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6/18
도무지 측정이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것을 수치화, 계량화하여 비용편익의 관점에서 최대의 효율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공리주의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본능적인 거부감을 일으킨다. 그러나 모든 사안에 대해 완벽하고도 엄격하게 공리주의를 적용할 수는 없더라도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비단 기부라는 행위에 한정지을 것도 없이 실생활에서도 공리주의적 접근은 많은 도움이 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선택과 행동을 살펴보면 얼마나 나이브하게 결정을 내리는지 알 수 있다. 한 달이 아닌 하루만이라도 자신의 행동을 녹화하여 살펴본다면 자신이 하는 행동이 얼마나 근거에 기반을 두지 않고 막연히 ‘그냥’이루어 지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기부는 대개 장기적으로 이루어진다. 기부를 한 달하고 그만둘 게 아니라면 좀 더 주의를 기울여 내 돈이 정말 제대로 된 곳에 쓰이는지 알아보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책에서도 지적하는 것처럼 기부를 한다는 행위만으로 자신의 도덕적 라이센스를 얻고 도덕적 우월감에 취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이 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을 돕는다는 따뜻하고도 고상한 행위를 냉정하고도 불경스럽게 따져 묻는다고 기부라는 행위의 가치가 떨어질 일은 없다. 그럴 리가.
도입도 좋지만 기존의 통설과 고정관념을 무수히 깨뜨리는 8장이 가장 통쾌하고 흥미로웠다. 친환경제품을 사용하는 것이 실제로 환경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공정무역거래를 통과한 제품을 사용하는 것이 과연 노동착취공장의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지와 같은 사안을 공리주의적 접근으로 살펴보며, 다시 한 번 일이라는 게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단순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 일은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 특히 9부는 일견 원론적인 얘기로 들리기도 하고 2017년의 한국사회에 완벽히 적용하기 힘들겠지만 어떤 직업 관련 책들보다 간결하고도 핵심적인 조언을 한다고 생각한다.
진로를 고민하는 학생과 에코백을 들고 다니는 사람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덧. 부록은 이 책의 주장을 4페이지로 요약하고 있으니 바쁘다면 요약이라도 읽어보면 어떨까 싶다. 더불어 저자의 관점과 주장에 관심이 생겼다면 피터 싱어의 ‘효율적 이타주의자’를 함께 읽어보는 것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무분별한 선행은 오히려 무익할 때가 많다. 플레이펌프가 대표적 예다. 트레버 필드와 그의 지원자들은 사실관계를 따져 보지 않고 감정에 치우쳤다. 아이들이 행복한 얼굴로 즐겁게 놓고 있을 뿐인데도 마을에는 깨끗한 물이 공급된다는 발상에만 도취된 것이다. 케이스 재단도, 로라 부시도, 빌 클린턴도 플레이펌프가 실생활에 유용하다고 납득할 만한 분명한 증거가 있어서라기보다 혁신적인 기술에 매료돼 지원한 거였다. 플레이펌프 캠페인의 비판자들이 필드와 그 지원군에게 악의가 있었다고 비난한 건 아니었다. 그들이 아프리카 시골 주민들을 진심으로 돕고 싶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선의에만 의존하면 오히려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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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남을 도우려 할 때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행동으로 옮기곤 한다. 숫자와 이성을 들이대면 선행의 본질이 흐려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탓에 세상에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기회도 놓치고 만다.
