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21



 

미리 말해두지만, 당신의 삶과 나의 삶, 과거와 미래, 씁쓸함으로 바뀐 달콤한 것들, 그리고 기쁨으로 변할지도 모르는 씁쓸한 것들에 대해 말해야 하는 이 편지 속에는 당신의 오만함에 깊은 상처를 낼지도 모르는 이야기가 자주 나올 거야.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당신의 오만함을 완전히 죽여버릴 때까지 편지를 읽고 또 읽기를. 만약 편지 속에서 당신이 부당하게 비난받는다고 느끼는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부당하게 비난받는 어떤 과오가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만약 편지 속에 당신 눈에서 눈물을 자아내는 구절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밤과 더불어 낮마저도 눈물을 위한 시간이 되어야 하는 감옥에서 우리가 우는 것처럼 울기를 바라. 그러는 것만이 당신을 구원할 수 있을 테니까.(44p)

 

 

궁극적으로, 결혼이나 우정과 같은 공동적인 관계를 이어주는 건 대화이고, 대화는 서로의 공통적인 기반이 있어야 가능하지. 그리고 지적 수준이 아주 다른 두 사람 사이에 가능한 공통적 기반은 가장 낮은 수준이 될 수밖에 없어. 생각과 행동에서 경박한 것은 매력적이지. 경박함은 내 극과 역설 속에 표현된 아주 멋진 철학의 핵심이기도 하고. 하지만 삶의 허황됨과 어리석음은 종종 나를 진력나게 했어. 우린 오직 진창 속에서만 만날 수 있었던 거야. 당신이 끝없이 반복했던 단 한 가지 이야기가 아무리 지독하게 매력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조차 더없이 단조롭게 느껴졌지. 난 종종 지루해 죽을 것만 같았고, 당신이 하는 이야기를 당신과 어울리기 위해 치러야 하는 값비싼 대가의 일부로, 어쩔 수 없이 참고 견뎌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지. 뮤직홀에 빠져드는 당신의 취향이나, 먹고 마시는 데 엄청난 돈을 써대는 당신의 기벽, 또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당신의 성격을 받아들였던 것처럼.(60-61p)

 

 

당신한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고통은 우리를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야. 고통만이 유일하게 우리가 살아 있음을 의식하게 해주기 때문이지. 과거의 고통에 대한 기억은 우리에게 꼭 필요해. 그건 우리의 지속적인 정체성에 대한 보증서이자 증서 같은 것이거든. 나 자신과 즐거움의 기억 사이에는 나 자신과 실제의 즐거움 사이만큼이나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 있어. 세상 사람들이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당신과의 삶이 쾌락과 허랑방탕함과 웃음만으로 일관된 것이었다면, 아마 난 과거의 단 한순간도 기억해낼 수 없었을 거야.(69-70p)

 

 

전적으로 자유로우면서도 동시에 전적으로 어떤 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매 순간 깨닫게 되는 인간적인 삶의 영원한 모순인 것 같아. 그리고 종종 그것만이 당신 성격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해명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인간의 영혼이 지닌 심오하고 무시무시한 미스터리에 대해 어떻게든 설명할 수 있다면 말이지.(86p)

 

 

나 역시 나만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지. 나는 내 삶이 한 편의 눈부신 희극이 될 거라고 믿었어. 당신은 그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우아한 인물 중의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고. 그런데 알고 보니 내 삶은 한 편의 역겹고 혐오스러운 비극이었던 거야.(88p)

 

 

인생의 치명적인 실수는 인간의 비합리성에 기인하는 게 아니야. 비합리적인 순간이 때로는 가장 근사한 순간이 될 수도 있거든. 인생의 치명적인 실수는 인간의 논리적인 면에서 비롯되지. 둘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어.(93p)

 

 

나는 불평할 생각이 전혀 없어. 감옥에서 깨닫게 되는 것 중의 하나는, 모든 것은 그대로이며, 앞으로도 그대로일 것이라는 사실이야(114p)

 

 

