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6/8
다방면에 관심을 가진 특이한 이력의 저자가 다방면의 사례를 바탕으로 연대가능성에 논하는 책. 책을 읽기 전부터 많이 들었던 '오배'라는 개념ㅡ엄밀히 말하면 데리다의 개념이지만ㅡ과 '관광'을 연결시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 게 설득력도 있고 재미있다.
이 책에서 로티는 주로 하버마스와 푸코의 대립을 다루지만 이를 하버마스와 데리다의 대립으로 치환해도 문제는 없다. 셋의 '타자'관 차이를 아주 간략히 요약하면 이성을 통해 타자와 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하버마스(근대주의자)고, 타자란 서로 알 수 없는 존재기 때문에 타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데리다(포스트모더니스트)며, 애초에 타자의 정의를 심화해 봤자 의미가 없으니 각 국면마다 다른 뜻으로 사용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로티(실용주의)다.(34-35p)
관광이 성립하려면 산업 혁명이 진전되어 노동자 계급이 힘을 갖고 이들의 생활 양식에 여가가 포함되는 큰 변화가 필요하다. 달리 말해 대중 사회와 소비 사회가 형성되어야 한다. 대중 사회와 소비 사회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20세기 사회를 지칭할 때 쓰이지만 그 맹아는 19세기 중반에 나타났다. 그리고 여기서 관광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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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와 라르센은 구체적으로는 1840년대에 시작된 잉글랜드의 해변 리조트 개발을 그 시초로 본다. 19세기에는 노동자 사이에 해수욕이 유행해 해안의 한적한 마을이 급격히 도시화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는 귀족이 독점하고 있었던 18세기적인 온천욕 치료를 대체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해수욕은 순수한 오락이 아니라 온천욕 치료에 가까운 것으로 인식되었다.(44-45p)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홈그로운 테러리스트나 외로운 늑대라고 불리는, 선진국 내부에서 조직적 배경 없이 고독하게 범죄를 준비하는 새로운 유형의 테러리스트다. 그들에게는 이데올로기가 없다. 표적도 정치인이나 경제 요인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이 21세기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반 대중 자체를 공격한다. 런던 만국박람회에 대중 요금으로 입장하고, 돈 한 푼 쓰지 않고 산책하며 파리의 파사주를 즐기던 노동자 계급의 후손을 표적으로 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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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들의 동기를 '진지하게'고찰하면 고찰할수록 헛돌게 된다. 이들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고 때로는 자살까지 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진지'하다. 사람의 생사만큼 진지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 동기를 파헤치면 도무지 '진지하다'고 할 수 없는 천박함에 당도하게 된다. IS(이슬람국가)가 인터넷에 공개한 할리우드 영화 뺨칠 정도로 과도한 편집을 거친 처형 동영상을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진지함'과 '경박함' 사이에서 맴도는 이 감각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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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스트의 동기를 '진지하게' 찾아내려는 것 자체가 그들의 행동을 볼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 원리를 언어화하기 위해서는 일단 '진지함'과 '경박함'의 경계를 무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관광객적인 것과 정치의 관계를 근본부터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61-62p)
내 생각에 어느 시기(대략 1995년 이후)부터 오타쿠 계열 콘텐츠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처음부터 2차 창작의 상상력을 내면화하게 되었다. 2차 창작 시장이 일정 규모를 넘으면 모든 작가가 2차 창작을 통해 재해석될 가능성을 미리 고려하게 되고, 그런 고려를 바탕에 두고서 캐릭터를 만들면 상업적 성공 가능성도 높아진다고 판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시장에서 유통되는 스토리나 캐릭터가 독특한 방향성을 갖게 된다. 캐릭터 설정이나 디자인은 손쉽게 2차 창작할 수 있게 '모에'화하고, 스토리도 처음부터 스핀 오프(파생 작품)를 만들기 쉽게 부품화되는 데이터베이스화가 진행된다. 특정 게임 장르에서는 스토리의 2차 창작(재해석)을 미리 고려한 결과, 같은 사건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루프(시간 반복) 모티프가 유행했다.
