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16
그러나 미숙함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위험은 글쓰기를 둘러싼 욕심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고통을 말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고픈 마음, 고통을 재료 삼아 예술 자체에 아부하고픈 야망, 그런 욕망들이 언어로 경험을 직조하는 작업에서 지배적인 힘이 되면 내게 일어난 사건을 배반하고 자신의 진실에서 멀어지는 타락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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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로서 고통을 전하되 끝없이 하소연하지 않는 작가로서의 자의식, 할 수 있는 말을 통해 할 수 없는 말까지 전하는 능란함, 쉬운 승리로도 쉬운 절망으로도 가벼이 기울지 않는 평정심, 아프다는 것을 시시한 글의 변명으로 삼지 않는 자존, 자기가 보는 어둠을 부러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것으로 자신을 장식하지 않는 윤리, 오랜 시간 매일 공들여 노력하는 자기 규율, 나의 고통은 유일하고 절대적이나 그와 동시에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고통을 인식하는 균형감, 고립시키는 고통을 접면을 넓히는 기회로 전환하는 놀라운 도약.
좋은 글의 조건을 나열해보면 쓰는 기술과 앓는 기술이 어느 정도 겹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앓기의 기술은 삶의 기술과 다른 말이 아니며, 삶의 기술은 쓰기의 기술과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46-47p)
"통증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통증은 논박할 수 없게, 또 절대적으로 현존하는 것이어서, '고통스러워하기'는 '확신하기'의 가장 생생한 예로 여겨질 수 있을 정도다. 반면 타인에게 통증은 도무지 잡히지 않는 것이어서 '통증에 관해 듣기'는 '의심하기'의 가장 좋은 사례가 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통증은 공유하기 불가능한 무언가로서, 부정될 수 없는 것이자 동시에 확증될 수도 없는 무언가로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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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은 언어의 근본적인 실패다. (...) [통증을 겪는 사람은] 통증으로 인해 이 고문과도 같은 친밀성에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소통할 수 없는 통증은 탐험가들이 형체가 있는 지형도를 그릴 수 있는 대륙이 아니다. 통증의 칼날 아래서 존재의 통일성은 조각나고 그리하여 언어도 조각난다. 그것은 비명을, 불평을, 신음을, 울음 또는 침묵을 유발한다. 다시 말해 발화와 사고의 실패를 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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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의 실제 느낌이 어떤지를 묘사할 때 말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는가? 언어는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잠잠해진 뒤에야 찾아온다. 말은 오직 기억에만 의지하며, 무력하거나 거짓이거나 둘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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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으로 문학에서 질병 묘사를 막는 것은 언어의 빈곤이다. 영어, 이 언어는 햄릿의 사변과 리어왕의 비극을 표현할 수는 있어도 오한이나 두통을 표현할 말은 없이 한쪽으로만 무성하다. 평범한 여학생도 사랑에 빠지면 셰익스피어나 키츠로 자신의 마음을 대신 말할 수 있지만, 아픈 사람이 머릿속의 통증을 의사에게 묘사하려고 하면 언어는 즉시 말라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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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을 묘사하는 '언어의 빈곤'에 관해 울프가 불평할 때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픈 사람에게 '쓸 수 있는 기존의 말'이 없다고 울프는 말한다. 그렇다면 통증과 근수축과 협착과 경련을 노래하는 그 모든 표현들은 뭐란 말인가. 후벼파는 듯한 통증, 파고드는 듯한 통증, 찌르고 꼬집는 듯한 통증, 욱신거리는 통증, 작열하는 통증, 쏘는 듯한 통증, 얼얼한 통증, 살점을 떼어내는 듯한 통증, 모두 좋은 표현들이다. 모두 오래된 언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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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통증이 사과가 아니라는 데서 온다.
