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1
2017/6/30
재독. 여행이라는 단어와 관련 있는 몇 가지 주제를 뽑아 그 중심으로 여행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느슨하게 전개하는 책이다. 알랭 드 보통의 교양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분야의 인용은,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쉽게 접하기 힘들었을 인물에게 한층 쉽게 접근하도록 도움을 준다. 단적인 예로 존 러스킨을 들 수 있겠다. 이런 이유로 알랭 드 보통은 유시민이 지향한다는 ‘지식소매상’이라는 명칭에 가장 걸맞는 양반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의 퇴폐적이고 염세적인 주인공인 귀족 데제생트 공작은 런던 여행을 기대하면서,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어떤 장소를 상상하는 것과 실제로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매우 염세적인 분석을 내놓는다.(19p)
그러나 기차를 탈 시간이 다가오면서, 그와 더불어 런던에 대한 꿈이 현실로 바뀔 시간도 다가오면서, 데제생트는 권태에 사로잡혔다. 실제로 여행을 하면 얼마나 피곤할까. 역까지 달려가야 하고, 짐꾼을 차지하려 다투어야 하고, 기차에 올라타야 하고, 익숙하지 않은 침대에 누워야 하고, 줄을 서야 하고, 약한 몸에 추위를 느껴가며 베데커가 그렇게 간결하게 묘사한 볼거리들을 찾아 움직여야 하고······. 그렇게 그의 꿈들은 더럽혀졌다. ‘의자에 앉아서도 아주 멋진 여행을 할 수 있는데 구태여 움직이며 다닐 필요가 뭐가 있는가? 런던의 냄새, 날씨, 시민, 음식, 심지어 나이프와 포크까지 다 주위에 있으니, 나는 이미 런던에 와 있는 것 아닌가? 거기 가서 새로운 실망감 외에 무엇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데제생트트는 탁자에 앉은 채 생각했다. ‘나의 유순한 상상력이 알아서 갖다 바치는 광경들을 거부하고 늙은 멍텅구리들처럼 해외여행이 필요하고, 재미있고, 유용할 것이라고 믿다니, 내 정신이 잠시 착란을 일으켰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데제생트는 셈을 하고 선술집을 떠나, 트렁크, 짐 보따리, 대형 여행 가방, 바닥 깔개, 우산, 지팡이와 더불어 그의 별장으로 돌아가는 첫 기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집을 떠나지 않았다.(21-22p)
이렇게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자세하게 전해주는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는 금세 미쳐버릴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삶 자체는 그런 이야기 양식을 따라, 반복과 엉뚱한 강조와 논리가 서지 않는 플롯으로 우리를 지치게 만들곤 한다. 삶은 우리에게 바르닥 전자, 차 안의 안전 손잡이, 길을 잃은 개, 성탄 카드, 꽉 찬 재떨이의 가장자리에 앉았다가 중앙으로 자리를 옮긴 파리만 보여주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귀중한 요소들은 현실보다는 예술과 기대 속에서 더 쉽게 경험하게 된다. 기대감에 찬 상상력과 예술의 상상력은 생략과 압축을 감행한다. 이런 상상력은 따분한 시간들을 잘라내고, 우리 관심을 곧바로 핵심적인 순간으로 이끌고 간다. 이렇게 해서 굳이 거짓말을 하거나 꾸미지 않고도 삶에 생동감을 부여하는데, 이것은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보푸라기로 가득한 현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 현재를 긴 영화에 비유한다면, 기억과 기대는 거기에서 핵심으로 꼽힐 만한 장면들을 선택한다. 내가 이 섬에 오기까지 9시간 30분이 걸렸는데, 기억은 불과 예닐곱 장의 정적인 이미지만 남겨놓았다.(27-28p)
실제 경험에서는 우리가 보러 간 것이 우리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 때문에 희석되어 버린다. 우리는 근심스러운 미래에 의해 현재로부터 끌려나온다. 당혹스러운 신체적, 심리적 요구들 때문에 미학적 요소들의 감상은 방해를 받는다.(43p)
“삶은 모든 환자가 자리를 바꾸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병원이다. 이 환자는 난방 장치 앞에서 아프고 싶어 하며, 또 저 환자는 창가에 누워 있으면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늘 여기가 아닌 곳에서는 잘 살 것 같은 느낌이다.”(51-52p)
턱수염: 힘의 상징. 턱수염을 너무 많이 기르면 대머리가 된다. 넥타이를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된다. 플로베르는 루이스 콜레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나는 본질적으로 진지한 사람이지만, 나 자신이 매우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좁은 의미에서 우스꽝스럽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 삶에 내재하는 가장 단순한 행동과 가장 평범한 몸짓으로 표현되는 우스꽝스러움이라는 의미에서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면도를 할 때면 웃음을 터뜨리곤 합니다. 너무 백치 같아 보여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설명하기가 몹시 어렵군요.”(111-112p)
