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6/16

 

 

작가가 자신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인물의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이 허용되는가? 아니면 오직 작가 자신이 아는 것에 관해서만 글을 써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이 사적인 글쓰기의 경제성을 높이고 있음을 간파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리고 거기에는 작품의 출처를 향한 불필요한 관심 또한 반드시 포함된다. 작가는 자신에 관한 글을 씀으로써 다른 사람의 진실을 자신의 것인양 썼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할 권리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자전적 소설'이라는 꼬리표 혹은 온라인 기사에 붙는 '사적인 에세이'라는 수식어는 독자와 작가 모두에게 안전망을 제공하며, 작가가 타인의 문화나 정체성에 대해 부적절한 발언을 하는 실수는 없을 거라고 보장한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다양성이 부족한 출판과 예술 분야에서 이러한 질문은 특히 중요하다. 백인 작가가 유색 인종의 관점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역사적으로 억압당한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출판계의 현재 여건에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목소리의 다양성 없이 이야기 자체의 다양성만을 추구하는 것은 불평등을 고착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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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모르는 작가가 고정관념을 고착하거나 귀중한 지면을 점령하지 않도록 아는 것만 써야 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인다고 하자. 두 번째 문제는 그것이 다른 작가들의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특정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 관한 글이 그 정체성의 영향을 직접 체험한 이들에게만 허락된다면, 오히려 그들이 '정체성 글쓰기'에 갇힐 위험이 있다.(77-79p)

 

 

 

전 세계 80여 개국에 3만 2000개의 매장을 보유하고 있는 커피숍 체인 스타벅스는 '진정성 없는' 브랜드의 교과서 같은 예시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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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스타벅스가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스타벅스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한때 스타벅스는 진정성 있는 분위기를 가장 중시하고 제품의 특이성보다는 본질을 우선하는 브랜드였다.(101-102p)

 

 

힙스터리즘은 자신들이 표방하는 '진정성'이 '진정성없음'으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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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서 진정성을 연기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 진정성은 그 의미를 잃는다. 자기 인식이 없어도 진정성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저 주류의 취향에 순응하며 살고 자기만의 길을 개척하지 않는다면, 진정성 있는 자아로 살아가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더 나아가서, 대중적 흐름에 의존하건 거부하건 간에 당신의 진정성이 오직 그것만을 위해 구축된다면? 그것을 진정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은 여전히 당신 자신인가?(106p)

 

 

ㅡ 에밀리 부틀,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 中,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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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16

 

 

시간이 흐른 뒤에는 '사람은 죽었다'라는 문장의 사이를 길게 채우는 것이 삶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은 죽어 있었다'로 끝나야 하지 않나. 내가 죽더라도 나는 죽었다에서 끝나지 않고 응급차에 실리고 관에 들어가고 누군가 장례식을 치러줄 테니까. 그런 와중에도 계속해서 나는 죽어 있을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서현은 '사람은 있었다'로 문장을 수정했다.(142p)

 

 

ㅡ 강보라 외, <소설 보다 봄 2025> 中,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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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16

 

 

물론 그러한 결론은 분명한 거짓이다. 왜냐하면 야심은 타고난 재능 같은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비-재생산의 제 1원인으로 고려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야심은 다른 모든 감정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행위 역량이 취할 수 있는 다양한 양태들 가운데 하나다. 감정은 그것을 규정하는 원인들을 통해 설명되어야 한다. 만약 야심이 명예의 욕망 혹은 결과를 향해 뻗어 나가는 에너지에 기초한다면 과연 무엇이 행위 역량이 그러한 형태를 취하도록 규정했는지 알아내야 한다. 야심이 관성을 이겨 내고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 목표를 향해 뻗어 나가게 하는 에너지를 만들어 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요컨대 야심은 구성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야심만으로는 비-재생산에 관한 충분한 설명이 이루어질 수 없다.

실제로 그것이 사회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혹은 지적인 것이든 예술적인 것이든 모든 야심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야심이다. 야심은 달성하고 싶은 모델, 이상, 목표에 대한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비-재생산의 경우에서 야심은 출신 환경에서의 지배적 모델과는 다른 모델에 대한 표상과 그 모델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의 존재를 함축한다. 다시 말해서 야심이 최초의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이유는 이 감정이 어떤 모델에 대한 관념과 그 모델처럼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이 합쳐진 결과, 즉 인식적 규정성과 감정적 규정성 사이의 혼란스러운 합성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재생산의 뿌리가 야심이라고 믿는다면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야심이 무엇인가에 대한 야심이라면, 이러한 야심을 가능하게 해 주는 그 무엇인가가 먼저 있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야심가들을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무로부터 일어나는 기적적인 창조처럼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생겨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한 사람에 관해 "그는 스스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해냈다"라고 말하는 것은 실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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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야심은 표면상의 원인에 불과하며 비-재생산의 궁극적 이유는 아니다.(63-65p)

 

 

스탕달의 소설은 치밀하게 계산된 모방의 한 가지 사례만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례는, 모든 비-재생산이 언제나 주체의 자유로운 결정으로부터 유래하며 주의주의적 형식에 따른다고 믿지 않는 한 일반화되기 어렵다. 오히려 사실은 그 반대이다. 우리의 행동 양식을 통제하는 모방은 대개의 경우 부지불식간에 실행된다. 이때 모방은 의식적인 결단에 따른다기보다 오히려 자동기계 장치가 움직이는 것과 더 가까운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

예를 들자면 우리는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이 울거나 웃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울거나 웃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행동 일반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모든 것을 자연발생적이고 전적으로 무반성적인 방식으로 흉내 낸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스피노자적 논리에 따른다면 이러한 현상은 아이들의 어린 신체가 아직 평형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아이들의 신체는 매우 큰 가소성을 지니고 있으며 아직 고정된 습관이 확고하게 자리 잡지 않은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의 신체는 자신의 고유한 기질에 구애받지 않고 남들이 하는 다양한 동작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웃거나 울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경우조차 아이들은 별생각 없이 심지어는 자기 행동의 내적 동기조차 알지 못한 채로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흉내 낸다. 이러한 유아의 모방은 의지 혹은 정신적 과정의 결과라고 볼 수 없으며, 신체와 신체적 유사성의 차원에서 각인된 이미지들과 반사적 행동에 기초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유아의 모방은 인간 신체가 외부 물체에 의해 한차례 변용되고 난 뒤에 신체가 그렇게 변용된 흔적 혹은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가 과거와 유사한 상황에서 그것들을 재생산하도록 배치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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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모방이 유년기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신체적 흔적의 결과라면 이러한 모방은 반성 행위보다는 반사 행위에 해당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계급 혹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주변의 감정적 반응과 행동 양식을 모방하는 것은 그 본질상 의식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대개의 경우 모방은 명시적인 선택이나 의식적인 학습의 결과라기보다는 거울처럼 주변을 반영하는 신체 도식에서 나온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물론 모방이 의식적인지 비의식적인지가 주어진 문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두 경우 모두에서 문제는 어떻게 한 개인이 출신 환경의 모델이 아닌 다른 모델을 모방할 수 있게 되는지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사회의 일반 사회 규칙은 개개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지배적인 모델을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해서 그들이 직접 볼 수도 없고 그들은 지속적으로 자극하지도 않는 어떤 다른 사례를 모방할 수 있게 되는가?(67-70p)

 

 

이처럼 학업 모델은 적절한 교육적·경제적 장치가 동반되었을 경우에만 비-재생산을 산출하는 모델로서 작동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도적 지원이 동반된 학업 모델이 비-재생산의 주춧돌로서 기능하도록 해 주는 체계적 방안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분명 그러한 제도는 뛰어난 학생들에게는 상당히 유용할 수 있다. 하지만 애초부터 탁월성이란 그 정의상 언제나 예외적인 것을 의미한다.(96-97p)

 

 

비-재생산은 이 원인과 저 원인이 교착되고 뒤엉킨 역사들을 사유하기를 권한다. 비-재생산은 일반 원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단 하나의 가장 결정적인 제 1원인으로부터 나온 산물이 아니라 복수의 원인들이 뒤엉킨 독특한 배치 속에서 하나의 궤적이 산출된 결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 어떠한 원인이든지 단독으로는 결코 결정적 원인이 될 수 없다. 야심도 대안적인 가족적 혹은 학업적 모델의 현전도, 재정적 지원이나 호혜적인 사회경제적 조치의 존재도 단독으로는 비-재생산을 설명해 줄 수 없다. 분명 수치심, 정의감 혹은 인정 욕구 같은 특권적 감정은 비-재생산을 만들어 내는 원초적 원인으로서 제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정은 언제나 양가적이다. 감정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강렬함으로 인해 그리고 감정과 결합하거나 길항하는 힘들의 작용으로 인해 똑같은 감정일지라도 상반된 방향으로 사람들을 밀어 넣을 수 있다. 디디에 에리봉 역시 수치심의 근본적 이중성에 주목한 바 있는데 이 감정은 때로는 침묵 속에 갇혀 입을 다물고 있도록 만들거나 기존 질서에 맞선 반항보다는 질서에 순응하게 만드는 공포를 낳기도 하지만 때로는 과감함을 낳을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과 규정의 계열 가운데 그것이 어떤 것이든 단 한 가지만 떼어 놓고 본다면 그것은 엄밀히 말해 계급횡단 출현의 필요조건을 죌 수 있으나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비-재생산은 결합적 사고방식과 협력 혹은 연결에 대한 사유를 불러오며 인과의 그물 혹은 인과의 다발에 대한 분석을 요구한다.(142-143p)

 

 

그런데 계급횡단자들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인간 존재는 마치 신분증과 같은 하나의 정체성을 소유하며 그것을 통해 서로 간의 식별이 가능하고 그에 맞는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는 명제가 확실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재생산에서 벗어난 개인들은 단순히 출신 환경 속에 맞는 정체성을 부여할 수 없으며 같은 출신 환경 속 다른 이들로부터 돌출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계급횡단자들은 필연적으로 유동적인 정체성 혹은 불안정한 정체성을 지닌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계급횡단자들의 존재를 지배하는 것은 바로 변화와 변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급횡단자들의 특징은 오히려 탈정체화와 출신 가족 및 계급으로부터 이탈하게 되는 과정에 있다.

이러한 탈정체화는 계급횡단자들이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는 동안의 일시적 국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도착 환경에서조차 '끝내' 동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출신 환경의 흔적을 어김없이 지니고 있으며, 지나간 역사의 흔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급횡단자들이 새롭게 정착한 환경의 사람들과 같은 조건을 공유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그들과 똑같은 공통 자산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점에서 계급횡단자들은 개인들을 제한된 사회적 범주로 분류하는 통계적 원리 및 고정된 정체성의 지위에 관한 비판을 불러온다. 계급횡단자들에게는 일단 지니고만 있다면 이 계급 혹은 저 계급에 속한다는 지표로서 이용될 수 있는 성질이나 특성을 할당하기가 무척 까다롭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윤리적·정치적 영역에서 사용되는 인정 개념 역시 그것이 앞으로 성취해야 하고 확립해야 할 무엇인가로서 설정된 정체성을 상정할 때는 문제적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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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 속에서 그러한 정체성 정치에 기초한 사회운동은 개인을 고정된 추상적 규정성, 예컨대 여성, 동성애자, 노동자, 부르주아지, 기업가 등등의 범주 속에 가두는 위험을 치르게 된다. 물론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정체성 개념의 깃발 아래 결집하는 것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여러 개인들을 묶어 주고 그들의 조건을 정의해 줄 수 있는 공통의 특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 개인들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효과적으로 조직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정 개념이라는 문제틀은 그것이 개인들을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에 고착시키고 개인들을 단지 하나의 유형이나 그들의 독특한 본질을 표현해 주지 않는 보편적인 하나의 공통 통념으로 환원시키게 될 때 그 불충분성을 드러낸다.(160-161p)

 

 

그러므로 결국 '자아'는 신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모든 것이 차용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파스칼은 사람들이 이러한 자아의 덧없음을 잊기 위해 잘못된 조롱에 몰두한다는 사실을 꼬집는다. "그러므로 직위나 직무에 대해서 명예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웃지 마시라! 사실 우리는 빌려온 특성을 제외한다면 그 누구도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허영심 많은 사람들은 존재와 소유 그리고 내면과 외면을 혼동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떠받들어 주기를 바라지만 진정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보다는 그저 우월한 지위와 직업적 명성에 대한 찬사를 받기 원할 뿐이라고 비웃는다. 그런데 사실 이 허영심 많은 사람들이 보여 주는 태도야말로 인간적 조건의 진실을 드러내 주고 있다.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은 사실 잠시 빌려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따라서 내실은 갖추지 못한 채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는 조롱은 허영심 많은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무턱대고 비웃는 맹목성을 향해야 마땅하다. 가령 우리는 부르주아지인 척 행세하는 벼락부자들이 실제 교양은 없으면서 부자연스럽게 부르주아지를 따라 하는 우스꽝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비웃는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행동과 모든 정체성은 금박을 입힌 도금품과 같은 것이고 금박은 언젠가 닳아 소모되기 마련이다. 이 점에서 계급횡단자가 어딘가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은 어색한 분위기를 풍기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닌데 그 역시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 빌려 온 특성들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신이 걸치고 있는 옷을 유독 불편하게 여기는데,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입고 있는 복장이 관습에 따라 부과된 것이라는 점을 완전히 잊고 자신이 처음부터 그러한 옷을 입고 태어났다는 가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아 개념에 대한 파스칼적인 탈신비화는 내재적 특성을 신분이나 사회적 직분과 같은 성격의 외재적 특성으로 동일시함으로써 개인적 자아를 해체한다.

(...)

