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4/18
영화를 좋아한다.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기 가장 쉽고도 편한 취미라고 생각했고, 책과는 다르다고도 생각했다. 둘 다 정보를 제공해주는 매체이나 책은 그중에서도 눈으로 읽어나가는 게 필요하므로 더욱 적극성을 띄는 과정이 요구되는 반면, 영화는 내 이해가 어디에 도달하든 눈을 뜨고 앉아 있기만 하면 마침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고 한 편의 영화를 봤다는 자족감이 들었다. 그 기간이 길어지며 자연스레 영화에 대한 관심과 더 알고자 하는 마음이 일었으며 관련 잡지와 인터넷을 통해 여러 사람을 알게 됐다. 정성일, 김영진, 허문영, 김소희, 남동철, 듀나, 김혜리, 이동진 등등. 이중 지금도 관심을 가지고 글이나 정보를 찾아보는 사람은 두 명이다. 김혜리와 듀나. 듀나에 대한 얘기는 다른 글에서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여기서는 김혜리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내가 영화를 조금이라도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면 바로 그 계기를 마련해 준 사람이다. 앞으로도 지면, 영상, 그 무엇에서든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항상 글로 접하다가 라디오 방송에서 처음 목소리를 들었을 때의 기억이 선연하다. 그 이후 성시경의 음악도시에서 ‘영화, 사람을 만나다’로, 이동진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김혜리의 주간영화’로, FMzine에서 ‘수요 재개봉관’으로, 그리고 현재 진행하는 ‘김혜리의 필름클럽’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듣고 있다. 왜 이렇게 팬(?)이 됐나 생각해봤는데 우선 식견이 풍부하다. 너무 당연한 소리지만, 영화라는 예술을 이해하는 데 교양 일반은 필수적인 덕목이다. 영화라는 매체는 참 특이하다.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는 연극과도 완전히 다르다. 연극이 관람자의 입장에서 무대의 어느 곳에든 시선을 열어두고 집중해서 보고 싶은 부분을 취사선택할 자유를 누리는 형식이라면, 영화는 관객에게 그러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감독이 의도한 미장센과 프레임 하에서 제한된 자유를 누릴 뿐이다. 또한, 비교적 새로운 예술이라 할 수 있는 영화는 전통적 예술의 영역이었던 회화, 건축, 음악, 무용 등을 적극적으로 영화 속으로 끌어들인다. 따라서 단순히 영화만을 만 번쯤 본다고 의미 있는 영화 읽기가 저절로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다. 영화에 대한 제반 지식을 기본으로 깔고 폭넓은 교양이 있어야 영화를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영화를 그렇게 분석하며 볼 필요는 없으나 영화를 좋아하며 좀 더 다양한 시각으로 보고자 하는 이라면 그의 말과 글에서 친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그럼에도 겸손하며 사려 깊다. 하나만 알게 되어도 남을 가르치고,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남을 교정하려는 양아치 같은 욕구가 솟구치는 게 인간이라는 종인데 이 사람에게서는 그런 걸 느낄 수 없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서두의 추천사에서 이런 말을 한다.
비평가가 듣고 싶은 찬사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당신의 글을 읽기 위해서 그 작품들을 봤어요.”
물론 신형철은 뒤이어 나오는 “당신처럼 써보고 싶어서 영화를 제대로 보기 시작했어요.”라는 말을 하기 위해 가져온 말이지만 나는 다시 그 찬사를 김혜리에게 보내고 싶다. 당신의 글을 읽기 위해 그 작품들을 봤다고.