가령 당신이 번화가를 걷고 있다고 치자. 매력적인 젊은 여성이 부담스러울 만큼 열성적인 태도로 길을 막아서며 대뜸 말을 건다. 당신이 걸음을 멈추자 그녀는 ‘눈부신 화장품’에서 투자자를 찾고 있다고 말하며 화장품 시장규모가 얼마나 거대한지, 자사 제품이 얼마나 뛰어난지 줄줄 늘어놓는다. 게다가 ‘눈부신 화장품’은 자금의 90퍼센트를 제품생산에 투입하고 임금, 유통, 마케팅에는 10퍼센트도 쓰지 않는데도 매우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므로 높은 투자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당신이라면 이 화장품 회사에 투자하겠는가?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구미가 당긴다면 전문가와 상담을 하거나 동종업체를 조사해 ‘눈부신 화장품’의 실적을 따져 볼 것이다. 투자한 돈으로 최고의 이익을 거둘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도 없이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남의 말만 믿고 선뜻 돈을 내는 멍청한 짓을 하진 않을 거라는 말이다. 화장품 회사가 길거리에서 투자자를 모집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해마다 수십만 명이 잘 알지도 못하는 모금 담당자의 말만 믿고 들어 본 적도 없는 자선단체에 기부한다. 그럴진대 그 돈이 어떻게 쓰이는 알 턱이 없다.(23-25p)
효율적 이타주의라는 용어는 말 그대로 ‘효율’과 ‘이타주의’가 결합된 표현이다. 각각의 의미부터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이타주의’는 ‘타인의 삶을 개선시킨다’는 단순한 의미를 나타낸다. 이타주의가 희생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 생각은 다르다. 남을 도우면서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도 이타주의다. ‘효율’은 주어진 자원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둔다는 의미다. 중요한 건 효율적 이타주의가 ‘그만저만한’ 선행을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힘닿는 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두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어떤 선행이 효율적인지 판단하려면 착한 일에도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남을 돕는 ‘특정’방식이 ‘소용없다’고 주장하거나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어떤 방식이 ‘가장’좋은지 따져 보고 그것부터 먼저 실천하자는 말이다.(26-27p)
우리는 이 세상의 갖가지 문제에 기가 질려 더러 이렇게 중얼거린다. “내가 나서서 도와 봤자 양동이에 물 한 방울 더 보태는 격이지 뭐가 달라지겠어.” 하지만 앞서 본 그래프들이 말해 주듯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문제는 물 한 방울의 크기지 양동이의 크기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매우 커다란 물 한 방울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같은 비용으로 우리가 누리는 편익보다 100배나 더 많은 편익을 남에게 제공할 수 있다는 걸 똑똑히 확인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수천 명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43p)
부상자가 이미 넘치는 상황인데도 환자가 계속 몰려들었다. 우리는 환자 이마에 1, 2, 3이라고 표기한 테이프를 붙였다. 1은 ‘즉시 치료’, 2는 ‘24시간 내 치료’, 3은 ‘치료 불가능’이라는 뜻이었다. 이마에 3이 붙은 사람들은 응급실 맞은편 길가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으로 옮겨 최대한 편안한 상태에서 숨을 거둘 수 있도록 했다. 담요를 덮어 몸을 따뜻하게 해 주고, 냉수를 먹이고, 갖고 있는 모르핀을 전부 투여했다. 1에 해당하는 환자들은 들것에 실어 응급실이나 그 근처 병원 입구로 옮겼다. 2가 붙은 사람들은 환자 ‘1’뒤에서 차례를 기다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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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우리도 오르빈스키처럼 선택을 해야 한다.
가령 당신이 자선단체에 얼마간의 돈을 기부하려 한다고 치자. 아이티 지진 구호활동을 펼치는 단체에 기부하면 재난 희생자들을 도울 수 있다. 이는 우간다의 에이즈 퇴치나 당신이 사는 동네의 노숙자 돕기에 기부할 돈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당신의 선택에 따라 생활이 개선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면 한 군데를 선택하기보다 차라리 모든 단체에 빠짐없이 기부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기부할 돈을 더 마련하거나 기부금을 쪼개 몇 군데로 나눠 보내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가진 돈과 시간은 제한돼 있고 당신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따라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한다. 당신은 누구를 도울 것인가?(50-52p)
<스탠퍼드 사회개혁 리뷰> 블로그에 효율적 이타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게시했다. 한 가지 명분을 다른 명분과 비교하는 것을 두고 “자선 제국주의나 마찬가지다. ‘내 명분’은 옳고 남의 명분은 귀중한 자원의 낭비라고 본다”고 비난했다. “한 사람이 얻는 이득을 다른 사람이 얻는 이득과 저울질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명분이 가장 효율적인지 따져 보는 게 비윤리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틀린 말이다. 그 말이 옳다면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디저트를 내주는 것보다 편익이 더 크다는 말이 성립할 수 없다. 100만 명의 목숨을 구하는 행위와 10명의 목숨을 구하는 행위가 다르지 않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의사가 감기 환자보다 심장 발작을 일으킨 환자를 먼저 치료할 수 있도록 치료의 우선순위를 정해 두는 간호사들도 아무 근거 없이 결정을 내리는 셈이다. 그렇지 않다. 타인의 이해관계와 내 이해관계를 비교하는 건 감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지만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62p)
어떤 명분에 힘을 보태야 할지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다. 가령 삼촌이 암으로 사망했다면 암 연구기금 조성에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사별의 아픔을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으로 승화시키는 건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암을 다른 치명적 질병보다 우선시해 기부하는 건 자의적인 판단의 결과일 뿐이다. 삼촌이 암이 아닌 다른 질병으로 사망했다 해도 슬픔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까운 사람을 잃었을 때 애도하는 건 그가 고통에 시달리며 예기치 않게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지 특정한 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은 아니다.(64p)
잠비아 출신 경제학자 담비사 모요는 2009년 『죽은 원조』에서 국제원조는 ‘해롭다’며 중단을 촉구했다. “지난 60년간 아프리카에 1조 달러 이상의 원조가 제공됐지만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모요의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고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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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들여다보면 원조 회의론자들이 내놓은 진단은 오해를 부를 가능성이 매우 놓은 데다 남을 도우려는 사람들에게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 주기 십상이다.
