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19

 

저자의 주관적 해석을 크게 개입시키지 않는 책. 아주 간략하게마나 버지니아의 울프의 생애와 주요 작품에 얽힌 사실을 더듬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하루에 두 번씩 켄싱턴 가든으로 산책을 나갔다. 산책이 점점 따분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버지니아는 항상 모든 것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여왕의 문'에는 견과와 구두끈을 파는 여자가 있었고, '꽃 산책로'에는 자잘한 요철 장식물이 있었다. 대개 기삿거리가 있었고, 없는 경우에는 버지니아가 소설을 썼다. 버지니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아이였던 만큼, 버지니아가 쓰는 소설은 아주 긴 연재소설인 경우가 많았다.(20p)

 

 

그때 버지니아 스티븐에게 가장 괴로웠던 점은 느껴야 하는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목소리를 낮추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였지만, 그 모든 관례화된 공개적 애도의 안쪽에 담겨 있는 것은 밖으로 표출되어야 하는 슬픔이 아니라 슬픔보다 더 괴로울 수 있는 무감정이었다.

'나는 그때 했던 혼잣말을 지금껏 위기의 순간마다 되풀이해왔다. "아무 감정을 못 느끼겠어."'

외적 기대와 내적 경험의 불일치를 어렴풋이 감지했다고 할까. 하지만 울프가 그 불일치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과거의 스케치>를 쓸 때였다.

"우리는 위선자가 되어 슬픔의 관습에 갇혔다. (중략) 원치 않는 역할을 연기해야 했고, 이해하지 못한 대사를 기억해내야 했다."

후일 울프는 소설을 통해서 그런 껍데기를 부술 방법을 모색해 나간다. 그러면서 중요한 순간은 사회가 명하는 '이때'가 아니라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그때'라는 것, 우리의 감정은 시간을 지키지도 않고 순서를 따르지도 않는다는 것을 역설한다. 무감정을 용납하기도 하고, 사건에 대한 반응이 이상하게 즉각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기도하며, 경험의 개인적 차이를 존중하기도 한다. 하지만 열세 살의 버지니아 스티븐은 갇힌 느낌, 짓눌린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29p)

 

 

울프는 산책에서 돌아오자마자 노트에 "H"모양("두 개의 직사각형이 한 개의 선으로 연결된"모양)을 그렸다. 과거, 중간 휴지, 다시 이어지는 이야기, 이렇게 세 부분이었다. 이 단순한 구조가 <등대로>의 플롯이자 요점이었다.

울프 자신도 인정했듯이 <등대로>는 가족력의 유령들을 잠재우는 작업이었다.

(...)

부모에 대해서 스는 과정(울프의 표현에 따르면 정신분석과 흡사한 과정)이 울프의 정신 속에서 부모가 차지하는 비중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지만(울프는 소설 <세월>에서, 그리고 회고록<과거의 스케치>에서도 계속 부모에 대해서 쓰게 된다), 울프가 <등대로>를 통해 자신과 이 두 강력한 인물 사이의 관계를 제어할 수 있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울프에게 미스터, 미시스 램지를 그리는 일은 곧 자기 부모를 떠올리는 일이었다. 울프는 램지 부부에 대해 씀으로써 한 아이의 시선으로 자기 부모에 대한 기억을 되짚을 수 있었다(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연령이 다양한 8남매의 시선을 통해 한 아이가 한 가정에서 서서히 커가는 느낌을 따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부모를 안다고 할 때 그 앎은 감정적·과장적·의존적 앎인 만큼, 울프는 미스터, 미시스 램지를 아이의 시각뿐 아니라 어른의 시각으로, 곧 어른이 어른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안정적·공감적 시각으로도 보기를 원했다. 마흔네 살이 된 울프가 중년이 된 부모의 초상을 그림으로써 부모와 대면한 것이다. 바네사는 <등대로>를 읽자마자 이 초상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장성해서 엄마와 동등해진 내가 엄마를 만난 것 같아."(121-122p)

 

 

<파도>에서 "등장인물은 여섯 사람이면서 한 사람"이라고 울프는 말했다. 여섯 사람이자 한 사람인 등장인물은 울프의 친구들이기도 하지만, 울프 자신들이기도 하다. 울프가 일기에 썼던 말을 하기도 하고, 간간히 울프의 목소리로 말하기도 한다. 수전은 몽크스 하우스 정원의 울프를 닮았다. 고전문헌학 교수 니벨은 울프가 마다한 기득권층의 인생을 사는 인물이지만, 니벨이 주머니 속의 '이력서'를 만지작거리면서 자기의 가치를 불안한 듯 가늠하는 모습은 울프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우리는 저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이 의미심장한 생각은 클러리사 댈러웨이의 생각이기도 했다.

"이 사람은 지금 이러니까 이런 사람이고 저 사람은 지금 저러니까 저런 사람이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지."

울프가 자신의 작가 인생의 상당 부분을 바친 작업은 그런 라벨들을 해체하는 작업, 곧 누군가를 '이런 사람' 또는 '저런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데 수반되는 허위를 폭로하는 작업이었다.

<파도>의 등장인물들이 어느 차원에서 "모두 하나"라면, 화자가 바뀌는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모두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진다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이다. 말하는 내용은 달라도 말하는 리듬은 똑같다.

(...)

울프가 리듬을 타면서 쓴 글이기 때문에 독자로 리듬을 타면서 읽어야 한다. 속독을 불가능하다. 소설의 속도는 등장인물들이 자기를 둘러싼 세상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느긋한 속도에 맞추어져 있다. <파도>의 등장인물들은 다 큰 어른들이지만,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인지할 때 느끼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 같은 경이로움이다. 그들의 독백은 현재형 시제의 독백, 곧 경이로운 것들 사이에서 한순간 걸음을 멈추고 그 순간의 놀라움을 들려주는 듯한 어조(다 큰 어른들에게서 좀처럼 들어볼 수 없는 어조)의 독백이다. <파도>는 울프의 가장 어려운 책일지도 모르지만, 울프의 목소리 속의 어린아이 같은 어조를 가장 분명하게 들려주는 책이기도 하다.

울프에게는 질릴 줄 모르는 호기심과 디테일을 향한 욕심이 있었다고 울프의 친구들은 종종 이야기했다. 어린아이들이 울프에게 끌린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비타 색빌웨스트의 아들 나이겔 니콜슨도 울프에게 끌린 어린아이들 중 하나였다.

 

울프가 그날의 사건을 들려달라고 하기에 내가 대답했다.

"사건은 없었는데요. 그냥 학교에서 집까지 왔어요."

울프가 다시 물었다.

"저런! 그러지 말고, 처음부터 다시 해보자. 아침에 무엇이 너를 깨워주었을까?“

내가 대답했다. "태양. 이튼에서 기숙사 창문으로 들어오는 태양.“

그러자 울프가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어떤 태양이었을까? 웃는 태양? 화난 태양?“

나는 이런 식으로 울프와 함께 내 하루를 하나하나 되짚어 나갔다.(154-155p)

 

 

<세월>이 울프를 자살 직전까지 몰아갔다는 것, <세월>과 1930년대 중반의 정치 상황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 <세월>이라는 픽션은 <3기니>라는 난폭한 논픽션과 짝을 이루는 작품이라는 것, <세월>의 형식 패턴은 총체성의 비전보다는 와해와 결렬에 가깝다는 것은 모두 사실이다. 이 사실들 때문인지, <세월>에 대한 비평은 그리 열렬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평가들이 주로 강조하는 것은 실패와 고통(<세월>의 작가가 겪었던 실패와 고통, 그리고 <세월>의 등장인물들이 겪는 실패와 고통)이고, 비평가들이 주로 지적하는 것은 <세월>이 <파도>와 완전히 상반된 작품이라는 점, 곧 내면 세계(서정성)를 뒤로 하고 바깥 세계(복잡한 리얼리즘)를 향한다는 점이다. <세월>은 울프의 소설들 중에서 가장 덜 읽히고 가장 덜 가르쳐지는 작품인 만큼, 지금 일반 독자 중에 <세월>을 읽는 독자는 간혹 드문드문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세월>은 울프가 생존 작가일 때 영국 국내에서 가장 빨리 팔려나간 작품이었고 미국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유일한 작품이었다. <세월>이 일반 독자에게 읽히기를 바란다는 뜻을 울프 자신이 분명하게 밝히기도 했다. <파도>의 판매고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울프가 '일반 독자'를 중요시한 작가임을 기억하게 해주는 말이기도 하다.(182-183p)

 

 

 

ㅡ 알렉산드라 해리스,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 中,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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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6

 

 

 

그러나 미숙함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위험은 글쓰기를 둘러싼 욕심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고통을 말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고픈 마음, 고통을 재료 삼아 예술 자체에 아부하고픈 야망, 그런 욕망들이 언어로 경험을 직조하는 작업에서 지배적인 힘이 되면 내게 일어난 사건을 배반하고 자신의 진실에서 멀어지는 타락이 시작된다.

(...)

병자로서 고통을 전하되 끝없이 하소연하지 않는 작가로서의 자의식, 할 수 있는 말을 통해 할 수 없는 말까지 전하는 능란함, 쉬운 승리로도 쉬운 절망으로도 가벼이 기울지 않는 평정심, 아프다는 것을 시시한 글의 변명으로 삼지 않는 자존, 자기가 보는 어둠을 부러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것으로 자신을 장식하지 않는 윤리, 오랜 시간 매일 공들여 노력하는 자기 규율, 나의 고통은 유일하고 절대적이나 그와 동시에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고통을 인식하는 균형감, 고립시키는 고통을 접면을 넓히는 기회로 전환하는 놀라운 도약.

좋은 글의 조건을 나열해보면 쓰는 기술과 앓는 기술이 어느 정도 겹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앓기의 기술은 삶의 기술과 다른 말이 아니며, 삶의 기술은 쓰기의 기술과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46-47p)

 

 

"통증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통증은 논박할 수 없게, 또 절대적으로 현존하는 것이어서, '고통스러워하기'는 '확신하기'의 가장 생생한 예로 여겨질 수 있을 정도다. 반면 타인에게 통증은 도무지 잡히지 않는 것이어서 '통증에 관해 듣기'는 '의심하기'의 가장 좋은 사례가 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통증은 공유하기 불가능한 무언가로서, 부정될 수 없는 것이자 동시에 확증될 수도 없는 무언가로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난다."

(...)

"통증은 언어의 근본적인 실패다. (...) [통증을 겪는 사람은] 통증으로 인해 이 고문과도 같은 친밀성에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소통할 수 없는 통증은 탐험가들이 형체가 있는 지형도를 그릴 수 있는 대륙이 아니다. 통증의 칼날 아래서 존재의 통일성은 조각나고 그리하여 언어도 조각난다. 그것은 비명을, 불평을, 신음을, 울음 또는 침묵을 유발한다. 다시 말해 발화와 사고의 실패를 유발한다."

(...)

통증의 실제 느낌이 어떤지를 묘사할 때 말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는가? 언어는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잠잠해진 뒤에야 찾아온다. 말은 오직 기억에만 의지하며, 무력하거나 거짓이거나 둘 중 하나다."

(...)

결정적으로 문학에서 질병 묘사를 막는 것은 언어의 빈곤이다. 영어, 이 언어는 햄릿의 사변과 리어왕의 비극을 표현할 수는 있어도 오한이나 두통을 표현할 말은 없이 한쪽으로만 무성하다. 평범한 여학생도 사랑에 빠지면 셰익스피어나 키츠로 자신의 마음을 대신 말할 수 있지만, 아픈 사람이 머릿속의 통증을 의사에게 묘사하려고 하면 언어는 즉시 말라버린다."

(...)

질병을 묘사하는 '언어의 빈곤'에 관해 울프가 불평할 때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픈 사람에게 '쓸 수 있는 기존의 말'이 없다고 울프는 말한다. 그렇다면 통증과 근수축과 협착과 경련을 노래하는 그 모든 표현들은 뭐란 말인가. 후벼파는 듯한 통증, 파고드는 듯한 통증, 찌르고 꼬집는 듯한 통증, 욱신거리는 통증, 작열하는 통증, 쏘는 듯한 통증, 얼얼한 통증, 살점을 떼어내는 듯한 통증, 모두 좋은 표현들이다. 모두 오래된 언어들이다."

(...)

문제는 통증이 사과가 아니라는 데서 온다.

