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남의 창문을 넘겨다보느라 바빠서. 혹은 남에게 창문을 들여다보일까 두려워서(82p)

 

 

사람들은 죽은 이가 한때 살아 있었음을 안다. 그 사람이 모범생이었다거나 직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거나 자식이 둘 있었다거나 하는 것도 안다. 절반가량은 그런 것조차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는 기억한다. 그러나 그런 사실들이 정확히 어떤 인상을 남겼는지는 떠올리지 못하고, 각각의 사실이 어떤 세부 사항으로 채워져 있는지도 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죽은 이를 잊는다는 것은 함께했던 시간을 툭 잘라내는 것과는 다르다. 그건 오히려 시간을 아주 빠르게 감아서 핵심만을 남기는 일에 가깝다. 부패한 시체가 뼈다귀로 변하듯이, 현존은 망각을 거쳐 이야기의 씨앗으로 변한다. 삶의 역동에 비하면 훨씬 간략하고 명쾌한 이야기로. 영웅의 업적은 교과서 한 단락으로 움츠러들고 위대한 제왕의 삶조차 두 페이지 분량으로 쭈그러들고 만다. 어떤 작가는 그걸 다시 수십만 자로 펼쳐내며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정말로 살아 숨 쉬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과거의 존재들이 살아 돌아오는 일은 없다. 여전히 이야기뿐이다.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언제고 사람을 매혹시킬 힘이 있을지라도 이웃을 건네는 아침 인사와 같은 행복을 전해주지는 못한다. 삶이 우리네 코앞에서 짖고 낑낑대는 (그리고 이따금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개라면, 이야기는 개가 있는 그림이다. 아주 멀리서 바라본 개, 오래전에 보았지만 지금은 소식을 몰라서 상상으로 그린 개, 추측과 기록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개,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상상된 개. 그림을 들여다보며 감탄할 수야 있지만 껴안을 방법이 없으므로, 우리의 삶에는 영영 맞붙지 못할 개(83-85p)

 

 

예전에 쓴 청소년 소설인 <다이브>에는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향해 "왜 슬퍼해? 기억해서 좋을 것도 없고 이미 지나간 일인데 잊어버리는 게 이득 아닌가?"라고 말하다가 주변인이게 핀잔을 듣는 소년이 나옵니다. 그건 제 목소리입니다.

성장기라는 단어 앞에서는, 어른들이 제게 '인간관게는 대차대조표가 아니며, 감정은 없애기로 마음먹는다고 해서 곧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를 알려주려 애쓰던 시간들이 떠오릅니다. 한편 이론가들을 통해 답을 얻으려 노력하던 것, 오랜 시간을 할애해 실천적인 노력을 기울이던 것도 기억납니다.(165-166p)

 

 

 

ㅡ 단요, <담장 너머 버베나> 中,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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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8

 

 

"유안 씨, 그거 알아요? 그곳의 귀환자들은 아예 치료도 거부하고, 움직임도 포기하고 침상에만 누워 살아간대요. 구호단체들이 그렇게 지원을 많이 보냈는데도, 좀처럼 나올 생각이 없다고요. 그에 비하면, 유안 씨는 얼마나 대단하고 훌륭해요. 도와주겠다는 손길이 그렇게 많은데, 다 포기하고 게으르게 누워만 있다니. 정말 너무 한심하지 뭐예요. 그런데 유안 씨, 세상에는 생각보다 그런 사람들이 꽤 많다? 아무리 돕겠다고 해도 일어나질 않아요. 자기 몸을 책임지고 보듬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자신뿐인데도, 나 몰라라 하고 스스로를 포기한 거지. 어쩜 그렇게 살 수가 있을까? 난 이해가 안 돼. 이해를 할 수가 없어."(169-170p)

 

 

