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6/28


발췌독. 잘 쓴 책이다. 제목이 비슷해서 같이 빌렸던 하지현의 '정신 의학의 탄생'과 대단히 비교됨.

 

 

18세기 말 이전까지 정신과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의사들이 정신병자를 돌봐 왔고 관리법을 적은 지침서 등이 전해 오기는 했지만,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의사들이 집단으로 내세울 전문분야로서의 정신의학이 없었다는 의미이다. 외과를 제외하고는 어떤 전문분야도 마찬가지였다. 의료가 세분화되어 전문분야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야 나타난 현상이다.

정신병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인간의 역사만큼 오래된 정신병은 부분적으로는 생물학적이고 또 유전적이기도 하다. 모든 정신질환이 다 신경계에서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병은 분명 뇌의 화학적 이상에 의해 생긴다. 그리고 어느 사회에서든 정신질환에 대응하는 나름대로의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13-14p)

 

 

생물정신의학이 의사의 용어였다면, 신경성nerves이라는 용어는 환자를 위한 것이었다. 19세기 초, 수용소로 환자를 데려오는 가족들은 환자가 미쳤기 때문이 아니고, 신경성 질환 때문이라고 말했다. 20세기 초부터 개인 의원에서 정신과 환자를 볼 수 있게 해주었던 발판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 신경성 질환이라는 개념이었다. 신경이라는 단어는 정신의학역사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지만, 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역설적이게도 신경과neurology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정신의학의 사회적 역사를 시작해야겠다. 신경성 질환이라는 말은 신체 중 “신경”에 속하는 부분의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이어서, 광기라는 말보다 환자들에게는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다. 1940년대 정신분석이 대세를 잡기 전까지는, 의사들 또한 정신병이든 신경증이든 모두 다 본질상 “신경에 의한 것”이라는 이 허구에 기꺼이 동참했다. 왜 정신과 의사들이 수치심 가리개 역할을 하는 이 허구적 개념에 적극 동참하려 했는지는 매우 중요한 주제이고, 정신의학 발달을 이끌어온 근본 동력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정신과 의사 입장에서 본다면, 이 치부 가리개를 발판으로 하여 수용소라는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 자기 개인 의원에서 중류층 환자를 상대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환자 입장에서 보면, 광기 환자라는 불명예와 유전병과 퇴행자라는 치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핑계가 되었다. 정신질환과 달리, 신경질환은 대부분 유전과 상관없는 것으로 알려져 오명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경성 질환이라는 단어는 의사와 환자가 완벽하게 공모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정신병 환자를 보던 의사들(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정신과 의사라고 불리게 된 유형의 의사들)은 도시의 신경-전문의사, 전기치료사, 신경정신과 의사 등등으로 불리게 되면서 이들의 사회적 지위와 수입은 껑충 뛰어오르게 된다. 그리고 환자들은 그들의 질병이 “진짜 기질성”인 것이고, 따라서 자신의 병이 유전이나 퇴행의 과정을 밟는 것, 혹은 “전부 다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환상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크게 안도하게 되었던 것이다.(193-194p)

 

 