우선, 회의론자들은 투입자금의 규모를 강조하는 오류를 범한다. 모요가 책에서 강조한 1조 달러의 원조 지출액이 그렇다. 1조 달러는 막대한 금액처럼 들린다. 일반인은 실감하기 어려운 큰돈이니 여타 지출액과 비교해 그 규모를 가늠해 보자. 연간 세계경제 총생산은 87조 달러다. 미국의 연간 사회보장 지출액은 8000억 달러다. 지난 10년간 세계 화장품 매출은 1조7000억 달러다. 2001년도에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이 용처를 알 수 없다고 밝힌 국방 예산만도 2조 3000억 달러다.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면 1조 달러가 그리 큰돈은 아니라는 말이다. 앞뒤 맥락을 고려하면 이 사실이 더 부각된다.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1조 달러를 원조했으니 연간 원조금은 170억 달러에 못 미친다는 얘긴데, 이를 4억1200만 명(같은 기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평균 인구 수)으로 나누면 연간 원조금은 1인당 40달러에 불과하다. 원조금 1조 달러가 수십 년에 걸쳐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분배됐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1인당 원조 금액은 보잘것없는 수준이다.
둘째, ‘원조가 그만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지난 수십 년간 경제 성장이 가장 더뎠던 나라에 사는 이른바 ‘밑바닥 10억 명’조차 삶의 질이 극적으로 개선되었다. 1950년에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의 기대수명이 고작 36.7세였지만 지금은 50퍼센트 이상 높아진 56세다. 현실은 담비사 모요가 내린 진단과 정반대다. 원조 자금은 보잘것없었지만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놀랄 만큼 개선된 것이다.(70-71p)
당신이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고 가정해 보자. 불타는 건물로 뛰어들어 문을 부수고 들어가 연기와 불꽃을 헤치고 무사히 한 사람을 구했다면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여러 명의 목숨을 구한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이번 주에는 화재 현장으로 뛰어들어 사람을 구하고 다음 주에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또 그다음 주에는 총알을 막아 사람을 구한다면? 뉴스에 등장해 영웅대접을 받을 테고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보다 ‘훨씬 더’큰 선행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가장 엄밀한 추정치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데 드는 비용은 약 3400달러다. 부유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현재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면서도 매년 기부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다. 평생을 통틀어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마다 한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기부는 화염에 휩싸인 건물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처럼 눈부신 액션은 없어도 생명을 구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가장 효율적인 단체에 기부하는 것만으로도 수십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니, 그만큼 대단한 일이 어디 있을까?(80-81p)
사실 우리는 늘 추가되는 단위를 기준으로 생각한다. 가령 당신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새 스웨터를 받았다고 치자. 스웨터를 받아서 마냥 좋을까? 당신이 스웨터를 몇 장이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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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있는 스웨터가 많을수록 새 스웨터의 가치는 줄어든다. 즉, 스웨터가 너무 많으면 가치는 마이너스가 된다. 이 책도 당신에게 한 권만 있다면 흥미롭게 읽을지 몰라도 한 권 더 생기면 냄비받침으로나 쓸 것이다. 이를 경제학자들은 ‘수확체감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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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분야가 이미 많은 관심과 자금을 모은 상태라면 굳이 그 분야에 추가 자원을 보태 봐야 큰 효과를 내기 어렵다. 반면 상대적으로 방치된 분야라면 효율적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88-89p)
국제사회가 자연재해에 합리적으로 대응했다면 규모가 더 큰 재해와 빈국에서 발생한 재해에 더 많은 구호금이 전달됐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지원금은 재해의 규모와 심각성이 아니라 정서적 호소력이 얼마나 큰지, 얼마나 널리 알려져 있는지에 따라 분배된 것으로 보인다.