사과는 내 몸 밖에 존재하며 볼 수 있는 사물이다. 그것은 내가 쳐다보고 있지 않아도, 다시 말해 내 지각과는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감각할 수 있으므로 나는 그 크기와 모양과 색과 향과 맛을 표현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 사과를 쥐여주기만 하면 된다. 반면 통증은 주관적이다. 통증은 내가 지각해야 존재하며 내 통증은 나만이 지각할 수 있다. 따라서 통증이 있으며 얼마나 아프고 어떻게 아픈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선 밖으로 표현해야 한다. 표현한다는 건 내 몸 밖에 통증을 알리는 표지 또는 통증과 닮은 사물을 만드는 일이다. 외부 세계에 사과 같은 것이 존재하도록 하는 일이다.

(표정, 제스처, 신음, 비명 등 반사에 가까운 신체적 표현을 제외하고) 가장 쉽고 흔한 표현 수단은 언어다. 그러나 앞의 인용문들이 보여주듯 언어가 통증을 만족스럽게 전달할 수 있느냐에 관해선 비관하는 이들이 많다. 혹은 최소한 그건 논쟁거리다.(51-55p)

 

 

만성 통증이 있는 많은 환자들은 그들이 괴로움 호소가 가족, 친구, 또 의사들까지도 그저 지치게 하고 마침내는 열받게까지 한다는 것을 재빨리 배운다. 침묵은 아무도 보거나 증명할 수 없는 통증에 대한 흔한 반응이 된다.

 

급성 통증이 울부짖게 한다면 만성 통증은 이와 같은 관계의 역학을 거쳐 침묵하게 한다. 이 침묵은 언어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한계 때문이고(앞에 적은 일화에서 당시 나는 언니에게 이미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었기에 신세타령까지 할 수는 없었다), 의료 서비스의 한계, 자존감의 한계 때문이다. 팻말을 항상 들고 있을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곁에 남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먼저 인정과 관심을 구걸하는 자신의 비굴함과 비참함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환자들은 점점 말하지 않는 법을 익힌다. 수면 아래의 삶을 혼자 견디는 데 적응한다. 어떤 검사 결과나 수치로 표지되지 않는 병의 경과와 영향을 많은 부분 조용히 겪어간다.

하지만 이 조용한 표면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혀 조용하지 않다.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그건 전적이고 폭력적인 과정이라고. '전적'인 이유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구석이 없기 때문이고, '폭력적'인 이유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정성을 경험하기 때문이다.(72-73p)

 

 

그러나 그 모든 그림 중 고통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바로 이 그림, 피도 칼도 상처도 등장하지 않는 이 그림을 고르겠다.

얼핏 보기엔 평화로운 어촌 마을의 일상을 그린 풍경화로 보인다. 농부는 밭을 갈고 양치기는 양을 몰고 낚시꾼은 낚시를 하고 배는 바다 위를 떠간다. 제목을 보고 나서야 그림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추락하는 이카로스가 있는 풍경>. 화면 오른쪽 물 아래로 사라져가는 두 다리가 이카로스다. 또 양치기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도 알게 된다. 양치기는 아직 하늘을 날고 있는 이카로스의 아버지 다이달로스를 보고 있다.

처음 이 그림을 봤을 때 '천재다!'라며 감탄했다. 내 오랜 관심이 '보이지 않는 내부의 것을 어떻게 그리지'에 있었다면, 피터르 브뤼헐은 내면의 암흑이나 지옥을 그리는 대신 시점을 밖으로 빼내 전환함으로써 고통받는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오히려 정확히 그려내기 때문이다. 태양 가까이 날았던 드문 환희와 영광의 기억을 포함해 모든 것이 사라지는 순간, 한 세계가 사라지는 그 순간은 화면 한구석 사라져가는, 거의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작고 가냘픈 두 다리로 나타날 뿐이다. 너무도 사소하고, 하찮고, 혼자다. 이와 대조적으로 화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변함없이 일상적인 세계의 풍경이다. 이 격차가 고통임을 브뤼헐은 알고 있었다.

(...)

농부는 밭을 간다. 양치기는 양을 친다. 낚시꾼은 낚시를 한다. 배는 항해한다. 밀랍을 녹인 태양도, 소년을 삼킨 바다도 늘 그랬던 것처럼 거기 그렇게 있다. 모든 것이 무너져도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는다.(83-86p)

 

 

고통이 표현 불가능하며 공유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관해 여러 찬동과 논박의 말이 있지만, 내 생각에 많은 경우 문제는 고통을 표현하는 언어와 재현의 한계가 아니라 사람들이 듣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고통뿐 아니라 환희 같은 내저 상태 또한 언어화하기 어려우며 표현하기 위해 직유법을 동원해야 할 때가 많다. 우리는 몸이 '찢어지는 것처럼' '칼로 찌르는 듯이' '두드려 맞은 것같이' 아프다고 말하지만, 몸이 '부푸는 것처럼' '둥실 떠오르는 듯이' '녹아내리는 것같이' 기쁘다고도 표현하지 않는가. 다만 고통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 자체로 충족된 상태인 환희와는 다르게 고통의 호소가 필요의 호소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무언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주목, 이해, 인정, 연민, 공감, 치료, 도움, 지원, 정의, 행동, 변화····· 고통 말하기는 듣는 이에게 요구한다. 고통을 호소하는 말을 듣는다는 것은 크든 작든 자신의 시간과 관심과 자원을 쏟길 요구받는 것이며, 남의 처지에 자신을 놓아보고 공감의 말 한마디를 건네는 일 같은 가장 사소한 연민에 드는 에너지조차 결코 적지 않다. 그리하여 남의 고통을 남의 집 불구경하듯 할 수 없을 때, 시혜적인 위치에서 동정해주며 도덕적 만족감에 뿌듯해하는 일 이상을 해야 할 때, 상대의 고통이 미심쩍거나 충분치 않다고 여겨질 때, 고통과 연민의 대차대조표를 그려보며 문득 억울한 마음이 들 때('내가 힘들 땐 별로 관심 못 받았는데') 사람들은 고통의 청자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화제 전환과 '나도 아프다'와 아픈 사람 비난과 고통의 사소화와 끊어버리는 전화들은 벗어나는 방법들이다.

시인 앤 보이어가 유방암 투병을 하는 동안 어떤 친구들은 관계에서 탈출 버튼을 누르며 이런 말을 남겼다. “너무 곤란하다.” “감당 못 하겠다.” 어려울 때 짐을 나누어 짐으로써 인간이 생존할 수 있다는 당위와 일반론이 내가 짐을 나누어 져야 하는 구체적인 현실이 되면 자기 연민이 타인 연민을 압도하기도 한다. ‘네가 암에 걸려서 내가 힘들다'는 것이다. 연민의 조건도 까다로워진다. 이제 사람들은 아픈 이가 자기 기준과 취향에 맞는 모습으로 아프길 바란다. 다시 앤 보이어의 말. "[우리는 전보다] 더 낫고 더 강하면서도 동시에 가슴이 아려올 정도로 악화한 상태이기도 해야 한다. 우리는 불행은 혼자 간직하고 용기는 만인에게 기부해야 한다." 사람들이 아픈 사람에게 기대하는 바는 어쩌면 다음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마음을 써줄 가치가 있을 만큼 심각하게 아프되 이성적인 모습을 보이며 평정심을 유지하고 병을 농담거리로 삼을 만큼 여유있는 자세를 취하면서 한탄과 한숨은 안으로만 삼키고 안 들리게 울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러나 고무적인 이야기와 깨달음은 내게 다오.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커다란 자원과 관심이 집중되어야 하는 암 환자의 경우와는 달리 만성적으로 아픈 사람의 친구들은 병자와 서서히 멀어지는 것 같다. 새 소식은 아프다는 소식뿐, 얼굴 한 번 보는 것도 여의치 않은 친구는 친구로 남기 어렵다. 점점 연락이 뜸해지는 게 아프다는 상황 때문인지 시간이 흐르며 각자의 인생 행로가 시나브로 갈라졌기 때문인지조차 알 수 없다. 긴 병에 효자 없다. 가끔 마음이 어두워지는 날이면 드는 생각이다. 효자도 없고 친구도 없고 때로는 언니도 없고 엄마도 없다.

 

하지만 나는 아픈 사람의 자기중심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병자의 관심은 자신의 병, 자신의 몸, 자신의 통증, 자신의 증상, 자신의 약, 자신의 치료, 자신의 상실, 자신의 절망, 자신의 걱정, 자신의 외로움에 쏠려 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저런 어려움과 씨름하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눈앞의 사람이 고통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가장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병자다. 자기 몸 안의 비극에 정신을 빼앗긴 그에게는 외부로 쏟을 관심도 에너지도 없다.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는 걸 모두가 알아주길 원하지만, 이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는 거의 모든 관계와 조우에서 상처받고 분노에 찬다.

(...)

나는 또한 아픈 사람의 하소연이 비슷한 내용으로 영원히 계속되는 경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이건 그 사람의 취미가 넋두리라서가 아니라 고통의 속성, 상처의 속성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은 말하게 하며, 애초에 완전히 말로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반복해서 말하게 한다. 고장난 턴테이블처럼 바늘은 마음에 파인 같은 홈만을 긁고 또 긁으며 같은 가락을 재생한다.(89-93p)

 

 

'삶을 이끌어간다lead a life'는 표현이 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노래하는 오래전 가요도 있다. '내 인생의 운전대를 내가 쥐어야 한다'는 스님-작가-구루의 인생 조언도 있다. 내가 알게 된 인생과는 반대다. 삶은 내 몸이라는 상황을 포함하여 내가 던져진 상황 안에서의 발버둥이고, 세계의 작용에 대한 내 반작용의 총합이며, 나는 궤도를 볼 수 없는 롤러코스터에 오른 겁먹은 승객이다.(135-136p)

 

 

물론 우리는 끝을 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살했다. 그는 '병에 진'것인가? 해피엔딩이 아니기에 불우하게 산 사람이 되는가? 조울병은 병이며, 무섭고 지독한 병이다. "다시 돌아오기에는 이번엔 너무 멀리 가버린 것 같아." 언니에게 남긴 유서에 울프는 썼다. 이번엔. 그 한 번의 돌아오지 못함이 인생 전체를 검게 칠하는 결말은 아닐 것이다. 더 이상 돌아올 수 없을 때까지는 계속 돌아온 게 아닌가.

 

한 해가 오고 또 오고 계속 올 거고. 아 이런, 시간은 너무도 길게 이어지고 그 긴 시간을 바라보면 늘 겁을 먹는 것 같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계속 나아간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열다섯 살의 버지니아 울프가 쓴 이런 일기를 마주친다.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했던 이부 언니마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해의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에 새긴 문장들이다. 그후 울프는 사십삼 년을 더 산다. 이 초년의 일기에 쓴 대로, 두려움을 마주하고 용기를 내고 계속 걸어가기로 결단하기를 거듭한 삶이었다.

(...)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한 1941년 3월 당시 그는 책을 완성한 후에 언제나 겪는 실패의 느낌에 우울해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독일군 전투기의 폭격이 이어지고, 울프 부부의 런던 집이 파괴되고, 시골집 주변에도 폭탄이 떨어지던 때였다. 나치의 영국 침공이 임박한 듯 보였다. 유대인이었던 남편 레너드와 버지니아는 독일군 상륙을 대비하여 자살 방법을 논의하며 자살에 쓸 아편을 구해두기도 한다. 기분의 저조가 없었더라도 어려운 시기였고 종말이 가까이 있는 듯 보인 때였던 것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히틀러가 죽였다고, 울프가 세계대전의 희생자라고 생각한다.(202-203p)

 

 

질병이나 삶에서 마주치는 다른 재앙 때문에 언제나 놀라겠지만, 그래도 나는 괜찮을 것이며 어디로 가든 괜찮을 것이다. 어디로 가든 그곳에서 새로운 나의 일부를 찾을 것이고, 선에 이바지할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새로운 차원의 사랑을 발견할 것이다. 신은 창문을 닫으시면서 문을 여신다.

(...)