노인: 홍수, 폭풍 등을 이야기할 때마다 늘 더 심한 경우는 본 기억이 없다고 말한다.(113p)
그가 가본 곳을 그보다 먼저 여행한 유럽인은 거의 없었다. 덕분에 훔볼트는 상상력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는 아무런 자의식 없이 자신의 관심을 끄는 것을 따라갈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설정한 위계를 따르거나 의도적으로 거부하지 않고, 스스로 가치의 범주들을 만들 수 있었다.(159p)
여행자가 “19세기 벽화와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는” “교회의 벽과 지붕”에 개인적인 관심이 생긴다면(무슨 죄를 지은 사람처럼 유순하게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실들ㅡ파리처럼 따분한 사실들ㅡ을 크게 뭉뚱그린 질문들, 진정한 호기심이 닻을 내리고 있는 질문들 가운데 하나와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훔볼트에게 그런 큰 질문은 ‘왜 자연이 지역마다 다를까?’하는 것이었다. 이글레시아 데 산 프란시스코 엘 그란데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그 질문은 ‘왜 사람들은 교회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일 수도 있고, 심지어 ‘왜 우리는 신을 섬기는가?’일 수도 있다. 이런 소박한 출발점으로부터 시작해서 호기심이 사슬처럼 연결되어 ‘왜 지역이 달라지면 교회도 달라질까?’ ‘교회 건축의 주류 양식은 어떤 것이었을까?’ ‘주요한 건축가들은 누구였고, 그들은 어떻게 성공을 거두었을까?’ 하는 질문들을 포괄할 수도 있다. 호기심이 이렇게 느릿느릿 진화한 상태에서만 여행자는 이 교회의 거대한 신고전주의적 양식의 정면을 만든 사람이 사바티니였다는 정보를 권태와 절망이 아닌 다른 감정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여행의 위험은 우리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정보는 꿸 사슬이 없는 목걸이 구슬처럼 쓸모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된다.(171-172p)
우리는 눈이 차갑다거나 설탕이 달다고 느낄 때처럼 어떤 장소가 아름답다는 것도 즉시, 또 언뜻 보기에는 자연발생적으로 느끼는 것 같다. 따라서 우리가 느낀 매력이 바뀌거나 커질 것이라는 상상은 해보기 힘들다.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은 어떤 장소 자체에 내재한 특질들에 의해 또는 우리 심리의 내부 회로에 의해 결정이 나는 것 같다. 따라서 어떤 아이스크림이 특히 맛있다고 느끼는 것을 어쩔 수 없듯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장소에 대한 느낌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방금 비유적으로 이야기한 것들과는 달리 심미적인 취향은 그렇게 굳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장소를 그냥 지나쳐버리는 것은 이렇다 할 자극이 없어 그곳이 제대로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어떤 불행하지만 무작위적인 연상에 의해 등을 돌리게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와 올리브 나무와의 관계도 그 잎의 은빛 광택이나 가지의 구조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달라질 수 있다. 밀이 바람결에 낟알이 가득한 머리를 숙일 때 이 연약하지만 순수한 작물의 페이소스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밀을 둘러싼 새로운 연상이 형성될 수도 있다. 아주 서툰 표현으로라도 프로방스의 하늘에서 중요한 것이 파란색의 색조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그 하늘에서 뭔가 눈여겨볼 만한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251-252p)
러스킨의 생각에 따르면, 데생이 아무런 재능이 없는 사람도 연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었다. 즉 그냥 눈만 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피게 해준다는 것이다.(300p)
러스킨은 빨리, 그리고 멀리 여행하고 싶어 하는 소망이 한 곳에서 제대로 된 기쁨을 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즉 바구니 가장자리에 걸린 파슬리의 작은 가지 하나처럼 세밀한데서 기쁨을 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302p)