이 사례를 든 이유는 헤드라인 뉴스로 보도되는 재해가 아니라 대대적으로 보도되지 못한 재해에 기부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2008년에 발생한 중국 쓰촨성 지진이 그렇다. 쓰촨성에 지진이 일어났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만 해도 이 책을 쓰기 전까지는 몰랐다. 중국 중심부에 위치한 청두에서 북서쪽으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지역에서 발생한 이 지진으로 8만7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일본 지진의 5배, 아이티 지진의 절반에 맞먹는 수다. 그런데도 국제지원금은 5억 달러에 불과했다. 이는 일본이나 아이티에 쏟아진 지원금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수준이다. 무슨 까닭인지 다른 지진 소식처럼 대서특필되지 못했고 그래서 지원금도 적었다. 따라서 기부금의 효과는 쓰촨성 지진 쪽이 더 컸을 것이다.(89-91p)
수확체감의 법칙은 어떤 사건이 강한 감정적 반응을 일으켜 돕고 싶은 충동이 생길 때 이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당신처럼 감정에 휘둘려 기부하는 사람들이 분명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난 사고를 접했을 때는 일단 울컥 솟는 감정을 억누르고 유사한 재난이 항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의 관심이 온통 쏠려 있는 곳이 아니라 당신의 돈이 가장 큰 보탬이 될 곳에 기부해야 한다.
또한 수확체감의 법칙은 남을 돕고 싶다면 부유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점도 보여 준다.(92p)
따라서 어떤 행위의 잠재력을 평가할 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리가 없다’는 이유로 묵살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상식이 된 대다수의 윤리적 관념들도 과거에는 매우 급진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여성, 흑인, 비이성애자도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생각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여겨졌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1790년 미 의회에 노예제 종식을 청원하면서 철벽 같은 반대에 부딪쳤다. 의회는 이틀간 논쟁을 벌였고 노예제 옹호론자들은 “노예 소유주에게는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인종이 뒤섞이면 미국의 가치와 특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며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에도 결국 노예제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 같은 반대론은 용납하기 어렵다. 여성, 흑인, LGBT의 평등권을 쟁취하기 위해 힘쓴 운동가들은 승리가 눈앞에 보였기 때문이 아니라 목표를 이뤘을 때의 보상이 매우 컸기 때문에 활동을 전개해 나간 것이다.(136-137p)
내가 배고픈 경찰들에게 도넛을 나눠 주는 자선 단체를 설립했다고 하자. 사명감에 불탄 나머지 사업 경비 중 0.1퍼센트만 간접비로 쓰고 나머지 비용은 나눠 줄 도넛을 사는 데 쓴다. 게다가 단체의 CEO인 나는 보수를 전혀 받지 않는다. 나는 훌륭한 단체를 설립한 걸까? 앞서 봤듯 가장 중요한 건 해당 자선단체가 가져올 ‘영향’이다. 당신의 기부금 100달러로 무엇을 하는지, 그 결과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나아졌는지를 살펴봐야 한다.(154p)
선진국보다 더 쉽게, 더 적은 비용으로 인명을 구할 수 있으므로 빈국에 집중해야 한다는 점은 앞서 설명했다. 그렇다면 교육, 식수 공급, 경제력 강화 등 여타 문제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역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영역들이지만 두 가지 이유에서 유독 보건 분야가 돋보인다. 첫째, 검증된 성과다. 천연두 근절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소아마비, 홍역, 설사병, 기니충병(메디나충증) 등 기타 보건 영역에서도 개발원조가 큰 기여를 했다. 반면 원조와 경제 성장의 상관성은 그만큼 뚜렷하진 않다. 둘째, 보건 개입 특성상 증거가 더 확실하다. 가령 미국에서 ‘알벤다졸’이라는 약이 회충 구제에 효과를 보였다면 케냐나 인도에서도 동일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사람의 몸은 대체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반면 인도에서 성과를 거둔 교육 사업이 케냐에서도 통할 거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문화와 교육 인프라의 간극이 크기 때문이다.(169-170p)
이처럼 열악한 오동환경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이곳에서 생산된 제품의 불매운동을 전개하는 단체들이 제법 있다. (...) 반대 운동은 고매한 의도에서 출발했다. 열악한 노동조건에 경악을 금치 못해 반대 운동에 나서는 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노동착취 공장 제품을 사지 않는 건 잘못이다. 5장에서 살펴봤듯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해 보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착취 공장이 경제적 압력에 굴복해 문을 닫으면 기존 노동자들이 더 나은 일자리를 얻을 것이라 짐작하기 쉽다. 과연 그럴까?
