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7

 

짧지만 힘 있는 작품이었다. 카뮈,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가 섞인 느낌. 문체는 전반적으로 건조한 편인데 신기하게도 묘사들이 생생해서 그림이 잘 그려짐. 은근히 시적인 것 같기도 하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은데 번역된 게 이것 말고는 없네.

 

 

 

여자 아나운서는 남색 상의에 살짝 파마를 한 단정한 이미지였는데 말은 속사포였다. 총알 한 상자를 쟁여두고 사방으로 쏘아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틀린 발음 하나 없었다. 분명 오랜 훈련을 받았을 터였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녀가 어떤 뉴스를 전하더라도 머리를 거치지 않은 채 입만 움직이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것이 기쁜 소식이든 슬픈 소식이든, 분통 터지든 무덤덤하든 상관없이 그녀는 모든 사건에 대해 엄숙한 태도를 유지했다.(99p)

 

 

여행, 노동, 전쟁, 섹스 등 인간 세상의 모든 일에 육신과 시간의 직접적인 접촉을 가로막는 장벽이 있다. 그러나 여기, 아무 할 일 없고 무슨 일이 있어도 금방 끝내버릴 이 좁은 감옥에서, 나는 항상 시간이 팔을 활짝 벌린 채 다가오는 것을 똑똑히 바라봤다. 시간은 엄청난 위력을 가졌으며 빈틈이 없고 모든 곳에 존재한다. 육신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있을 감정이 없다. 너의 참회를 듣지도 않고 너의 슬픔을 봐주지도 않는다. 그저 산사태나 만조의 파도처럼 온 방 안을 가득 메우며 너를 파묻고 능지처참시킨다. 그것이 너를 파묻어 온몸이 그 무게에 짓눌릴 떄 그것은 한 덩어리였고, 그것이 너를 능지처참하여 피부 곳곳을 칼로 도려낼 때 그것은 예리했다. 그것은 저항할 수가 없으며, 당신을 지극히 천천히 죽음으로 몰아 넣는다.

(...)

죽음은 번개나 감탄사가 아냐. 순식간에 다가와 사납게 찌르는 검 같은 게 결코 아니란 말이다. 그건 하나의 과정이야. 모든 기관이 차례로 고장이 나고, 온수팩이 얼음이 되어가는 과정 말이다. 그것이 천천히 다가오는 걸 감내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은 없구나. 얘야, 지금 내가 가장 바라는 건 누군가 맞은편에 누워 나랑 같이 죽는 거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그런 일이 벌어진 경우는 거의 드물지. 내가 보고 있는 건 건강하고 성장하는 너희들이다. 너희는 억지로 눈썹을 찌푸리고 눈물을 흘리지만, 사실 너희는 뼛속까지 경쾌하고 활발한 기운을 내뿜고 있지. 너희 몸 어디 하나 비 온 뒤 새싹처럼 생기발랄하지 않은 곳이 없어. 나는 이미 쇠약해졌다. 너희가 오면 이 사실을 가중시킬 뿐이야. 너희는 나를 감방에 가두고, 자신은 바깥에서 유치원 꼬마들처럼 둘러앉아 노닥거리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 노니는 웃음소리가 거대한 쇠절구로 변하여 하늘에서 조금씩 내리누른 결과 나는 바닥에서 꼼짝도 못하게 되었다. 너희는 나에게 수치를 안겨줬어. 우리 사이의 거리는 멀고도 멀다. 다들 꺼져. 아니면 총으로 나를 죽여버려라.(137-139p)

 

 

가면서 뒤돌아보니, 콩제의 모친은 응석받이 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었다. "딸아, 내 딸아." 주위 사람들이 부축해 일으켰지만 그녀는 울고불고 난리를 멈추지 않았다. 이 모든 게 일종의 의식처럼 진행되었다. 그녀는 이 정도 소란도 피우지 않으면 엄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건 순수한 고통이 아니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순수한 고통은 딸의 초상만 남겨진 텅 빈 공간에 홀로 있을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지 않고, 오장육부가 모두 사라진 것 같은 공허만 마주하게 된다.(156-157p)

 

 

"그렇다면 자신을 충만하게 할 다른 의미 있는 일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 보는 건 어땠을까요." 재판장이 말했다.

"시도는 해봤죠. 저는 초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사막에 물방울을 던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증발되어버리잖아요. 저는 항상 일이 시작될 때 그것의 피할 수 없는 결말을 봐버립니다. 예를 들어 사과를 먹으면 결국 쓰레기통에서 나뒹굴 씨가 떠오르고요, 축배를 드는 장면에서는 가득 쌓인 설거지거리와 텅 빈 식당을 고독히 오가는 고양이가 눈에 그려집니다. 사랑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공중으로 쏘아올린 불꽃 같은 거죠. 발기부전 상태로 섹스를 염원하며 하늘 저편에 아직 빛이 있다고 자신을 속여보지만, 불꽃이 스러진 자리엔 사실 암흑뿐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육신은 결국엔 삭고 쇠약해져, 자기 똥오줌도 못 가릴 정도로 존엄이 사라집니다. 그러다 결국 죽게 되겠죠. 우리가 죽은 미래의 어느 날,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가 땅에서 썩은 뼛조각을 파내어 입에 물고 뛰어 다니겠죠. 바로 우리의 뼛조각을요."

(...)

전 그저, 몸은 젊은데 노쇠한 영혼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마주하게 되는 현실을 말하려는 겁니다. 이미 저는 그 무엇도 믿지 않습니다. 예전부터 기러기가 시적 감성과 아무 상관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기러기가 왜 그렇게 납니까? 돼지랑 다를 것도 없죠. 그냥 추위를 피해서 먹이를 찾아 날아다니는 거잖아요.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동물보다 고차원적인 이유는 동물들처럼 혐오스러운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들과 똑같이 혐오스러운 일을 한다는 걸 인간은 의식합니다. 우리는 음식을 탐하고 땅을 빼앗고 자원을 파헤치고 원시적인 성욕에 좌지우지됩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다 하면서, 그저 수치를 위해 의미를 발명했습니다. 속옷을 발명하는 과정이나 다를 게 없죠. 그런데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의미라는 단어 자체도 무의미해지죠.“

"어쩌면 잘못되었을지도 모를 이 깨달음 때문에 저는 냉담하고 무기력해져 어떤 일을 해도 시들해지기만 하더군요. 저의 생명은 이 때문에 흐물흐물 풀어져 중풍 환자처럼 멍하니 누워 있기만 했습니다. 날이 바뀌어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어제와 똑같은 변함없는 하루였습니다. 시간은 응고되어 천천히 흐르다 못해 거대한 시멘트를 뒤집어쓴 꼴이었습니다. 매일 그 속에 잠겨 숨을 쉴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왠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그저 울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졌을 때 결심했죠. 나 스스로 처리할 수 없다면 당신들이 처리하도록 넘기자. 내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면 당신들이 선택하도록 모두 넘기자. 당신들은 쫓고, 나는 도망치고, 이 얼마나 간단합니까. 저는 원시 사회에서 먹이사슬의 말단에 위치한 동물처럼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미친 듯 날뛰며 무의식의 충만감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생명이란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돌아갈 것, 뭘 하든 안 하든 마찬가지로 소멸할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최소한 저는 그걸 통해서 시간과의 독대를 회피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나 자신과 시간 사이에 어떤 장막을 세우고 싶었습니다.(186-189p)

 

 

그들 또한 결국 자신들의 방식으로 이 살인 사건을 해석하고들 있겠지. 이를테면,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서, 도둑질하려다가, 대입 스트레스 때문에, 사회적 차별이 원인이 되었다는 등등의 사회에 공표할 만한 적당한 해석을 하나 찾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알게 되는 걸 원치 않는 것이다. 너무나 무료한 한 사람이 고작 쥐와 고양이 게임을 하고 싶어서 다른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이 사건을 기획하면서 만든 최초의 계획은 고작 네 문장이었다.

 

목적: 충만감

방식: 도망

수단: 살인

자금: 일만 위안

 

이것이 내 유서의 전부다. 당신들 역사에 이러한 한 사람이 존재했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안녕.(191-192p)

 

 

 

ㅡ 아이, <도망자> 中,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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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7

 

 

너무나도 예리하고 신랄하게 k-창작계의 현실을 짚는 소설. 거의 대부분의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며 봤다. 2024년 한국 창작의 현실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영미권을 포함한 유럽의 창작 현실을 알고 싶다면 '옐로페이스'를 권한다.

 

 

 

“좋아, 좋아. 요즘 딱 해야 할 얘기야. 페미니즘도 그렇고, 시대도 그렇고, 여성 인물도 그렇고, 요즘 젊은 애들도 그렇고, 딱 그런, 그렇잖아? 아주 시의적절한, 그런 거잖아?”

피 PD는 ‘그렇다’는 게 대체 뭔지는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하나만은 확실했다.

 

“이거 통한다.”

 

하지만 팔리기 위해 쓰인 모든 영화 시나리오가 그렇듯 「맨투맨」의 운명도 순탄치 않았다. 투자사들을 도는 동안 몇 번의 수정을 거듭하면서도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원래 처음 쓴 「맨투맨」 속 초롱이는 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흑인 혼혈이었다. 그러나 어디서 그런 배우를 구하겠냐는, 그리고 설령 구한다고 해도 무명에 가까운 그런 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 어떻게 투자를 받으며 어떤 관객이 보러 오겠느냐는, 뭐 그런 지극히 당연한 문제의식으로 인해 결국 초롱이를 (토종) 한국인으로 바꿔야만 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초롱이 옆에 빠방한 남자 캐릭터를 붙여 일명 ‘남녀 투톱’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 여자 배우 한 명만 있으면 역시나 투자받기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선 가산점이었던 게 현실에선 마이너스 점수였다. 이외에도 승부 조작을 하는 악당의 역할이 필요하다든지, 초롱이 곁에는 예측 불허의 발랄하고 예쁜 여자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든지, 뭐 여러 가지 피드백들로 인해 「맨투맨」도 초롱이도 점점 바뀌어 갔다. 나는 갈수록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21-23p)

 

 

“시대를 이야기해야 하는 거야. 오늘날, 지금 이곳의 사회, 시스템! 그래, 인마!”

뒤이어 피 PD는 자신의 대학 시절과 1980년대의 투쟁, 그리고 그때 전성기를 구가한 문학과 예술에 대해 침 튀기며 떠들어 댔다. 나는 한평생을 그 단 몇 년간의 대학 시절과 확인불가능한 무용담을 가지고서 먹고사는 것 같은 피 PD와 그들 동년배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피 PD는 세상과 불화해야 한다며 목에 핏대를 올렸고, 혼자 골방에 갇힌 것 같은 이런 글 써 오지 말고 요즘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사는지 조사해서 지금 이 시대의 것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이 시대의 것을 찾으라고?

그 말은 나에게 마치 참치회를 불판에 구워 먹는 일과 같은 인지부조화를 불러일으켰다. 내가 바로 이 시대의 사람이고, 요즘의 젊은이였다. 그런데 나를 향해 이건 요즘의 것이 아니며 이 시대의 젊은이들 얘기가 아니라는 둥 판결을 내리는 것은 피 PD처럼 젊었을 적 일찌감치 사회에서 한자리씩 차지한 뒤 몇십 년간 그곳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는 저 잘난 세대의 분들이었다.

결국 나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닌가 봐. 이 시대의 젊은이가 아닌가 봐.(56-57p)

 

 

세상과의 불화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옥빛 누나였다. 옥빛 누나의 경우는 인생에 불화가 없어서 결국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케이스였다.