이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지극히 일반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오타구 문화만 그런 것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한 작품이 오로지 그 자체의 가치만으로 평가받고 유통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모든 작품은 '다른 소비자가 어떻게 평가하느냐'그리고 '다른 소비자는 내 평가를 어떻게 여기느냐'등과 같은 '타자의 시선'을 내포한 형태로 소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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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용어를 모른다 해도 페이스북의 '좋아요' 기능을 생각해 보면 그 본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마음에 드는 게시물을 보고 소박하게 '좋아요'를 누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좋아요'를 누르면 다른 사람에게 높이 평가받은 게시물에 적극적으로 '좋아요'를 누른다. 그래서 네트워크 전체로 보면 정치처럼 사람에 따라 찬반이 나뉘는 골치 아픈 화제를 피해 고양이 사진이나 요리 사진처럼 '무해'한 콘텐츠에 '좋아요'가 몰리게 된다. 우리는 지금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메커니즘이 전례 없이 맹위를 떨치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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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는 작품을 분석할 때 먼저 작품 자체를 평가하고 그런 다음 작품의 소비 환경을 살피는 상식적인 순서를 적용할 수 없다. 작품 자체가 이미 소비 환경을 감안해 제작되었으므로 분석자도 이를 고려하며 작품을 다루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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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영화, 만화 등 장르를 막론하고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은 대체로 작품 자체의 독해를 중시하고 소비 환경의 분석은 '사회학적인 것'이라며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지금도 문예지에는 그런 시대착오적인 비평이 넘쳐 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작품의 내부(작품 자체)와 외부(소비 환경)를 분리해 전자만을 대상으로 삼아 '순수하게' 비평하거나 연구하는 태도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외부가 내부에 어떤 형태로 포함되는지 그 역동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비평도 연구도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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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이 책의 용어로 표현하면 오늘날 커뮤니티 분석이나 지역 연구를 할 때는 처음부터 관광객의 시점에 입각한 분석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주민이 자각 없이 살아가는 '소박한 토지'가 먼저 존재하고, 나중에 관광객이 그곳을 발견해 경제적 이익이 생겨나면 대신 소박함이 상실된다ㅡ이것이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변화의 순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현대 소비 환경 속에서는 원작이 먼저 존재하고 나중에 2차 창작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원작자는 처음부터 2차 창작을 철저히 염두에 두고 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처음에 '소박'한 주민이 있고 뒤이어 관광객이 오게 된다는 순서도 실은 전도된 것이 아닐까? 아니, 오히려 지금은 모든 장소가 관광객의 시선을 이미 내면화해 시가지나 커뮤니티를 만드는 쪽으로 바뀌고 만 것이 아닐까? 달리 말해 모든 것이 테마 파크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문제는 신중히 검토할 가치가 있다.(68-71p)
지금 세계에서 유통되고 있는 것은 후쿠시마의 2차 창작인 Fukushima뿐이다. 원작(원래의 후쿠시마)을 소중히 여기는 살함들은 이 현실을 견디기가 힘들 것이다. 그 견디기 힘듦을 호소하는 가이누마는 원작충의 입장에 서 있다. 그 마음은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2차 창작을 결코 없앨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Fukushima에 대한 환상이 앞으로도 계속 재생산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그런 2차 창작=Fukushima의 유통을 역이용해 사람들의 일부라도 원작=원래의 후쿠시마로 인도할 수는 없을까? 즉 원전 사고 이외의 후쿠시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머물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고 현장을 보고 싶다', '폐허를 보고 싶다'는 감정을 활용해 후쿠시마의 매력을 세계에 알리는 프로그램을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내 제안이었다.