정신의학 역사에 관한 여태까지의 책들은 정신분석이 나타나기 이전의 모든 사건이 정신분석이라는 한 꼭짓점을 향해 수렴되어 왔다고 보고, 정신분석을 이야기의 끝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1939년 프로이트가 사망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돌아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보이는데, 그것은 정신분석이 정신의학 역사의 마지막 장이 아니라 실은 흐름이 멈춰져 있던 시간이며, 연속성의 단절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20세기 중반 중산층 사람들은 자신의 심리적 문제가 오래전의 사건과 연관된 무의식적 갈등, 특히 성적 갈등에서 생긴다는 이론에 열광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수세기 동안 정신과 의사들은 이 질병이론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를 정신의학의 소유라고 생각했는데, 그러했던 특별한 이유는, 정신분석이 정신의학의 존재 공간을 수용소에서 개인 진료소로 이동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이트 이론이 생존했던 시간은 아주 짧은 시기에 불과하다. 긴 카우치에 환자가 누워 있고 그 뒤에 침묵하는 분석가가 앉아 있던 장면이 정신의학의 무대 중앙을 차지했던 시간은 긴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아주 잠시였을 뿐이다. 이 장면을 비추던 스포트라이트는 1970년대 정신의학계의 과학이 발달하면서 꺼져 버리고 정신분석은 변방으로 밀려났다. 되돌아보면, 프로이트 정신분석은 정신의학을 절정에 이르게 했던 것이 아니라, 생물정신의학의 진화 과정을 잠시 늦추었던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잠시의 멈춤이 정신의학에 일으킨 파장은 엄청난 것이었는데, 가장 큰 의의는 정신과 의사를 수용소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프로이트 관점에 근거한 성찰심리학은 정신과 의사로 하여금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진료소에서 환자를 보는 전문의사로서의 위상을 확립케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신경과 의사가 가져갔던 정신치료를 되찾아 오게 했던 것이다. 더욱이 정신과 의사들은 이 새 치료법에 독점권을 행사하겠다는 대망을 품게 되었다. 대중은 정신치료와 정신분석이 대동소이한 것으로 간주했다. 최신식 유행하는 성찰치료를 받고 싶은 환자들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다. 왜냐하면 미국 정신분석 협회가 주장하기를, 오직 의사만이 분석 훈련을 받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도록 실력행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런 주장은 매우 기이한 것이었는데, 정신분석가가 되기 위해서 의사로서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논리는 점성술가가 되려면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의사가 프로이트 기법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려 했던 이유는 심리학자, 정신과 사회사업가 그리고 새로운 부의 샘을 발견하고 덤벼드는 경쟁자들을 배제시키기 위한 이기적 발상이었다.

결국 정신분석을 지향하던 정신과 의사들은 더 이상 독점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영문학 교수가 정신과 의사보다 정신분석을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1960년대 이후에는 의사 아닌 온갖 분야의 사람들이 정신분석가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겠다고 했다. 더욱 궁지로 몰리게 된 이유는, 정신분석의 과학적 근거라고 내세웠던 이론들이 붕괴했다는 데에 있다. 정신적 문제가 비정상적인 모유수유에 의해 생긴다는 주장과 뇌의 세로토닌 결핍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은 동시에 진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신질환에 관한 생물학적 근거가 축적되어 감에 따라, 정신의학은 사람들이 정신분석에 열광하는 동안 잃어버렸던 과학으로서의 기반을 되찾기 시작했다. 뇌야말로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부분이었다. 1990년대에 이르자 대부분의 정신과 의사들은 정신분석이 과학적으로는 파산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관한 이론모델과 소위 무의식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정교하게 고안된 분석기법은 시간의 제련을 견뎌 내지 못했다. 정신분석과 관련된 모든 사건은 특정 시대의 인공적 산물로 밝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의학 이외의 분야에서는 정신분석이 계속 번창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신의학 분야에서 정신분석은 거의 사라지고, 마음과 뇌의 문제를 해결하는 의학적 방법으로서는 더 이상 인정되지 않고 있다. 정신분석이 생존하지 못했던 이유는, 과학에 패배했다는 것과 또한 초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열광케 했던 그 욕구가 우리 시대에는 사그라져 가고 있다는 데 있다.(245-247p)

 

 