천 번쯤 들은 것 같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어요'라든지 '신께서 더 나은 이야기를 쓰고 계신 거예요' 같은 말들. 보아하니 신은 돌아다니면서 문을 닫고 창문을 여느라 바쁜 것 같았다. 아무리 열고 닫아도 질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말에서 중요한 건 언제나 맥락이지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겐 더욱 그렇다. 누가 어떤 상황에서 발화하여 어떻게 전달된 말인가에 따라 똑같은 말이 비수가 되기도 하고 동아줄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자신의 불행에 압도되어 있는 아픈 사람은 애초에 좋은 대화 상대가 아니다. 이 고통을 누가 안다고 해도 화가 나고(네가 뭘 알아) 모른다고 해도 화가 난다(이걸 어떻게 몰라). 뭘 먹으라든가 먹지 말라는 말, 뭐가 몸에 좋다는 말에도 진절머리가 난다(내가 안 해본 게 있을 것 같냐). 건강한 사람이 편안하게 호흡을 하며 사지를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사실에조차 비뚤어진 마음이 들 수 있는 게 아픈 사람이다.

(...)

그러나 한편으로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좀전에 나는 중병, 만성적인 병,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을 겪은 실제 또는 픽션 속 여덟 사람의 말을 이미 소개했으며, 이들의 말이 나에게 그랬듯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줄 것이라는 사실이다.

(...)

무엇보다, 막을 새도 없이 파고드는 가족이나 지인들의 말과는 달리 당신은 선택할 수 있다. 책은 덮으면 그만인 것이다. 의학적 처치 때문이든 주변 사람들 때문이든 병 자체 때문이든 끊임없이 몸과 마음이 침입당하는 느낌에 시달리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소통에 목마른 투병인에게, 사적으로 별관계가 없는 사람의 말을 듣거나 듣지 않길 선택할 수 있다는 독서의 조건은 아플 때 책을 오히려 가장 가깝고 편한 친구로 만든다. 당신은 이 글도 덮어버릴 수 있다. 이 사실이 내게 계속 쓸 용기를 준다.(209-212p)

 

 

조지 클루니는 보드카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래, 계속 가봤자 뭐할 거야. 살아봤자 뭐하겠어. 그렇지만 일단 가기로 마음먹는다면 계속 해봐야지." 무엇이 날.

깨달음과 결단으로 이어지는 익숙하고 바람직한 서사로 글을 끝맺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점점 작아지는 엄마의 몸, 그럼에도 여전히 나를 미치게 하는 엄마의 잔소리("간절히 기도하고 성령 받아라"), 잇몸 퇴축과 치간 칫솔과 홍대 근처 좋은 치과가 주요 주제인 전화 통화, 아이허브 사이트에서의 영양제 쇼핑, 초등학생들의 머릿속에 영어 현재완료 시제를 쑤셔 넣으려는 나의 닦달, 장마철에 집으로 들어온 돈벌레와 에프킬라, 눈이 아파 급격히 줄어든 트위터 사용 시간, 돈 걱정, 허리 걱정, 녹아버린 빙하, 욕실 청소, 과탄산소다, 조카의 입시 준비, '점심에 뭐 먹지', 양파 다듬기, 코로나 백신, '계속할 수 있을까'와 '계속해야 한다'를 오가는 글쓰기, 바로 이 글, 자신에게조차 감추고 싶은 이 우울한 병자의 글. 내 사랑은 더 낮고 넓어져야 하는지 모른다. 만물이야. 이번엔 이것들 사이에 발을 꽂아 넣을 순 없을까. 나를 여기 이 흙에 심을 순 없을까. 마침내 그럴 순 없을까.(226-227p)

 

 

 

ㅡ 메이, <아프다는 것에 관하여> 中, 복복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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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4

 

 

사이비 교주 취재 담당 기자로 30년을 일한 기록을 모은 취재 무용담. 현상에 대한 분석이나 통찰은 없고 그냥 자신이 경험한 취재 에피소드 나열에 그쳐 식상하다.

사이비 교주나 사이비 단체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저자가 제안하는 현실적인 방법 중 하나가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라니 참으로 기독교인다운 발상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사람들은 왜 사이비 종교에 빠질까? 나는 강의할 때 그 이유의 핵심을 '사랑' 때문이라고 말한다. 너무도 뻔한 말일 수 있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사랑의 결핍 때문에 사이비에 빠지게 된다.(214p)

 

사람들이 사이비에 빠지는 많은 이유 중 하나일 수는 있으나 그게 저렇게 단순하면 얼마나 좋을까...

 

 

사이비 교주들을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해 볼 수 있었다. 하나는 '사기꾼'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신 이상자'다.

사기꾼 교주는 말 그대로 사기를 친다. 그들의 주된 목적은 돈이나 여자다. 결코 진리가 아니다. 사기꾼 교주의 가장 큰 특징은 주 자신이 스스로 신이 아닌 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오직 신의 이름을 이용할 뿐이다. 반면에 정신 이상자 교주는 정말 자신이 신이거나 신과 같은 존재인 줄로 착각한다. 이들은 대체로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려고 한다. 그런 교주의 수는 많지 않다. 또 오래 존립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돈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서이다.(232-233p)

 

 

요즘 교주와 과거 교주 사이에는 어떤 특징들이 있을까. 먼저 자체 교리로 무장하고 있느냐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요즘 교주들은 과거에 비해 이론(교리)으로 무장하고 있는 경향이 짙다. 요즘 교주들은 나름대로 체계적인 교리를 구성해 놓았다. 신도들에게도 교리공부를 강조한다. 기독교 옷을 입고 있는 사이비는 <성경>을 사용하고, 불교 계통의 사이비는 <격암유록> 등을 주로 많이 사용한다.

(...)

둘째는 사이비 교주들의 반대 세력 대응 태도다. 20~30년 전만 해도 교주들은 신도들을 동원해 자신을 비판하고 연구하는 기관이나 신문, 방송 언론사 등을 직접 찾아가 물리적으로 실력 행사하는 일이 잦았다. 출입문을 부수거나 책상을 뒤엎고, 심지어 연구원과 기자들을 폭행하기도 했다. 공영 방송국을 점령하여 방송에 차질이 발생한 적도 있었다. 심지어 한 사이비 이단 연구가가 모 신도에 의해 칼에 찔려 사망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 교주들은 대체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어설픈 물리적 행동은 오히려 자신들에게 손해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으며, 또 개인 휴대전화가 언제든 녹음과 영상 촬영으로 동원될 수 있는 시대다.

그 대신 법적 고소 사건이 대폭 늘었다. 언론사를 상대로는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소송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것이 요즘 교주들의 특징이다. 따라서 기자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취재할 때 심증보다 물증 중심으로 진행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이비 교주들 중 어떤 이는 신문 방송에 자신을 비판하는 보도가 나올 경우 무조건 소를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법정 싸움을 하면 자신이 패소할 것이 뻔한데도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이유는 법적 승소가 아니라, 내부 단속용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을 비판하는 신문 방송 보도로 인해 동요되는 신도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게 주된 목적이다. 교주는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모두 거짓말이고, 또 증인들도 돈 때문에 사주받은 것이라고 떠든다. 신도들을 대거 동원하여 교주 결백을 증명한다는 집회를 갖기도 한다.(251-256p)

 

 

 

ㅡ 장운철, <나는 교주다> 中, 파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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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9

 

 

 

어느 날 수미씨가 내게 언제 가장 행복한지를 물은 적이 있었다. 나는 불행을 잊고 있을 때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수미씨는 장애가 불행의 원인이라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눈이 먼 게 불행한 게 아니라 이 상태로 영원히 살아가야 한다는 게 진짜 불행이라고 말했다.

곧 바이러스는 진정될 것이다. 세상은 예전의 일상으로 차츰 복귀해나갈 거다. 내 기준으로 팬데믹은 진짜 불행이 아니다. 그것에는 끝이 있기 때문이다.(159p)

 

 

마사지 숍까지는 차로 10분 거리다. 예약은 오전 11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장애인 콜택시는 늦어도 8시부터 호출해야 한다. 기본 두어 시간은 기다려야 연결이 된다. 10분 거리를 3시간에 걸쳐 가야 하는 것, 그것이 앞 못 보는 장애인의 삶이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 빨리 체념한다. 그것이야말로 불행에서 빠져나오는 가장 빠른 길이다.(185p)

 

 

 

 

ㅡ 조승리,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中,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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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7

 

 

댈러웨이 부인(시공사 판본 기준으로 열린책들 참고), 안나 카레리나(문학동네), 사랑에 관하여(펭귄), 철도 여행의 역사(볼프강 쉬벨부쉬)는 챙겨봐야지.

 

 

 

이런 안나의 태도를 보며 골리니쉬체프는 생각한다. "그녀 자신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말하자면 남편을 불행하게 하고 그와 아이들을 버리고 명예고 뭐고 다 잃었으면서도 어떻게 이토록 발랄하고 쾌활하고 행복한 기분으로 지낼 수 있는지를 그는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음미할수록 흥미로운 대목이다. 독자 또한 골리니쉬체프의 시선을 따라 안나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되기도 하지만, 한 사람의 매력이나 본질은 자기 자신은 오히려 모르고 낯선 타인이 먼저 알아봐 주는 것이란 생각을 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43-44p)

 

 

예의범절의 가장 중요한 법칙 중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침묵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그냥 알고 지내는 사람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모습을 보여봐요. 그들에게 당신의 고통, 즐거움, 사사로운 일들에 대해 들려줘 봐요. 처음에는 관심 있는 척하겠지만 곧 냉담해질 거예요.(74p)

 

 

포의 작품은 논리에서 출발하며, 그의 인물들은 줄곧 논리적인 태도를 견지하려 애를 쓴다. 하지만 결국 인간의 논리로는 이해 불가능한 영역 및 현상이 있음이 강조된다. 인간의 지각이란 그 한계가 뚜렷한 것이어서 어떤 현상의 원인 결과를 파악할 수 없으며, 실재하는 어떤 건물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마저도 실패하고 만다. 신문 헤드라인으로 뽑으면 이런 식이 되겠다. "포, 이번에도 열심히 관찰했지만 이해는 실패···."(101p)

 

 

에밀 졸라는 기본적으로 장면 묘사에 뛰어난 작가여서 그냥 묘사를 읽어나가는 재미만 해도 상당하다. 대사 역시 노동자들의 말투가 그대로 드러나 생생함을 전달한다. 여기에 얹어지는 중요한 작가적 시각이 있는데, 바로 졸라가 취한 '자연과학자의 시선'이다. 그는 냉정한 과학자의 시선으로 인간과 세상살이를 바라봤다. 요컨대 인간의 운명에는 개인의 의지나 열정, 선한 마음 같은 것보다 유전과 환경 같은 자연법칙이 훨씬 중요하고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본 것이다. 예를 들어 알코올 중독자의 아들은 알코올 중독자가 될 수밖에 없으며,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관, 세계관이 반영된 문학 또는 예술을 '자연주의'라 부른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자연주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자연과학자의 눈'으로 관찰, 분석, 검토, 보고하고자 하는 태도를 말한다. 사실주의와 더불어 19세기를 특징짓는 문예사조라 할 수 있는 자연주의는 이후 20세기 초중반(그리고 후반)까지 서구는 물론 비서구권 여러 지역에서 문학과 예술이 추구해야 할 지향점이 되었다.

에밀 졸라는 자연과학자의 눈으로 세상과 인간을 보았는데, 그의 관점은 어떤 한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회 전체라는 관점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 아래 졸라는 19세기 중후반 프랑스 사회의 풍속, 가치관,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 곧 시대상 전체를 상세히 묘사한다. 이런 면에서 졸라의 소설들은 '예술'보다는 '사회과학'에 더 가깝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279-280p)

 

 

처음 얼마 동안은 읽을 수가 없었다. 주위의 혼잡과 사람들의 말소리가 방해를 했으며, 이윽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그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다음에는 왼쪽 창문을 두드리며 창틀에 쌓이는 눈송이, 방한구를 뒤집어쓴 채 몸 한쪽 면이 온통 눈에 덮인 채 지나가는 차장의 모습, 밖에 눈보라가 참 무섭게 몰아친다는 사람들의 얘기 소리, 이러한 것들이 그녀의 주의를 산만하게 했다. 그러나 그다음부터는 똑같은 것의 연속이었다. 뭔가를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를 내는 기차의 진동, 창문을 두드리는 눈, 뜨겁다가 식었다가 다시 뜨거워졌다 하는 증기열의 변화, 어둑함 속에서 아른거리는 똑같은 얼굴들과 똑같은 목소리들. 그래서 안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읽은 것이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안나 아르카디예브나는 책을 읽었고 내용도 이해했지만 읽는다는 것, 즉 책에 쓰인 타인의 삶의 반영을 뒤따라간다는 것이 불쾌했다. 그녀 자신의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했다. 소설의 여주인공이 환자를 간호하고 있는 부분을 읽을 때는 자기도 조용한 발걸음으로 병실 안을 걷고 싶은 욕구에 시달렸고, 의회 의원이 연설을 하고 있는 장면을 읽을 때면 자기도 연설을 하고 싶어졌다. 또 레이디 메리가 말에 올라타 사냥을 하며 시누이를 약 올리고 그 대담함으로 좌중을 놀라게 하는 대목을 읽을 때면 자기도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조그만 손으로 매끈한 페이퍼나이프를 만지작거리며 책을 읽으려고 애썼다.(334-336p)

 

 

하지만 시라는 것은 너무 어린 나이에 쓰면 보잘것없는 것이 되고 만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한다. 평생을 두고, 가능한 한 오래 살면서 의미와 달콤함을 모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그 다음 아마 오랜 삶의 맨 마지막에 열 줄 정도의 좋은 시를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시라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는 경험이다. 시 한 줄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도시를, 온갖 사람들과 사물들을 보아야 하며, 동물들을 알아야만 한다. 새들이 어떤 식으로 나는지 알아야 하며, 아침에 꽃이 필 때 꽃의 몸짓을 알아야 한다.