현실은 반대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노동착취 공장이 좋은 일자리다. 대안이라고 해 봐야 저임금 중노동에 시달리는 농장 일꾼, 넝마주이 등 더 형편없는 일자리뿐이고 심지어 실직자가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재활용 플라스틱을 찾아 쓰레기 더미를 뒤지던 캄보디아 여성 핌 스레이 라스는 “공장에서 일하면 정말 좋겠어요. 거긴 그래도 그늘에서 일할 수 있잖아요. 여긴 너무 더워요”라고 말했다.
기꺼이 일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노동착취 공장이 상대적으로 좋은 일자리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이들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노동착취 공장을 택한 노동자들이며, 갖은 애를 쓴 끝에 겨우 일자리를 얻은 사람들도 있다. 21세기 초반에 라오스캄보디아버마에서는 400만 명이 노동착취 공장 일자리를 얻기 위해 태국으로 이주했다. 볼리비아에서도 많은 이들이 노동착취 공장에 취업하기 위해 추방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 브라질로 불법 입국했다. 브라질 노동착취 공장 노동자들의 연평균 임금은 2000달러다. 많다고 할 순 없지만 농업과 광업이 주된 산업인 볼리비아의 평균 임금에 비하면 600달러 더 많다. 한편 방글라데시 노동착취 공장 노동자들의 하루 임금은 2달러, 캄보디아는 5.5달러, 아이티는 7달러, 인도는 8달러다. 터무니없는 저임이지만 현지 하청공장 일당이 1.25달러임을 감안하면 노동착취 공장으로 몰리는 것도 당연하다. 선진국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 추방을 무릅쓰면서까지 열악한 노동착취 공장에서 일하려는 걸까? 1장에서 설명했듯 부유한 나라 사람들은 절대빈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경제학자들은 노동착취 공장이 가난한 나라에 득이 된다는 데 의문을 달지 않는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좌파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같은 고용 증대 방식이 전 세계 극빈층에게는 반가운 희소식이라는 게 압도적인 주류 견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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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노동자들이 처한 가혹한 노동환경은 가히 공분을 살 만하다. 그렇다고 노동착취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 대신 국내 생산 제품을 구입하는 건 해결책이 아니다. 애초에 착취공장을 선망의 직장으로 만든 절대빈곤을 해결하려 더 노력하는 게 올바른 대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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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알반 커피보다 몇 달러 더 주고 공정무역 커피를 사면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객관적 증거에 따르면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첫째, 공정무역 제품을 구입한다고 해서 무조건 가난한 나라의 빈곤층에 수익이 돌아가는 건 아니다. 공정무역 인증 기준은 상당히 까다롭다. 가난한 나라의 농부들은 이 기준을 충족시키기 어렵다. 공정무역 커피 산지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멕시코, 코스타리카 등이다. 에티오피아 같은 최빈국과 비교하면 10배나 부유한 나라들이다. 설령 공정무역 제품 구입이 농부들에게 더 많은 몫을 되돌려 주는 방법이라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부유한 나라의 공정무역 제품을 구입하는 것보다 최빈국의 비공정무역 상품을 사는 게 더 효율적일 수 있다. 소득 수준에 따라 돈의 가치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전 세계 경제 불평등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살펴본 1장을 떠올려 보자. 코스타리카는 에티오피아에 비해 10배 부유하기 때문에 평균적인 코스타리카인이 체감하는 몇 달러의 가치보다 평균적인 에티오피아인이 체감하는 1달러의 가치가 더 크다.