어린 시절 나는 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과거를 지우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었는데 영화는 내가 유일하게 아는(잠을 제외한) 임사체험이자 임생체험을 제공했다. 바깥 세계와 나를 단절하고 어둠 속에 숨죽이고 있으면 “빛이 있으라!”라는 신의 명이 떨어진 듯, 영사실 창에서 백광이 쏟아지고 하나의 생애가 시작된다. 그것은 나의 삶이 아니지만 앞에 썼듯 딱히 나의 삶이 아닌 것도 아니다. 영화 한 편 안에도 무수한 삶과 죽음이 있다. 테이크는 지속되는 동안 현재 진행형의 삶이며 편집은 한 쇼트의 죽음이자 다음 쇼트의 탄생이다. 죽음이 삶에게 그러하듯, 쇼트가 끝나기 전에 우리는 그 생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인간은 삶에 포함돼 있지 않을 때 그것의 전경을 조감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술이 유용하다.(12p)
여하튼 여행은 부정할 수 없는 고역이다. 세계는 저 밖에서 우리가 휴가 내기만 기다리고 있다가 위안과 각성을 선물하는 놀이동산이 아니고, 대자연은 우리를 팔 벌려 안아주려고 거기 존재하지 않는다. 여행의 고생스러운 면모를 배제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2010)나 <꾸뻬 씨의 행복여행>(2014)같은 영화는 그래서 미덥지가 않다. 지중해의 풍미를 담은 몇 번의 저녁 식탁이나 제3세계 국민과의 짧은 교류로, 자아가 발견되고 영혼이 치유될 가능성은 여행사 카탈로그와 항공사 CF에나 있다. 실제로 우리의 자아는 우리를 접대하고 가르치려고 작심한 상대가 아니라 예기치 못하게 부딪히고 부대낀 것들에 의해 딱지를 떼고 형태를 잡아나간다.(23p)
멀리서 바라볼 때는 보듬어주고 싶어 하고 가엾어하면서 나와 그 사람의 거리가 좁혀지면 회피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 거기에 대한 고민이 시작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133p)
기억이란 불러낼 때마다 원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회상한 버전을 재구성한 결과라고 한다. <브루클린>이 남긴 심상은 분명 나의 외지 생활에 대한 추억을 물들일 것이다. 그래서 몇 년 후에는 실제로 나의 감상인지 에일리스를 통한 간접경험인지 가리기 힘든 기억의 구역이 생길 것이다. 내가 영화를 훔친 건지 영화가 내 삶을 훔친 건지 모르지만 어느 쪽이든 개의치 않는다.(137p)
회상하기 시작할 때 유년은 끝난다는 걸 어른인 우리는 알고 있다. 모든 체험의 불가역한 일회성과 죽음을 인식하며 비로소 사춘기는 시작된다.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 기쁠 것도 슬플 것도 없다. 하지만 거기에는 어렴풋한 아름다움이 있다.(193p)
어른의 드라마라는 표현을 쓰며 내가 떠올리는 그림은 자신을 괴롭히는 부패하고 부조리한 세계를 형성하는 데에 스스로 일조한 다음 그 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중년의 모습이다. 그는 젊은이들처럼 “왜 이따위 세상을 만들었느냐”고 기성 세대를 원망할 입장이 못 된다. 그렇다고 칵 죽을 수도 없다. 행복하긴 글렀지만, 지키고 싶고 어쩌면 근근히 지킬 수 있을 지도 모르는 가치와 사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연륜이 손아귀에 쥐어 준 한 줌의 힘으로 세상이 더 나빠지는 걸 막는 데에 힘을 보태는 것만이 삶의 정당성을 방어하는 마지막 보루다. 존 르 카레의 인물들은 희망 없이 거대한 피로의 하중에 깔린 채 노력한다. 줄담배와 알코올에 기대어 낡은 몸을 질질 끌고.(224p)
영화를 본 다음 들춰본 <신 엘로이즈>에는 나탈리가 눈에 담았을 법한 다른 명제도 있다. “소진된 사랑이 영혼을 고갈시킨다면 억제된 사랑은 영혼을 고양시킬 수 있다.” 내 눈에는 나탈리의 대처가 힘든 현실을 회피하는 ‘정신 승리’로 보이지 않는다. 예술, 철학, 종교의 궁극적 효용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나는 같은 지점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예술도, 철학도, 종교도 세계를 직접 개선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이 세계를 개선하려는 태도를 유지하도록 지지해준다. 이것은 엄연히 실질적이며 위대한 힘이다.(264p)
ㅡ 김혜리,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中, 어크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