(...)

그러나 기억이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기억이 많아진다면 그것들을 잊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다가 기억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큰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기억 그 자체로는 아직 시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억들이 우리 안에서 피가 되고, 시선과 태도가 되고, 이름 없는 것이 되어 더 이상 우리 자신과 분리될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너무나 드문 한순간에 그 기억의 한가운데에서 시구의 첫 단어가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353-355p)

 

 

서가 오른편의 창문이 열려 있지 않나요? 책 읽기를 멈추고 눈을 들어 창밖을 내다보는 건 얼마나 즐거운가요! 그럴 때 눈에 들어오는 장면들 (...) 독서와는 전쳐 무관한 그 무의식적이고 끝없는 움직임이 얼마나 상상을 자극하나요?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어떻게 된 일인지 창문이 열려 있었고, 책은 에스칼로니아 울타리와 멀리 펼쳐진 하늘을 배경으로 놓여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읽고 있는 것이 책이 아니라 풍경 위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 인쇄되어 엮이고 제본된 것이 아니라 마치 나무와 들판과 더운 여름 하늘이 만들어낸 작품 같았고, 맑은 아침에 사물들의 윤곽을 따라 헤엄치는 공기 같았다.

- 버지니아 울프,「독서」

 

바로 이것, 창문 밖 주변 풍경을 내다보게 만드는 것이 책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다. 책 읽기는 우리에게 주변 세상을 살피게 한다. 창밖 풍경(자연)은 물론 나와 전혀 관련 없는 다른 시대와 다른 나라의 풍속과 감정과 사람들 등 '다른 세계'를 살피게 한다.

책은 그 속으로 파고들면 나에게 유용한 정보와 통찰을 캐낼 수 있는 지식의 보고 같은 것이 아니다. 내 정신을 살찌우는 양식 같은 것도 아니다. 책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평소엔 하지 않았던 딴생각을 하게 만드는 촉매다.

우리의 독서 경험을 정직하게 돌아보면, 책 속으로 파고드는 것 자체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알 수 있다. 책 읽기는 자꾸만 중단된다. 우리는 읽고 있던 책의 페이지에서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곤 한다. 카페 테이블에 앉아 책을 펴놓고는 있지만(마치 사진의 울프처럼) 창밖 풍경을, 인테리어 소품을 멍하니 바라볼 때도 많고 다른 생각에 빠질 때가 많다.(374-376p)

 

 

한편, 위에 언급된 산시로의 독서 경험 중 세 번째 장면을 보면 산시로가 「하이드리오타피아」의 마지막 구절을 두고 "이 한 구절이 주는 의미보다는 그 의미 위에 드리워진 정서의 그림자가 더 반가웠다"고 생각하는 대목이 있다. 사실 17세기 영국 작가(토머스 브라운)와 20세기 일본 독자(산시로)의 거리는 '명문 감상'을 불가능하게 하기에 충분한 거리다. 오랜 옛날 영국 의사의 책, 그것도 고대 로마의 장례 절차를 서술한 책이 20세기 초 일본의 새내기 대학생에게 무슨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설령 열심히 읽고 이해한다 한들 무슨 유용한 게 남을 수 있을까. 하지만 '정서(의 그림자)'는 느낄 수 있다. 번역된 세계문학 작품들을 읽을 때 우리 역시 이 '정서의 그림자'를 느낀다.

고작 정서의 그림자를 느끼는 것 정도로 뭘 할 수 있을까, 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세계문학은 19세기 이후의 작품들인 데다 번역자들의 노력과 축적된 독서 경험 덕에, 토머스 브라운에게 산시로가 느끼는 거리감보다는 훨씬 가깝고 친숙하기 때문이다.(380p)

 

 

 

 

ㅡ 시로군, <막막한 독서> 中, 북루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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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6

 

https://www.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2406191329001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24/09/09/how-to-give-away-a-fortune

위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인물이 언급한 책이 궁금했던 차에 번역되어 나왔길래 읽어봄.

1~5장 보다는 6~10장이 더 흥미로웠다. 이래저래 생각해 볼 만한 주제.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부에는 상한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이것을 부의 제한주의라고 부른다.

(...)

하지만 부의 제한주의가 모든 것을 한 방에 해결하는 마법의 정책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어야겠다. 부의 제한주의는 규제적 이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그곳에 도달하고자 우리가 노력을 경주하는 지향점이되, 세상이 현재 조직되어 있는 방식을 생각할 때 그곳에 정말로 도달할 수 있을 법하지는 않은 어딘가 인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상으로 삼고 있는 것 대부분이 그렇다. 빈곤 타파라는 이상도 그렇고 차별 철폐라는 이상도 그렇다. 빈곤 타파나 차별 철폐가 규제적 이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들의 중요성이 적어지는 것은 전혀 아니다. 개인이 축절할 수 있는 부가 어느 정도를 넘지 않게 하자는 이상도 마찬가지다.(21-22p)

 

 

극도의 빈곤은 대체로 모든 이에게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노숙인의 형태이든, 늘 같은 옷을 입고 학교에 오고 학교에서 무상으로 주는 급식에 의존해야 하는 아이의 형태이든, 또 그밖의 어떤 물질적 결핍의 형태이든 말이다. 하지만 극도의 부는 종종 비가시적이다. 많은 나라에서 부자들과 슈퍼 부자들은 다른 이들의 시야에 드러나지 않으려 한다.

(...)

당연한 말이지만 불평등에는 양쪽이 있다. 불평등은 가난한 사람들이 더 가난해져서도 생기고 부자들이 더 부유해져서도 생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가난해지거나 중산층이 쪼그라들어서 불평등이 생길 때는 우리 눈에 더 잘 보이고 많은 사람이 피부로 이를 경험한다.

(...)

반면, 매우 부유한 사람들이 더 부유해지는 경우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별로 없고 우리 대부분의 일상도 적어도 곧바로는 달라지지 않는다. 1년에 한 번 나오는 '부자 순위'를 보거나 언론이 부의 분포에 대한 최신 통계를 보도하기로 했을 때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을 뿐이다. 즉 우리는 언론이 이 이슈를 보도하기로 결정했을 때만 상황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이 20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불평등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매우 적었던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

그리고 불평등은 눈송이처럼 계속 불고 있어서 다루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피케티의 책이 나오고서 10년 동안 부자들은 더 부유해졌다. 옥스팜은 매년 글로벌 불평등 통계를 발표하는데 이 숫자는 매번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린다. 일례로 2020년에서 2022년 사이에 전 세계 상위 1%는 나머지 99%가 얻은 소득과 부의 두 배 이상을 얻었다.(42-44p)

 

 

과거에는 다들 너무 가난했지만 그 뒤에 전 세계적으로 극빈곤이 크게 줄었다는 지배적인 내러티브는 틀렸거나 오도의 소지가 있다. 이 내러티브에 대해 우리가 시급히 고려해보아야 할 반박 내러티브가 존재하며, 이 논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

첫째, '데이터로 보는 우리 세계'와 동일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일단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

(...)

특히 과거 사람들의 소득이 어느 정도였을지에 대한 추측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수치는 매우 정교하지 못하다. 그리고 경제학자 로버트 앨런이 지적했듯이 더 유의미한 데이터를 사용하면, 예를 들어 얼마를 버는지보다 무엇을 소비하는지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사회가 진보해왔다'는 내러티브는 붕괴한다.

둘째, '데이터로 보는 우리 세계'가 빈곤 통계를 낼 때 사용하는 빈곤선이 극단적으로 낮다. 이 빈곤선은 구매력 평가로 보정한 2011년 기준 하루 1.90달러다.

(...)

우리는 이 빈곤선의 의미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것은 빈곤이 아니라 극빈곤이다. 또한 우리가 사회 발전의 주요 지표로 이 빈곤선을 사용한다면 기준을 너무 낮게 잡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65-67p)

 

 

우리 대부분은 계급이 우리 사회와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른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민권 운동과 해방 운동이 성공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이제는 모두가 동등한 기회를 누린다고 믿게 되었다. 모두가 동등한 기회를 갖고 있다면 계급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안 그런가?

이와 함께, 거의 모든 곳에서 노조가 꾸준히 쇠락하고 노조 파괴까지 자행되면서 계급 간 차이에 대해 대중의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하던 주요 제도 하나가 약화되었다. 더 은밀한 변화도 있는데, 서로 다른 계급 사람들이 섞일 기회가 점점 더 없어지는 방향으로 사회가 달라진 것이다. 주거, 교육, 의료 등이 대체로 계급선을 따라 분절되어 있고, 유럽에서는 탈종교화가 진전되면서 모든 사회 계층이 모이던 곳 중 하나가, 즉 교회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이 오는 곳이 아니게 되었다. 보편 징집의 폐지도 상이한 계층 사람들을 한데 모이게 하던 몇 남지 않은 제도 하나를 없앤 격이 되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삶과 그들이 직면하는 제약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도 이러한 변화 때문에 우리가 불평등 정도를 실제보다 더 낮게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고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른 이들보다 얼마나 더 많이 가졌는지를 실제보다 작게 생각한다.(80p)

 

 

물론 전쟁 범죄나 국가 부패는 슈퍼 부자들이 타인의 삶에 피해를 끼치면서 막대한 돈을 버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또 다른 유형의 부정한 돈으로는 기업이 소비자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면서 버는 돈이 있다.

새클러 가문을 보자. 이들은 미국 제약회사 퍼듀파마의 소유주이고, 이 회사는 옥시콘틴이라는 오피오이드 진통제를 판매했다. 1990년대 말에 퍼듀파마는 오도의 소지가 있는 마케팅을 공격적으로 전개하면서 1차 의료기관의 일반의들에게 옥시콘틴을 판촉했다. 옥시콘틴이 식품의약국 승인을 받고서 6년간 퍼듀파마는 사실이 아닌 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이 약이 다른 진통제보다 중독성이 적다고 광고했다.

(...)

기업인이 버는 부정한 돈은 이게 다가 아니다. 내가 저지른 잘못의 비용을 다른 이들이 치르게 함으로써 부정직하게 돈을 버는 방법도 있다. 물론 기업은 때로 실패를 한다. 사업을 영위하는 데는 리스크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사업에서 나오는 돈은 기꺼이 취하면서 무언가가 잘못되었을 때의 비용은 다른 사람들이 지게 한다. 어떤 경우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비용이 너무나 큰데, 종종 이 비용은 납세자를 포함해 모든 시민에게 퍼지고 기업 소유주의 평판에 대한 피해는 흩어져버린다.(111-113p)

 

 

법의 테두리 안에서 세금을 회피해 납부를 최소화하도록 도와주는 산업이 존재한다. 금융 전문가, 법률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이 산업은 재산 방어 산업이라고 불린다.

(...)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세금을 안 내는 개인과 조세 당국 사이의 이슈도 아니다. 이것은 '사회 계약'의 핵심과 관련한 문제다. 정부가 조세 회피와 포탈로 세수를 잃으면 모든 사람이 손해를 본다.

(...)

