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7
짧지만 힘 있는 작품이었다. 카뮈,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가 섞인 느낌. 문체는 전반적으로 건조한 편인데 신기하게도 묘사들이 생생해서 그림이 잘 그려짐. 은근히 시적인 것 같기도 하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은데 번역된 게 이것 말고는 없네.
여자 아나운서는 남색 상의에 살짝 파마를 한 단정한 이미지였는데 말은 속사포였다. 총알 한 상자를 쟁여두고 사방으로 쏘아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틀린 발음 하나 없었다. 분명 오랜 훈련을 받았을 터였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녀가 어떤 뉴스를 전하더라도 머리를 거치지 않은 채 입만 움직이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것이 기쁜 소식이든 슬픈 소식이든, 분통 터지든 무덤덤하든 상관없이 그녀는 모든 사건에 대해 엄숙한 태도를 유지했다.(99p)
여행, 노동, 전쟁, 섹스 등 인간 세상의 모든 일에 육신과 시간의 직접적인 접촉을 가로막는 장벽이 있다. 그러나 여기, 아무 할 일 없고 무슨 일이 있어도 금방 끝내버릴 이 좁은 감옥에서, 나는 항상 시간이 팔을 활짝 벌린 채 다가오는 것을 똑똑히 바라봤다. 시간은 엄청난 위력을 가졌으며 빈틈이 없고 모든 곳에 존재한다. 육신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있을 감정이 없다. 너의 참회를 듣지도 않고 너의 슬픔을 봐주지도 않는다. 그저 산사태나 만조의 파도처럼 온 방 안을 가득 메우며 너를 파묻고 능지처참시킨다. 그것이 너를 파묻어 온몸이 그 무게에 짓눌릴 떄 그것은 한 덩어리였고, 그것이 너를 능지처참하여 피부 곳곳을 칼로 도려낼 때 그것은 예리했다. 그것은 저항할 수가 없으며, 당신을 지극히 천천히 죽음으로 몰아 넣는다.
(...)
죽음은 번개나 감탄사가 아냐. 순식간에 다가와 사납게 찌르는 검 같은 게 결코 아니란 말이다. 그건 하나의 과정이야. 모든 기관이 차례로 고장이 나고, 온수팩이 얼음이 되어가는 과정 말이다. 그것이 천천히 다가오는 걸 감내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은 없구나. 얘야, 지금 내가 가장 바라는 건 누군가 맞은편에 누워 나랑 같이 죽는 거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그런 일이 벌어진 경우는 거의 드물지. 내가 보고 있는 건 건강하고 성장하는 너희들이다. 너희는 억지로 눈썹을 찌푸리고 눈물을 흘리지만, 사실 너희는 뼛속까지 경쾌하고 활발한 기운을 내뿜고 있지. 너희 몸 어디 하나 비 온 뒤 새싹처럼 생기발랄하지 않은 곳이 없어. 나는 이미 쇠약해졌다. 너희가 오면 이 사실을 가중시킬 뿐이야. 너희는 나를 감방에 가두고, 자신은 바깥에서 유치원 꼬마들처럼 둘러앉아 노닥거리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 노니는 웃음소리가 거대한 쇠절구로 변하여 하늘에서 조금씩 내리누른 결과 나는 바닥에서 꼼짝도 못하게 되었다. 너희는 나에게 수치를 안겨줬어. 우리 사이의 거리는 멀고도 멀다. 다들 꺼져. 아니면 총으로 나를 죽여버려라.(137-139p)
가면서 뒤돌아보니, 콩제의 모친은 응석받이 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었다. "딸아, 내 딸아." 주위 사람들이 부축해 일으켰지만 그녀는 울고불고 난리를 멈추지 않았다. 이 모든 게 일종의 의식처럼 진행되었다. 그녀는 이 정도 소란도 피우지 않으면 엄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건 순수한 고통이 아니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순수한 고통은 딸의 초상만 남겨진 텅 빈 공간에 홀로 있을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지 않고, 오장육부가 모두 사라진 것 같은 공허만 마주하게 된다.(156-157p)
"그렇다면 자신을 충만하게 할 다른 의미 있는 일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 보는 건 어땠을까요." 재판장이 말했다.