원작을 소중히 하려면 한번은 2차 창작을 거쳐야 한다. 언뜻 이해가 잘 안 될지도 모르겠다. 논리만 보면 말장난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논리만 보면 말장난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아주 알기 쉬운 이야기다. 예를 들어 내가 체르노빌에 사람들을 안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2차 창작된 체르노빌(방사능으로 오염된 불모지)를 한번 믿었기 때문이다. 원전 사고가 없었다면, 그리고 체르노빌이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누가 굳이 우크라이나 변경의 전원 지역까지 찾아갈까? 마찬가지로 가이누마가 「최초의 후쿠시마학」을 출간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원전 사고가 없었다면, 그리고 괴물화한 Fukushima가 유통되지 않았다면 굳이 후쿠시마학을 구상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2차 창작이 없다면 원작에 접근할 회로도 없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앞세 체르노빌 투어 참가자가 모두 체르노빌이 '평범하다'는 감상을 남긴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실망했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관심의 폭이 넓어졌다는 뜻이다. 체르노빌은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예전에는 유대인이 인구의 절반을 점했다고 한다. 체르노빌이 자리한 폴레시아 지방은 아름다운 숲에 둘러싸인 늪지대로, 지금은 폐허가 되고 만 발전소 근처의 도시 프리피야트는 소련을 대표하는 유토피아로 건설된 선진적인 인공도시였다.
많은 일본인이 이런 사실을 모른다. 관심도 없다(외국인이 후쿠시마의 현실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그리고 체르노빌에 대해 유치한 환상을 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일방적으로 비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용해야 한다. 설령 동기가 유치한 환상이라고 해도 한번 체르노빌까지 발걸음을 옮겨 그곳이 '평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투어 참가자는 필연적으로 그 사고 이외의 배경 정보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 정보의 다층성 속에서 다시 한번 사고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매년 체르노빌 투어를 통해 노리고 있는 효과다. 나 또한 처음 체르노빌에 갈 때는 유치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사람은 자신이 '평범하지 않다'고 믿고 있던 장소를 찾아가 그곳이 '평범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평범하지 않은'일이 우연히 그곳에서 일어났다는 '운명'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다. '평범함'과 '평범하지 않음' 사이의 왕복 운동이 바로 다크 투어리즘의 근간이다.
탁상공론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78-80p)
관광은 시민 사회의 성숙과 무관하다. 관광은 국가의 외교적인 의지와도 무관하다. 달리 말해 공화제와도 국가 연합과도 무관하다. 관광객은 단지 자신의 이기심과 여행업자의 상업 정신에 이끌려 다른 나라를 방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문=관광은 평화의 조건이 된다. 이것이 칸트가 말하려던 바가 아닐까?
이는 또한 21세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국제 사회가 '불량배 국가'를 지정해 테러리스트를 양산하고 있는 한편, 세계 각국은 엄청난 수의 관광객을 외국으로 내보내고 있다. 관광객들이 꼭 '공화국'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중국, 러시아, 중동 국가들도 서양의 기준에서는 성숙한 국가라고 할 수 없을지 모르며, 이로 인해 국가 차원에서는 영원한 평화를 위한 국가 연합에 가입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 국가의 시민은 관광객으로서 전 세계를 활보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조국의 체제와는 상관없이 평화에 공헌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과 한국, 일본과 중국은 항상 심각한 정치적 문제를 안고 있지만 서로를 오가는 많은 수의 관광객 덕분에 관계 악화가 상당히 억제되고 있다.
관광의 이런 기능은 그것이 발명되었을 때부터 의식되었다. 쿡은 스코틀랜드 행 투어를 최초로 기획하면서 그것이 두 지역의 우호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을 기대했다.(104-105p)
여기서 내가 아렌트를 사례로 든 이유는 일반적으로 그녀가 슈미트와 코제브, 특히 슈미트와 대조적인 사상가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사실 나치에 협력했던 슈미트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망명한 유대인 아렌트는 정치적으로 대극에 위치한다. 아렌트는 좌익이고 슈미트는 우익이다. 그러나 그런 이데올로기적 표면을 벗겨 내고 보면 이들의 사상은 놀랍도록 구조가 비슷하다.