예술대학에 입학하고 막 두 번째 학기에 접어들었을 때, 옥빛 누나는 엄청난 깨달음에 그만 충격받고 말았다. 그 전까지 옥빛 누나는 한국 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불우한 가정환경,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가족끼리의 어떤 갈등과 폭력 등이 모두 소설이기에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뭐랄까, 히어로 영화 속 초능력자들처럼 현실엔 절대 존재하지 않지만 그냥 재미로 보는, 장르적인 클리셰 같은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대학에 오니 다들 앞다투어 자신들이 실제 그런 경험이 있음을 밝혔다. 처음 옥빛 누나는 그게 거짓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다 실화였던 것이다! 그건 초능력자들이 실존한다는 것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그들과 옥빛 누나는 극단적으로 달랐다. 10대 시절에 가족끼리 두 번의 세계여행을 떠났고 가족회의를 통해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매우 수평적이며 다정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면서도 자신의 가정이 지극히 평범한 줄로만 알았던 옥빛 누나로서는 그런 불화를 겪어 본 적이 없을뿐더러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소설을 쓴다는 애들은 모두 그런 경험이 있었고, 나아가 그런 경험이 흡사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가능성 혹은 자질과 품격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양 여겼다는 점이다. 심지어 어떤 평론가는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없다는 말을 했고, 학생들은 그 말을 경전처럼 입에 올리곤 했다.

상처는 일종의 훈장이었다. 이혼 정도는 상처 축에도 들지 못했다. 옥빛 누나가 속해 있던 그 집단에서는 자신이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크면 클수록, 쉽게 말해 과거 엄마나 아빠가 개차반이면 개차반일수록 어떤 자부심과 우월감을 보이는 것 같았다.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과는 달리 엄마나 아빠에게 그런 상처 따위 받아 본 적 없는 옥빛 누나를 마치 숭고한 혁명에 참여하지 않고 혼자 무임승차한 파렴치한처럼 대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옥빛 누나 본인마저 죄책감 비스무레한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서 어떤 날엔가는 참고 참던 옥빛 누나가 가족들을 향해 울부짖으며 따진 적도 있었다. 왜 나를 이렇게 화목하고 평탄하게 키웠나요! 왜 나한테는 시련을 주지 않은 거예요!

흐음, 한마디로 모두들 개변태 마조히스트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

“내 기분이 오늘따라 누군가를 조소하고 비웃고 싶으면 젊은작가상 수상집을 읽고, 허망하게 망해 가는 뭔가를 볼 때의 허무한 기분을 느끼고 싶으면 이상문학상 수상집 같은 거 읽고.”

(...)

“난 본인 스스로가 너무 불쌍해서 견딜 수 없어 하는 거, 자기 연민이라고 해야 하나, 그게 참 싫더라. 또 그러면서도 불쌍한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하잖아?”(58-61p)

 

 

잠깐, ‘마초’라고 해서 육체적으로든 외모적으로든 강인하거나 거친 모습의 남자를 상상했다면, 그건 조용히 정체를 감춘 채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수많은 마초들에 대한 실례일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보통의 평균 성인 여자보다 키가 작았고 말랐던 것이다.

(...)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가 쓰는 글에는 아무리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흔히 말하는 남성성에 대한 열망, 그리고 그와 비례하여 왜곡된 성관념이 진하게 묻어 나왔다. 당시 사회는 한창 미투운동이 일어나며 세상의 변화를 촉구하던 때였고, 실제로 세상이 변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처럼 변화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 항상 그렇듯이 한쪽에서 혼자 팔짱 낀 채 ‘아닌데? 내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 않은데?’라며 힘 빠지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 법이었다. 우리의 초록 뿔테가 그랬다. 당연히도 좋은 말을 들을 리 없었다. 그를 향해 폭격과도 같은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신에 대한 정당하지 않은 대우라 여겼고, 이 시대의 마초답게 스스로를 핍박 받는 (그리고 지성적인) 의인 혹은 순교자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이 싸움에서 절대 굴복할 수 없다는 듯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

앞서 내가 치성이 형 얘기를 하며 일명 어둠의 스승에 관하여 말을 했던가. 그렇다. 초록 뿔테는 명실상부 나의 스승이었다. 그를 보며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아! 나는 저러면 안 되겠구나.(108-109p)

 

 

이야기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 작가는 말하지 않고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때의 작가가 꼭 나라는 인간과 동일인일 필요는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글 속의 화자와 글을 쓰는 작가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잘 모르는 것 하나가 있다. 그건 바로, 때로는 그 작가마저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작가의 얼굴마저 흉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교묘한 연출을 시도했다. 머릿속에 내가 아닌 또 다른 작가를 상상했다. 그리고 그 작가라면 어떤 문장을 쓰고, 어떤 화자를 통해 어떤 캐릭터로 어떤 사건에 대해 어떤 어휘로 표현할까 고민하며 글을 썼다. 그 작가는 말하자면 우리의 스승님과는 정반대의 이유로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남성이다. 혹은 호감까진 아니더라도 일종의 정상참작은 된다.

그렇다. 정상참작이다.

처음부터 내가 그렇게 치밀했던 건 아니었다. 시작은 무의식적인 공포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렇게 써버린 일이었다. 하지만 같은 조 사람들에게 한번 찬사를 듣자 그것은 나의 명백한 지침이 되어 버렸다. 나는 그 지침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은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나를 향한 그처럼 따뜻한 박수와 응원 그리고 지지는 생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축축하고 어둡기만 하던 음지에 햇볕이 스며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들 나를 좋아했다. 아마 우리의 스승님과 대비되어 나란 인간이 더 돋보였으리라. 그들은 기본적으로 친절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들이었고, 그런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다는 건 정말이지 행복한 일이었다.

프랑켄이 태어난 건 바로 그즈음이었다. 처음엔 글 쓸 때만 잠깐씩 내 주위를 맴돌며 중얼거리던 그 존재가 언젠가부터 글을 쓰지 않을 때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하는 말과 사상은 아무런 줏대도 신념도 없이 마치 덕지덕지 매단 훈장처럼 제멋대로였다. 그래서 나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따서 그를 '프랑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

그것은 비열한 행위인가. 나는 스스로를 향해 묻는다.

하지만 내가 남의 것을 탐하거나 뭔가를 빼앗기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나는 단지 호의와 응원, 지지를 받고 싶은 것이다. 사랑받고 싶은 것이다.

물론 솔직히 말하면 이해되지 않는 것도 많다. 나와는 어떤 의미에서든 정체성이 다른 그들이 느끼는 감정과 사용하는 표현의 본질을,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앵무새처럼 흉내낼 뿐이다. 알 것 같다고, 이해할 것 같다고, 그리고 때로는 겸허히 반성이라도 하는 듯이(혼날 땐 입 꾹 다무는 게 상책이듯) 의도된 침묵도 해 가면서, 소소한 거짓말을 할 뿐이다. 하지만 그게 꼭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스포츠의 부정행위나 반칙처럼 무슨 큰 잘못을 한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내가 속으로 그들을 조롱하거나 그들에게 격렬히 반대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단지 나는 좀 헷갈릴 뿐이었고, 그러나 그 헷갈림은 잠시 보류한 채, 일단 지금보다는 더 사랑받을 수 있을 모습으로 나 자신을 위장한 것뿐이었다.

근데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더 비열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스스로를 향해 묻는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 행위로써 나에게 일종의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지, 나는 반문한다.

그리고 이렇게 반문함으로써 자기반성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건 아닌지, 나는 의심한다.

그리고 이렇게 의심함으로써 나는 적어도 양심적인 인간임을 넌지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에 또다시 묻는다. 어쩌면 또다시,

아······ 음······ 뭐라 해야 하지······. 좀 왠지······ 느끼하네요.

진실한 나는 진실한 대답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진실임은 과연 누가 판단할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진실한지 아닌지 스스로가 제일 잘 알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맞을까.

 

나의 진실을 판단할 자격이 과연 나에게 있을까?(110-113p)

 

 

더불어 그 선배는 편집증적인 화법을 구사했는데, 예컨대 아무도 모르는 마이너한 서브컬처 쪽 지식들과 유럽의 혁명운동가들을 조합한다든지, 주어와 술어에 서로 어울리지 않는 걸 집어넣거나 번역투의 대사를 써서 짐짓 문장을 더럽게 한다든지, 아무튼 의도적으로 그렇게 말하고 글을 씀으로써 자신이 일종의 힙스터라고 믿는 자였다. 특별해지고 싶다는 발버둥.

(...)

어쨌든 힙스터가 되기 위해 무진장 노력하면서도 '흐음? 힙스터가 뭐지?' 하는 그의 오묘한 표정을 볼 때면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132p)

 

 

그들, 프랑켄과 그년은 우리와 확실히 달랐다.

우리는 좋게 말하면 겁이 많고 조심스러운 인간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비겁한 인간이었다. 말을 하기보단 침묵하는 편이, 어떤 문장을 쓰기 보다는 쓰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혼자 속으로 의심하고 고민하며 생각하다가, 결국엔 아무 말도 아무 문장도 쓰지 않고는 나중에 가서 아, 그때 아무것도 안 하길 참 다행이다, 하고 안심하는 쪽이었다. 실제로 그간 우리가 그런 선택을 함으로써 이득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태도로는 「맨투맨」을 쓸 수 없었다. 의심하고 고민하며 생각하는 것 따위를 하다가는 아무것도 결정 지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심하고 고민하며 생각하는 것 따위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것은 행위가 아니라 비행위로 간주된다. 비행위는 욕망 없는 인간의 문장처럼 쓰이지 않는다. 쓰이지 않은 것을 읽어 주는 이는 없다.

 

그래서 뭐든 해야 하는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과 소음들은 이제 덮어 두고.

저 멀리로 아득한 곳으로 스스로를 던져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161-162p)

 

 

그런데 문제는 이 '안전한' 시나리오가 이제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꽤나 충격적인 사실인데, 왜냐하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러한 전략이 어느 정도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해함' 또는 '착함'이 하나의 화두가 되어 한국 사회를 휩쓸고 지나갔던 몇 년 전의 풍경을 기억하고 있다. 양극화되어 가는 사회에 대한 반발로 터져 나왔던 그러한 대중적 요구 속에서 「맨투맨」이 획득하고 있는 균형 감각은 어느 정도 미덕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작품이 표방하고 있는 중간자적 위치는 분명한 상업적인 소구점이 있었을 것이고, 때에 따라 그것이 밀수하고 있는 제삼자적 태도마저 어떤 신중함으로 칭송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고 이제 그런 시나리오는 팔리지 않는다. 사용자의 연령, 젠더, 소득, 학벌, 정치 성향에 맞춰 가장 알맞은 콘텐츠들이 선별되어 추천되는 2024년의 개인화된 미디어 환경 위에서 「맨투맨」이 취하고 있는 어정쩡한 태도는 기껏해야 '타겟층'이 불분명하다는 소리를 들을 뿐이다. 작품의 유일한 미덕이라 할 만한 절묘한 균형 감각은 이제 오히려 그것의 매력을 감소시키는 약점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그것의 진영적 애매함은 어떠한 매개도 없이 곧바로 상업적 애매함으로 이어지고 있다. 작중 「맨투맨」의 시나리오가 투자자들에게 퇴짜를 맞을 때마다 반복해서 제기되는 "주인공의 욕망이 보이지 않는다"(36쪽)는 지적은 한편으로 그 뒤편에 놓인 작가의 욕망을 집요하게 캐묻고 있다. 너는 대체 누구의 편을 들고 있냐고, 우리에게 그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하라고.

(...)

이 소설이 치성이 형의 사례를 경유해서 우리에게 전달하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이제는 더 이상 판정까지 가면 안 된다. 이기더라도 확실하게 이겨야 하고, 지더라도 확실하게 져야 한다.

