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4/15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런 대화다. 그런데 왜 안 되냐고? 이 책을 보면 알겠지만 이런 식의 대화는 시간과 에너지가 드는 법이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도 모두가 만족스러운 결과에 도달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오스카는 레베카와 그 많은 이메일 대화를 주고 받은 후 처음과는 달리 조금 나아진 모습을 보이지만 그래봐야 여전히 '개자식'이다. 때때로 상대를 향해 분노를 터뜨릴지라도 애정에 기반하여 상호이해가 가능한 길을 모색하는 과정을 누리는 호사를 우리는 경험할 수 있을까? 일단 나부터 먼저 대화를 시도해봐야겠지?

 

 

 

남자들이 나를 이전만큼 좋아하지 않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남자들에게 매력을 덜 느낀다는 점이 문제이지요. 당신들은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길을 가지 못합니다. 언제나 돌봐주고, 안심시키고, 이해해주고, 도움을 주거나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하지요. 남자 하나를 부양하는 데 너무 많은 노력이 들어요. 젊은 여성들 말이 맞습니다. 당신들의 남성성은 너무 취약합니다.(43p)

 

 

조에가 정신적 피해를 호소할 예정이라는데, 예전에 제가 조금 끈질기게 치근덕거린 일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책이 출간된 시점이었고, 길어 봐야 삼 개월이었죠. 무엇이 되었든 간에 조에에게 무언가를 억지로 강요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남자아이처럼 조용히 굴었어요.

(...)

제가 한 최대한의 열정적 행위는 작별 인사를 하다가 딱 한 번 뺨이 아닌 입술에 입을 맞추려 한 일입니다.(53p)

 

 

사건을 요약해볼게. 너는 그 사람한테 반했어. 상냥한 성격에 비난받을 행동은 하지 않았지. 너는 진짜 괜찮은 남자인데, 어떤 미친년이 너를 엿 먹이려고 이야기를 지어냈다는 말이지? 여기서 첫 번째 문제는 그게 너희 업계에서 여자를 괴롭히는 모든 강간범이 똑같이 떠들어대는 레퍼토리라는 거야. 너희 같은 작가들은 그저 결백하다고만 하는데, 한편에는 무수한 피해자가, 다른 한편에는 자신이 맞닥뜨린 게 뭔지 이해하지도 못하는 문제적 남자들이 있어.(59-60p)

 

 

당신 친구 중에 나이든 사람들이 있겠죠. 노화가 당신 일이 되면, 거울을 피하는 법 같은 걸 언제든 배울 수 있어요. 하지만 가까운 이들이 노쇠해지는 일은, 당신 세계를 이루었던 것을 당신이 잃어버렸다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친구들은 자신만의 매력이나 지혜, 유머, 호기심으로 당신 마음을 사로잡았던 사람이니까요. 나는 옷가지에 그다지 흥미가 없고, 언제든 즉시 쓸 수 있는 돈을 확보하고 있는 게 좋아요. 집으로 사람을 초대하는 건 좋아하지 않고, 집에 가구도 몇 점 없을뿐더러 책도 소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나를 둘러싼 사람이 전부인 셈이에요. 내 인생에 주목할 만한 구석은, 내가 전적으로 감탄하며 우러러보던 사람이 내 주변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 성공이 바로 그것이었죠.

(...)

나이의 역사에는 어떤 정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오십 세에 쓰러집니다. 우리가 동경하던 성격적 특징은 왜곡되고, 오만함은 회한으로 변하며, 유머에는 요실금 환자의 지린내가 나고, 매력은 변질되어 버립니다. 청소년기의 변화와 비교할 수 있겠으나 더 비참하죠. 목소리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이거나 사유의 융통성이 그대로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랜 친구들을 보석처럼 간직하세요. 여전히 함께 있을 때 편한 사람을요. 점점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더 지혜로워지거나 더 흥미로워지거나 더 관대해진 사람들이죠. 끔찍한 난파 사고의 생존자라도 되는 양 곁에 그들을 잡아두세요.(70-72p)

 

 

우리의 어린 시절은 오늘날 젊은이들 시대와 굉장히 달랐습니다. 우리는 실망스러운 일을 평범하게 넘겼죠. 부모님은 집에 잘 계시지 않았어요. 그들은 젊어서 우리 남매를 낳고도 자신만의 일상이 따로 있었습니다. 저를 돌보는 일은 종종 누나 차지였죠. 누나가 핸드볼을 하러 가면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집에 혼자 남겨졌어요. 그 시절 모두가 그렇듯 그걸 평범하게 넘겼습니다.