슈미트, 코제브, 아렌트 모두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커다란 사회 변화 속에서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근본부터 되물은 사상가다. 슈미트는 친구와 적을 구분 짓고 정치를 행하는 자가 바로 인간이라고 답했고, 코제브는 타자의 인정을 추구하며 투쟁하는 자가 인간이라고 답했으며, 아렌트는 광장에서 토론하며 공공성을 만드는 자가 인간이라고 답했다. 언뜻 제각각인 답처럼 보이지만 이들이 인간을 무엇과 대비시켰는지를 보면 공통된 문제 의식이 부각된다. 슈미트가 친구/적 이론을 구축한 것은 친구와 적의 구분에 신경 쓰지 않고 경제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인간(자유주의자)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코제브가 투쟁 정신으로 무장하고 역사를 만드는 이가 바로 인간이라고 주장했던 것은 투쟁도 역사도 필요로 하지 않고 쾌락에 자족하는 인간(동물적 소비자)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을 집필한 것은 다시 인용하면 "자기 육체라는 사적인 공간에 갇힌",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노동하는 동물'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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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미트와 코제브 그리고 아렌트는 같은 패러다임을 살았다. 이들은 모두 경제적 합리성을 원동력으로 삼으며 정치를 배제하는, 친구/적의 구분이 없는 평면적인 대중 소비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고전적인 '인간'의 정의를 부활시키려 했다. 달리 말해 그들은 모두 글로벌리즘이 실현하게 될 쾌락과 행복의 유토피아를 거부하기 위해 인문학 전통을 활용하려 했다.
이 책이 '관광객'을 사유함으로써 극복하려는 대상이 바로 이 무의식적 욕망이다. 20세기의 인문학은 대중 사회의 실현과 동물적 소비자의 출현을 '인간이 아닌 것'의 도래로 받아들이고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이 거부가 글로벌리즘이 진행된 21세기에 통할 리 없다. 실제로 인문학의 영향력은 이번 세기 들어 급속히 쇠퇴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문학 자체를 변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이 책의 바탕에 있는 위기 의식이다.(134-136p)
그렇지만 다중 개념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따라서 관광객의 철학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네그리와 하트의 철학을 얼마간 수정할 필요가 있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의 대두를 강조한다. 분명 앞서 짚은 바와 같이 21세기 들어 세계 각지에서 지구화의 대안(지금과는 다른 또 하나의 지구화)을 요구하는 민중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네트워크 형태의 자기 조직화(지도자 없는 동원)도 일반화되었다. 이 점에서 다중의 존재감은 눈에 띄게 커졌다.
그러면 이 힘은 어떤 식으로 현실 정치와 연결될까? 데모는 어떻게 정치를 움직이는가? 네그리와 하트의 철학에는 이에 대한 전략론이 통째로 결여되어 있다. 이들은 데모가 그대로 정치가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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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평이하게 해석하면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이 모여 목소리를 내기만 하면 네트워크의 힘으로 어떻게든 되지 않겠냐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이를 믿느냐 또는 '사랑'하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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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운동에는 당도 이데올로기도 지도자도 필요 없다. 반자본주의적일 필요도 없다. 그저 네트워크의 힘을 믿으면 된다. 사랑이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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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악의적으로 말하자면 「제국」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고 지금도 운동권에게 참조되는 이유는 그 분석력이나 사상의 깊이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다중의 운동론적 결함 때문 아닐까? 네트워크와 사랑만 믿으면 나머지는 생명 정치의 자기 조직화가 어떻게 해 준다ㅡ이렇게 고마운 운동론이 또 어디 있을까. 설혹 이것이 오해라 해도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오해를 경유해 힘을 얻은 것이다.(172-175p)