모든 정체성은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언제나 일종의 사칭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지 않은 빌려 온 것에 불과한 특성들로 우리 자신을 꾸미고 그 특성들이 마치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착복하기 때문이다.(170-171p)

 

 

적응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이전의 아비투스를 해체하는 법을 익히고 또한 낯선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기존의 관습들을 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과거를 내려놓고 그동안 얻은 것들을 처분하는 것, 요컨대 자신이 물려받은 유산들을 청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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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적응은 자신의 허물로부터 벗어나는 일종의 탈피 과정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변신은 결코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급횡단자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가게 된다. 새로운 습속에 곧바로 부합하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계급횡단자들은 적응한 존재인 동시에 도태된 존재이다. 그들은 아무것이나 그 즉시 채워 넣을 수 있는 빈 서판 같은 존재가 아니며 그들이 데카르트적인 극단적 회의를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행동 양식을 일순간에 중지시킨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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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가정에서의] 부모 자식 사이 예절은 여전히 내게 하나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교육을 잘 받고 자란 사람들이 소소한 안부 인사 속에서마저 보여 주는 극도의 친절함을 '이해'하는 데까지 내겐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나는 부끄러웠다. 내가 그러한 존경을 받을 자격이 없었으며, 그들에게 나의 처지에 대해 매우 특별한 공감을 받았다고 상상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들이 매우 열렬한 관심을 보이는 얼굴로 던진 질문들과 그 미소들이 식사할 때 입을 다물고 먹거나 코를 풀 때는 안 보이는 곳에서 푸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기호를 해독하는 작업은 매우 까다롭다. 왜냐하면 중간중간 출신 환경의 코드가 끼어들고 가로막아 해독 작업에 훼방을 놓기 때문이다.(183-184p)

 

 

쥘리앵은 푸른 옷을 입을 때도 검고, 검은 옷을 입을 때도 푸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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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그 형태와 모습 혹은 그것을 물들인 염료가 무엇이든지 간에 계급횡단자의 기질은 잡종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의 짜임새는 이종교배를 통해 나왔다. 계급횡단자는 태어난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숱한 전정 작업과 수선 작업을 통해 구성된다. 그 작업이 잘 이루어졌다면 겉으로는 그에게서 푸른색만이 보이겠지만 말이다. 계급횡단자의 구성은 한 편의 역사와 변천의 과정 속에서 구성되며 이 구성 과정은 단순한 누적이나 하나의 층위의 다른 층위로의 대체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계급횡단자의 구성을 출신 환경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면서 점차 도착 환경에 가까워지는 식의 연속적 시간성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출신 환경과의 거리 두기, 새로운 삶의 방식에의 적응, 도착 환경 속으로의 동화 등의 과정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단계별로 구별하는 일은 당연히 가능하다. 그렇지만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이 결코 선형적인 진보의 궤적을 그린다고 볼 수는 없다. 과거는 현재 속으로 끊임없이 되돌아오며 그때마다 현재의 삶에 변형을 일으키는 밀물과 썰물을 동반한다. 출신 환경의 경험이 정확히 유년 시절에 국한되고, 새로운 세계로의 변화와 입문의 과정은 오직 청소년기에만 일어나는 것이며, 새로운 세계로의 완벽한 통합은 은퇴 후 마침내 되돌아갈 자리를 찾게 되는 성인기에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각각의 상이한 국면들은 결코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각각의 단계들은 서로 중첩되어 있으며 또한 각각의 단계는 긴밀하게 얽혀 있는 상호 관련 속에서 전개된다.(200-201p)

 

 

그러나 계급횡단자가 새로운 세계에 안착하여 격차가 점차 줄어들고 가장 큰 결여가 채워지더라도 거리의 에토스는 여전히 그의 행동 양식을 지속적으로 지배한다. 그는 새로운 아비투스를 습득했지만 그 아비투스는 여전히 그에게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

말하자면 계급횡단자는 언제나 경계 주변에서만 맴돌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적 코드에 알맞게 행동하고 상황에 어긋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그에게는 잠시 물러나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고, 따라서 그의 생각과 실천 사이에는 항상 거리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급횡단자는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운 채 경계 태세 속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상황과 자연스럽게 동화될 수도, 일치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 상황이 바로 자신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믿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관찰자로서의 이 거리는 계급횡단자를 행위자보다는 구경꾼으로 만들곤 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고 난 뒤에 행동한다. 계급횡단자의 행동은 상황에 대한 즉각적인 반사 행위라기보다는 긴 반성 끝에 알맞은 행동 양식을 채택한 결과이며, 그는 한 박자 늦게 행동하고 있는 자신을 지켜보게 된다.

(...)

계급횡단자의 이러한 망설임과 불일치는 역설적이게도 그를 경계에 더욱 강하게 붙들어 놓음으로써 악순환 속으로 밀어 넣는다.(208-209p)

 

 

심지어 계급횡단자가 상류 사회에 기꺼이 받아들여지는 때조차 그의 예외적인 이력에 쏟아지는 경탄과 그의 능력과 도전 정신에 대한 찬양은 오히려 계급횡단자로 하여금 거리를 느끼게 만든다. 그 경탄과 찬양이 계급횡단자로 하여금 '오직 태어나는 고생만 했던' 사람들과 힘겨운 투쟁으로 그 자리를 쟁취해야만 했던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는 후발 주자로서 선두를 따라잡아 같은 대열에 올라왔다는 것을 인정받지만 그저 한 명의 아웃사이더로서 인정받을 뿐이다. 그의 통합 가능성 여부는 전적으로 그에게 호의를 베풀지 말지를 결정하는 서클의 후한 인심에 달려 있다. 이때 계급횡단자란 해당 모임이 그릇된 계급의식을 타파하고 관용과 사회적 다양성에 열린 정신을 가질 수 있는 기회에 불과하다. 계급횡단자는 기껏해야 한 명의 생존자 혹은 이례적인 현상으로 여겨질 뿐이며 심지어는 다른 화제로 넘어가기 전에 딱 질리지 않을 정도로만 활용될 뿐인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던져 주는 비범한 사람 혹은 이국적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다.

(...)

요컨대 그에게 주어진 안락의자 따위는 없다. 그에게 허락된 것은 단지 간이 의자뿐이다.

하지만 설령 계급횡단자가 자신의 뿌리를 되찾고자 시도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다시 자신의 출신 환경에 속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더 이상 예전과 동일한 존재가 아니며 그의 기질은 변했기 때문이다. 멀어짐에서 생겨난 출발 지점과의 거리는 그 거리를 다시 거슬러 가 보는 귀환 과정 속에서 오히려 더욱 고착된다. 그의 귀환은 눈물겨운 재회와는 거리가 멀다. 예전 세계와의 만남은 대개 파투 난 만남과 같다. 이제 만남은 단지 간극이 얼만큼 벌어졌는지 측정하게 되는 기회에 불과하다.

(...)

역설적이게도 다가가는 일이 멀어짐의 거리를 정확히 측정하는 일이 된다. 지리적 거리가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역사적 거리는 결코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 지리적 거리는 되돌아갈 수 있는 것이지만 역사적 거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계급횡단자들은 더 이상 한때 친숙했던 세계에서도 온전히 발붙일 수 없다. 그곳에서조차 그는 어디에선가 옮겨 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계급횡단자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는 여전히 떠난 자와 머무른 자라는 차이가 남아 있다. 그렇게 계급횡단자는 모국으로 돌아온 이민자의 운명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긴 체류를 마치고 돌아온 이민자는 자신의 나라에서도 외국인이나 다름없는 것이다.(214-217p)

 

 

계급횡단자는 역설적이게도 상당한 겸손과 극도의 오만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계급횡단자는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자리를 차지했으나 타고난 특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에 부적격함의 느낌과 진정한 정당성을 소유했다는 확신을 동시에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계급횡단자는 자신이 그저 상속자에 불과한 사람들보다 위에 있는 동시에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 결과 그는 스스로를 가장자리로 내몰리게 한느 계속 견지하기 어려운 태도를 지닌 채 살아간다.

그러나 경계를 넘나듦으로써 계급횡단자는 규칙을 준수하는 동시에 위반하려는 모순된 욕망에서 유래하는 내부와 외부의 변증법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계급횡단자는 그렇게 반항적인 순응주의자라는 형용 모순적 형태를 체화한다. 계급횡단자는 상류 사회에 받아들여지고 그 속에서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속에 완전히 통합되는 것은 그에게 견디기 어려운 일이 된다.(227-228p)

 

 

어머니가 세상의 시선에서는 '가사도우미'로 인식되며 고용인 신분에 속한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 순간 자크에게 갑자기 어머니가 보잘것없는 존재로 보이기 시작했고, 자크는 자신의 어머니가 가사도우미라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꼈다. 하지만 이 나쁜 감정은 이내 그를 향해 다시 돌아왔다. 사랑하는 자신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의 위치에 대한 사회적 판단을 단지 서류상에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받아들여 버린 스스로에 대해 경멸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즉 자크는 자신의 수치심에 대한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고 그의 고통은 자신을 향한 분노로 더욱 배가되었다. 만약 수치심이 멀어짐의 증거라고 한다면 수치심에 대한 수치심은 가까움을 드러내 보여준다.

(...)

수치심에 대한 수치심, 이 감정의 힘은 마치 한번 중심을 잃게 되면 아무리 평형을 되찾으려 해도 넘어지게 되는 것처럼 자신으로부터 타인에게로 기울었다가 이윽고 타인으로부터 자신에게로 다시 한번 되돌아오면서 최초의 수치심을 배가시킨다. 자크는 수치심가 수치심을 느꼇다는 수치심을 동시에 경험한다.

(...)

이렇게 해서 수치심은 자가 증식의 폐쇄 회로 속에서 계속 재생산된다. 왜냐하면 수치심을 느꼈다는 죄책감을 비롯한 모든 것이 수치심을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끝이 없어 보이는 마음의 동요가 시작되도록 만든다. 자크는 수치심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는 수치심을 자기 자신 안에서 계속해서 다시 마주칠 뿐이다.

(...)

일반적으로 수치심은 생각, 행동 또는 자신이 보여지는 방식이 나쁜 것으로 지적ㅡ 그 지적이 옳건 틀렸건 간에ㅡ받는 데서 생겨나는 모욕감이다. 수치심의 원천은 다양할 수 있겠지만 이 감정은 언제나 평가하고 판단하는 자의 시선ㅡ이 시선이 외부의 것이든 혹은 내면화된 것이든ㅡ에 대한 표상을 함축하고 있다.

사실 수치심이 반드시 타인이 실제로 제기한 도덕적 비난에 관한 내적 반향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치심은 자신과 대립하는 외부 시선을 상상하는 것에서 가장 빈번하게 생겨난다. 따라서 주체는 타인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게 되는데, 그로 인해 설령 쥐구멍으로 달아나 숨고 싶을 때조차 그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주체 자신이 판단하는 자와 판단되는 자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법이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수치심을 우리에 대한 외부의 비난의 결과로 국한시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비난한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우리의 어떤 행동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으로 정의하는 까닭이다. 요컨대 스피노자의 정의에 따르면 수치심은 어떠한 사실적 기반도 가지지 않은 순전히 상상적인 것일 수도 있는데 다만 이러한 상상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주입되어 몸에 새겨진 도덕적 판단과 관련한 이미지와 그 흔적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미지와 흔적은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일련의 결과들을 부산스럽게 산출하며 외부의 비난이 없는 경우조차 끊임없이 재활성화된다.

(...)

어떠한 합리적 근거로도 단지 그것만으로는 감정을 억누르는 데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감정은 신체와 정신에 새겨진 흔적들에 기초한 신체적·정신적 변화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스피노자는 실제로 좋거나 혹은 나쁜 것에 대한 참된 인식도 단순히 참으라는 이유로 감정을 제거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참된 인식이 다른 감정을 제거할 수 있는 효력을 가진다면 그것은 그 인식 자체가 하나의 감정인 경우일 때뿐이다. 간명한 논증을 통해 누군가를 무가치한 인간이 아니라고 변호해 주는 것은 헛수고에 불과하다. 우리는 논증만으로는 감동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감정이 그런 것처럼 수치심 역시 그것보다 더 강력한 다른 상반된 감정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억제될 수도 파괴될 수도 없다.

사회적 수치심의 경우에도 이와 동일한 도식이 나타난다.(233-237p)

 

 

그렇다면 과연 미슐레를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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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러 흠결에도 불구하고 미슐레의 행보는 새로운 기질을 직조하기 위해서는 신화를 만들어 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미슐레는 민중 그리고 신념과 열정으로 사회를 변혁하는 전진하는 천재에 대한 서정적 형상을 그려 내고 또 아래 세계 사람들이 자긍심을 회복하고 살아가고 싸울 수 있는 데 필요한 힘을 깨워 내도록 역량과 위대함을 그들에게 부여함으로써 그들이 활력을 되찾게 해 준다. 정치적 변화는 단순히 정치 현상을 합리적으로 분석하는 것으로는 생겨나지 않는다. 변화는 스스로의 힘과 가치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주는 상상적 표상들에 의존한다. 이러한 상상력은 적어도 변화를 위한 운동의 초기에는 매우 유용한 전략적 무기를 구성한다. 사실 가장 먼저 무찔러야 할 대상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고 체념 속에서 계속 작아지게 만드는 우리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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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점에서 병적인 수치심으로부터 그래도 건강한 점이 있는 수치심에 대한 수치심으로의 이행은 변화를 위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물론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다니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어떤 감정이 오직 그와 상반되는 더 강력한 다른 감정에 의해서만 제압될 수 있다면 크나큰 수치심은 오로지 그만큼 큰 자긍심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실제적인 변화는 우선 말과 행동을 가로막고 금지하는 빗장을 끊어 내기 위한 상상적 변화에서 시작된다.(266-267p)

 

 

계급횡단자와 관련하여 낙인을 뒤집는 일은 균열을 잘 마름질하고 과거의 조작들을 모아서 그것을 재전유하는 작업에 기초한다. 이러한 재전유는 자신의 출신을 수용함으로써 출신 환경을 더 이상 지울 수 없는 치욕의 표지가 아니라 자신을 구성하는 역사적 계기들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함축한다. 계급횡단자의 균열된 기질을 통합하려는 시도는 파열을 통합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때의 통합이란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먼저 그것은 변화한 환경으로의 통합을 의미하며 또한 도착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속에 출신 환경을 통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269-270p)

 

 

1910년, 빅토르 세르주는 잡지 「무정부」에 외곬이라는 필명으로 기고한 글에서 노동자주의를 시각의 상실과도 같은 질병으로 취급하며 노동자에 대한 과잉된 이상화를 매우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식자층 사이에서 퍼진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찬양"과 노동의 순교자들에게 작품을 바치는 주례사 문학의 진부함을 비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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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주의? 그것은 진보적이라고 불리는 거의 모든 지식인을 괴롭히는 기이한 질병이다. 마르크스주의와 생디칼리즘은 노동자주의의 치유 불가능한 두 가지 형식이다. 수많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이 병에 시달리고 있다. 이것은 지각 능력과 사유 능력의 상당히 막심한 손상을 가져오는데 이 병에 걸리면 노동자들은 그저 아름답고 건실하기만 한 존재로 보이게 되며 그들의 추하거나 사악한 면, 쓸모없고 심지어는 해롭기까지 한 면은 결코 볼 수 없게 된다. 선량한 시민의 무리 가운데 하나를 이루고 있는 후줄근하고 알코올중독에 줄담배를 피워 대는 결핵에 걸린 슬픈 얼간이는 이러한 마법을 통해 노동자가 된다. 그의 '신성한'노동은 인류를 먹여 살리고 진보시키며, 그의 고결한 노고는 인류에 휘황찬란한 미래를 보장한다.··· 노동자주의자에게 바로 그 프롤레타리아트가 병역과 투표 그리고 일상적 노동을 통해 자본과 권력의 그 가증스러운 체제를 지지하고 뒷받침하는 가장 확실한 지지자라는 점을 일깨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약 그랬다가는 그 즉시 부르주아적 편견에 빠져 사회과학이라고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으로 취급될 것이다.(276p)

 

 

사실 어떠한 규정성도 단독으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며 충분한 효력을 발휘하지도 않는다. 어떤 규정성이든 오직 다른 규정성과의 교차와 협력을 통해서만 결과를 산출할 수 있다. 하나의 규정성을 다른 규정성들로부터 떼어 놓고 단독으로 고려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비-재생산의 씨실을 이룰 수 있는 선들 가운데 하나이긴 하겠지만 그 선이 실제로 하나의 직물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규정성들과 함께 엮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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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러한 이유에서 계급의 이행은 수평적인 기계적 인과성의 형태가 아니라 기질이 매듭지어지는 입체적 형태하에서 고려해야 한다.(302p)

 

 

마지막 분석을 하면서 과연 사회적 비-재생산을 더 유리하게 만들어 주는 규정성 혹은 그러한 비-재생산에 심각한 장애물이 되는 규정성이 따로 있는지 탐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를 고려한다면 우리가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그리고 이성애자보다는 동성애자에게, 백인보다는 흑인에게 불리한 요인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에 근거해서 그러한 정체성이 중첩되어 있을수록 넘어야 할 사회적 장벽이 계단처럼 쌓여 더욱 극복하기 어려워진다고 상상하기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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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떤 규정성들, 예를 들어 젠더, 성적 지향성 또는 인종 같은 규정성들이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효과와 그 실제적 영향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규정성들이 사회적 계급의 변화에 선험적으로 절대적인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성급할 것이다.(303p)

 

 

 

ㅡ 샹탈 자케, <계급횡단자들 혹은 비-재생산> 中,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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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15

 

 

 

경제가 쪼그라들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내면과 자신의 경제 상황으로 돌려졌고, 상품 구매나 라이프 스타일을 통해 '참된 자아'를 구현하는 타협안이 마련됐다. 1980년대는 레이건-대처의 신자유주의가 중산층을 분쇄했다. '소외'라는 말은 사라졌고, 신자유주의 경영 담론은 노동자가 일터에서 받는 구조적 압력을 온갖 종류의 '스트레스'로 간단히 치환했다.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것은 노동자의 몫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과거에 비해 소외가 더 완화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을 '관리'하거나 심지어 '경영'하는 다양한 기술과 기법이 등장했지만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시간 감각에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기계들의 변화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 없이 마치 자신들의 논리를 갖고 있는 것처럼,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혼자서 저만치 움직여 있다. 청소년기에 쓰던 피쳐폰은 온데간데없이, 세상에서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우리는 점차 빨라지는 신제품의 주기에 따라 감각을 재정비해해야 하는 세상에서 살게 됐다. 전자레인지나 냉장고는 기능이 정해져 있다. 이것들은 수십 년 동안 잘 바뀌지 않았다. 우리는 20년 된 냉장고를 무리 없이 다룰 수 있고, 20년 전에 살던 사람이 지금으로 온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스마트폰은 아니다. 특정한 기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기능을 제공하는, 말 그대로 작은 컴퓨터인 이 기계는 우리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끌고 간다.