제게는 열두 살짜리 딸이 있어요. 어느 수요일 오후 클레망틴을 혼자 내버려둔다면, 아내는 경찰을 불러서 무책임한 아빠를 아이와 격리해달라고 요청할지도 모릅니다. 딸은 저희 집 바로 아래편에 내려주는 버스를 타는데, 친구들에게는 제가 자기를 아프가니스탄 노새 취급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더군요. 그 나이에 저는 놀러 나가기 위해 통블렌에서 8킬로미터 거리를 자전거로 달렸는데 말이죠. 그때는 부모님을 안심시키는 용도의 휴대전화도 없었고, 부모님은 걱정할 생각도 안 했어요.(78-79p)

 

 

제 책과 세계를 연결해주던 여성과 사랑에 빠진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조에는 온갖 기분 좋은 소식을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끊임없이 전화해서 스케줄이 비었는지 묻고, 집 바로 아래 택시를 댄 채 저를 기다리고, 몇 시간 동안 제 앞에서 제 이야기를 했어요. 물론 그게 당시 그녀의 업무였죠. 하지만 저는 단단히 착각하고 그녀에게 빠졌습니다. 그녀의 배려, 제게 일어난 모든 일을 향한 열광적 반응이 일의 일부임을 이해하지 못한 겁니다. 제멋대로 흥분했습니다. 그녀가 예쁘다거나 매력이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요. 그야말로 제 인생의 운명이라고 생각했거든요.(104-105p)

 

 

피해자의 말을 신성시할 생각은 없어요. 여성들도 이따금 거짓말을 합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건 말건, 그게 정당하다고 생각하건 말건 상관없이 말이죠. 하지만 날조를 일삼는 피해자는 미미한 반면, 남성 인구 중 강간범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나면 당신들 남성의 퇴락을 스스로 환기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친구 중에 강간범이 있어도 자신은 아니니까 그러한 비난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다니, 남성들에 대한 분노를 감출 수 없습니다. 그 지점에서 뭐랄까····· 아무리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보려고 해도 당신들을 동정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113p)

 

 

그 후로, 대다수 프랑스인이 좁은 아파트에 복닥복닥 살고 있는 현실에서 작가 두 명이 평소 휴가를 보내는 별장으로 떠난 걸 두고 사람들이 분노를 뿜어내는 반응을 접하고 있습니다. 유사시에는 도로에서 두 시간 운전한 일이 굉장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내 생각은 이래요. 최상위 계층을 미워히지는 않는 이러한 편집증적 열기가 이상하다고요. 그저 당신의 이웃, 언제든 자신이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있는 그런 사람만 골라가며 증오합니다. 진짜 안전지대에서 보호받는 사람들이 아니라요.(177-178p)

 

 

당신이 청춘 시절에 대해 느끼는 그리움을 이해해요. 하지만 그 시기는 끝났고, 우리는 이제 열네 살짜리 아이가 아니에요. 행복한 재발이라는 건 없습니다. 그걸 알아보려고 다시 돌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늘 중독자와 어울리며 지냈는데, 그중 누구도 "다시 시작하니까 얼마나 행복하던지!"라고 고백하지 않았어요.(265-266p)

 

 

나는 홀로 싸우는 사람들과 항상 뜻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가 마주할 최악의 상황을 두려워한다면 그 친구를 위해 무얼 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저 문자 메시지를 보내 탁구나 치러 가자, 테라스에서 만나자라는 말뿐이에요. 그저 지나가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 있어주는 거죠. 우리의 친구에게 여전히 다음이 있기를 기도하면서 말이죠. 때를 기다리면서요.(272-273p)

 

 

그런데 당신 딸은 사람이에요, 당신의 버팀목이 아니라. 단약을 하는 과정이 딸에게 죄우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281p)

 

 

자, 어머니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어. 그렇다고 엇나간 어린 시절을 지겹게 되풀이하며 평생을 살 수는 없어. 익숙해지라고, 진저리나는 행동은 그만두고.(290p)

 

 

"그땐 누난 나보다 서너 배는 덩치가 컸는데, 틈만 나면 날 때렸잖아.“

"진짜 그렇게 생각해, 동생아? 다 잊어버렸어? 네가 딱 두 가지 일에 집착하고 다른 건 신경도 안 썼잖아. 나를 꼬집고 내 물건을 훔치는 일에만 몰두했어. 학교에 내다 팔기 위해 가끔 훔치는 수준이 아니라, 자리를 비우는 족족 훔쳐다 버렸잖아. 주방 쓰레기통도 아니고 냅다 뛰어서 버스 정류장 쓰레기통에 버렸지. 넌 진짜 머저리였어. 그저 날 골탕 먹이려고. 네가 작은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던 모습이 생생하네. 그때 여덟 살쯤이었지. 그래서 널 때린 거야. 같이 사는 게 그야말로 지옥이었어."