그렇다면 도입의 방식은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할까? 우리에게는 트리와 리좀 대신 스몰 월드와 무척도라는 새로운 개념이 주어졌다. 트리와 리좀은 상이한 네트워크의 상이한 형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래서 포갤 수 없었다. 스몰 월드와 무척도는 같은 네트워크 속 상이한 수준의 특징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포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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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에는 스몰 월드성과 무척도성이 있다. 한쪽에는 여러 클러스터가 만드는 좁은 세계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차수의 멱승 분포가 만드는 불평등한 세계가 있다. 여기까지는 수학적 진리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같은 사회를 살면서 때로는 스몰 월드성을 느끼고 또 때로는 무척도성을 느낀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수학적으로 보면 우리 한 명 한 명이 네트워크의 꼭짓점이다. 그리고 스몰 월드=무척도 네트워크에서 꼭짓점과 꼭짓점의 관계는 가지 하나로 연결된 두 꼭짓점이라는 대등한 관계로도, 연결된 가지 수에 큰 차이가 있는 불평등한 관계로도 해석할 수 있다. 전자는 네트워크의 형태에 주목한 해석이고, 후자는 차수 분포에 주목한 해석이다. 실제로 이에 대응하듯 우리 인간은 다른 한 인간(타자)과 마주했을 때 상대를 대등한 인간으로 느낄 때도 있지만 부와 권력의 격차 앞에 압도당할 뿐일 때도 있다. 아렌트는, 아니 그뿐 아니라 많은 20세기 인문학 사상가가 전자와 같은 관계가 인간 본연의 모습이고 후자는 '인간의 조건'이 박탈된 상태라고 여겼다. 그러나 사실 양자는 하나의 관계에 대한 두가지 표현으로, 우리는 항상 둘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고 봐야 한다. 오늘날의 SNS를 예로 들면 이 동시성 또는 양면성은 팔로워가 100명 정도 되는 무명 트위터 사용자가 팔로워 100만 명인 유명인에게 멘션을 보냈다가 답멘션을 받은 상황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멘션은 일대일 의사소통이지만 동시에 수많은 멘션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두 해석은 모두 옳다. 이 모순은 복잡계 네트워크 구조에서 수학적으로 도출된다.
우리는 항상 같은 사회=네트워크에서 스몰 월드적 형태와 무척도적 차수 분포를 동시에 경험한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 이 두 가지 경험에서 두 개의 질서, 두 개의 권력 체제가 생성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조건'과 그 외부, 정치와 그 외부, 국민 국가와 제국, 규율 훈련과 생명 권력, 정규 분포와 멱승 분포, 한 명 한 명이 인간으로 대우 받는 공동체주의적 소통 영역과 인간을 동물의 집합으로만 셈하는 자유지상주의적 통계 처리 영역이 하나의 사회적 실체에 대한 두 가지 권력론적 해석으로 동시에 생성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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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렇다면 국민 국가와 제국의 2층화는 수학적 필연에 의거한 구조라는 말이 된다. 인류 사회가 하나의 네트워크인 한, 스몰 월드의 질서를 기초로 한 체제와 무척도의 질서를 기초로 한 체제가 병존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더 이상 내셔널리즘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지만, 그렇다고 글로벌리즘의 시대로 완전히 이행할 수도 없다. 스몰 월드의 질서를 대변하는 것이 지금과 같은 국민 국가가 아닐 가능성은 있어도 인간이 인간인 한, 세계가 무척도의 질서로 뒤덮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212-214p)
이러한 유연성은 가족이 5장 마지막 부분에서 논한 루소 또는 로티의 '연민'과 연결될 수 있음을 뜻한다. 가족이란 원래 우연한 존재다. 그래서 우연을 통해 확장될 수 있다. 가족의 윤곽은 성과 생식, 공동 거주와 재산 외에 사적인 애정을 통해서도 정해진다. 이 특성이 가족의 확장성을 낳는데, 이는 동시에 가족의 경계를 매우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전통적인 가족 형태가 열세에 처한 지금의 일본에서는 특히 그렇다. 혈연은 확장되고 있으며 금전 관계도 이에 준해 확장되고 있다. 하지만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가족이라고 불러야 할지 현대에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만약 내가 작은아버지를 가족으로 여기고, 작은아버지가 그의 작은아버지(작은할아버지)를 가족으로 여긴다 해도 그것이 반드시 내가 작은할아버지를 가족으로 여긴다는 뜻은 아니다. 사적인 애정은 이처럼 직선적으로 확장되지 않는다. 현대인은 만난 적 없는 작은할아버지보다 키우고 있는 개를 더 가족처럼 여길지도 모른다. 가족의 경계 확정이 어렵다는 것은 달리 말해 가족의 공통성을 추출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나와 작은아버지가 닮았고 작은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도 닮았다고 하자. 그렇다고 내가 꼭 작은할아버지를 닮는 것은 아니다.(250-251p)
이들에 따르면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기술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는 기술적 낙관주의, 창업가의 경쟁을 전면적으로 긍정하는 신자유주의, 히피 문화의 영향을 받은 반체제 지향, 마지막으로 앞서 말한 애국주의가 섞여 탄생한 매우 기이한 이데올로기다. 보수 지향과 진보 지향이 비판 없이 뒤섞여 있기에 해커들은 자본주의의 본질은 부정하지 않은 채로 반자본주의적인 이상을 나이브하게 논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해 탐욕스러울 정도의 부를 향한 욕망을 가진 채로 욕심 없는 공산주의자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오픈, 셰어, 프리 등 반자본주의적인 유행어를 만들어 낸 미국인 상당수가 억만장자인데 그들은 이런 모순에 괴로워하지 않는다.(268-269p)
세계를 만들어 내는 근원을 라캉 이론에서는 '대타자'라고 부르는데 이 대타자가 큰 삼각형의 정점에 자리한다.