한나가 허전한 내 허벅지를 쓰다음을 때, 그러면서 "금속 다리로 구두를 신고 춤추는 네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데, 그걸 본 순간 나는 사랑에 빠졌지"하고 속삭일 때, 나는 고통을 기꺼이 견디며 춤을 추고 싶었다. 그럴 때면 한나가 나의 아름다움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비참함마저도 사랑한다고 믿고 싶었다. 실제로도 어느 정도는 그랬다. 한나가 내게 바란 것은 완성된 형태의 아름다움이나 강인함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어떤 나아감의 방향, 지향점이었다. 불안정한 지면 위를 위태롭게 한 발 한 발 내딛는, 넘어질 듯 아슬아슬한 춤을 지속하는, 그 춤이 지속되기만 한다면, 한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새벽이 되면 나는 알 수 있었다. 고요와 적막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깊은 밤이 되면, 바로 이곳이야말로 내가 궁극적으로 머물러야 할 자리라는 걸. 흔들림도 뒤척임도 없는 부동의 장소. 움직임이 없는 몸. 모든 것이 멈춰 선 몸.

그 몸 안에서 나는 고통도 괴로움도 없이 자유로웠다.(171-172p)

 

 

왜 어떤 이들은 그렇게 적극적으로 삶을 거부하는가. 왜 비이성적으로 스스로를 해치려 드는가.

단 한 번 므레모사에 직접 간 적이 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풍경이 떠오른다. 그곳에서 나는 놀랍고 끔찍한 것을 보았다. 움직이는 것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경배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지만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 복종했다. 이미 죽어 버린 존재들을 위해. 그 관계가 어떻게 성립하는지, 왜 가능한지는 지금까지도 파악하지 못했다. 어떤 초자연적 현상이나 믿음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듯했다. 그것은 몹시 기이한 풍경이자 종교적인 풍경이었다.

므레모사에서는 삶의 권력을 고정된 것들이 쥐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끝내 설득할 수 없었다.

 

그 의사의 회고를 읽고서야 나는 내가 무엇을 바라왔는지 비로소 알았다.

내가 바라는 건 죽음이 아니었다. 나는 삶을 원했다. 누구보다도 삶을 갈망했다. 단지 다른 방식의 삶을 원할 뿐이었다.(174-175p)

 

 

 

 

 

ㅡ 김초엽, <므레모사> 中,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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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6

 

 

이제부터 중요한 건 피가 멈추지 않게 하는 거야.

(...)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된대. 계속 피가 흐르고 내가 통증을 느껴야 한 대.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했어.

멍하게 나는 되물었다.

····· 신경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데?

불쑥 인선의 얼굴이 아이처럼 밝아져 하마터면 함께 웃을 뻔했다.

뭐, 썩는 거지. 수술한 위쪽 마디가.

(...)

그렇게 안 되도록 삼 분에 한 번씩 이걸 하는 거야. 이십사 시간 동안 간병인이 곁에서.

삼 분에 한 번?

상대의 말을 따라 할 줄밖에 모르게 된 사람처럼 나는 되물었다.

그럼 잠은 어떻게 해?

난 그냥 누워 있고, 밤에 오시는 분은 깜박깜박 졸다가 바늘로 찔러주셔.

얼마나 오래 이렇게 해야 해?

앞으로 삼 주 정도.

(...)

네 말이 맞아. 그리고 설령 지금 포기한다 해도, 없어진 손가락의 통증을 평생 느끼는 경우가 많아서 의사는 권하지 않는다고 했어.