"난 하나도 기억 안 나."(293p)

 

 

그 순간 내가 그녀를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약을 끊는 게 그 정도로 수월하다는 사실이 놀랍긴 했지만요. 저렇게 되고 싶다, 저렇게 쉽게 약을 끊으면 좋겠다, 필요할 땐 약에 취해 즐기면서도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이게 진짜 내 모습입니다. 해시시를 단 한 모금만 빨아도, 위스키를 병째 비우고 해시시를 연달아 1그램이나 흡입하게 되겠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어울리면서요. 가서 즐겁게 놀지도 못하고 그저 진을 빼고 올 겁니다. 나는 중도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 내 모습이 괜찮습니다.(300p)

 

 

무엇보다, 어떤 주제에 관해서라도 내가 느낀 그대로를 느끼고 말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자, 누군가 강간당했다는 이야기를 꺼내면, 자기 말만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 우후죽순 나타나서 그 사건을 결코 극복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합니다. 어떤 정신과 의사는 나에게 분열 상태를 거론했습니다. 강간당한 여성은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신체 증상처럼 자기분열을 겪는다고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나는 여자예요. 어떻게 내가 분열되지 않은 존재이길 바라세요?" 나는 어릴 때부터 내 몸의 주인은 다른 이들의 시선이며, 순전히 나의 아름다움과 매력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어요. 매력이라는 것은 나를 분열시킵니다. 그러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요. 살찌는 것을 걱정하지 않으면서 음식을 먹는 여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식욕과 자신이 당연히 분열되는데, 다른 것이라고 크게 다를까요?

(...)

내 말은 어떤 중요성도 띠지 않았습니다. 내 경험을 평가할 권한이 내게 없었어요. 그녀가 이미 앗아갔으니까요.(308-309p)

 

 

정신과 의사들이 형식적인 진료를 싫어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문제는 그들이 내 말을 듣고 응답할 때 일어납니다. 앞서 이야기한 어떤 민감한 단어를 그들이 전혀 듣지 않고 넘긴 걸 바로 알게 되거든요. 내 케이스를 보면, 예컨대 집요한 괴롭힘은 심각한 사안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내가 어렸을 떄 부적절한 방식으로 삼촌에게 추행당했다면, 의료진은 그 말을 주의 깊게 들을 겁니다. 나한테 바로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고 할 테고, 나는 몇 시간이고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인터넷에서 페미니스트 블로그를 운영한다는 이유로 집요한 사이버불링의 대상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들은 계속 다른 문제가 있는지 찾습니다. 나의 나약함을 정당화할 만한 어린 시절의 일을요. 내 케이스에서는 아무리 어린 시절을 들여다봐도 별다른 게 없습니다. 깊이 파고들어야 하는 문제는 정치적인 것입니다. 나를 치료하는 척하는 이들은 아버지가 내 숙제를 잘 도와줬는지 묻습니다. 그건 격리실로 보내져 춥고 배고프다고 말하는 정치범에게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스카프를 둘러주었는지 묻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312-313p)

 

 

그중 전형적인 프로필은 없습니다. 우리가 찾으려고 예상하는 사람은 여자를 만나 본 적 없는 도태된 남자나 못생긴 남자들이지만, 그 밖에도 수많은 가정의 아버지, 노인, 모든 분야의 모든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도시에 살기도 하고 시골에 살기도 하며, 문맹인 경우도 있으나 대학교수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보복도 받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고 온라인에서 원하는대로 자행합니다. 페미니스트를 괴롭힌 남성주의자가 강제 입원 명령을 받은 사례는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모욕적인 답변을 받기라도 하면 그들은 몇 달 동안 항의합니다. 무리 지어 공격할 때는 <시계태엽 오렌지>의 인물처럼 거칠지만, 우리 중 누군가가 맞설 답을 생각해내면 엄지공주처럼 쪼그라듭니다. 그들은 일말의 방해도 용인하지 못하며 자신의 영역을 사수합니다. 온라인에서 자신들의 취지에 맞는 콘텐츠만 양산하길 원하며 어떤 반대 의견도 참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관대합니다. 남자들에 대해, 우리는 낙태를 시키지 않을 것이며, 교육받을 권리를 빼앗지도 않을 것이며,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시키지도 않으며, 거리에서 죽이지 않을 것이며, 조깅할 때 죽이지 않을 것이며, 숲속에서 죽이거나 집으로 데려와 죽이지도 않을 것이며, 그들의 태생적 성별을 들어 수치를 주지 않을 것이며, 허기지게 만들지 않을 것이며, 강간하지 않을 것이며, 테이블 아래로 더듬지 않을 것이며, 섹스하고 싶어한다 해서 비난하지 않을 것이며, 공공장소에 나가지 못하게 금하지도 않을 것이며, 권력의 서클에서 배제하지 않을 것이며,