예전에는 식당에 가서 돈을 내고 음식을 주문하면 점원이 돈을 돈통에 넣고 주문을 주방에 전달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음식이 나왔음을 알리는 점원의 호명은 번호표와 번호가 뜨는 스크린으로 대체됐다. 몇 년이 지나니 점원마저도 사라졌다. 우리는 어떤 논리로 내가 키오스크에서 선택한 주문 사항과 내가 지불한 금액이 주방과 가게의 돈통에 전달되는지, 어떻게 직원들이 나의 주문을 전달받는지 이제는 알 길이 없다. 이것이 꼭 과거에 대한 향수는 아닐 것이다. 이제 놀라울 것도 없는, 우리 삶에서 일상이 된 자동화는 삶의 여러 순간들을 안 보이는 상자 속에 가둬 준 채로 잠시 뒤 결과물을 툭 제시하는 것만으로 소임을 다했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작업의 어떤 단계들을 통제하고 개입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점차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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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자체는 늘어날 수 없는데 우리가 늘 제자리를 유지하려면 과거보다 더 빨리 달려야만 하고, 달리기를 멈추는 순간 급격한 감속에 따라 병리적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는 체제가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가속으로 인한 소외는 내가 만든 대상, 자연, 사회 세계, 나의 행위에서 멀어지는 것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 자체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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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소외는 나의 감각이나 자원, 내가 구성한 세계 속의 사물을 활용하지 못하고, 나의 주변 상황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을 잃어버린 상태로 정의할 수 있다. 나에 대한 주관적인 모습이나 내가 세상 속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에 관한 감각도 변형된다. 자기가 있는 시공간에 어색함을 느끼고, 현재를 있는 그대로 경험할 수 없는 위축된 상태가 바로 소외에 다름 아니다. 내가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무언가에 접근할 수 있으며 미래를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진 세상에서 남는 것은 항구적인 불안이다. 계속해서 편집증적으로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신하면서 주어진 과업을 수동적으로 '처리'하는 데만 몰두하게 된다. 우리는 삶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손쉬운 방어기제를 끊임없이 개발해 냄으로써 문제를 회피하거나, 은폐하거나, 뒤로 미룬다. 마친 현실을 직시하기 싫어서 발버둥 치는 아이와 같다.(73-75p)

 

 

사토리세대는 한국에 N포세대라는 이름으로 치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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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짝을 짓고 가족을 형성하는 데 있다고 한다면, 욕구를 포기한 젊은이들은 어떤 인간들인가? 사회학자 후루이치는 그들을 '끝난 인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자발적인 포기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의 좌절이 경쟁주의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이 같은 조어에선 은폐되어 있다. 섹스와 성, 연애조차도 경쟁적인 재화로 만든 사회야말로 젊은이들을 '끝난 인간'으로 만든 주범인 셈이다. 섹스할 상대를 선택할 자유나 꿈꾸던 미래를 현실로 만들 자유는 모두 한정된 인원에게만 제공됐다. 자발적 포기로 위장된 젊은 세대의 무기력은 말끔하고 편안한 일상에 고착되는 것처럼 간주됐지만, 그 내면은 원망할 대상을 선택할 '자유'를 추구하기 시작했다.(215-216p)

 

 

누군가는 어떤 것이 기이하냐고 묻는다. 대답은 이렇다. 2000년대에서 2010년대로 이동하며 자유에 일어난 중요한 변화는 '훔칠 수 있는 자유'가 '지켜야 하는 자유'로 변화했다는 점이다.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음악, 영화, 프로그램을 토렌트 같은 P2P 프로그램으로 다운받는 일은 마치 공기의 존재만큼이나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졌다. 금연 구역에서 흡연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많은 흡연자들은 금연 구역을 이용하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2010년대 전후로 정부와 지자체가 실제 거리 단속을 강화하고 강력한 수준의 법제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많은 흡연자들은 금연 구역 표지판을 무시하고, 건물 내에서 아무렇게나 담배를 피우며 살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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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불법적 행위들은 이유를 막론하고 자신의 편익을 도모하려는 데서 발생한다. 즉 '개인 행위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자유가 중요하다. 내가 '개인으로서' 갖고 있는 성적 자기 결정권, 노동자로서 갖고 있는 권리는 침해당할 수 없다. 이런 것들이 내가 '자유'를 바라보는 렌즈가 되었다. 우리가 자유에서 떠올리는 모습은 이런 것이었다. 반면 2010년대에 시민들은 자유를 대하는 데 있어 여태까지와 다른 태도를 취했다. 우리는 '우장창창' 사태에서 세입자가 아닌 '건물주'의 자유를 옹호했고, 보행자가 아니라 운전자의 자유에 감정을 이입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괴기하다고까지 할 현상이었다. 우리는 내가 언제나 약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 기반해 다소 부당할지라도 '개인적 층위'의 자유를 활용했다. 그러나 내가 아니라 나보다 훨씬 거대한 '기업', '건물주', '국가'의 관점에서 자유를 파악하고 평가한다. 다시 말해 세상을 바라보는 '스케일' 단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영화평론가 지우베르투 페레즈는 예술에서 '스케일'의 차이는 질적으로 다른 체험을 유발하는 요소라고 말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물리법칙은 규모에 무관심하지 않다. 어떤 세계보다 두 배 큰 세계는 크기만 두 배고 똑같은 세계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세계다. 예술에서도 규모는 차이를 만든다. 여전히 사진은 삶보다 작다. 영화 화면은 삶보다 크다. (...) 텔레비전의 작은 화면에서 영화를 보는 경향은 더 이상 우리가 들어가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들여다보며 엿볼 수 있는 세계로 영화의 변화된 경험을 만든다." 규모와 범위가 달라지면, 똑같은 개념이라도 더 이상 같지 않다. 우리는 짚신벌레의 눈으로 코끼리의 세계를 볼 수 없다.

(...)

2010년대에 들어 사람들의 눈에 밟히는 자유는 일반적인 시민이 견디기에 대단히 거대한 크기다.(404-407p)

 

 

2010년대 초두를 여는 '아덴만 여명 작전'이라는 이례적 사건에 대해 영화 평론가 허문영은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는다. 허문영은 관객이 마주한 이미지가 아니라, 관객과 이미지 사이에 놓인 '거리'를 문제 삼는다. 대부분 논자들은 영화가 현실을 재현하는 이미지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이 장면은 지나치게 잔인한 거 아니에요?" "여기서 주인공은 왜 바보처럼 행동하죠? 이거 비하 아닐까요?" 대신에 허문영은 관객이 이미지와 맺는 관계를 조정시키는 벡터로 '거리'에 매달리는 편을 택한다. 허문영의 분석대로 우리는 영화의 감각적 특성에 대한 호불호를 표하기 마련이다. 관객이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같은 고어 영화나 타란티노의 피칠갑 액션 영화에 호불호를 표하는 건 자연스러운 행위고, 취향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허문영이 보기에 실제 인간을 살해하는 영상에 환호하는 일은 취향이 아니라 윤리의 영역에 속한다. 사람이 죽었다. 또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죽였고, 이는 국가의 이름으로 승인됐다. 허문영은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데 사람들이 매혹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답은 의외로 간단할지 모른다.

"서울 도심과 아프리카의 지리적 거리, 한국인과 소말리아인의 인종적 거리, 혹은 도시인과 화물선 선원의 계층적 거리, 그리고 해적이라는 얼마간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기호(한 인디레이블은 '해적'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가 빚어 내는 비실재감이라는 심리적 거리 등등. 이 거리들이 한데 모여 더해지거나 곱해질 때, 거기에 그 사건이 나의 생활 반경에 모종의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국제정치학적 거리에 대한 판단이 가세할 때, 아덴만 사태는 그것을 원거리 통신 미디어를 통해 바라보는 우리에게 실제 사건이라기보다 하이퍼리얼한 스펙터클에 가까워진다.

(...)

거리라 함은, A지점에서 B지점까지 같은 물리적이고 실재적인 거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

내가 몸담은 시공간과 사회적 위치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실제 사건조차 실제 현실과 닮은 스펙터클로 받아들여진다. 한국인들도 이미 9·11 테러라는 선례를 접한 바 있다.(434-435p)

 

 

 

ㅡ 강덕구, <밀레니얼의 마음>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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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15

 

처음 몇 꼭지는 적당한 수준의 난이도라 생각하며 읽었는데, 본격적인 논문이 나오는 부분부터는 꽤나 본격적이라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 않다.

 

 

레비나스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레비나스에 따라 보더라도 기쁨이나 즐거움은 자기중심적 욕구의 충족에서 성립하죠. 우리 삶의 본래적 모습이 즐김, 즉 향유(juuissance)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향유는 '~으로 산다'는 구조를 갖지요. 그리고 이 무엇무엇('~')은 우선 타자적인 요소들로부터, 그러니까 내 뜻대로 좌우할 수 없는 요소들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니까 나의 삶은 내가 아닌 것에 의존해 사는 것이라는, 어쩌면 당연한 얘기를 하는 것이죠. 즐김은 이렇게 내가 아닌 것으로 사는 삶이 존립하는 데서 오는 만족함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쁨이나 즐거움은 여기에 수반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으로 사는 삶을 사는 한, 여기에 따르는 기쁨이나 즐거움은 우리 삶의 기본 특성인 셈입니다. 그러나 또 그러한 한, 이 기쁨은 근본적으로 자족적인 것일 수 없어요. 타자적인 요소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 타자적인 것은 궁극적으로 동일화가 불가능한 것, 즉 완벽한 제어와 통제가 불가능한 것이에요. 말 그대로 '다른'것이거든요.

(...)

기쁨의 근본적 유인은 기쁨을 느끼는 주체 밖에 있습니다. 기쁨이 느낌인 한에서 그럴 수밖에 없지요. 물론 그 바깥을 안으로 만들어 나가려 할 수는 있습니다. 레비나스 식으로 말해, 외부를 내재화하려, 타자적인 것을 동일자화하려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거기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폭우가 쏟아질 때 우산이나 지붕 아래서 비를 피할 수는 있지만, 당장 비를 멈추게 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죠. (29-31p)

 

 

무조건적 환대의 정신이 없다면 권리상의 환대는 충돌과 갈등을 자기 관점에서 조정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허울에 불과할 수 있다. 권리는 그것이 누구에 의해 또 어떤 맥락에서 규정되는가에 따라 그 상당 부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종교 분쟁이나 인종 분쟁에서조차 분쟁 당사자들은 자기들의 정당한 권리를 찾는다고 생각하지, 자신들이 상대방의 권리를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환대를 받을 수 있는 이방인의 자격과 상호성도 자기편에서 제한하고 규정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진정 상호적인 권리의 인정을 위해서도 자신의 틀에 맞지 않는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자세, 즉 자신의 틀을 열어젖히는 무조건적 환대의 정신이 필요하다. 결국 무조건적 환대란 나와 공통된 것만 받아들이고 타자를 '자기화'하려는 동일자의 지배 논리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사항은 조건적 환대와 무조건적 환대가 배타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조건적 환대와 무조건적 환대는 서로를 나름의 자리에서 환대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될 수 있을까요. 무조건적 환대는 조건적 환대의 바탕에 놓인 채 현실의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조건적 환대는 무조건적 환대의 영향으로 자신의 조건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긴 이 양자가 얽히는 양상은 역시 비대칭적이죠. 조건적 환대는 권리로서의 환대나 법적인 환대처럼 때로 건조하게 고립적으로 내세워질 수 있겠지만, 무조건적 환대 그 자체만의 모습은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순수한 무조건적 환대는 성립 불가능하니까요. 더 정확히 말해, 최소한 지속 불가능하지요. 순수한 무조건적 환대란 말 그대로 아무런 조건 없이 타자를 받아들이고,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개방하며,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일 텐데, 그래서야 환대의 요건인 주인으로서의 주체의 자리와 심지어 주체 자체마저 존립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므로 무조건적 환대는 언제나 현실의 조건들과, 그러니까 어떤 조건적 환대와 결합하는 한에서 현실화한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

요컨대 무조건적 환대는 조건적 환대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겹쳐 있습니다. 이 점을 놓치면 무조건적 환대를 실체화하려는 잘못을 범하게 되지요. 무조건적 환대는 그 자체로는 예시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환대의 예들 가운데 배어들어 가 있을 따름이며, 그 예들 하나하나는 모두 특정한 조건들에 의해 제약되어 있죠.

(...)

그렇다면 무조건적 환대의 정신이 살아 있다는 전제하에서 환대의 문제에 있어 정작 중요한 것은 무조건적 환대와 결합하는 시대적 또는 상황적 조건들이 아닐까요?(93-97p)

 

 

그렇다면 환대라는 틀을 넘어서는 길은 없을까요? 제가 알기로는 레비나스가 그런 방도를 추구하는 대표적인 사람인 듯합니다.

(...)

주체는 타자의 볼모라는 겁니다.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타자를 손님으로 맞아들이는 주인이 아니라, 애당초 타자에 매여 있는 처지라는 뜻이죠. 타자는 주체에 우선하며, 주체는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비로소 성립됩니다. 우리 삶의 모습이 워낙 그렇다는 거예요. 타자는 내게 손님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근접해 있습니다. 강박이라고 할 정도로요. 비록 내가 무언가를 차지하고 있다 해도 그건 원래 내게서 비롯하거나 내게 속하는 것이 아니죠. 오히려 나는 타자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에요. 일시적으로라도 내가 어떤 자리를 차지함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 자리에 이미 얽혀 있는 타자들을 대신하여 책임을 다함으로써죠. 내가 타자의 볼모라는 말은 이렇게 내가 스스로 행하지 않은 바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처지를 일컫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책임짐은 계산이나 거래를 넘어서며, 그 기초가 되는 이해관계를 넘어서지요.

(...)