<그림 12>에는 주체에서 출발하는 화살표가 두 개 그려져 있다. 하나는 <그림 11>과 같은 상상적 동일화의 화살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또 하나의 화살표가 세계=스크린을 뛰어넘어, 대타자에서 출발해 세계=스크린을 통과한 다음 오른쪽에 있는 주체를 향해 곧장 나아가는 '시선'을 향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징적 동일화 작용을 표현한다. 세계=스크린을 성립시키는 매커니즘 자체와 동일화하는 것이다.
세계를 성립시키는 메커니즘 자체와의 동일화라는 말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또한 영화에 비추어 생각하면 알기 쉽다. 나는 앞서 상상적 동일화는 스크린에 비친 배우(이미지)에 대한 동일화라고 말했다. 그런데 애초에 배우는 왜 스크린에 비치는가? 물론 누군가가 그들을 캐스팅하고 촬영했기 때문이다. 상징적 동일화는 이러한 스크린 뒤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동일화다. 즉 영화라면 카메라에 대한 동일화가 된다. '대타자'에서 주체를 향해 뻗은 '시선'은 영화 감독이 배우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상징적 동일화는 상상적 동일화보다 '고급'이다. 이 또한 영화에 비추어 생각하면 알기 쉽다. 영화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가진 친구가 있다면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나는 있다). "배우나 스토리 같은 영화의 내용을 보고 있는 동안은 아마추어다. 시네필(영화광)이라면 스크린에 보이는 부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 즉 카메라 프레임이나 감독의 시선을 좇는다." 바로 이것이 상상적 동일화와 상징적 동일화의 차이다. 아마추어는 이미지를 본다. 시네필은 카메라에 동일화한다. 그리고 영화 감상자는 이 동일화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성숙해진다.
라캉 이론은 이와 동일한 논리로 주체화 과정을 설명한다. 인간은 부모나 교사 등을 모방하는 것만으로는(상상적 동일화만으로는) 어른이 되지 못한다.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그 메커니즘을 이해할 때(상징적 동일화를 했을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 이 이중화가 라캉파 정신분석 주체 이론의 핵심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보이는 것(이미지)에 동일ㅇ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상징 혹은 언어)에 동일화할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주체가 된다). 라캉은 보이는 것의 세계를 '상상계', 보이지 않는 것의 세계를 '상징계'라 지칭했다. '대타자'와 '상징계'는 거의 비슷한 뜻을 갖는다.(282-283p)
지하 생활자는 체르니솁스키 주장의 내용이나 실현 가능성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유토피아를 실현하고 싶으면 실현하면 되고,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으면 행복해지면 된다고 쓰고 있다. 이를 전제로 나는 그런 것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고 호소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는 똑똑해지지 않을 권리, 행복해지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지하 생활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은 계몽되어 교양을 가진 인간, 한마디로 미래의 인간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욕망할 리가 없다, 이건 수학이다, 하고 내게 반복한다. ···하지만 일 백 번 되풀이하건대, 인간이 의도적으로 해롭고 어리석을뿐더러 바보 같은 것을 원하는 경우가 딱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을 바랄 수 있고, 오직 지혜로운 것만을 바랄 의무에 얽매이지 않을 권리를 확보하기 위함이다.(304p)
일류샤는 원래 들개 한 마리에게 쥬치카라는 이름을 붙이고 예뻐했다. 하지만 어느 날 스메르쟈코프 때문에 핀이 들어간 빵을 쥬치카에게 먹이고 만다. 쥬치카는 고통스러워하며 멀리 달려가 그대로 사라진다. 앓아누운 일류샤는 이 일을 항상 마음에 걸려 한다. 그래서 콜랴는 쥬치카와 똑같이 생긴 개를 찾아와 일류샤에게 선물한다. 페레즈본이라고 이름 지어진 새 개는 쥬치카가 아닌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류샤는 페레즈본을 보고 한눈에 이 개가 쥬치카라고 확신하며 매우 기뻐한다. 그 개가 정말 쥬치카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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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치카와 페레즈본의 우화는 바로 그 '이것임'자체가 해체되고 해소되는 순간을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류샤는 쥬치카를 사랑했다. 그 쥬치카는 저 쥬치카뿐이다. 그렇기에 쥬치카를 잃은 상처느 결코 아물지 않는다. 실제로 일류샤도 처음에는 다른 개를 키우자는 제안을 거부했다.