(...)

평등을 언급할 때 우리는 이런 평등을 주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걸 주장했다면 우리의 욕구가 불러일으킨 분노를 이해하기에 아주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겠죠. 하지만 그들은 너무 나약합니다. 자기를 방어하는 데 익숙하죠.(356-358p)

 

 

"그녀를 채용하지 않은 건 당연해, 그건 중요한 자리거든, 이 영상은 언제든 수면 위로 다시 올라올 수 있어."

무슨 말을 할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던 걸까요. 그게 무슨 대수죠. 그냥 섹스 영상인데요. 영상에서 그녀가 난민을 고문한 것도 아니고, 노숙자에게 불을 붙인 것도 아니고, 죽어가는 아시아 커뮤니티를 협박한 것도 아니고, 히죽거리면서 나치식 경례를 한 것도 아닌데요. 아마 페니스를 빨거나 애무를 받고 있었거나겠지요. 혹은 만난 지 얼마 안 된 남자 네 명과 호텔에서 엑스터시를 하고 환희에 가득 찬 밤을 보내고 있었거나요. 동의에 의한 섹스를 한 거죠. 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어요.(364p)

 

 

자매 여러분, 우리는 더 분발해야 합니다. 남자들이 저지른 것만큼이나 우리도 이미 멍청한 짓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다만 권력이 없죠. 우리는 남자들의 어리석은 회동을 따라 합니다. 거짓된 분노를 따라 하고, 감옥 같은 폭력을 따라 하고, 권위를 향한 사랑을 따라 합니다. 우리 말을 들어준다는 명분하에 아버지를 향해 열렬한 구애를 보내며 그의 정의를 따릅니다. 원한다면 그를 어머니라고 불러보세요. 그러면 금방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같은 게임이에요. 남자를 용서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당신들이 내게 한 일을 용서할 의향이 없습니다. 덜하거나 더하지도 않은 똑같이 좆같은 상황입니다. 오랜 시간 겪어보니 알아차리게 되더군요.(387p)

 

 

 

ㅡ 비르지니 데팡트, <친애하는 개자식에게> 中, 김영사

,

2025/4/8

 

 

하기야 모두를 순전한 마음으로 아끼고 용서하고 이해하기란 천사나 할 일이지 사람의 태도는 아니다. 천사처럼 군다는 것은 상대를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고기가 말을 모르고 규칙을 모르는 것에 화내지 않듯이 기대가 없고 하찮은 존재에게만 한없이 너그러울 수 있다.(109p)

 

 

ㅡ 단요, <다이브> 中, 창비

,

2025/4/7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환대보다 적대를, 다정함보다 공격성을 더 오래 마음에 두고 기억한다. 어떤 환대는 무뚝뚝하고, 어떤 적대는 상냥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게 환대였는지 적대였는지 누구나 알게 된다.(29p)

 

 

살아오면서 알던 이들의 변신을 많이 보아왔다. 그들의 변화를 접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그걸 설명할 수 있는 '도발적 사건'을 찾곤 했다. 누군가의 변절, 누군가의 타락, 누군가의 성공, 누군가의 추락, 누군가의 돌변을 말할 때 '걔가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그 일이 있고 나서······'로 설명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러지 않으려 노력한다. 우주의 만물이 그러하고, 내가 그러했듯, 그럴듯한 이유 없이도 인간은 얼마든지 변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오히려 변화보다 더 어려운 것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니 이 자연스러운 결과에 굳이 '도발적 사건'을 갖다붙여 설명할 필요는 없다. 모든 지도에 축척이 있듯이 실제 세계는 이야기의 세계를 초과한다. 다만 이해가 잘 되지 않을 뿐.(79-80p)

 

 

 

ㅡ 김영하, <단 한 번의 삶> 中, 복복서가

,

2025/4/6

 

‘개와 소금의 왕국’이라는 단편에 나오는 쌍둥이 테마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확장하여 만든 걸로 보이는 범죄 소설. '피와 기름'의 우혁도 등장한다(?). 꽤나 재밌고, 만족도 높은 시간이었다. 등장인물이 말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기계적이고 계산적이라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고 일견 동의한다. 다만 그걸 감안하고도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이 펼쳐놓는 생각의 흐름이 충분히 흥미로웠다. ‘다이브’도 그냥 읽어야겠다.