세계에서의 나의 존재 또는 "태양 아래의 나의 자리", 나의 집, 이런 것들은 다른 사람에게 속하는 자리를, 즉 이미 나로 인해 제3세게에서 억압받거나 굶주리고 추방당한 다른 사람에게 속하는 자리를 부당하게 빼앗은 것이 아니었을까. 즉 그것은 배척이고 배제이고 추방이며 약탈이고 살해가 아니었을까. "태양 아래의 나의 자리"란 모든 대지에 대한 찬탈의 시작이고 찬탈의 이미지라고 파스칼은 말했다. 이것은 나의 존재함이 폭력과 살인으로 이룰 수 있는ㅡ그 의도나 의식의 무고함에도 불구하고ㅡ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 그것은 나의 현존재의 바로 그 장소가 누군가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다. 이것은 자리를 가질 수 없음을, 곧 심오한 의미의 유토피아를 뜻한다.(111-113p)

 

 

사실 이런 점이 교수님의 말을 그와 유사한 다른 말들과 구별해 줍니다. "나는 너희들 때문에 산다."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기도 하지요. "당신만이 내 삶의 의미야." 애인에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흔한 말이지요. 이 말들에서 '당신'이나 '너희들'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특정한 대상만을 가리키지요. 그렇다고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적합한 얘기겠지요. 그러나 교수님의 말은 좀 다릅니다. 거기서 '자네들'은 분명 그 수업에 참석해 있는 학생들을 가리키지만, 꼭 그들에게만 제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의 그 말은 우리에게 연속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지평을 환기시킵니다. 우리가 맺는 삶의 관계가 유동적으로 끝없이 펼쳐지듯이 우리 삶의 의미 또한 그러할 수 있다는 점을 환기시킵니다.(168-169p)

 

 

제가 좋아하는 현대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내 밖이 나보다 크다는 평범한 사실을 우리에게 새삼스레 일깨워 줍니다. 그의 용어를 빌면, 타자는 나 또는 동일자보다 언제나 크고 높습니다. 타자는 나보다 우선하지요. 내가 있기 전에 다른 사람들과 세상이 머ㅏㄴ저 있다는 사실, 그래서 나는 내 밖을 받아들이고 내 밖과 소통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끊임없는 자각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우리를 변화하게 합니다. 레비나스는 근대 이후의 서양 문명이 이러한 사실을 무시한 채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버렸다는 점을 지적하지요. 이 같은 자기중심주의는 독단주의로, 타자에 대한 억압으로 나아가며, 종래에는 자기 자신마저 파괴하기 쉽습니다.

(...)

이런 자세는 당신이 요만큼 열어 놓으니 나도 요만큼 열겠다는 식의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스스로에 대해 비판적이고 타인에 대해 개방적이 됨으로써 함께 열려있는 방식, 이것이 열린 생각과 열린 대화가 요구하는 자세입니다.

(...)

더욱이 우리의 열린 생각은 이러한 현실적 상황과 함께 현재의 의사소통이 안고 있는 한계를 고려하는 데로도 열려 있어야 합니다. 즉 오늘날의 의사소통의 틀 바깥으로도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시말해, 지금의 의사소통 안에 수용되지 못하고 무시되거나 배제된 수많은 의견들이 있다는 사실, 또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내는 사회적 조건들이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는 자칫 의사소통만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잘못된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단지 말이 안 통한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매몰차게 밀쳐 버리는 행동을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보지 않습니까.(176-179p)

 

 

진정한 용서라고 해서 삶이나 이해관계와 무관하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계산과 따짐의 삶이 가능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계산의 저변에는 계산 불가능한 것이, 계산을 넘어서는 것이 자리하고 있다는 얘기다. 칠종칠금의 예에서도 이 지반은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맹획을 놓아주는 제갈량의 용서가 전략적인 효과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 용서가 계산되지 않은 면과 관계할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잘못을 저지른 누군가를 용서하고, 그 용서에 그 사람이 감동하여 새로워진다고 하는 경우에, 그 용서의 행위가 그런 효과를 염두에 두고 계산된 것임이 드러난다면, 과연 어느 누가 그런 용서에 감복하겠는가?

그러니까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그렇게 숨겨진 의도가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마키아벨리 식의 어조로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문제는 의도가 노출되느냐 감춰지느냐에 있지 않다. 계산된 용서가 계산을 넘어선 용서의 외양을 취해야 효력을 발휘한다면, 그 효력은 계산을 초월한 용서에 힘입은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긴, 이런 '진정한' 용서조차 사실은 은폐된 계산을 담고 있는 것이며, 재산과 무관하게 용서를 행하는 사람은 무지를 통해 자기 자신마저 속이고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자신에게 해를 끼친 자를 조건 없이 용서하고, 용서받는 자가 그 용서를 통해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스스로도 마음에서 우러나는 무조건적 용서를 했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따지고 보면 그 용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를 무의식적으로 노리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채우기 어려운 복수심이나 원망 등으로 겪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숨은 계산이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이런 고려는, 레비나스 식으로 말하자면, 모두 동일자적 질서에 속하는 것이다.

(...)

우리의 삶이 우리가 관장할 수 없는 영역에서부터 비롯한 것이고, 그 점은 선물이 내 뜻대로 내게 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일 내가 바라는 바대로 선물이 주어지도록 요구하고 그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일종의 강요나 거래이지 선물이라고 하기 어렵다.

(...)

자신들의 삶뿐 아니라 태어나는 후손들의 삶도 선물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레비나스가 말하는 용서는 이런 선물의 면모를 지닌다. 더구나 그것은 새로움을 주는 선물이다. 이것은 대칭성과 계산을 모두 넘어선다. 그렇게 새로움을 준다는 점에서 이것은 시간의 구성이기도 하다. "잘못을 용서하는 것의 역설은 용서를 시간 그 자체를 구성하는 것으로 보게 한다." 이런 용서의 원형을 이루는 것은 늙음과 죽음을 넘어서는 삶의 연속성이다. 번식성ㅡ자식을 통해 끊임없이, 그러니까 단절을 넘어 계속되는 삶의 갱신이 용서의 원형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우리가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받는 것이다. 우리가 용서하는 주체고, 우리가 후세대에게 삶을 주는 것이 아니냐고? 천만에. 우리는 후세대가 삶을 얻는 과정에서 작은 역할을 하는 것뿐이다. 그들의 삶은 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선물이며, 특히 우리에게는 용서다. 잘못과 후회와 위반과 참회를 세월의 주름 속에 새기며 늙어 죽기 마련인 우리가 받는 용서다.(234-237p)

 

 

 

ㅡ 문성원, <철학의 기쁨> 中,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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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9

 

큰 감흥 없다. 그냥 옛 어른이 쓴 에세이.

 

 

사람을 믿었다가 속았을 때처럼 억울한 적은 없고, 억울한 것처럼 고약한 느낌은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어떡하든지 그 억울한 느낌만은 되풀이해서 당하지 않으려든다. 다시 속기 싫어서 다시 속지 않는 방법의 하나로 만나는 모든 것을 일단 불신부터 하고 보는 방법은 매우 약은 삶의 방법 같지만 실은 가장 미련한 방법일 수도 있겠다.

믿었다가 속은 것도 배신당한 것에 해당하겠지만 못 믿었던 것이 실상은 믿을 만한 거였다는 것 역시 배신당한 것을 수밖에 없겠고 배신의 확률은 후자의 경우가 훨씬 높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가 팔십 평생을 회고하며 자신 있게 못된 사람 만난 일 없다고 술회할 수 있듯이 세상엔 믿을 만한 게 훨씬 더 많다. 우리가 믿음에 대해 쉬 잊고 배신을 오래 기억하며 타인에게 풍기지 못해 하는 것도 우리의 평범한 일상의 바탕이 결코 불신이 아니라 믿음이기 때문일 것이다.(24-25p)

 

 

딸애들이 한창 혼기에 있을 땐 어떤 사위를 얻고 싶으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고, 친구들끼리 모여도 화제는 주로 시집보낼 걱정이었다. 큰 욕심은 처음부터 안 부렸다. 보통 사람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이 쉬워 보통사람이지 보통 사람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대라면 그때부터 차츰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우선 생활 정도는 우리 정도로 잡았다. 왜냐하면 우리보다 잘사는 사람도 많고 못사는 사람도 많은데 내 어림짐작으로는 우리보다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수효가 비등비등한 것 같으니 우리가 중간, 즉 보통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본 보통 사람은 대략 이러했다.

살기는 너무 부자도 아니고 너무 가난하지도 않을 것, 식구끼리는 화목하되 가끔 의견충돌쯤 있어도 무방함, 부모가 생존해 계시되 인품이 보통 정도로 무던하여 자식에게 보통 정도의 예절과 공중도덕을 가르쳤을 것, 학력은 내 자식이 대학을 나왔으니 대학은 나와야겠지만 일류냐 이류냐까지는 안 따지기로 하고 그 대신 적성에 안 맞는 엉뚱한 공부를 해서 대학을 나오나마나이면 절대로 안 되고, 용모나 키도 보통 정도만 되면 되지만 건강할 것, 돈 귀한 줄 알고 인색하지 않을 것, 등등이었다.

나는 그만하면 욕심도 너무 안 부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사윗감은 쌔고 쌨으려니 했다.

(...)

내가 가장 보통이라고 생각하고 내세운 조건은 어쩌면 가장 까다로운 조건인지도 몰랐다.

(...)

얼마 전에 어떤 일간지에서 평균치의 한국 사람을 계산해서 거기 꼭 들어맞는 사람을 찾아내서 '한국의 보통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크게 보도한 적이 있다.

(...)

그의 생활 정도나 학벌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보통 사람을 훨씬 밑돌았지만 그는 보통 이상 날카로운 사회적 안목과 비판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보통 사람다운 점이 딱 하나 있다면 그것은 큰 욕심 안 부리고 열심히 노력해서 지금보다 좀더 잘살고 자식은 자기보다 더 많이 가르치고 싶다는 건전하고 소박한 꿈이었다.

그러나 한편 냉정히 생각해보면 큰 욕심 안부리고 노력한 것만큼만 잘살아보겠다는 게 과연 보통 사람의 경지일까? 보통 사람이란 좌절한 욕망을 한 장의 올림픽복권에 걸고 일주일 동안 행복하고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이 아닐까? 보통 사람의 숨은 허욕이 없다면 주택 복권이나 올림픽복권이 그렇게 큰 이익을 올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 풍진세상에서 노력한 만큼만 잘살기를 바라고 딴 욕심이 없다면 그건 보통 사람을 훨씬 넘은 성인의 경지이다.

그럼 진짜 보통 사람은 어디 있는 것일까? 과연 있기는 있는 것일까? 보통 사람이란 평균 점수처럼 어떤 집단을 대표하고 싶어 하는 가공의 숫자일 뿐, 실지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크게는 안 바라요. 그저 보통 사람이면 돼요." 가장 겸손한 척 가장 욕심 없는 척 이렇게 말했지만 실은 얼마나 큰 욕심을 부렸었는지 모른다. 욕심 안 부린다는 말처럼 앙큼한 위선은 없다는 것도 내 경험으로 알 것 같다.(54-58p)

 

 

계획한 시간을 예기치 않은 일에 빼앗길까 봐 인색하게 굴다 보니 거의 시계처럼 살려니 꿈이 용납되지 않는다. 낮에 꾸는 꿈이란 별건가. 예기치 않은 일에 대한 기대가 즉 꿈일 수 있겠는데 나는 그걸 기피하고 다만 시계처럼 하루를 보내기에 급급하다.

시계처럼 산다면 제법 정확하고 신용 있는 사람 티가 나지만 시계가 뭐 별건가. 시계도 결국은 기계의 일종이거늘.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지 사람이 기계처럼 살아서 어쩌겠다는 걸까.

(...)

조금 덜 바빠져야겠다. 너무 한가해 밤이나 낮이나 꿈만 꾸게는 말고, 가끔가끔 단꿈을 즐길 수 있을 만큼만 한가하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계획 밖의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길 소망하면서 가슴을 두근대고 싶다.(66-67p)

 

 

그리고 엄마한테 귀가 따갑게 들은, 남의 좋은 점을 찾아내면 네 속이 편하고 네 얼굴도 예뻐질 거라는 엄마의 잔소리는 철들고 어른 되어, 엄마한테 그런 소리를 안 듣게 된 후에 오히려 더 자주 생각나고, 어떡하든지 지키고 싶은 생활신조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

남의 좋은 점만 보는 것도 노력과 훈련에 의해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으니 누구나 한번 시험해보기 바랍니다. 남의 좋은 점만 보기 시작하면 자기에게도 이로운 것이, 그 좋은 점이 확대되어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 변해 간다는 사실입니다.(134p)

 

 

나는 이런 보답의 기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외손자 사랑이 좋다.

손자야, 너는 이 할미가 너에게 쏟은 정성과 사랑을 갚아야 할 은공으로 새겨둘 필요가 없다. 어느 화창한 봄날 어떤 늙은 여자와 함께 단추만 한 민들레꽃 내음을 맡은 일을 기억하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건 아주 하찮은 일이다.

나는 손자에게 쏟는 나의 사랑과 정성이 갚아야 될 은공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아름다운 정서로 남아 있길 바랄 뿐이다. 나 또한 사랑했을 뿐 손톱만큼도 책임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내가 불태운 것만큼의 정열, 내가 잠 못 이룬 밤만큼의 잠 못 이루는 밤으로 갚아지길 바란 이성과의 사랑, 너무도 두렵고 무거운 책임감에 짓눌려 본능적인 사랑 또한 억제했야 했던 자식 사랑·····. 이런 고달픈 사랑의 행로 끝에 도달한, 책임도 없고 그 대신 보답의 기대도 없는 허심한 사랑의 경지는 이 아니 노후의 축복인가.(148p)

 

 

아무리 헹구어도 남아 있는 곰삭은 시간의 맛, 절대로 인공적으로는 만들 수 없는 그 맛은, 아무하고도 나눌 수 없는 고독의 맛이기도 하다. 아무하고도 그 맛의 밑바닥, 궁핍했던 시절의 내 혀 끝에 남긴 맛의 오지만은 나눌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그 보잘것없는 것을 아귀아귀 포식하고 나면 슬프다.(267p)

 

 

 

ㅡ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中,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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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9
 
저자가 관련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새로운 건 없었고, 이미 아주 많은 심리학 교양서에 등장해 식상한 인지 편향에 대해 다시 한번 언급하고 자신의 사례를 곁들인 정도였다.
 