(...)

이제 정말 그는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주장해야 한다. 실베스터 스탤론과 캐스터 세메냐 사이에서. 뉴할리우드 시네마와 페미니즘 시네마 사이에서. 어제의 좋음과 오늘의 나쁨 사이에서. 영호는 결국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러나 그는 결국 모든 것을 선택한다. 영호는 「맨투맨」을 위해 여섯 개의 서로 다른 결말을 쓴다.

(...)

이곳에는 모든 경우의 수가 뷔페처럼 미리 준비되어 있으며, 편집자, 투자자, 그리고 독자는 자신의 취향에 맞춰서 그중 하나의 「맨투맨」을 선택하여 읽으면 그만이다.

이것은 이 소설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가장 저열한 장면이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선택함으로써 사실 아무런 선택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립식 시나리오'의 구조 속에서 선택의 책임은 또다시 다른 사람에게 떠넘겨진다. 최대주의의 선율 사이로 모든 가능성들이 수확되지만 정작 그것을 지휘하고 있는 작가의 자리는 비어 있다. 그는 다만 어떠한 자극적인 가능성들을 배설한 채 암막 뒤로 쥐새끼처럼 숨어들고 있을 뿐이다. 소설의 윤리는 폭파되었다. 그는 또다시 도망치고 있다. 이건 비겁하다. 정말 쓰레기같이 비겁하다.

그런데······ 그에게 뭔가 다른 가능성이 열려 있었을까? 나는 여기에 잠시 멈추어 서서 ㅡ 마치 영호가 그러하였듯 ㅡ 그에게 주어질 수 있었던 다른 결말을 상상해 보지만, 도대체 좀처럼 그럴듯한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다. 말의 역설적인 의미에서, 무한히 열려 있는 「맨투맨」의 결말은 소설 속 영호의 이야기가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결말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이 비겁한 풍경은 2024년 한국에서 '「록키」를 좋아하는 한 30대 남자 작가 지망생'이 숨을 쉬며 글을 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그동안 가꾸어 온 글쓰기의 가능성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풍족하게 폐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 「맨투맨」의 결말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다.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분기들. 가능성의 개수에 비례하여 줄어드는 작가의 죄. 우리는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208-213p)

 

 

 

ㅡ 최재영, <맨투맨>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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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0

 

 

재미없다.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에요. 그 부인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욕망 때문에, 혹은 관습에 따라 결혼했어요. 아이를 하나 낳았고요. 아이가 어떻게 생기는지는 안도 알잖아요."

"너보다는 잘 모를 것 같은데. 하지만 거기에 대해 아는 건 있지." 안이 비꼬았다.

"그리고 그 아이를 키웠어요. 부인은 바람을 피우지는 않았을 테니 그런 유의 불안이나 문제는 알지 못했겠죠. 그녀는 많은 여자들이 간 길을 따랐고 알다시피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하죠. 젊은 시절 중산층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었고 그 상황에 안주해 거기서 벗어나려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어요. 그 부인은 이것도 하지 않고 저것도 하지 않았다는 걸, 뭔가를 성취하지 않았다는 걸 자랑스러워하고 있다고요."

(...)

"요즘 유행하는 생각이구나. 하지만 그건 가치가 없어." 안이 말했다.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나는 내 생각을 말했지만, 사실 그건 내 견해라기보다는 어딘가에서 들은 말이었다. 어쨌든 나의 삶, 아버지의 삶은 그런 생각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안은 그것을 경멸함으로써 내게 상처를 주었다. 사람은 뭔가 대단한 가치에 목표를 둘 수도 있지만 경박한 가치에 집착할 수도 있다.(50-51p)

 

 

엘자는 며칠 동안 별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한 주가 빠르게 흘러갔다. 유일하게 행복하고 유쾌한 칠 일. 우리는 가구를 새로 들인다거나 시간표를 짠다거나 하는 복잡한 계획을 세웠다. 그런 것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그렇듯 아버지와 나는 무모하게도 빡빡하고 실행하기 어려운 계획을 짜면서 즐거워했다. 우리가 그런 계획을 실제로 실행할 것이라고 믿기나 했던가? 매일 낮 12시 반 같은 장소로 가서 점심을 먹고,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그런 다음 외출하지 않고 집에 머물러 있는 것이 정말 가능하다고 아버지는 믿었을까? 하지만 아버지는 자유분방한 생활을 가볍게 포기하고 질서로, 품위 있고 체계적인 중산층의 생활로 들어가는 것을 격찬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나에게 그랬듯이 아버지에게도 공중누각에 지나지 않음이 분명했다.(70-71p)

 

 

나는 사랑받고 싶었고 위로받고 싶었고 나 자신과 화해하고 싶었다. 아버지와 안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는 사랑의 밤이 기다리고 있었고, 내게는 베르그송이 있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려고, 나 자신을 측은히 여기려고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때 이미 나는 안을 측은히 여기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패배시키리라는 것을 확신한 사람처럼.(82p)

 

 

"그들이 하는 말이 얼마나 단조롭고······ 뭐라고 해야 좋을까······? 조잡한지 깨닫지 못했니? 계약이니, 여자들이니, 파티니 하는 얘기들이 지루한 적 없었어?"

"알다시피 난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십 년을 보냈어요. 그들은 행실에 단정한 면이라곤 없는 사람들이고 그 점이 여전히 매력적이에요.“

그것이 마음에 든다는 말까지는 차마 하지 못했다.

"이 년이나 지났는데······. 그건 논리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란다. 감수성이나 직감력의 문제지······." 그녀가 말했다.(154p)

 

 

그제야 안은 얼굴을 들었다. 여느 때의 모습은 간곳없이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안은 울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가 공격한 대상이 하나의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살아 있는 개체였음을. 그녀는 조금 내성적인 어린아이였다가 사춘기 소녀였다가 이윽고 여인이 되었을 터였다. 그녀는 마흔 살이었고 혼자였으며 한 남자를 사랑했고 그와 더불어 행복하게 살고자 했다. 십 년, 어쩌면 이십 년을. 그런데 내가······. 그 얼굴, 지금 그녀의 그 얼굴, 그 얼굴은 내가 만든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차 문에 기대어 온몸을 떨었다.(174-175p)

 

 

 

ㅡ 프랑수아즈 사강, <슬픔이여 안녕> 中, a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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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9

 

저자의 주관적 해석을 크게 개입시키지 않는 책. 아주 간략하게마나 버지니아의 울프의 생애와 주요 작품에 얽힌 사실을 더듬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하루에 두 번씩 켄싱턴 가든으로 산책을 나갔다. 산책이 점점 따분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버지니아는 항상 모든 것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여왕의 문'에는 견과와 구두끈을 파는 여자가 있었고, '꽃 산책로'에는 자잘한 요철 장식물이 있었다. 대개 기삿거리가 있었고, 없는 경우에는 버지니아가 소설을 썼다. 버지니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아이였던 만큼, 버지니아가 쓰는 소설은 아주 긴 연재소설인 경우가 많았다.(20p)

 

 

그때 버지니아 스티븐에게 가장 괴로웠던 점은 느껴야 하는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목소리를 낮추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였지만, 그 모든 관례화된 공개적 애도의 안쪽에 담겨 있는 것은 밖으로 표출되어야 하는 슬픔이 아니라 슬픔보다 더 괴로울 수 있는 무감정이었다.

'나는 그때 했던 혼잣말을 지금껏 위기의 순간마다 되풀이해왔다. "아무 감정을 못 느끼겠어."'

외적 기대와 내적 경험의 불일치를 어렴풋이 감지했다고 할까. 하지만 울프가 그 불일치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과거의 스케치>를 쓸 때였다.

"우리는 위선자가 되어 슬픔의 관습에 갇혔다. (중략) 원치 않는 역할을 연기해야 했고, 이해하지 못한 대사를 기억해내야 했다."

후일 울프는 소설을 통해서 그런 껍데기를 부술 방법을 모색해 나간다. 그러면서 중요한 순간은 사회가 명하는 '이때'가 아니라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그때'라는 것, 우리의 감정은 시간을 지키지도 않고 순서를 따르지도 않는다는 것을 역설한다. 무감정을 용납하기도 하고, 사건에 대한 반응이 이상하게 즉각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기도하며, 경험의 개인적 차이를 존중하기도 한다. 하지만 열세 살의 버지니아 스티븐은 갇힌 느낌, 짓눌린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29p)

 

 

울프는 산책에서 돌아오자마자 노트에 "H"모양("두 개의 직사각형이 한 개의 선으로 연결된"모양)을 그렸다. 과거, 중간 휴지, 다시 이어지는 이야기, 이렇게 세 부분이었다. 이 단순한 구조가 <등대로>의 플롯이자 요점이었다.

울프 자신도 인정했듯이 <등대로>는 가족력의 유령들을 잠재우는 작업이었다.

(...)

부모에 대해서 스는 과정(울프의 표현에 따르면 정신분석과 흡사한 과정)이 울프의 정신 속에서 부모가 차지하는 비중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지만(울프는 소설 <세월>에서, 그리고 회고록<과거의 스케치>에서도 계속 부모에 대해서 쓰게 된다), 울프가 <등대로>를 통해 자신과 이 두 강력한 인물 사이의 관계를 제어할 수 있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울프에게 미스터, 미시스 램지를 그리는 일은 곧 자기 부모를 떠올리는 일이었다. 울프는 램지 부부에 대해 씀으로써 한 아이의 시선으로 자기 부모에 대한 기억을 되짚을 수 있었다(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연령이 다양한 8남매의 시선을 통해 한 아이가 한 가정에서 서서히 커가는 느낌을 따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부모를 안다고 할 때 그 앎은 감정적·과장적·의존적 앎인 만큼, 울프는 미스터, 미시스 램지를 아이의 시각뿐 아니라 어른의 시각으로, 곧 어른이 어른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안정적·공감적 시각으로도 보기를 원했다. 마흔네 살이 된 울프가 중년이 된 부모의 초상을 그림으로써 부모와 대면한 것이다. 바네사는 <등대로>를 읽자마자 이 초상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장성해서 엄마와 동등해진 내가 엄마를 만난 것 같아."(121-122p)

 

 

<파도>에서 "등장인물은 여섯 사람이면서 한 사람"이라고 울프는 말했다. 여섯 사람이자 한 사람인 등장인물은 울프의 친구들이기도 하지만, 울프 자신들이기도 하다. 울프가 일기에 썼던 말을 하기도 하고, 간간히 울프의 목소리로 말하기도 한다. 수전은 몽크스 하우스 정원의 울프를 닮았다. 고전문헌학 교수 니벨은 울프가 마다한 기득권층의 인생을 사는 인물이지만, 니벨이 주머니 속의 '이력서'를 만지작거리면서 자기의 가치를 불안한 듯 가늠하는 모습은 울프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우리는 저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이 의미심장한 생각은 클러리사 댈러웨이의 생각이기도 했다.

"이 사람은 지금 이러니까 이런 사람이고 저 사람은 지금 저러니까 저런 사람이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지."

울프가 자신의 작가 인생의 상당 부분을 바친 작업은 그런 라벨들을 해체하는 작업, 곧 누군가를 '이런 사람' 또는 '저런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데 수반되는 허위를 폭로하는 작업이었다.

<파도>의 등장인물들이 어느 차원에서 "모두 하나"라면, 화자가 바뀌는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모두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진다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이다. 말하는 내용은 달라도 말하는 리듬은 똑같다.

(...)

