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6
“하지만 난 그 충고를 해줄 수 없다. 그리고 내가 그런 충고를 해줄 거라고 네가 믿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구나.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니? 사실 난 아내가 살길 바란다. 내 아들이 살길 바라고, 나도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무슨 일이라도 할 거야. 상황을 정리해보니 이건 목숨 하나에 세 목숨이 걸린 일이구나. 미안하다. 내 그릇이 더 크길 네가 기대했던 건 안다. 하지만 우린 늙었어, 레오. 우린 강제노동수용소에 가면 살아남지 못할 거다. 우린 헤어져서 홀로 죽게 될 거야.”
“아버지가 젊으셨다면 그땐 어떤 충고를 하셨을까요?”
스테판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옳다. 내 충고는 그래도 변함없었을 거야. 하지만 내게 화내지 마라. 여기 올 때 뭘 기대하고 온 거니? 우리가 그래 좋아, 죽는 건 상관없어, 그럴 줄 알았니? 그리고 우리가 죽는다고 뭐가 달라지니? 네 아내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거야? 너희 둘이 행복하게 계속 살 수 있는 거니? 그랬다면 너희 둘을 위해 기꺼이 내 목숨을 내놨을 거다. 하지만 일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잖아. 결국에 우린 죽겠지, 우리 넷 다, 하지만 넌 네가 옳은 일을 했다는 걸 알고 죽겠지.”(156-157p)
“내가 당신과 결혼했던 건 두려웠기 때문이야. 당신의 구애를 거절하면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어떤 구실을 붙여서든 날 체포할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야. 나는 어렸어, 레오. 당신은 권력이 있었고. 그래서 우리가 결혼한 거야. 내 이름이 레나인 척했다고 당신이 한 이야기 있지? 당신은 그 이야기가 재미있다고,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지? 내가 당신에게 가명을 댄 이유는 당신이 날 추적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야. 당신은 유혹이라고 생각했지만 난 감시라고 생각했어. 우리 관계는 공포를 토대로 만들어진 거야. 당신 관점에선 안 그렇겠지. 당신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니까. 도대체 내게 무슨 힘이 있어? 내가 한 번이라도 힘을 가진 적이 있나? 당신이 내게 청혼했을 때 내가 받아들인 이유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기 때문이야.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아주 많은 일들을 참아가면서 살고 있어. 당신은 한 번도 날 때린 적도 없고, 소리도 지르지 않았고, 폭음을 한 적도 없어. 그런 걸 생각해보면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운이 좋았다는 건 인정해. 당신이 내 목을 죄었을 때, 당신은 내가 당신과 지냈던 유일한 이유를 없애버린 거야.”
기차가 떠나기 시작했다. 레오는 기차가 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방금 한 말을 받아들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머릿속에 담아뒀던 것들을 쉬지 않고 쏟아냈다. 둑이 터진 것처럼 그 말은 자유롭게 풀려나왔다.
“지금 당신처럼 권력이 없어지면 사람들이 당신에게 진실을 말한다는 문제가 생길 거야. 당신은 그런 상태에 익숙하지 않겠지. 당신은 당신이 발산하는 공포로 둘러싸인 세계에 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함께 지내려면 그 망상에 찬 낭만주의는 접어둬야 해. 우리가 같이 지내는 건 상황 때문이야. 당신에겐 내가 있고 내겐 당신이 있지. 그것 외에는 사실 별게 없어.(249p)
ㅡ 톰 롭 스미스, <차일드 44> 中, 노블마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