내겐, 이 모든 일이 어제도 아닌, 바로 오늘 일어난 것만 같이 느껴져. 고통은 하나의 긴 순간이기 때문이지. 고통은 계절처럼 나눌 수 있는 게 아니야. 우린 다만 그 다양한 순간들을 기록하고, 그 순간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라고. 우리에게 시간은 전진하는 게 아니야. 순환할 뿐이지. 이곳에서의 시간은 고통을 중심축으로 끊임없이 회전하는 것처럼 느껴져. 삶을 마비시키는 부동성, 일상의 세세한 상황까지 불변의 패턴에 따라 규제하기. 먹고 마시고 걷고 눕고 기도하거나 또는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 행위까지 빠짐없이 지배하는, 철의 공식으로 이루어진 가차없는 법칙. 이러한 삶의 부동성은 끔찍한 각각의 날들을 아주 작은 디테일에서까지 형제처럼 닮게 만들어버리면서,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 외적인 힘들에까지 그 부동성을 전염시키는 것처럼 보이지. 파종기나 수확기, 허리를 굽혀 곡식을 수확하는 사람들이나 포도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면서 포도를 따는 사람들, 떨어진 꽃잎들로 새하얗게 변하거나 떨어진 과일들이 흩어져 있는 과수원의 풀밭에 관해서 우린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 수 없어. 우리에겐 오직 한 가지 계절, 고통의 계절만이 존재하기 때문이지.(117-118p)

 

 

내가 두 명의 경관 사이에서 파산 법정으로 향할 때, 음울한 긴 복도에서 나를 기다리던 로비는 수갑을 차고 고개를 숙인 채 지나가는 내게 엄숙하게 모자를 들어올려 경의를 표했어.

(...)

지혜가 내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고, 철학은 불모지와 같고, 내게 위안을 주고자 했던 이들의 격언이나 문구가 내 입속에서 티끌과 재처럼 서걱거릴 때, 그 조용히 침묵하던 작은 사랑의 행위에 대한 기억은 나를 위해 모든 연민의 우물을 막아놓았던 봉인을 풀고, 사막을 장미처럼 활짝 꽃피우게 하며, 고독한 유배의 씁쓸함으로부터 나를 끌어내 세상의 상처받고 망가진 위대한 영혼들과 조화를 이루게 했지.(122p)

 

 

그리고 이 모든 것에서 얻은 결론은, 나는 당신을 용서해야 한다는거야. 나는 반드시 당신을 용서해야만 해. 지금 이 편지를 쓰는 것도 당신 마음속에 씁쓸함을 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그런 감정을 뽑아내기 위해서야.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당신을 용서해야하는 거야. 가슴속에 독뱀을 품은 채 자신을 갉아먹고 자라게 하거나, 매일 밤 일어나 자기 영혼의 정원에 가시를 심을 수는 없으니까.(134p)

 

 

고통은 영구적이고, 모호하고, 어두우며 무한성을 띠고 있다.(138p)

 

 

나는 내가 평범한 교도소의 평범한 죄수였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여야만 해. 그리고 당신한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가 배워야 하는 것들 중 하나는 그런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야. 나는 그 사실을 하나의 벌로 받아들여야 해. 만약 벌 받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벌 받는 게 아무 소용 없겠지. 물론 난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들 때문에 유죄판결을 받기도 했고, 내가 한 행동들 때문에 유죄판결을 받기도 했지.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가 저지르고도 한 번도 벌을 받지 않은 것들이 그보다 훨씬 더 많아.(145p)

 

 

즐거움과 웃음 뒤에는 거칠고 엄혹하고 냉담한 기질이 있을 수 있어. 하지만 고통 뒤에는 언제나 고통이 있을 뿐이지. 기쁨과는 달리 고통은 가면을 쓰지 않아.(153-154p)

 

 

어느 한순간에 무언가를 깨달았다가는, 이내 무거운 걸음으로 뒤따르는 긴 시간 동안 그것을 잊고 살기 때문이지.(156p)

 

 

다른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162p)

 

 

시적인 심성을 지닌 모든 이들처럼 그는 무지한 사람들을 사랑했어. 그는 무지한 사람의 영혼 속에는 언제나 위대한 생각을 위한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하지만 그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참을 수가 없었어. 특히 교육에 의해 바보가 된 사람들을. 매사에 왈가왈부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현대인들. 그리스도는 그들을 이렇게 묘사했지. 앎의 열쇠는 갖고 있지만, 자신이 사용할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하도록 허용하지도 않는 유형이라고.(179-180p)

 

 