울프가 리듬을 타면서 쓴 글이기 때문에 독자로 리듬을 타면서 읽어야 한다. 속독을 불가능하다. 소설의 속도는 등장인물들이 자기를 둘러싼 세상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느긋한 속도에 맞추어져 있다. <파도>의 등장인물들은 다 큰 어른들이지만,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인지할 때 느끼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 같은 경이로움이다. 그들의 독백은 현재형 시제의 독백, 곧 경이로운 것들 사이에서 한순간 걸음을 멈추고 그 순간의 놀라움을 들려주는 듯한 어조(다 큰 어른들에게서 좀처럼 들어볼 수 없는 어조)의 독백이다. <파도>는 울프의 가장 어려운 책일지도 모르지만, 울프의 목소리 속의 어린아이 같은 어조를 가장 분명하게 들려주는 책이기도 하다.

울프에게는 질릴 줄 모르는 호기심과 디테일을 향한 욕심이 있었다고 울프의 친구들은 종종 이야기했다. 어린아이들이 울프에게 끌린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비타 색빌웨스트의 아들 나이겔 니콜슨도 울프에게 끌린 어린아이들 중 하나였다.

 

울프가 그날의 사건을 들려달라고 하기에 내가 대답했다.

"사건은 없었는데요. 그냥 학교에서 집까지 왔어요."

울프가 다시 물었다.

"저런! 그러지 말고, 처음부터 다시 해보자. 아침에 무엇이 너를 깨워주었을까?“

내가 대답했다. "태양. 이튼에서 기숙사 창문으로 들어오는 태양.“

그러자 울프가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어떤 태양이었을까? 웃는 태양? 화난 태양?“

나는 이런 식으로 울프와 함께 내 하루를 하나하나 되짚어 나갔다.(154-155p)

 

 

<세월>이 울프를 자살 직전까지 몰아갔다는 것, <세월>과 1930년대 중반의 정치 상황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 <세월>이라는 픽션은 <3기니>라는 난폭한 논픽션과 짝을 이루는 작품이라는 것, <세월>의 형식 패턴은 총체성의 비전보다는 와해와 결렬에 가깝다는 것은 모두 사실이다. 이 사실들 때문인지, <세월>에 대한 비평은 그리 열렬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평가들이 주로 강조하는 것은 실패와 고통(<세월>의 작가가 겪었던 실패와 고통, 그리고 <세월>의 등장인물들이 겪는 실패와 고통)이고, 비평가들이 주로 지적하는 것은 <세월>이 <파도>와 완전히 상반된 작품이라는 점, 곧 내면 세계(서정성)를 뒤로 하고 바깥 세계(복잡한 리얼리즘)를 향한다는 점이다. <세월>은 울프의 소설들 중에서 가장 덜 읽히고 가장 덜 가르쳐지는 작품인 만큼, 지금 일반 독자 중에 <세월>을 읽는 독자는 간혹 드문드문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세월>은 울프가 생존 작가일 때 영국 국내에서 가장 빨리 팔려나간 작품이었고 미국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유일한 작품이었다. <세월>이 일반 독자에게 읽히기를 바란다는 뜻을 울프 자신이 분명하게 밝히기도 했다. <파도>의 판매고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울프가 '일반 독자'를 중요시한 작가임을 기억하게 해주는 말이기도 하다.(182-183p)

 

 

 

ㅡ 알렉산드라 해리스,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 中,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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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9

 

 

동유럽의 프루스트라 불린다는데 내가 프루스트는 안 읽어봐서 그건 잘 모르겠고, 좀 덜 난해한 제발트나 올가 토카르추크 느낌.

 

 

 

빛이라면, 그것을 사진으로 포착해 보존하려는 안쓰러운 시도나마 해볼 수 있다. 혹은 모네처럼 같은 성당을 하루의 여러 시간대에 그려볼 수도 있다. 모네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았다ㅡ성당은 전략일 뿐, 빛을 포착하기 위한 덫일 뿐이었다. 하지만 냄새라면, 그런 비결이 우리에겐 없다. 필름도 기록 장비도 없으며, 수천 년 동안 그런 도구는 발명된 적이 없다. 인류는 이것을 어떻게 간과할 수 있었을까?

향을 기록하는 장비가 없다는 사실이 진정 놀랍지 않은가? 실은 하나가 있긴 하다. 기술보다 앞서 존재한 단 하나의 도구, 가장 오래된 아날로그 도구. 그것은 물론 언어다. 당분간은 언어 말고 다른 도구가 없으므로 나는 어쩔 수 없이 여러 향기를 말로 포착해 또다른 노트에 추가해야 한다. 우리는 묘사해봤거나 비교해본 향기만을 기억한다. 놀라운 점은 이런저런 냄새에 대한 이름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느님 혹은 아담은 일을 제대로 끝마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빨강, 파랑, 노랑, 보라 등등의 이름이 있는 색깔과는 다르다. 향기는 우리가 직접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향기는 언제나 비교를 통해, 묘사를 통해 인식된다. 제비꽃 냄새가 난다. 토스트 냄새가, 해초 냄새가, 비 냄새가, 죽은 고양이 냄새가····· 하지만 제비꽃, 토스트, 해초, 비, 그리고 죽은 고양이는 향기의 이름이 아니다. 이 얼마나 부당한가. 아니 어쩌면 이 불가능성 아래에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다른 징조가 숨어 있는지도·····(73-74p)

 

 

치아의 고고학이라는 것을 만들어 치아의 필링과 사용된 재료의 종류에 따라 시대를 십 년씩 명확히 구분하는 일은 분명 가능할 것이다. 오호, 나의 치과의사는 항상 말한다. 환자분 치아는 90년대의 간략한 역사로군요. 당시의 혼란, 위기, 메탈세라믹에 대한 의기양양한 첫 실험, 신경치료의 대중화, 비뚤어지게 박은 치아 기둥, 완전한 악몽이에요. 치과의사가 고고학자라면·····(105p)

 

 

나는 기억의 텅 빈 굴에서 마지막으로 떠나가는 것은 향기의 기억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후각이 일찍 형성되는 감각이기 때문일 테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것은 맨 마지막에, 머리를 땅에 처박고 냄새를 킁킁거리는 작은 동물처럼 떠나간다.(121p)

 

 

나는 도망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다른'세상에서 돌아왔고, 시간을 뒤섞어버렸다. 그런 경우에는 치료를 중단하고 퇴원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사람이 직접 퇴원을 요청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바깥에서는 실제 시간이 흐르는데 여기에서는 우리가 중고 제품 같은 과거를 그들에게 속여 팔고 있다고 말하는 상황을 상상했다. 공동체에 입소하면 환자들(적어도 병의 단계가 초기인 환자들)과 그들의 가족은 이것이 실은 치료의 한 형태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실험의 순도를 위해서는 다른 현실의 입자들이 들어오지 않도록 막는 편이 더 나았다. 환경이 다른 시대에 오염되지 않도록 멸균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도망자가 공동체로 돌아온 뒤 한 행동은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저녁식사 후 나는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바깥의 도시에서는 모두가 어떤 실험 대상이 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사람들이 미래에 사는 척 연기하고 있더라고, 자네들은 믿기 어렵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귀에 전선을 연결하고 손에는 작은 텔레비전을 든 채 걸어다니면서 화면에 눈을 박고 고개를 들지도 않아. 돈을 엄청 쏟아부어 SF 영화를 찍고 있거나, 아니면 앞으로 오십 년 뒤에 삶이 어떻게 될지 실험을 하고 있나봐. 그것이 도망자가 공공연히 밝힌 결론이었다.(136-137p)

 

 

과제는 다음과 같았다. 미래에 심각한 결손이 발생할 때 우리는 어떻게 내일을 위한 시간을 조금이나마 벌 수 있을까? 간단한 대답은 바로, 약간 뒤로 가는 것이었다. 뭐든 확실한 게 있다면 그것은 과거다. 오십 년 전은 지금부터 오십 년 후보다 더 확실하다. 이십, 삼십, 혹은 오십 년을 뒤로 간다면 딱 그만큼 앞서게 된다. 맞다, 그것은 이미 살아본 시간, '중고' 미래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미래는 미래다. 그래도 지금 우리 앞에 입 벌린 무보다는 낫다. 미래의 유럽은 이제 가능하지 않으므로 과거의 유럽을 택하자. 간단하다. 미래가 없을 때는 과거에 투표하는 것이다.(184-185p)

 

 

얘기가 거기서 살짝 옆길로 샜다. 용서하시길, 하지만 과거는 샛길과 일층의 작업장과 분필로 표시한 패턴과 복도로 가득하다.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것들에 대해 여백에 쓴 메모들ㅡ나중에 가서야 우리는 과거라는 거위가 바로 거기에,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253-254p)

 

 

나는 궐기대회의 세부 처리가 상당히 절묘했다는 점을 떠올렸고 그 정도의 말을 해주었더니 뎀비는 꽤 기분이 좋은 듯했다. 스피커 소리를 갈라지게 한 게 좋았어. 일부러 그런 거지?

어떻게 생각해? 그리고 음향 상태 확인 과정의 실수 말이야. 음향 기사가 욕하고····· 사람들은 그런 걸 기억해. 내 말 믿어도 돼, 하나같이 똑같았던 사회주의 시절의 무수한 궐기대회에서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정확히 그런 거야, 그런 실수. 그리고 지금 그걸 재현해서 보여주면 사람들은 그때로 곧장 돌아가는 거지.(290-291p)

 

 

어떤 나라가 가진 유일한 자산이 불행이라면 왜 불행을 단념한단 말인가ㅡ그들에게 슬픔이라는 원유는 유일하게 고갈되지 않는 자원이다. 그리고 그들은 더 깊이 팔수록 더 많이 채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국가적 불행의 무한한 매장고. 민족과 국가가 저마다 행복을 추구한다는 생각은 거대한 환상이자 자기기만이다. 행복은 실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견디기도 힘들다. 그런 휘발성 물질, 깃털처럼 가벼운 그런 환영, 바로 코앞에서 터저버려 눈에 매운 거품이나 튀길 비눗방울을 갖고 뭘 하겠는가?