재산 방어 산업을 고용할 만큼 부자가 아닌 사람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족한 세수를 메우기 위해 세금을 더 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는 자신이 '똑똑해서' 세금을 안 냈다고 말했지만 세금 회피는 똑똑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이기적이고 비애국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이것은 부의 극단적인 집중과 매우 관련이 크다.

(...)

즉 그들은 로비를 하고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법이 한층 더 금권정치적 속성을 갖게 했다. 첫째, 조세 부담을 자본에서 노동으로 옮기고, 둘째, 최고세율을 낮추고, 셋째, 더 많은 구멍과 맹점을 도입하면서 말이다.

(...)

이제 미국에서는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의 실효 세율이 같다. 아주 부자인 경우는 예외인데, 근로 소득이 없고 재산 방어 산업의 도움을 최대로 받기 때문에 이들은 심지어 세율이 가장 낮다.(131-133p)

 

 

미래에 도움을 얻을 것을 기대하면서 제공하는 거액의 후원금은 명백히 정치적 평등의 원칙을 훼손한다. 하지만 미국 정치철학자 토머스 크리스티아노가 지적했듯이 위험에 처한 민주적 가치는 이것만이 아니다. 돈으로 표를 샀을 때, 선출된 정치인은 돈을 댄 사람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정책들을 추진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정책들을 추진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모든 사람이 부담한다. 돈으로 표를 사는 것은 사회 전체가 지출하는 비용에 무임승차하는 것이다. 소수의 거액 기부자에게 득이 되는 입법을 하는 과정에 우리 모두가 돈을 대고 있는 것이다.(151p)

 

 

누군가가 자신의 부를 진정으로 온전히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만 벌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부의 제한주의 주장의 핵심이자 기본적인 철학적 원칙들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부의 제한주의는 근본적인 철학적 통찰 하나에 토대를 두고 있다. 시장과 재산은 사회적 제도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본래의 세상에는, 즉 사회적 맥락을 떠나서는, 재산도 없고 시장도 없다는 의미다. 재산과 시장은 공유된 규칙과 규범의 시스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는 그것을 조율하는 기관, 일반적으로는 정부가 큰 역할을 한다. 대개 우리는 재산을 시장 교환에서 얻는데, 그 시장은 정부에 의해 구성되고 정부에 의해 보호되며 정부에 의해 작동이 가능해진다. 시장에서 우리가 갖는 이해관계를 보호해주는 정부가 없다면, 우리는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1651년 저서에서 '자연 상태'라고 묘사한 상태로 가게 될 것이다.

(...)

그런데 정부가 존재하려면, 그리고 이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으려면 자원이 필요하다. 정부는 반드시 세금을 걷어야 한다. 세금 없이는 정부가 우리 재산을 보호할 수도 없고 시장에서 사기나 절도를 막아 시장 거래가 제대로 이뤄지게 할 수도 없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철학적 논지는 조세 없이는 재산권 보호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국가가 없다면 우리가 아는 대로의 재산은 존재할 수 없고 세금이 없다면 국가가 존재할 수 없다. 제도가 존재하기 전에는 재산도 존재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조세 제도와 정부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동일한 사회경제적 시스템의 일부다.

(...)

과세에 반대하거나 과세가 '도둑질'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금 없이는, 즉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사회 계약 없이는 소득도, 재산도, 안정적 거래도, 매끄럽게 작동하는 시장도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 계약이 없다면 위험과 혼란만 있을 것이다.

(...)

많은 자유지상주의자, 경제적 보수주의자, 신자유주의자들이 믿는 것과 달리 세전의 소득과 부의 분포는 정부의 개입과 지속적인 사회적 협력 없이 나타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정부가 손대지 말고 내버려두어야 할 '자연스러운' 재산의 분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소득과 부에 대한 어느 정도의 과세는 늘 합당하고 정당하다.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얼마나 많이 걷어야 하고 누구에게 걷어야 하는지, 그리고 시장의 공정성을 보장하고, 공정하고 포용적인 사회 계약이 유지되게 하려면 그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다.(202-205p)

 

 

상속받은 재산을 자신이 마땅히 가질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상속으로 무엇을 얼마나 갖게 되는지는 단순히 운으로 정해진다. 당신이 수백만 달러를 상속받는다면 이는 운 좋게 슈퍼 부자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재산에 대해 당신에게 도덕적으로 자격이 있다고는 어떤 의미로도 말하기 어렵다. 누구도 부모를 선택하거나 태어난 장소와 시대를 선택할 수 없다. 철학자들은 많은 주제에서 의견이 다르지만 상속받은 재산이 가질 자격이 없는 재산이라는 데는 일반적으로 일치를 보인다. 상속받은 그 부에 대해 어떤 노력이나 의사결정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몰수적 성격의 과세를 엄격하게 적용해 상속을 완전히 철폐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을 기꺼이 던져보아야 한다. 철학자 D.W 해슬릿이 언급했듯이, 우리는 정치 권력의 상속을 철폐했다. 경제 권력의 상속 또한 철폐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상속세(또는 유증세)에 반대하는 표준적인 논리는 물려주는 사람이 자기 돈을 자기 마음대로 쓸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맞는 논리가 될 수 없다. 사회는 자유가 다른 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행사될 경우 다양한 방식으로 제한을 가한다. 우리는 단지 그러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스토킹하거나 납치할 수 없다. 피해자의 기본적인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액의 상속은 다른 사람들에게, 또한 사회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기회의 평등을 훼손한다. 사회의 계층 이동성도 훼손한다. 또한 [상속받는 사람에게] 역인센티브를 발생시킨다. 평생 쓸 돈이 있는데 왜 힘들게 일하겠는가?

(...)

문제는 상속이 막대하게 불평등하다는 점이지 상속 자체가 아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대규모 상속이 문제다. 작은 액수를 물려받는 것은 사회적 계층 이동성이나 기회의 평등을 저해하지 않고, 당신이 재능을 낭비할 기회를 주지 않으며, 모두를 위한 복지나 번영에 기여해야 할 돈을 해변에서 테킬라를 마시는 데 쓰게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상속세에 대해 더 자주 제기되는 또 다른 반대는 상속세가 '이중 과세'라는 주장이다. 상속하는 사람은 그 돈을 벌었을 때 이미 세금을 냈는데 나중에 자녀에게 이전할 때 세금을 또 내야 한다. 같은 돈에 두 번 세금을 내는 것이니 불공정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상속[물려받는 것]에 과세하는 것과 유증[물려주는 것]에 과세하는 것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상속은 받는 사람 입장에서 소득이며(그리고 불로소득이다), 원칙적으로 모든 소득에는 세금이 붙는다. 교사는 봉급을 받고, 여기에는 세금이 붙는다. 가게 주인은 수익을 올리고, 여기에도 세금이 붙는다. 음악가는 음반을 팔고, 여기에 세금이 붙는다. 소득에 세금을 물리지 않는 경우는 소득이 아주 낮을 때뿐이다. 대개 소득이 매우 낮은 사람은 세금이 면제된다.(206-210p)

 

 

매우 재능이 있는 사람들끼리 경쟁할 때는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재능의 작은 차이보다 운이 훨씬 더 중요하다.

(...)

능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실증근거로도 확인된다. 능력이 뛰어나야 높은 자리에 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노력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능력도 있고 노력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의 수가 최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자리의 수보다 훨씬 많다. 누가 그 업계의 꼭대기를 차지해 막대한 보수를 받을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운, 그리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이 서로를 판단할 때 갖게 되는 편향이다.(217p)

 

 

이 모든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몇몇 고려 요인에 따른 어느 정도의 보수 격차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사회가 특정한 직무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가, 그 일을 하기에 필요한 능력이 얼마나 희소한가, 그 능력과 숙련이 그 사람에게 얼마나 잘 발달되어 있는가, 그 일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이는가, (...) 아마도 10배 정도까지는 정당화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돌봄 노동자와 1년에 수백만 달러를 버는 CEO 사이의 막대한 간극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222p)

 

 

하지만 더 큰 정부가 늘 사람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정부는 너그러운 복지 국가 정부만큼 큰 정부일 수 있고(국민소득 대비 정부지출 비중 기준), 그러면서 재분배와 사회적 지출에 들어갔던 돈을 복지 수급자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데 쓰고 있을 수 있다. 이는 몇몇 유럽 정부들이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한 이후에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 일이다. 그들은 공공 영역과 복지시스템 전반에서 규제와 모니터링을 켜켜이 늘렸다. 표방된 목적은 무임승차나 '복지 사기'를 막는다는 것인데, 실제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거짓이 없는지 따져봐야 할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정책은 복지 수급자들에 대한, 또는 공무원의 직업 의식에 대한 과도한 불신을 보여준다.

(...)

어떤 '큰 정부'들은 납세자의 돈을 공공의 후생과 재분배에 사용하지만, 어떤 '큰 정부'들은 매우 비효율적이며 통제 메커니즘이나 지정학적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군사 인프라에 많은 돈을 사용한다. 이 모두가 그들이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느냐의 문제다.

아마도 이 모든 요인 때문에, 어떤 부유한 자선가는 정부에 맡겼을 때 정부가 자신의 부를 잘 분배해주리라는 신뢰를 갖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

다른 말로, 일부 슈퍼 부자들이 정부가 작아야 한다고 믿는 한 가지 이유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계급적 편견이 그들 자신과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정당성 있는 리더이며 자신의 부가 그 증거라고 생각한다.

(...)

이들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에 스스로의 문제를 탓해야 하며, 다시 이는 그들이 정책 결정에 참여하기에는 부적합한 사람들임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또한 정부는 엘리트 계층이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선출되어 대중이 운영하므로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신뢰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정책 결정은 매우 부유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주어서 그들 손에 맡기는 게 더 낫다. 그들이 막대한 부는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가끔 자선 기부로 부의 일부를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주사놓듯 찔끔찔끔 흘려 넣게 하면서 말이다.(274-278p)

 

 

'너무 많은 돈'이 저주의 다른 형태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아주 많다. 애비게일 디즈니는 부자가 되는 것이 그 사람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부유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행사하게 되는 권력이 일으키는 정신적 부담을 이야기했다.

(...)

그런 계산은 내 자아에서 무언가를 떼어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너무나 나를 소진시킵니다. 정서적으로 너무 지치게 돼요. 어떤 사람을 돕고 어떤 사람을 돕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고 이런 계산 자체를 하지 않기로 해버리면, 길거리의 노숙인을 무언가 인간이 아닌 존재로 낮추어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당신에게서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는 사고를 발달시키게 됩니다. 도움을 달라는 요청은 정말 말도 못하게 많습니다. 어떤 공간에 들어갔을 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내가 도와주기를 원하는 사람, 그리고 그러한 필요를 발생시키는 상황을 내가 바꿔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없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303-305p)

 

 

미국인들이 현재와 같은 불평등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왜 더 많은 재분배를 위해 투표하지 않을까? 다른 나라에서 이루어진 연구들에서도 동일한 패턴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실제의 자산 불평등을 대폭 과소평가하고 있었고 그렇게 축소해서 생각하고 있는 정도보다도 더 작은 불평등을 원했다. 임금 불평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불평등의 정도를 실제보다 낮게 생각했고 그것보다도 더 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임금 불평등을 작게 인식하는 정도는 현저했다. 한국 연구에서 응답자들은 CEO가 저숙련 노동자보다 10배 정도 더 벌 것이라고 생각했고 4.6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데이터가 존재하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연구 당시에 CEO 임금과 저숙련 노동자 임금의 비는 10대 1보다 훨씬 높았다. 미국은 354배, 독일과 스위스는 거의 150배였다.

(...)

이것이 왜 중요할까? 불평등이 높다고 인식하고 있으면 사람들은 재분배를 강하게 요구할 것이다. 반면, 지금처럼 불평등이 실제보다 작다고 잘못 생각한다면 재분배 요구는 미미할 것이다.

(...)

