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14
2023 발췌
아름다운 글 한 편을 읽었다. 건축가 김원 선생이 돌아가신 대학 시절의 은사를 그리워하며 쓴 글이다. 그 교수는 정년퇴직하고 집에서 책 읽는 것으로 소일하셨다고 한다. 건축과 교수라면 은퇴하여 당연히 서울시나 건설부의 자문위원, 전문위원, 심의위원이라는 자리에 앉아 대형 건설 프로젝트의 수주에 직간접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보통인데 일절 그런 자리를 마다한 분이라고 한다. “은퇴는 은퇴여야지·····” 하셨다는 것이다. 「자장면과 삼판주」라는 글의 일부를 옮겨본다.
·····아마 꽤 심심하셨을 것이다. 그래선지 가끔 나에게 전화를 거셔서 “김군, 나 점심 좀 사주려나. 자장면도 좋고·····” 하셨다. 나는 이분이 ‘짜장면’이라 하지 않고 ‘자장면’이라고 천천히 발음하시는 게 듣기 좋았다. 내가 차로 모시러 가겠다고 하면 “아니야, 내가 나가서 버스를 타면 되네” 하셨다. ‘뻐스’를 ‘버스’로 하시는 것도 듣기 좋았다. 어느 핸가 정초에 세배를 드리려고 가뵙겠다고 전화를 드렸더니 무척 좋아하시면서 집을 알겠느냐 얼마나 걸리느냐 물으셨다. 그날은 폭설이 내려서 그 집까지 가는 데 애를 먹었다. 골목길에 들어서니 교수님이 부인과 함께 우산을 쓰고 대문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니 썰렁했고 난방도 시원치 않았다. 음식 준비나 누가 다녀간 흔적도 없었다. 그날 밤 교수님은 내가 사간 샴페인을 다 잡수시고 기분이 좋아서 “여보, 김군이 가져온 삼판주가 아주 좋구먼”하셨다. 샴페인을 ‘삼판주’라고 하는 것이 아주 듣기 좋았다. 몇 년 뒤에 교수님은 조용히 돌아가셨고 장례식도 조촐하게 치러졌다·····(87~88p)
그런데 이들의 공존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야기에는 끝이 있지만 삶에는 끝이 있을 수 없다는 것. 이야기는 시작되기가 어렵지 일단 시작되면 무조건 끝을 향해 가야 하지만, 삶을 다르다. 삶은 언제든 중단될 수 있고 멈출 수 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중단이고 멈춤이다. 말하자면 죽음은 이야기의 끝에 찍히는 마침표 같은 것이 아니다. 죽은 자들이 모두 삶을 마무리한 자들이라고 볼 수 없으며, 삶을 마무리한 자들이 그 순간에 바로 죽음을 맞는 것도 아니다. 모든 죽음은 예기치 않은 것이며 사건이다. 그러니 이야기로 치자면 마무리를 해야 할 순간에 사건이 터지는 꼴이다. ‘삶의 한가운데’라는 표현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삶의 모든 순간은 다 삶의 한가운데이고, 따라서 죽음은 늘 삶의 한가운데서 맞닥뜨리는 것이다. 이야기와 삶이 드러내는 이러한 편차로 인해 둘의 공존은 서로를 지치게 만든다.(250~251p)
아무 데로나 가려는 자는 그 어느 곳에도 가지 못하는 법. 그 어떤 항구도 목적지로 삼지 않는 사람에게는 바람도 아무 쓸모가 없다.(290p)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몽테뉴는 문필가가 되었다. 출판이 그를 문필가로 만들었고, 그래서 뒷날의 수필에서는 자신의 그림자를 분명히 드러냈다. 모든 공공성은 거울이다. 인간은 자신이 관찰당한다는 것을 알면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정말로 책들이 나오자마자 몽테뉴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수필들을 고치기 시작했다. 보르도 판본은 그가 죽는 순간까지 모든 표현을 갈고 닦았으며 구두점을 바꾸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뒷날의 판본들은 수많은 끼워 넣기를 보여준다. 그것들은 인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자기가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언제나 거듭 자신을 중심에 두었다. 이전에는 자신을 알기 위해서 자신을 탐색했다면, 이제는 자기가 누군지를 세상에 보여주려고 하며, 가장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정밀한 자신의 초상화를 내놓으려 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처음 판본에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적다는 것이 더 많은 말을 해준다. 그 모습이 진짜 몽테뉴, 탑 속의 몽테뉴이며, 자신을 모색하는 몽테뉴이다. 처음 판본에는 더 많은 자유와 정직함이 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조차 유혹을 피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자신을 알고자 하지만 나중에는 자신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291p)
ㅡ 임호부, <이모부의 서재> 中, 산과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