행복이라고? 행복은 볕에 내놓은 우유처럼, 겨울날의 파리나 초봄에 핀 크로커스처럼 금방 부패한다. 행복의 등뼈는 해마의 등뼈처럼 연약하다. 훌쩍 등에 올라타 멀리 내달릴 수 있는 튼튼한 암말이 아니다. 교회나 국가의 기틀이 될 주춧돌이 아니다. 행복은 역사 교과서에 실리지 않고(거기에는 전투, 집단 학살, 배반, 어느 대공의 유혈 낭자한 살해 따위만 들어갈 수 있다) 연대기나 실록에도 실리지 않는다. 행복이란 독해 책과 외국어 숙어집, 그중에도 초급 교본에나 나올 뿐이다. 행복은 언제나, 아마도 문법적으로 가장 쉬워서겠지만, 현재시제로 이야기된다. 오직 현재에서만 모두가 행복하고 태양은 빛나고 꽃은 향기롭다. 우리는 해변에 가는 중이에요, 여행에서 돌아오고 있어요, 실례지만 근처에 좋은 레스토랑이 있을까요·····

검劍은 행복을 벼려 만들지 않는다. 행복이라는 원료는 연약하고 부스러지기 쉽다. 행복은 웅장한 소설이나 노래나 서사시에 적합하지 않다. 노예의 사슬도, 함락된 토로이도, 배반도, 날이 무뎌진 검과 부서진 뿔피리를 지닌 채 언덕에서 피 흘리는 롤랑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늙은 베어울프도 없다·····

행복의 깃발 아래로는 군단을 불러모을 수 없다·····

실로 어떤 나라도 불행을 단념하려 하지 않았다. 필요하면 언제든 꺼낼 수 있는 지하 저장고에서 잘 익어가는 와인과 같은 불행을. 국가적이고 전략적인 불행의 비축. 하지만 지금(최초로) 행복을 선택할 순간이 왔다.(331-333p)

 

 

추측하자면, 1968년에는 1968년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누구도, 어이, 이봐, 우리가 지금 살며 경험하는 이것 말이야, 이게 역사에 길이 남을 그 위대한 68이야, 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발생한 지 오랜 뒤에야 발생한다····· 이미 생겨났다고 추정되는 어떤 일이 정말로 일어나기 위해서는 시간과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지연되어 발생한다. 사진을 인화할 때 이미지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나타나듯이····· 1939년도 1939년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불확실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두통을 느끼며 깨어나는 아침들이 있었을 뿐.(334p)

 

 

프라하의 봄 이후 파멸의 여름이 찾아왔고, 삶이 부서질 때 늘 그렇듯 모든 것은 자리를 바꾼다. 거리를 행진하던 이들은 그해 여름과 그뒤 모든 여름의 추운 그늘 속으로 사라지고 고분고분한 이들이 밖을 기웃거리다 불려 나와 비어버린 자리를 차지한다. 당신을 절망하게 하는 것은 충돌, 깨진 창문, 망명자, 수감자, 폭행과 강간 피해자, 심지어 살해된 자가 아니라, 훗날 어느 오후에 거리에서 웃고, 함께 어울리고, 당신을 오래 삶에서 내쫓을 그 똑같은 체제 안에서 아이를 낳는 사람들을 볼 때 미묘하게 찾아오는 오싹한 허무감이다. 역사에는 수천, 수만 년의 세월이 있으니 오륙십 년 정도는 망쳐도 별 탈이 없다. 역사에게 그 정도는 고작 일 초나 될까 말까 한 시간이다. 하지만 역사의 일 초가 일생인 인간-하루살이는 무엇을 해야 하나? 68에 뒤이은 그 오후들 때문에 프라하는 60년대를 선택하고픈 마음이 없었다.(349-350p)

 

 

 

 

 

ㅡ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타임 셸터>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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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6

 

 

 

그러나 미숙함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위험은 글쓰기를 둘러싼 욕심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고통을 말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고픈 마음, 고통을 재료 삼아 예술 자체에 아부하고픈 야망, 그런 욕망들이 언어로 경험을 직조하는 작업에서 지배적인 힘이 되면 내게 일어난 사건을 배반하고 자신의 진실에서 멀어지는 타락이 시작된다.

(...)

병자로서 고통을 전하되 끝없이 하소연하지 않는 작가로서의 자의식, 할 수 있는 말을 통해 할 수 없는 말까지 전하는 능란함, 쉬운 승리로도 쉬운 절망으로도 가벼이 기울지 않는 평정심, 아프다는 것을 시시한 글의 변명으로 삼지 않는 자존, 자기가 보는 어둠을 부러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것으로 자신을 장식하지 않는 윤리, 오랜 시간 매일 공들여 노력하는 자기 규율, 나의 고통은 유일하고 절대적이나 그와 동시에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고통을 인식하는 균형감, 고립시키는 고통을 접면을 넓히는 기회로 전환하는 놀라운 도약.

좋은 글의 조건을 나열해보면 쓰는 기술과 앓는 기술이 어느 정도 겹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앓기의 기술은 삶의 기술과 다른 말이 아니며, 삶의 기술은 쓰기의 기술과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46-47p)

 

 

"통증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통증은 논박할 수 없게, 또 절대적으로 현존하는 것이어서, '고통스러워하기'는 '확신하기'의 가장 생생한 예로 여겨질 수 있을 정도다. 반면 타인에게 통증은 도무지 잡히지 않는 것이어서 '통증에 관해 듣기'는 '의심하기'의 가장 좋은 사례가 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통증은 공유하기 불가능한 무언가로서, 부정될 수 없는 것이자 동시에 확증될 수도 없는 무언가로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난다."

(...)

"통증은 언어의 근본적인 실패다. (...) [통증을 겪는 사람은] 통증으로 인해 이 고문과도 같은 친밀성에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소통할 수 없는 통증은 탐험가들이 형체가 있는 지형도를 그릴 수 있는 대륙이 아니다. 통증의 칼날 아래서 존재의 통일성은 조각나고 그리하여 언어도 조각난다. 그것은 비명을, 불평을, 신음을, 울음 또는 침묵을 유발한다. 다시 말해 발화와 사고의 실패를 유발한다."

(...)

통증의 실제 느낌이 어떤지를 묘사할 때 말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는가? 언어는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잠잠해진 뒤에야 찾아온다. 말은 오직 기억에만 의지하며, 무력하거나 거짓이거나 둘 중 하나다."

(...)

결정적으로 문학에서 질병 묘사를 막는 것은 언어의 빈곤이다. 영어, 이 언어는 햄릿의 사변과 리어왕의 비극을 표현할 수는 있어도 오한이나 두통을 표현할 말은 없이 한쪽으로만 무성하다. 평범한 여학생도 사랑에 빠지면 셰익스피어나 키츠로 자신의 마음을 대신 말할 수 있지만, 아픈 사람이 머릿속의 통증을 의사에게 묘사하려고 하면 언어는 즉시 말라버린다."

(...)

질병을 묘사하는 '언어의 빈곤'에 관해 울프가 불평할 때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픈 사람에게 '쓸 수 있는 기존의 말'이 없다고 울프는 말한다. 그렇다면 통증과 근수축과 협착과 경련을 노래하는 그 모든 표현들은 뭐란 말인가. 후벼파는 듯한 통증, 파고드는 듯한 통증, 찌르고 꼬집는 듯한 통증, 욱신거리는 통증, 작열하는 통증, 쏘는 듯한 통증, 얼얼한 통증, 살점을 떼어내는 듯한 통증, 모두 좋은 표현들이다. 모두 오래된 언어들이다."

(...)

문제는 통증이 사과가 아니라는 데서 온다.

사과는 내 몸 밖에 존재하며 볼 수 있는 사물이다. 그것은 내가 쳐다보고 있지 않아도, 다시 말해 내 지각과는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감각할 수 있으므로 나는 그 크기와 모양과 색과 향과 맛을 표현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 사과를 쥐여주기만 하면 된다. 반면 통증은 주관적이다. 통증은 내가 지각해야 존재하며 내 통증은 나만이 지각할 수 있다. 따라서 통증이 있으며 얼마나 아프고 어떻게 아픈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선 밖으로 표현해야 한다. 표현한다는 건 내 몸 밖에 통증을 알리는 표지 또는 통증과 닮은 사물을 만드는 일이다. 외부 세계에 사과 같은 것이 존재하도록 하는 일이다.

(표정, 제스처, 신음, 비명 등 반사에 가까운 신체적 표현을 제외하고) 가장 쉽고 흔한 표현 수단은 언어다. 그러나 앞의 인용문들이 보여주듯 언어가 통증을 만족스럽게 전달할 수 있느냐에 관해선 비관하는 이들이 많다. 혹은 최소한 그건 논쟁거리다.(51-55p)

 

 

만성 통증이 있는 많은 환자들은 그들이 괴로움 호소가 가족, 친구, 또 의사들까지도 그저 지치게 하고 마침내는 열받게까지 한다는 것을 재빨리 배운다. 침묵은 아무도 보거나 증명할 수 없는 통증에 대한 흔한 반응이 된다.

 

급성 통증이 울부짖게 한다면 만성 통증은 이와 같은 관계의 역학을 거쳐 침묵하게 한다. 이 침묵은 언어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한계 때문이고(앞에 적은 일화에서 당시 나는 언니에게 이미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었기에 신세타령까지 할 수는 없었다), 의료 서비스의 한계, 자존감의 한계 때문이다. 팻말을 항상 들고 있을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곁에 남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먼저 인정과 관심을 구걸하는 자신의 비굴함과 비참함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환자들은 점점 말하지 않는 법을 익힌다. 수면 아래의 삶을 혼자 견디는 데 적응한다. 어떤 검사 결과나 수치로 표지되지 않는 병의 경과와 영향을 많은 부분 조용히 겪어간다.

하지만 이 조용한 표면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혀 조용하지 않다.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그건 전적이고 폭력적인 과정이라고. '전적'인 이유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구석이 없기 때문이고, '폭력적'인 이유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정성을 경험하기 때문이다.(72-73p)

 

 

그러나 그 모든 그림 중 고통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바로 이 그림, 피도 칼도 상처도 등장하지 않는 이 그림을 고르겠다.

얼핏 보기엔 평화로운 어촌 마을의 일상을 그린 풍경화로 보인다. 농부는 밭을 갈고 양치기는 양을 몰고 낚시꾼은 낚시를 하고 배는 바다 위를 떠간다. 제목을 보고 나서야 그림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추락하는 이카로스가 있는 풍경>. 화면 오른쪽 물 아래로 사라져가는 두 다리가 이카로스다. 또 양치기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도 알게 된다. 양치기는 아직 하늘을 날고 있는 이카로스의 아버지 다이달로스를 보고 있다.

처음 이 그림을 봤을 때 '천재다!'라며 감탄했다. 내 오랜 관심이 '보이지 않는 내부의 것을 어떻게 그리지'에 있었다면, 피터르 브뤼헐은 내면의 암흑이나 지옥을 그리는 대신 시점을 밖으로 빼내 전환함으로써 고통받는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오히려 정확히 그려내기 때문이다. 태양 가까이 날았던 드문 환희와 영광의 기억을 포함해 모든 것이 사라지는 순간, 한 세계가 사라지는 그 순간은 화면 한구석 사라져가는, 거의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작고 가냘픈 두 다리로 나타날 뿐이다. 너무도 사소하고, 하찮고, 혼자다. 이와 대조적으로 화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변함없이 일상적인 세계의 풍경이다. 이 격차가 고통임을 브뤼헐은 알고 있었다.

(...)

농부는 밭을 간다. 양치기는 양을 친다. 낚시꾼은 낚시를 한다. 배는 항해한다. 밀랍을 녹인 태양도, 소년을 삼킨 바다도 늘 그랬던 것처럼 거기 그렇게 있다. 모든 것이 무너져도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는다.(83-86p)

 

 

고통이 표현 불가능하며 공유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관해 여러 찬동과 논박의 말이 있지만, 내 생각에 많은 경우 문제는 고통을 표현하는 언어와 재현의 한계가 아니라 사람들이 듣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고통뿐 아니라 환희 같은 내저 상태 또한 언어화하기 어려우며 표현하기 위해 직유법을 동원해야 할 때가 많다. 우리는 몸이 '찢어지는 것처럼' '칼로 찌르는 듯이' '두드려 맞은 것같이' 아프다고 말하지만, 몸이 '부푸는 것처럼' '둥실 떠오르는 듯이' '녹아내리는 것같이' 기쁘다고도 표현하지 않는가. 다만 고통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 자체로 충족된 상태인 환희와는 다르게 고통의 호소가 필요의 호소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무언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주목, 이해, 인정, 연민, 공감, 치료, 도움, 지원, 정의, 행동, 변화····· 고통 말하기는 듣는 이에게 요구한다. 고통을 호소하는 말을 듣는다는 것은 크든 작든 자신의 시간과 관심과 자원을 쏟길 요구받는 것이며, 남의 처지에 자신을 놓아보고 공감의 말 한마디를 건네는 일 같은 가장 사소한 연민에 드는 에너지조차 결코 적지 않다. 그리하여 남의 고통을 남의 집 불구경하듯 할 수 없을 때, 시혜적인 위치에서 동정해주며 도덕적 만족감에 뿌듯해하는 일 이상을 해야 할 때, 상대의 고통이 미심쩍거나 충분치 않다고 여겨질 때, 고통과 연민의 대차대조표를 그려보며 문득 억울한 마음이 들 때('내가 힘들 땐 별로 관심 못 받았는데') 사람들은 고통의 청자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화제 전환과 '나도 아프다'와 아픈 사람 비난과 고통의 사소화와 끊어버리는 전화들은 벗어나는 방법들이다.