 

 

 

“최 선생님이 보기엔 그 노인들이 바보 같지요?”

“그렇다기보다는, 이해가 어려운 면이 있죠. 그 정도면 스스로도 몸이 망가졌다는 걸 느낄 텐데 기어코 스테로이드제나 받아 가려는 게 말입니다.”

“그거는 본능이에요.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려는 특질, 즉 항상성은 사람 몸만이 아니라 정신에도 적용된다 이겁니다. 늙을수록 더더욱 그래요. 큰 병원에 간다면 수술을 마음먹어야 하지만 스테로이드제가 있으면 내일도 모레도 살던 대로 살 수 있지요.”

“그러나 어쨌든 중병으로 병원에 가는 것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때가 언제냐, 얼마나 심각해졌느냐의 차이일 뿐이라고 봅니다만.”

대표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 대하듯 껄껄 웃었다.

“죽음이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처하는 과정은, 죽음 자체보다 두렵기 마련이에요. 아까 내가 바보라는 말을 썼지요. 이 두려움을 이기지 못 하면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됩니다."(8-9p)

 

 

"그 기전이 미스터리라서 그래.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는 것보다 그게 낫다고 생각하는 심리가 이해가 안 가. 잡일이야 돈 내고 사람 쓰면 되고, 말은 그냥 하면 나오는 거 아닌가?"

"솔직히 말해 줘?"

"가급적이면."

"당신은 성격이 악랄한데 인간 자체는 순해서 손해만 보고 살아. 학생들 중에 그런 유형이 있잖아. 규칙 안 지키는 애들은 잡아먹을 것처럼 굴고, 특히 공부까지 못하면 죽어라 싫어하고, 남이 벌을 안 받으면 자기가 손해 본 양 억울해하는 애들. 그러면서도 맡은 일은 거의 강박적으로 하는 애들. 그런데 인간관계는 어째야 하는지를 몰라서, 괜히 돈은 돈대로 내면서 인망 깎아먹고 그러지."

"모범생들의 행동 습성이지. 의사들 중에 모범생 아니었던 사람 얼마나 있기에."(73p)

 

 

어릴 적부터 겪어 온 바에 따르면 민호는 최선이라는 개념에 기묘한 진정성을 부여하는 녀석이었다. 중학생 시절, 민호 녀석이 운동부 선배의 여자친구와 사귀면서도 정작 그 선배에게는 무척이나 깍듯하게 대하는 걸 보고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났다. 도대체 무슨 심리냐, 사람 놀리는 재미 때문이냐 하고 묻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자기는 상대가 바라는 대로 한다는 거였다. 여자애가 양다리를 원하는 그래 주는 것이고, 선배는 공손한 후배를 원하니 그것도 따라 준다고 했다. 자신은 둘 모두가 좋으며 둘은 자신에게 잘해 주니까, 들키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셈이니까,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리라는 대답 앞에서 민형은 낯선 충격을 받았다.

모두를 동등하게 아끼며 서로 나누는 관계로부터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인간 유형이란 세인들의 상상과 달리 아름답지 않았다. 멀쩡한 줏대를 갖추지 못한 상태라면 재난이나 다름없었다. 진상이 돌출되기 전까지는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환상이 주어진다는 점, 그래서 도리어 진상을 묻어 두게 된다는 점이 그 재난을 더욱 변칙적이고 위험하게 만들었다.(94-95p)

 

 

순수한 헌신과 친절로 가장한 처세술의 경계를 묻자 묘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우리가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생각해······ 전문 분야가 다를 뿐이지."

"받을 거 받고, 줄 거 주면서 살겠다는 게 형 신조잖아. 나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나는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니는 것과 별개로 거절이 어려운 사람이거든. 돈이 아니라 인간 마음이 얽힌 문제라면 특히 그래. 그러니까 일단 어지간하면 남이 바라는 건 다 해 주고, 나한테 필요한 게 생기면 그때 말을 꺼내. 그중 누구든지 한 명이라도 해 주면 되는 일이야. 연대책임 후불제란 말이야. 이해하지?"

