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21

 

 

어떤 사람이 제멋대로 나를 침범하고 휘젓는 것을 묵묵히 견디게 하는 건 사랑이지만, 또 그 이유로 떠나기도 하지.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31p)

 

 

막 엄마가 된 당신을 위한 임신과 출산의 모든 것은 집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사이에 그들은 네다섯 번의 이사를 했으므로 책이 언제 어떤 경로로 분실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미숙아에 대한 설명이 그 어디쯤에 나왔는지도 이제 지원은 가물가물했다. 아니다. 조산을 막기 위한 운동법에 대해서라면 몰라도, 미숙아에 대해 다루는 부분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기를 기다리는 여자 중에서 미숙아의 삶에 관심이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건 운전면허를 따려는 이들이 교통사고 피해자의 사고 이후의 삶에 무관심한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58p)

 

 

그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구체적으로 말한 적이 없었고 나도 묻지 않았다. 아버지라면, 내 아버지에 대해서도 전혀 궁금하지 않은데 남의 아버지를 궁금해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77p)

 

 

내가 잠시 한눈을 팔아도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죄가 또 유예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하고 절망했다. 극적인 파국이 닥치면, 속죄와 구원도 머지않을 텐데.(97p)

 

 

새로운 부임지를 기다리면서 엄마는 신혼 시절 살았던 에든버러에 대해 부쩍 자주 이야기했다. 무엇보다 자유로워서 좋았다고 했다. 자유로웠다는 게 무슨 뜻인지 묻지 않았다. 그녀가 대뜸, 네가 없었다는 뜻, 이라고 말할까 보아서였다. 그러면 나도, 아예 태어나지 않았을 때가 제일 자유로웠다고 응수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땐 영원히 지속될 줄 알았어, 행복이, 우린 참 사랑했거든. 젊은 시절의 부모가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는지, 무엇에 이끌려 국적과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결합하게 되었는지 미안하지만 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과거의 정열과 무관하게 현재 그들의 삶은 몇 모금 마신 다음 뚜껑을 열어놓고 방치한 페트병 속 탄산수 같았다.(106p)

 

 

박이 그녀의 인격을 비하하거나 비아냥거리는 태도를 취한 적은 없었다. 그는 도우미에게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않았다. 말년의 그가 모든 사람에게 그러했듯이. 타인에게 아무 태도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태도를 완성시키는 방법은 오랫동안 몸에 밴 박의 습관처럼 보였고, 번번이 타인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많은 이들이 박의 과묵을 고압적이거나 권위적인 성격의 일단이라고 받아들였다. 그의 그런 모습은 노회한 정치인의 한 전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136p)

 

 

 

정이현, <상냥한 폭력의 시대>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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