두 사람이 산책을 나간다고 해보자. 한 사람은 스케치를 잘하는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그런 데는 취미가 없는 사람이다. 그들은 녹색 길을 따라 걸어간다. 이 두 사람이 지각하는 경치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 사람은 길과 나무를 볼 것이다. 그는 나무가 녹색임을 지각하지만, 그것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나무가 녹색임을 지각하지만, 그것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태양이 빛나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반면 스케치를 하는 사람은 무엇을 볼까? 그의 눈은 아름다움의 원인을 찾고, 예쁜 것의 가장 세밀한 부분까지 꿰뚫어 보는 데 익숙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햇빛이 소나기처럼 잘게 나뉘어 머리 위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는 잎들 사이로 흩어지고, 마침내 공기가 에메랄드빛으로 가득 차는 모습을 관찰한다. 그는 여기저기에서 가지들이 잎들의 베일을 헤치고 나오는 모습을 볼 것이다. 보석처럼 빛나는 에메랄드색 이끼와 하얀색과 파란색, 자주색과 빨간색으로 얼룩덜룩한 환상적인 지의류가 부드럽게 하나로 섞여 아름다운 옷 한 벌을 이루는 것을 볼 것이다. 이어 동굴처럼 속이 빈 줄기와 뱀처럼 똬리를 틀고 가파른 둑을 움켜쥐고 있는 뒤틀린 뿌리들이 나타난다. 잔디가 덮인 비탈에는 수많은 색깔의 꽃들이 상감 세공처럼 새겨져 있다. 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스케치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녹색 길을 통과하여 집에 돌아왔을 때 할 말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다. 그저 이러저러한 길을 따라 걸어갔다 왔을 뿐이다.(310-312p)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329p)
여행의 심리를 우리 자신이 사는 곳에 적용할 수 있다면, 이런 곳들도 훔볼트가 찾아갔던 남아메리카의 높은 산 고개나 나비가 가득한 밀림만큼이나 흥미로운 곳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여행을 하는 심리란 무엇인가? 수용성이 그 제일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장소에 다가가게 된다. 어떤 것이 재미있고 어떤 것이 재미없다는 고정관념은 버리게 된다. (...)
이와 대조적으로 집에 있을 때는 기대감이 별로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동네에서 흥미 있는 것은 모두 발견했다고 자신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곳에 오래 살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이다. 우리가 10년 이상 산 곳에 뭔가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는 생각은 하기 힘들다. 우리는 습관화되어 있고, 따라서 우리가 사는 곳에 대해 눈을 감고 있다.(334-335p)
혼자 여행을 하니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함께 가는 사람에 의해 결정되어버린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도록 우리의 호기심을 다듬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특정한 관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어떤 측면이 나타나는 것을 교묘하게 막을 수도 있다. 동행자에게 면밀하게 관찰을 당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이 억제될 수도 있다. 또 동행자의 질문과 언급에 맞추어 우리 자신을 조정하는 일에 바쁠 수도 있고, 너무 정상으로 보이려고 애를 쓰는 바람에 호기심을 억누를 수도 있다.(341-342p)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ㅡ하찮고 일상적인 경험ㅡ을 잘 관리함으로써 그것을 경작 가능한 땅으로 만들어 1년에 세 번 열매를 맺게 한다. 반명 어떤 사람들ㅡ그 숫자는 얼마나 많은지!ㅡ은 운명의 솟구치는 파도에 휩쓸리거나 시대와 나라가 만들어내는 혼란스러운 물줄기 속으로 밀려들어가면서도 늘 그 위에 코르크처럼 까닥거리며 떠 있다. 이런 것을 관찰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인류를 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 즉 적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아는 소수(극소수)와 많은 것을 가지고 적은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아는 다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343p)
ㅡ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中, 이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