 
 
그러나 유명인들은 때로 그들 자신을 '연기'한다. 게다가 온라인에서는 그 쇼가 매일 24시간 방송된다. 우리는 유명인들이 자신의 '실제' 페르소나를 조각조각 디지털로 방송하던 레이건 시대 할리우드 우상숭배보다 더욱 방향감각을 잃고 그들이 전부를 안다고 느낀다.
(...)
텀블러, 틱톡, 인스타그램, 패트리온 등의 플랫폼을 통해 스타의 개인적 정보에 이전보다 월등히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주술적 과잉공유의 시대에는, 유사사회적 거리가 줄어들고 팬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스타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어쨌든 텔레비전과는 달리 테일러 스위프트가 실제로 당신의 인스타그램 댓글에 직접 반응할 가능성이 있긴 하니 말이다. 전능하신 성인이 신자의 기도, 혹은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다.(36-37p)
 
 
우리는 당연히 우리의 영웅이 조금은 우리와 비슷하기를 바란다. 미세하게 인간적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팝 스타가 자기 노래 첫 소절을 깜빡해서 다시 시작해야 할 때. 대통령이 몰래 숨어서 담배를 피울 때. 휴가 중에 어머니가 알딸딸해졌을 때. 불완전함이라는 고명은 초콜릿 칩 쿠키 위의 소금 조각처럼 스타들의 성스러움을 한층 더 두드러지게 한다. 그러나 동상처럼 숭상받는 사람들이 온전히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면 우리는 때때로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군다.
지난봄 한 영국 소설가와 점심을 먹으며 서로의 유년 시절을 비교하던 중, 그가 '충분히 괜찮은 어머니'라는 개념을 언급했다. 영국 소아청소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컷이 1953년 어머니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아이들을 실망하게 하는 게 아이들에게 더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만든 용어다.
(...)
"설령 완벽한 어머니가 되는 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아주 작은 실망감도 견디지 못하는 예민하고 취약한 아이가 될 것이다. 충분히 괜찮기만 하다면, 우리 대부분이 그러리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대체로 옳은 선택을 하고, 가끔 틀린 선택을 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우상을 흠결 없는 어머니의 형상으로 덧칠하는 스탠은 취약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예술적 우상들이 충분히 괜찮기만 해도 되지 않을까.(48-49p)
 
 
현실화 박사의 성장세는 독보적이지만, 그 내용은 그렇지 않다. 박사의 메시지는 음모론의 기본 조건을 속속들이 충족한다. 그 바탕이 되는 논거는 현대 정신 건강 위기에 맞게 각색된 고전적인 선악 이야기로, 전통적인 치료법과 약 들이 사람들을 계속 아프게 하지만 여기에서 벗어나 스스로 치유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저 우주가 당신을 굽어살피게 하는 법을 배우기만 하면 된다. 아픈가? 가난한가? 최선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한가? 그렇다고 당신의 못된 상사나 착취적인 전 연인을 탓하지 말라. 그것은 피해자나 하는 일이다. 고혈을 빨아먹는 상류층을 탓하지 말라, 그것은 실제 음모론자들이나 하는 짓이니까. 그 대신 해결되지 않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탓하라. 그러고 나서 이 '자기 역량 강화 사이클'에 등록해, 전통적인 치료 비용에 비교하면 새 발의 피인 월 26달러로 당신에게 걸맞은 삶을 현실화하는 법을 배우라.
이런 내용은 현실화 박사뿐 아니라 2020년대 초 시장으로 물밀 듯 몰려든 뉴에이지 정신 건강 유명 인사 전부가 기본적으로 주창하는 바다. 국민의 심리 상태가 집단으로 급격히 악화하고 정신 건강 담론이 증가하면서 이전까지는 심리치료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들마저도 자신의 불안을 과민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
현실화 박사가 명성을 얻을 즈음에는 치명적인 전염병과 같은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야 마땅할 미국 의료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철저하게 무너졌고, 수많은 시민이 전통적인 정신과 의사조차 찾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관공서의 기나긴 줄과 보험 정책, 2000달러짜리 양복을 빼입은 우유부단한 고위급 의료 자문단에 질려 버렸다. 대신 이들은 자신과 같은 언어를 구사하고, 비용 없이 휴대전화로 접근할 수 있으며, 사람마다 다른 여러 작은 이유가 무작위로 뭉쳐 기분이 엉망이고 세상이 숨 막히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목적이 분명한 단 하나의 거대한 원인이 있다고 특별한 용어로 설명해주는 친숙한 포퓰리스트를 원했다.(56-59p)
 
 
남성의 음모론 취향은 보통 UFO나 사탄 비밀결사로 향하지만, 교육받은 여성들은 그 누구보다도 달빛 샤워, 크리스털 힐링, 끌어당김의 법칙을 비롯한 현실화 기술 등 뉴에이지 개념을 열렬히 받아들인다. '조절장애' '신경회로' '후성유전학' '혈관미주신경반응' 등 다음절 DSM 용어와 신비주의를 결합해 이용하는 이런 가르침은 타로점과 의학 진단의 달콤한 만남처럼 느껴진다. 언뜻 보기에 자기 치유의 약속을 힘을 기르도록 도와주는 것처럼 보인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외적인 힘을 탓하는 전통적인 음모론에서 통제 소재가 전적으로 추종자 외부에 위치한다면, 현실화에서는 다시 개인이 통제 소재가 된다. 그러나 나는 이런 방향 전환이 한층 음험하다고 생각한다. 음모론 대부분은 불가사의한 외부의 악이 당신을 통제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음모론적 치료에서는 그 악한 힘이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고 말한다.
'자기 치유'는 각자가 자신의 운명을 창조한다는 티베트불교의 가르침을 상품화한 추상적인 뉴에이지 개념이다. 본래의 교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이나 사건을 통제할 수 없더라도 우리 자신의 반응을 통제함으로써 고통을 완화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인스타그램용으로 멀끔하게 포장된 버전은 개인의 책임에 지나치게 몰두하게 만들 수 있기에 문제적이다. 음모론적 치료가 내세우는 핵심 메시지의 중심에는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치유되지 않은 어린 시절의 상처로 둔갑한 '트라우마'의 보편적인 위험성이 있다.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와 질병 사이 연관성을 과도하게 일반화하는 인플루언서들도 있다. 고통을 대하는 이런 납작한 태도는 의료계의 인종차별이나 세대 간 빈곤 같은 구조적 요소뿐 아니라, 무작위로 닥쳐와 트라우마를 남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불운 역시 간과한다. 운 좋은 결과가 있을 때 개인의 노력 역시 마찬가지로 과대평가된다.
복잡다단한 질문을 형이상학적 교리로 해명해 내는 경향은 때로 '영적 우회'라고 불린다. 이런 관점은 명상이나 심지어 사랑하는 이들의 지지와 같은 외부적인 돌봄을 추구하지 말라고 은근하게 종용한다. 불행을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는 것은 온전히 각자의 몫이라는 메시지가 핵심이기 때문이다.(67-69p)
 
 
2021년 버지니아대학교 심리학 연구자 두 명은 참가자 91명에게 특정 패턴을 제시하고 색깔 블록을 더하거나 빼서 대칭을 만들어 보도록 했다. 연구자들은 참가자 20퍼센트만이 블록을 빼서ㅡ감산 위주의 접근법으로ㅡ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여겼다. 이처럼 뭔가를 더하는 해결책을 선호하는 편향은 흔히 나타나며, 배낭 씨와의 관계에 나를 가두었던 손실 회피와도 관려이 있다. 대부분 사람은 문제가 제기되면 자연스럽게, 뭔가가 불필요하거나 잘못 놓여서가 아니라 빠져서 그 문제가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가산 편향은 최근에 내가 수면 습관을 개선하겠다고 오후에 에스프레소를 마시지 않고 침실에 휴대전화를 들고 들어가지 않는 대신 라벤더 베개 스프레이와 아답토젠 파우더 한 통, 일출 알람 시계에 100달러를 쓰기로 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색깔 블록 여섯 개를 추가하려 한 셈이다. 걸리적거리는 두 개만 제거하면 되는 일인데 말이다.
(...)
하지만 때로 행복해지기 위해 정말로 필요한 것은 뭔가를 치워버리는 일이다.(101-102p)
 
 
마치 낮이 밤에 자리를 내어 주는 모습처럼, 자신의 몸이 허약해지는 것과 동시에 구독자 수가 늘어나는 모습을 바라보면 어떤 기분일까?*
 
*죽음은 웹상의 존재감에 왜곡된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뇌종양을 이겨 낸 코트니는 수많은 전문적인 메이크업 영상을 올렸는데, 그럼에도 조회 수가 가장 많은 것은 실어증 수술 후의 질의응답 "업데이트: 말하기는 어려워"다. 조회수 500만이 넘는 이 영상의 섬네일에는 반짝이는 분홍색 배경 속, 방사선 헬멧 옆에서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코트니의 모습이 담겨 있다. 1년 뒤 코트니가 완치를 선고받자 조회수는 수천 건씩 추락했다.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 생생하게 죽어 가는 과정을 바라보는 것을 흥미로워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상황이 나빠지는 데도 한계가 있고, 인터넷에서 관심을 끄는 데 관해서라면 완치는 죽음과 마찬가지로 사업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144p)
 
 
최신성 환상은 그저 내가 새로 접했다는 이유로 어떤 대상이 객관적으로도 새로우며, 따라서 위협적이라고 가정하는 경향을 일컫는다. 위급하지 않은 추상적인 '위험'이 당장 자신을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릴 것처럼 반응해 본 적이 있다면, 끝없이 발생하는 최신성 환상을 탓해도 된다. 이 편향은 어떤 현상이 단지 우리 눈에 우연히 들어왔다는 이유로 그 현상이ㅡ사실은 몇 시간, 수개월,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왔다고 해도ㅡ지금 막 발생했다고 믿도록 속인다.(170p)
 
 
전염병은 우리 두뇌를 바다로 휩쓸어 가 버렸고, 시간은 지독히 느릿느릿 흘러갔지만 돌아보면 그 모든 시간이 어디로 가 버렸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 사랑에 빠지면 정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케이시와 나 사이의 모든 새로움이 우리를 온전히 현재에 머물도록 했고, 시간은 시게 위에서보다 100배는 늘어났다. 유년 시절이 그토록 길게 느껴지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새롭기 때문이다. 적어도 자신에게는.(186-187p)
 
 
주목할 점은 꾸며 낸 자신감은 효과가 없다는 사실이다. 앤더슨은 진정한 자기 확신은 자주 먼저 나서서 낮고 편안한 톤으로 말하는 등 특정한 언어적, 신체적 표지를 단서로 측정될 수 있다고 말한다. 구경꾼들은 이런 지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허튼소리에는 속지 않지만,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 자신도 자기 말을 믿지 않을 때만 그렇다. 2014년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과신을 조장하는 것은 "자기기만적 허세"다. 자기기만적 허세는 단순히 실제보다 더 나은 사람인 양 행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다고 믿는 일종의 심오한 기만을 말한다.(203-204p)
 
 
이런 현상의 많은 부분이, 특정 진술을 단순히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에 진실이라고 믿는 경향인 환상 진실 효과로 인해 발생한다. 거짓을 '진실처럼 들리게'만드는 반복의 힘이 핵심인 환상 진실 효과는, 가짜 뉴스 헤드라인부터 해서 마케팅을 위해 들먹이는 주장, 루머, 잡다한 상식, 인터넷 밈까지 아우르는 여러 '자극제'에 의해 증명되었다. 내가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껌 한 덩이를 삼키면 소화하는 데 7년이 걸린다고 굳게 확신했던 이유도 환상 진실 효과 때문이다. 그러나 이 편향은, 엑스액토 칼이 포장지를 가르는 것처럼 너무나 쉽게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퍼져 나가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환상 진실 효과가 미치는 영향력은 중세 신부에게서 실제보다 더 악취가 났다는 믿음처럼 소박할 수도 있지만, 복지제도를 이용하는 사람은 게으르다는 신화처럼 사회를 좀먹기도 한다. 개인과 사회에 대한 전설과 이야기 유형 전체가 환상 진실 효과를 통해 만들어지고, 계속해서 전파되고, 의심 없이 믿어진다. 최악의 경우, 이런 편향을 지배하는 자는 폭군이 될 수 있다. 공적인 인물들은 반복과 압운 같은 아주 오래된 스토리텔링 전통을 정치 무대로 가져와서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대량 퍼뜨려 편견을 조장하고 이로써 권력을 강화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언어적 기술은 진실을 깨우치는 즐거움을 불어넣는다. 또 무작위적인 일회성 일화보다는 여러 출처에서 확인된 정보를 중시하도록 우리를 일깨운다.(227-228p)
 
 
이번 세기 만들어진 신조어 중 지금까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아네모이아anemoia'로, 경험하지 않은 시절에 대해 느끼는 향수를 의미한다. 이전까지 이름이 없던 감정을 가리키는 신조어를 모아 놓은 매혹적인 해설집 「슬픔에 이름 붙이기」의 저자 존 케니그가 만든 단어다. 해당 책에는 좋은 책을 다 읽은 뒤 찾아오는 상실감을 듯하는 "루스레프트looseleft", 자신의 심장박동을 의식하는 불안감을 의미하는 "루바토시스rubatosis"등이 등장한다. '아네모이아'는 '바람'을 의미하는 'anemos'와 '마음'을 뜻하는 'noos', 두 고대 그리스어 단어와 관련이 있다.(270p)
 
 
만드는 과정에 우리의 도움이 들어간 물건에 지나치게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은 이케아 효과로 알려진 인지 편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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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아 효과는 2011년 아이비리그 연구자 세 명이 직접 조립한 제품의 가치를 부풀리려는 인간의 내재적 충동을 입증하면서 문서상 최초로 언급되었다. 하버드대학교 행동과학자 마이클 I. 노턴이 주도한 실험에서 참가자들은 레고를 조립하고, 종이를 접고, 이케아 상자를 조립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참여자가 DIY 취미에 전혀 관심이 없거나 재미를 느끼지 않았을 때도, 프로젝트가 완성되는 걸 본 참여자는 곧장 만족감으로 부풀었다. 참여자들은 객관적으로 더 나은 미리 조립된 제품보다 자신이 조립한 제품에 더 많은 돈을 내겠다는 의향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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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지는 얘기로는 1947년 제너럴밀스에서 처음부터 직접 만든 케이크와 사실상 맛이 똑같은 새 베티크로커 케이크믹스를 출시했다. 해당 제품은 처음에는 인기를 누렸지만, 곧 판매가 추락해 생산이 중단되기 직전이었다. 당황한 제너럴밀스사는 프로이트파 심리학자에게 분석을 요청했고, 그 심리학자는 판매 부진이 죄책감의 결과라는 결론을 내렸다. 전업주부들은 자기가 한 일이 고작 물 붓기밖에 없다면 케이크가 진정으로 자기 것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두 손으로 직접 폭신폭신한 간식을 만들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자 제너럴밀스사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마케팅을 전환했다. "달걀을 더하세요"라는 표어를 더해 케이크믹스를 재출시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기 쉬우면서도 너무 쉽지는 않은 케이크가 탄생했다. 베티크로커 판매는 급증했다.
이 달걀 전설의 세부 사항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우선 신선한 달걀을 더하는 것은 단순히 마케팅 술책만은 아니다. 그러면 실제로 인스턴트 케이크가 더 맛있어진다), 핵심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뭔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우리 손이 개입한 결과물을 그렇지 않은 결과물보다 더 좋아한다.
(...)
기술적으로 보면 케이크믹스에는 추가 재료나 노동, 전문성이 필요하지 않지만, 그 달걀이 '효능감', 즉 어떤 일이 잘 돌아가게 했다는 영적 만족감을 찾으려는 소비자의 욕망을 충족한 것이다. 달걀 먹분에 사람들은 자기도 중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298-301p)
 
 
 
 
ㅡ 어맨다 몬텔, <합리적 망상의 시대> 中, A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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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8

 

 

다방면에 관심을 가진 특이한 이력의 저자가 다방면의 사례를 바탕으로 연대가능성에 논하는 책. 책을 읽기 전부터 많이 들었던 '오배'라는 개념ㅡ엄밀히 말하면 데리다의 개념이지만ㅡ과 '관광'을 연결시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 게 설득력도 있고 재미있다.

