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18

 

 

삶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단 한가지도 없다.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 된다.(136p)

 

 

자기가 달을 용서하고 말고 할 계제가 못되는 애송이 소설가에 불과하다는 것과 자신이 때로 낯선 이들의 삶에 깜짝 놀라곤 하지만 낯선 눈으로 보면 허구한 날 술만 마시는 그녀 자신의 삶이야말로 가장 경악할 만한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157p)

 

 

“이를테면 과거라는 건 말입니다.”

마침내 경련이 잦아들자 그가 말했다.

“무서운 타자이고 이방인입니다. 과거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도 수정이 안되는 끔찍한 오탈자, 씻을 수 없는 얼룩, 아무리 발버둥쳐도 제거할 수 없는 요지부동의 이물질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기억이 그렇게 엄청난 융통성을 발휘하도록 진화했는지 모릅니다. 부동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유동적이게 만들 수 있도록, 육중한 과거를 흔들바위처럼 이리저리 기우뚱기우뚱 흔들 수 있도록, 이것과 저것을 뒤섞거나 숨기거나 심지어 무화시킬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의 기억은 정확성과는 어긋난 방향으로 그렇다고 완전한 부정확성은 아닌 방향으로 기괴하게 진화해온 것일 수 있어요.”(167-168p)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176p)

 

 

자기 취향에 충실할 때 사람들은 그만큼 한가한 것이고, 부고나 채무, 마감 같은 긴급성이 앞서면 누구라도 메시지를 남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180p)

 

 

 

ㅡ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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