인선이 정말로 진지하게 포기하려고 했다는 것을 그때 나는 알았다. 삼 분에 한 번씩 저 자리를 찔릴 때마다 그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의료진에게 물은 것이다. 지금 깨끗하게 포기하면 안 되겠느냐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의사가 환지통에 대해 말했을 것이다. 지금은 물론 손가락을 지키는 편의 통증이 더 강하지만, 손가락을 포기할 경우 통증은 손쓸 수 없이 평생 계속될 거라고.(40-42p)

 

 

나는 바닷고기를 안 먹어요. 그 시국 때는 흉년에다가 젖먹이까지 딸려 있으니까, 내가 안 먹어 젖이 안 나오면 새끼가 죽을 형편이니 할 수 없이 닥치는 대로 먹었지요. 하지만 살 만해진 다음부터는 이날까지 한 점도 안 먹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 뜯어먹었을 거 아닙니까?(225p)

 

 

지면과 연결된 수직갱도 입구에서 탐사 팀이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렸다고 기자는 썼다. 오십 년 동안 입구를 밀봉했던 콘크리트가 부서지자, 갱도를 타고 내려갈 공간도 없이 어마어마한 유해들이 쏟아져나왔다. 그 입구가 처형 장소였던 것이다. 거기 세워진 사람들이 총을 맞고 갱도에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기자는 썼다. 아래쪽의 제2수평갱도를 시신들이 채운 뒤 그 위로 떨어진 시신들이 제1수평갱도까지 차올라 흩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지상과 맞닿은 수직갱도 입구까지 시신으로 가득찼을 때 군인들이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썼다.

(...)

삼 년 동안 사백 구를 수습하고 2009년에 중단했으니까, 지금도 삼천 구 이상이 갱도에 남아 있어.

(...)

그 삼 년은, 여기뿐 아니라 전국의 학살 터에서 유해가 발굴된 기간이기도 해.(284-285p)

 

 

여기쯤 멈춰 서서 엄마는 저 건너를 봤어. 기슭 바로 아래까지 차오른 물이 폭포 같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갔어. 저렇게 가만히 있는 게 물 구경인가, 생각하며 엄마를 따라잡았던 기억이 나. 엄마가 쪼그려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311p)

 

 

 

ㅡ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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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7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기계가 있었다. 80억 명의 소식을 한데 모아 전해주는 웹사이트가, 설명을 듣고 상상한 그림을 그려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생각만으로 사물을 움직이는 시대를 열겠다며 장담하던 사업가가, 사람의 머리에 칩을 꽂아 넣으려는 과학자들이 있었다. 생각하는 기계들과 어디에도 없던 생물이 있었다. 그 모든 기술과 욕망이 만들어낸 시대가 있었다······. 사악할 만큼 게걸스럽고 충격적으로 다양한 시대였다······. 새 휴대폰을 얻지 못해 죽음을 꿈꾸는 아이와 굶어 죽어가는 아이가 같은 공기를 호흡하는 시대였다.

걷기부터 계단 오르기까지 일상의 모든 움직임을 기계에게 맡긴 다음 건강 산업에 돈을 가져다 바치고, 어떤 나라의 공장에서는 매일 새로운 티셔츠가 찍혀 나오는데 바로 그 나라의 빈민가에서 누더기의 산이 자라고, 아이들은 그 산을 타고 오르며 입을 만한 옷을 줍고, 유명인들의 삶, 꾸며진 삶, 화면 속에만 존재하는 삶을 탐내느라 모두가 불행해지고,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어디에도 없었던 사진이 마법처럼 생겨나고, 그 사진들은 거짓말하는 정치인에게 투표할 이유가 되고,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을 믿을 수 없으니 기쁨과 고통 또한 무의미하고, 진실과 거짓이 그 자체로 헛소리가 되면 끝내 남는 것은 찰나의 쾌락과 갈망, 갈망, 갈망······.(7-8p)

 

 

아이들은 자유에 무슨 나쁜 점이 있느냐며 묻고, 선생들은 이런 예시를 댄다.

 

서론: 외관상으로는 전혀 구분할 수 없는 사탕 두 개가 있는데, 하나에는 독약이 들어 있고 다른 하나는 무해하다고 하자. 이때 어떤 사람이 독약이 든 사탕을 골라 죽게 되었다고 해서, 그가 자유롭게 죽음을 선택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어떤 행동이 자유의 산물이기 위해서는 올바른 정보에 근거해 결과를 추론하고, 그에 따라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상태가 전제 되어야 한다.