1990년 브라운 대학 정신과 교수 피터 크레이머는 “미용 정신약물학”이라는 달콤한 신조어를 만들어 내고는 그 단어를 엘리 릴리 사가 개발한 프로작(플루옥세틴)이라는 새로운 항우울제에 적용했다. 크레이머는 환자로 하여금 “안녕한 상태보다 훨씬 더 좋게better than well 느끼도록 해주는 약이라고 주장했지만, 결국은 약물중독을 부추긴 것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그러나 프로작과 그 외 유사한 약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우울감이나 불안감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NCS 조사에 의하면, 지난 12개월 동안 모든 미국인의 10.3%가 적어도 한 번은 주요우울증을 앓았고, 일생주기로 보았을 때 전 미국인의 19%(5명에 1명꼴)가 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의 기분장애를 경험했다고 했다. 또한 전 미국인의 20%가 폐쇄공포증, 광장공포증 등의 공포증을 지난 12개월 동안 경험했다고 하며, 20명 중 1명꼴로 전반적인 불안을 느낀다고 했다. 다시 말해 이런 증상들이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생활을 꾸려갈 수 없는 상태는 이제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마땅히 도움을 받아야 할 상태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인간 정신의 복잡성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옛날 스타일의 정신과 의사들보다는 정신치료 전문 정신과 의사들에게 환자들이 더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진료실에서는 공감 어린 관계를 조성하는 것보다는 현실적으로 증상을 완화시켜 주는 것이 더욱 궁극적인 치료 목적일 것이다. 뇌에 원인이 있는 문제는 뇌의 화학 수용체에 작용하는 약에서 그 치료법을 찾을 수 있었다. 이는 정신의학에는 좋은 소식이었다. 항정신증 약물은 정신분열증에, 삼환계 항우울제는 우울증에, 그리고 항조증 약물은 조증에 각각 특이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과 대조적으로, 새로 나온 멋진 약들은 불안과 우울 등의 온갖 다양한 증상들을 한 가지 약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새로운 약이 야기한 문제점은, 이러한 약물이 20세기 말에 이르러 너무나 유행하게 되자, 환자들이 보기에 의사는 의사-환자 관계를 치료적으로 사용하여 상담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신기한 약을 전달해 주는 사람으로만 간주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미용 정신약물이 소개되면서 의료계는 커다란 소용돌이에 말려 들어가게 된다. 과거에 의사는 종기 따는 사람이나 관장 목적으로 강력한 설사제 처방전을 써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았고 환자들은 때로 성급하게 화를 내기도 했을 것이다. 근대 후기에 와서도 환자들은 의사의 진찰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에 화를 냈을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의사와의 상담은 오직 환자 자신이 이미 선택 해 놓은 약을 처방받기 위한 것이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길은 오직 약 뿐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원과 같은 1차 의료기관에 있는 의사들은 이미 이러한 약물 요구 상황을 경험하고 있다.(512-513p)

 

 

정신과 약의 판매에서 큰 이윤이 나온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된다. 바리움의 인기가 치솟아 오를 때 제약회사들은 미래의 시장이 바로 이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눈을 뜬 것이다. 제약회사마다 경쟁적으로 향정신성 약물 개발에 뛰어들게 되자 이들은 정신과 의사의 진단 감각을 왜곡시키기에 이르렀다. 파고들 만한 틈새시장을 만들어 내기 위해 제약 회사들은 질병 범주를 부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상태를 질병이라고 명명했다 하더라도 별로 주목받지 못하던 질병이, 제약회사가 치료약을 개발해 내놓게 되면 가히 유행성 전염병처럼 곧바로 대중성을 획득하게 된다. 정신약물학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힐리는 “의학 분야에서는 여태까지 흔히 보아 왔듯이, 치료방법이 개발되면 그 질병의 존재를 알아채기 쉬워진다”고 말했다.

공황장애의 예를 들어 보자. 전통적으로 정신의학에서는 공황증상을 불안의 일부 증상으로 보았다. (...) 1980년대 회사는 코넬 대학의 제럴드 클러먼의 지휘하에 이루어진 광범위한 임상시험을 통해 공황장애가 진정 독립적인 질병이며 자낙스가 그 병에 특별히 경이로운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그 결과는 전적으로 확신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초 자낙스는 정신의학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약이 되었으며, 정신과 의사들은 자낙스 처방은 과학에 근거한 것이고, 당시 전국을 휩쓸고 있는 공황장애 유행에 시달리는 환자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정신의학 진단이 점차로 제약회사들에 의해 조작되어 온 상황을 배경으로 해서 1990년대에는 일상용어에도 약이 등장하게 된다. 프로작이 바로 그것이다. 바리움이 등장했을 때, 불안을 치료할 효과적인 약이 존재하게 되자 환자와 의사 모두는 온갖 문제를 불안이라는 용어로 정의하는 데에 기꺼이 동참했다. 우울증을 치료할 프로작이 등장하자 이제는 우울증이 주인공이 되었고 우울증은 모든 종류의 스트레스에 대한 검증표가 되었다. 맨해튼에 있는 베스 이스라엘 의료센터의 한 의사가 말하길, “전화벨이 울리면 매번 누군가가 프로작에 관해 얘기합니다.” “사람들은 그 약을 먹어 보고 싶어 하지요. 의사가 그건 우울증이 아니라고 말하면 그들은 ‘나는 분명히 우울합니다!’ 라고 대꾸한답니다.”(520-522p)

 

 