사과는 내 몸 밖에 존재하며 볼 수 있는 사물이다. 그것은 내가 쳐다보고 있지 않아도, 다시 말해 내 지각과는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감각할 수 있으므로 나는 그 크기와 모양과 색과 향과 맛을 표현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 사과를 쥐여주기만 하면 된다. 반면 통증은 주관적이다. 통증은 내가 지각해야 존재하며 내 통증은 나만이 지각할 수 있다. 따라서 통증이 있으며 얼마나 아프고 어떻게 아픈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선 밖으로 표현해야 한다. 표현한다는 건 내 몸 밖에 통증을 알리는 표지 또는 통증과 닮은 사물을 만드는 일이다. 외부 세계에 사과 같은 것이 존재하도록 하는 일이다.
(표정, 제스처, 신음, 비명 등 반사에 가까운 신체적 표현을 제외하고) 가장 쉽고 흔한 표현 수단은 언어다. 그러나 앞의 인용문들이 보여주듯 언어가 통증을 만족스럽게 전달할 수 있느냐에 관해선 비관하는 이들이 많다. 혹은 최소한 그건 논쟁거리다.(51-55p)
만성 통증이 있는 많은 환자들은 그들이 괴로움 호소가 가족, 친구, 또 의사들까지도 그저 지치게 하고 마침내는 열받게까지 한다는 것을 재빨리 배운다. 침묵은 아무도 보거나 증명할 수 없는 통증에 대한 흔한 반응이 된다.
급성 통증이 울부짖게 한다면 만성 통증은 이와 같은 관계의 역학을 거쳐 침묵하게 한다. 이 침묵은 언어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한계 때문이고(앞에 적은 일화에서 당시 나는 언니에게 이미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었기에 신세타령까지 할 수는 없었다), 의료 서비스의 한계, 자존감의 한계 때문이다. 팻말을 항상 들고 있을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곁에 남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먼저 인정과 관심을 구걸하는 자신의 비굴함과 비참함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환자들은 점점 말하지 않는 법을 익힌다. 수면 아래의 삶을 혼자 견디는 데 적응한다. 어떤 검사 결과나 수치로 표지되지 않는 병의 경과와 영향을 많은 부분 조용히 겪어간다.
하지만 이 조용한 표면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혀 조용하지 않다.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그건 전적이고 폭력적인 과정이라고. '전적'인 이유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구석이 없기 때문이고, '폭력적'인 이유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정성을 경험하기 때문이다.(72-73p)
그러나 그 모든 그림 중 고통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바로 이 그림, 피도 칼도 상처도 등장하지 않는 이 그림을 고르겠다.
얼핏 보기엔 평화로운 어촌 마을의 일상을 그린 풍경화로 보인다. 농부는 밭을 갈고 양치기는 양을 몰고 낚시꾼은 낚시를 하고 배는 바다 위를 떠간다. 제목을 보고 나서야 그림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추락하는 이카로스가 있는 풍경>. 화면 오른쪽 물 아래로 사라져가는 두 다리가 이카로스다. 또 양치기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도 알게 된다. 양치기는 아직 하늘을 날고 있는 이카로스의 아버지 다이달로스를 보고 있다.