 

정신질환자의 예시: 약을 정기적으로 먹지 않으면 망상과 환각을 겪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망상에 시달리는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온전히 돌아볼 수 없기 때문에, 그 스스로는 꾸준한 복약을 장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강제로라도 약을 먹여야 할까, 아니면 스스로 결정하도록 내버려둬야 할까?

 

혹은 이런 것도 있다.

 

마약중독자의 예시: 어떤 사람이 마약에 중독되어서, 마약에 대한 충동과 갈망 외에는 어떤 것도 떠올리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자. 그대로 내버려둘 경우 이 사람은 가진 약을 모두 써버린 다음 다른 약을 구하려 할 것이고, 그만큼 재활에서 멀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한편 본론은 이렇다.

 

욕망과 기술의 문제: 인류의 역사는 기술과 욕망의 역사다. 욕망은 기술을 발전시키며 기술은 다시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낸다. 편히 일하려는 욕망이 증기기관을 발명한 것처럼, 기관차와 철도의 도입이 광범위한 물류 배송을 가능케 한 것처럼, 그에 따라 시장의 규모가 확대된 것처럼······. 하지만 이런 순환이 반드시 좋은 것인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인류는 그 순환을 지배하는 대신 그저 휘둘리지 않았던가? 그게 과연 자유인가?(9-10p)

 

 

"여자애보다는 나 자신을 비웃었던 거죠. 내 처지 말예요. 머릿 속의 생각들이 그대로 전해지면 여자애는 도망갈 게 분명했거든요. 반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여자애가 계속 나를 좋아한다면, 그 애는 내 곤란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그게 아주 지겹더라구요. 나한테 남은 문제는 그 지겨움이에요. 3호가 시키는 대로 하고, 순순히 몸을 넘겨주는 일에 익숙해지더라도 끝나지 않는 문제죠. 아니, 오히려 더 커지기만 해요.“

"그 지겨움을 자세히 읊어봐라.“

"말 그대로예요. 아무나 붙잡고 이렇게 떠든다고 생각해봐요. 내 머릿속에 살인마인지 방화범인지 모를 게 사는데, 미친 짓거리를 말리느라 아주 지친다고요. 보통은 내가 허세를 부리는 줄 알죠. 반사회적인 걸 멋지다고 생각하는 애들이 종종 있잖아요. 그런데 상담 일지를 보여주고 증인들을 데려다놓으면, 비웃던 사람들이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져서 도망가는 거예요. 거리를 두려 하죠. 머릿속에 그런 목소리가 있거니와 가끔 유혹에 흔들리는 사람은 가까이할 상대가 아니니까요.“

"평범한 방법으로는 이해를 구할 수 없고, 이해받더라도 손해란 말이구나.“

"무슨 패를 내더라도 질 수밖에 없는 게임 판에 선 셈이죠. 크게는 세 가지 결말이 있는 것 같아요. 페널티가 다를 뿐이지 셋 다 패배고요. 하나는 완전히 이해받은 다음 모두와 멀어지는 거고, 다른 하나는 아무것도 이해받지 못한 상태로 이해한다는 눈빛을 받거나 비웃음거리가 되는 거고, 마지막 하나는 침묵하는 거죠. 기대도 하지 않고요. 기권을 선언하는 거예요."(171-172p)

 

 

"심리검사라거나 상담이라거나, 그런 건 아무 소용도 없어요. 심리검사에 나오는 문장들, 그러니까 작은 동물을 괴롭히고 싶다거나, 아이들을 돌보는 걸 좋아한다거나 하는 문장들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 똑같은 거예요. 그렇다에 체크하면 그런 사람처럼 보이고, 아니다에 체크하면 아닌 사람처럼 보이죠. 그뿐이에요. 말은 그냥 하면 나오는 거고 검사지는 체크한 대로만 결과가 나오는 거예요.“

