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5/11

 

 

“뛰어나 봐야 아무 쓸데없다는 거지, 그래, 알겠다.”

“쓸데없기만 한 게 아니야. 해롭다니까. 뛰어난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려고 할 때면 그 여자는 경쟁 관계에 들어갔다고 느끼게 돼. 자기도 뛰어나야만 할 것 같거든. 버티지 않고 바로 자기를 내주면 안 될 것 같은 거지. 그런데 그냥 보잘것없다는 건 여자를 자유롭게 해 줘. 조심하지 않아도 되게 해 주는 거야. 재치 있어야 할 필요도 전혀 없어. 여자가 마음을 탁 놓게 만들고, 그러니 접근이 더 쉬워지지. 아, 이쯤 하자. 다르델로를 만나면 보잘것없는 인물이 아니라 나르키소스를 상대하게 될 거야. 이 말의 정확한 의미에 주의해야 해. 나르키소스라는 건 거만한 사람이라는 게 아니야. 거만한 사람은 다른 이들을 무시하지. 낮게 평가해. 나르키소스는 과대평가하는데, 왜냐하면 다른 사람 눈에 비친 자기 모습을 관찰하고 더 멋있게 만들고 싶어 하거든. 그러니까 그는 자기의 모든 거울들에 친절하게 신경을 쓰는 거지.”(25-26p)

 

 

“나 자신한테 화가 나서 그래. 나는 왜 틈만 나면 죄책감을 느끼는 걸까?”

“괜찮아.”

“죄책감을 느끼느냐 안 느끼느냐. 모든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 같아. 삶이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지. 다들 알아. 하지만 어느 정도 문명화된 사회에서 그 투쟁은 어떻게 펼쳐지지? 보자마자 사람들이 서로 달려들 수는 없잖아. 그 대신 다른 사람한테 잘못을 뒤집어씌우는 거야. 다른 이를 죄인으로 만드는 자는 승리하리라. 자기 잘못이라 고백하는 자는 패하리라. 네가 생각에 푹 빠져서 길을 걷고 있어. 어떤 여자가 맞은편에서 오는데 마치 세상에 저 혼자인 것처럼 왼쪽도 오른쪽도 안 보고 그대로 전진하는 거야. 둘이 서로 부딪쳐. 자, 이제 진실의 순간이야. 상대방한테 욕을 퍼부을 사람이 누구고, 미안하다고 할 사람이 누굴까? 전형적인 상황이야. 사실 둘 다 서로에게 부딪힌 사람이면서 동시에 서로 부딪친 사람이지. 그런데 즉각, 자발적으로, 자기가 부딪쳤다고, 그러니까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런가 하면 또 즉각, 자발적으로 자기가 상대에게 부딪힌 거라고, 그러니까 자기는 잘못한 게 없다면서 대뜸 상대방을 비난하고 응징하려드는 사람들도 있지. 이런 경우 너라면 사과할 것 같아 아니면 비난할 것 같아?”

“나라면 분명 사과하겠지.”

“아이고, 이 친구야, 너도 사과쟁이 부대에 속한다는 거네. 사과로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그래, 그렇지.”

“그런데 착각이야. 사과를 하는 건 자기 잘못이라고 밝히는 거라고. 그리고 자기 잘못이라고 밝힌다는 건 상대방이 너한테 계속 욕을 퍼붓고 네가 죽을 때까지 만천하에 너를 고발하라고 부추기는 거야. 이게 바로 먼저 사과하는 것의 치명적인 결과야.”

“맞아. 사과하지 말아야 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사람들이 모두 빠짐없이, 쓸데없이, 지나치게, 괜히, 서로 사과하는 세상, 사과로 서로를 뒤덮어 버리는 세상이 더 좋을 것 같아.”(57-58p)

 

 

그는 성공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시샘을 불러일으킬까 걱정했고, 찬탄의 대상이 되는 것을 즐겼지만 추종자들을 피했다. 사사로운 생활에서 몇 차례 상처를 입은 뒤, 특히 퇴직자들의 음울한 무리에 합류해야 했던 해부터 이런 조심성은 고독을 즐기는 취향으로 변했다. 그의 반순응적인 발언들이 예전에는 그를 더 젊어 보이게 했지만 이제는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데도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옛날 사람, 그러니까 늙은이가 되게 했다.(77-78p)

 

 

“샤를하고 너는, 사교계 칵테일파티에서 불쌍하게 속물들 시중이나 드는 동안 좀 재미있게 해 보려고 웃기는 파키스탄 말을 만들어 냈어. 뭔가 신비하게 만드는 즐거움이 너희에게 보호막이 돼 주었을 거야. 하긴 그게 우리 모두의 작전이기도 했지.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을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하지만 내 눈에는 우리 장난이 힘을 잃었다는 게 보인다. 너는 기를 쓰고 파키스탄어를 해서 흥을 돋우려 하고 있어. 그래 봐야 안 돼. 너는 피곤하고 지겹기만 할 뿐이야.”(96-97p)

 

 

“너, 왔다가 그냥 간 게 몇 번이야?”

“벌써 세 번. 그래서 사실 여기에 샤갈을 보러 오는 게 아니라 한 주 한 주 지나며 줄이 거 길어지는 걸, 그러니까 지구에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는 걸 확인하러 오는 거지. 저 사람들 봐! 저 사람들이 느닷없이 샤갈을 사랑하게 됐다고 생각해? 저 사람들은 오로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어디든 달려가고 뭐든 다 할 준비가 돼 있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냥 누가 하라는 대로 다 해. 기막히게 조종하기 쉽다고.”(136p)

 

 

 

ㅡ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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