둘째, 공정무역 제품이라는 이유로 소비자가 추가로 지불한 돈 중 실제로 농부들의 수중에 떨어지는 건 극히 일부다. 나머지는 중개인이 갖는다. 공정무역재단은 소비자가 추가로 지불한 금액 중 얼마가 커피 생산자에게 돌아가는지 알려 주는 자료를 제공하지 않으므로 외부에서 독립적으로 진행한 연구를 참고해야 한다. 세계은행 경제 자문관인 피터 그리피스가 영국 카페 체인점의 의뢰로 수행한 용역연구에 따르면 추가 금액 중 가난한 나라의 커피 생산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1퍼센트 미만이다.
셋째, 생산자에게 돌아가는 그 적은 몫마저 더 많은 임금으로 바뀐다는 보장이 없다. 공정무역 인증은 인증받은 단체가 생산한 제품에 더 높은 가격을 쳐주는 절차이지 해당 단체에 소속된 생산자들에게 더 높은 임금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다. 런던대 동양아프리카연구소의 크리스토퍼 크래머 교수가 이끈 연구팀이 4년에 걸쳐 에티오피아와 우간다의 공정무역 노동자 임금을 조사한 결과, 공정무역 노동자들은 비공정무역 노동자들에 비해 임금이 더 낮고 노동조건도 열악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공정무역이 큰 성과로 내세우는 지역공동체 사업에서도 정작 극빈층이 소외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쯤 되면 공정무역 제품을 살 이유가 없다. 기껏해야 상대적으로 부유한 나라의 노동자에게 아주 미미한 금액을 보태 줄 따름이다. 차라리 더 저렴한 상품을 사고 그렇게 절약한 돈을 비용효율성이 높은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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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널리 보급된 방법 중 대다수는 그다지 효과가 없다. 그중에서도 잘 알려진 방법이 전자제품을 쓰지 않을 때 전원을 꺼 두라는 지침인데 실제 효과는 미미하다. 휴대폰 충전기를 1년 내내 꽂아 두는 것보다 뜨거운 물로 목욕 한 번 더 하는 게 탄소 발자국을 더 늘린다. 대기전력 소비의 주범인 TV 플러그를 1년 내내 꽂아 두는 것보다 자동차로 2시간 달리는 편이 온실가스를 더 많이 배출한다. 방에서 나갈 때 전등을 끄라는 조언도 효과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전등이 가정용 에너지 사용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겨우 3퍼센트다. 집에 아예 불을 켜지 않고 살아도 탄소 배출량을 감축시키는 효과는 미미하다. 비닐봉지 사용은 어떨까? 비닐봉지를 전혀 쓰지 않아도 연간 감축되는 온실가스 배출량은 100킬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도 부풀려 잡은 수치이지만 이마저도 당신의 연간 탄소배출량 중 0.4퍼센트에 불과하다. 현지 생산 제품을 구매하면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다는 것도 과장된 얘기다. 식품 생산으로 생겨나는 탄소발자국 중 10퍼센트만 운송 과정에서 발생하고 80퍼센트는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실 국내산인지 수입산인지를 따지는 것보다 구매하는 식품 종류가 더 중요하다. 수입 식품을 전혀 사지 않는 것보다 일주일 중 하루는 붉은색 육류 및 유제품을 먹지 않는 것이 탄소발자국을 줄이는 데 더 효과적이다. 수입 식품보다 국내산 식품 탄소발자국이 더 큰 경우도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북유럽인들이 자국에서 생산한 토마토를 먹으면 스페인에서 수입한 토마토를 먹을 때보다 탄소발자국이 5배 커진다. 온실재배에 필요한 난방 및 조명 시설 가동으로 배출되는 온실가스량이 수송에 따른 배출량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개인이 온실가스 배출을 줄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고기 섭취 줄이기, 장거리 이동 줄이기, 가정에서 전기 및 가스 사용 줄이기 등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바로 탄소상쇄다. 다른 곳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감축하거나 온실가스 배출을 막는 사업에 기금을 내는 탄소상쇄는 개인 차원에서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려는 노력보다 효과가 더 크다.(182-191p)
탄소상쇄에 반대하는 여타 논리들도 있지만 대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조지 몬비오는 앞서 인용한 글에서 탄소상쇄를 중세시대의 관행에 빗대 ‘면죄부 판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를 인터넷 풍자 사이트의 불륜상쇄 서비스와 비교해 보자. 이 웹사이트는 “당신이 파트너 몰래 바람을 피우면 대기 중에 상심, 고통, 질투를 배출하는 셈입니다. 불륜상쇄는 파트너를 속이지 않고 가정에 충실한 분에게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당신의 불륜을 상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고통과 불행이 상쇄되므로 당신은 떳떳하게 살 수 있습니다”라고 주장한다.