"멀쩡한 사람 흉내를 내고 있다 이거지?“(183p)

 

 

"기억은 감각과 한 묶음이지. 감각이 라벨 역할을 하는 거야. 내가 빗소리를 들으면 사고를 떠올리듯이.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비가 세차게 오고 있었거든. 마찬가지로 고통은······ 고통을 선택하고 간직하는 작업은 나를 과거에 붙들고 내 삶을 완성시키지. 이 통증이 없으면 흉터를 남겨둘 이유도 없을 테고, 그렇게 사건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다면 그 순간을 계속 생각할 이유도 사라질 테니 말이다.“

"살면서 들은 이야기 중에서 손꼽힐 정도로 정신 나간 소린데요."

"성장에는 상처와 아픔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포함되지. 지나간 기억은 희미해지고, 평생토록 타오를 것만 같던 감정도 어느 순간 보면 불이 꺼져 있단 말이다. 그건 즐거운 일만은 아니야. 감정을 지탱할 힘이 사라진다는 의미니까. 나이가 들수록 근육이 헐거워지는 것처럼 마음도 느슨해져서, 더 이상 분노하거나 원망할 수 없게 된다. 답을 알기 전까지는 결코 눈을 감을 수 없을 듯한 의문도, 복수심도, 아무려면 괜찮은 문제들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시간에 빼앗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워하는 나를 세상에 남겨두려면?"(228-230p)

 

 

나이가 들면 모든 고난과 역경을 그러려니 넘기게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법했다. 그런 태도는 종교적이거나 영적인 깨달음과는 다르며 휴머니즘과도 거리가 먼 것이다. 그냥 지치고 힘들고 귀찮아서 눈감아버리는 일을, 느물거리는 미사여구로 장식하는 것이다. 꾸미지라도 않으면 비참하고, 눈을 감지 않으면 고통스러우니 어쩔 수가 없다.(281p)

 

 

 

 

ㅡ 단요, <목소리의 증명> 中,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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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9

 

 

 

나는 불안했다. 그 불안의 근원은, 샴페인 거품 같은 환희가 순식간에 스러질 수 있다는 사실, 저 걸인이 엄마에게 감사하는 것도 덤벼드는 것도 어디까지나 초라한 충동에 달린 일이라는 사실, 엄마는 그걸 알면서도 마님 소리에 한껏 의기양양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도련님 소리를 들으며 사탕을 핥는 것 외에 없다는 사실.(75p)

 

 

세계의 치명적인 진실은, 모두의 망상이 서로 단절되어 있으며 정신병자조차 다른 정신병자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뭐랄까, 물과 물 아닌 것들의 관계와 비슷하다. 청산가리와 메탄올은 둘 다 인간을 죽이지만, 죽음이라는 공통점을 근거 삼아 두 물질이 중화되어 물로 바뀌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군산복합체 음모론을 믿는 정치꾼 노인은 자신이 나폴레옹의 환생이라 믿는 여자를 비웃고, 나폴레옹의 환생은 유대교 카발라와 베다 점성술에 심취한 학생을 조롱한다. 나폴레옹은 역사적 인물이지만 점성술은 미신이니까. 심지어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조차 모르면서 싸우는 경우도 잦다.

(...)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들이 상징계에서는 완전히 다른 영토를 밟고 있음을 보게 되면, 뒤엉킨 대화를 풀어내기가 훨씬 쉽다.

(...)