처음 이 그림을 봤을 때 '천재다!'라며 감탄했다. 내 오랜 관심이 '보이지 않는 내부의 것을 어떻게 그리지'에 있었다면, 피터르 브뤼헐은 내면의 암흑이나 지옥을 그리는 대신 시점을 밖으로 빼내 전환함으로써 고통받는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오히려 정확히 그려내기 때문이다. 태양 가까이 날았던 드문 환희와 영광의 기억을 포함해 모든 것이 사라지는 순간, 한 세계가 사라지는 그 순간은 화면 한구석 사라져가는, 거의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작고 가냘픈 두 다리로 나타날 뿐이다. 너무도 사소하고, 하찮고, 혼자다. 이와 대조적으로 화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변함없이 일상적인 세계의 풍경이다. 이 격차가 고통임을 브뤼헐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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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는 밭을 간다. 양치기는 양을 친다. 낚시꾼은 낚시를 한다. 배는 항해한다. 밀랍을 녹인 태양도, 소년을 삼킨 바다도 늘 그랬던 것처럼 거기 그렇게 있다. 모든 것이 무너져도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는다.(83-86p)
고통이 표현 불가능하며 공유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관해 여러 찬동과 논박의 말이 있지만, 내 생각에 많은 경우 문제는 고통을 표현하는 언어와 재현의 한계가 아니라 사람들이 듣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고통뿐 아니라 환희 같은 내저 상태 또한 언어화하기 어려우며 표현하기 위해 직유법을 동원해야 할 때가 많다. 우리는 몸이 '찢어지는 것처럼' '칼로 찌르는 듯이' '두드려 맞은 것같이' 아프다고 말하지만, 몸이 '부푸는 것처럼' '둥실 떠오르는 듯이' '녹아내리는 것같이' 기쁘다고도 표현하지 않는가. 다만 고통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 자체로 충족된 상태인 환희와는 다르게 고통의 호소가 필요의 호소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무언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주목, 이해, 인정, 연민, 공감, 치료, 도움, 지원, 정의, 행동, 변화····· 고통 말하기는 듣는 이에게 요구한다. 고통을 호소하는 말을 듣는다는 것은 크든 작든 자신의 시간과 관심과 자원을 쏟길 요구받는 것이며, 남의 처지에 자신을 놓아보고 공감의 말 한마디를 건네는 일 같은 가장 사소한 연민에 드는 에너지조차 결코 적지 않다. 그리하여 남의 고통을 남의 집 불구경하듯 할 수 없을 때, 시혜적인 위치에서 동정해주며 도덕적 만족감에 뿌듯해하는 일 이상을 해야 할 때, 상대의 고통이 미심쩍거나 충분치 않다고 여겨질 때, 고통과 연민의 대차대조표를 그려보며 문득 억울한 마음이 들 때('내가 힘들 땐 별로 관심 못 받았는데') 사람들은 고통의 청자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화제 전환과 '나도 아프다'와 아픈 사람 비난과 고통의 사소화와 끊어버리는 전화들은 벗어나는 방법들이다.
시인 앤 보이어가 유방암 투병을 하는 동안 어떤 친구들은 관계에서 탈출 버튼을 누르며 이런 말을 남겼다. “너무 곤란하다.” “감당 못 하겠다.” 어려울 때 짐을 나누어 짐으로써 인간이 생존할 수 있다는 당위와 일반론이 내가 짐을 나누어 져야 하는 구체적인 현실이 되면 자기 연민이 타인 연민을 압도하기도 한다. ‘네가 암에 걸려서 내가 힘들다'는 것이다. 연민의 조건도 까다로워진다. 이제 사람들은 아픈 이가 자기 기준과 취향에 맞는 모습으로 아프길 바란다. 다시 앤 보이어의 말. "[우리는 전보다] 더 낫고 더 강하면서도 동시에 가슴이 아려올 정도로 악화한 상태이기도 해야 한다. 우리는 불행은 혼자 간직하고 용기는 만인에게 기부해야 한다." 사람들이 아픈 사람에게 기대하는 바는 어쩌면 다음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마음을 써줄 가치가 있을 만큼 심각하게 아프되 이성적인 모습을 보이며 평정심을 유지하고 병을 농담거리로 삼을 만큼 여유있는 자세를 취하면서 한탄과 한숨은 안으로만 삼키고 안 들리게 울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러나 고무적인 이야기와 깨달음은 내게 다오.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커다란 자원과 관심이 집중되어야 하는 암 환자의 경우와는 달리 만성적으로 아픈 사람의 친구들은 병자와 서서히 멀어지는 것 같다. 새 소식은 아프다는 소식뿐, 얼굴 한 번 보는 것도 여의치 않은 친구는 친구로 남기 어렵다. 점점 연락이 뜸해지는 게 아프다는 상황 때문인지 시간이 흐르며 각자의 인생 행로가 시나브로 갈라졌기 때문인지조차 알 수 없다. 긴 병에 효자 없다. 가끔 마음이 어두워지는 날이면 드는 생각이다. 효자도 없고 친구도 없고 때로는 언니도 없고 엄마도 없다.