"전혀 모르겠는데."

"마음의 빚이란 그런 거야. 마음의 빚이라는 건······ 그게 정확히 얼마인지는 나도 상대도 모르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찔러 보고 아니면 마는 식으로 수금하는 거지. 그중에서 더 많이 납부하는 사람이 있으면 고마운 일이고.“

"심약하고 소심한 사람 건수 잡아서 등쳐먹는다는 소리를 고상하게 하는군."(136-137p)

 

 

대화에서 거듭 확언되는 사실이란 썩 확실치 못 한 것들이다. 가건물이 매 순간 흔들거리고 있음을 잊기 위해 억지로 고정못을 박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서로가 서로의 주장을 강경하게 앞세울 때는 특히 그렇다. 그러니까 가장 확실한 사실들은 말해지지 않는 영역에, 만약 입에 오르더라도 그렇게나 이렇게 쯤으로 호명되는 영역에 존재한다. 그것들은 너무나도 치명적인 진실이기 때문에 감히 발음할 수 없고, 발음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안다. 대화의 역설은 이러한 행태가 순전한 뜬소문에도 적용된다는 점에 있다. 치명적이지만 매혹적인 허구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똑같이 한다. 상대를 감싸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책임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그 일 때문에 딸이 그렇게 됐대요. 그렇게가 무엇인지, 그 일은 또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 하는 상태로 수근대는 말들. 침묵 아닌 침묵이 계속되는 동안 각자에게는 각자의 이야기가 생기고, 그건 대개 진상과 다르다. 다른 편이 차라리 낫다.(153-154p)

 

 

사람들은 말로 풀어낸 부분만을 아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언어에 앞서 복받치는 충동이야말로 가장 명료하다. 혼자 죽으려다가 그 소식에 기뻐할 누군가를 상상하고, 차라리 남을 죽이길 택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올곧은 마음이 필요할 터였다.(159-160p)

 

 

 

ㅡ 단요, <트윈> 中, 북다

,

2025/4/6

 

 

잘 읽히는 건 맞음. 지난 작품집인 ‘빛을 걷으면 빛’과 이번 작품을 거의 같은 시기에 읽으며 느낀 점은 이 작가가 꾸준히 천착하는 주제는 매 소설마다 소재는 달라지더라도 정체성, 세대, 연령, 계급 등이 서로 상이한 인물들이 여러 계기로 만남을 갖고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듯하나 결국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긴 힘들다는 것, 그리고 작품에서 비판, 풍자의 대상이 되는 인물을 독자도 조롱하거나 욕을 하며 볼 텐데 그 인물들과 책을 읽는 너희들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볼 수 있냐고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를 독자 쪽으로 돌려버리는 연출을 즐겨 쓴다는 것이다. 기억하고 싶거나 인상적인 문장은 없었다. 존나 내가 뭘 몰라서 그런 건가.

 

 

 

ㅡ 성해나, <혼모노> 中, 문학동네

,

2025/4/4

 

 

작가가 쓰고자 노력하는 소설은 아마도 자전적 소설로 실린 ‘김일성이 죽던 해’에서 화자가 설명하는 좋은 소설에 가닿으려는 노력이지 않을까.

 

주인공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만, 결국은 실패하는 소설

 

 

 

ㅡ 성해나, <빛을 걷으면 빛> 中, 문학동네

,

2025/4/2

 

 

나는 돈이 필요한 게 아니다. 죄책감 같은 것도 모른다. 내가 지나온 평생과 앞으로의 시간에 각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무엇을 하면 평판이 깎이는지, 무엇을 하면 감옥에 가는지, 무엇을 하면 돈을 잃는지, 무엇을 하면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지, 이 모든 감점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뿐이다. 그런 종류의 앎은 도덕이나 예의나 타산처럼 쓰일 수도 있지만 실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내게 중요한 것은 이 순간의 마음뿐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나는 너무 유아적이고 이기적이라서, 추해지지 않거나 영예로울 까닭조차 알지 못해서, 찰나의 기쁨보다 더 중요하고 복잡한 것을 느낄 능력이 없다. 나는 오래전에 지나간 선택지를 다시금 마주치고, 또 다른 기쁨을 꿈꾸기로 마음먹는다.