그런데 도스토옙스키느느 이 상처가 아무는 기적의 순간을 묘사한다. 야마시로와 반바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일류샤가 페레즈본이 쥬치카라고 믿었는지 또 실제로 페레즈본이 쥬치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페레즈본이 페레즈본인 동시에 쥬치카일 수도 있다는 것, 일류샤가 그런 사유의 가능성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쥬치카가 쥬치카였던 것은 생각해 보면 그 자체가 우연이다. 애초부터 쥬치카는 한 마리 들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쥬치카가 죽은 후에도 다시 쥬치카적 존재를 찾아 새로운 관계를 모색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것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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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나일 수밖에 없고 쥬치카는 저 쥬치카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 상처는 결코 미래의 나와 다른 개의 구원을 통해 아물지 않는다. 지하 생활자는 이를 이유 삼아 유토피아를 부정했고 이반=스타브로긴은 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알료샤는 이를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이 좁은 길을 통과할 수 있는 다른 사유의 가능성을 이야기의 형태로 제시했다는 것이 야마시로와 반바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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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샤가 일류샤였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순전히 우연이다. 새로운 '착한 아이'가 등장해 아버지와 함께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부활한 쥬치카가 새롭게 페레즈본으로 등장했던 것처럼, 새로운 일류샤도 교환 가능한 우연한 존재로 등장해 아버지와 함께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어 가는 새로운 운동을 시작할 것이다." 한 아이가 우연히 태어나서 우연히 죽는다. 그리고 또 새 아이가 우연히 태어나 어느새 필연의 존재로 바뀌어 간다. 일류샤의 죽음은 그런 운동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운동을 보통 가족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불능적 주체는 불능이긴 하지만 결코 무력하지 않다. 세상은 아이들이 바꾼다. 인간은 인간을 고독 속에 가두는 '이것임'의 중력에서 벗어나 운명을 아이들에게 맡길 때 비로소 이반=스타브로긴의 허무주의를 탈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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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요약하겠다. 이 장에서 전하려 한 메시지 하나는 '우리는 지하 생활자나 스타브로긴처럼이 아니라, 부모가 아이를 접하듯이 세계를 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공동체주의자나 자유지상주의자처럼이 아니라, 가족 유사성에 근거해 신생아를 접할 때처럼 타자와 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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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자유주의는 타자 원리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힘을 잃었다. 한편 지금 우위를 점하고 있는 공동체주의(내셔널리즘)와 자유지상주의(글로벌리즘)에는 아예 타자 원리가 없다. 2017년 현재 타자에 대한 관용을 지탱할 철학 원리는 이제 가족 유사성밖에, 또는 '오배'밖에 없다. 이것이 내 인식이다. 따라서 나는 가족의 이념과 그 가능성을 철학이 더 진지하게 그리고 포괄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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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에나 철학자는 아이를 싫어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예전에는 아이였다. 우리 모두 섬뜩한 존재였다. 우연의 아이였다. 우리는 분명 실존적으로 죽는다. 죽음은 필연이다. 하지만 탄생은 필연이 아니며 우리 중 누구도 태어났을 때는 실존이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는 필연에 도달하는 실존이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연에 노출되어 다음 세대를 만드는 부모가 되어야 삶을 완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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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로 죽는 데 그치지 말고 부모로서도 살아가라. 2부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한마디로 이것이다. 물론 여기서 부모는 생물학적 부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상징적 또는 문화적 부모도 존재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런 부모가 내가 말하는 부모 개념에 가깝다. 왜냐하면 부모가 된다는 것은 오배를 일으킨다는 것이고 우연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도 가능한 한 많은 우연의 아이를 만들어 미래의 철학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334-338p)
그는 컴퓨터의 움직임 전체를 가시화하려 한 것이 아니다. 프로그램이나 계산은 어차피 가시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스크린에는 '가짜'만 비출 수 있을 뿐이다. 다만 그는 이 '가짜'와 '진짜'의 관계를 바꾸었다. CLI 시대의 전문가는 '진짜'를 조작하기 위해 '가짜'와는 거리를 두고 머릿속의 보이지 않는 스토리에 기대야 했다. GUI는 이 스토리를 보이는 것으로 바꾼다.