 

 

이 책에서 로티는 주로 하버마스와 푸코의 대립을 다루지만 이를 하버마스와 데리다의 대립으로 치환해도 문제는 없다. 셋의 '타자'관 차이를 아주 간략히 요약하면 이성을 통해 타자와 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하버마스(근대주의자)고, 타자란 서로 알 수 없는 존재기 때문에 타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데리다(포스트모더니스트)며, 애초에 타자의 정의를 심화해 봤자 의미가 없으니 각 국면마다 다른 뜻으로 사용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로티(실용주의)다.(34-35p)

 

 

관광이 성립하려면 산업 혁명이 진전되어 노동자 계급이 힘을 갖고 이들의 생활 양식에 여가가 포함되는 큰 변화가 필요하다. 달리 말해 대중 사회와 소비 사회가 형성되어야 한다. 대중 사회와 소비 사회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20세기 사회를 지칭할 때 쓰이지만 그 맹아는 19세기 중반에 나타났다. 그리고 여기서 관광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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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와 라르센은 구체적으로는 1840년대에 시작된 잉글랜드의 해변 리조트 개발을 그 시초로 본다. 19세기에는 노동자 사이에 해수욕이 유행해 해안의 한적한 마을이 급격히 도시화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는 귀족이 독점하고 있었던 18세기적인 온천욕 치료를 대체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해수욕은 순수한 오락이 아니라 온천욕 치료에 가까운 것으로 인식되었다.(44-45p)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홈그로운 테러리스트나 외로운 늑대라고 불리는, 선진국 내부에서 조직적 배경 없이 고독하게 범죄를 준비하는 새로운 유형의 테러리스트다. 그들에게는 이데올로기가 없다. 표적도 정치인이나 경제 요인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이 21세기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반 대중 자체를 공격한다. 런던 만국박람회에 대중 요금으로 입장하고, 돈 한 푼 쓰지 않고 산책하며 파리의 파사주를 즐기던 노동자 계급의 후손을 표적으로 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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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들의 동기를 '진지하게'고찰하면 고찰할수록 헛돌게 된다. 이들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고 때로는 자살까지 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진지'하다. 사람의 생사만큼 진지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 동기를 파헤치면 도무지 '진지하다'고 할 수 없는 천박함에 당도하게 된다. IS(이슬람국가)가 인터넷에 공개한 할리우드 영화 뺨칠 정도로 과도한 편집을 거친 처형 동영상을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진지함'과 '경박함' 사이에서 맴도는 이 감각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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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스트의 동기를 '진지하게' 찾아내려는 것 자체가 그들의 행동을 볼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 원리를 언어화하기 위해서는 일단 '진지함'과 '경박함'의 경계를 무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관광객적인 것과 정치의 관계를 근본부터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61-62p)

 

 

내 생각에 어느 시기(대략 1995년 이후)부터 오타쿠 계열 콘텐츠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처음부터 2차 창작의 상상력을 내면화하게 되었다. 2차 창작 시장이 일정 규모를 넘으면 모든 작가가 2차 창작을 통해 재해석될 가능성을 미리 고려하게 되고, 그런 고려를 바탕에 두고서 캐릭터를 만들면 상업적 성공 가능성도 높아진다고 판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시장에서 유통되는 스토리나 캐릭터가 독특한 방향성을 갖게 된다. 캐릭터 설정이나 디자인은 손쉽게 2차 창작할 수 있게 '모에'화하고, 스토리도 처음부터 스핀 오프(파생 작품)를 만들기 쉽게 부품화되는 데이터베이스화가 진행된다. 특정 게임 장르에서는 스토리의 2차 창작(재해석)을 미리 고려한 결과, 같은 사건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루프(시간 반복) 모티프가 유행했다.

이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지극히 일반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오타구 문화만 그런 것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한 작품이 오로지 그 자체의 가치만으로 평가받고 유통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모든 작품은 '다른 소비자가 어떻게 평가하느냐'그리고 '다른 소비자는 내 평가를 어떻게 여기느냐'등과 같은 '타자의 시선'을 내포한 형태로 소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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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용어를 모른다 해도 페이스북의 '좋아요' 기능을 생각해 보면 그 본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마음에 드는 게시물을 보고 소박하게 '좋아요'를 누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좋아요'를 누르면 다른 사람에게 높이 평가받은 게시물에 적극적으로 '좋아요'를 누른다. 그래서 네트워크 전체로 보면 정치처럼 사람에 따라 찬반이 나뉘는 골치 아픈 화제를 피해 고양이 사진이나 요리 사진처럼 '무해'한 콘텐츠에 '좋아요'가 몰리게 된다. 우리는 지금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메커니즘이 전례 없이 맹위를 떨치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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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는 작품을 분석할 때 먼저 작품 자체를 평가하고 그런 다음 작품의 소비 환경을 살피는 상식적인 순서를 적용할 수 없다. 작품 자체가 이미 소비 환경을 감안해 제작되었으므로 분석자도 이를 고려하며 작품을 다루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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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영화, 만화 등 장르를 막론하고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은 대체로 작품 자체의 독해를 중시하고 소비 환경의 분석은 '사회학적인 것'이라며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지금도 문예지에는 그런 시대착오적인 비평이 넘쳐 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작품의 내부(작품 자체)와 외부(소비 환경)를 분리해 전자만을 대상으로 삼아 '순수하게' 비평하거나 연구하는 태도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외부가 내부에 어떤 형태로 포함되는지 그 역동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비평도 연구도 존재할 수 없다.

(...)

이를 이 책의 용어로 표현하면 오늘날 커뮤니티 분석이나 지역 연구를 할 때는 처음부터 관광객의 시점에 입각한 분석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주민이 자각 없이 살아가는 '소박한 토지'가 먼저 존재하고, 나중에 관광객이 그곳을 발견해 경제적 이익이 생겨나면 대신 소박함이 상실된다ㅡ이것이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변화의 순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현대 소비 환경 속에서는 원작이 먼저 존재하고 나중에 2차 창작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원작자는 처음부터 2차 창작을 철저히 염두에 두고 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처음에 '소박'한 주민이 있고 뒤이어 관광객이 오게 된다는 순서도 실은 전도된 것이 아닐까? 아니, 오히려 지금은 모든 장소가 관광객의 시선을 이미 내면화해 시가지나 커뮤니티를 만드는 쪽으로 바뀌고 만 것이 아닐까? 달리 말해 모든 것이 테마 파크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문제는 신중히 검토할 가치가 있다.(68-71p)

 

 

지금 세계에서 유통되고 있는 것은 후쿠시마의 2차 창작인 Fukushima뿐이다. 원작(원래의 후쿠시마)을 소중히 여기는 살함들은 이 현실을 견디기가 힘들 것이다. 그 견디기 힘듦을 호소하는 가이누마는 원작충의 입장에 서 있다. 그 마음은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2차 창작을 결코 없앨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Fukushima에 대한 환상이 앞으로도 계속 재생산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그런 2차 창작=Fukushima의 유통을 역이용해 사람들의 일부라도 원작=원래의 후쿠시마로 인도할 수는 없을까? 즉 원전 사고 이외의 후쿠시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머물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고 현장을 보고 싶다', '폐허를 보고 싶다'는 감정을 활용해 후쿠시마의 매력을 세계에 알리는 프로그램을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내 제안이었다.

원작을 소중히 하려면 한번은 2차 창작을 거쳐야 한다. 언뜻 이해가 잘 안 될지도 모르겠다. 논리만 보면 말장난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논리만 보면 말장난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아주 알기 쉬운 이야기다. 예를 들어 내가 체르노빌에 사람들을 안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2차 창작된 체르노빌(방사능으로 오염된 불모지)를 한번 믿었기 때문이다. 원전 사고가 없었다면, 그리고 체르노빌이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누가 굳이 우크라이나 변경의 전원 지역까지 찾아갈까? 마찬가지로 가이누마가 「최초의 후쿠시마학」을 출간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원전 사고가 없었다면, 그리고 괴물화한 Fukushima가 유통되지 않았다면 굳이 후쿠시마학을 구상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2차 창작이 없다면 원작에 접근할 회로도 없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앞세 체르노빌 투어 참가자가 모두 체르노빌이 '평범하다'는 감상을 남긴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실망했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관심의 폭이 넓어졌다는 뜻이다. 체르노빌은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예전에는 유대인이 인구의 절반을 점했다고 한다. 체르노빌이 자리한 폴레시아 지방은 아름다운 숲에 둘러싸인 늪지대로, 지금은 폐허가 되고 만 발전소 근처의 도시 프리피야트는 소련을 대표하는 유토피아로 건설된 선진적인 인공도시였다.

많은 일본인이 이런 사실을 모른다. 관심도 없다(외국인이 후쿠시마의 현실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그리고 체르노빌에 대해 유치한 환상을 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일방적으로 비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용해야 한다. 설령 동기가 유치한 환상이라고 해도 한번 체르노빌까지 발걸음을 옮겨 그곳이 '평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투어 참가자는 필연적으로 그 사고 이외의 배경 정보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 정보의 다층성 속에서 다시 한번 사고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매년 체르노빌 투어를 통해 노리고 있는 효과다. 나 또한 처음 체르노빌에 갈 때는 유치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사람은 자신이 '평범하지 않다'고 믿고 있던 장소를 찾아가 그곳이 '평범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평범하지 않은'일이 우연히 그곳에서 일어났다는 '운명'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다. '평범함'과 '평범하지 않음' 사이의 왕복 운동이 바로 다크 투어리즘의 근간이다.

탁상공론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78-80p)

 

 

관광은 시민 사회의 성숙과 무관하다. 관광은 국가의 외교적인 의지와도 무관하다. 달리 말해 공화제와도 국가 연합과도 무관하다. 관광객은 단지 자신의 이기심과 여행업자의 상업 정신에 이끌려 다른 나라를 방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문=관광은 평화의 조건이 된다. 이것이 칸트가 말하려던 바가 아닐까?

이는 또한 21세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국제 사회가 '불량배 국가'를 지정해 테러리스트를 양산하고 있는 한편, 세계 각국은 엄청난 수의 관광객을 외국으로 내보내고 있다. 관광객들이 꼭 '공화국'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중국, 러시아, 중동 국가들도 서양의 기준에서는 성숙한 국가라고 할 수 없을지 모르며, 이로 인해 국가 차원에서는 영원한 평화를 위한 국가 연합에 가입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 국가의 시민은 관광객으로서 전 세계를 활보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조국의 체제와는 상관없이 평화에 공헌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과 한국, 일본과 중국은 항상 심각한 정치적 문제를 안고 있지만 서로를 오가는 많은 수의 관광객 덕분에 관계 악화가 상당히 억제되고 있다.

관광의 이런 기능은 그것이 발명되었을 때부터 의식되었다. 쿡은 스코틀랜드 행 투어를 최초로 기획하면서 그것이 두 지역의 우호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을 기대했다.(104-105p)

 

 

여기서 내가 아렌트를 사례로 든 이유는 일반적으로 그녀가 슈미트와 코제브, 특히 슈미트와 대조적인 사상가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사실 나치에 협력했던 슈미트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망명한 유대인 아렌트는 정치적으로 대극에 위치한다. 아렌트는 좌익이고 슈미트는 우익이다. 그러나 그런 이데올로기적 표면을 벗겨 내고 보면 이들의 사상은 놀랍도록 구조가 비슷하다.

슈미트, 코제브, 아렌트 모두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커다란 사회 변화 속에서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근본부터 되물은 사상가다. 슈미트는 친구와 적을 구분 짓고 정치를 행하는 자가 바로 인간이라고 답했고, 코제브는 타자의 인정을 추구하며 투쟁하는 자가 인간이라고 답했으며, 아렌트는 광장에서 토론하며 공공성을 만드는 자가 인간이라고 답했다. 언뜻 제각각인 답처럼 보이지만 이들이 인간을 무엇과 대비시켰는지를 보면 공통된 문제 의식이 부각된다. 슈미트가 친구/적 이론을 구축한 것은 친구와 적의 구분에 신경 쓰지 않고 경제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인간(자유주의자)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코제브가 투쟁 정신으로 무장하고 역사를 만드는 이가 바로 인간이라고 주장했던 것은 투쟁도 역사도 필요로 하지 않고 쾌락에 자족하는 인간(동물적 소비자)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을 집필한 것은 다시 인용하면 "자기 육체라는 사적인 공간에 갇힌",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노동하는 동물'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

슈미트와 코제브 그리고 아렌트는 같은 패러다임을 살았다. 이들은 모두 경제적 합리성을 원동력으로 삼으며 정치를 배제하는, 친구/적의 구분이 없는 평면적인 대중 소비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고전적인 '인간'의 정의를 부활시키려 했다. 달리 말해 그들은 모두 글로벌리즘이 실현하게 될 쾌락과 행복의 유토피아를 거부하기 위해 인문학 전통을 활용하려 했다.

이 책이 '관광객'을 사유함으로써 극복하려는 대상이 바로 이 무의식적 욕망이다. 20세기의 인문학은 대중 사회의 실현과 동물적 소비자의 출현을 '인간이 아닌 것'의 도래로 받아들이고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이 거부가 글로벌리즘이 진행된 21세기에 통할 리 없다. 실제로 인문학의 영향력은 이번 세기 들어 급속히 쇠퇴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문학 자체를 변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이 책의 바탕에 있는 위기 의식이다.(134-136p)

 

 

그렇지만 다중 개념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따라서 관광객의 철학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네그리와 하트의 철학을 얼마간 수정할 필요가 있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의 대두를 강조한다. 분명 앞서 짚은 바와 같이 21세기 들어 세계 각지에서 지구화의 대안(지금과는 다른 또 하나의 지구화)을 요구하는 민중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네트워크 형태의 자기 조직화(지도자 없는 동원)도 일반화되었다. 이 점에서 다중의 존재감은 눈에 띄게 커졌다.

그러면 이 힘은 어떤 식으로 현실 정치와 연결될까? 데모는 어떻게 정치를 움직이는가? 네그리와 하트의 철학에는 이에 대한 전략론이 통째로 결여되어 있다. 이들은 데모가 그대로 정치가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

즉 평이하게 해석하면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이 모여 목소리를 내기만 하면 네트워크의 힘으로 어떻게든 되지 않겠냐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이를 믿느냐 또는 '사랑'하느냐다.

(...)

새로운 운동에는 당도 이데올로기도 지도자도 필요 없다. 반자본주의적일 필요도 없다. 그저 네트워크의 힘을 믿으면 된다. 사랑이 있으면 된다.

(...)

조금 악의적으로 말하자면 「제국」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고 지금도 운동권에게 참조되는 이유는 그 분석력이나 사상의 깊이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다중의 운동론적 결함 때문 아닐까? 네트워크와 사랑만 믿으면 나머지는 생명 정치의 자기 조직화가 어떻게 해 준다ㅡ이렇게 고마운 운동론이 또 어디 있을까. 설혹 이것이 오해라 해도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오해를 경유해 힘을 얻은 것이다.(172-175p)

 

 

그렇다면 도입의 방식은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할까? 우리에게는 트리와 리좀 대신 스몰 월드와 무척도라는 새로운 개념이 주어졌다. 트리와 리좀은 상이한 네트워크의 상이한 형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래서 포갤 수 없었다. 스몰 월드와 무척도는 같은 네트워크 속 상이한 수준의 특징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포갤 수 있다.

(...)