 

 

 

ㅡ 단요, <개와 소금의 왕국> 中, 우주라이크소설

,

2025/4/1

 

크게 말을 보탤 게 없이 뻔한 작품이었다. 한때 김애란을 좋아했던지라 에세이를 포함해서 그의 모든 글을 읽어왔다. 그러나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으며 내가 좋다고 느끼는 그의 글은 단편에 한정되는 게 아닐까라는 의문을 가졌었고, 이번 작품을 읽으며 그 생각은 더 굳어졌다. 무색무취의 청소년 문학인 줄 알았다.

 

 

 

ㅡ그래? 넌 이야기가 왜 좋은데?

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ㅡ끝이······ 있어서?

소리가 신기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ㅡ난 반댄데.

ㅡ뭐가?

ㅡ난 시작이 있어 좋거든. 이야기는 늘 시작되잖아.

지우가 잠시 먼 데를 봤다.

ㅡ이야기에 끝이 없으면 너무 암담하지 않아? 그게 끔찍한 이야기면 더.

소리도 시선을 잠시 허공에 뒀다.

ㅡ그렇다고 이야기가 시작조차 안 되면 허무하지 않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잖아.

ㅡ그런가?

ㅡ응.(66-67p)

 

 

누군가 집을 떠나 변해서 돌아오는 이야기, 지우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알았다. 하지만 그 결말을 잘 믿지는 않았다. 누군가 빛나는 재능으로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 재능이 구원이 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에 몰입하고 주인공을 응원하면서도 그게 자신의 이야기라 여기지는 않았다. 지우는 그보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 그래도 괜찮음을 알려주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떠나기, 변하기, 돌아오기, 그리고 그사이 벌어지는 여러 성장들. 하지만 실제의 우리는 그냥 돌아갈 뿐이라고, 그러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당시 자기 안의 무언가가 미세히 변했음을 깨닫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 삶의 나침반 속 바늘이 미지의 자성을 향해 약하게 떨릴 때가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그런 것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는데다 거의 표도 안 나는 그 정도의 변화도? 혹은 변화 없음도? 지우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다만 거기에는 조금 다른 이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지우는 그 과정에서 겪을 실망과 모욕을 포함해 이 모든 걸 어딘가 남겨둬야겠다 생각했다.(232-233p)

 

 

 

 

ㅡ 김애란, <이중 하나는 거짓말> 中, 문학동네

,

2025/3/31

 

이 소설에서는 어떤 의미나 상징을 내포하는 식으로 동물을 의인화 하지 않고 말이 통하지 않고 결코 상호 이해에 도달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긴다. 그 점을 새롭게 평가하는 듯.

 

 

 

그랬던 내가 어떻게 두희의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양심에 관한 속담을 예로 들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양심이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만한 행동을 하면 삼각형은 마음속에서 회전하며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양심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다 보면 뾰족했던 모서리가 닳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 얘기를 들은 후로 내 마음 속에는 크고 작은 삼각형들이 생겨났다. 그중 죽음에 관한 삼각형은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아빠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소식이 궁금하던 중학교 동창이 사고로 운명을 달리하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서서히 모서리가 닳아갔다.

한동안 나는 삼각형의 모서리가 다시 자라길 기다렸다. 첨예하고 날카로운 감각이 다시 자라나 나를 떠나지 않기를 밤마다 기도했다. 하지만 삼각형은 다시 자라나지 않았다. 내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삼각형은 내 삶의 모양에 맞춰 모양이 변했다.

한때 삼각형이었던 마음들을 떠올리며 나는 내가 비로소 어른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평생 알고 싶지 않던 어른들의 마음을 저절로 이해할 수 있었다. 보편적인 굴레에 무사히 안착했다는 사실과 마주할 때마다 나는 무척 분했지만, 한편으로는 편안했다.(103-104p)

 

 

세월이 지남에 따라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시간은 착실하게 나를 따라붙었다. 한동안 나는 시간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계절이 바뀌고, 강산이 변했다. 17년간 이어지던 두희의 시간이 끝났을 때, 나는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동안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말에 의지했다. 시간이 모든 걸 말끔하게 해결해주리라 믿었다. 이마에 남아 있던 수영모의 밴드 자국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 사라져 있는 것처럼.