하지만 이는 '진짜'를 비추게 되었음을 뜻하지 않는다. 창이나 아이콘은 어디까지나 '가짜'에 불과하다. 케이는 이를 모두 이해한 상태에서 그 '가짜'를 '가짜'인 채로 만지고 조작함으로써 '진짜'를 변화시키는 세계 감각을 구축하려고 했던 것이다.(357-358p)
구체적으로는 방금 논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립에 기초를 둔 행동 원리, 즉 사람은 보이는 것에 쉽사리 속으니 보이지 않는 것을 논하자는 지침 자체가 실효성을 잃어 가지 않을까?
실제로 이런 현상이 지금 여러 곳에서 관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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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에게도 2016년 트럼프 선풍은 예상 밖의 현상이었다. 진보적 성향의 인물들은 당초에 트럼프 지지자들이 유명하고 부자라는 화려한 이미지(보이는 것)에 속고 있을 뿐이며 지리멸렬한 실체(보이지 않는 것)가 알려지면 영향력도 약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많은 지지자가 아무리 진실이 알려져도 거짓을 계속 믿었고(페이크 뉴스), 진보파의 집요한 비판은 오히려 지지자들 내부에 악질적인 음모론의 유행을 가져왔다. 트럼프는 '가짜'에 불과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 '진짜'가 있다는 지식인의 호소는 한편으로는 '가짜'면 어떠냐는 반발을 불렀고, 다른 한편 우리에게는 우리 나름의 '진짜'가 있다는 독자적인 세계관을 낳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촉시적 평면의 시대에 사람은 '가짜'너머에 '진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은 '가짜'를 '가짜'인 채로 만지고 조작하고 가공하며 많은 사람이 그 조작 자체에 쾌락을 느끼는 시대고, '가짜'를 계속 만지다 보면 언젠가 '진짜'에 도달한다고 믿는 시대다. 모든 것을 보고 만질 수 있다고 믿는 시대에 보이지 않는 것을 논하는 사람은 신뢰를 잃는다. 그런 시대에 지식은 무엇을 행동 원리로 삼아야 할까? 상당히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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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말하면 촉시적 평면의 시대에 '리터러시'란 무엇인지 묻는 문제이기도 하다. 스크린 시대에는 보이는 것을 의심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사유하는 것이 리터러시였다. 촉시적 평면의 시대에 그런 의심의 정신은 어디로 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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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시적 평면에서는 모든 것이 보인다. 그리고 만질 수 있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리 생각한다. 케이가 말하는 일루전이다. 그래서 '가짜'너머에 '진짜'가 있다고 주장하며 후자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담론을 신뢰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루뭉술하게 평면적으로 펼쳐진 '가짜'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어서 각기 다른 논리로 구성된 여러 하위 세계를 발견해 이들 간의 모순을 찾아내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앞으로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행동 원리를 사유하는 데 참고가 될지도 모르겠다.(360-363p)
ㅡ 아즈마 히로키, <관광객의 철학> 中, 리시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