내가 여기서 나간 후에 한 친구가 파티를 열어 나를 초대하지 않는다 해도 난 조금도 서울해하지 않을 거야. 나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어. 자유와 책과 꽃과 달이 있는데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어? 게다가 이제 파티 같은 것은 내 몫이 아니야. 그런 건 이미 신물이 날 만큼 해본 터라 더이상 아무런 흥미도 없어. 이제 내겐 그런 식의 삶은 완전히 끝났어. 아주 다행스럽게도 말이지. 하지만 여기서 나간 후에 어떤 친구가 슬픔에 처했는데 그것을 나와 함께 나누기를 거부한다면, 그때는 정말 더없이 씁쓸하게 느껴질 것 같아. 만약 그 친구가 내게 애도의 집의 문을 닫아버린다면, 나는 몇 번이고 다시 돌아가 들어가게 해달라고 애원할 거야. 내가 함께 나눌 자격이 있는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만약 그가 나를 그러기에 적절하지 않고, 자신과 함께 눈물 흘릴 자격이 없는 존재로 여긴다면, 나는 그 사실을 가장 사무치는 수치이자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내게 가해진 불명예로 느끼게 될 거야.(189p)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눈물은 매일 겪는 일상의 한 부분이지. 감옥에서 울지 않는 날은 마음이 행복한 날이 아니라, 마음이 돌처럼 굳은 날이야.(192p)

 

 

예전에 사람들은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라며 나를 비난하곤 했지.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한 개인주의자가 되어야만 해.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나 자신으로부터 많은 것을 이끌어내고, 그 어느 때보다도 세상에 적게 요구해야만 해. 사실, 나의 몰락은 삶에 개인주의를 지나치게 요구해서가 아니라 너무 적게 요구한 데서 비롯된 거야. 내 삶에서 유일하게 수치스럽고 용서받을 수 없고 경멸할 만한 행위는 당신 아버지로부터 나를 지켜달라며 마지못해 사회에 도움과 보호를 요청했다는 거야. 누군가에게 그런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개인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충분히 잘못된 것일 수 있어. 하지만 당신 아버지 같은 성격과 면모의 사람 때문에 그랬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떤 구차스러운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을까?

물론 내가 사회의 힘을 작동시키자마자, 사회는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지. “당신은 지금까지 나의 법들을 무시하며 살아와놓고, 이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 법들에 호소한다는 건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 법들이 최대한으로 적용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당신이 법에 호소를 했으니, 그 법을 따라야만 하오.” 그 결과, 나는 지금 감옥에 있지.(194-195p)

 

 

내가 정말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당신 아버지의 특징적인 성격을 똑같이 따라 하려고 했다는 거야. 그는 당신에게 하나의 경고가 되었어야 하는데 어째서 당신이 모방하고자 하는 본보기가 되었는지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서로 증오하는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유대감이나 동료애 같은 게 존재할 수도 있다는 예외 때문이 아니라면 말이지. 아마도 비슷한 이들이 서로에게 적대감을 느끼는 기이한 법칙에 의해, 당신과 당신 아버지는 여러 면에서 아주 달라서가 아니라 아주 비슷하기 때문에 서로를 증오하는 게 아닐 까 생각해.(197-198p)

 

내가 당신이라면, 누군가가 가식적인 것들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걸 원치 않았을 거야. 누구라도 자신의 삶을 세상에 드러내 보여줘야 할 이유는 없어. 세상은 어차피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자신이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하고는 얘기가 달라지지. 예전엔 언젠가 나와 아주 가까운 친구10년 동안 알고 지낸 친구가 나를 보러 와서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자기는 세상 사람들이 나에 대해하는 나쁜 말들을 한마디도 믿지 않으며, 나를 완전히 결백한 사람으로, 당신 아버지가 꾸민 비열한 흉계의 희생자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내가 알기를 바란다고 말이지. 나는 그의 말에 울음을 터뜨리면서 이렇게 말했어. 당신 아버지의 결정적인 비난 가운데는 거짓된 것들과 역겨운 적의에 의해 내게 전가된 것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내 삶이 비뚤어진 쾌락들과 기이한 열정들로 가득했던 것 또한 사실이라고. 그러니 그가 그 사실을 나에 관한 기지의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는다면 나는 더이상 그의 친구가 될 수 없고, 그와 어울릴 수도 없다고 말했지. 그는 내 말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만 우린 여전히 친구로 남았어. 나는 가식으로 그의 우정을 구하지 않았던거야. 당신에게도 말했듯이, 진실을 말하는 것은 고통을 동반하는 법이야. 하지만 거짓을 말하도록 강요받는 것은 더욱더 고통스러운 일이지.(217-218p)

 

 

본래 비밀이란 언제나 그 구체적인 발현들보다 훨씬 작은 법이거든. 원자의 위치를 옮기는 것만으로도 온 세상이 흔들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226p)

 

 


오스카 와일드, <심연으로부터>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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