인간 사회에는 스몰 월드성과 무척도성이 있다. 한쪽에는 여러 클러스터가 만드는 좁은 세계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차수의 멱승 분포가 만드는 불평등한 세계가 있다. 여기까지는 수학적 진리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같은 사회를 살면서 때로는 스몰 월드성을 느끼고 또 때로는 무척도성을 느낀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수학적으로 보면 우리 한 명 한 명이 네트워크의 꼭짓점이다. 그리고 스몰 월드=무척도 네트워크에서 꼭짓점과 꼭짓점의 관계는 가지 하나로 연결된 두 꼭짓점이라는 대등한 관계로도, 연결된 가지 수에 큰 차이가 있는 불평등한 관계로도 해석할 수 있다. 전자는 네트워크의 형태에 주목한 해석이고, 후자는 차수 분포에 주목한 해석이다. 실제로 이에 대응하듯 우리 인간은 다른 한 인간(타자)과 마주했을 때 상대를 대등한 인간으로 느낄 때도 있지만 부와 권력의 격차 앞에 압도당할 뿐일 때도 있다. 아렌트는, 아니 그뿐 아니라 많은 20세기 인문학 사상가가 전자와 같은 관계가 인간 본연의 모습이고 후자는 '인간의 조건'이 박탈된 상태라고 여겼다. 그러나 사실 양자는 하나의 관계에 대한 두가지 표현으로, 우리는 항상 둘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고 봐야 한다. 오늘날의 SNS를 예로 들면 이 동시성 또는 양면성은 팔로워가 100명 정도 되는 무명 트위터 사용자가 팔로워 100만 명인 유명인에게 멘션을 보냈다가 답멘션을 받은 상황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멘션은 일대일 의사소통이지만 동시에 수많은 멘션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두 해석은 모두 옳다. 이 모순은 복잡계 네트워크 구조에서 수학적으로 도출된다.

우리는 항상 같은 사회=네트워크에서 스몰 월드적 형태와 무척도적 차수 분포를 동시에 경험한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 이 두 가지 경험에서 두 개의 질서, 두 개의 권력 체제가 생성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조건'과 그 외부, 정치와 그 외부, 국민 국가와 제국, 규율 훈련과 생명 권력, 정규 분포와 멱승 분포, 한 명 한 명이 인간으로 대우 받는 공동체주의적 소통 영역과 인간을 동물의 집합으로만 셈하는 자유지상주의적 통계 처리 영역이 하나의 사회적 실체에 대한 두 가지 권력론적 해석으로 동시에 생성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

만약 그렇다면 국민 국가와 제국의 2층화는 수학적 필연에 의거한 구조라는 말이 된다. 인류 사회가 하나의 네트워크인 한, 스몰 월드의 질서를 기초로 한 체제와 무척도의 질서를 기초로 한 체제가 병존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더 이상 내셔널리즘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지만, 그렇다고 글로벌리즘의 시대로 완전히 이행할 수도 없다. 스몰 월드의 질서를 대변하는 것이 지금과 같은 국민 국가가 아닐 가능성은 있어도 인간이 인간인 한, 세계가 무척도의 질서로 뒤덮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212-214p)

 

 

이러한 유연성은 가족이 5장 마지막 부분에서 논한 루소 또는 로티의 '연민'과 연결될 수 있음을 뜻한다. 가족이란 원래 우연한 존재다. 그래서 우연을 통해 확장될 수 있다. 가족의 윤곽은 성과 생식, 공동 거주와 재산 외에 사적인 애정을 통해서도 정해진다. 이 특성이 가족의 확장성을 낳는데, 이는 동시에 가족의 경계를 매우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전통적인 가족 형태가 열세에 처한 지금의 일본에서는 특히 그렇다. 혈연은 확장되고 있으며 금전 관계도 이에 준해 확장되고 있다. 하지만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가족이라고 불러야 할지 현대에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만약 내가 작은아버지를 가족으로 여기고, 작은아버지가 그의 작은아버지(작은할아버지)를 가족으로 여긴다 해도 그것이 반드시 내가 작은할아버지를 가족으로 여긴다는 뜻은 아니다. 사적인 애정은 이처럼 직선적으로 확장되지 않는다. 현대인은 만난 적 없는 작은할아버지보다 키우고 있는 개를 더 가족처럼 여길지도 모른다. 가족의 경계 확정이 어렵다는 것은 달리 말해 가족의 공통성을 추출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나와 작은아버지가 닮았고 작은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도 닮았다고 하자. 그렇다고 내가 꼭 작은할아버지를 닮는 것은 아니다.(250-251p)

 

 

이들에 따르면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기술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는 기술적 낙관주의, 창업가의 경쟁을 전면적으로 긍정하는 신자유주의, 히피 문화의 영향을 받은 반체제 지향, 마지막으로 앞서 말한 애국주의가 섞여 탄생한 매우 기이한 이데올로기다. 보수 지향과 진보 지향이 비판 없이 뒤섞여 있기에 해커들은 자본주의의 본질은 부정하지 않은 채로 반자본주의적인 이상을 나이브하게 논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해 탐욕스러울 정도의 부를 향한 욕망을 가진 채로 욕심 없는 공산주의자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오픈, 셰어, 프리 등 반자본주의적인 유행어를 만들어 낸 미국인 상당수가 억만장자인데 그들은 이런 모순에 괴로워하지 않는다.(268-269p)

 

 

세계를 만들어 내는 근원을 라캉 이론에서는 '대타자'라고 부르는데 이 대타자가 큰 삼각형의 정점에 자리한다.

<그림 12>에는 주체에서 출발하는 화살표가 두 개 그려져 있다. 하나는 <그림 11>과 같은 상상적 동일화의 화살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또 하나의 화살표가 세계=스크린을 뛰어넘어, 대타자에서 출발해 세계=스크린을 통과한 다음 오른쪽에 있는 주체를 향해 곧장 나아가는 '시선'을 향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징적 동일화 작용을 표현한다. 세계=스크린을 성립시키는 매커니즘 자체와 동일화하는 것이다.

세계를 성립시키는 메커니즘 자체와의 동일화라는 말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또한 영화에 비추어 생각하면 알기 쉽다. 나는 앞서 상상적 동일화는 스크린에 비친 배우(이미지)에 대한 동일화라고 말했다. 그런데 애초에 배우는 왜 스크린에 비치는가? 물론 누군가가 그들을 캐스팅하고 촬영했기 때문이다. 상징적 동일화는 이러한 스크린 뒤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동일화다. 즉 영화라면 카메라에 대한 동일화가 된다. '대타자'에서 주체를 향해 뻗은 '시선'은 영화 감독이 배우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상징적 동일화는 상상적 동일화보다 '고급'이다. 이 또한 영화에 비추어 생각하면 알기 쉽다. 영화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가진 친구가 있다면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나는 있다). "배우나 스토리 같은 영화의 내용을 보고 있는 동안은 아마추어다. 시네필(영화광)이라면 스크린에 보이는 부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 즉 카메라 프레임이나 감독의 시선을 좇는다." 바로 이것이 상상적 동일화와 상징적 동일화의 차이다. 아마추어는 이미지를 본다. 시네필은 카메라에 동일화한다. 그리고 영화 감상자는 이 동일화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성숙해진다.

라캉 이론은 이와 동일한 논리로 주체화 과정을 설명한다. 인간은 부모나 교사 등을 모방하는 것만으로는(상상적 동일화만으로는) 어른이 되지 못한다.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그 메커니즘을 이해할 때(상징적 동일화를 했을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 이 이중화가 라캉파 정신분석 주체 이론의 핵심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보이는 것(이미지)에 동일ㅇ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상징 혹은 언어)에 동일화할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주체가 된다). 라캉은 보이는 것의 세계를 '상상계', 보이지 않는 것의 세계를 '상징계'라 지칭했다. '대타자'와 '상징계'는 거의 비슷한 뜻을 갖는다.(282-283p)

 

 

지하 생활자는 체르니솁스키 주장의 내용이나 실현 가능성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유토피아를 실현하고 싶으면 실현하면 되고,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으면 행복해지면 된다고 쓰고 있다. 이를 전제로 나는 그런 것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고 호소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는 똑똑해지지 않을 권리, 행복해지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지하 생활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은 계몽되어 교양을 가진 인간, 한마디로 미래의 인간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욕망할 리가 없다, 이건 수학이다, 하고 내게 반복한다. ···하지만 일 백 번 되풀이하건대, 인간이 의도적으로 해롭고 어리석을뿐더러 바보 같은 것을 원하는 경우가 딱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을 바랄 수 있고, 오직 지혜로운 것만을 바랄 의무에 얽매이지 않을 권리를 확보하기 위함이다.(304p)

 

 

일류샤는 원래 들개 한 마리에게 쥬치카라는 이름을 붙이고 예뻐했다. 하지만 어느 날 스메르쟈코프 때문에 핀이 들어간 빵을 쥬치카에게 먹이고 만다. 쥬치카는 고통스러워하며 멀리 달려가 그대로 사라진다. 앓아누운 일류샤는 이 일을 항상 마음에 걸려 한다. 그래서 콜랴는 쥬치카와 똑같이 생긴 개를 찾아와 일류샤에게 선물한다. 페레즈본이라고 이름 지어진 새 개는 쥬치카가 아닌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류샤는 페레즈본을 보고 한눈에 이 개가 쥬치카라고 확신하며 매우 기뻐한다. 그 개가 정말 쥬치카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

쥬치카와 페레즈본의 우화는 바로 그 '이것임'자체가 해체되고 해소되는 순간을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류샤는 쥬치카를 사랑했다. 그 쥬치카는 저 쥬치카뿐이다. 그렇기에 쥬치카를 잃은 상처느 결코 아물지 않는다. 실제로 일류샤도 처음에는 다른 개를 키우자는 제안을 거부했다.

그런데 도스토옙스키느느 이 상처가 아무는 기적의 순간을 묘사한다. 야마시로와 반바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일류샤가 페레즈본이 쥬치카라고 믿었는지 또 실제로 페레즈본이 쥬치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페레즈본이 페레즈본인 동시에 쥬치카일 수도 있다는 것, 일류샤가 그런 사유의 가능성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쥬치카가 쥬치카였던 것은 생각해 보면 그 자체가 우연이다. 애초부터 쥬치카는 한 마리 들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쥬치카가 죽은 후에도 다시 쥬치카적 존재를 찾아 새로운 관계를 모색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것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

나는 이 나일 수밖에 없고 쥬치카는 저 쥬치카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 상처는 결코 미래의 나와 다른 개의 구원을 통해 아물지 않는다. 지하 생활자는 이를 이유 삼아 유토피아를 부정했고 이반=스타브로긴은 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알료샤는 이를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이 좁은 길을 통과할 수 있는 다른 사유의 가능성을 이야기의 형태로 제시했다는 것이 야마시로와 반바의 생각이다.

(...)

"일류샤가 일류샤였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순전히 우연이다. 새로운 '착한 아이'가 등장해 아버지와 함께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부활한 쥬치카가 새롭게 페레즈본으로 등장했던 것처럼, 새로운 일류샤도 교환 가능한 우연한 존재로 등장해 아버지와 함께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어 가는 새로운 운동을 시작할 것이다." 한 아이가 우연히 태어나서 우연히 죽는다. 그리고 또 새 아이가 우연히 태어나 어느새 필연의 존재로 바뀌어 간다. 일류샤의 죽음은 그런 운동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운동을 보통 가족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불능적 주체는 불능이긴 하지만 결코 무력하지 않다. 세상은 아이들이 바꾼다. 인간은 인간을 고독 속에 가두는 '이것임'의 중력에서 벗어나 운명을 아이들에게 맡길 때 비로소 이반=스타브로긴의 허무주의를 탈피할 수 있다.

(...)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요약하겠다. 이 장에서 전하려 한 메시지 하나는 '우리는 지하 생활자나 스타브로긴처럼이 아니라, 부모가 아이를 접하듯이 세계를 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공동체주의자나 자유지상주의자처럼이 아니라, 가족 유사성에 근거해 신생아를 접할 때처럼 타자와 접해야 한다.

(...)

과거에 자유주의는 타자 원리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힘을 잃었다. 한편 지금 우위를 점하고 있는 공동체주의(내셔널리즘)와 자유지상주의(글로벌리즘)에는 아예 타자 원리가 없다. 2017년 현재 타자에 대한 관용을 지탱할 철학 원리는 이제 가족 유사성밖에, 또는 '오배'밖에 없다. 이것이 내 인식이다. 따라서 나는 가족의 이념과 그 가능성을 철학이 더 진지하게 그리고 포괄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어느 시대에나 철학자는 아이를 싫어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예전에는 아이였다. 우리 모두 섬뜩한 존재였다. 우연의 아이였다. 우리는 분명 실존적으로 죽는다. 죽음은 필연이다. 하지만 탄생은 필연이 아니며 우리 중 누구도 태어났을 때는 실존이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는 필연에 도달하는 실존이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연에 노출되어 다음 세대를 만드는 부모가 되어야 삶을 완수할 수 있다.

(...)

아이로 죽는 데 그치지 말고 부모로서도 살아가라. 2부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한마디로 이것이다. 물론 여기서 부모는 생물학적 부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상징적 또는 문화적 부모도 존재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런 부모가 내가 말하는 부모 개념에 가깝다. 왜냐하면 부모가 된다는 것은 오배를 일으킨다는 것이고 우연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도 가능한 한 많은 우연의 아이를 만들어 미래의 철학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334-338p)

 

 

그는 컴퓨터의 움직임 전체를 가시화하려 한 것이 아니다. 프로그램이나 계산은 어차피 가시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스크린에는 '가짜'만 비출 수 있을 뿐이다. 다만 그는 이 '가짜'와 '진짜'의 관계를 바꾸었다. CLI 시대의 전문가는 '진짜'를 조작하기 위해 '가짜'와는 거리를 두고 머릿속의 보이지 않는 스토리에 기대야 했다. GUI는 이 스토리를 보이는 것으로 바꾼다.

하지만 이는 '진짜'를 비추게 되었음을 뜻하지 않는다. 창이나 아이콘은 어디까지나 '가짜'에 불과하다. 케이는 이를 모두 이해한 상태에서 그 '가짜'를 '가짜'인 채로 만지고 조작함으로써 '진짜'를 변화시키는 세계 감각을 구축하려고 했던 것이다.(357-358p)

 

 

구체적으로는 방금 논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립에 기초를 둔 행동 원리, 즉 사람은 보이는 것에 쉽사리 속으니 보이지 않는 것을 논하자는 지침 자체가 실효성을 잃어 가지 않을까?

실제로 이런 현상이 지금 여러 곳에서 관찰된다.

(...)

전문가들에게도 2016년 트럼프 선풍은 예상 밖의 현상이었다. 진보적 성향의 인물들은 당초에 트럼프 지지자들이 유명하고 부자라는 화려한 이미지(보이는 것)에 속고 있을 뿐이며 지리멸렬한 실체(보이지 않는 것)가 알려지면 영향력도 약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많은 지지자가 아무리 진실이 알려져도 거짓을 계속 믿었고(페이크 뉴스), 진보파의 집요한 비판은 오히려 지지자들 내부에 악질적인 음모론의 유행을 가져왔다. 트럼프는 '가짜'에 불과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 '진짜'가 있다는 지식인의 호소는 한편으로는 '가짜'면 어떠냐는 반발을 불렀고, 다른 한편 우리에게는 우리 나름의 '진짜'가 있다는 독자적인 세계관을 낳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촉시적 평면의 시대에 사람은 '가짜'너머에 '진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은 '가짜'를 '가짜'인 채로 만지고 조작하고 가공하며 많은 사람이 그 조작 자체에 쾌락을 느끼는 시대고, '가짜'를 계속 만지다 보면 언젠가 '진짜'에 도달한다고 믿는 시대다. 모든 것을 보고 만질 수 있다고 믿는 시대에 보이지 않는 것을 논하는 사람은 신뢰를 잃는다. 그런 시대에 지식은 무엇을 행동 원리로 삼아야 할까? 상당히 어려운 문제다.

(...)