하지만 나는 아픈 사람의 자기중심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병자의 관심은 자신의 병, 자신의 몸, 자신의 통증, 자신의 증상, 자신의 약, 자신의 치료, 자신의 상실, 자신의 절망, 자신의 걱정, 자신의 외로움에 쏠려 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저런 어려움과 씨름하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눈앞의 사람이 고통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가장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병자다. 자기 몸 안의 비극에 정신을 빼앗긴 그에게는 외부로 쏟을 관심도 에너지도 없다.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는 걸 모두가 알아주길 원하지만, 이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는 거의 모든 관계와 조우에서 상처받고 분노에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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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또한 아픈 사람의 하소연이 비슷한 내용으로 영원히 계속되는 경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이건 그 사람의 취미가 넋두리라서가 아니라 고통의 속성, 상처의 속성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은 말하게 하며, 애초에 완전히 말로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반복해서 말하게 한다. 고장난 턴테이블처럼 바늘은 마음에 파인 같은 홈만을 긁고 또 긁으며 같은 가락을 재생한다.(89-93p)
'삶을 이끌어간다lead a life'는 표현이 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노래하는 오래전 가요도 있다. '내 인생의 운전대를 내가 쥐어야 한다'는 스님-작가-구루의 인생 조언도 있다. 내가 알게 된 인생과는 반대다. 삶은 내 몸이라는 상황을 포함하여 내가 던져진 상황 안에서의 발버둥이고, 세계의 작용에 대한 내 반작용의 총합이며, 나는 궤도를 볼 수 없는 롤러코스터에 오른 겁먹은 승객이다.(135-136p)
물론 우리는 끝을 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살했다. 그는 '병에 진'것인가? 해피엔딩이 아니기에 불우하게 산 사람이 되는가? 조울병은 병이며, 무섭고 지독한 병이다. "다시 돌아오기에는 이번엔 너무 멀리 가버린 것 같아." 언니에게 남긴 유서에 울프는 썼다. 이번엔. 그 한 번의 돌아오지 못함이 인생 전체를 검게 칠하는 결말은 아닐 것이다. 더 이상 돌아올 수 없을 때까지는 계속 돌아온 게 아닌가.
한 해가 오고 또 오고 계속 올 거고. 아 이런, 시간은 너무도 길게 이어지고 그 긴 시간을 바라보면 늘 겁을 먹는 것 같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계속 나아간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열다섯 살의 버지니아 울프가 쓴 이런 일기를 마주친다.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했던 이부 언니마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해의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에 새긴 문장들이다. 그후 울프는 사십삼 년을 더 산다. 이 초년의 일기에 쓴 대로, 두려움을 마주하고 용기를 내고 계속 걸어가기로 결단하기를 거듭한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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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한 1941년 3월 당시 그는 책을 완성한 후에 언제나 겪는 실패의 느낌에 우울해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독일군 전투기의 폭격이 이어지고, 울프 부부의 런던 집이 파괴되고, 시골집 주변에도 폭탄이 떨어지던 때였다. 나치의 영국 침공이 임박한 듯 보였다. 유대인이었던 남편 레너드와 버지니아는 독일군 상륙을 대비하여 자살 방법을 논의하며 자살에 쓸 아편을 구해두기도 한다. 기분의 저조가 없었더라도 어려운 시기였고 종말이 가까이 있는 듯 보인 때였던 것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히틀러가 죽였다고, 울프가 세계대전의 희생자라고 생각한다.(202-203p)