이를 염두에 두면, 부자들이 돈에 대해, 특히 부자와 슈퍼 부자들이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왜 꺼리는지 알 수 있다.(320-321p)

 

 

극단적인 부를 (또한 빈곤도) 한 방에 없앨 수 있는 마법의 약은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를 잘 알고 있으며, 대부분의 활동가와 단체들은 다양한 수준에서 광범위한 제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도 부의 제한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 또는 평등을 향한 어떤 종류의 진보에도 반대하는 사람들은 부의 제한주의나 평등주의를 마치 그것이 단 한 가지 제안인 것처럼 과장해 단순화한다.(332-333p)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지식인, 기업인, 정치인들이 우리로 하여금 정부는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공무원들은 이기적이고 자유시장은 다른 모든 것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믿게 만든, 잘 조직화되 노력의 결과였다. 이러한 노력은 주류 미디어의 내러티브를 바꾸었고, 학생들이 학교와 사회에서 배우는 내용을 바꾸었으며, 기업인과 공직자들이 사용하는 어휘를 바꾸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인 사회·경제 조치들이 구체적으로 도입되면서 우리 세계는 경쟁과 탐욕이 지배하는 사회로 바뀌었다. 신자유주의는 나라마다 다른 형태를 띠었지만, 그것이 자연스럽거나 불가피하게 온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추동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실행하고 강화하기로 의도적으로 선택한 데서 나온 결과였다는 점은 모든 곳에서 같았다.

좋은 소식은, 우리가 선택을 통해 신자유주의를 바꿀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점이다.(335p)

 

 

노동 소득에 자본 소득보다 높은 세율이 적용되는 것이 불공정하다는 데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많은 국가의 현실이다. 네덜란드에서는 가장 최근의 굵직한 세제 개혁이 있었던 2001년에 노동 소득과 자본 소득에 동일한 세율이 적용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작은 수정이 야금야금 이뤄져 자본 소득에 예외가 몇 차례 적용되면서 노동 소득이 자본 소득보다 세율이 11% 높아졌다.

(...)

이러한 내용은 2022년에야 대중에게 알려졌다. 정부의 의뢰로 진행된 한 연구가 모든 관련 기관과 정당에서 정보를 확보해 분석한 결과였다. 이러한 정보가 없는 국가에서도 비슷한 연구를 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면 평등주의적이라는 평판을 가지고 있는 국가에서조차 조세시스템이 노동보다 자본에 유리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346-347p)

 

 

나는 상속을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에게 각각 해당될 도덕적 고려 사항들을 감안해 위와 같은 제안의 약간 변형된 버전을 제안하고자 한다. 도덕적인 관점에서, 상속받는 사람은 그 부를 상속받을 자격이 전혀 없고, 상속하는 사람은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 자신의 소비를 줄여가며 저축을 늘린 것에 대해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해서, 내 제안은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받을 수 있는 상속과 증여에 제한을 두고 그것을 넘으면 모두 조세 수입으로 귀속시켜 그 국가의 시민들에게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국가는 상속세 세수를 다른 세원에서 나온 것과 함께 일반 세수로 합쳐서 도로, 학교 등 공공 지출에 쓸 수도 있지만, 또 다른 그리고 아마도 더 나은 대안도 있다. 상속세고 들어온 돈은 국가의 모든 젊은이에게 재분배하는 용도로 지정해 모든 젊은이가 이전 세대의 부를 나누어 받게 하는 것이다.

(...)

두 번째 이유는 상속세 수입은 젊은 층에게 재분배하면 현재 심각한 수준인 세대 간 불평등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많은 연구자가 세대 간 불평등 때문에 젊은이들이 크게 불리한 처지에 있게 되었다고 우려한다. 종종 상속은 80대인 사람이 사망하면서 50대인 자녀에게 물려준다. 상속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은 상속 재산을 실제로 받기 전에 이미 상당한 이득을 누린다. 나중에 돈이 생길 것을 알기 때문에 학자금 대출이나 모기지 대출을 더 쉽게 결정할 수 있다. 또 이들은 부모 생전에 상당한 증여도 이미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상속세로 거둔 세수를 20대 중반인 사람들에게 재분배하면 전체 인구의 번영에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젊은이가 성인으로서의 삶을 돈에 대한 부당한 걱정 없이 시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348-349p)

 

 

 

ㅡ 잉그리드 로베인스, <부의 제한선> 中,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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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

 

이 책을 통해 궁금해 진 책은 존 케이지의 '사일런스',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 일레인 스캐리의 '고통 받는 몸'. 그 중 존 케이지 책이 제일 궁금함.

 

 

 

 

예전에 현대소설강독 수업을 들었을 때가 기억난다. 에세이는 아니고 소설가에 대한 얘기였지만, 소설가에게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강렬한 원체험 같은 것이 있는데, 그 자전적인 요소를 너무 성급하게 소설로 써버리면 이제 다음 소설을 써 나가기가 난망하다는 것이었다. 교수님은 그것을 '씨암탉 잡기'에 비유했다. 크게 대접해 보겠다고 집에 하나 있는 씨암탉을 잡고 나면 더 이상 대접할 게 남아 있질 않는 것이다.(15p)

 

 

쓸 것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써야 한다. 그런데 왜 쓰고 있는 거지?

이 '왜'라는 질문이 늘 골칫거리다. 누군가는 돈 때문이라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즐거움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단 나는 돈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는 아직 그 단계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고 싶긴 하다······) 글쓰기가 전혀 돈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

그렇다면 즐거움 때문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고통과 불안, 초조함, 답답함, 민망함과 절망, 기타 등등을 섞은 이 감정이 마냥 즐거움인 것 같지만은 않다.

최근에는 더욱 글쓰기의 즐거움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돈이나 문학적 명성, 권위 등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며, 글쓰기라는 활동이 주는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즐거움이라는 것을 별로 믿지 않는다. 물론 나도 글쓰기를 비롯한 이런저런 일들에서 때때로 즐거움을 느끼며 그럴 때 매우 기쁘고 만족스럽다. 내가 의심하는 것은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즐거움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즐거움 때문에 한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내적인 충만함, 즉 외부의 간섭 없이 주체적으로 시작되며 동시에 그것 자체만으로 만족스러운 어떤 활동이라는 환상이 필요하기 때문일 때가 많다.

'스스로의 즐거움이 가장 큰 동력이어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어떤 활동을 하는 사람을 북돋아 주는 말이라기보다 순수한 즐거움을 동력으로 삼지 못하는 주체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말일 가능성이 높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는 익숙한 호통과도 닮아 있다. 그런데 왜 하지 말라는 것일까? 사람들은 때때로 하기 싫은 것을 하고 싶어 한다. 더 단순히는 하기 싫어서 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때때로 우리는 괴로움을 원하며 그것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다.

동시에 그런 말은 행위에 내재한 어떤 근본적인 이유 없음을 은폐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유라는 건 뭔가를 하지 않으려고 할 때 필요한 것이다. 뭔가를 하는 데에는 큰 이유가 필요하지 않고 사실 이유가 거의 혹은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글을 쓰는 사람한테 왜 이런저런 종류의 글을 쓰냐고 물어보면 이런저런 이유들을 열심히 떠올려 보고 짜맞춰 보지만 잘 맞아떨어지지가 않고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글을 쓰지 않는 사람에게는 항상 완벽한 이유들이 있다. 그 이유들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언제나 맞아떨어진다.

(...)

어디서 어떤 경로로 글쓰기의 의무가 찾아오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느 순간 글을 쓰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글쓰기라는 의무를 부여하며, 그 이후로는 의무에 충실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선택이 남아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무의 특성은 그것이 나에 의해 부과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단 부과되고 난 후에는 나의 타자가 되어 나의 바깥에서 나를 강제한다는 점에 있다. 그것이 나의 바깥에 있기에, 나는 내가 왜 그러한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의무는 여타의 이유 없이도 글쓰기라는 행위를 지속할 수 있게 해 준다. 푸코는 글쓰기의 즐거움이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질문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는 다만 글쓰기란 그것이 존재하는지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글쓰기의 동기가 자신의 즐거움이나 괴로움, 기쁨, 슬픔 등의 감정과 무관한 층위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27-31p)

 

 

재능이란 질리기의 능력이다. 질린다는 건 아주 중요한데, 왜냐면 사람은 질리지 않으면 절대 다른 것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뭔가를 패배 때문에 그만둔다는 건 낭설이다. 나는 패배 때문에 그만두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질리지만 않으면 아무리 많이 져도 그것을 계속한다. 때문에 빨리 질리는 것만이 다른 것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천재들은 뭔가를 해 보기도 전에 벌써 질려 한다. 벌써 재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재미있는 부분으로 곧장 진입할 수 있다.

(...)

그렇다면 노력은 무엇인가? 극장에 가는 걸 싫어한다는 정지돈에게 금정연은 묻는다. “싫어하는 것치고 극장에 너무 자주 가는 거 아니에요?” 그러자 정지돈은 이렇게 대답한다. “정연 씨,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사는 사람은 없어요.” 이게 노력이다. 하기 싫어도 하는 것.(41-42p)

 

 

나는 모든 글쓰기가 그 자체로 소중하며 가치 있다는 식의 말이 그다지 사실에 가깝지 않고 별로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글쓰기는 그 반대의 사실에 접근해 가는 과정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존 케이지는 연주자들에게 자유를 부여한 자신의 작업이 종종 형편없이 연주되는 것을 듣는다고 이야기한다. 자유롭게 하면 되는 것인데 거기에 어떻게 좋고 나쁨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아무렇게나 한다는 것은 결국 신중하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만약 연주가 잘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연주자들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익숙한 취향이나 기억에 의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49p)

 

 

사실 예전에 나는 꼰대와 호구라는 주제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당시 내게는 사람들이 가장 되기 싫어하는 두 개가 꼰대와 호구인 것처럼 보였다.

(...)

시절이 바뀌어서 요즘에는 자신을 꼰대라고 부르는 것이 어느 정도는 스스럼없는 분위기도 생겨난 것 같다. 물론 자신을 ‘젊은 꼰대’라고 부르는 경우는 대부분 좋지 않다. 어떤 사람이 사십 대인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영 포티’에는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기에는 말하자면 체리피킹을 하려는 얄미운 셈속 같은 것이 느껴진다. 어쨌든 내가 꼰대와 호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꼭 남들과 다른 방향을 무조건적으로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다. 거기에는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꼰대의 좋은 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감각이 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다.

·····장점이 두 개면 충분히 많은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정말 만족을 모른다. 정말이지, 이래서 세상이·····

 

하지만 장점이 두 개뿐이라도 꼰대적인 것은 글쓰기에 필수저인 어떤 측면을 가지고 있다. 사실 많은 작가들이, 아니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꼰대였다.(106-107p)

 

 

그것이 우리가 또한 호구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일단 여기에는 늘 그렇듯 실용적인 장점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호구가 되기 너무 싫어하는 나머지, 호구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피해마저도 감수하려 한다.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기꺼이 감수하는 피해의 양은 가끔 보면 기가 질릴 정도이다. 내 생각에는 그냥 호구가 되는 것이 낫다·····

그리고 그건 전혀 나쁜 일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호구의 사례를 참조해 보자.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내놓으라고 한 사람, 그러니까 예수.

(...)

그런데 이런 말을 하면 지금은 시대가 훨씬 삭막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럴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말하자면 예전에는 한쪽 뺨을 맞았을 때 다른 쪽 뺨을 내놓으면 상대가 거기서 더 때리지 않을 정도의 도리라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 존재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그러니까 어떤 좋은 것이 예전에는 가능했지만 이제는 가능하지 않으므로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변명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존재해 왔던 사람의 유형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다른쪽 뺨을 내놓으라고 했을 때도 이미 그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그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향해 말을 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때도 사람들은 그렇게 착하지 않았다. 착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으면 애당초 예수님이 그렇게 죽지 않았겠지····· 그렇지 않나?

구체적으로 호구의 덕목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는 우선 수용하는 사람(자신의 뜻을 현실로 관철할 힘이 없음)이다. 그리고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귀가 얇고 잘 속아 넘어감)이며, 용서하는 사람(복수를 할 역량이 결여되어 있음)이다····· 물론 조금 그렇다. 딱 보기에 별로 좋아 보이지만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원치 않게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좋은 일 아닐까?(111-112p)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에는(한국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단지 내가 외국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뭘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심지어 뭘 하는 방법을 알아보려고 유튜브를 찾아봐도 태반이 하지 말라는 말들이다.

(...)

얼마 전에는 출판을 전제로 쓴 일기가 언제나 보기 흉한 나르시시즘으로 빠질 수밖에 없으니 하지 말라는 요지의 글을 읽었다.

(...)