시인 앤 보이어가 유방암 투병을 하는 동안 어떤 친구들은 관계에서 탈출 버튼을 누르며 이런 말을 남겼다. “너무 곤란하다.” “감당 못 하겠다.” 어려울 때 짐을 나누어 짐으로써 인간이 생존할 수 있다는 당위와 일반론이 내가 짐을 나누어 져야 하는 구체적인 현실이 되면 자기 연민이 타인 연민을 압도하기도 한다. ‘네가 암에 걸려서 내가 힘들다'는 것이다. 연민의 조건도 까다로워진다. 이제 사람들은 아픈 이가 자기 기준과 취향에 맞는 모습으로 아프길 바란다. 다시 앤 보이어의 말. "[우리는 전보다] 더 낫고 더 강하면서도 동시에 가슴이 아려올 정도로 악화한 상태이기도 해야 한다. 우리는 불행은 혼자 간직하고 용기는 만인에게 기부해야 한다." 사람들이 아픈 사람에게 기대하는 바는 어쩌면 다음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마음을 써줄 가치가 있을 만큼 심각하게 아프되 이성적인 모습을 보이며 평정심을 유지하고 병을 농담거리로 삼을 만큼 여유있는 자세를 취하면서 한탄과 한숨은 안으로만 삼키고 안 들리게 울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러나 고무적인 이야기와 깨달음은 내게 다오.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커다란 자원과 관심이 집중되어야 하는 암 환자의 경우와는 달리 만성적으로 아픈 사람의 친구들은 병자와 서서히 멀어지는 것 같다. 새 소식은 아프다는 소식뿐, 얼굴 한 번 보는 것도 여의치 않은 친구는 친구로 남기 어렵다. 점점 연락이 뜸해지는 게 아프다는 상황 때문인지 시간이 흐르며 각자의 인생 행로가 시나브로 갈라졌기 때문인지조차 알 수 없다. 긴 병에 효자 없다. 가끔 마음이 어두워지는 날이면 드는 생각이다. 효자도 없고 친구도 없고 때로는 언니도 없고 엄마도 없다.

 

하지만 나는 아픈 사람의 자기중심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병자의 관심은 자신의 병, 자신의 몸, 자신의 통증, 자신의 증상, 자신의 약, 자신의 치료, 자신의 상실, 자신의 절망, 자신의 걱정, 자신의 외로움에 쏠려 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저런 어려움과 씨름하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눈앞의 사람이 고통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가장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병자다. 자기 몸 안의 비극에 정신을 빼앗긴 그에게는 외부로 쏟을 관심도 에너지도 없다.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는 걸 모두가 알아주길 원하지만, 이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는 거의 모든 관계와 조우에서 상처받고 분노에 찬다.

(...)

나는 또한 아픈 사람의 하소연이 비슷한 내용으로 영원히 계속되는 경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이건 그 사람의 취미가 넋두리라서가 아니라 고통의 속성, 상처의 속성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은 말하게 하며, 애초에 완전히 말로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반복해서 말하게 한다. 고장난 턴테이블처럼 바늘은 마음에 파인 같은 홈만을 긁고 또 긁으며 같은 가락을 재생한다.(89-93p)

 

 

'삶을 이끌어간다lead a life'는 표현이 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노래하는 오래전 가요도 있다. '내 인생의 운전대를 내가 쥐어야 한다'는 스님-작가-구루의 인생 조언도 있다. 내가 알게 된 인생과는 반대다. 삶은 내 몸이라는 상황을 포함하여 내가 던져진 상황 안에서의 발버둥이고, 세계의 작용에 대한 내 반작용의 총합이며, 나는 궤도를 볼 수 없는 롤러코스터에 오른 겁먹은 승객이다.(135-136p)

 

 

물론 우리는 끝을 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살했다. 그는 '병에 진'것인가? 해피엔딩이 아니기에 불우하게 산 사람이 되는가? 조울병은 병이며, 무섭고 지독한 병이다. "다시 돌아오기에는 이번엔 너무 멀리 가버린 것 같아." 언니에게 남긴 유서에 울프는 썼다. 이번엔. 그 한 번의 돌아오지 못함이 인생 전체를 검게 칠하는 결말은 아닐 것이다. 더 이상 돌아올 수 없을 때까지는 계속 돌아온 게 아닌가.

 

한 해가 오고 또 오고 계속 올 거고. 아 이런, 시간은 너무도 길게 이어지고 그 긴 시간을 바라보면 늘 겁을 먹는 것 같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계속 나아간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열다섯 살의 버지니아 울프가 쓴 이런 일기를 마주친다.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했던 이부 언니마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해의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에 새긴 문장들이다. 그후 울프는 사십삼 년을 더 산다. 이 초년의 일기에 쓴 대로, 두려움을 마주하고 용기를 내고 계속 걸어가기로 결단하기를 거듭한 삶이었다.

(...)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한 1941년 3월 당시 그는 책을 완성한 후에 언제나 겪는 실패의 느낌에 우울해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독일군 전투기의 폭격이 이어지고, 울프 부부의 런던 집이 파괴되고, 시골집 주변에도 폭탄이 떨어지던 때였다. 나치의 영국 침공이 임박한 듯 보였다. 유대인이었던 남편 레너드와 버지니아는 독일군 상륙을 대비하여 자살 방법을 논의하며 자살에 쓸 아편을 구해두기도 한다. 기분의 저조가 없었더라도 어려운 시기였고 종말이 가까이 있는 듯 보인 때였던 것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히틀러가 죽였다고, 울프가 세계대전의 희생자라고 생각한다.(202-203p)

 

 

질병이나 삶에서 마주치는 다른 재앙 때문에 언제나 놀라겠지만, 그래도 나는 괜찮을 것이며 어디로 가든 괜찮을 것이다. 어디로 가든 그곳에서 새로운 나의 일부를 찾을 것이고, 선에 이바지할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새로운 차원의 사랑을 발견할 것이다. 신은 창문을 닫으시면서 문을 여신다.

(...)

천 번쯤 들은 것 같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어요'라든지 '신께서 더 나은 이야기를 쓰고 계신 거예요' 같은 말들. 보아하니 신은 돌아다니면서 문을 닫고 창문을 여느라 바쁜 것 같았다. 아무리 열고 닫아도 질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말에서 중요한 건 언제나 맥락이지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겐 더욱 그렇다. 누가 어떤 상황에서 발화하여 어떻게 전달된 말인가에 따라 똑같은 말이 비수가 되기도 하고 동아줄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자신의 불행에 압도되어 있는 아픈 사람은 애초에 좋은 대화 상대가 아니다. 이 고통을 누가 안다고 해도 화가 나고(네가 뭘 알아) 모른다고 해도 화가 난다(이걸 어떻게 몰라). 뭘 먹으라든가 먹지 말라는 말, 뭐가 몸에 좋다는 말에도 진절머리가 난다(내가 안 해본 게 있을 것 같냐). 건강한 사람이 편안하게 호흡을 하며 사지를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사실에조차 비뚤어진 마음이 들 수 있는 게 아픈 사람이다.

(...)

그러나 한편으로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좀전에 나는 중병, 만성적인 병,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을 겪은 실제 또는 픽션 속 여덟 사람의 말을 이미 소개했으며, 이들의 말이 나에게 그랬듯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줄 것이라는 사실이다.

(...)

무엇보다, 막을 새도 없이 파고드는 가족이나 지인들의 말과는 달리 당신은 선택할 수 있다. 책은 덮으면 그만인 것이다. 의학적 처치 때문이든 주변 사람들 때문이든 병 자체 때문이든 끊임없이 몸과 마음이 침입당하는 느낌에 시달리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소통에 목마른 투병인에게, 사적으로 별관계가 없는 사람의 말을 듣거나 듣지 않길 선택할 수 있다는 독서의 조건은 아플 때 책을 오히려 가장 가깝고 편한 친구로 만든다. 당신은 이 글도 덮어버릴 수 있다. 이 사실이 내게 계속 쓸 용기를 준다.(209-212p)

 

 

조지 클루니는 보드카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래, 계속 가봤자 뭐할 거야. 살아봤자 뭐하겠어. 그렇지만 일단 가기로 마음먹는다면 계속 해봐야지." 무엇이 날.

깨달음과 결단으로 이어지는 익숙하고 바람직한 서사로 글을 끝맺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점점 작아지는 엄마의 몸, 그럼에도 여전히 나를 미치게 하는 엄마의 잔소리("간절히 기도하고 성령 받아라"), 잇몸 퇴축과 치간 칫솔과 홍대 근처 좋은 치과가 주요 주제인 전화 통화, 아이허브 사이트에서의 영양제 쇼핑, 초등학생들의 머릿속에 영어 현재완료 시제를 쑤셔 넣으려는 나의 닦달, 장마철에 집으로 들어온 돈벌레와 에프킬라, 눈이 아파 급격히 줄어든 트위터 사용 시간, 돈 걱정, 허리 걱정, 녹아버린 빙하, 욕실 청소, 과탄산소다, 조카의 입시 준비, '점심에 뭐 먹지', 양파 다듬기, 코로나 백신, '계속할 수 있을까'와 '계속해야 한다'를 오가는 글쓰기, 바로 이 글, 자신에게조차 감추고 싶은 이 우울한 병자의 글. 내 사랑은 더 낮고 넓어져야 하는지 모른다. 만물이야. 이번엔 이것들 사이에 발을 꽂아 넣을 순 없을까. 나를 여기 이 흙에 심을 순 없을까. 마침내 그럴 순 없을까.(226-227p)

 

 

 

ㅡ 메이, <아프다는 것에 관하여> 中, 복복서가

,

2024/12/10

 

카레르가 3주만에 쓴 데뷔작이라고 한다.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계속 읽으면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져서 여러 번 끊어 읽었다. 책의 완성도는 나무랄 데 없지만 정신적으로 상당히 몰아가는 책이라 힘들었다. 왕국이나 리모노프도 언젠가는...

 

 

 

그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사무실이나 집에서 그를 정신병자 수용 시설에 처넣지 않고 없었던 일로 하면서 전처럼 다시 시작하자고 암묵적인 합의를 하면, 아마 삶은 다시 시작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은 영원히 망가져 버릴 것이다. 이 일에 대한 기억 때문만이 아니라 대화 도중에 이 끔찍한 일이 다시 튀어나올 수 있다는 위험, 사건의 후유증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 때문에 말이다. 그가 두 사람의 공통된 기억, 어떤 사람 혹은 물건에 대해 아무 뜻 없이 언급할 때 아네스가 창백해지면서 입술을 깨물고 한참 말이 없는 것만 봐도 <또 시작이구나>하게 될 것이다. 세상이 다시 와해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런 지뢰밭 위에서의 생활, 언제 다시 우르르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채 더듬더듬 앞으로 나가는 생활, 이런 생활을 어느 누가 견딜 수 있겠는가? 그는 자신을 상대로 음모가 꾸며졌다는 터무니없는 가정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도망쳤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ㅡ 엠마뉘엘 카레르, <콧수염> 中, 열린책들

,

2024/12/6

 

 

'자기만의 방'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그때도 느꼈지만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 자체가 사건 중심의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빨리 읽으려고 하면 쉽게 지치는 것 같다. 인내심을 가지고 최대한 소설 속에서 수시로 바뀌는 등장 인물의 내면에 감정이입을 하니 생각보다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 이유에는 가독성 높은 번역의 덕도 있을 듯하고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덜 낯설어서일 수도 있겠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파도', '등대로', '세월' 중 한 권 정도는 더 읽어봐야지.