플루옥세틴은 다른 항우울제보다 월등하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단지 부작용이 적고 편안하다는 것에 더하여 한걸음 더 나아가 유쾌하게까지 만들어 주며, 삼환계 항우울제처럼 변비와 무거움을 느끼게 하기보다는 마치 “100미터 달리기 경주에 막 뛰어나갈 준비가 된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약은 삼환계 항우울제처럼 복용한 지 여러 주가 지나야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복용 초기부터 작용하고 치료적 영역도 더 안전했다. 말하자면 치료 용량과 치사 용량 사이의 용량 차이가 커서 안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혈액검사로 약물농도를 측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 1987년 미국 식약청은 프로작의 사용을 승인했다.

1990년 프로작 출시 3년 후 맥린 병원에 있던 2명의 연구자가 프로작은 우울증에만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고 공황장애에서부터 탈력발작에 이르게 다양한 효과가 있음을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렇게 여러 상태를 개선하는 데 프로작이 효과가 있으므로 이 상태들이 어떤 공통점을 가질 것이라고 추정하고, 그것은 정서와 관련된 일련의 장애(정서 스펙트럼 장애, ASD)에 속할 것이라고 제시했다. 이는 분명 우울증의 범위를 확대하려는 과학적 변명이었고, 우울증은 이제, 그 저자가 말했듯이, “인류에게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질병”중의 하나가 되었다. 저자 중 한 사람인 해리슨 포프가 말한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ASD라는 어귀는 흔히 인용되곤 한다. 프로작의 전망은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했다.

그리고 말 그대로 진행되었다. 1993년 미국 정신과 의사를 찾는 사람의 절반가량이 정서장애였다. 바리움이 불안에 사로잡힌 국가를 달래주었듯이, 새로운 우울증 약은 그 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 온갖 질병을 생산해 낸 것이다.

언론의 묘기가 뒤를 이었다. 프로작은 심지어 아무런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인생의 고민거리를 견디는 데 만병통치약으로 세상에 소개되었던 것이다. 1993년 <타임>은 프로작이 “일시적 유행이 아닐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것은 의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일 중독에 빠진 “수전”은 월경주기 때마다 짜증스러워지고 한번은 남편에게 결혼반지를 내동댕이치기도 했는데, 이런 사람의 고통을 완화 시켜 준다고 했다. 이제 그녀의 모난 성격은 조금 부드러워졌다. 진짜 정신질환이란 극심한 고통과 장애를 일으키므로 괴로워하는 그들을 위로할 방편도 없다고 보았던 역사적 전통적 관점에서 보면 수전과 같은 사람들이 과연 실제 정신질환을 가진 것인지 아닌지 논쟁하는 것은 이제는 쓸모없는 일이 된 것 같다.(526-527p)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말 “정신착란”이 덜 끔직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면, 그 변화에 기여한 것은 많은 부분 정신약물학의 영향이다. 사람들이 정신질환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용인하게 된 것이 아니라, 단지 약물 혁명이 정신질환의 증상을 완화시키거나 혹은 완치시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정신질환자는 팔이 부러지거나 머리에 혹이 생긴 사람과 마찬가지로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고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초창기 약물학 혁명을 이끌었던 피에르 데니커는 이렇게 말했다. “37년이 지난 후에야 광기의 얼굴은 완전히 달라졌는데, 이는 정신약물학은 물론 정신치료, 사회치료 등의 치료 방식과 지역사회에서의 환자 재활 등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데니커가 보기에 “광인 혹은 정신착란”은 “일상적인 환자”로 변화되었다. 약물치료가 “미용” 정신약물학이라고 보든 아니든 간에 이는 결코 작은 성과가 아니다.(530p)

 

 

정신의학이 주장하는 과학적 패러다임은 양날의 칼과 같다. 생물학적 패러다임을 고수한다면, 지금과 같이 엄청난 수의 사람이 원하는 기능개선 정신약물학을 포기하고 중증 정신질환자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반대로, 유행병이라 불릴 정도의 환자 몫을 유지하려 한다면, 정신의학은 대중의 욕구와 가치관에 영합함으로서 더욱 일용품화되고 결국은 탈의료화의 방향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의학이 의학의 전문분야로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을 것인가?(545p)

 

 

 

ㅡ 에드워드 쇼터, <정신의학의 역사> 中,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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