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4/20

나는 더 이상 아버지가 그립지 않다. 보통은 그렇다. 나도 그리워하고 싶다. 그리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시간이 모든 것을 치유해준다는 말은 진실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사실이며,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조심하지 않으면, 시간은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가져가버리고, 그 자리에 이해만을 채워 넣는다. 시간은 기계이다. 시간은 고통을 경험으로 바꾸어놓는다. 순수한 정보를 가져다 편집하고, 보다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번역해놓는다. 우리 삶의 사건들은 기억이라고 불리는 다른 물질로 변형되며, 이 과정에서 손실되는 것들은 결코 다시 되돌릴 수 없다. 다시는 편집되지 않은, 가공되기 전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로 인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선택권이 없다.(88p)

나는 잊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느낌이라는 것을. 앞으로 나아가는 일, 절벽에서 아래의 암흑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일, 놀랍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갑자기 착륙하는 일. 그리고 이어지는 매 순간순간마다 그런 똑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는 일. 매 순간마다 추락한 다음 다시 기어 올라와 똑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겪는 일. 나는 이 윙윙대고 흐릿한 풍경, 잠망경을 통해 보는 것 같은 의식, 내 자신의 삶을 누리는 것의 마찰력과 견인력, 그 삶의 소모를 거의 그리워했었나보다. 나는 현재라는 이름의, 혼란스럽고 즉흥적이지만 과도하게 제작된 매 순간의 무대에 대해서, 만들어졌다 부서지는, 매번 스스로를 분해하는, 시간의 매 순간마다 부서진 후 다시 만들어지는 그 무대가 가져다주는 위험과 즐거움에 대해 거의 잊어버렸던 것 같다.(101~102p)

어쩌면 내가 원한 것이 바로 이런 상황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사람을, 모든 존재를 나로부터 밀어내는 것. 나는 언제나 이런 일을 저질러버린다. 진짜로 선택을 할 만한 기회가 오는 경우는 너무도 드물다. 보통은 이 세계의 줄거리가 나를 앞으로 가도록 밀어낸다. 그러나 가끔 중요한 갈림길, 시간의 나뭇가지가 갈라지는 지점에서, 내가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때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언제나 이런 결과가 나와버린다.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 내가 보호해야 할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만다. 나는 자기 타임머신을 망가뜨리는 고객들이나 돈을 구걸하는 지나가는 섹스봇 따위에게는 친절하지만,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일에서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 엄마, 필, 아버지에게도.(147p)

ㅡ 찰스 유, <SF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 中,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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