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작년 겨울쯤에 읽었던 것 같다. 표시해놓은 구절을 적어놓고 잊어버렸다가 생각난 김에 올린다. 볼라뇨의 책 중에서 비교적 분량이 짧아 편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으나 읽기가 쉽지는 않았다. 이게 다 ‘나의 문해 능력이 부족한 탓이려니’라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 책을 써냈을 당시의 시대상과 중남미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한 지식이 전무 할 뿐만 아니라 거론하고 인용하는 작가들의 생소함으로 인해 완벽한 몰입과 이해에 어려움이 따랐다. 여러 핑계로 카라마조프가네 형제들도 못 읽고 있는데 2666은 그냥 닥치고 있어야겠다.
물론 페어웰은 자신이 소문의 엔진이나 뇌관이나 불씨라는 사실을 부인했고 나는 그를 탓할 기운도 의욕도 없었다. 그저 전화기 앞에 앉아 친구들이나 옛 친구들의 전화, 경솔함을 탓하는 오이도 씨와 오데임 씨와 페레스라루체의 전화, 혹은 원한을 품은 익명의 전화나 파다한 소문 중에서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지 알고자 하는 교회 당국의 전화, 그것도 아니면 산티아고의 문화계에서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도 내게 전화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 침묵이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거부감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윽고 사람들이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어안이 벙벙했다. 이 땅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그저 아련한 햇빛과 번개와 연기가 어렴풋이 보일 뿐인 미지의 잿빛 지평선을 향해 묵묵히 가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122~123p)
삶은 계속되고 계속되고 계속되었다. 마치 알갱이마다 미세하게 풍경을 그려 넣은 쌀알 목걸이 같은 삶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런 목걸이를 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목걸이를 벗어 눈에 가까이 대고 알갱이마다 담겨 있는 풍경을 해독할 충분한 인내심이나 용의가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쌀알 미니어처가 살쾡이나 독수리의 눈을 요하는 측면도 있고, 그 풍경들이 관, 공동묘지 조감도, 인적 없는 도시, 심연과 정상, 존재의 하찮음과 그 존재의 우스꽝스러운 의지,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들, 축구 시합을 하는 사람들, 칠레의 상상력을 순회 항해하는 거대한 항공모함을 방불케 하는 권태 등의 불쾌한 놀라움을 안겨 주곤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우리는 권태에 찌들어 있었다. 우리는 책을 읽었고, 권태를 느꼈다.(126~127p)
습관은 모든 조심스러움을 무디게 하고 일상은 모든 끔찍함을 누그러뜨리는 법이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 당시 왜 누구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을까? 답은 간단했다. 그 손님도 겁을 먹었고, 다른 사람들도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나는 겁을 먹지 않았다. 뭔가 말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너무 늦게 그 사실을 알았다. 시간이 자애로이 감추어 버린 것을 무엇 때문에 들쑤신단 말인가?(149p)
해결책이 있을까?(155p)
ㅡ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 中,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