중추가 아닌 부분은 호흡이나 살덩어리나 경험 따위고, 중추는 그들 각각의 믿음이다. 영혼은 몸의 유일한 형상이라고 아퀴나스가 말했듯, 그들의 육신과 기억은 현실에 비스듬하게 걸친 믿음의 퇴적물이다.(111-112p)

 

 

어떤 사람의 믿음은 그가 태어난 곳과 불가분의 관계이며 상징계의 주소는 그 믿음의 내력이다. 회복주의 기독교 교파의 조기교육 과정을 통해 종말론을 배웠는지, 통제광 할머니와 게으른 아버지 사이에서 이중구속을 겪으며 칼 세이건의 책을 피난처 삼았는지, 금융위원회 위원장인 아버지에게 얻어맞으면서 자랐는지 같은 것들이 한 사람의 좌표를 결정한다. 이는 인간이 다음 세대를 낳는 과정이자 개인이 자기 자신을 퇴적시키는 방식이다. 가령 내가 방구석에 틀어박힌 상태로 컬트적인 정치-신학-금융 블로그를 운영한다는 사실에서 아버지의 영향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자존심이 상하긴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나고 아버지는 아버지인 것과 별개로.(131-132p)

 

 

아무튼 나는 인간이 좋고, 윤리와 정치와 기술과 경제(그중에서는 계급보다는 화폐와 금융과 시장)가 좋고, 사람들이 마주치며 발생하는 관계들이 좋고, 이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이 좋다.(176-177p)

 

 

 

ㅡ 단요, <한 개의 머리가 있는 방> 中, 트리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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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18

 

 

친구 둘의 우정이 아닌 셋의 관계는 여러모로 복잡하다. 그 미묘한 감정의 역학관계를 섬세하게 묘사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사실 좀 간지러웠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단편이나 중편 분량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굳이 늘리고 늘렸다고 느낌.

 

 

아주 옛날부터 나는 내게 친구가 딱 두 명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운데서 단단히 팔짱을 끼고 싶었다. 그건 생각보다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남들은 몰라도, 친구들에게 너무 쩔쩔매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친구 되기'가 가장 어려웠다. 같은 일을 하는 동료가 아니어도 선배에게 나는 친구일까? 함께 사진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해든에게 나는 친구일까? 나는 그런 것이 궁금했다.

아름다운 삼각형을 원하는 건 나만의 꿈일까. 언제나 삼각형을 상상하며 살아온 것 같았다. 둘은 너무 적고 넷은 너무 많으니까. 나에게 둘이 의미하는 것은 애인이었고 넷이 의미하는 것은 가족이었다. 셋은 친구였다. 나는 둘이나 넷보다 언제나 셋만을 바라왔다.(23p)

 

 

내가 스스로 낸 상처들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울기 직전의 얼굴이 되고 가끔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었다. 엄마가 지닌 슬픔의 녹는점 중 하나가 나였던 것이다. 왜 그래 민아야····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와 말투는 또다시 내 슬픔의 녹는점이 되고. 엄마가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를 때의 목소리, 빈정거리고 짜증낼 때의 목소리를 싫어했으나 가장 싫은 것은 슬픔을 녹인 것 같은 목소리를 낼 때였다. 떼어낸 마음이 금방 다시 돌아가 붙어버리니까. 엄마를 싫어하려고 애썼는데 도저히 그게 되지 않게 만드니까.

(...)

아무래도 슬픔은 고체다. 내가 제일 많이 떠올리는 형태는 어릴 적 봤던 바이올린 활에 바르는 송진덩어리다. 슬픔은 마음 한구석에 송진 같은 고체 형태로 존재하다가 어떤 녹는점에서 녹아 흐른다. 액체가 되어 온몸으로 퍼지기도 하고 자칫하면 눈물이 되어 쏟아지기도 한다. 슬픔의 녹는점은 누군가의 한마디나 체온, 혹은 해질녘의 버스 정류장이나 혼자 멍하니 보내는 주말의 긴긴 낮일 수도 있다.(65-67p)

 

 

나는 민아 언니의 수업에 성실하게 참여했다. 사람은 신기하게 한쪽에 성실해지면 다른 한쪽에도 성실해지기 쉬운지, 작은 인형을 붙들고 고민하는 동안 다시 카메라를 드는 일도 잦아졌다.(109p)

 

 