사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 있고 거기엔 아무 문제도 없다. 출판을 의식하며 쓴 일기에는 실제로 위와 같은 단점이 어느 정도는 있을 것이다. 물론 꼭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하더라도 타자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문제 제기도 가능하겠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 이전의 문제이다. 말하자면 글을 쓰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싫어하는 것에 아주 거창한 이유를 붙이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 같다. 마치 내가 무엇을 싫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윤리적이거나 미학적인 근거가 있어야 하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내가 무엇을 싫어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윤리적이거나 미학적인 근거가 있다고 말하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이러저러해서 난 별로던데'라고 쓰는 경우는 별로 없다. 언제나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심각하고 중대하며 근본적인 문제가 숨겨져 있다. 하지만 정말 늘 그런 것일까? 일레인 스캐리는 한 글에서 예술가들이 괴로움을 표현하는 일에 대한 경계를 표현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것이 보다 일반적으로 글을 쓰는 이들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스캐리는 이렇게 썼다.

 

예술가들이 성공적으로 괴로움을 표현한 탓에 예술가 집단이 가장 진정으로 고통받는 사람들로 여겨지고, 그래서 도움이 절박하게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서 의도치 않게 관심을 빼앗을 위험이 있음을 창작자는 인지해야 한다.(125-127p)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세상에는 사소한 일들도 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들ㅡ그중에서도 특히 비평가라고 불리는 이들ㅡ에게 사소한 것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내가 겪었던 일이기도 한데, 예전에는 누군가가 무슨 글이나 생각을 옹호하면 곧바로 그 사람을 아우슈비츠의 옹호자로 만들어주는 일종의 거대한 비평적 미끄럼틀 같은 것이 있었다. 잘 세워진 도미노처럼 작은 블록 하나를 건드리면 그것이 다른 블록들을 무너뜨리면서 곧장 대학살의 현장으로까지 향하는 것이다. 이 도미노는 완벽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어서 결코 도중에 멈추는 법이 없다. 은유를 좋아한다고요? 은유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아시나요?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 그러한 작동 방식을 옹호하던 사람들이 바로·····

(...)

게다가 무엇이 정말 나쁜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구제할 수 없이 불의에 속할 것이 매우 확실한 몇몇 사례나 억압의 장치들이 있기는 하지만, 전면적이고 근본적으로 악을 단언할 만한 것이 얼마나 많을까? 미셸 푸코는 이 주제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해 온 사람 중 한 명이다.

나는 어떤 것은 '해방'의 층위에 속하고 또 어떤 것은 '억압'의 층위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강제수용소처럼 확신을 가지고 그것이 해방의 도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주어진 체계가 얼마나 공포를 부추기든 간에, 어떠한 저항도 사전에 막아 버리는 고문과 처형을 제외한다면, 언제나 저항과 불복종, 대항 세력화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ㅡ이는 일반적으로 간과되는데ㅡ고려해야만 합니다.(128-129p)

 

 

우리는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플로베르에게 이 자가당착은 다름 아닌 예술과 글쓰기가 시작되는 곳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결코 피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가 종종 사용하고는 하는 '내로남불'이라는 비난은 대부분 적절하지 않다.

(...)

이런 비난의 문제는 우리가 마치 자가당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준다는 데에 있다.

결국 모두가 똑같으니 누군가를 절대 비판해서는 안 된다거나, 혹은 손바닥 뒤집듯 그때그때 마음 편하게 말을 바꿔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나는 우리가 자가당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 달라지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

그러니, 맞다. 문제는 누가 태도를 바꾸고, 이전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혹은 자신이 하는 말과 들어맞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그런 일은 결국 누구에게나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무엇이 싫다고 하기 전에 내가 언젠가 그것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비판은 어딘가 다르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그것은 어쨌든 사태에 대해 조금 더 다각도로 생각하는 한 방법일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언제나 그 조금의 차이가 매우 중요하게 느껴진다.(133-135p)

 

 

어떤 작가가 작품집을 내고 나면 뭔가 다음 작품집에서는 다른 것을 보여 주기를 바라는 심리가 있다. 자신이 '이미 본 것'에는 더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심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의 경우 또한 고려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볼 때 그것이 달라지기를 바라면서 보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실제로는 보았던 것을 또 보고 싶어서 보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예컨대 부코스키의 새로운 책을 읽을 때 나는 그 사람이 뭔가 다른 걸 보여 주리라 생각하기보다는 저번 책에서 보여 줬던 걸 또 보여 주기를 바란다. 종종 도가의 일화를 인용하기 좋아하는 존 케이지는 이렇게 쓴다. "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무언가를 하다가 2분 후 지루해지면 4분을 더 시험해 보아라. 그래도 지루하다면 8분, 16분, 32분 등등으로 시간을 늘려라. 마침내 그것이 절대 지루하지 않으며 아주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는 꼭 감상의 영역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가 자신의 고유성을 주장하는 방식, 즉 우리가 스타일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반복과 관계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역시 한 벌의 옷만 입고 다녔다.

(...)

나는 체구가 아주 작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자들이 입는 옷을 입지 못한다. 평생 동안 그 난관, 그 문제와 싸웠다. 너무 작은 여자라는 사실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도록 옷이 절대 눈에 띄지 않게 할 것. 늘 똑같이 입어서 사람들이 나의 키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도록 할 것. 늘 똑같이 입어서 사람들이 나의 키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도록 할 것. 똑같이 입는 이유가 아니라 그냥 똑같이 입는다는 사실이 눈에 띄도록 할 것. 이제 나는 가방도 들지 않는다. 늘 같은 옷을 입고 다닌 뒤로 삶이 달라졌다.

종종 변화에 대한 압박감은 새로운 글을 쓰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뒤라스에게 스타일의 반복은 스타일 그 자체를 달라지게 하지는 않지만, 그것 외의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157-159p)

 

 

조금 이상한 말일 수 있지만, 나는 나와 관련된 것이라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위험한 것 같다. 그러한 생각은 자체로 권리라는 개념을 가리키고 있는데, 시몬 베유는 이 개념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에겐 권리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겐 그런 것을 표현할 단어들이 없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정의라는 단어로 만족을 했지요." 시몬 베유는 우리가 그리스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 지점에서는 나도 그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 중요한 건 오히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늘어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혹은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영역을 축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사례에 한정해서라면, 나는 작가가 자신의 텍스트에 대해서 그 정도의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작가가 텍스트를 써서 발표한 이상 어떤 통제 불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영역이 있다고 생각한다. 저작권이란 좋게 봐주더라도 편의상의 조치에 가깝지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일 수 없다. 더군다나 사후까지 자신의 텍스트가 자신이 생각했었던 방식으로만 유통될 수 있어야 한다는 발상은······ 아무래도 누군가의 작가적 세계라는 것이 그 정도로까지 중요한 것일 수 있을까 싶은 것이다. 물론 이것이 어느 정도는 이상적이고 또 위험성도 있는 생각이라는 것은 나도 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통제해야 할까?(175-177p)

 

 

그런데 통제를 하지 말라는 말이 꼭 무엇인가를 더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말,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

요점은 반대에 가깝다.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경향성이며,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작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연스럽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지면 가라앉는다.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물에 뜨게 만들어져 있는데도 말이다. 자유라는 말도 비슷한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해야만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들이야말로 거기서 거기이며 대개 비슷하고 진짜로 흥미롭지 않다. 우리는 종종 어딘가에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문제는 대개 같은 곳으로 탈출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

"거듭 말씀드리지만 내가 폭력적이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일반적으로 평가라는 것은 꼭 자동차와 같죠. 차종을 선택할 수도, 나아갈 방향을 택할 수도 없어요. 제일 먼저 도착하는 걸 빼앗아 잡아타야 해요. 폭스바겐이면 폭스바겐을 타고, 택시면 택시를 타고 가는 거예요. 비행기가 도착하면 비행기를 타야 하죠. 중요한 것은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나에 대한 첫 평가는 말하자면 폭력적이라는 일련의 해프닝을 통해 이루어진 거예요. 그건 오해죠. 하지만 차가 없다면, 먼저 오는 차를 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만약 백남준이 자신의 작업이 오해받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그는 계속 기다려야 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 상태로 영영 움직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즉 오해 가능성이란 이동 가능성이기도 하다ㅡ우리는 오해 가능성으로부터 열린 공간 속에서만 움직인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오해가 진실과 대립하는 것이라기보다, 진실이 표현되는 특정한 형식 중 하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해는 가장 자주 오는 차이고 진실은 그 차를 잡아탄다ㅡ오해는 진실을 훼손한다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삶이 우리의 통제 바깥에 훨씬 많은 것처럼, 진실은 오해 속에 훨씬 더 많다.(183-185p)

 

 

 

 

ㅡ 강보원, <에세이의 준비>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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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

 

제목 그대로 일급의 사회학자와 역사학자가 다섯 번 만나 나눈 대담을 묶은 책.

이 책이 부르디외의 생각을 느껴보기 가장 좋은 입문서(?)라니... 말랑말랑한 책들만 읽다가 이런 책을 오랜만에 읽어서 어려웠다.

5번의 대담을 묶은 책이라 분량이 많진 않으나 밀도가 상당했다. 하비투스니 사회적 자본이니 몇몇 개념은 평소에 주워들은 적이 있었는데 장(field)은 처음 들어보는 개념이라 신선했다.

 

 

 

부르디외의 관점에서 사회학은 사람들에게 그릇된 환상을 심어 주는 오인을 걷어 내면서 지배와 예속을 작동시키는 매커니즘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게 해 준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환상에서 벗어나는 고통을 겪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자는 참을 수 없는 인간이다." 그런데 사회학자는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참을 수 없는 인간이다. 자신이 분석하는 사회공간에 그 자신 또한 위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르디외의 말에서, [사회공간에 대한] 인식을 생산하는 주체가 인식의 대상 속에 갇혀 있는 사회과학이 벗어날 수 없는 이런 위치를 알게 되며, 바로 그런 위치에서 부르디외 자신이 언급하듯 고통스런 '정신분열'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18-19p)

 

 

제가 보기에 선생님의 작업 속에는 푸코식으로 말해서 확실성의 껍질을 벗겨 내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사회학의 문제들」에서 그런 주장과 거의 비슷한 문장이 발견됩니다. "언어적이고 정신적인 자동성을 파괴하기." 사회세계에서 외견상 당연해 보이는 모든 사실을 문제화한다는 것이죠. 이는 이를테면 "이것은 지금과 다르게 존재할 수 없어. 이것은 언제나 그래 왔어·····" 같은 식으로 자명성을 전제하는 모든 주장과 단절하게 합니다. 선생님이 증명하듯이 자명성은 언제나 특수한 내기물 및 세력관계와의 관련 속에서 구성됩니다.

(...)

아무튼 확실성의 껍질을 최대한 벗기는 작업에서 선생님이 취한 방식 중 가운데 하나는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된 경계, 분할, 구획들이 사실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드러내면서 말이죠.(35p)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사회학자는 이런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지요. 사회학자의 모든 작업은 행동의 관찰, 담론, 문서 자료 등에 기초해서 진실의 도출에 필요한 조건을 구축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언제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그들은 민중이 다른 사회집단에 비해 훨씬 더 참된 말을 한다고 믿지요. 사실 민중은 각별한 피지배 상황에 처해 있는데, 특히 상징적 지배의 메커니즘에 의해 지배받고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광부들의 입에 마이크를 들이대고는 그들이 진실을 수집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의 발상이 좌파가 권력을 잡은 시기에 한창 유행했지요.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수집한 것은 앞선 30년 동안 노동조합이 유포한 담론들에 불과합니다. 한편 농부들을 상대로 똑같은 일을 한다면, 우리는 약간의 변형이 있긴 해도 초등학교 교사들의 담론을 수집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회세계 안에서 지식인의 것이건 프롤레타리아의 것이건 혹은 다른 누군가의 것이건 간에 일종의 본원적인 [진실의] 장소를 찾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이 같은 발상 속에는 일종의 신비주의적 사고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57-58p)

 

 

엘리아스는 저에 비해서 훨씬 더 연속성에 민감합니다. 제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스포츠 사례를 들자면, 고대의 올림픽에서 현재의 올림픽까지 연속적 계보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스포츠사가가 그렇게 하는데요, 저는 이런 작업에 위화감을 느낍니다. 외양상 연속성이 존재하지만, 이는 19세기에 일어난 거대한 단절을 은폐합니다. 그 당시 영국에서 엘리트 기숙하교가 유행했고, 교육체계가 변화했으며, 스포츠 공간이 출현했습니다···· 달리 말해, 술과 같은 전통 게임과 근대 축구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습니다. 전혀 없어요. 이는 완전한 단절입니다. 예술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동일한 문제를 발견합니다. 정말 놀랍게도 이것은 사실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미켈란젤로와 율리우스 2세 사이의 관계가 피사로와 강베타 사이의 관계와 같다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엄청난 불연속이 존재하며, 불연속성의 기원 또한 존재합니다.(106-107p)

 

 

문학 분야에 대해서도 우리는 동일한 분석을 할 수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플로베르 이전에는 예술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지요. 여기서 저는 의도적으로 과장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이 충격을 받도록 말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예술가라는 식의 주장은 시대착오[의 오류]를 범하는 일입니다. 물론 역사학자들이 그렇게 순진하지는 않겠죠.

