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8/23
생명의 출현이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출현도 역시 유일무이한 것이라면, 그것은 (인류가 출현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인류의 출현 가능성이 거의 0이었기 때문이다. 우주는 생명으로 충만해 있지도 않았고, 생명계는 인간으로 충만해 있지도 않았다. 우리가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몬테-카를로의 도박장에서 우리의 번호가 우연히 운 좋게 뽑힌 것과 마찬가지다. 방금 10억을 따서 망연해 있는 사람처럼,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의 조건에 대해 낯설음을 느낀다 하더라도 뭐가 이상할 것이 있겠는가?(205p)
현대 사회에서 선택이 아직 작용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가장 적합한 자의 존속’을 유리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현대적인 용어로 말해서, ‘가장 적합한 자의 유전자가 그 자손들의 번창을 통해서 존속’하는 데 선택이 이롭게 작용하지 못한다. 지성, 야망, 용기, 상상력 등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성공의 요인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들은 개인적 성공의 요인은 될지언정, 유전적 성공의 요인은 아니다. 진화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이 유전적 성공의 여부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적 성공의 요인이 유전적 성공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통계에 의하면 지능 지수(혹은 문화 수준)와 커플 사이의 평균자녀수는 서로 반비례한다. 또한 같은 통계 자료에서 지능 지수가 높은 사람들끼리 커플로 결합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상황이다. 가장 뛰어난 유전적 잠재성이 그 번식률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소수의 엘리트들에게 점차 집중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231p)
현대 사회는 과학이 가져다준 물질적 풍요와 힘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과학이 주는 가장 심오한 메시지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실상 거의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진리를 찾기 위한 새롭고 유일한 원천에 대한 규정, 윤리의 기초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의 요구, 물활론적 전통과의 단적인 결별에의 요구, ‘옛날의 결속’을 완전히 포기하고 그 자리를 새로운 어떤 것으로 대신할 필요성의 제기 등등의 것을 말이다. 과학이 주는 모든 힘으로 무장하고 또한 그것이 주는 모든 물질적 풍요를 향유하면서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바로 이러한 과학에 의해 이미 그 뿌리까지 괴멸된 가치 체계에 따라 살고 있는 것이다.(242p)
과학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그 완전한 의미에서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은 마침내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온 자신의 오랜 꿈에서 깨어나 자신의 완전한 고독을, 자기 존재의 근본적인 이상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이 마치 집시처럼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변방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주는 그의 음악에 귀 기울이지 않으며, 그가 꿈꾸는 희망에도, 그가 겪는 고통이나 그가 저지르는 범죄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무관심해 할 뿐이다.(245p)
ㅡ 자크 모노, <우연과 필연> 中, 궁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