 

 

 

 

군중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원한 국가의 상징인 국왕과 말을 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그 존재가 누군지는, 후에 시간의 잔해들을 면밀히 조사하는 호기심 많은 골동품 연구가들만이 알 수 있으리라. 그때 런던은 풀이 웃자란 오솔길일 것이고, 이 수요일 아침 인도를 따라 질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결혼반지를 낀 뼈다귀와 금이빨밖에 남지 않은 채, 먼지에 덮여 있으리라. 그때서야 자동차 속의 얼굴이 누구인지 알려지게 되리라.(27p)

 

 

하지만 흐르는 시간이 두려웠다. 브루턴 부인의 얼굴, 그 무표정한 돌 같은 얼굴 위에서 시곗바늘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 해 한 해 베어져 나간 그녀의 인생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 그 남은 시간도 젊은 시절처럼 삶의 색과 맛과 분위기를 만끽하며 보낼 순 없으리라. 젊었을 땐 어느 방에 들어가면 그 방이 자신으로 가득 차는 듯했다. 그래서 들어가기 전 문턱에서 잠시 머뭇거릴 때면, 종종 황홀한 전율을 느끼곤 했다. 발아래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는 바다로 뛰어들 준비를 하는 잠수부처럼, 무언가를 부술 듯 위협하다 부드럽게 표면 위로 솟구치는, 진주빛 수초를 뒤집었다 덮었다하는 파도를 내다보는 심정으로.(47p)

 

 

지금까지 수백만 번이나 거울을 들여다봤지만, 그럴 때마다 늘 얼굴에 약간의 경련이 일었다. 그녀는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입술을 오므렸고, 그러면 날카롭고, 화살같이 뾰족하고, 명확한 모습이 되었다. 그 모습은 자신의 바람을 그러모은 모습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양립할 수 없는 부분들로 이루어진 존재인지는 그녀만이 알고 있었다. 세상에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언제라도 만남의 장소를 제공하고, 지루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찬란한 빛을 제공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존재였다. 그녀의 도움을 받는 젊은이들에겐, 한결같은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다른 면모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결점이나 질투심, 허영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찬에 초대받지 못해 들끓는 감정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감정은 정말 비열하다고 (마침내 머리를 빗으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그나저나 그 옷은 어디 있지?(57p)

 

 

"내게 진심을 말해줘, 진심을." 그가 아무리 계속 그렇게 말해도,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녀는 돌처럼 굳어버린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진심을 말해달라고." 그는 되풀이해 말했다. 그때 갑자기 <타임스>지를 든 늙은 브라이트코프가 불쑥 나타나더니, 입을 벌린 채 그들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냥 가버렸다. 그래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진심을 말해줘." 그는 되풀이해 말했다. 딱딱한 것에 부딪혀 으스러지는 심정으로. 그녀의 표정은 온화하지 않았다. 강철 같고, 부싯돌 같았다. 뼛속까지 뻣뻣해 보였다. 그는 몇 시간이나 눈물을 흘리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마침내 그녀가 "소용없어요, 소용없어. 이게 마지막이에요"하고 말했을 때, 뺨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떠나버렸다.(94-95p)

 

 

늙는다는 것이 가져다주는 보상은 바로 이거야. 열정은 여전하지만 지난날의 경험을 천천히 불빛 아래 돌려 볼 수 있는 힘을 갖게 됐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존재에 최상의 향기를 더해주는 힘이지.

끔찍한 고백이지만ㅡ그는 다시 모자를 썼다ㅡ쉰세 살이 되고 보니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이 필요치 않았다. 인생 그 자체, 인생의 순간순간, 그것의 방울방울, 여기, 이 순간, 지금 이 햇빛 속에, 리젠트 공원에 있는 것으로 충분했다. 정말이지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했다. 힘이 남았다 해도, 인생의 참맛을 보기에는 남은 인생은 너무 짧을 것이다. 그 남은 세월 동안 생의 기쁨을, 생이 지닌 그늘을 미묘하게 추출해내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그것들이 전보다 더욱 견고해 보이고, 더 이상 개인적이지 않게 다가올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클라리사가 준 고통도 예전만큼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115-116p)

 

 

언제나 똑같았다. 하루가 지나면 다른 하루가 찾아왔다.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야만 했고, 하늘을 쳐다봤고, 공원을 거닐었고, 휴 휫브레드를 만났고, 그러고 집에 돌아오니 갑자기 피터가 찾아왔다. 또 리처드가 저 장미를 가져왔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러다가 죽음이 온다니, 언젠가는 끝이 오고야 만다니, 차마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녀가 인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 모든 순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178p)

 

 

그녀는 아픈 사람들으 좋아했다. 킬먼 양이 당신 세대 여성에게는 모든 직업이 열려 있다고 했으니, 의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농장주가 되어도 좋을 것이다. 동물들도 종종 아프니까, 1천 에이커쯤 되는 땅을 가지고 사람을 부리는 농장주가 되어도 좋을 것이다. 그럼 자신이 부리는 사람들이 사는 오두막에도 찾아가볼 것이다. 이게 서머실 하우스구나. 나는 아주 훌륭한 농장주가 될거야. 이런 생각이 든 것은 킬먼 양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거의 전적으로 서머싯 하우스 때문이었다. 그 커다란 회색 건물은 너무나도 화려하고 장중했다.(198-199p)

 

 

그는 혼자 있어야 자신의 감정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야 울 수도 있었다. 이런 묘한 감수성 때문에, 그는 인도의 영국인 사회에서 파멸했다. 적당한 때에 울거나 웃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런던의 우체통 옆에 서 있는 그는, 지금도 자기 안에 울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 그리고 오늘 하루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클라리사를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된 오늘 하루의 무게가 강렬한 더위로 더욱 무거워졌고, 뒤이어 런던에서 받은 이런저런 인상이 한 방울, 한 방울, 아무도 모르는 그만의 지하실 바닥에 괴어 그를 피곤하게 하는지도 몰랐다. 그런 완전하고 침범할 수 없는 은밀함 때문에, 인생은 깜짝 놀랄 만한 구부러진 길과 후미진 곳으로 가득 찬 비밀의 정원인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바로 그런 순간들이 우리를 놀래키고 숨 막히게 만드는 것이다. 대영박물관 건너편 우체통 곁에 서 있을 때도, 그는 바로 그런 순간을 맞은 것이었다. 즉 앰뷸런스로 인해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그는 마치 감정의 세찬 흐름에 빨려 높은 지붕 위까지 올라간 것 같았다. 그리고 빨려가지 않은 남은 몸뚱이는, 하얀 조개들이 흩어져 있는 해안가에 벌거벗은 채 남아 있는 듯했다. 바로 그런 감수성이, 인도의 영국인 사회에서 그가 파멸하게 된 원인이었다.(220-221p)

 

 

그녀는 또한 섀프츠버리 거리를 올라가는 그 버스에 앉아서, 자신이 모든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했었다. 의자 등받이를 탁탁 치며 '여기, 여기, 여기'가 아니라 모든 장소에 내가 있는 것 같다고 손을 휘두르며 말했었다. 저 모든 것이 나 자신이라고, 때문에 나를, 아니 그 누구라도 제대로 알려면, 그를 완성시켜준 사람들이나 장소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녀는 자신이 한 번도 이야기해본 적 없는 사람들, 예를 들어 거리를 지나가는 여인이나 카운터 뒤에 서 있는 남자에게, 심지어는 나무들이나 헛간 같은 것에서도 이상한 친근감을 느낀다고 했었다. 그것은 결국은 초월적인 이론이 되었고, 거기에 죽음에 대한 공포까지 작용하여 그녀는 결국 다음과 같은 것을 (회의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믿게 되었다. 혹은 믿는다고 말하게 되었다. 우리의 외양, 즉 밖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보이지 않는 부분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덧없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부분만이 널리 퍼져 나가 계속 살아남아서, 죽음 뒤에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달라붙거나 어떤 장소들에 출몰하게 될 것이라고. 아마도, 아마도.

거의 30년 동안 그녀와 우정을 유지했던 그에게, 그녀의 그런 이론은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떠나 있기도 했고 여러 일들로 방해도 받았기에(예를 들면, 오늘 아침에도 그가 막 클라리사와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을 때, 다리가 긴 망아지 새끼같이 날씬한 엘리자베스가 말없이 들어왔었다) 그들의 실제 만남은 짧고, 파편적이며, 때때로 고통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만남들이 그의 삶에 미친 영향은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신기할 정도로.(221-222p)

 

 

사실 그는 가끔 나타나서 맴돌다가 쏜살같이 내려와서 단숨에 먹이를 잡아채는 매나 솔개처럼, 즉 스스로 자족하는 고독한 인생을 살고 싶었다(여러 개의 열쇠들과 서류들을 분류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물론 그는 어느 누구보다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고 있었다(조끼의 버튼을 채웠다). 그것이 그의 파멸의 원인이었다. 그는 흡연실에 가지 않을 수가 없었고, 대령들과 어울리긴 좋아했고, 골프와 브리지 게임을 좋아했고, 무엇보다 여자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과의 교제는 아름다웠고, 그들의 사랑은 성실하고 대담하고 위대했다. 비록 장애물들이 있었지만(봉투들 위에는 머리카락이 까만, 반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들과의 만남은 삶의 절정에서 피어나는 귀하고도 눈부신 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에게조차 전적으로 만족할 수 없었고, 언제나 상황을 살폈다(클라리사가 그에게서 무언가를 영원히 앗아갔기 때문이었다). 물론 데이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기질상 그는 질투심으로 크게 화를 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묵묵한 헌신에 아주 쉽게 싫증을 냈고, 다양한 사랑을 원했다.(230-231p)

 

 

샐리의 목소리는 그 옛날처럼 황홀한 울림도 없었고, 눈빛도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그래도 클라리사의 눈엔 시가를 피우던 샐리가, 스펀지가 들어 있는 가방을 가지러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복도를 가로지르던 샐리가 눈에 선했다.

(...)
그냐는 대담하고 무모해서 모두를 집중시키며 야단법석을 떠는 타입이었기에, 그런 일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그녀가 죽을 거라고, 순교자처럼 죽을 거라고, 끔찍한 비극으로 인생의 막을 내릴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랬던 그녀가, 놀랍게도 결혼식 때 상의에 커다란 꽃 장식을 달았던, 맨체스터에 큰 방직 공장을 가지고 있는 대머리 남자의 부인이 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게다가 아들을 다섯이나 낳았다니!(264-265p)

 

 

우리는 계속 살아가겠지(그녀는 다시 손님들에게 돌아가야 했다. 방들은 여전히 붐볐고, 새로운 손님도 계속 오고 있었다). 우리는(그녀는 하루 종일 부어턴을, 피터를, 샐리를 생각했었다) 계속 늙어가겠지. 그녀에게도 지켜내고 싶은 중심의 무언가가 있었지만, 그것은 쓸데없이 복잡한 일상 속에서, 잡담에 파묻히고 거짓말에 더럽혀지기도 하며 녹아 없어졌다. 하지만 그 남자는 그 중심을 지켜냈다. 죽음은 그것을 지켜내려는 저항이었다. 죽음은 그 중심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소통의 시도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신비하고도 자꾸만 손에서 빠져나가는 삶의 중심에 도달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기며, 점점 더 그 중심에서 멀어져가, 거기에 접근하면서 느꼈던 황홀감도 잊어버린다. 그렇게 황폐해져가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도, 믿을 수 없이, 클라리사는 요즘처럼 행복해본 적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을 천천히 즐기고 싶었다. 의자들을 바로 놓고 책꽂이에 책을 꽂으며,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젊은 시절의 즐거움을 상실한 채, 일상에 파묻혀 자기 자신을 잃으며 살아가다가, 문득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면 너무나도 큰 희열에 휩싸였다. 부어턴에서도 사람들이 모두 떠들고 있을 때, 혼자 밖으로 나가 하늘을 쳐다보곤 했었다. 런던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후에도,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하늘을 보려고 창가로 걸어 나갔었다.(269-271p)

 

 

 

ㅡ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中,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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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4

 

 

사이비 교주 취재 담당 기자로 30년을 일한 기록을 모은 취재 무용담. 현상에 대한 분석이나 통찰은 없고 그냥 자신이 경험한 취재 에피소드 나열에 그쳐 식상하다.