두 경우 모두 비유에 결함이 있다. 면죄부를 사더라도 타인에게 끼친 피해나 당신이 저지른 죄를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효율적인 탄소상쇄는 다르다. 당신의 탄소배출로 다른 누군가가 피해를 입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평생 탄소를 배출하면서도 동시에 효과적으로 상쇄한다면 평생에 걸친 총량으로 따져 볼 때 당신은 기후변화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는 셈이다. 불륜의 경우 정신적 충격의 여파가 피해를 입은 상대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 상쇄를 통해 불륜 행위의 총량을 그대로 유지한다 해도 그렇다. 반면 탄소상쇄는 당신의 배출량으로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는 일 자체를 막는다. 애초에 불륜을 저지르지 않은 상태와 ‘동격’인 것이다.(195-196p)
요약하자면 이렇다. 기부를 하면 당신의 돈을 가장 효율적인 사업에만 집중시킬 수 있다. ‘최선’의 활동과 ‘그럭저럭 좋은’활동의 결과가 다르다는 점만 봐도 효율적인 기부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윤리적 상품을 더 많이 구입하는 데 더 많은 돈을 쓰는 건 목표를 정확히 공략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런데 윤리적 소비와 기부의 차이는 이게 다가 아니다. 윤리적 소비 물결이 오히려 해로울 수도 있다고 생각할 만한 까닭이 있다. 바로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도덕적 허가moral licensing’효과 때문이다. 이는 착한 일을 한 번 하고 나면 이후에 선행을 덜 실천하는 것으로 보상받으려 하는 경향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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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허가 효과는 사람들이 실제로 착한 일을 하는 것보다 착해 보이는 것, 착한 행동을 했다고 인식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을 보여 준다. 에너지절약 전구를 구입하는 행위로 ‘내 몫을 했다’고 생각하면 조금 뒤에 잔돈 몇 푼을 훔쳐도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자기 인식이 흔들리지 않는다.
도덕적 허가 효과는 결심을 비틀 수 있다. 다른 사람이 효율적인 선행을 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향후 남을 돕는 횟수를 줄이는 방식으로 이타적 행위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고 한다면 의미가 없다.(199-201p)
열정을 따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어이없는’조언이기 때문이다. ‘적성에 꼭 맞는’직업을 찾아야 된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니지만 이미 가슴속에 품고 있던 ‘열정을 발견하고 그에 맞는’직업을 찾으라는 건 전적으로 틀린 말이다. 한번 자문해 보자. 열정을 따르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까? 최대관심사를 찾고 그 관심사에 부합하는 직업을 골라 그저 밀어 붙이기만 하면 되는 걸까? 객관적인 증거를 두고 본다면 답은 그 반대다.
우선 대다수 사람들이 열정을 보이는 분야는 직업 세계에 들어맞지 않는다. 캐나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열정을 쏟는 분야가 있다고 답한 84퍼센트의 학생 중 90퍼센트가 스포츠, 음악, 예술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통계 자료를 보면 스포츠, 음악, 예술 산업과 관련된 일자리는 3퍼센트에 불과하다. 이 학생들 중 절반만 열정을 따른다 해도 대다수가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 이 경우 ‘열정을 가진 분야에서 일하라’는 조언은 오히려 해가 된다.
(...) 유달리 뛰어난 재능을 지닌(또는 운이 좋은)소수만 안정적으로 생계를 꾸려 갈 수 있는 스포츠 및 음악 분야가 그렇다. 미국 고등학교 운동선수 중 프로로 진출하는 사람은 1000명 중 1명꼴도 안 된다. 대다수 사람들은 직업에 대한 열정이 없다. ‘열정을 따르라’는 조언은 그런 사람들을 어설픈 자기성찰로 내몰아 잘못된 길로 빠지게 할 수도 있다.(208-209p)
세계 소득분포의 85퍼센트는 다름 아닌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결정된다. 극빈층은 생산적인 활동에 제약이 많은 환경에 살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254p)
ㅡ 윌리엄 맥어스킬, <냉정한 이타주의자> 中, 부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