하지만 이제 나는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시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건 아니라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거라면 왜 우리는 저절로 행복해지지 않는 것일까. 시간이 내 문제를 떠안고 멀리로 흘러가는데 왜 나는 여전히 가슴이 답답한 것일까. 끊임없이 시간이 흐르는데 어째서 두희의 방바닥에 남은 패인 자국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두희의 물건을 하나도 남김없이 정리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두희의 흔적은 장판 위에 남은 자국뿐이었다. 비바리움을 올려놓았던 선반의 귀퉁이가 몇 년간 장판을 눌렀던 흔적이었다. 장판을 교체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가도 눌린 자국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141-142p)

 

 

두희와 함께했던 시간은 두희의 죽음으로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 시간들은 여전히 내 곁에 남아 있었다. 조금 더 다양한 기쁨과 슬픔, 행복과 외로움, 상실과 위안 들이 나의 경험으로 남으면서 나에게는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182-183p)

 

 

"근데,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게 뭐가 나쁜거야? 우린 인간이잖아. 얘네도 타란툴라적인 생각으로 세상을 이해할 텐데."

"사람들이 가진 힘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너무 강력하잖아."

비바리움들을 전부 돌아본 나는 J가 데리고 있는 타란툴라들이 어째서 오랫동안 블루프로그에 남아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너무 흔해서, 은신처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아 관찰이 어려워서, 움직임이 지나치게 빨라서, 발색이 애매해서, 다리 부절을 회복하지 않아서. 타란툴라 사이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문제처럼 여겨지는 건 확실히 균형 관계가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219p)

 

 

내 인생에 블루프로그가 없었다면 어쩌면 내 삶은 훨씬 평탄했을지 몰랐다. 두희가 없는 삶 속에서는 두희로 인해 엄마와 척을 지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소리와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또 타란툴라에 대한 편견으로 나를 대하는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지금보다 단조로운 삶이 분명했다. 나는 단순하지 않은 삶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내 인생에 블루프로그가 있었기 때문에 포포를 지키고 싶어하는 원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나와 당신이 참 많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 무언가와 함께 산다는 건, 그래서 서로를 관찰할 수밖에 없고 그럼에도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다는 건 내게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였다.(225p)

 

 

 

ㅡ 정덕시, <거미는 토요일 새벽> 中, 은행나무

,

2025/3/25

 

 

 

"그 시대에 이런 음악이 있었다니 대단하군요!" "와, 정말 시대를 앞서 나간 패션이에요!" "이 디자인은 굉장히 세련됐네요. 옛날에 나온 거라고는 믿기지 않아요!" 이런 종류의 말들을 해보거나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로서는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들이다. 사람들은 왜 자신이 이전 시대의 사람들에 비해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왜 모두들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것이 나아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왜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걸까?

(...)

모두에게 확실한 것은 매 순간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슬퍼지지 않기는 매우 어렵다. 어쩌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것이 나아지고 있다는 믿음은, 죽음을 잊기 위한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 순간 죽음에 가까워진 딱 그만큼의 희망을 어떻게든 상상해내야만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그 시대에 이런 음악이 있었다니 대단하군요!"라는 말에 대한 느낌이 좀 달라진다. '뭐야, 뭐 그런 소리를 해'라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뭐랄까, 연민의 마음이 생긴다. 내 시대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는 것이나,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나, 연인과 만나 데이트를 하는 것이나, 맛있는 요리를 먹는 것이나, 결국 그저 죽음을 잊고 하루를 기분 좋게 살아보려는 노력인 것이다.(179-184p)

 

 

아무튼 영화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람도 꽃처럼 돌아오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람은 꽃'처럼' 돌아올 수 없다. 하지만 꽃'으로' 돌아오기는 하는 것이다. 꽃뿐만 아니라 고양이로, 안개로, 산으로, 별빛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물론 살아생전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다. 그래서 죽음은 슬프다. 죽음의 순간에, 하나의 인격은 영영 끝난다. 당사자의 입장에서도, 주변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그것은 서글픈 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는 한, 모든 것에는 끝이 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미 수많은 끝을 경험했다. 학교를 졸업했고, 직장을 그만두었고, 사랑했던 사람과 이별했고, 한때 친했던 몇몇 친구와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게 되었다. 어떤 끝은 갑작스레 찾아왔고 다른 끝은 시나브로 찾아왔다. 물론 옛 연인이나 친구들과는 어쩌면 재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시절의 그 관계, 그 마음, 그 촉감이 영영 끝났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고 보면 결국 매 순간이 시작이고 끝인 셈이다. 다시 말해, 매 순간이 탄생이고 죽음인 것이다. 지금은 저녁 여섯시 십일분이다. 창밖으로 붉은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몇 시간 뒷면 오늘 하루도 끝날 것이다. 그리고 2020년 4월 3일은 여영 돌아오지 않을 거이다. 존 레넌이나 김광석이 돌아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236-237p)

 

 

 

 

ㅡ 장기하, <상관 없는 거 아닌가?> 中, 문학동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