질병이나 삶에서 마주치는 다른 재앙 때문에 언제나 놀라겠지만, 그래도 나는 괜찮을 것이며 어디로 가든 괜찮을 것이다. 어디로 가든 그곳에서 새로운 나의 일부를 찾을 것이고, 선에 이바지할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새로운 차원의 사랑을 발견할 것이다. 신은 창문을 닫으시면서 문을 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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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번쯤 들은 것 같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어요'라든지 '신께서 더 나은 이야기를 쓰고 계신 거예요' 같은 말들. 보아하니 신은 돌아다니면서 문을 닫고 창문을 여느라 바쁜 것 같았다. 아무리 열고 닫아도 질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말에서 중요한 건 언제나 맥락이지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겐 더욱 그렇다. 누가 어떤 상황에서 발화하여 어떻게 전달된 말인가에 따라 똑같은 말이 비수가 되기도 하고 동아줄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자신의 불행에 압도되어 있는 아픈 사람은 애초에 좋은 대화 상대가 아니다. 이 고통을 누가 안다고 해도 화가 나고(네가 뭘 알아) 모른다고 해도 화가 난다(이걸 어떻게 몰라). 뭘 먹으라든가 먹지 말라는 말, 뭐가 몸에 좋다는 말에도 진절머리가 난다(내가 안 해본 게 있을 것 같냐). 건강한 사람이 편안하게 호흡을 하며 사지를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사실에조차 비뚤어진 마음이 들 수 있는 게 아픈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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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편으로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좀전에 나는 중병, 만성적인 병,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을 겪은 실제 또는 픽션 속 여덟 사람의 말을 이미 소개했으며, 이들의 말이 나에게 그랬듯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줄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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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막을 새도 없이 파고드는 가족이나 지인들의 말과는 달리 당신은 선택할 수 있다. 책은 덮으면 그만인 것이다. 의학적 처치 때문이든 주변 사람들 때문이든 병 자체 때문이든 끊임없이 몸과 마음이 침입당하는 느낌에 시달리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소통에 목마른 투병인에게, 사적으로 별관계가 없는 사람의 말을 듣거나 듣지 않길 선택할 수 있다는 독서의 조건은 아플 때 책을 오히려 가장 가깝고 편한 친구로 만든다. 당신은 이 글도 덮어버릴 수 있다. 이 사실이 내게 계속 쓸 용기를 준다.(209-212p)
조지 클루니는 보드카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래, 계속 가봤자 뭐할 거야. 살아봤자 뭐하겠어. 그렇지만 일단 가기로 마음먹는다면 계속 해봐야지." 무엇이 날.
깨달음과 결단으로 이어지는 익숙하고 바람직한 서사로 글을 끝맺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점점 작아지는 엄마의 몸, 그럼에도 여전히 나를 미치게 하는 엄마의 잔소리("간절히 기도하고 성령 받아라"), 잇몸 퇴축과 치간 칫솔과 홍대 근처 좋은 치과가 주요 주제인 전화 통화, 아이허브 사이트에서의 영양제 쇼핑, 초등학생들의 머릿속에 영어 현재완료 시제를 쑤셔 넣으려는 나의 닦달, 장마철에 집으로 들어온 돈벌레와 에프킬라, 눈이 아파 급격히 줄어든 트위터 사용 시간, 돈 걱정, 허리 걱정, 녹아버린 빙하, 욕실 청소, 과탄산소다, 조카의 입시 준비, '점심에 뭐 먹지', 양파 다듬기, 코로나 백신, '계속할 수 있을까'와 '계속해야 한다'를 오가는 글쓰기, 바로 이 글, 자신에게조차 감추고 싶은 이 우울한 병자의 글. 내 사랑은 더 낮고 넓어져야 하는지 모른다. 만물이야. 이번엔 이것들 사이에 발을 꽂아 넣을 순 없을까. 나를 여기 이 흙에 심을 순 없을까. 마침내 그럴 순 없을까.(226-227p)
ㅡ 메이, <아프다는 것에 관하여> 中, 복복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