(...)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장인은 언제부터 예술가로 변모했는가?" 그런데 예술가는 사실 장인에서 탄생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하나의 소우주에서 다른 소우주로의 이행이 일어난 것이죠. 이행 이전의 소우주에서 사람들은 경제의 규범에 따라 무언가를 생산합니다. 거기에서는 일반적인 [상품] 생산의 규범을 따릅니다. 반면에 이행 이후의 소우주는 경제세계 내부에서 하나의 고립된 독자적 소우주, 일종의 전도된 경제세계입니다. 거기서는 사람들이 시장 없이 무언가를 생산합니다. 즉 그들은 어떤 경우엔 평생동안 한 작품도 팔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생산합니다. 또 그들은 작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자본[특히 문화자본]을 충분히 갖춰야 합니다. 말라르메를 비롯한 수많은 시인의 경우가 그랬죠. 좀 더 깊은 분석이 필요하지만, 대체로 1880년대 이전의 시기에 예술가나 작가라는 개념을 투사할 때, 우리는 엄청나게 부정확한 용어를 쓰는 야만을 저지르는 셈입니다.

 

 

 

ㅡ 피에르 부르디외, 로제 샤르티에,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中, 킹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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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30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 방문객수는 좀 놀라웠다.

 

 

오히려 우리를 놀라게 한 기록은 2022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방문한 미술관 5위에 대한민국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이 그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508만 명이 방문해 2위에 랭크된 바티칸 박물관, 409만 명이 방문해 3위를 한 영국박물관, 388만 명이 방문해 4위에 자리 잡은 테이트 모던에 이어 한 해 341만 명이 방문하여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관람객이 찾은 미술관으로 기록되었다.(26p)

 

 

뮤지엄이 가진 자들의 과시와 사치, 허영의 공간이 아닌 대중을 위한 공간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시점을 확인하기 위해선 17세기 영국을 살펴봐야 한다. 1677년 영국의 정치인이자 수집가였던 일라이어스 애슈몰이 옥스퍼드 대학교에 기증한 호기심의 방의 수집품을 수용하기 위해 1683년 건립된 애슈몰린 박물관은 시민혁명의 시대를 겪으며 1845년 의회가 제정한 박물관령에 따라 시민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자유와 평등의 시민혁명 정신은 권력과 부의 상징과도 같았던 뮤지엄을 대중을 위해 전시를 선보이고 대중이 함께 향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화시켰다. 물론 시민의 권리를 가질 수 없었던 하층민은 이 역시 누릴 수 없는 시대였기에 현재의 모습과 완벽히 일치한다고 할 순 없겠으나, 과거에 비하면 진일보한 것이었다.(31p)

 

 

안토니 곰리는 과거의 방식으로 돌을 깎거나 흙을 조형해 조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석고붕대를 이용해 자신의 몸을 직접 본을 떠 주물하는 방식으로 조각 작품을 선보여왔다. 얼굴까지 석고로 뒤덮어 몸의 본을 뜨는 과정은 그 자체로 생명을 담보로 하는 수행에 가깝지만, 그렇게 떠낸 인체 조형물을 미술관뿐만 아니라 도시 곳곳에 전시하는 설치 프로젝트를 통해 거대한 세상 속에 던져져 실존하는 인간 군상을 표현해온 곰리의 작품은 단순해 보이는 과정 속에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다.(329p)

 

 

 

 

ㅡ 김찬용, <미술관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中, 땡스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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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9
 
 
예술에 대한 사랑이니 뭐니 아무리 떠들어대 봐야 면세점에서 절도를 저지른 시점에서 그냥 상습적으로 도둑질을 일삼는 흔한 범죄자다. 자기는 예술품을 팔기 위해 훔친 게 아니라지만 그것도 자타에 의해 큰 씀씀이가 없는 삶을 살고, 주변의 경제적 원조까지 받으니 그런 헛소리를 하는거지. 웃기지도 않는다. 역시나 말년에는 훔친 물품을 팔려다 딱 덜미를 잡혔죠?
83살에도 절도 습관을 못 버려 17번째로 감옥으로 간 '대도' 조세형이 떠오른다. 대도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네.
 
 
 
브라이트비저는 어디에 가든 눈에 보이는 박물관 안내 책자를 가져오는 오랜 습관이 있다. 관광 안내소나 호텔 로비에서 한 아름 모아오곤 한다. 도서관이나 신문 가판대에서도 미술 잡지는 모조리 훑어보고 프랑스 미술 주간지 <라 가제트 드로우트>도 정기 구독한다.
때로 이런 안내 책자나 잡지에서 유난히 브라이트비저의 눈길을 끄는 사진이 있다. 그러면 떨리는 손으로 사진에 대한 기사나 설명을 읽고는 그 작품이 어디에 있는지 기억 해둔다. 아주 어릴 때 가본 박물관이라도 그곳에서 가장 좋아했던 작품을 생각하면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날 보러 온 작품들 역시 '마음속 목록'에 올라가 있다. 브라이트비저와 앤 캐서린은 최대한 자주 이 마음속 목록의 작품을 보러 간다. 앤 캐서린이 병원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주간에는 목록에 있는 몇몇 작품을 한데 묶어 동선을 짜서 자동차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이 정도가 계획의 전부로, 이미지가 떠오르면 갈 곳을 정한다. 나머지는 거의 즉흥적으로 결정한다.(65p)
 
 
하지만 박물관 절도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사전 준비나 도주 경로가 아니다. 보안 시스템을 휘저어 진열장 문을 따고, 경비원을 따돌려 작품을 밖으로 빼내고 나면 그때부터 진짜 골치 아픈 일이 시작된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고 추적이 가능한 물건인 데다, 뉴스에도 사진이 뜰 테니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조차 위험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작품은 결국 짐짝으로 전락하고 만다. 훔친 물건을 내보일 수도 없고 내다 팔려고 하면 더욱 위험해진다.(74p)
 
 
사실 박물관 보안에는 모순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박물관은 작품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유하기 위해 존재하며 관람객은 거창한 보안 장치의 방해 없이 가능한 한 작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박물관 절도 사건을 거의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 있다. 작품을 저장고에 넣고 문을 잠근 뒤 무장 경비를 세우면 된다. 하지만 이러면 당연히 박물관도 사라진다. 박물관이 아니라 은행이 된다.
(...)
소규모 박물관의 관장들은 보안에 대해 이야기하길 꺼린다. 이들은 그나마 부족한 예산을 최신 보안 장치(예를 들면 실처럼 얇아서 화판에 꿰매 넣을 수 있는 추적 장치)에 배정하느니, 그 돈으로 차라리 더 많은 작품을 사들이고자 한다. 관람객을 끌어모으는 것은 새로운 작품이지 이전보다 견고한 보안 체계가 아니다.
지역 박물관에는 박물관과 관람객 사이에 암묵적 규칙이 존재한다. 박물관은 거창한 보안 장치 없이도 귀중한 작품이나 유물을 가까이에서 관람하게 하고, 우리는 누구나 인류 전체의 유산을 보존하는 데 동참한다. 이런 측면에서 브라이트비저와 앤 캐서린은 공익에 해가 되는 암적인 존재다. 공동의 유산을 혼자만 누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배제한다.(86-87p)
 
 
'아트 로스 레지스터'는 런던에 본부를 둔 세계 최대 규모의 도난 작품 데이터베이스로, 50만 건이 넘는 품목이 등록돼 있다. 이 총계는 매일 늘어나는 중이며 이를 통해 얼마나 많은 예술품이 사라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지 알 수 있다. 작품 회수율은 전체 도난 작품 중 10퍼센트 미만이라고 한다. 사건을 완벽하게 해결하여 범인도 잡고 작품도 회수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박물관에서 도난당한 경우는 그래도 회수율이 상당히 높다. 대략 잡아 약 50퍼센트 정도이며 일부 수사대는 열 건 중 아홉 건을 회수할 때도 있다고 주장한다.(144p)
 
 
앤 캐서린은 이제 차도 있고 집도 있으며 매일 출근할 직장도 있다. 브라이트비저만 없으면 특별한 변수 없는 무난한 삶이다. 하지만 앤 캐서린의 지인들은 지속적인 흥분감이 그녀에게 마약 같은 존재였다고 말한다. 브라이트비저와 함께라면 비밀스러운 보물 창고도 있고 매주 떠나는 예술품 절도 여행도 있다. 브라이트비저의 광기 어린 열정, 아니 어쩌면 그냥 그의 푸른 눈동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앤 캐서린은 그 모든 것을 이대로 끊어낼 수 없다.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손을 올리면 그때는 영원히 나를 못 볼 줄 알아."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앤 캐서린도 이제는 안다. 하지만 자신이 적극적으로 도둑질을 돕고 싶지도 않다.(190-191p)
 
 
더 심각한 문제는 이제 브라이트비저가 작품을 제대로 돌보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예술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큰 사명이라고 늘 주장해왔지만, 그뤼예르성의 섬세한 융단을 창문으로 던지고 침대 밑에 처박아두는 것은 보호와는 거리가 멀다. 르네상스 시대 그림들은 어떠한가. 거의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벽에서 잡아채 급하게 액자에서 빼내고 차 트렁크에 실어 덜컹거리는 길을 이동한다. 보안 카메라를 등지고 훔쳤던 약제상 유화는 나무판 세 개가 결합되어 있는데, 다락에서 이미 화판 사이가 벌어지고 뒤틀리기 시작했다.(197p)
 
 
"브라이트비저가 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앤 캐서린은 경찰 조사에서 폰데어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하나의 작품 같은 거였어요." 브라이트비저는 앤 캐서린이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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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05년 후반, 앤 캐서린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낸 지 얼마되지 않아 그녀를 대체할 다른 '작품'을 찾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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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앤 캐서린을 만났을 때처럼 이번 새 인연도 만나자마자 강렬하게 빠져들었다.(274-275p)
 
 
책의 마지막 장에 쓴 대로 브라이트비저는 예술품 보안 컨설턴트로 일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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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29일 브라이트비저는 파리 오를리 공항에 도착한다. 출판사에서 돈도 받았겠다. 마침 스테파니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으므로 면세점에서 옷가게에 들른다. 보안 컨설턴트 일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보안상 취약한 부분이 "2초 만에" 눈에 들어온다. 보안 카메라도 없고 보안 요원도 없다. 그 순간 이상한 본능이 치민다. 브라이트비저에 따르면 "몸이 기억했다", 그는 스테파니에게 선물할 캘빈 클라인 흰색 바지와 프랑스 디자이너 소니아 리키엘의 티셔츠 한 장을 골라 여행 가방 안에 집어 넣고는 그대로 면세점을 빠져나간다.
그러다 책 홍보를 다닐 때 새 옷을 입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괴로웠던 시절 옆에서 응원해준 아버지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브라이트비저는 면세점을 빠져나온 지 1분도 안 돼 다시 돌아가서 옷을 일곱 개 정도 더 집어 들고 나온다. 가격으로는 총 1,000달러 정도 된다.
브라이트비저는 면세점의 보안 요원 수를 잘못 파악했다. 박물관 경비원과 달리 그들은 사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
어머니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브라이트비저를 용서한다. 다시 심리 치료를 받겠다고 약속하자 스테파니도 떠나지 않기로 한다. (275-278p)
 
 
삶에서 브라이트비저가 만난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리만큼 그의 도둑질에 관대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메쉴르, 그리고 앤 캐서린도 모두 그랬다. 관대한 정도가 아니라 브라이트비저만큼 예술을 사랑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던 듯하다. 예술 전문 기자 노스는 "이 무리에는 부모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지적한다. "'도둑질을 멈춰라', '작품을 돌려 놓아라', '어른답게 행동해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바로 이 점이 브라이트비저의 문제였다."(280p)
 
 
 
 
 
ㅡ 마이클 핀클, <예술 도둑> 中, 생각의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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