무엇보다 그들은, 셋이어서 좋았다. 길이 좁아서 가끔 삼각형으로 걸어야 할 때, 뒤처진 자리에 있어도 불안하지 않았고 의도했는지 의도하지 않았는지 번갈아 뒤처졌다. 뒤처진 사람은 앞선 두 사람의 등을 보고 먼저 남겨진 발자국을 보며 기쁘게, 딴생각 없이 걸었다. 세 사람 모두 우리가 셋이라는 사실을 더없이 잘 알고 있어서, 가끔 둘이고 자주 둘이고 영원히 혼자이지만 우리는 셋이라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관계가 된 게 좋았다. 언제나 곁눈질을 하던 관계에서 드디어 셋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순간이 온 것이 좋았고 셋이서 오지 않았다면 의미가 없었음을 알고 있는 상태가 좋았다.(172p)

 

 

그들이 이루는 삼각형은 각자가 선 자리에 따라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두 점이 유독 가깝고 한 점이 비교적 멀 때는 그 모양이 변했으나, 삼각형은 삼각형이었다. 아닌 적은 없었다.(200p)

 

 

 

ㅡ 김화진, <동경>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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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5/21

 

 

소설집이 나오기 전에 여러 형태로 작가의 작품을 미리 접했다. '소설 보다'에서 '롤링 선더 러브', '창비 계간지'에서 '보편 교양',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세상 모든 바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적어도 김기태 작가의 팬이거나 그게 아니라도 한국문학의 현재를 성실히 따라가는 독자처럼 보이는데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소설집에 실린 9작품 중 3편은 미리 읽은지라 건너뛰고 다른 작품을 순서대로 읽었는데 어째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그나마 제일 마지막에 실린 '팍스 아토미카'가 기억에 남는다.

묘사가 다른 예술과 구분되는 소설의 유일한 특징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장기를 거의 이용하지 않고 소설을 전개한다는 사실이 작품을 모아놓고 읽으니 확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작가가 대중문화 일반에 관심이 많고 잘 알며 그 소재를 자주 작품에 사용하는데 그게 그렇게 유효한지 모르겠다. 재밌지가 않다. 예를 들어 '나는 솔로'를 위시한 한국의 짝짓기 예능을 소재로 만든 '롤링 선더 러브', 아이유 및 다양한 아이돌을 소재로 만든 '로나, 우리의 별'은 소재를 제하면 작품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아마도 비슷한 연배로 생각되는 남성 작가가 다루는 세계와 소재를 동시대를 살고 있는 내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소설적 재미를 크게 못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다 그렇지 않나. 자신이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주제를 타인이 이야기할 때 관용이 부족해지는 것처럼.

 

 

 

 

결국 모두가 헤어질 이유는 많고 계속 만나야 할 이유는 적었다.(88p)

 

 

귀화할 수 없느냐고 진주가 물었다. 그건 니콜라이조차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한 과정이었다. 사회통합프로그램 이수나 필기시험, 면접 따위를 따져 보기 전에 일단 귀화 신청 자격을 갖추려면 영주권을 취득해야 했다. 물론 영주권을 받는 데도 여러 조건이 있었다.

니콜라이는 전년도 한국인 평균 이상을 벌어야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으며, 그건 연봉 삼천팔백만원 정도라고 설명했다. 진주는 마트에서 받는 월급에 열둘을 곱해봤다. 공무원 시험에 붙는다고 해도 금방은 어려운 돈이었다.(125p)

 

 

때로는 팬을 자처하는 이들이 더욱 날카롭게 광고 상품의 생산과정과 음악적 동료들의 언행과 신곡 가사의 함의를 따졌다. '개념 연예인'이나 '소셜테이너' 딱지를 달았던 스타들이 오랫동안 사랑받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진정성을 검증하는 눈이 많아지면 행동반경이 좁아진다. 로나는 급기야 잠시 상업광고 출연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조차 돈을 벌 만큼 벌었느냐는 비아냥을 샀다. 우리는 로나가 불필요하게 소모되기보다는 음악에만 집중하길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 위축되었을 뿐, 우리보다 멀리 가고 있었다.