달리 말하면 촉시적 평면의 시대에 '리터러시'란 무엇인지 묻는 문제이기도 하다. 스크린 시대에는 보이는 것을 의심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사유하는 것이 리터러시였다. 촉시적 평면의 시대에 그런 의심의 정신은 어디로 가게 될까?

(...)

촉시적 평면에서는 모든 것이 보인다. 그리고 만질 수 있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리 생각한다. 케이가 말하는 일루전이다. 그래서 '가짜'너머에 '진짜'가 있다고 주장하며 후자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담론을 신뢰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루뭉술하게 평면적으로 펼쳐진 '가짜'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어서 각기 다른 논리로 구성된 여러 하위 세계를 발견해 이들 간의 모순을 찾아내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앞으로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행동 원리를 사유하는 데 참고가 될지도 모르겠다.(360-363p)

 

 

ㅡ 아즈마 히로키, <관광객의 철학> 中, 리시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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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5/28

 

 

그러나 테크 기업들은 AI의 가능성과 편의성을 강조하는 서사에 집중한다. 정작 AI가 작동하는데 필요한 물리적 기반과 인간 노동의 현실을 모호하게 감추면서 말이다. 대중의 상상 속에서 AI는 빛나는 뇌, 복잡한 신경망, 공중에 떠 있는 가벼운 구름 등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마치 AI가 물리적인 실체 없이 공기 중을 부유하는 순수한 정보의 집합체인 것처럼.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거대한 데이터 센터에서 육중한 선반마다 장착된 수많은 서버가 일정한 열기와 백색 소음을 내뿜는 모습과 데이터를 전 세계에 실어 나르는 촉수 같은 해저 케이블을 떠올려보라. AI는 물질적 실체를 갖고 있다. 반도체 칩, 서버, 케이블 등이 지속적으로 추가되고 유지, 보수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의 신체가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하고, 서버를 식히기 위해 엄청난 양의 물을 소비해야 한다. 우리가 챗GPT에 질문을 던지거나 인터넷 검색을 수행할 때마다, 이 거대한 기계는 그 물리적 인프라를 통해 '숨을 쉰다'.

기계는 전력과 물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AI의 이면에서, 기술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분투하는 인간 노동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AI는 광범위한 인간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 데이터 주석작업, 결과 검증, 알고리즘 조정 등 다양한 업무에 노동자들의 손길이 필요하다. AI가 오작동하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마다 인간이 개입하여 알고리즘을 보완해야 한다.

(...)

오늘날의 AI가 완전히 자율적으로 작동한다는 개념도 이와 유사한 거짓에 기반한다. 정교한 AI 소프트웨어도 수천 시간의 저임금 노동이 투입된 결과물이다.

추출 기계는 물리적 자원과 노동뿐만 아니라 훈련 데이터세트에 녹아 있는 인간 지능을 먹고 자란다. AI는 인간의 지식을 포착하여 이를 머신러닝을 통해 학습한다. 기본적으로 AI는 훈련 데이터에 의존하는 파생적 존재이며, 그 데이터를 통해서 자동차 운전, 사물 인식, 자연어 생성과 같은 다양한 활동을 출력한다. 이 모든 과정은 수십억 개의 데이터 포인트로 이루어진 방대한 데이터세트를 통해 인류의 지식과 경험을 수집하는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22-24p)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데이터 주석 작업자로 일하면서,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정제된 학습 데이터세트로 바꾸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을 하고 있다. 왜 이런 방식의 노동이 필요할까? AI 모델을 훈련하려면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필요한데, 이 데이터를 AI 시스템에 곧바로 입력할 방법은 없다. 애니타 같은 노동자들이 데이터를 정리하고 꼬리표를 붙여야만 AI가 이를 이해할 수 있다.

(...)

흔히 우리는 AI 개발이라고 하면, 팔로알토나 멘로 파크에 위치한 에어컨 잘 나오고 번지르르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AI 훈련에 필요한 약 80퍼센트의 시간이 데이터세트 주석 작업에 쓰이고 있다.

(...)

기술 평론가인 필 존스의 말처럼 "실제로 머신러닝의 마술은 고된 데이터 분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격무는 보통 제3의 공급자에게 외주로 맡겨진다.(53-55p)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프라의 발전이 곧바로 공정한 경쟁 조건이나 지역적 불평등 해소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전 세계 인터넷 보급률이 늘었다고 해서 노동 조건의 불평등과 착취 관행이 저절로 해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업들은 최저 비용과 최대 생산성을 추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연결성은 값싼 노동력을 더욱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쪽으로 진화했다. 데이터 작업자들에게 '평평한 세계'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라, 세계적 경쟁 속에서 더욱 열악한 조건으로 내몰리는 계기가 됐다.

프리드먼의 주장처럼 세상이 평평해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프리드먼은 '네트워크에 연결되는 것'과 '협상력의 평등'을 동일하게 보았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데이터 주석 작업은 글로벌 노동 시장에서 거래되지만, 이 시장에서 활동하는 주체들이 가진 권력은 매우 불평등하게 분포되어 있다.(65p)

 

 

AI는 인간 판단의 한계와 편견을 뛰어넘는 초인적인 지능처럼 소개된다. 일관성 없고 변덕스러운 인간이 내리는 결정을 일관되고 공정한 머신러닝 알고리즘이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AI는 마법처럼 보이기도 한다. 언제나 정답을 제공하고, 인간보다 더 많은 데이터를 높은 정확도로 분석할 수 있으며, 무의식적인 편향조차 없다는 믿음이 퍼져 있다. 게임에서 치트 코드를 입력하는 것처럼, AI를 활용하면 항상 승리할 수 있다는 식이다.

그러나 AI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이러한 이상적인 그림과는 거리가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상상했던 것처럼, 기술이 신이 내린 선물일 리 없다. 기술은 인간이 설계하고 개발하는 것이며, 그것을 만든 인간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고스란히 반영된다.

(...)

가장 기본적인 단계에서부터, LLM은 학습 데이터에 영향을 받는다. 많은 AI 모델들은 인터넷에서 무작위로 수집한 비정형 데이터를 기반으로 학습하는데, 이 데이터에는 이미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스며들어 있다. 따라서 생성형 AI가 이러한 데이터를 학습하면, 기존의 편향을 디지털 형태로 재생산할 가능성이 크다.

(...)

AI 연구소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인구통계학 자료는 없지만, 인공지능 분야를 떠받치고 있는 고등교육 통계를 보면 AI 업계는 압도적으로 '백인'과 '남성'이 주도하는 분야다.

(...)

이처럼 LLM이 특정 인구집단을 배제한 채 개발된다면, 기존의 사회적 위계를 더욱 강화하고, 현재의 불평등한 구조를 유지하는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

머신러닝 엔지니어들과 AI 정책 연구자들의 지리적 위치와 이념적 배경 역시 AI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AI 연구소 대부분은 실리콘밸리에 있다. 이곳은 신자유주의 경제학, 자유지상주의, 극단적 개인주의, 반노동조합 문화가 지배하는 곳이다.

(...)

이처럼 AI는 온라인 플랫폼의 사용자 구성, 데이터세트의 생성과 선별, 모델 훈련 방식, AI 정책 등 전 과정에서 특정한 헤게모니의 영향을 받고 있다. 특히 백인, 남성, 미국 중심의 글로벌 기술 엘리트들이 AI의 설계와 활용 방식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 결과 AI는 이들의 관점을 반영하고, 그들의 관심사에 맞춰 개발되고 있다.(97-101p)

 

 

"운송망과 통신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겹쳐지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이는 땅 위에서도 마찬가지다. 광섬유 케이블은 종종 기존 철도 노선을 따라 설치됐고, 철도 회사들은 기존 선로 옆에 케이블 네트워크를 구축할 권리를 판매해 추가 수익을 창출하기도 했다.

19세기 해저 케이블 확산의 역사는 대영제국의 식민지 지배 전략과 밀접히 연결돼 있다. 당시 영국은 전 세계에 흩어진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빠르고 효율적인 통신 시스템을 필요로 했다. 이에 적합한 기술이 바로 전신이었고, 영국은 전 세계 식민지를 연결하는 '올-레드 라인'이라 불리는 전산망을 구축했다.

(...)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케이블의 주재료는 구리였다. 그러나 1950년대 들어 동축 케이블이 등장하면서 신호 품질과 대역폭이 크게 향상되었다. 덕분에 전신을 넘어 전화통화까지 가능해졌으며, 데이터 전송 속도도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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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막대한 인터넷 트래픽과 AI 연산량을 처리할 수 있게 해준 결정적인 기술 혁신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에 이루어진 광섬유 케이블의 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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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설치된 대부분의 해저 케이블은 주로 대서양을 가로질러 미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데 집중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아시아 시장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태평양 연안 국가들도 점차 더 많은 연결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2000년대에는 아프리카 지역의 인터넷 인프라 개선을 위한 씨컴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는데, 이 프로젝트를 통해 해저 케이블이 동부와 남부 아프리카까지 확장될 수 있었다.(121-124p)

 

 

그러나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창작 산업은 다양한 계층의 일자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상당수는 비용 때문에 AI로 대체될 수 있다. 이런 일자리들은 겉보기에는 화려하지 않지만, 많은 예술가들에게 생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유명한 예술가조차도 소규모 작업을 통해 수입을 보충해야 창작 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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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전, 영어 학습 자료, 설명 영상, 기업 홍보 영상 같은 걸 녹음해요. 이 일이 없어진다면, 다른 창작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울 겁니다." 이러한 일자리의 소멸은 전업 예술가의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금도 많은 창작자들이 낮은 보수를 받고 일한다. 그런데 비교적 안정적인 수입을 제공하는 다양한 창작 일자리가 사라진다면, 결국 부유한 가정 출신의 사람들만이 예술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될 가능성이 크다.(151p)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이후, IDF는 민간인 피해를 감수하는 기준을 더욱 완화했다. IDF는 공격 시 예상되는 민간인 사망자 수를 미리 산출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당화 가능한 수준'의 피해라고 판단되면 공격을 감행한다. 이제 AI는 전쟁을 '정밀하게 만든다'는 수사를 뒤집고, 오히려 대규모 민간 피해를 '계산 가능한 비용'으로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

AI 시스템 도입 이후, 이전까지는 폭격 대상이 아니었던 하마스 하급 조직원의 주택까지 표적으로 지정되기 시작했다. 한 이스라엘 관계자는 "표적의 대부분이 집이었다"며, "하마스 요원들이 사는 집이 가자지구 전역에 퍼져 있으므로, AI가 그 집들을 자동으로 표적으로 지정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죽인다"고 말했다. 이는 AI 기반 전쟁 기술이 오히려 무차별적인 폭격을 확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민간인 피해를 줄인다는 '기술적 정밀성'의 수사는 실상 전략적 공포 조성과 대량 살상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변질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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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스라엘은 '아빠는 어디에?'라는 시스템을 통해, 표적으로 지정된 인물이 집에 돌아왔는지를 실시간으로 확인한 뒤 야간에 해당 주택을 폭격했다. 이때 사용된 무기는 정밀 유도 폭탄이 아닌 '멍청한 폭탄dumb bombs'으로 분류되는 재래식 포탄이었다. 이는 민간 피해가 발생할 것이 예상된 공격이다. IDF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이러한 AI 시스템의 결정으로 인해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여성과 아이들이 사망했다. 이는 AI 기술이 단지 정보를 정밀하게 처리하는 도구가 아니라, 국가의 전쟁 수행 능력을 폭발적으로 확장하는 수단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328-330p)

 

 

이 책은 AI 생산 네트워크가 본질적으로 식민주의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실제로 이 네트워크는 과거 식민 제국의 항로와 전신 케이블이 지나던 경로와 부분적으로 겹친다. 무엇보다, 가치와 자원이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흐르도록 설계되어 있다. 세게 자본주의 체제의 중심에 있는 첨단 하이테크 국가들은 주변부 국가들로부터 노동력, 핵심 광물, 데이터를 수탈하며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AI 생산의 글로벌 분업 체계에서도 이러한 불균형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고도로 훈련된 엔지니어들은 높은 임금과 안전한 환경에서 일하는 반면, 단순하고 저임금의 업무는 노동 규제가 느슨한 저개발국가로 아웃소이된다. 이 구조는 결국, 과거 식민주의가 만들어놓은 불평등한 발전 모델이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AI 네트워크는 고정된 구조가 아니며, 변화의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AI를 생산하는 방식은 피할 수 없는 운명도 아니고, 누군가의 악의적인 통제 아래 놓인 절대적 질서도 아니다.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은 사람이다. 물론 이들은 시장의 구조적 압력과 네트워크 내 경쟁 구도 속에서 움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AI 네트워크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공급망의 특정 지점에서 발생한 압력이나 행동에 따라 전체 시스템이 반응할 수 있다. 어느 한 지점에서 노동자들이 행동에 나선다면, 그 영향이 네트워크 전반에 파급될 수 있다. 변화를 위한 첫걸음은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다.(331-332p)

 

 

 

ㅡ 마크 그레이엄 등, <AI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 中, 흐름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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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5/21

 

 

 

걱정은 흔들의자와 같아서 계속 움직이지만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27p)

 

 

이런 생각을 해본다. 걱정은 보험과 같은 것이라고. 보험은 미래에 일어날지 모를 위험에 대비하는 것이 목적이다. 만일 한 달에 2백만 원 정도 버는 사람이 150만 원을 다달이 저축성도 아닌 비보장성 보험에 납입하고 있다면, 그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걱정이 많다는 건 그런 모양새다. 보험료는 생활이 가능한 선 안에서 합리적으로 내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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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서 이미 실행을 하고 난 뒤라 더 할 것이 없는 상황일 때에는 그 일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을 하기보다 낙관적인 기대를 하는 게 이득이다. 시험을 보기 전에는 비관적인 걱정을 해도 그 덕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열심히 준비할 수 있으니 좋다. 그렇지만 시험이 끝나고 난 다음 성적이 나올 때까지의 기간 동안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이미 화살은 활을 떠났다.(30-32p)

 

 

오랜 기간 진행되는 정신분석적 치료의 목적은 그동안 그 사람을 설명해오던 서사에 의문을 갖고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그 축을 변화시켜보는 것이다. 이미 자신을 설명하게 구축된 서사를 바꾸기란 어려운 일이고, 그렇기에 강한 저항을 만나게 된다. 게다가 치료의 결과로 영웅이 되거나 어떤 괴로움도 없기를 기대한다면 그 변화는 더욱 힘들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연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신분석의 목표는 신경증적 비극을 평범한 보통의 불행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83p)

 

 

신경증은 모호함을 참고 견디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확실하고 분명한 원인을 찾지만 인생은 불확실하고 모호한 것 투성이고, 끝까지 이유나 원인은 모른 채로 종결되는 일이 더 많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주변의 중요한 사람들도 그저 군중의 일부이며 거대한 삶의 흐름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했던 것이지,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때가 더 많다. 하지만 신경증적 상황일 땐 그걸 인정하지 못해서 사는 게 고통스럽고 힘들다.(85p)

 

 

그러니 뭔가 결심할 때 이 관계가 영원하기를 바라지는 말자.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그동안은 함께 가는 동반자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의지하면서 지내겠지만, 또 바라보는 곳이 달라지게 된다면, 가고자 하는 방향이 각자 다를 수밖에 없는 시점이 온다면, 그때는 놓아주고 각자의 길을 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해보자. 그게 인생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함께 해올 만큼 해왔다면 인생의 다음 단계에는 또 다른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129p)

 

 

ㅡ 하지현, <아무튼, 명언> 中,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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