"시도는 해봤죠. 저는 초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사막에 물방울을 던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증발되어버리잖아요. 저는 항상 일이 시작될 때 그것의 피할 수 없는 결말을 봐버립니다. 예를 들어 사과를 먹으면 결국 쓰레기통에서 나뒹굴 씨가 떠오르고요, 축배를 드는 장면에서는 가득 쌓인 설거지거리와 텅 빈 식당을 고독히 오가는 고양이가 눈에 그려집니다. 사랑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공중으로 쏘아올린 불꽃 같은 거죠. 발기부전 상태로 섹스를 염원하며 하늘 저편에 아직 빛이 있다고 자신을 속여보지만, 불꽃이 스러진 자리엔 사실 암흑뿐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육신은 결국엔 삭고 쇠약해져, 자기 똥오줌도 못 가릴 정도로 존엄이 사라집니다. 그러다 결국 죽게 되겠죠. 우리가 죽은 미래의 어느 날,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가 땅에서 썩은 뼛조각을 파내어 입에 물고 뛰어 다니겠죠. 바로 우리의 뼛조각을요."
(...)
전 그저, 몸은 젊은데 노쇠한 영혼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마주하게 되는 현실을 말하려는 겁니다. 이미 저는 그 무엇도 믿지 않습니다. 예전부터 기러기가 시적 감성과 아무 상관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기러기가 왜 그렇게 납니까? 돼지랑 다를 것도 없죠. 그냥 추위를 피해서 먹이를 찾아 날아다니는 거잖아요.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동물보다 고차원적인 이유는 동물들처럼 혐오스러운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들과 똑같이 혐오스러운 일을 한다는 걸 인간은 의식합니다. 우리는 음식을 탐하고 땅을 빼앗고 자원을 파헤치고 원시적인 성욕에 좌지우지됩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다 하면서, 그저 수치를 위해 의미를 발명했습니다. 속옷을 발명하는 과정이나 다를 게 없죠. 그런데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의미라는 단어 자체도 무의미해지죠.“
"어쩌면 잘못되었을지도 모를 이 깨달음 때문에 저는 냉담하고 무기력해져 어떤 일을 해도 시들해지기만 하더군요. 저의 생명은 이 때문에 흐물흐물 풀어져 중풍 환자처럼 멍하니 누워 있기만 했습니다. 날이 바뀌어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어제와 똑같은 변함없는 하루였습니다. 시간은 응고되어 천천히 흐르다 못해 거대한 시멘트를 뒤집어쓴 꼴이었습니다. 매일 그 속에 잠겨 숨을 쉴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왠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그저 울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졌을 때 결심했죠. 나 스스로 처리할 수 없다면 당신들이 처리하도록 넘기자. 내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면 당신들이 선택하도록 모두 넘기자. 당신들은 쫓고, 나는 도망치고, 이 얼마나 간단합니까. 저는 원시 사회에서 먹이사슬의 말단에 위치한 동물처럼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미친 듯 날뛰며 무의식의 충만감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생명이란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돌아갈 것, 뭘 하든 안 하든 마찬가지로 소멸할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최소한 저는 그걸 통해서 시간과의 독대를 회피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나 자신과 시간 사이에 어떤 장막을 세우고 싶었습니다.(186-189p)
그들 또한 결국 자신들의 방식으로 이 살인 사건을 해석하고들 있겠지. 이를테면,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서, 도둑질하려다가, 대입 스트레스 때문에, 사회적 차별이 원인이 되었다는 등등의 사회에 공표할 만한 적당한 해석을 하나 찾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알게 되는 걸 원치 않는 것이다. 너무나 무료한 한 사람이 고작 쥐와 고양이 게임을 하고 싶어서 다른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이 사건을 기획하면서 만든 최초의 계획은 고작 네 문장이었다.
목적: 충만감
방식: 도망
수단: 살인
자금: 일만 위안
이것이 내 유서의 전부다. 당신들 역사에 이러한 한 사람이 존재했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안녕.(191-192p)
ㅡ 아이, <도망자> 中, 글항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