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6/29

 

여자, 과일, 이상·····. 이 세상에 기쁨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따사로운 가을날 낯익은 섬의 이름을 외며 바다를 헤쳐 나가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쉬 천국에다 데려다 놓을 수 있는 것이어서 나는 좋아한다. 그곳만큼 쉽게 사람의 마음을 현실에서 꿈의 세계로 옮겨 가게 하는 곳은 없으리라. 꿈과 현실의 구획은 사라지고 아무리 낡은 배의 마스트에서도 가지가 뻗고 과물이 익는다.(26p)

 

·····그래요, 젊은것들은 양도 처먹고 닭도 처먹고 돼지도 처먹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처먹지 않으면 배가 차지 않는다는군요·····.(35p)

 

다른 정열, 보다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히기 위해 쏟아 왔던 정열을 버리는 것. 그러나 그것 역시 일종의 노예근성이 아닐까? 이상이나 종족이나 하느님을 위해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은? 따르는 전형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길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좀 더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을 벗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건 무엇일까?(38~39p)

 

두목, 사람들 좀 그대로 놔둬요. 그 사람들 눈뜨게 해주려고 하지 말아요! 그래, 뜨여 놓았다고 칩시다. 뭘 보겠어요? 비참해요! 두목, 눈 감은 놈은 감은 대로 놔둬요. 꿈꾸게 내버려 두란 말이에요·····.

(...)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며 꿈이 짜낸 빛의 천이다. 보랏빛 바람(사랑, 증오, 상상력, 행운, 하느님)에 둘러싸인 구름·····. 이 땅의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도 이제는 암호 이상의 예언을 들려줄 수 없다. 암호가 모호할수록 선지자는 위대한 것이다.(92~93p)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본, 나뭇등걸에 붙어 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떠올렸다. 나비는 번데기에다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지만 오래 걸릴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입김으로 데워 주었다. 열심히 데워 준 덕분에 기적은 생명보다 빠른 속도로 내 눈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날개를 뒤로 접으며 구겨지는 나비를 본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엾은 나비는 그 날개를 펴려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내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쭈그러진 채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손바닥 위에서 죽어 갔다.

나는 나비의 가녀린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178p)

 

나는 당신의 소위 그 <신비>를 살아 버리느라고 쓸 시간을 못 냈지요. 때로는 전쟁, 때로는 계집, 때로는 술, 때로는 산투르를 살아 버렸어요. 그러니 내게 펜대 운전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요? 그러니 이런 일들이 펜대 운전사들에게 떨어진 거지요.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살 줄을 몰라요.(315p)

 

조르바, 우리는 구더기랍니다. 엄청나게 큰 나무의 조그만 잎사귀에 붙은 아주 작은 구더기지요. 이 조그만 잎이 바로 지굽니다. 다른 잎은 밤이면 가슴 설레며 바라보는 별입니다. 우리는 이 조그만 잎 위에서 우리 길을 조심스럽게 시험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잎의 냄새를 맡습니다. 좋은지 나쁜지 알아보려고 우리는 맛을 보고 먹을 만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이 잎의 위를 두드려 봅니다. 잎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소리를 냅니다.

어떤 사람은(겁이 없는 사람들이겠지요) 잎 가장자리까지 이릅니다. 거기에서 고개를 빼고 카오스를 내려다봅니다. 그러고는 부들부들 떱니다. 밑바닥의 나락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게 되지요. 멀리서 우리는 거대한 나무의 다른 잎들이 서그럭거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는 뿌리에서 우리 잎으로 수액을 빨아올리는 걸 감지합니다. 우리 가슴이 부풀지요. 끔찍한 나락을 내려다보고 있는 우리는 몸도 마음도 공포로 떨고 맙니다. 그 순간에 시작되는게·····.

나는 말을 멈추었다. 나는, 그 순간에 시작되는 게 바로 시(詩)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조르바가 알아들을 것 같지 않아 말을 끊어 버린 것이었다.(387p)

 

 

 

ㅡ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中,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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