 

이런 저런 구설 때문에 저에게 흠집이 나더라도 괜찮다는 생각에 닿았어요. 저는 완벽하지 않아요.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결과를 만드는 게 더 중요하죠.(190p)

 

 

나는 잘 살고 있을까.

잠들기라는 마지막 과제를 수행하려면 "나는 잘 살고 있다"라고 핵에게 알려주는 편이 좋다. 그러나 그 주문은 너무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다. 내가 연구한바, 구체적 행위나 상태에 대한 간결한 주문일수록 효과가 높다. 나는 통원 치료중인 질병이 없다. 나는 임금 근로자 평균 이상을 번다. 나는 일 년에 삼 주 이상 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 나는 어떤 소송에도 연루되지 않았다. 나는 건조기와 식기세척기와 세 곡 이상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가졌다. 나는 방 세 개에 화장실이 두 개인 자가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 주택의 자산 가치는 상승중이다. 나는 명절이나 경조사가 아니더라도 연락하는 친구가 세 명 이상 있다······ 이런 주문들의 총합이 어떤 임계점에 도달하면 '나는 잘 살고 있다'라는 주문이 유효해질까. 위에서 나열한 주문들은 나에게 대개 사실이 아니지만, 전부 사실이라면 충분한 걸까.(281-282p)

 

 

지구 종말 시계가 자정 90초 전을 가리키는 2024년은 '슈퍼 선거의 해'로 불린다. 76개국에서 대선 혹은 총선이 시행되어, 인류의 절반에 가까운 사십억 명이 참여한다. 그중 약 육 퍼센트인 이억삼천만 명만이 미국 대선 투표권을 갖고 있으며 실제로 투표하는 이는 더 적다.(283p)

 

 

 

ㅡ 김기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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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5/14

 

 

하지만 인간이 저지르는 일은 상상을 초월했다. 역사를 공부하고 매일 끔찍한 뉴스를 접하면서 그걸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피부로 느끼지 못했던 탓이리라. 아미의 곁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시적인 태도가 가능했다. 그런 아미의 척수에 권정현지는 현실의 주삿바늘을 꽂아넣었다. 더 이상 행동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137p)

 

 

어느 날에는 아미가 집착하는 체외인 출생 문제가 그렇게 심각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동일하든 어머니가 동일하든 무슨 문제란 말인가 어차피 부모와의 교류는 금지되어 있는데! 스스로가 자신을 단독자로 자각하면 되는 일이다. 현재의 자아와 삶에 만족한다면 부모를 따질 필요가 없다. 생물학적 부모는 스트레스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철멍은 가끔은 자신도 체외인이길 바랐다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심어둔 저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의무가 없고 자유로운 체외인이 부럽다고 생각했고 이런 자신의 생각에 깜짝 놀랐다. 체외인 혐오자나 뉴 휴머니스트들이 하는 말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건 두 극단적인 세력이 같은 이유로 체외인을 혐오하거나 애호한다는 사실이었다. 해방된 존재가 누군가에겐 공포였고 누군가에겐 축복이었다. 하지만 실제의 체외인은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147p)

 

 

사람들은 행복을 입에 달고 살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불행을 원했다. 삶의 의미와 가치는 불행과 고통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 사회가 반복해서 차별을 생산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차별 없는 세계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따라서 뉴 휴머니스트는 해방과 행복이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속박과 고통을 제시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성공한 혁명 뒤에 공포 정치와 숙청이 뒤따르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새로운 시대 이면에는 전 시대만큼 억압적인 이데올로기가 존재했고 사람들은 거기에 매혹됐다. 가족은 그중 가장 오래되고 힘이 센 이데올로기였다. 이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게 존재할까?(152-153p)

 

 

 

ㅡ 정지돈, <브레이브 뉴 휴먼> 中,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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