사이비 교주나 사이비 단체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저자가 제안하는 현실적인 방법 중 하나가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라니 참으로 기독교인다운 발상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사람들은 왜 사이비 종교에 빠질까? 나는 강의할 때 그 이유의 핵심을 '사랑' 때문이라고 말한다. 너무도 뻔한 말일 수 있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사랑의 결핍 때문에 사이비에 빠지게 된다.(214p)

 

사람들이 사이비에 빠지는 많은 이유 중 하나일 수는 있으나 그게 저렇게 단순하면 얼마나 좋을까...

 

 

사이비 교주들을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해 볼 수 있었다. 하나는 '사기꾼'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신 이상자'다.

사기꾼 교주는 말 그대로 사기를 친다. 그들의 주된 목적은 돈이나 여자다. 결코 진리가 아니다. 사기꾼 교주의 가장 큰 특징은 주 자신이 스스로 신이 아닌 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오직 신의 이름을 이용할 뿐이다. 반면에 정신 이상자 교주는 정말 자신이 신이거나 신과 같은 존재인 줄로 착각한다. 이들은 대체로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려고 한다. 그런 교주의 수는 많지 않다. 또 오래 존립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돈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서이다.(232-233p)

 

 

요즘 교주와 과거 교주 사이에는 어떤 특징들이 있을까. 먼저 자체 교리로 무장하고 있느냐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요즘 교주들은 과거에 비해 이론(교리)으로 무장하고 있는 경향이 짙다. 요즘 교주들은 나름대로 체계적인 교리를 구성해 놓았다. 신도들에게도 교리공부를 강조한다. 기독교 옷을 입고 있는 사이비는 <성경>을 사용하고, 불교 계통의 사이비는 <격암유록> 등을 주로 많이 사용한다.

(...)

둘째는 사이비 교주들의 반대 세력 대응 태도다. 20~30년 전만 해도 교주들은 신도들을 동원해 자신을 비판하고 연구하는 기관이나 신문, 방송 언론사 등을 직접 찾아가 물리적으로 실력 행사하는 일이 잦았다. 출입문을 부수거나 책상을 뒤엎고, 심지어 연구원과 기자들을 폭행하기도 했다. 공영 방송국을 점령하여 방송에 차질이 발생한 적도 있었다. 심지어 한 사이비 이단 연구가가 모 신도에 의해 칼에 찔려 사망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 교주들은 대체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어설픈 물리적 행동은 오히려 자신들에게 손해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으며, 또 개인 휴대전화가 언제든 녹음과 영상 촬영으로 동원될 수 있는 시대다.

그 대신 법적 고소 사건이 대폭 늘었다. 언론사를 상대로는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소송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것이 요즘 교주들의 특징이다. 따라서 기자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취재할 때 심증보다 물증 중심으로 진행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이비 교주들 중 어떤 이는 신문 방송에 자신을 비판하는 보도가 나올 경우 무조건 소를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법정 싸움을 하면 자신이 패소할 것이 뻔한데도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이유는 법적 승소가 아니라, 내부 단속용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을 비판하는 신문 방송 보도로 인해 동요되는 신도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게 주된 목적이다. 교주는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모두 거짓말이고, 또 증인들도 돈 때문에 사주받은 것이라고 떠든다. 신도들을 대거 동원하여 교주 결백을 증명한다는 집회를 갖기도 한다.(251-256p)

 

 

 

ㅡ 장운철, <나는 교주다> 中, 파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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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30

 

 

'필경사 바틀비'는 예전에 한 번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 당연하게도 세부가 기억나지 않아서 다시 읽었다. 생각보다 웃긴 부분이 있는 소설이었다. 처음 읽은 '선원 빌리 버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어떤 것을 묘사할 때 종교적, 역사적 맥락을 알아야 명확하게 이해가 가능한 장황한 비유를 많이 사용했다는 것 정도. 물론 몰라도 내용 이해에 크게 무리는 없지만 그래도 놓치는 부분들이 있겠지. 이 시기에는 이런 정보는 기본 교양으로 깔고 갔던 건가 싶기도 하고. 가령 아래와 같은 식이다.

 

 

그렇지만 클래거트의 질투는 통속적인 형태의 질투가 아니었다. 빌리 버드에 대한 그의 질투는 불안한 마음으로 다윗이라는 잘생긴 청년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사울 왕의 얼굴을 찡그리게 만든 근심에서 나온 질투 같은 것과도 완전히 달랐다.(147p)

 

함장의 준엄한 눈길을 잠시 벗어난 클래거트는 묘한 표정으로 함장의 안색을 지켜봤다. 자신의 전략이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는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고, 막내 요셉을 질투하던 형제들의 대표가 상심한 아버지 야곱을 속이려고 염소 피가 묻은 외투를 보여 주며 지었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182p)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그 사건에 관한 정보를 사건 발생 현장, 즉 후갑판 함장실 내부로만 한정시켰다는 사실은 러시아 야만의 황제 표트르 대제가 건설한 수도의 왕궁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했던 비극적인 사건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채택한 방침과 어느 정도 비슷한 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196p)

 

빌리의 야만성은 현재 입고 있는 옷을 제외하면 로마의 게르마니쿠스 장군을 위한 개선식에서 살아 있는 전리품으로서 행진에 포함됐던 동족인 영국인 포로들의 야만성과 비슷했다.(225p)

 

 

앞으로도 내가 살면서 모비딕을 읽을 일은 없을 듯한데 짧은 소설로나마 허먼 멜빌을 느껴본 걸로 만족한다.

 

 

 

 

 

맨 처음 저의 감정은 순수한 우울함과 진지한 연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바틀비 군의 외로운 처지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면서 그 우울함은 서서히 공포로 바뀌었고, 연민은 혐오로 변해 갔습니다. 비참한 정황을 직접 목격하거나 그에 대해 생각하게 될 때 그 정도가 일정 선을 넘지 않는 한에서만 애정을 느끼게 되지만, 그 선을 넘어서면 더 이상 애정이 우러나지 않게 된다는 말은 정말 맞는 말이기도 하고, 또 실망스러운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본성에 내재한 이기심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단언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현상은 오히려 과도한 기질적 질환을 치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절망감에서 기인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에게는 연민이 곧 고통인 경우가 흔합니다. 그리고 그런 연민이 실질적인 구원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지면, 그 연민을 미련 없이 버리는 것이 상식에 맞는 일입니다.(41-42p)

 

 

마침내 저는 제가 직업상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제가 사무실에 두고 있는 이상한 존재와 관련해 의아해하며 수군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상당히 우려스러웠죠. 그러고는 이 친구가 장수할 가능성도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됐습니다.(59p)

 

아 진짜 뻘하게 터졌네. 이 아저씨 재밌는 사람이네 ㅋㅋ

 

 

그렇게 지어낸 일화는 이 이야기가 전하려는 사건에 깃들어 있는 수수께끼를, 그게 무엇이든 간에, 다소 흥미로운 방식으로 설명하는 데 써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런 식의 일화는 없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앞으로 전하게 될 사건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그 원인은, 그 근본 자체에서 보자면, 천재적인 괴담 작가 앤 레드클리프가 지어낸 「우돌포의 비밀」이란 작품과 같은 종류의 이야기에 들어 있는 것에 못지않을 만큼 신비하고 원초적인 요소로 가득차 있다. 일부 극소수의 사람들은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사실만으로 즉각적이고 깊은 적개심을 느낀다. 이런 적개심보다 더 신비로운 것이 있을까?(140p)

 

 

어쨌든 이런 사악함은 야만성이라는 비천한 속성의 덩어리가 전혀 들어 있지 않고 일관되게 지성에 의해 좌우되는 종류의 사악함이기 때문에 대표적인 사례를 구하려면 다른 곳을 찾아봐야 한다. 문명은, 특히 금욕적인 종류의 문명은 자연적인 사악함의 좋은 토양이 된다. 이런 환경에서 그것은 점잖음이라는 망토 속에 몸을 숨긴다. 이런 사악함을 조용히 도와주는 부정적인 덕목들도 있다. 또한 자연적인 사악함은 술이 그 안에 들어오도록 경계를 게을리하는 법이 없다. 그 자체에 속하는 자그마한 악이나 죄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이런 유의 사악함은 그런 사소한 악이나 죄악 같은 것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데서 엄청난 자부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돈을 추구하거나 탐욕스럽지 않다. 간단히 말해, 여기서 말하는 사악함이란 비천한 것이나 감각적인 것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종류의 사악함이다. 그것은 진지하며, 그렇다고 냉소적이지도 않다. 인간에 대해 아첨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폄훼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대표적인 본보기에서 이 예외적 본성을 잘 드러내주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자연적인 사악함을 가진 사람은 안정된 기질과 신중한 몸가짐을 보이며, 그래서 그 사람을 이성의 법칙을 충실하게 따르는 마음의 소유자로 착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실제 마음속에서는 이성의 법칙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자 몸부림치고 있으며, 이성을 사용하더라도 오직 비합리적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교묘한 수단으로서만 사용하는 선에서 그친다. 다시 말하자면, 이런 사람이 현명하고도 건전한 그리고 차분한 판단을 동원해서 이루려 하는 목적은 그 터무니없음의 정도에서 광기가 개입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성격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이다. 그것도 가장 위험한 부류의 미친 사람들이다. 이들의 광기는 연속적이지 않고, 어떤 특정한 것에 촉발되어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이 광기는 거의 자폐적이라 할 정도로 잘 보호되어 은밀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가장 활발하게 작동할 때조차 보통 사람들은 이를 제정신과 구별하기 어렵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어떤 것이 되었건 그 목적이 절대로 발설되지 않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에게 그 목적을 달성하는 방식과 실제 드러나는 달성 과정은 언제나 완벽하게 합리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143-144p)

 

 

이미 성숙한 나이의 선원이라도 특정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서툰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165p)

 

 

한 무명 작가는 이런 구절을 남겼다. "전투가 벌어진 뒤 사십 년이 지나서 비전투원이 그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어야 했는지를 논하기는 쉽다. 자욱한 포연 속에서 쏟아지는 총탄을 무릅쓰며 그 전투를 실제로 지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현실적 측면과 도덕적 측면 모두를 고려해야 하고, 게다가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꼭 필요한 다른 위기 상황과 관련해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이다. 안개가 짙을수록 쾌속 증기선은 그만큼 더 위험해지며, 그렇기에 누군가를 치어 죽일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속도를 높여야만 하는 것이다. 선실 안에서 아늑하게 앉아 카드 게임이나 하고 있는 사람들은 잠도 못 자고 함교를 지키는 사람들이 느끼는 부담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법이다."(213p)

 

 

 

 

ㅡ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선원 빌리 버드>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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